얼마전 최장집 선생이 진보에 대해 일갈하는 말씀을 했다. 노, 김 두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현재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처한 상황을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다만, 나는 최장집 선생이 이야기하는 무책임하고 고민하지 않는 진보, 대안 없는 진보란 말이 한 편으론 억울하기도 하다. 리영희 선생 이후 어느새 최장집 선생의 네임 밸류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높은 반열에 있다. 윤건차 선생은 지식인지도에서 최장집 교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로서 불행한 것 중 하나는 최장집 선생 정도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좌측에 서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현실이다. 불행히도.... 그렇다.

나는 가끔 최장집 선생과 당신이 일군 에꼴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지향이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허당은 한국사회에서 '지역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론 최장집 선생이 내린 결론이나 비판이란 것이 언론에 의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에 비해 실질적으론 내용(contents)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내가 불민한 탓이 크겠지만 당신과 당신의 그룹이 주장하는 바가 지금 이렇게 잘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한 상식도 없는 사회인 탓이지, 당신이 주장하는 바가 새로운 지향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언론에 의해 논의되는 것에 비해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상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에 토를 달 것도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결론은? 그래서 법이라는 상식 안에서 대안을 잘 모색해서 다음 선거에서는 잘 해보자는 말이다.

만약 영국이나 다른 여타 선진국에서라면 이런 이야기가 언론에 대서특필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거 모르겠나? 물론 언론에 보도된 것만으로는 당신이 그날 했다는 이야기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나의 태만을 탓해도 하는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최장집 선생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겠단 말은 아니다. 다만 나 같은 일개 백면서생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정도로는 이 갑갑증을 풀기 어렵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내가 갑갑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질적으로 작금의 위기는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보여준 지난 10년의 실패의 결과물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말하는 진보의 범위가 좀더 좌측으로 이동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현재의 집권세력이 이전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크게 구분되는 것은 잘 해봐야 두 가지 정도의 차이다. 하나는 통일(북한)에 대한 강경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촌스러운 민주주의다. 만약 이와 다른 대안이 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분류된 스펙트럼, '진보적 자유주의'의 범위 밖에 있다.

문제는 그 대안의 한 발은 지역주의 같은 전근대적이나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 고려해야 하고, 다른 한 발은 영미식 자유주의 정치경제제도를 내화한 한국 사회가 아닌 더 먼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진보(자유주의)세력의 협소한 보폭으로 보았을 때, 가랑이 찢어지기 딱 좋은 형국이다. 게다가 MB정부의 밀어붙이기는 최장집 선생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 실질 권력(정치경제는 물론 문화권력)의 장악을 통해 역전 자체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고 대안을 만들어 가는 시늉만이라도 하기 위해선 우선 민주당 안에 중심축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민주당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이회창의 패배 이후 박근혜 대표체제로 강력하게 뭉치면서 여러 가지 쇼맨쉽을 보여주었지만 지금 민주당은 그럴 만한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잘 해야 '자멸'이다. '헤쳐모여' 없이 한나라당과 경쟁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부활은 어려워 보인다. 야당의 장기자랑 시간이 돌아오고 있다. (*어쨌든 최장집 선생의 말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장 불편한 심정이 들었던 부분은 당신 자신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분이란 사실이고, 당신의 대안이 본질적으론 보수주의란 사실이다.)    

그런데 정운찬 선생은 왜 그리 가셨나? 오늘 한겨레 그림판을 보니 MB가 일타 쓰리피를 했다고 나오던데, MB입장에선 어차피 심대평 카드가 안 될 바에는(이것도 이미 지역주의 포석이 아닌가 말이다. 한국에서 지역주의 정치판은 다소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변이다) 정운찬 카드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문제는 MB가 정운찬 선생을 경제전문가로 영입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가 스스로 충남의 아들을 자부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낙점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만약 내가 '민주당'의 논평가였다면 한복 바지에 양복 입었다 정도로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라면 정운찬을 적극 지지해주었을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입장에서 정운찬은 버린 카드가 된 셈이니 재 뿌리는 대신, 정운찬을 두둔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이제이"하는 심정으로 힘을 실어줘보는 것도 관전하는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물론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총리가 무슨 힘이 있겠나, 게다가 MB는 노무현 처럼 실세총리를 기용할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정운찬 선생 입장에서야 학자적 이미지 훼손(이미 지난 번에 식자층에는 훼손될 대로 훼손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 자들이 무슨 힘이 있나)을 빼놓고는 손해 볼 것 하나 없다. MB정부에서 잘 하면 자기 공이고, 못하면 각을 세워 제2의 이회창이 되면 될 터이니 말이다.

다만 정운찬 선생의 정치감각이 과연 그 정도로 탁월할 것인가는 고민 좀 해봐야 한다. 서울대 출신으로 나 잘난 맛에 죽쑨 정치인들의 반열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참고로 일단 앞서간 선배들로 이인제, 이회창이 있다). 만약 MB가 정운찬 총리를 실세 총리로 자신의 국정 운영 동반자로 삼아 정책적 전환을 이룬다면 정당의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을 위해선 단기적으로 좋은 일일 테고, 한승수 총리처럼 얼굴 마담에 그친다면 어차피 더 망가질 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대통령, 총리한 것이니 국민들 입장에서 손해날 것도 없는 일 아니겠나 싶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송곳'이라 했다. 이회창 총리가 자칭타칭 '대쪽'이라 하였으니 송곳은 대쪽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말은 어느 면으로 보자면 그저 이죽거림에 불과한 것이지만 정운찬 총리 내정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중도실용의 서민정치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단순한 쇼가 아니며 - 실제로 그것이 쇼에 불과할지라도 '정운찬'이란 인물 아이콘을 통해 - 실체를 지니게 될 가능성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40%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MB가 라디오 주례연설을 택했을 때, 내가 가장 주의깊게 살핀 것은 이 부분이었다. 그는 토론을 잘 하지 못하는 대통령이고, 토론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는 토론 대신 연설을 즐기고, 연설은 일방적인 대신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남는다. 히틀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말', 그 중에서도 '연설'이야 말로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 했다.  

연설에 대해 논평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봐야 토론과 달리 한 단계 아래 수준으로 격하되는 것이며, 대안도 없이 힐난하는 격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여의도 정치를 비판하고, 관심 없다고 했다고 하여 노무현과 흡사하단 이야기를 하지만 내 보기엔 노무현 보다 어떤 의미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더욱 노련한 정치가다. 정치가 곧 민주적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명박의 정치프레임을 그냥 파시즘, 유사파시즘이라 비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대중을 정치적 그물망 안으로 호명하는 방식(프레임)을 살펴보면 MB정부가 대중을 호명하는 방식에 있어 상당히 노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B정부의 이미지정치는 쇼의 수준은 대단히 낮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만 그것이 곧바로 대중적인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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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4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4 16:16   좋아요 0 | URL
MB가 충청권에 이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는?

만약 이념적 대립 없이 혹은 이념적 대립이 있더라도 현실적으로 충청과 호남의 지역연합 없이는 민주당이 두 번 다시 재집권할 수 없는(이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끼리 서로 나눠먹기 할 필요도 없는...)상황이 되어가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호남은 아예 버린 패로 취급하더라도(이런 표현은 사실 어차피 뭘해도 지지해주지 않을 진보적 정치세력을 버린 패로 취급한다는 이전의 정치분석에도 나왔던 것인데, 저는 이것을 다시 지역으로 바꿔본 겁니다.), 영남과 나머지 지역, 그 중에서 특히 충청권은 한 차례 배신한 경험이 있으므로 최소한 다시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권력 분배에 신경 쓰겠다는 것이지요.

마키아벨리적으로 말하자면 대화든, 정치든 결국 '뻔뻔한 자'가 이기는 법인데, MB정부와 한나라당의 정치를 살펴보면 속은 뻔하지만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프레임으로 계속해서 끌고 간다는 겁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민주주의의 중요한 한 축인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도 계속해서 숫자로 밀어부치는 대의민주주의는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방식 같은 것이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법, 시장을 방문해 영세상인의 어깨를 쳐주지만 결국 그들을 위한 정책은 취하지 않는 방식이 먹히는 이유는 결국 주류 언론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죠. 한겨레, 경향, 몇몇 인터넷 매체만으로는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미네르바나 이후 벌어진 잇따른 검열이나 저작권 법안 등으로 한 편으론 인터넷을 통제하고, 다른 한 편으론 인터넷의 여론의 향배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요.

과거엔 친정부적인 글들이 올라오면 '한나라알바'라 하며 무시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젊은 네티즌들 스스로의 오폭 사례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거든요. 예전엔 이들을 '한나라 알바'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제가 보았을 때는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건데 이들의 분노 자체는 매우 정직한(알바로 보기 어려운) 것들이 상당히 많아 보이거든요.

다만 이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누가, 어떻게 초래했는가를 분석함에 있어서 잃어버린 10년 내지는 세대담론에 매몰되는 측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른바 '좌빨'들이 정책을 잘못 하고, 자신들 스스로 기득권 세력화하는 바람에(문제는 이걸 전면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인지라) 자신들이 현재 곤경에 처했다는 저들의 선전이 먹히고 있는 상황이란 거죠.

qualia 2009-09-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찬의 본질은 그가 “회색인/회색분자”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정운찬의 치명적 한계입니다.
역사에서 “회색인/회색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과 “불의”와 절대 타협을 몰랐던 노무현은 분명 한국 역사의 “기적”입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었다는 사실은 불가사의 그 자체입니다.

한국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노예의 역사”입니다.
그 노예가 노예임을, 종놈이 종놈임을 스스로 깨달을(자각할) 때,
비로소 노예의 역사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최초로 그런 철저한/뼈아픈 “노예적 자각”으로
불의한 역사에 맞서나갔던 유일한 정치가가
바로 노무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09-04 16:17)

바람구두 2009-09-04 16:48   좋아요 0 | URL
^^;;;

딸기 2009-09-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너무 잘 읽었어. :)

바람구두 2009-09-04 18:29   좋아요 0 | URL
그대가 잘 읽었다니 왠지 흐뭇해지는 걸... ^^

노이에자이트 2009-09-0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을 정도의 보폭을 지닌 세력으로 바람구두 님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정당이나 기타 결사체가 있는지요? 만약 현재 없다면 어떻게 그런 보폭을 넓히도록 해야 할까요?

바람구두 2009-09-04 18:30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제 글에 이미 썼다고 생각하는데 안 보이시나 봅니다.
^^;;;

비연 2009-09-04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례로 조순과 이수성도 있죠..정말 개탄할만한 현실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4 19:09   좋아요 0 | URL
조순과 이수성을 동일한 반열에 올리기는 좀 어렵지요(조순의 경우엔 대선 후보로 나섰던 과정 자체가 당신의 명성에 흠이 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그 자신은 확실한 입장이 있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한 편으론 정운찬의 출사표 "한국 사회의 현실은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기엔 너무 급박한다"는 표현도 이해는 됩니다. MB정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라도 가서 한 역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당을 선택해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요.

노이에님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 조금 불성실하다 생각하여 여기에 마저 글을 담자면 현재의 민주당으로서는 어렵고, 친노를 포괄한 신당의 출현(저는 이것을 야당의 '장기자랑'이라고 표현했는데, 다시 물어보시니...^^;;;)이 현실적인 대응 전략일 수 있겠지요. 문제는 이와 같은 신당출현만으로는 더이상 희망을 품기 어려울 만큼 한국 사회의 정치적 권리 주체들이 다양한 형태로 훼손당한 현실에 있다고 봅니다.

과거 DJ와 YS의 경우엔 비교적 확실한 지역근거를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세력을 부분적으로 흡수통합하면서 새로운 정치활력을 빚어냈습니다. 일종의 T자형 구조인데 중심은 지역에 기반하면서도 좌우로 새로운 정치세력과 연대하면서 보폭을 넓히는 형태였던 것이지요. 가장 극적인 형태가 DJ의 호남, 충청 연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대중동원 정치력에 대해 감탄(감동)하는데 저역시 이 부분은 노무현 개인의 정치적 카리스마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 노무현은 이들 대중의 정치적 동원력을 소모했을 뿐 이를 정치적으로 재생산하는데는 무능력하거나 심지어 두려워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개혁국민정당이 그 좋은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정치실험은 그 당대에서 종료되었을 뿐 맥을 잇지 못했고, 이후 민주당은 과거의 정치실험에서 얻은 성과들을 체제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 DJ식 정당구조에 머물고 있습니다. 거리로 나갔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결국 국회로 돌아온 꼴이 되었으니까요. 민주당이 배출한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민주세력 내부에 커다란 권력(상징) 공백을 남겼습니다.

거기에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반(100일)에 닥친 촛불시위는 민주당으로 하여금 정치적 반성 이전에 정치투쟁에 먼저 나서도록 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촛불시위는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 입장에서 더 큰 불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천막당사에서 뼈를 깍는 '쇼' 한 번 제대로 해보기 전에 부랴부랴 전선으로 달려와야 했으니까요. 이런 일련의 사태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더욱 집결하게 만들었고, 민주당은 달라지 않았으므로 한나라당에 실망한 이들이 지지할 정당이 없게 된 것입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생존했다면 어떤 형태로든 현재의 정치 문제에 대해 일정하게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그런 까닭에 MB정권의 탄압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때 민주당과 친노신당이 결합하여 새롭게 추진하는 정책대안이란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읽고 있었다던 '유로피안 드림'의 형태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국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와 미실의 대화, "국민들에게 판타지를 줄 것이냐, 희망을 줄 것이냐"의 대결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MB정권과 한나라당과의 대결에서 지역이 아닌 선명한 정책과 이념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면 차기 대권은 물론 차차기 대권 경쟁에서도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음, 현단계에서 그나마 제가 집권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정치세력입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진보적 이념정당이 집권가능성을 열어보려면 일단 지역주의가 아닌 이념과 정책으로 대결하는 선거의 조건이 먼저 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나라당의 해체 내지는 민주당의 소멸 가능성 같은 것 말이죠. 다른 한 편으론 진보신당의 보수화 이후 소멸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네요.)이 정권을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겁니다.(솔직히 저는 경제정책이란 측면에서 MB정부와 노무현 정부 사이에 크도록 큰 차이가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말을 바꿔 정확히 하자면 노무현 정부는 복지(분배)분야를 좀더 강화하고 싶었지만 보수세력과 힘의 대결에서 결국 우향우한 발걸음을 크게 돌리지는 못했다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그의 서거 이후 그의 임기초 정책들을 평가하며 나온 이야기들에 불과합니다.)

그 같은 근거는 무엇보다 미디어 법안과 교과서 개악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입니다.
 

예전에 죽을동살동 열심히 페이퍼 올리고 리뷰를 써대던 시절이 있었다. 바쁘니 노니 해도 그 무렵은 지금보다 시간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원고료라는 부수입이 없던 시절이었다(나는 서른 다섯 이전까지는 외부 원고를 전혀 쓰지 않았다). 사람이 간사하다는 것이 외부 청탁을 받아 200자 원고지 한 장에 단돈 몇 푼이라도 돈을 받게 되자 돈 받지 않고 쓰는 글조차 가끔씩 은연중에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냐 싶게 원고료를 계산해 보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영세자영업자라 할 수 있는 프리에이전트, 프리랜서, 자기경영의 마인드는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것들에서 사람을 감염시킨다.  

출세든, 명예든 지금껏 내가 역사공부하고, 사람공부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뛰어든 사람은 졸부(투기 같은 방식으로 적당한 부를 누리는 사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짜 부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나도 안다. 대충 그 정도 누리고 살면 되지, 그 이상 바라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는 사실쯤은... (어쨌든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도 자기경영 마인드보다는 자기 즐거운 모드에 충실하는 것이 낫다는 훈계쯤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굳이 이야기한다는 것이 바로 노파심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하고, 차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태우고 나면 자리에 앉아 컴퓨터 켜고, 이메일 확인하고, 의무적으로나마 내 홈페이지 들어가서 새로운 글 없나 살펴본 뒤에(사실 요즘은 들여다 볼 필요가 거의 없다. 댓글이나 새로운 글이 거의 올라오지 않으므로... 나는 힘들게는 살 수 있어도 심심하게는 절대 못 산다.) 알라딘 서재에 온다. 밤새 안녕한지 살펴보기 위함인데, 댓글이 올라와 있으면 흐뭇하고, 밤사이 추천 수가 더 올랐으면 더 흐뭇해진다. 그런 뒤에 찾아가는 곳은 알라딘 메인의 나의 계정에 있는 적립금이다. 알라딘에서 '땡스투'를 운영하고부터 심심찮게 나에게도 적립금이란 것이 쌓인다. 내가 알기로 알라딘에서 적립금 장사 제일 잘 하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참고서 장사고, 다른 하나는 로쟈님처럼 꾸준히 자신이 쓰거나 다른 곳에서 스크랩해온 페이퍼(나는 스크랩 역시 일종의 개인도서관 기능을 하는 블로그의 매우 중요한 콘텐츠 중 하나라 생각하므로 이것을 폄훼할 마음은 전혀 없다)에 관련 서적들을 링크해서 올리는 경우다. 나는 전자나 후자나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런 점에선 애초에 이 시스템에 발을 들여놓은 나 역시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땡스투'란 것이 일종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스템이고, 그것이 굳이 큰돈이 아닌 푼돈이란 점에서 약간의 성취동기는 될지 언정 서재를 운영하는 주된 목적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크게 흠을 잡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예전엔 '서재활동지수' 평가에서 매주 몇 등 안에 들면 얼마간의 적립금이 계정에 축적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가 겹치기도 한다. 사실 그와 같은 방식이나 "이주의 리뷰" 같이 다소간의 정치적 선택(마케팅)으로 선정되는 적립금 축적에 비해 '땡스투'는 비록 금액의 규모면에선 매우 적은 액수이지만 이전의 '서재활동지수'나 '이주의 마이리뷰' 같은 몇몇 열심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거나 가물에 콩나듯 한 번씩 간택되는 적립금에 비하면 '땡스투'는 상대적으로 기회 균등이란 점에서 평등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매일 아침마다 '땡스투' 적립금을 확인하고, 홀로 흐뭇해 하고, 책을 구입하려는 데 '땡스투'할 만한 페이퍼나 리뷰가 없을 때 서운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참, 알량한 자존심이지만 그렇게 몇 푼의 '땡스투 적립금'에 나는 이렇게 아둥바둥하고 있는 걸까. 감히, 김수영이 고깃국에 고기 몇 점 덜 들어갔다고 투덜대는 것에 비유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난 왜 이렇게 작은 일에 분개하고 흐뭇해 하고 있는 것인지 ... 아마도 펀드에 주식에 몇 푼의 종잣돈을 투자해놓고 경영자보다 더 경영자 편에 아둥바둥 서게 되는 사람들, 아파트 한 채 간신히 갖고 있고, 그거 팔아서 시세차익은 커녕 어디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엄두도 못 내는 처지에 부동산 대책이니 안정이니 하는 말에 가슴부터 먼저 철렁 내려앉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 마음에 얹어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적당히 많이, 그리고 모자라게 가진 사람들이 가장 피곤하게 사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나는 200원을 주운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좀더 많이 줍는 요행을 바란다. 이런 나를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말이다. 흐흐, 이건 또 무슨 자기합리화란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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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2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2 10:16   좋아요 0 | URL
어, 메피스토님 같은 유명한 블로그 스타님이 어인 일로 제 하찮은 블로그에 왕림을 다 해주셨나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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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만만치 않은 듯 해요.
걔중엔 정말 신기한 재주꾼들도 많고요.
세상 모든 일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는 법이겠지요.

Mephistopheles 2009-09-02 10:52   좋아요 0 | URL
쳇..비밀 댓글을 써봤자 소용이 없다니까.

바람구두 2009-09-02 10:56   좋아요 0 | URL
푸핫, 비밀글인지 미처 몰랐어요.
으, 죄송혀요. ^^;;;

Arch 2009-09-0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괜히 땡스투를 노린다고 책 링크 해놓고 그런적도 있어요.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바람구두님 팁을 드리자면- 저는 거의 이 경우 땡스투를 받아서- 그 즈음 할인하는 도서나 신간을 링크하는 경우 땡스투를 많이 눌러주던데요. 벌써 알고 계신데 뒷북 같지만. 문제는 제가 알라딘을 잘 들여다보지 않아 그야말로 우연히 들어맞지만요.

저도 추천이랑 댓글이 참 좋아요. 일의 맥은 진작 끊겨서 원, 바람구두님 시간이 되면 페이퍼 양산 경쟁 이런거 하고 그럼 좋겠단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어요.

바람구두 2009-09-02 10:57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팁을 알아야 할 만큼 제가 목을 매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요.
그리고 제가 페이퍼 양산경쟁에 뛰어들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요.
아하하....(이거 뭐니?)

Arch 2009-09-02 11:3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뭐에요. 바보가 되어버린 아치.

바람구두 2009-09-02 12: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바보잖아요.
(아, 아치님 놀려먹으니 재밌다)

Arch 2009-09-02 13:01   좋아요 0 | URL
으으으~ 으으으~ 부들부들


(화난척 했으니까 바람구두님이 그만 놀리겠지?) 치~

바람구두 2009-09-02 13:42   좋아요 0 | URL
히히...

다락방 2009-09-0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요 바람구두님.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자고

맘에드는 리뷰나 페이퍼가 없을때 서운해하면서 땡스투를 누르지 않아요. 100원이 더 생긴다고 하지만, 맘에 들지도 않는 글에 100원을 줘가면서 받고 싶지는 않아, 나도 안 받겠어, 하는 거죠. 아, 이건 무슨 자존심인가요? ㅎㅎ

Arch 2009-09-02 10:46   좋아요 0 | URL
아, 멋지다! 전 다급 땡쓰투족인 것 같아요.

바람구두 2009-09-02 10: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저는 그럴 경우 추천만 안 누르는데요. 흐흐

무해한모리군 2009-09-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음에 드는 리뷰나 페이퍼가 없을 경우 추천만 안 누르는데요. 흐흐 (2)
아~~~~ 왜 난 사소한 것에 목을 매는가 ㅎㅎㅎ

바람구두 2009-09-02 12:26   좋아요 0 | URL
흐흐, 그러게요.

마늘빵 2009-09-02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침마다 확인하긴 하는데, 하나도 없는 날은 - 그런 날이 더 많았는데 요새는 수시로 주문을 해서 구입용 땡스투가 많다죠 - 좀 서운하기도. 그게 또 리뷰를 지속적으로 써줘야, 것도 신간 위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거 받자고 리뷰 쓰진 않고, 길에서 줍는 정도의 금액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죠. ^^

바람구두 2009-09-02 12:27   좋아요 0 | URL
음, 그런 건 확실히 있어요.
굳이 땡스투를 눌러줘야 한다면 나는 아프님의 땡스투를 꾸욱 눌러드린다는 거... ^^
그게 아니면 잘 쓴 글에...
그도 아니면 긴 글에...

2009-09-02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2 14: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남에게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냥 그런 마음가짐으로 글 쓰려고 할 뿐입니다.

로쟈 2009-09-0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상품넣기를 하지 않고 상품 이미지만 복사해다 붙이면 땡스투에 뜨지 않습니다. 스크랩해온 글에 상품넣기를 하면 저작권 위반이라고 해요.(제 기억엔 2007년까지만 허용이 됐습니다). 해서 스크랩으론 적립금 장사를 못한다는 걸 오해가 있으실까 해서 알려드립니다. 물론 추기로 몇 마디 주절거리면서 링크를 걸어놓는 경우는 있지만요...

바람구두 2009-09-02 17:48   좋아요 0 | URL
쓸데없이 로쟈님을 들먹여서 불쾌하게 만든 건 아닌지 저으기 염려가 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그랬다면 사과드립니다. ^^;;; 에고고...

로쟈 2009-09-02 18:3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래도 하루 수입이 1000원이 넘을 때도 있습니다.^^; 혹시나 적립금 장사의 노하우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어서 댓글을 달았을 뿐이예요. 요령은 많이 쓰고 링크도 많이 걸어두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몇년 하면, 하루 천원이 보장될지도 모르니까요.^^;

바람구두 2009-09-02 19:16   좋아요 0 | URL
흐흐, 괜히 쫄았네...^^
 

일년에 한두 차례 역사기행을 간다. 스물 네번의 역사기행동안 실제로 내가 간 횟수는 아마도 14회 남짓. 예전엔 여름방학 기간 중에 갔으므로 잡지 마감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고 남아야 했던 적이 두어 차례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12번 정도 역사기행을 간 것일 텐데, 본격적인 역사기행 이전에 답사를 한 차례 다녀오기 때문에 거기에 곱하기 2를 하면 내가 떠난 역사기행의 횟수가 대략 맞아 떨어진다.   

호남권, 영남권, 영동권, 중부권, 강원권 등등... 역사기행을 한 10년 다녀보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한반도가 참 아름답고 볼만한 곳이 많구나란 생각과 더불어 한반도가 참 좁구나 그런데 그나마도 반토막이 났으니 가보려 해도 이제 더이상 신선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쉽게 말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역사기행을 갈 만한 곳은 대략 사찰, 사당, 서원, 폐사지, 유배지, 무덤, 기념관, 박물관 정도다. 그러다보니 전국의 심심산중에 서 있는 작은 암자로 이름난 곳이 아닌 웬만한 명승고찰로 알려진 곳 중에선 안 가본 곳이 거의 없고, 서원도 동네 어귀 작은 곳까지 다녀보았다. 물론 이런 곳을 사람들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가더라도 일반적인 대중을 끌고 그런 곳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남권이 조선왕조 500년간 사림(지배계급)의 본거지였기에 같은 남부 지방이라도 영남권에는 유배지가 그리 많지 않은데 비해 호남권의 역사 유적지 중 상당수는 유배지다. 당장 이번 역사기행 장소 중 세 군데가 유배지였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의 다산초당,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였던 보길도, 그리고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 유배 길에 잠시 표류하여 들렀던 보길도의 글씐바위 터가 그렇다. 해남의 대흥사 역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길에 들렀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다. 다산초당에 올려진 기와를 보며 실망한 사람들도 많지만 어차피 제대로 고증한다면 그야말로 볼 것 없을 테고, 상상하며 마음으로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초당이라도 중국의 두보가 살았다는 초당은 풀로 엮은 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보가 정말 그런 초당에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보길도 세연정에 가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산 윤선도를 욕한다. 1980년대를 거치며 형성된 민중사관 탓인지 아니면 이런 곳에 나오면 저절로 그런 심사가 드는 건지 몰라도, 현대정치엔 보수꼴통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 너나할 것 없이 윤선도가 보길도 마을 주민들 잡아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라고 족쳤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겠지만 요즘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보길도의 세연정의 화려함보다는 담양 소쇄원의 담박한 풍경을 좀더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다. 세연정의 화려함은 경치가 주는 화려함과 더불어 약간의 인공미가 더해진 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 원림이 주는 인공미를 상상할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세연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가설 무대 하나씩(동대와 서대)을 설치하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물길에 보 하나를 더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무척이나 화려하고 호사스럽게 보이는 것이 도리어 신기할 정도다.     

어쨌거나 인천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해 첫 번째 행선지인인 강진 무위사에 당도한 것이 거의 1시쯤 되었고, 그 다음 행선지가 청자박물관, 다산기념관과 다산초당을 둘러 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쳤다. 재미있었던 것은 버스 네 대로 움직이는 역사기행단의 피곤함을 하늘도 알았던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가 그치고, 다시 버스에 오르면 다시 비가 쏟아지는 일이 첫날 내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첫날 완도의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푸니 10시가 다 되어 갔다. 둘째 날도 버스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사실 완도는 강진에서 보길도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쯤 되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머물진 않았고, 청해진 유적지와 장보고 기념관, 드라마 해신 촬영세트장 정도만 돌아보고 곧바로 보길도로 떠났다.  

보길도에서 다시 해남 땅끝전망대를 보고 나니 그날 하루 일정도 끝이었다. 대흥사 앞 숙소에 여장을 푸니 밤 9시 함께 간 동료들이 술 한 잔만 하자고 하도 졸라대서 하는 수 없이 맥주를 한 여서일곱 캔 정도 마셨다. 간만에 음주였지만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술 취하는지도 모르고 새벽 2시까지 마시고 죽은 듯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사람들 인솔하고 대흥사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왕복 40분여가 걸리는 대흥사를 다녀왔더니 술이 다 깼다. 대흥사 다녀온 뒤 두륜산 케이블카 타고 전망대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직접 산행을 하여 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건 불가능하고, 마침 이틀 전에 비가 내린 뒤라 조망이 좋은 편이었다. 두륜산에서 다시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당으로 향했고, 녹우당에서 왕인박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서둘러 인천행.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는 재단에서 하는 일 중에서 역사기행 사전답사를 가장 좋아하고, 역사기행을 제일 싫어한다.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을 밥 굶는 사람 하나 없이 고르게 먹이고, 잠자리 투정하는 사람 없이 잘 재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길 잃거나 다치는 사람 없이 잘 보살피려면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다보면 공연히 작은 실수 하나, 타박 하나에도 속이 상하고, 인간이 미워지고 싫어진다. 절간 앞의 멍멍이는 사람들 손을 많이 타면 탈수록 순해지는데 사람은 사람 손을 많이 타면 탈수록 더 예민해지고 상처받는다. 역사기행을 다녀오고 나면 내가 예민한 탓이겠지만 한동안은 사람들이랑 말 섞는 일조차 피곤하게 느껴진다.  

인천 사무실에 도착해 2박 3일간 역사기행을 잘 따라와준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다시 한밤중이었다. 일요일엔 죽은 듯이 자고, 월요일 아침엔 20분 지각... 오전 10시부터 다시 다가오는 음악회 행사 준비로 서울 마포에 있는 디자인실 사무실로 출동했다가 좀 전에 들어왔다. 2박 3일간 신문도, TV뉴스도 없이 살았더니 그 사이 세상이 어찌 돌아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곳 알라딘도 조용했는지, 잘 지냈는지 알 수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잘 지내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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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9-08-3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내고 있었답니다 ..저만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보길도까지 2박 3일이었으니, 정말 빡빡한 일정이셨네요.
저도 조교로 답사간 적 있었는데, 어휴 애들한테 술 적당히 마시라고 신신당부하고, 선생님과 애들 사이에서 눈치보며 쫓아다니다 보니 2박3일 갔다오면 파김치가 되곤 했지요.
수고많으셨네요. 근데 사진은 더 없나요? ㅎㅎ

바람구두 2009-08-31 21:04   좋아요 0 | URL
사진이야 더 있지요.
답사로 한 번, 역사기행으로 한 번씩
한 장소를 한 달 사이를 두고 두 번이나 가잖아요. ^^
좀 올려볼까요?

마노아 2009-08-3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끄트머리 안부 인사에서 짠해요. 빡센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신 것을 축하해요. 푹 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힘들겠지요. 마음에라도 여유가 가득 찼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사진 저도 원츄에요!!!

바람구두 2009-08-31 21:05   좋아요 0 | URL
너무 피곤해서 끝나자마자 들어왔어요.
아, 선덕여왕 봐야 하는데...ㅠ.ㅠ

2009-08-31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1 10:0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
원고의 질은 문제가 안 되죠.
.
.
.
.
일단 분량이 다르잖아욧!!!

2009-08-31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1 10:06   좋아요 0 | URL
예....계속 피곤하네요. ^^
어제도 제법 일찍 잤는데...
선덕여왕 다보고...^^
 



제24회 역사기행...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피곤하지만 잘 다녀왔습니다. 

사진 : 해남 두륜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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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9-08-3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전망대는 못 가보고 더운날 땀 뻘뻘 흘리며
대흥사만 다녀왔어요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이렇게나 멋진것을...!

바람구두 2009-08-31 16:52   좋아요 0 | URL
1박2일에도 나왔었지요.
이곳의 설경을 배경 삼아...
경치란 측면에선 이번 기행의 하일라이트 중 하나였답니다. ^^

마노아 2009-08-3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바람구두님, 황해문화는 홈페이지가 없나요???

바람구두 2009-08-31 21:03   좋아요 0 | URL
홈페이지는 재단홈페이지 안에 기생하는 형태로 있어요.
하부 디렉토리 형태로...
http://wwww.saeul.org

울보 2009-08-31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져요,,

바람구두 2009-09-01 10:0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비연 2009-09-0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기행 다녀오셨군요^^ 저도 함 꼭 가보고 싶은데...

바람구두 2009-09-01 10:07   좋아요 0 | URL
다녀오셨잖아요. 시애틀~
 



강진 - 무위사, 고려청자박물관, 다산초당, 정약용 유물전시관 
완도 - 청해진유적지(해신촬영지), 장보고유적지 
보길도 - 세연정, 예송리해수욕장, 송시열글씐바위 
해남 - 땅끝전망대, 고산윤선도유적지(녹우당), 대흥사, 두륜산 케이블카 
영암 - 왕인박사유적지, 도갑사 등지를 둘러보고 올 예정입니다. 

이미 지난 달에 사전 답사차 다녀왔고, 제가 인솔팀장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라
마음 편하긴 어렵지만 '콧바람' 한 번 쐬러 나가는 것만도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  
다녀오고 난 뒤 밀어둔 일감들 처리하려면 며칠 동안 고생 좀 하겠지만 조심해서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온 뒤 간단한 여행기라도 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을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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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8-2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결혼 후 첫 휴가때 옆지기랑 돌아다녔던 곳이에요...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즐거운 시간 되시길...

조선인 2009-08-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때 간 여정이네요.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져요.

바람돌이 2009-08-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길도 세연정이네요. 제가 갔을 때는 저런 포스가 안 보이던데요. ㅠ.ㅠ
어쨋든 좋으시겠어요. 이쪽 동네는 갈때마다 좋더라구요. 아 다시 가고 싶어요. ^^

2009-08-26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9-08-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억, 그림 같은 사진이에요. 이번 추천은 순전히 사진의 포스 덕분입니다! 구두님 잘 다녀오셔요~

paviana 2009-08-2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길도 좋다는 말은 대학때부터 들었는데 너무 멀어서 아직까지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오세요.
제 경험으로는 남도 2박3일 갔다오면 2kg씩은 체중이 늘어나더라고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