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 오공은 상주성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고 은각은 책략을 써 용아녀를 꾀어내다


p.122

“이원길! 이원길... 이원길... 이원...기...일!”


   오공이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름과 얼굴은 제왕 이원길이다. 『요원전』에서 이원길은 부모를 잃은 손오공이 그나마 정붙이며 살고 있던 복지촌의 사람들을 깡그리 학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굶고 있던 백성들이 자신의 쌀을 몰래 먹는다며 게임을 하듯 학살을 진행하고 있다. 죽어가는 민중들의 원념과 오공의 머리를 죄어오는 금환의 고통이 이원길로 수렴되는 순간이다. 지금 그에게는 이원길만이 타도 대상이며, 이원길을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이원길로 보이는 상황이다. 학살을 진행했던 이원길을 없애기 위해 오공 역시 학살을 진행한다. 결국 민중의 더 많은 피를 원하는 무지기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p.132

“천축의 원신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나이까?”

“천축이라... 그렇군, 그것도 괜찮겠어... 하지만 천축은 머나먼 곳... 너희 인간들에게는 너무나도 먼 곳이다... 지금... 지금 이 사슬은 너는 물론이거니와 오... 오공조차도 끊을 수가 없다...!”


   용아녀의 질문에 무지기가 말을 돌리고 있다. 무지기는 천축이나 또 다른 원신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알고는 있지만 모른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앞에서도 이야기 헸듯이 무지기는 “말을 잘하(善應對言語)”기 때문이다.

만일 무지기가 천축의 원신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천축에 원신, 즉 하누만이 존재한다면, 『요원전』에서 ‘무지기’와 ‘하누만’의 관계는 『머드멘』에서 ‘아엔’과 ‘위대한 자’의 관계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손오공’과 ‘코도와’가 있을 것이다. 『머드멘』에서 ‘위대한 자’는, 숲을 지키고 전통을 지키는 코도와에게 도움을 준다. 반면 아엔은 부족민들에게 ‘카고(Cargo)’라는 부와 문명을 주면서 숲을 파괴하고 전통을 없앤다. 『머드멘』에서는 자세히 밝히진 않았지만, 결국 파푸아뉴기니는 근대화란 이름으로, 아엔이 승리를 하며 위대한 자는 숲에 머물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요원전』의 결말을 내 맘대로 생각해 본다면, 오공이 인도에 가서 하누만을 만나, 제천대성의 사슬[輪回]에서 벗어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무지기는 고통 받는 백성들의 원념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 또 다른 지살에게 제천대성의 칭호를 내리지 않을까... 그냥 짐작일 뿐이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오공은 불교에 귀의할 수도 있고,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천(帝釋天)일 수도 있고, 미륵(彌勒)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역사 속의 오공(悟空)이 되어 당의 사신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짐작일 뿐이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내용이 언급될 때 하나씩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다.



p.132~133

“더욱, 더 많은 피가... 원한이... 탄식이 나는 필요하다! 너희들의 피를 마시고, 너희들의 살을 먹고 나는 더욱 강대해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너희들의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알겠느냐, 인간들이여! 무력한 버러지들이여! 더욱 더 괴로워해라! 더욱 더 피를 흘려라! 너희들이 흘리는 막대한 피가 내 힘이 되어, 머지않아 너희들의 원수를 쓰러뜨릴 것이다! 자, 할 수 있겠느냐 용아녀? 해봐라! 피바다를 만들어봐라! 그 피와 원한어린 목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 천명天命은 바뀌어 이 사슬이 끊어지리라!”


   너무나 솔직하게 무지기가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해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심스럽지만, 본래 원숭이에게 있는 성질 급한 성격의 발로라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무지기는 나찰(羅剎, Rakshasa)이다.


『라마야나』에 등장한 나찰 타타카


   나찰은 힌두교의 악귀로 지상에서는 제물을 어지럽히고 무덤을 파헤치며 사람을 미혹시켜 잡아먹고, 지옥에서는 죄인을 못살게 군다. 손톱은 독이 묻어 나오고, 음식을 상하게 하며 모양을 바꾸어 나타나 환각에 빠지게 하거나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불교에서도 처음에는 악귀로 받아들여졌으나, 후에 호법 외호신(護法外護神)으로 받아들여져 야차(夜叉, yakṣa)와 함께 사천왕(四天王, Lokapāla) 가운데 비사문천(毘沙門天, Vaiśravaṇa)의 권속에 들어간다.

   『요원전』「대당편」에서 나찰은 두 번 언급이 되는데, 하나는 76회~100회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나찰녀(羅剎女)이고, 다른 하나는 43회와 45회에 등장하는 비람파(毘藍婆) 보살이다. 그 중 비람파보살과 무지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해당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p.161

“열흘 동안 자리를 펴고 지내면서 복채라고는 사람 목 하나라... 이거야 원, 나도 장안에나 가볼까...”



   이 역술가는 신과선생(神課先生) 원수성(袁守誠)이다. 아직 이름을 밝히지 않아 후에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지금 이 이야기가 원수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인지라, 조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원수성은 『서유기』 9회(문지사판은 10회)에 등장하는데, 등장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한 어부가 나무꾼에게 “한 점술가가 점을 쳐주는데, 그가 시키는 대로 경하(經河)에 그물을 뿌리면, 백발백중으로 고기가 잡힌다”는 말을 경하 용궁의 야차가 듣고는 용왕에게 보고를 올린다. 경하 용왕은 수족(水族)이 끝장나는 것을 막으러 그 점술가의 점을 망치려는 계획을 짠다. 선비로 변신한 용왕은 원수성을 찾아가 내일 날씨를 묻자, 원수성이 몇 시에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고 그치는지를 얘기하고 정확한 강수량까지 이야기했다. 비를 내리는 것은 용왕의 재량이라, 우쭐한 용왕은 점이 맞으면 복채를 두둑하게 주겠으나, 틀리면 이곳을 떠나라는 내기를 한다. 그런데 정확히 원수성이 했던 말대로 비를 뿌리라는 옥황상제의 소칙이 내려온다. 용왕은 소칙과 조금 다르게 비를 내리는 시간을 다소 어긋나게 하고 강수량을 조금 줄여 원수성의 점괘를 틀리게 하지만, 결국 용왕은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위징(魏徵)에게 목이 베이고 만다. 『요원전』에서 원수성이 이야기 한 “복채라고는 사람 목 하나”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 원수성의 신점(神占)으로 경하 용왕과 위징, 당태종이 연결되며, 후에 관세음보살과 당태종 그리고 삼장법사가 연결된다. 원수성은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각 인물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요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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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 백운白雲이 걷히니 길이 드러나고 허영虛影이 움직이니 어둠이 깊어지다


p.089

“용아녀의 원수는 수 양제잖아. 양제는 죽었고 수도 멸망했는데 왜 당과 싸우는 거야?

“수나 당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두건덕은 백성 출신이었고, 민중을 위해 일어선 의인義人이었어. 그 뒤를 계승한 유흑달도 그렇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공연히 전란을 키워 사람들만 괴롭게 할 뿐이잖아.”


   손오공의 의문과 용아녀의 고민이 부딪혔다. 엄청난 부역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짠 수양제가 죽었지만, 곳곳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수에서 당으로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중들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오공의 지적대로 용아녀는 싸움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오공처럼, 잃어버리지 않는 힘을 원할 뿐이다. 무지기는 그런 용아녀의 마음을 이용하면서, 그녀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후에 용아녀는 이런 고민을 스스로 끊지만, 이런 용아녀의 번민은 홍해아에게 옮겨진다. 홍해아 역시,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오공의 힘에 미혹(迷惑)되고 만다. 여러모로 비극인 셈이다.



p.107

“도적의 주모자는 어디 사는 누구냔 말이다!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이 꼴이 될 것이야!!”


   제왕 이원길의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땅에 묻어 목만 남겨놓고 말발굽으로 머리를 깨고 있다. 이원길이 실제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전의 남북조 시대 때, 북위(北魏)의 대장 후경(厚卿)이 주군(州軍)을 이끌고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투항한 후, 양나라를 배반, 10만 대군으로 도읍인 건강(建康, 南京)을 함락시켰을 때, 백성들을 거대한 맷돌에 갈아 죽이고, 하반신을 땅에 파묻고는 기마군을 풀어 재미 삼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쩌면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치통감』권187에 기록된 이원길의 행적을 보면, “항상 두탄과 더불어 놀며 사냥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농작물을 유린하고 밟았다. 또 멋대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게 하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활을 쏘아 그들이 화살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은 분하고 원망하였고,” 이렇듯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듯하다.



p.111

“오공, 분명히 보여줬다. 네가 처한 상황을 말이다... 이것은 환각이 아니야. 그 증거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라! 이런 일은 어쩌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언제 어디서든 이와 유사한 일이 항시 일어나고 있단 말이다! 내가 어디에나 있다고 한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느냐!”


   오공은 제천대성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분노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민중들의 원념들을 이끌어내 대성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오공은 “그런 상황이 천년만년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라 일갈한다. 하지만, 무지기의 말대로 그런 상황은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나라로 통일될 때까지 전란이 그치지 않았던 약 400여 년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기근, 질병, 동란 가운데 민중들이 있었으며, 계급과 민족의 압박, 착취는 물론이고 대규모적인 학살이 수시로 전개되던 상황이었다. 수문제의 치세는 짧았고, 수양제의 과도한 부역과 그로 인한 민란은 민중들에게, 또다시 지옥문이 열렸다는 공포와 낙담, 그리고 심한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무지기가 자신 있게 “내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 불교도 중국에서 힘을 얻었다. 이처럼 현실의 삶이 슬프고 고통스럽고,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허망함이 가득한 시대, 선량한 사람이 가혹하게 살고, 악인이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회, 집안을 건사하기는커녕 내 한 몸조차 돌볼 수 없는 사회, 바로 이런 때 불교가 민중의 의식 깊숙이 파고들었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으니, 인과응보를 윤회에 기탁하고 합리성을 ‘내세’와 ‘천국’에 맡기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무지기는 “불가에 속한 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이 점은 생각을 해볼 주제가 된다. 혁명을 통한 민중의 자각, 그리고 종교를 통한 민중의 구원. 혁명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엄청난 피를 부른다. 종교적인 구원은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로 내 현실을 죽음에 저당을 잡히는 것이다. 혁명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혁명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 죽음 뒤에 있을지도 모를 내세나 천국을 위해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불안/불만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마邪魔안의 부처佛陀, 부처佛陀안의 사마邪魔’ 속에서 무엇을 봐야할지/선택해야 할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천축에 가는 이유는 ‘원신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이지만, 천축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는, 때로는 무지기의 선택을 하고 때로는 불타의 선택을 하면서 ‘사마안의 부처, 부처안의 사마’를 깨달아 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는, 아마도 「천축편」의 마지막 회에서나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죽기 전에 그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로호시 선생님 힘내세요!)



p.115~120

폭주하는 손오공


   민중들의 분노로 제천대성의 힘을 이끌어낸 손오공은 화과산에서 무지기가 행동한 것처럼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는데, 이런 모습은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이 떠오르는데,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는 <에반게리온>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그림자의 거리(影の町)」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에반게리온의 이미지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요원전』에서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소년 만화의 형식, 손오공의 폭주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 언급한 우주론, 혜안(惠岸) 행자가 자신의 망상들과 싸우는 모습 등이 그런 게 아닐까 하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이 나올 때 언급하는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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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 내광사來光寺에서 소녀가 승려를 찾고 상주성相州城에서 노파가 재물을 탐하다


p.049

“어머니는 수나라 양제의 운하 공사에 부역으로 끌려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고구려 원정으로...”


   누노메 조후는 “양제의 ‘양(煬)’이라는 글자는 ‘예를 버리고 민심을 멀리한다’, ‘하늘에 거역하고 민을 학대한다’라는 뜻의 시호로서, 악한 군주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수양제는 역사적으로 실정의 이미지, 폭군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러 사적에 실려 있는, 민중에 대한 과도한 부역이다.

   먼저, 605년에 낙양(洛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 새로운 수도(장안을 서경西京이라 부르고, 낙양을 동경東京이라 했다) 조영을 위해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는데, 두보(杜寶)의 『대업잡기(大業雜記)』에 따르면, 성벽공사에 70만, 토공감(土工監)의 상역(常役)에 80만, 목공・기와공・금공・석공 각 10여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其內諸殿基及諸墻院又役十餘萬人,直東都土工監,常役八十餘萬人;其木工、瓦工、金工、石工,又役十餘萬人).

   그리고 같은 해(605년)에 화이허와 황허를 연결하는 통제거 공사를, 608년에 황허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 건설을, 610년에는 창장과 위항을 연결하는 강남하 공사를 시작했으니, 당시의 수나라는 온통 나라 전체가 공사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대운하 공사가 끝난 611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준비, 612년부터 3년간 세 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뒷이야기는 알려진 바와 같다.

   무리한 공사의 연속으로, 부역할 백성들이 부족, 결국 대운하 건설 당시에는 면제대상이었던 부인들까지 징발되었는데, 『요원전』에서 용아녀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p.058

“때마침 천축에서 오신 큰 스님께서 상주에 계시다고 하여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습니다. (...) 가보리迦菩提 대사라고 하시는 천축 스님께서 이 근처 내광사來光寺에 와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찾아뵙던 도중 이 산길로 접어들어...”


   역사 속의 현장 스님은 형주를 지나, “상주에서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다(至相州,造休法師)”고 했는데, 『요원전』에서는 천축에서 온 가보리 대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고 한다. 게다가 제6회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상주로 가는 길이었다고 했는데, 해가 바뀐 지금도 상주로 가는 길이다. 아마도 손오공과 현장, 그리고 천축을 연결시키기 위해 역사를 조금 비튼 것 같다.

   천축에서 온 가보리 대사는 『서유기』에서 손오공에게 성과 이름을 내려주고 장생(長生)의 도리와 72가지 변화 술법, 그리고 한 번에 십만 팔천 리를 갈 수 있는 근두운(筋斗雲)을 타는 법을 가르친 수보리조사(須菩提祖師)에서 차용한 것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수보리 조사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인도의 고승 수부티Subhūti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인도의 고승(Subhūti)이 동승신주의 도사(須菩提)에서 다시 인도의 승려(迦菩提)로 순환이 된 셈이다. 가보리 대사의 迦는 석가모니(釋迦牟尼, Shakyamuni)의 가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가보리 대사를 원 발음에 가깝게 부른다면 Kyabhūti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중요한 것은 아니다. :)

   실제로 현장 스님은 중국을 떠나기 전, 천축에서 온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현장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서 온 바라빈가라미트라(波羅頻迦羅蜜多羅)라는 고승이 불경을 강론하고 있어서 청강을 했는데, 바로 그 때의 강론이, 현장을 인도로 가게 한 어떤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p.061

“주지 스님, 소승이 계율을 깨고 그만 여체를 건드리고 말았나이다!!”


   모로호시 선생의 장점이자 특징이라면, 이야기의 흐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혹은 코믹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인데, 바로 이 상황에서, 폭주하듯 달려온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부여했다.

   웃자고 한 말에 심각하게 대꾸를 하자면, 당시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는데, 이 구족계에 따라 비구승은 250가지 계율을 지켜야 하고, 비구니는 300여 가지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니, 그 중 여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계율이 충분히 있을 만도 하다. 이 계율은 “불교 학문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 승려들의 일상생활과 단체생활, 개인적인 수행과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세세한 항목들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출가하지 않은 일반 거사(居士), 신도들에게는 오계(五戒)나 팔계(八戒)가 주어지는데, 자세한 것은 저팔계(豬八戒)가 등장할 때 다루기로 한다.



p.063

“뭐야, 이 절은 소림사少林寺 분원分院이라도 되나? 오냐오냐 말로 하려니 이런 꼴이라니깐!”


   허난성[河南省] 의 정저우[鄭州] 쑹산[嵩山]에 위치한 소림사는, 우리에게 절이라기보다는 무술을 수련하는 도장(道場), 혹은 무협소설에서 무술의 분파(分派)로 여겨지는데, 무승(武僧)들로 유명하지만, 그나마 전해오던 무술들도 문화대혁명 때 완전히 파괴되어 계승이 끊겼다고 한다. (후에 절은 복원했고,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 중 유명한 이야기로는 620년, 이세민이 왕세충을 깨뜨리기 위해 낙양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일 때, 소림사에서 온 13인의 무승들이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620年唐太宗攻打洛陽,因得到少林寺13武僧生擒駐守轅州的王世充的侄子王仁則立下戰功後) 이들 승려들이 단순히 전투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무공을 사용한 고수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소림사에 대한 소문은 이때 퍼졌을 것이고, 무술을 하는 승려에 대한 이미지도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소림사는 현장 스님에게도 각별한 사찰이기도 한데, 후에 구법 여행을 마치고 귀국, 당태종을 만나서 올렸던 청원 중 하나가 ‘소림사로 가서 경전 번역 사업에 종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림사는, 508년, 북인도 출신의 승려 보데류지(菩提留支, Bodhiruci)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대량으로 지니고 와 중국어로 불경을 번역한 곳이기도 하다.



p.067

“또 도적들이! 한패인가?!”


   용아녀가 소림사 분원이라고 조롱했던 내광사가 도적들에게 약탈을 당하는 이 장면은 소림사가 홍건적들(고려를 침공한 그 홍건적들 맞다!)에게 약탈을 당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 중(1351~1366), 홍건적들이 소림사를 습격, 불상의 금박을 벗기고, 복장유물(腹藏遺物,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 보물)을 찾기 위해 불상을 파괴하자 승려들이 다 도망가고, 홍건적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한 명도 못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소림사에서는 이 이야기를, 불목허니로 있던 긴나라왕(紧那罗王)이 불쏘시개 하나로 홍건적들을 다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로 뻥을 쳤는데, 바로 이 긴나라왕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유명한 ‘소림사 주방장’의 이야기이다.



p.071

“그렇게 먼 데서 어찌 중원까지 오셨나요?”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세.”


   가보리 대사의 이 말은 현장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날 때 다졌던 마음가짐과 흡사하다. 가보리 대사가 불교의 발원지에서 제대로 배운 불법으로 중국의 중생들이 보리를 얻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현장은 제대로 불법을 배워 중국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먼 인도로 떠나는 것이다. 현장이 인도로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요원전』 3권에서 해당 이야기가 나올 때 자세히 다루는 것으로 한다.



p.072~074

가보리 대사와 통비공과의 싸움


   통비공이 가보리 대사를 죽이려고 요술(妖術)을 부리는데, 가보리 대사는 불경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외우고, 결국 통비공은 본 모습을 보이고 도망간다. 가보리 대사가 외운 것은 주문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3에서 주문을 외우는 승려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북인도 오장나국(烏仗那國, Uddiyana)의 승려들이 그러한데, “이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으며 선정에 잠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능히 글을 잘 외지만, 심오한 뜻을 깊이 궁구하지는 않는다.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특히 금주(禁呪)에 능하다(並學大乘,寂定為業,善誦其文,未究深義,戒行清潔,特閑禁呪。)”고 적혀있다. 금주란 다라니(陀羅尼)로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呪文)’을 뜻하는데, 『대당서역기』 전체를 통틀어, 그러니까 현장이 다녀 본 130여개국의 나라 중 다라니를 외고 있다고 기록한 곳은 이 나라뿐인 것으로 보아, 가보리 대사는 우디야나 출신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주문으로 요괴를 제압하는 것은 『서유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삼장법사가 14회에서 손오공을 컨트롤하기 위해 사용하는 긴고주(緊箍呪), 관세음보살이 18회 흑대왕・42회 홍해아를 제압할 때 쓴 금고주(金箍呪)・금고주(禁箍呪)가 있으며, 26회에서 인삼과나무를 살려낼 때 불경과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이런 것은 인도와 중국, 불교와 도교, 고대의 무술(巫術) 등이 서로 합쳐지고 걸러져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에는 구병시식(救病施食)이라는 의식이 있는데, 이른바 ‘귀신병’이라고 하는 빙의현상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종의 퇴마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귀신을 없애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닌 음식을 주고 법문을 알려주어 귀신을 불법에 귀의시키기 위한 의식으로 법력(法力)이 높은 승려만이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담이지만, 예전 한국 공포 영화 〈망령의 곡〉에서, 마지막에 주지 스님의 불교 파워로 귀신을 물리치는 장면(특히 염주를 투척하니 귀신이 삼단 텀블링을 하며 괴로워하는 그런 괴이한 퇴마장면)은 〈엑소시스트(The Exorcist)〉의 퇴마장면이 참으로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릿한 박력을 선사했던 기억이 난다.



p.076

“천축에 원신猿神이 있어, 지상에 재앙 된 자들로 하여금 투전승자鬪戰勝者로써 거듭나게 하리라 -”


   뒤에 손오공과 용아녀가 해석한 것을 옮긴다면 “인도에 있는 원숭이 신이 지살의 운명을 지닌 자들을 천강의 운명으로 바꿔주리라.” 정도가 될 것이다. 제천대성 무지기에 따르면 지살과 천강 모두 난을 일으키도록 되어있지만, 백운동의 석벽에 기록된 것에 따르면 지살은 실패할 운명을, 천강은 성공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되어있다.

   정리해본다면, 무지기는 자신의 의지를 지닌 인간들, 제천대성의 칭호를 받은 이들이 난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원할 뿐이지, 그 난의 성공/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무지기의 의도를 아는 누군가가 무지기가 모르는 글자로 이런 비밀을 남겨 놓은 것이고, 이것을 확인하는, 지살성의 운명을 지닌 이들이 헛된 죽음을 겪지 않도록, 무지기가 내린 운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도의 원숭이 신은 누굴 가리키는 것인가? 하누만(Hanumān)이라고 조심스럽게 확신해본다. 하누만은 인도의 많은 신들 중에서 지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신이다. 하누만에 대한 이야기는 『라마야나(Rāmāyaṇam)』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가 섬기는 라마(Rāmā)에 대한 헌신성, 충성심은 물론이고, 괴력과 민첩성 등으로 볼 때, 『서유기』의 손오공 역시 하누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은 모든 악의 파괴자이자 모든 고난의 추방자로, 라마의 모든 장애와 고난을 제거한다.


하누만, 라마, 시타, 라크쉬마나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본다면, 무지기로부터 제천대성의 칭호를 받은 손오공, 그리고 제천현녀의 칭호를 받은 용아녀 모두 지살의 운명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인도에 있는 원숭이 신이, 지살의 운명에 있는 자들을 투전승자가 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손오공과 용아녀가 인도로 가게 될 명분이 만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명쾌하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바로 저 ‘투전승자’라는 단어 때문인데, 이 단어는 명백히 『서유기』 100회에서 손오공이 석가여래에게 받는 칭호 ‘투전승불(鬪戰勝佛)’에서 차용한 단어로 ‘싸움을 하여 승리한 부처님’의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싸움은 외적인 치고받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치성하는 번뇌와 잡념과 망상을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천축에 있는 원숭이 신은 거대한 맥거핀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원숭이 신의 유무가 아니라 ‘천축에 가는’ 것이다.



p.080

“유흑달의 패배다... 예언대로야...”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어... 홍해아도...”

“불과 수백 기로 겨우 달아났잖아. 틀렸어. 결국에는...”


   아마도 지금 『요원전』에서 다루는 유흑달의 패배가 『자치통감』권190에 기록된 “(622년) 유흑달은 범원(范願) 등 200여 기병과 돌궐로 도망하여서 산동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범원은 『요원전』제8회에서 죽는 것으로 나왔다. 아마도 홍해아가 범원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돌궐로 간 유흑달은 622년 6월에 돌궐의 군사들과 정주(定州,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를 약탈, 옛 장수들과 군사들을 규합한다. 하나 더 첨부하자면, “그해 10월 기유일(1일)에 제왕 이원길에게 산동에서 유흑달을 토벌”하라는 조서가 내렸지만, “이원길은 유흑달의 군사가 강하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p.081

“자네를 멸하는 것은 사교의 신도, 운명도 아닐세... 자네 자신 안에 있는 것, 바로 자네의 마음이야... 지금 그대로 지내다간 자네는 필경 자신의 분신에 의해 파멸할 걸세...”


   『요원전』 전체에 걸쳐 다루는, 하나의 몸속에 들어있는 마성(魔性)과 불법(佛法)의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역시 고승은 고승이시다!) 굳이 마성이니 불법이니 할 필요 없이, 악심과 선심으로 표현해도 되겠다. 인간에게는 악심과 선심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 두 마음 중 어느 하나 우위를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을 규정하고 표현한다. 악심과 선심 혹은 마성과 불법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치성하는 번뇌와 잡념과 망상을 싸워 이기는 자가 바로 투전승자/투전승불이다. 나를 이기는 자가 나를 구원할 수 있고[小乘], 나를 구원한자가 대중을 구원할 수 있다[大乘]. 불교의 가르침은 나[自我]를 찾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이야기는 후에 ‘사마邪魔안의 부처佛陀, 부처佛陀안의 사마邪魔’라는 주제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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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 용녀는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치고 오공은 아녀자를 업고 동굴로 돌아가다


p.013

“하북에는 기근이 들었다고 해도 다른 지방은 그렇지 않아. 특히 강남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라. 당군은 거기서 난 풍부한 양곡을 운하로 퍼 나르고 있단 말씀이야.”


   수나라 때 건설한 운하를 살펴보면, 우선 수문제가 584년에 광통거(廣通渠)를 개통해 황허[黃河]와 장안을 연결했고, 587년에 산양독(山陽瀆)을 열어 화이허[淮河, 淮水]와 창장[長江, 揚子江]을 연결했다. 그 후 수양제가 605년 통제거(通濟渠)를 완성해 화이허와 황허를 연결, 창장에서 장안까지 연결하는 수로가 개통되었다. 608년에는 황허와 탁군(涿郡, 베이징北京 부근)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했고, 611년에는 창장 남안으로부터 위항[余抗, 항저우抗洲]을 연결, 탁군, 장안, 위항을 물길로 이동할 수 있는 사통팔달의 수로가 완성이 되었다.



   수문제가 운하 공사에 착수한 것은, 수도 장안의 번영으로 인구가 증가해서,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광통거로 관동의 곡물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었으며, 산양독으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강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대운하 공사 역시 기본적으로 수문제와 같은 이유에서였지만, 너무나 무리한 공사 진행으로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사역을 당해, 그 원한이 끊임이 없었다. 그런데 운하가 완성된 611년에, 수양제는 양주(揚州, 장쑤성江苏省)에서 탁군까지 용주(龍舟)로 행차를 했는데, 이 배는 높이가 45척, 길이가 200척, 총 4층 규모에 2층에만 120개의 방이 있고, 노를 젓는 데만 8만명의 인부가 필요했다니, 그 꼴을 봤던 민중들이 충분히 피를 토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은 자신의 유람 시설을 위한 공사라고 백성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제거의 경우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개통한 것이었고, 이후 612년부터 3년간 고구려 원정에 나서니, 바로 이런 이유들로 민란이 봉기하여 수나라가 멸망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의 진위야 어찌됐든, 이 대운하로 중국의 남북교류는 경제적인 것은 물론, 문화적인 것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요원전』에서는 멸망한 수에 이어 곧 통일을 눈앞에 둔 당이 이 운하를 십분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p.038

“이... 이만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더 이상 들어갔다간 오리무중에 빠질 걸세.”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짙은 안개가 5 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36 「장해전(張楷傳)」에 나오는 오리무(五里霧)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장해(張楷)는 후한 순제(順帝)때 선비로, 학문이 뛰어나고 도술(道術)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벼슬에 관심이 없어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명성이 높아져 그를 찾아온 문하생과 학자들이 얼마나 많던지 은둔한 곳 근처에 그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거리가 생길 정도였다. 게다가 장해를 찾는 사람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부류만 있는 게 아니라 도술을 배우려는 무리도 많았다. 그 중 관서(關西) 출신의 배우(裴優)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삼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는(三里霧)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장해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배우기를 청했다. 장해는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기(五里霧) 때문이다. 그러나 장해는 몸을 피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배우는 안개를 일으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는데, 안개를 일으키는 도술을 장해에게서 배웠다고 진술해 장해도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장해는 옥중에서도 고전을 읽고, 『상서(尚書)』의 주석을 달았는데, 배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리무중의 연원은 ‘(장해)는 성정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오 리를 안개로 덮을 수 있었다. (性好道術,能作五里霧。)’, 바로 이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왠지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오리무중’에 가까운 이야기로는, 먼 옛날 신화의 시대에 치우(蚩尤)가 타 부족과의 전쟁 중에, 천지를 뒤덮는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 못하게 했다던 이야기가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치우의 안개는 나중에 황제黃帝에게 깨지고 만다.) 고우영 선생께서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십팔사략』 1권 「치우(蚩尤)」편에서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활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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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원전』 의 번역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잡지 못한 오류들이 조금씩 보인다. 1권에 대한 글도 끝냈고 해서, 그간에 썼던 글 중 오류라 생각하는 부분들만 모아서 따로 정리를 한다. 명시한 것들이, 확실하게 틀린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라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다음에 재판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반영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올린다.




p.004

등장인물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이유는 아래 p.078 무지기 항목에서 설명.




p.005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 이연의 넷째 아들.


넷째 아들 → 셋째 아들 


   1권 p.247 본문과 註에서 다루었으므로 셋째 아들로 통일해야 한다.




p.022

국원攫猨이구먼...” 확원攫猨이구먼... (p.023, p.024, p.029, p.030, p.031, p.035, p.052, p.054 모두 수정)


   확원(攫猨)이라 읽어야 한다. 확원이란 앞서 이야기한 가국을 나타내는 다른 말이다. 『포박자(抱朴子)・대속편(對俗篇)』에, “후(猴: 원숭이)는 나이가 팔백 살이 되면 원(猿: 원숭이)으로 변하고, 나이가 오백 살이 되면 확(攫: 큰 원숭이)으로 변한다”고 했다.




p.034

“평소라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음식이겠으나... 권세를 등지고 산야에서 풀을 뜯어 연명한 옛 성인 백이와 숙제의 덕을 기리기에는 좋은 기회일 게야.”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p.076

무지기無支奇... 그 이름은 이 노인네도 알고 있소. 먼 옛날 하夏를 개국했던 성국 우왕禹王께서 치수를 하실 깨 붙잡아 귀산龜山 아래 사슬로 꽁꽁 묶어 뒀다던 수괴水怪가 아니오? 『악독경』岳讀經이라 하는 책에서 본 적이 있소이다. 장강長江, 회수淮水의 물을 지배하며 온갖 들판의 넓이와 개울의 깊이에 통달했다던가...


무지기無支奇 무지기無支祁


   무지기(無支祁)는 巫支祁・无支祁・巫支祗 등으로 표기되는데, 『요원전』에서는 ‘기’자를 祁에서 奇로 바꾸었다. 『요원전』에는 차용한 캐릭터의 원래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경우가 가끔 보이는데, 그게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서유기』 47회와 99회에 나오는 일금(一金)은 『요원전』 74회부터 96회까지 등장하는 일금(一金)으로 글자가 바뀌었는데, 각 작품에서 칭秤과 승升이라는 단어에 맞게 이름을 해석하므로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겠다. 


   무지기에 대한 기록은 『고악독경(古岳讀經)』제 8권에 나오는데, 『고악독경』은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67 「이탕(李湯)」에 실려 있다.


禹理水,三至桐柏山,惊風走雷,石號木鳴,五伯擁川,天老肅兵,功不能興。禹怒,召集百靈,授命夔龍,桐柏等山君長稽首請命。禹因囚鴻蒙氏、章商氏、兜盧氏、梨婁氏,乃獲准渦水神,名無支祁。善應對言語,辨江准之淺深,原隰之遠近。形若猿猴,縮鼻高額,青軀白首,金目雪牙,頸伸百尺,力逾九象,搏擊騰踔疾奔,輕利倏忽,聞視不可久。禹授之童律不能制;授之烏木由,不能制;授之庚辰,能制。鴟脾桓胡、木魅水靈、山襖石怪,奔號聚繞,以數千載,庚辰以戟逐去。頸鎖大索,鼻穿金鈴,徒准陰龜山之足下,俾准水永安流注海也。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세 번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렀는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며 돌이 부르짖고 나무가 울었으며 오백(五伯)이 시내를 끌어안고 천로(天老)가 병사들을 모아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가 노하여 천하의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기룡에게 명하여 동백 등의 산군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명령을 청했다. 우가 홍몽씨(鴻蒙氏)・장상씨(章商氏)・두호씨(兜盧氏)・이루씨(梨婁氏)를 가뒀기 때문에, 곧 회수(准水)와 와수(渦水) 사이에서 요물을 잡았는데 이름이 무지기(無支祁)라고 했다. (이 요괴는) 말을 잘하고 장강의 흐름과 회수의 흐름 가운데의 얕고 깊음을 가려낼 줄 알며, 벌판과 습지의 가깝고 먼 것을 가릴 줄 알았다. 생긴 것은 원숭이와 같은데 코가 움츠러들었고 높은 이마에 몸빛은 푸르고 머리는 희며 금처럼 반짝이는 눈에 눈처럼 하얀 이를 가졌다. 목을 길게 빼 늘이면 그 길이가 백 자는 되는데 힘은 코끼리 아홉 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세며 동작이 매우 빨라 잠깐 사이에 번득이며 듣고 보이는 것이 오래 가지 못했다. 우가 무지기를 동률(童律)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조목유(烏木由)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경진(庚辰)에게 맡겼더니 다스릴 수 있었다. (경진이 일을 시작하자) 치비・환호・나무 도깨비・물의 정령・산의 요괴・돌 요괴들이 달려와 모여들기를 수천 년 동안이나 했는데 경진이 갈래진 창으로 쫓아냈다. (경진은 무지기의) 목에 굵은 사슬을 메고 코에는 금방울을 닳아 회수 북쪽의 구산(龜山) 기슭에서 항복시키니 회수를 좇아 영안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갔다.


   모로호시 선생은 무지기의 奇를 『산해경・서산경(西山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궁기(窮奇)’라는 짐승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그 짐승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西山經」: 曰邽山。其上有獸焉,其狀如牛,蝟毛,名曰窮奇。

규산(邽山)이라는 곳에는, 그 위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그 생김새가 소와 비슷하고, 고슴도치 털로 덮여 있으며, 이름은 궁기(窮奇)라 한다.


궁기(窮奇)


「海內北經」: 窮奇狀如虎,有翼,食人從首始,所食被髮,在蜪犬北。

궁기(窮奇)는 생김새가 호랑이와 비슷하고, 날개가 있으며, 사람을 잡아먹을 때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잡아먹히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으며, 도견(蜪犬)의 북쪽에 있다.


궁기(窮奇)




p.244

“당시 천하의 판도로 말할 것 같으면 열에 아홉은 거의 당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만 고개도高開道, 서원랑徐円朗 등 아직도 당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이 남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유흑달은 하북을 거점 삼아 당에게 마지막까지 완강히 저항한 군웅 중 마지막 한 사람이었답니다.”


서원랑徐円朗 서원랑徐圓朗 


   역사 속 인물, 고유명사이니 통자 대신 본자를 써야 한다.




p. 358

“잘 들어, 진秦 말엽에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오광吳廣, 신新 시절 거병한 여모呂母, 녹림綠林의 난을 주도한 왕림王匡・왕봉王鳳, 적미군赤眉軍을 이끈 번숭樊崇, 후한後漢 말 황건군黃巾軍의 주모자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 장노張魯, 북위北魏 시절 대승교大乘敎의 난을 일으킨 법경法慶...”


왕림王匡 → 왕광王匡

장노張魯 → 장로張魯 (p.359 장노 수정)




p.358

“* 다들 아시겠지만, 황소는 이 이야기로부터 수백 년 뒤 당 말기를 뒤흔든 ‘황소의 난’의 주모자, 그리고 송강은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옮긴이 註)”


북송 시절 그 이름도 유명한 양산박 108호걸의 두령으로서 조정에 맞선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뜻하는 것이올시다.

→ 북송(北宋) 말기의 도적으로 약 1년간 관군과 대치해 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항복한 인물로, 『수호전』의 송강은 바로 이 송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올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송강은 역사 속의 인물인데, 설명은 『수호전』의 송강과 섞여 있다. 송강은 북송(北宋) 시절의 도적으로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니,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이듬해 5월에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에,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송사(宋史)』에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한다(言宋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고 나와 있어 ‘양산박 108호걸’, ‘급시우’ 등은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p.407

수말당초隋末唐初 군웅할거도群雄割據圖


서원랑徐円朗 → 서원랑徐圓朗

임자홍林子弘 → 임사홍林士弘

이자통李子通 아래 그림 밑에 심법흥(沈法興) 추가





p.408

623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유흑달, 이세민에게 패해 죽다 → 유흑달, 제갈덕위(諸葛德威)의 배반으로 사로잡힘. 이건성, 유흑달을 참수.


   『자치통감』 권190을 보면, 당시 유흑달을 토벌하러 가는 것은 이세민이 아니라 태자 이건성이다. 이건성이 유흑달 토벌에 지원한 것은, 뛰어난 무공으로 당(唐)의 기반을 굳건하게 세운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런 가운데, 무덕(武德) 6년 (623년), 정월 기묘일(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요주(饒主,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 라오양현饶阳县)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배신해 생포한 후, 이건성에게 호송해갔다. 유흑달과, 함께 잡힌 유흑달의 동생 유십선(劉十善)은 유흑달의 도읍지였던 명주에서 목이 베어 죽었는데,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이건성이 유흑달의 참수를 지시했던 것으로 본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유흑달을 죽인 것으로 설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권 이후로 홍해아가 더 이상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권말 부록 부분은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 생각되어 일부러 오류를 적었다.




   이상 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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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8-0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처럼 상세히 해부하신 님이 참 대다하신듯 싶어요^^

Tomek 2013-08-06 09:46   좋아요 0 | URL
정말 재미있는 책인데, 별로 얘기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홀로 몇 자 끼적여봤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