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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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 근 20년만에 갑자기 인터넷 서점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 10월, 이 책의 저자, 레싱이 노벨문학상을 탔기 때문이다. 올해 88세의 영국여성인 레싱은 노벨상 수상의 변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들(노벨 평가위원회)은 언젠가 그 여자(레싱 자신)에게 상을 줘야 할텐데 하면서 걱정했을 거예요. 난 이미 유럽에서 많은 상을 받았어요.'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친 페미니즘의 기수이기도 한 그녀의 대단한 자신감이다.

난 운이 좋게도, 왜 운이 좋은 건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노벨상을 타기 일이주 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알라딘의 편집자추천을 극진히 신뢰하는 나의 취향과 이 책의 가격이 딱 맞아 떨어진 우연한 행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책은 가족소설, 공포소설, 사회소설 등 어느 것으로 분류하기 애매하지만, 재미있다.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고, 다 읽고 나면 뭔가를 더 갈구하게 된다. 난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찾았다. 왠지 영화로 만들어져 있을 것만 같았고, 영상 속에서 다섯째 아이, 벤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이 책이 영화화되면 좋겠다는 나의 동지들을 여럿 목격할 수 있었다.

난 이 책의 심오한 의미나 사회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공포소설로 분류하고 싶다. 이 책에는 귀신이나 유령도, 피 튀기는 칼부림도 없다. 괴물도 없고, 총격전도 없다. 그런데 무섭다. 온몸에 쏴하고 소름이 돋도록 섬뜩하다. 이것은 정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포였다. (정말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공포를 영상으로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될지 의심되지만...)

1차적이고 표면적인 공포의 대상은 단연 다섯째 아이, 벤이다. 기형의 몸에, 감정없는 눈과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불행의 씨앗. 하지만 학교의 선생님들의 눈에는 다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 정도로 보일만큼 정상이다. 이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벤에게서 우리는 연민과 공포를 함께 느낀다. 마치 각설탕과 쓰디쓴 알약을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진짜 공포는 그의 옆에 있는 정상인 가족들이다. 어렵게 만들어온 대가족의 행복 전체를 위협하고 파괴했던 그 악마를 그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였을지도 모르는 지옥에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모성애가 무섭다. 성한 나머지 네 손가락(정상의 네 아이들)을 위해 기형의 새끼 손가락(다섯째 아이)을 과감히 깨물어 잘라내어 버리는 아버지의 냉정함이 무섭다. 잘려진 손가락을 어딘가 묻어버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지독한 환경변화에 적응하고, 대피하는 네 아이들의 결코 어리지 않은 생각들이 섬뜩하다.

레싱은 우리가 따뜻한 사랑의 울타리로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허울을 새로운 느낌의 공포로 대체했다. 어쩌면 기형아 낙태가 만연하는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공포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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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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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위차장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기업의 기획실에 있다. 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업의 전사 기획팀에 있다. 위차장은 34세 나이에 최연소 차장 승진을 했다. 나는 국내 내노라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33세에, 내가 아는 한, 회사에서 최연소 차장 승진을 했다.

위차장의 아내와 딸아이는 그의 성격 때문에 처가집으로 떠났다. 나의 아내는 힘들다며 딸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2개월간 떠나 있었다. 위차장의 아내와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말들을 한다. '냉혈동물, 가시 돕힌 철갑, 뒤틀린 사람'. 나는 가끔 아내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냉혈한, 가시가 뾰족뽀족 난 사람, 속이 꼬인 사람'.

이 이야기는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인가? 순간 나는 저자가 나를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 똑같을 수 있을까. 이런 류의 사람들이 세상에도 많은걸까. 이 책은 명실상부 베스트셀러니 말이다.

물론 나는 아스퍼거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 것 같다. 이 책에 언급된 아스퍼거 신드롬은 지적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뇌의 유전적 결함에 의해 상대의 감정이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데, 위차장도 그렇고 나도 그런 병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러기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고, 이 책이 '배려'라는 키워드를 통해 제시하는 테라피가 더욱 궁금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난 잘하고 있는데 구지 개선이라는 것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위차장이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어려움에 빠진 조직(1팀), 신선 같은 조언자(인도자 감사님), 악날한 내외부의 적들(철면, 사스퍼거), 그 속에서 개과천선하는 우리의 주인공, 위. 사실 최근 소설형식의 자기 개발서들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진짜 소설에 비해 묘사나 설명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개연성도 약하고, 가끔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되는 부분도 보인다.

따라서 주제를 전개하는 측면에서는 이렇다할 매력을 찾지 못했고, 문제는 주제의 참신성이었다. 배려라는 제목만 보면 왠만한 사람이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떠오를 것이다. 이 책도 상당수의 지면을 이 주제에 할애하고 있다. 만약 내용이 여기서 그쳤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저자는 배려를 자신과 세상을 위한 배려로 더 확장했다. 이것은 배려라는 단어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 자신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이기적이다는 말과는 다르다. 자신을 자기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식하거나 허영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에게 솔직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보이는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답이 떠오르는 문제는 아니다. 책에서도 이런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우리, 특히 위차장 같은 나잘란 인물은 항상 남보다 나아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공격하고 비판하고 울타리를 치고 뻣뻣해진다. 이것을 위해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다보니 항상 힘들다. 이 가면을 벗어던지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을진도 모른다.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에 대한 사랑은 어깨에 힘을 빼고, 미소를 띠고, 경청하고, 포용하고, 낮아지는 것이다.

세상을 위한 배려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의 영업 1팀의 성공의 비결이기도 한데, 통찰력을 발휘해 고객이 진정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어디서 읽은 '돈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대중의 가려운 곳은 어디인가? 그걸 찾고 창조하는 것이다.

하루 밤만에 다 읽고 나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와 똑같은 설정의 위차장의 변화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나. 솔직히 결말부분에 있던 '사람은 능력이 아니라 배려로 살아간다'는 명제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배려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치하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현대판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걱정하는 것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주장과도 큰 차이가 없다.

나와 굉장히 비슷한 주인공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나의 사고가 이미 굳을대로 굳어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근거나 설명도 없이 그냥 옌날 이야기 한 편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책을 덮은 후 새벽에 얻은 내 답은 아직 뭐라 말하기엔 좀 이르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배려가 너무 부족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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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라딘 서점, '이주의 마이리뷰'에 당선! ^^
    from We Are The STAR 2007-11-24 12:19 
    배려라는 책 서평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이주의 마이리뷰에 당선되었다. ㅎㅎ (여기 클릭하면 발표 화면으로 넘어갑니다) 배려 - 한상복 지음/위즈덤하우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종진 옮김, 이상권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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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그녀를 또는 그를 사랑하는가? 이쁘니까? 잘 생겼으니까? 착하니까? 나랑 잘 맞으니까? 첫눈에 반했으니까? 이 책의 저자는 소설 아닌 소설로 그 해답을 찾는다.

이 책의 시작은 여느 로맨스 소설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후에 남자의 중얼거림이 시작된다. 어떻게 끌리게 되었는지, 무엇으로 인해 사랑이 깊어가는지, 어떻게 잠자리까지 도달하고, 왜 싸우고, 왜 다시 화해하게 되며, 종국에 헤어짐의 고통에 도달하게 되는지… 남자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빌어 각 사랑의 단계를 분석하고 판단한다.

분석하고 해명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심리학책처럼 딱딱하지 않다. 욕망에 불타는 10대의 일기처럼 유치하지도 않다. 다소 현학적인 태도가 걸리긴 하지만,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는다. 마치 나의 지난 사랑의 일기를 보듯 친근하다. 나아가 사랑에 대한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는 법이 없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단락은 책넘김을 쉽게 한다. 마치 촉촉한 뻥튀기를 먹는 느낌이랄까.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새롭고 독특한 시도이고, 나에게 있어 그의 그런 시도는 성공한 것 같다.

저자가 어린 나이에 쓴 글치고, 나름의 깊은 철학적 고찰이 엿보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래서 유치하지 않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너무 사랑해서다.' 또는 '그것이 하늘이 정한 우리의 운명이다.'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삼류소설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엔 플라톤, 칸트, 니체 등 고등학교 윤리책에서나 접했을 이름들이 잔뜩 등장한다. 저자는 그들의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의 결과들을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다소 유치한 주제에 딱 맞게 맞추었다. 불쏘시게를 가져다 골프를 치려면 폼이 안나지만, 골프채를 가져다 볼쏘시게로 쓰면 폼 나듯이 말이다.

이 책의 여러 가지 장점들 중에서도 맘에 드는 것은 번역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로알드 달의 '맛'이나 '눈 먼 자들의 도시' 등 번역의 티가 안나는 맛갈스런 번역으로 유명하다. 나쁜 번역은 상상과 사고를 방해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것이 없이 깔끔하다.

과연 남자는 사랑과 이별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그 답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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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로버트 먼치 글, 안토니 루이스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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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에 어색하다. 특히 한국의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랑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이것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청소년기에는 기존 질서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고 또래집단에 강하게 의존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건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어느정도 정설인 것 같다.

이런 청소년기 자녀들의 태도에 대한 대응이 동서양이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서양의 부모들은 이런 청소년의 이상한 태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예전과 다름 없는 태도를 견지한다. 격없는 농담을 건낸다거나, 자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는 당황하는 자식을 보며 깔깔대거나, 좋은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자녀의 친구를 자식처럼 대하거나, 심지어 다 큰 녀석의 뺨에 뽀뽀 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어떠한가?

우리네 부모님들은 무관심을 덕으로 삼는 듯하다. 청소년기의 자녀가 부모에 무관심해지면, 부모도 자녀에게서 뚝 떨어진다. 그것이 자녀를 위하는 길인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한국의 부모, 자식 간은 점차 서먹해진다. 감히 사랑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뽀뽀? 상상도 하지 말아라. 가끔 대학생 녀석이 만취가 돼, 날리는 뽀뽀 정도가 있을지언정 맨정신에 뽀뽀는 기대도 말아라.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한국 사람에게 사랑해라는 한 마디는 공산당 총부리 앞에서 외치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들다. 아침부터 부시시한 눈으로 주섬주섬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의 요기를 차리는 아내의 정성 앞에도 그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생일날, 미역국 먹으러 오라는 어머님의 전화 소리에도 눈물은 흘릴지언정 사랑해라는 말은 전달되지 않는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볼살이 통통하고 애교 많은 아기들에게도, 말을 알아 먹을 나이 정도가 되면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칭찬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의 하나뿐인 아버지로서 사랑을 듬뿍 전할 방법이 없을까. 여기 정면돌파는 아니지만 귀중한 편법이 하나를 소개한다. 우선 좀 일찍 퇴근해 잠들기 전 아이들과 함께 첨벙첨벙 거품 목욕을 한다. 그리고 함께 아이 침대로 가서 이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아빠 작곡의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책을 읽으며 반복해 불러 준다. 졸린 아이는 이것이 책의 내용인지, 아빠가 나를 위해 부르는 노래인지 비몽사몽 간에 헤깔린다. 그리곤 아빠가 나에게 하는 사랑 노래로 착각하고는 잠에 빠져든다.

처음엔 지어서 불러야 하는 노래 구절이 자꾸 반복되어 어색하기도 하지만(처음엔 앞서 부른 것과 나중에 부르는 노래가 다르기도 하다), 어느샌가 이 노래가 익숙해지고 있다면 작전은 성공이다. 이 책의 반복 구절인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는 심각하게 자주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고 뒤로 갈수록 점점 의미를 갖게 되는 걸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부모가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 나이인 3살에서 6살 아이에게 가장 적당하며, 반복구절이 있다고 해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가 혼자 읽는 글읽기 연습용 책은 아닌 듯 싶다.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아빠들이여, 오늘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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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 1
아기 타다시 지음, 오키모토 슈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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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는 직원 천삼백명의 그리 작지 않은 회사이다. 우리 회사의 사장님은 나이 예순을 넘기신 대기업 임원 출신의 베태랑 경영인이시다. 그리고 내가 우리 회사에서 존경하는 몇 분 중에 외유내강의 훌륭한 리더이시다. 나는 운좋게 그런 사장님을 자주 뵐 수 있는 조직과 위치에 있고, 그러다보니 사장님실을 자주 들락거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사장님 책상에서 의외의 책을 발견했다. 만.화.책. 손주를 위한 선물용인가? 평소에 경영서적을 주로 보시는 사장님께서 뜸금없이 만화책이라니. 사장님, 이거 사장님께서 보시는 겁니까? 어, 그거 누가 보라고 추천해 주셨는데 사다놓고도 볼 시간이 없네, 허허허. 사장님께서 주로 만나시는 분들을 추정해 보면 틀림없이 다른 기업의 임원이나 사장님이실텐데, 사장님들끼리 서로 추천해 주는 만화책이라니.

그 후 자리에 와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책 '신의 물방물'의 인기가 모니터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특히 사회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계신 나이가 넉넉한 분들에게도 필독서로 꼽히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왜 일까?

서로 추천되고, 대중에 널리 읽히는 만화책들의 공통점은 그 분야 박사들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반이 없다면 배울 것도 호기심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그런 책이될 것이다. 슬램덩크는 농구, 식객은 조리, 초밥왕은 초밥, 고스트 바둑왕은 바둑, 타짜는 도박에 대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풀어놓는다. 이런 전문성이 만화책의 나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신의 물방울' 역시 이런 고도의 전문성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엄청난 포도주를 매주마다 먹어대고(책 끝의 아기 타디시의 주말 와인 코너가 증명하듯), 테스트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중에 그 많은 주제들의 만화책들을 뒤로 하고 '신의 물방울'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포도주라는 소재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를 우리 나라의 사회적 변화라는 틀에서 다시 들여다 보면 더 재미있다.

경제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저 위쪽의 극소수의 큰 부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산층의 문화의 향유 수준이 거의 같아졌다. 또 기업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고급품의 가격이 떨어진 이유도 있고, 또는 마케팅 전략으로서 기업들이 매스티지를 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매스티지란 대중 mass와 명품 prestige라는 말의 합성어로 대중적인 명품을 의미한다.

인간의 간사한 이중성은 남과 다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남과 구별되기를 바란다. 특히 최근 한국사회는 기존의 단결, 융화, 왕따안되기의 문화에서 독특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개성과 별종, 괴짜의 문화로 이동하고 있다. 비슷한 문화 향유를 거부하고 비슷한 남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이런 상중산층의 욕구는 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문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포도주 문화가 아닌가 한다.

사실 내가 아는 포도주는 80년대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여 한 잔 할 때 술을 못하는 어머님들을 위해 마련한 알콜이 약하고 달작지근한 음료일 뿐이었다. 그땐 나도 옆에서 달달한 맛 때문에 홀짝였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대부분 국내 포도농장에서 설탕을 팍팍 넣어서 바로 찍어낸 그냥 포도주였다. 맥주잔에 콸콸 따라 먹는 써니텐의 대체품일뿐인 것이다. 감히 와인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한 그런 것이었다. 나의 이런 기억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 새로운 풍조는 포도주 문화라기보다는 와인 문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와인 문화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고자 하는 중산층과 그 상위층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그냥 소리가 챙챙 나는 근사한 잔에 먹는 붉은 음료가 아니라, 향과 맛을 음미하고, 어디 몇 년 산이 어떠며, 빈티지가 어떻고, 테루아르니 보르도를 떠들어대며 먹는 것이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덥석 들어올 수 있는 진입장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문화코드로 외제차와 오페라의 유행을 들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진입장벽을 돈으로 치고 있다. 그냥 중형차가 아니라 더 비싼 외제차, 그냥 영화나 뮤지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에 몇 십만원을 주고 보는 근사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오페라. 이런 문화에는 '넌 이런거 비싸서 못하지?' 하는 심리가 숨어있다. 외국에서는 대중 스포츠인 골프가 한국에서는 귀족문화로 퍼져가는 것도 역시 이런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와인은 다르다. 괜찮은 와인 한 병의 가격은 5만원 내외고, 어느 정도 마신다해도 10만원에서 왔다갔다 하는 가격이다. 따라서 먹을라치면 어느 정도 월수입이 된다면 사먹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의 심리는 돈에 의한 우월감(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보다는 지식과 경험에 대한 우월감이다. 지식과 경험은 돈으로 뚝딱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어떻게 배우지? 개인사사? 학원? 맨땅에 해딩? 그나마 기초지식을 배우기에는 책만한 것이 없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는 건 만화책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책 '신의 물방울'의 가치이다. 고도의 전문지식과 흥미의 결합.

난 너희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난 돈이 많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와인에 탐닉해 보자. 옆에 두고 볼 필독 입문서는 사장님들도 보시는 책, 우아한(?) 만화책, '신의 물방울'.

무엇보다 이 책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책을 읽다 말고, 롹 그룹 퀸을 느끼게 한다는 '샤토 몽페라'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참고로 '샤토 몽페라'는 1권에서 나온 가장 싼 와인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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