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 처형장에 귀곡성鬼哭聲이 울려 퍼지고 황하黃河에서 오공이 크게 노하다


p.194

“우리는 수 양제의 압정에 맞서 싸웠다. 당을 세운 이연과 다를 바가 없거늘, 어째서 우리는 역도逆盜로 몰려 죽어야만 했단 말이냐. 대성이라면 원수를 갚아다오.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게...”


   이들 모두 무지기의 꾐에 넘어가 죽은 민중들이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무지기는 말을 잘하는 요물이다. 그는 항상 이치에 맞는 말을 한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중노동에 혹사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끌려가고, 난세가 찾아오면 빼앗기고, 기근이 일어나면 굶어죽는 민중의 삶. 민중의 삶은 원통함과 억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무지기는 바로 이런 민중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에 스며들어 민중들을 자각시켜 또 다른 난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무지기는 이러한 민중의 난이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무지기는 민중들의 원통함을 바탕으로 큰 난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죽은 민중들의 원통함으로 살아가는 요물이기 때문이다.

   원혼들이 지금 손오공/대성에게 접근하고 있고, 손오공은 이 원혼들로 인해 자아를 더욱 잃어가고 있다. 무지기가 물속에 잡혀 있어도 끊임없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윤회(輪廻, Saṃsāra) 때문이다.

   어쩌면 『요원전』은, 이러한 무지기의 윤회를 끊기 위한, 번뇌에 속박된 현상 세계인 차안(此岸, 이 언덕)에서 벗어나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인 피안(彼岸, 저 언덕)으로 가고자하는 장대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p.196

“소승은 하직 수행 중인 몸입니다만 독경讀經쯤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보리菩提라도 빌어주도록 하지요.”


   드디어 등장한 현장(玄奬) 스님! 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을 소개하는 p.200에서 하기로 한다.

   보리란 산스크리트 보디(Bodhi)를 음역한 말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참다운 지혜, 깨달음, 또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을 일컫는다. 이 보리를 얻은 뒤에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장이 망자들의 보리를 빌어준 것은 몸과 마음의 고뇌와 속박의 원인인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망자들의 해탈(解脫, mokṣa )을 기도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p.197

“이시 무진의보살 즉종좌기 편단우견 합장향불 이작시언 세존 관세음보살 이하인연 명관세음 불고무진의보살... 爾時 無盡意菩薩 卽從座起 偏袒右肩 合掌向佛 而作是言 世尊 觀世音菩薩 以何因緣 名觀世音 佛告無盡意菩薩...”


해석: 그 때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시되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되...


   망자들의 원한을 달래주기 위해 현장이 암송하는 것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제7권)의 제25품(品)인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法華經)』으로 불리는데 이 명칭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백련화(白蓮華)와 같은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제경(諸經)의 왕으로 생각되었고,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은, 불타(佛陀)는 아득하게 멀고 오래된 옛날부터 미래 영겁(未來永劫)에 걸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超越的存在)로 되어 있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모든 인간들이 부처의 깨달음을 열 수 있는 대도(大道, 一乘)를 보이기 위함이며, 그 대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위키백과 묘법연화경 참조) 『묘법연화경』은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클릭)에서 e-book으로 읽을 수 있다.

   『요원전』에서 현장이 독경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주된 내용은 ‘옮긴이註’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중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거나 생각하면 그 신통력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인데, 실제로 현장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우면서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긴다. 한 번은 『요원전』제99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다른 한 번은 『요원전』「서역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p.200

“아... 어찌된 영문일까... 머리가 맑아졌어... 그 무시무시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난 어찌 되었던 거지... 어째서 이런 곳에...”


   억울하게 죽은 망자들의 보리(菩提)를 빌어주기 위해 현장이 암송한 「관세음보살보문품」으로 손오공 또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야성(野性)을 제어하기 위해서 긴고아주를 외우고, 고통으로 인해 그 야성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반면, 『요원전』에서 현장의 독경은 망자들의 원혼으로 자아를 잃은 손오공이 고통을 벗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한다.



p.201

“저는 형주荊州에서 온 현장玄奬이라고 합니다. 겨우 전란이 가라앉아 상주相州를 순례하고 장안으로 들어가던 참입니다.”


   현장 스님에 대한 평가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요 변역가이며 불교학자”란 첸원중(錢文忠) 교수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에는 어떠한 과장도 들어가 있지 않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실상 『요원전』의 주인공이며, 왜 『요원전』이 『서유기』가 아니라 『대당삼장취경시화』를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현장이라는 인물에 담겨 있다. 그의 대한 평가는 차차 해나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장 스님의 탄생에서부터 상주를 지나기까지의 행적을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현장법사는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20년(600년)에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진(陳)이고 진류(陳留) 사람으로 한(漢) 나라 태구(太丘)의 현장이었던 중궁(仲弓)의 후손이다. (法師諱玄奘,俗姓陳,陳留人也。漢太丘長仲弓之後。)

   사남매 중 막내였는데 둘째 형인 장첩(長捷)은 먼저 출가하여 동도(東都, 洛陽)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고 있었다. 현장이 능히 법을 가르치고 전할 만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절로 데리고 가서 경전(經典)을 외우고 익히게 했다. (其第二兄長捷先出家,住東都淨土寺。察法師堪傳法教,因將詣道場,誦習經業。)

   현장은 13세에 대리경(大理卿) 정선과(鄭善果)의 특채로 승려로 뽑혔다. 이후 경 법사(景法師)에게 『열반경(涅槃經)』을,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는데 한 번 들은 것은 다 알았으며, 두 번 본 뒤에는 다시 의심이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경탄했다. 그래서 법좌(法座)에 올라 그대로 강술하도록 하니 읽는 억양이나 해석하는 표현이 모두 스승과 똑같았다. 그의 훌륭한 소문과 명성은 이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一聞將盡,再覽之後,無復所遺。眾咸驚異,乃令昇座覆述,抑揚剖暢,備盡師宗。美問芳聲,從茲發矣。時年十三也。)

   그 뒤 수 양제가 암살당하고, 군웅들이 일어나 천하에 전란이 끊이지 않자 현장은 형에게 장안(長安)으로 가자고 했다. “이곳이 비록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긴 하지만 사람이 죽고 화란(禍亂)이 이처럼 심하니, 어찌 이곳을 지키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唐)의 황제[高祖]가 진양(晋陽) 사람들을 데리고 이미 장안에 계시며 천하 사람들이 부모처럼 의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님, 함께 장안으로 갑시다. (此雖父母之邑,而喪亂若茲,豈可守而死也!余聞唐帝驅晉陽之眾,已據有長安,天下依歸如適父母,願與兄投也。)”

   하지만 현장과 그의 형이 장안으로 갔을 때는 중원 전체가 혼란에 휩쓸린 터라 도성에는 수업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상대적으로 전란에서 벗어난 면촉(綿蜀, 四川)으로 떠났다. “장안에는 불법(佛法)을 강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촉나라로 가서 수업(受業)하도록 하십시다. (此無法事,不可虛度,願遊蜀受業焉。)”

   당시에는 천하가 기아로 허덕일 때였으나 그래도 촉(蜀) 지방만은 양식이 풍부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어 강좌에는 항상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현장의 이지(理智)와 큰 재주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오(吳)・촉(蜀)・형초(荊楚)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時天下饑亂,唯蜀中豐靜,故四方僧投之者眾,講座之下常數百人。法師理智宏才皆出其右,吳・蜀・荊・楚無不知聞)

   현장은 출가한 지 8년 후, 2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도에서 정식으로 수계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여름 안거(安居) 때에는 율(律)을 배워 5편(篇) 7취(聚)의 종지(宗旨)를 한 번에 터득했다. 익주(益州)에서 경론(經論) 연구를 다 마치고 법사는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뛰어난 종지를 배울 생각이었으나 법률 조식(條式)에 어긋나기도 하고 또 형의 만류도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即以武德五年於成都受具,坐夏學律,五篇七聚之宗,一遍斯得。益部經論研綜既窮,更思入京詢問殊旨。條式有礙,又為兄所留,不能遂意)

   이에 현장은 몰래 상인들과 더불어 일행이 되어 배를 타고 3협(峽)을 거쳐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서 형주(荊州)의 천황사(天皇寺)에 이르렀다. 이곳의 승려나 속인들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이던 터라 모두들 이렇게 오신 김에 설법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乃私與商人結侶,汎舟三峽K,沿江而遁。到荊州天皇寺,彼之道俗承風斯久,既屬來儀,咸請敷說。)

   강의가 끝나자 다시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선덕(先德)들을 찾아 물었다. 먼저 상주(相州)에 이르러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또 조주(趙州)에 가서는 도심(道深) 법사를 뵙고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罷講後,復北遊,詢求先德。至相州,造休法師,質問疑礙。又到趙州,謁深法師學《成實論》)

   『요원전』에 첫 등장한 현장은 바로 이 시기의 현장이다. 첫 등장에서 현장은 “수행중인 몸”이라며 자신을 한껏 낮추었지만, 그의 명성은 위에 기술한 대로 오(吳)・촉(蜀)・형초(荊楚) 지방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충분히 안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장은 불교에 대한 학구적・종교적인 열망으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인도로 기어이 간다. 바로 그 때문에 중국의 불교(와 한국과 일본의 불교)는 더욱 풍요로워졌으며, 부가적으로 장쾌한 신마소설(神魔小說) 『서유기』를 읽을 수 있게 됐다.



p.203

“두건덕의 잔당으로 당에 반기를 든 유흑달劉黑闥과 한패인 홍해아紅孩兒라는 녀석이외다. 나이는 젊지만 상당히 만만찮은 녀석이었지요. 이제 장안으로 호송되면 아마 참수될 겁니다.”


   ① 유흑달이 두건덕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8에 나와있다. “유흑달은 장남(漳南)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날래고 용감하며 교활하였는데, 두건덕과 잘 지냈으며, 뒤에 도적떼가 되어, 학효덕, 이밀, 왕세충을 돌며 섬겼다. (...) 왕세충이 유흑달로 하여금 신향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당시 이세적은 위징과 함께 두건덕에게 투항한 상태였다)이 그를 쳐서 포로로 잡아 두건덕에게 바쳤다.” 유흑달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1회 고아현 항목(p.037) 참조.

   ② 드디어 홍해아가 등장했다. 홍해아는 『요원전』에서 현장과 오공의 뒤를 숨이 막히게 쫓는, 참으로 지긋지긋하면서도 애처로운 캐릭터이다. (무려 85회까지 등장한다.) 『요원전』에서는 홍해아와 관련한 서브 캐릭터들이 마구 등장해 『요원전』의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이는 『서유기』에서도 그렇다. 『서유기』는 대부분이 단발성 캐릭터와 상황의 연속으로, 마치 게임에서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게임 내러티브 방식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연속성을 지닌 캐릭터가 바로 홍해아이다. 홍해아는 40~43회에 걸쳐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지만, 홍해아의 삼촌인 여의진선(如意眞仙)이 53회에, 59회~61회에 홍해아의 어머니인 나찰녀(羅刹女)와 우마왕(牛魔王)이 등장한다. 또 우마왕은 손오공의 의형제로 3회와 4회에 걸쳐서 등장하니 이정도면 『서유기』의 중심 플롯을 지탱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풀어나가기로 한다.



p.206

“나리, 이제 곧 삼문협三門峽의 난소難所에 들어서는뎁쇼.”


   p.202에서 교위의 말을 보면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지금 황허[黃河]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뱃사공의 말을 보면 이들은 창장[長江, 陽長江]에 있다. 삼협은 창장에 있는 쥐탕샤[瞿塘峽, 구당협], 우샤[巫峽, 무협], 시링샤[西陵峽, 서릉협]의 세 협곡을 말한다.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펑제[奉節, 봉절]에서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이창[宜昌, 의창]에 이르는 사이에 있으며, 옛날부터 항해가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며 총 길이가 204km에 달한다. 난소는 이창의 옛 이름을 말하므로, 이들은 황허를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창장을 거슬러 오르는 셈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루트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먼저 삼문협을 지나 난소에 들른 후 창장을 계속 따라 내려가다가 산양독(山陽瀆)을 타고 화이허[淮河, 淮水]에서 통제거(通濟渠)를 이용, 황허로 빠져서 거슬러 올라가 광통거(廣通渠)를 이용해 장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런 루트를 사용할 바에는 차라리 육로가 낫겠다. 엄청난 물량도 아니고, 고작 죄수 한 명에 야인 하나를 호송하는데 이런 불합리한 루트를 이용할 이유는 없다. 그냥 황허와 창장을 합쳐버린 모로호시 다이지로 선생의 대륙적 기상이라 퉁치고 넘어가도 무방할 듯하다.


수 대운하 지도



p.215

“제... 제기랄... 하백河伯... 용왕龍王... 아니면 하다못해 그 어떤 요물이라도 좋다... 나의... 나의 이 원한을 풀어다오... 그리 하면 내 오장육부를 바칠 테니... 제기랄... ”


   하백과 용왕은 모두 물의 신이다. 둘 다 『산해경』에 기록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소박한 모습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하백은 음탕하고 탐욕스런 강의 신이며, 용왕은 사해바다를 다스리는 바다의 신이다. 물론 둘 다 물의 신이므로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거처를 마련해놓고 살고 있다.

   『서유기』에서도 하백과 용왕이 등장하는데, 하백은 46회에 영감대왕(靈感大王)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용왕은, 2회에서 손오공에게 삥을 뜯기고, 10회에선 승상 위징(魏徵)에게 목이 베이며, 14회에선 욱하고 뛰쳐나온 손오공을 달래서 다시 삼장법사에게 돌아가도록 권유하기도 하지만, 43화에선 외질 소타룡(小鼉龍)이 친 사고를 수습하고, 45회에선 도가와 불가의 법력대결로 끌려나오며, 63회에선 잘못 들인 사위 때문에 온 집안이 깡그리 도륙당한다.

   『요원전』에서는 이런 깊은 원한으로 무지기가 응답을 하는데, 무지기는 황허 밑바닥에 묶인 무지기이기도 하지만, 제천대성의 칭호를 내려 받은 손오공이기도 하다. (물론 무지기는 황허에서 사로잡혔다는 고사는 없지만, 수괴이기 때문에 용왕과 같이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 저주로 두 무지기가 응답하고 일어선다.



p.226~227

원한으로 불러낸 무지기와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왕 교위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제괴지이』「요괴잉어[妖鯉, 요이]」편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금초(金焦)라는 사내가 굉욱(轟郁)을 죽이고 양식어장을 빼앗자, 굉욱은 잉어로 변해 금초의 잔칫상에 올라 기어이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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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 오행산五行山의 장章


제5회 - 쌍차령雙叉嶺에서 괴동怪童이 범을 잡고 단두파斷頭坡에서 교위校尉가 수레를 멈추다


p.165

“모르는 일이야. 화과산과 우리 이가촌 뒤편 쌍차령雙叉嶺은 그 막이 맞닿는 산이 아닌가.”


   쌍차령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서천으로 경을 구하러 떠나는 길에서 여섯 번째 재앙과 환난을 당하는 곳이다. 아직 손오공을 비롯한 세 제자들을 만나기 전인 상황으로 장안(長安)을 떠날 때 따라온 두 종자들이 요괴들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광경을 목격한 곳이기도 하다. 『요원전』에서는 화과산이 쌍차령과 맞닿아 있다고 했는데, 『서유기』에서는 쌍차령은 (손오공이 석가여래에게 벌을 받고 있는) 오행산과 맞닿아 있다. 삼장법사는 이곳에서 사냥꾼 진산태보(鎭山太保) 유백흠(劉伯欽)을 만나 호랑이[寅將軍]에게 잡아먹힐 뻔한 고난에서 벗어나고, 또 손오공을 만나게 된다. 『서유기』에서 묘사한 쌍차령은 다음과 같다.


寒颯颯雨林風, 響潺潺澗下水。 香馥馥野花開, 密叢叢亂石磊。 鬧嚷嚷鹿與猿, 一隊隊獐和麂。 喧雜雜鳥聲多, 靜悄悄人事靡。 那長老, 戰兢兢心不寧; 這馬兒, 力怯怯蹄難舉。

   차가운 나무숲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아찔한 계곡에는 시냇물이 무섭게 흘러내린다.

   향기로운 들꽃이 여기저기 활짝 피고, 겹겹으로 포갠 바위 더미가 아찔하게 솟구쳤네.

   시끄럽게 우짖는 사슴하며 원숭이 떼, 이리 뛰고 저리 뛰노는 향노루하며 고라니의 무리.

   어지럽게 지저귀는 산새 소리에, 인적은 하나 없이 적막하구나.

   삼장 법사 금선 장로 불안하여 전전긍긍, 끌려가는 짐승도 겁먹고 앞발굽을 머뭇거리네.



p.166

“이 유백흠이라는 사내는 ‘진산태보’라는 별명을 지닌 이 마을의 사냥꾼이랍니다. 쌍차령을 자기 안마당처럼 돌아다니며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아 생계를 잇는 사냥꾼으로서 그 솜씨는 이 부근에서 제일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사내...”


   ‘진산태보(鎭山太保)’라는 뜻은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鎭山, 主山]을 지키는 태보[벼슬아치, 관리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유기』13회와 14회에 등장하는 유백흠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그 이유는, 삼장법사가 아직 세 제자들을 만나기 전, 이 제자들의 역할, 즉 삼장법사를 재앙과 환난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또한 제자 중 하나인 손오공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유백흠은 호랑이를 “들고양이[山貓]” 정도로 치부하면서 사냥해서 잡을 정도의 무예와 담력을 지닌, 일명 상헌터라 할 수 있다.


이런 느낌? (윤태호 作 『미생』에서 인용)


   『서유기』에서 유백흠은 어느 정도 삼장법사와 동행하지만, 국경 근처에 이르자, 호위를 포기하는데, 이로 보아 유백흠의 캐릭터는 실제 역사에서 현장스님이 당(唐)의 국경, 옥문관(玉門關)을 벗어날 때 큰 도움을 주는 호인(胡人) 석반타(石磐陀)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석반타의 큰 도움으로 현장스님은 옥문관을 벗어나지만, 그 직후 석반타는 동행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석반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1권, 『현장 서유기(玄奘西游记)』 제5강에 나오며 『요원전』에서도 87회~100회에 걸쳐 등장한다.

   참고로,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창조한 유백흠은 『제괴지이』「구도왕(拘屠王)」의 어설픈 구도왕 왕이와 닮아 보인다.




p.167

“앗, 이런! 범이다! 이 발자국 크기로 봐서는 아무리 나라도 당할 재간이 없겠어. 거기다 가깝지 않은가!”


   『요원전』에서는 유백흠이 호랑이 발자국을 보고 꽁무니를 치는 것으로 나오지만 『서유기』에서 유백흠은 삼장법사 앞에서 호랑이 사냥을 한다. 『서유기』에서 유백흠과 호랑이의 일대격전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怒氣紛紛,狂風滾滾。怒氣紛紛,太保沖冠多膂力;狂風滾滾,斑彪逞勢噴紅塵。那一個張牙舞爪,這一個轉步回身。三股叉擎天幌日,千花尾擾霧雲飛。這一個當胸亂刺,那一個劈面來吞。閃過的再生人道,撞著的定見閻君。只聽得那斑彪哮吼,太保聲狠。斑彪哮吼,振裂山川驚鳥獸;太保聲狠,喝開天府現星辰。那一個金睛怒出,這一個壯膽生嗔。可愛鎮山劉太保,堪誇據地獸之君。人虎貪生爭勝負,些兒有慢喪三魂。

   싸움터 분위기는 노기등등, 모진 돌개바람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데,

   노기등등한 싸움터에 사냥꾼은 뚝심을 뽐내고, 미치광이 돌개바람에 얼룩무늬 호랑이는 기세를 뽐내고 티끌을 뿜어낸다.

   저편이 아가리를 쩍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앞 발톱 춤을 추니, 이편은 빙그르르 몸을 돌려 잽싸게 피한다네.

   하늘을 떠받든 세 갈래 강철 작살, 햇볕 아래 눈부시게 빛나니, 수천 가닥 얼룩진 꼬리가 안개를 휩쓸고 구름장을 흩날린다.

   저편의 작살은 앙가슴을 마구 찔러들고, 이편의 송곳니와 두 발톱은 면상을 할퀴어 한입에 삼켜버리려 한다.

   선뜻 돌아가는 몸짓에 잘 피해내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으나, 정면으로 마주쳤다가는 염라대왕을 만나보기 십상이라네.

   들리는 것이라곤 얼룩 범의 포효성에, 진산태보의 사나운 기합 소리,

   얼룩 호랑이의 포효성에 산천초목이 흔들려 쪼개지고, 날짐승 길짐승이 놀라서 달아나며,

   진산태보의 사나운 기합 소리, 천궁을 활짝 열고 일월성신 나타내라 호통을 친다.

   저편의 금빛 눈동자가 살기를 드러내면, 이쪽은 대담한 배짱에 노여움이 치솟는다.

   솜씨 좋은 진산태보 유백흠이 여기 있다면,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산군이 저기 있으니,

   사람과 호랑이가 목숨을 탐내어 승부 다투는데, 자칫 굼뜬 동작 보였다가는 삼혼칠백을 몽땅 날릴 판이라네.



p.168~171

손오공과 호랑이와의 사투


   손오공과 호랑이와의 사투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서유기』 13회에서 유백흠이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서유기』 14회에도 손오공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여의봉으로 단 한방에 머리를 후려갈겨 박살을 내버리지, 이렇게 사투를 벌이지는 않는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호랑이를 단매에 때려잡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天那!天那!劉太保前日打的斑斕虎,還與他鬥了半日;今日孫悟空不用爭持,把這虎一棒打得稀爛。正是強中更有強中手!」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 지난번 유태보가 얼룩무늬 호랑이와 싸웠을 때도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겨우 때려잡았는데, 이제 손오공은 엎치락뒤치락 드잡이질도 않고 몽둥이질 한 번에 호랑이를 묵사발로 만들다니, 이야말로 ‘강자 중에 더 힘센 강자가 있다’는 그 말이 맞는구나.”


   손오공은 잡은 호랑이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데, 이것은 『요원전』에서도 같다. 참고로 p.170 네 번째 컷에서 손오공이 호랑이 목을 뒤에서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건 『수호전』 22회에서 무송(武松)이 경양강(景陽崗)에서 술에 취한 몸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모습과 흡사하다. 무송은 “왼손으로 호랑이의 정수리 가죽을 꽉 움켜잡고, 철퇴만 한 오른 주먹을 슬그머니 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정신없이 내리쳤다”고 했다. 무송은 『제괴지이』「창귀(倀鬼)」편에도 보이는데, 거기에서도 호랑이를 때려잡으며 주인공인 아귀(阿鬼, 燕見鬼)를 구해주는 역을 맡았다.




p.179

“이 지경까지 자아를 잃었을 줄이야... 별 수 없지. 지금은 일단 현녀玄女 쪽을 찾아가볼까...”


   ‘현녀’라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구천현녀(九天玄女)’일 것이다. 구천현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수호전』 41회에서 송강(宋江)이 구천현녀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천서(天書)를 받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통비공이 이야기하는 현녀는 『평요전(平妖傳)』의 구천현녀일 것이다.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수호전』의 구천현녀가 서왕모에 가까운 권위 있는 모습의 이미지라면, 『평요전』의 구천현녀는 전사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닌다는 차이점이 있다. 자세한 것은 오공이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는 10회에서 기술하는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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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 이빙은 다시 한 번 대성大聖을 상대하고 신군神君이 신쇄神鎖로 요원妖猿을 묶다


p.122~123

무지기의 이미지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창조한 무지기는 중국의 신화와 소설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이미지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퀴클롭스(Κύκλωψ, Kuklōps), 더 소급하자면, 호메로스(Ὅμηρος, Hómēros)의 『오뒷세이아(Ὀδύσσεια, Odýsseia)』 제9권에 등장하는 퀴클롭스 폴리페모스(Πολύφημος, Polyphēmos)의 이미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특히 p.074에서 무지기의 첫 등장이 ‘동굴 속, 외눈박이 거인, 식인’의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거의 확실하다.


벌떡 일어서더니 내 전우들에게 두 손을 내밀어 한꺼번에

두 명을 마치 강아지처럼 움켜쥐더니 땅바닥에 내리쳤소.

그러자 전우들의 골이 땅바닥에 흘러내려 대지를 적셨소.

그러더니 그자는 그들을 토막 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산속에 사는 사자처럼 내장이며 고기며

골수가 들어 있는 뼈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소.

- 천병희 역 『오뒷세이아』 제9권 288행~293행 -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퀴클롭스 상



요크셔 박물관의 퀴클롭스


   하지만,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머드멘』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요원전』의 무지기가 『머드멘』의 아엔과 동일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머드멘』에서 아엔은, 인류의 조상 키우나기에게 불을 주어 지혜를 갖게 했지만, 그 때문에 키우나기와 나미테를 숲에서 쫓겨나게 했다. 즉, 아엔은 성서의 뱀, 사탄 같은 존재다. 아엔은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의 삶, 즉 숲을 파괴하는 악한 존재이지만,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원주민들에게 카고(재물)을 내리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엔은 인류에게 풍요를 주는 대신 낙원에서 몰아내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이다. 『요원전』의 무지기 또한 민중에 대한 억압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민중의 원통함 속으로 스며들어 그 원한을 바탕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악귀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란은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부른다. 이런 면에서 무지기의 존재 역시 이율배반적으로 볼 수 있다.

 

하야토, 나미코 & 아엔


코도와 & 아엔


   『머드멘』에서 아엔의 반대급부로 “위대한 가면(혹은 위대한 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요원전』에서 무지기의 반대급부는 누가 될까? 불법(佛法)? 아니면 또 다른 원숭이 신[外道]?


   



p.126

“이 이빙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과거 우왕께서 무지기를 옭아매셨던 그 사슬로 요괴를 붙들 수 있도록 해주소서.”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우왕(의 명을 받은 경진庚辰)이 무지기의 목에 큰 쇠사슬을 꼬았다(頸鎖大索)’는 고사가 있지만, 이랑진군에게도 그에 걸맞는 신화/전설/이야기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맥망관초본고본잡극(脉望館鈔本古今雜劇)』에 실려 있는 네 편의 희극 중 「이랑신쇄제천대성(二郞神鎖齊天大聖)」, 「관구이랑참건교(灌口二郞斬健蛟)」, 「이랑신사쇄마경(二郞神射鎖魔鏡)」 세 편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물속에 살던 요괴를 잡은 이랑신을 중심으로 서술됐다.



p.137

“상제上帝가 대성 어르신을 붙들고자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치고 있는 것 같구먼.”


   상제는 고천상성 대자인자 옥황대천존 현궁 고상제(高天上聖大慈仁者玉皇大天尊玄穹高上帝), 간단하게 줄여 옥황상제를 말한다. 도교의 신은 너무 많아 목록을 적는 것도, 위계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지만, 최고신의 위계는 확고부동하게 정해져있다. 도교의 신령 가운데 최고 지존은 ‘삼청(三淸)’의 세 천신(원시천존元始天尊, 영보천존靈寶天尊, 도덕천존道德天尊)과 이들을 보필하는 ‘사제(四帝)’이다. 사제 중 가장 존귀하고 숭앙받는 이가 바로 옥황상제인데, 천도를 주재하고,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주재하는 최고 신령이다.


   천라지망이란 “하늘의 그물, 땅의 그물”이라는 뜻으로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경계망 또는 재액”을 비유할 쓰는 말이다. 『서유기』5회에서, 태백금성의 중재로 무단이탈의 죄도 사해주고 제천대성이란 그럴듯한 직함까지 얻은 손오공이, 서왕모(西王母)의 반도복숭아를 다 따먹고 태상노군(太上老君, 道德天尊)의 금단을 몽땅 훔쳐 먹은 후 반도대회에 쓸 술과 음식을 모조리 훔쳐 먹는 대형 사고를 치고 화과산으로 도망간 후, 상황을 보고받은 옥황상제가 노발대발 분노하며 손오공을 잡으라는 명을 내리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인데, 조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玉帝大惱。即差四大天王,協同李天王並哪吒太子,點二十八宿、九曜星官、十二元辰、五方揭諦、四值功曹、東西星斗、南北二神、五嶽四瀆、普天星相,共十萬天兵,布一十八架天羅地網下界,去花果山圍困,定捉獲那廝處治。

   옥황상제는 노발대발, 그 즉시 사대 천왕(四大天王)을 출동시켜 탁탑 이천왕과 나타 삼태자 부자를 돕게 하고 이십팔수(二十八宿), 구요성관(九曜星官), 십이 원신(十二元辰), 오방게체(五方揭諦), 사치공조(四值功曹), 동서성두(東西星斗), 남북이신(南北二神), 오악사독(五嶽四瀆), 보천성상(普天星相)을 지명하여, 도합 10만 천병(天兵)을 이끌고 하계로 내려가, 화과산을 천라지망 열여덟 틀로 물샐틈없이 포위해 놓고 그 요망한 원숭이 놈을 기어코 잡아 처단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詩曰:

天產猴王變化多,偷丹偷酒樂山窩。只因攪亂蟠桃會,十萬天兵布網羅。

   이런 시구가 또 있다.

   저절로 태어난 원숭이 임금 변화무쌍해,

   금단을 훔쳐 먹고 술을 훔쳐 제 소굴에서 즐기니,

   반도연회 큰 잔치를 어지럽힌 죄로, 십만 천병이 천라지망을 펼치는구나.



p. 145

“이런... 큰일이다. 저것은 우왕이 만들어 이랑진군에게 전해지던 박요쇄縛妖鎖아닌가!”


   『관지문정(灌志文征)』 권5 『이공자치수기(李公子治水記)』에 실린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빙과 매산칠성이 해마다 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괴롭히는 얼룡을 잡았을 때, 때마침 어린 손자를 얼룡의 제물로 바칠 뻔했던 노파를 만났는데, 그 노파가 쇠사슬을 전해주자 이랑이 그 쇠사슬로 얼룡을 묶어 복룡관 돌기둥 밑의 깊은 못에 가두어 그때부터 다시는 수해로 인한 우환이 없었다고 한다. (終复擒之于新津縣童子堰。方返至王婆岩,遇前日茅屋泣孫老嫗,持鐵鎖鏈來謝贈之。二郎即以此鎖鏈鎖孽龍,系之于伏龍觀石柱下水深潭中,后遂無水患。)

   위앤커는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에 의하면 그 노부인은 바로 관음보살이었으며 스스로를 왕파(王婆)라 불렀다고” 했는데, 중국의 고대 신화와 도교와 불교가 서로 섞여있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로 볼 수 있겠다.

   이 이야기는 『서유기』 47회~49회에 걸친 차지국(車遲國) 원회현(元會懸) 진가장(陳家莊)과 통천하(通天河)의 영감대왕(靈感大王)과의 이야기로 차용되기도 했다.



p.148

“이것은 통비通臂! 그런 재주를 부리는 걸 보니 역시 요물이었나!”


   드디어 등장한 통비공! 하지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으니, 통비공에 대한 이야기는 제7회로 미루기로 한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4회에 등장한 통비공은 캐릭터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일개 수상쩍은 노인네’에 불과했는데, ‘메인 스토리와 관계없는 지점(5회 초반)에서 슬쩍 움직이니 캐릭터가 확립’된 특이한 경우라고 후지타 카즈히로와(藤田和日郎)의 대담에서 밝힌 바 있다. 이 대담은 『요원전』7, 8권에 권말부록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p.153

“어찌 보고 자시고, 싸움보다도 홍수 때문에 뭐 남아난 게 없네 그려. 원길이가 정말로 고아현을 격파했나?”


   『자치통감』권189와 권190을 보면, 621년 “12월 정묘일(15일)에 진왕 이세민과 제왕 이원길에게 명령을 내려 유흑달을 토벌”하라는 당고조의 조칙이 있었고, 622년 3월 “임진일(11일)에 유흑달은 고아현을 좌복야로 삼”았으며, 그 후 유흑달이 패배, 유흑달은 돌궐로 도망하고 하북은 평정되었다. 도망한 유흑달이 돌궐을 이끌고 산동을 노략질한 게 622년 “6월 신해일(1일)”이라고 적혀있으니,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제천대성의 칭호를 받고 긴고아를 쓴 때와 무지기가 깨어나 다시 물속에 묶인 때와 고아현의 죽음은 622년 3~6월 사이의 홍수가 범람한 어느 날인 듯하다. 물론 역사와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라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

   고아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유흑달이 죽을 때 고아현의 이름이 한 번 언급된다.

   『요원전』에서는 이세민이 이원길을 도우러 달려왔으나 홍수의 도움으로(요원의 도움으로) 도울 일이 없었다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것은 이와는 다르다. 『자치통감』권191을 보면, 624년, 이세민이 돌궐과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이원길에게 자신과 함께 싸움에 임할 수 있는지(선봉에 나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원길이 두려워하니, 이세민은 “네가 감히 나가지 못한다면 나는 마땅히 혼자서라도 가겠으니, 너는 여기에 남아서 이를 보아라.”라고 호통을 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고종의 뒤를 잇는 이세민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어느 정도 곡필이 들어간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원길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이런 초월적 존재들의 전투(무지기-이빙)가 인간의 역사(이원길-고아현)에 영향을 주는 내용의 이야기를 『공자암흑전』「공자가 괴력난신을 말하다」편에서도 그린 적이 있는데, 공자[孔丘]와 양호(陽虎)의 싸움으로 치우(蚩尤)가 깨어나고 그로 인해 수극토(水克土)의 형국으로 홍수가 일어나 오(吳)나라와 제(齊)나라의 싸움에서 오나라가 승리를 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요원전』이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Ίλιάς, Iliad)』와 『오뒷세이아』의 자리에 놓이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p.154

“오-공- 아무데도 없구나... 역시 죽었나...?”


   아쉽게도 신양선인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서유기』에서 수보리조사(須菩提祖師)와 거의 흡사하다. 수보리조사는 손오공에게 성과 이름을 내려주고 장생(長生)의 도리와 72가지 변화 술법, 그리고 한 번에 십만 팔천 리를 갈 수 있는 근두운(筋斗雲)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1회와 2회에 걸쳐 등장한 이후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유기』에서 수보리조사는 도가의 선인이지만, 원래는 인도의 고승 수부티Subhūti의 높임말로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로, 천성이 자비심이 많아 출가하여서도 늘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수보리조사가 손오공을 추방했을 때 “앞으로 네가 어떤 화란을 일으키고 흉악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내 제자였다는 소리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만약 네놈의 입에서 일언반구라도 그런 말이 나왔다가는, 내 당장 알아차리고 가서 네놈의 원숭이 껍질을 몽땅 벗겨내고 뼈다귀를 바수어버릴뿐더러, 그 혼백을 십팔층 지옥에다 처박아 놓고 만겁(萬劫)의 세월이 지나더라도 두 번 다시 환생을 못 하게 만들어버릴 테다!” 하고 엄포를 놓지만, 손오공이 이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오공은 67회에서 타라장(駝羅莊)의 이노(李老)에게 자신이 수보리조사에게 도술을 배웠다는 것을 밝히지만, 아쉽게도(?) 수보리조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 더 들자면, 『수호전(水滸傳)』의 왕진(王進)의 역할과도 비슷하다. 1회에서 태위 고구(高俅)의 미움을 받아 몰래 도망하는 왕진은 사가촌(史家村)에 들러 후에 양산박의 108두령 중 한 명이 되는 사진(史進)을 가르친다. 『수호전』의 초반은 고구가 왕진을 이끌어내고, 왕진이 사진을 이끌어내며, 사진이 노지심(魯智深)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뒤에도 계속 등장하지만, 왕진은 이후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원전』에서도 신양선인은 손오공을 수렴동으로 끌어들이고 무지기를 만나게 한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비롯해, 이빙과 제천대성의 죽음(?)을 목격한 후 제천대성의 칭호를 받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이후의 역할은 통비공이 맡았다.

   굳이 『수호전』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원전』에 『수호전』의 인물들과 에피소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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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 오공은 항아리 속 천지를 들여다보고 이빙은 계곡에서 야인들을 사냥하다


p.076

“무지기無支奇... 그 이름은 이 노인네도 알고 있소. 먼 옛날 하夏를 개국했던 성국 우왕禹王께서 치수를 하실 깨 붙잡아 귀산龜山 아래 사슬로 꽁꽁 묶어 뒀다던 수괴水怪가 아니오? 『악독경』岳讀經이라 하는 책에서 본 적이 있소이다. 장강長江, 회수淮水의 물을 지배하며 온갖 들판의 넓이와 개울의 깊이에 통달했다던가...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p.004의 無支奇도 수정)


무지기・이빙・손오공・통비공


   무지기(無支祁)는 巫支祁・无支祁・巫支祗로 표기되는데, 『요원전』에서는 ‘기’자를 祁에서 奇로 바꾸었다. 『요원전』에는 차용한 캐릭터의 원래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경우가 가끔 보이는데, 그게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서유기』 47회와 99회에 나오는 일칭금(一秤金)은 『요원전』 74회부터 96회까지 등장하는 일승금(一升金)으로 글자가 바뀌었는데, 각 작품에서 칭秤과 승升이라는 단어에 맞게 이름을 해석하므로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무지기에 대한 기록은 『고악독경(古岳讀經)』제 8권에 나오는데, 『고악독경』은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67 「이탕(李湯)」에 실려 있다.


禹理水,三至桐柏山,惊風走雷,石號木鳴,五伯擁川,天老肅兵,功不能興。禹怒,召集百靈,授命夔龍,桐柏等山君長稽首請命。禹因囚鴻蒙氏、章商氏、兜盧氏、梨婁氏,乃獲准渦水神,名無支祁。善應對言語,辨江准之淺深,原隰之遠近。形若猿猴,縮鼻高額,青軀白首,金目雪牙,頸伸百尺,力逾九象,搏擊騰踔疾奔,輕利倏忽,聞視不可久。禹授之童律不能制;授之烏木由,不能制;授之庚辰,能制。鴟脾桓胡、木魅水靈、山襖石怪,奔號聚繞,以數千載,庚辰以戟逐去。頸鎖大索,鼻穿金鈴,徒准陰龜山之足下,俾准水永安流注海也。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세 번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렀는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며 돌이 부르짖고 나무가 울었으며 오백(五伯)이 시내를 끌어안고 천로(天老)가 병사들을 모아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가 노하여 천하의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기룡에게 명하여 동백 등의 산군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명령을 청했다. 우가 홍몽씨(鴻蒙氏)・장상씨(章商氏)・두호씨(兜盧氏)・이루씨(梨婁氏)를 가뒀기 때문에, 곧 회수(准水)와 와수(渦水) 사이에서 요물을 잡았는데 이름이 무지기(無支祁)라고 했다. (이 요괴는) 말을 잘하고 장강의 흐름과 회수의 흐름 가운데의 얕고 깊음을 가려낼 줄 알며, 벌판과 습지의 가깝고 먼 것을 가릴 줄 알았다. 생긴 것은 원숭이와 같은데 코가 움츠러들었고 높은 이마에 몸빛은 푸르고 머리는 희며 금처럼 반짝이는 눈에 눈처럼 하얀 이를 가졌다. 목을 길게 빼 늘이면 그 길이가 백 자는 되는데 힘은 코끼리 아홉 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세며 동작이 매우 빨라 잠깐 사이에 번득이며 듣고 보이는 것이 오래 가지 못했다. 우가 무지기를 동률(童律)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조목유(烏木由)에게 맡겼으나 다스리지 못했고, 경진(庚辰)에게 맡겼더니 다스릴 수 있었다. (경진이 일을 시작하자) 치비・환호・나무 도깨비・물의 정령・산의 요괴・돌 요괴들이 달려와 모여들기를 수천 년 동안이나 했는데 경진이 갈래진 창으로 쫓아냈다. (경진은 무지기의) 목에 굵은 사슬을 메고 코에는 금방울을 닳아 회수 북쪽의 구산(龜山) 기슭에서 항복시키니 회수를 좇아 영안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갔다.


   『고악독경』은 당(唐)나라 사람 이공좌(李公佐)가 쓴 필기집(筆記集), 즉 소설이다. 그러므로 무지기는 신화나 전설로 구전되어온 존재가 아니라, 저자의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허구인 존재이다. 위앤커(袁珂)는 『중국신화전설Ⅰ』에서 무지기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신화에 포함시켰으나, 각주에서 “이것은 소설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송원宋元시대에는 널리 민가에 유포되어 있었고 또 희극이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것이므로 여기서도 간단히 서술해 보았”다고 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또한 p.077~078에 걸쳐 『고악독경』에 관한 이야기를 “과연 이 이야기가 참인지 거짓인지...”하며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기』에도 무지기가 언급되는 장면이 있는데, 66회에서 찾을 수 있다. 소뇌음사(小雷音寺)의 가짜 석가여래에게 붙잡힌 삼장법사와 두 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손오공이 우이산(旴貽山) 빈성(蠙城)에서 대성국사왕보살(大聖國師王菩薩)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대성국사왕보살이 이런 말을 한다.


奈時值初夏,正淮水泛漲之時。新收了水猿大聖,那廝遇水即興,恐我去後,他乘空生頑,無神可治。

   요즈음 철기가 초여름이어서 회하에 홍수가 넘칠 때요, 또 근자에 수원대성(水猿大聖)을 새로이 항복시켰는데 그놈은 홍수철만 되면 기운을 뽐내니, 내가 이곳을 비운 틈을 타서 장난질을 치게 되면 그때는 어떤 신령도 그놈을 다스릴 길이 없을 것일세.


   흥미로운 점은 무지기가 손오공의 원형이라는 점이다. 루신(魯迅)은 “손오공이 무지기의 고사를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했으며, 리우위첸(劉毓忱)은 손오공의 이미지가 계(啓)가 신령한 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와 무지기의 고사, 그리고 황제(黃帝)에게 반기를 든 치우(蚩尤)와 형천(形天)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니까 『요원전』의 제천대성 무지기, 『고악독경』의 무지기, 『서유기』의 제천대성 손오공, 수원대성 등은 서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무지기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은 관계로, 일단 끊고 4회에서 다시 한 번 하는 것으로 한다.



p. 077

“먼 옛날 황제黃帝께서 퇴치하셨던 기라는 외발 짐승이나 노夒라는 원숭이도 그와 비슷한 요물이라고 하더이다.”


   ① 『산해경・대황동경(大荒東經)』에 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東海中有流波山,入海七千里,其上有獸,狀如牛,蒼身而無角,一足。出入水則必風雨,其光如日月,其聲如雷,其名為夔,黃帝得之,以其皮為鼓,橛以雷獸之骨,聲聞五百里,以威天下。

   동해(東海)의 가운데에 유파산(流波山)이 있는데, 바다로 7천 리 들어가 있다. 그 위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생김새가 소와 비슷하고, 푸른색 몸에 뿔이 없으며, 다리는 하나이고, 물을 드나들면 곧 반드시 비바람이 몰아친다. 그 빛은 마치 해나 달처럼 밝으며, 그 소리는 우레와 같은데, 그 이름은 기(夔)라 한다. 황제(黃帝)가 그것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의 뼈로 북채를 만드니, 그 소리가 5백 리 밖까지 들려, 천하를 떨게 했다.


『국어(國語)・노어(魯語)』에도 기에 대한 설명이 있다.


夔一足,越人謂之山繰,人面猴身能言。

   기는 발이 하나이며, 월(越)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산조(山繰)라고 부르는데, 사람의 얼굴에 원숭이의 몸을 하고 있으며, 말을 할 줄 안다.



기(夔)


   ② 노(夒)라는 짐승은 그 어원이 기(夔)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와 단옥재(段玉裁)의 주에 설명이 나와 있다.


貪獸也。一曰母猴,似人。

   (기는) 탐욕스러운 짐승이다. 모후라고도 하는데 사람과 흡사하다.


貪獸也。一曰母猴, 謂夒一名母㺅。

   (기는) 탐욕스러운 짐승이다. 모후라고도 하는데, 노를 모후(=기)라고 말한다.


   ③ 모로호시 선생은 무지기의 奇를 『산해경・서산경(西山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궁기(窮奇)’라는 짐승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夔)와 기(奇)는 전혀 다른 것임이 확실하다.


「西山經」: 曰邽山。其上有獸焉,其狀如牛,蝟毛,名曰窮奇。

   규산(邽山)이라는 곳에는, 그 위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그 생김새가 소와 비슷하고, 고슴도치 털로 덮여 있으며, 이름은 궁기(窮奇)라 한다.


궁기(窮奇)


「海內北經」: 窮奇狀如虎,有翼,食人從首始,所食被髮,在蜪犬北。

   궁기(窮奇)는 생김새가 호랑이와 비슷하고, 날개가 있으며, 사람을 잡아먹을 때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잡아먹히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으며, 도견(蜪犬)의 북쪽에 있다. 


궁기(窮奇)


   * 기(夔)와 노(夒)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사다리님의 블로그(클릭)에서 확인 바랍니다.



p.082

“그자가 바로 네 어미의 남편이었던 손해라는 사내다.”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원정은 요하(遼河), 요동성(遼東城), 평양성(平壤城), 살수(薩水)에서 큰 전투가 있었는데 p082~083에 묘사된 그림으로 보아 손해는 요동성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요동성은 수문제와 수양제에 걸친 4번의 고구려 원정(598~614)에서 단 한 번도 침략을 불허한 무적의 요새였다.



p.092

“그자는 미후왕美猴王이다. 황건의 난 당시 제천대성의 칭호를 이어 싸우던 자였지.”


   미후왕(美猴王)이란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복지동천(福地洞天) 화과산 수렴동(花果山水簾洞)’을 찾아낸 후 원숭이들에게 왕으로 추대됐을 때 불린 이름이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은 미후왕, 제천대성, 필마온, 손행자(孫行者) 등이 있는데 『요원전』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이 이름들을 각각의 캐릭터로 분산시키고 있다. 아마도 『요원전』의 마지막에서나 이들 이름들이 손오공으로 수렴될 것이라 예상하는데, 정말 끝은 볼 수 있을지 독자로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황건의 난(黃巾之亂)은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난 농민대반란이다. 황건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시작으로 인해 한제국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 미후왕이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도통 모르겠는데, 어쩌면 무지기가 손오공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일 수 있겠다. 무지기는 “말을 잘하(善應對言語)”기 때문이다.



p.100

“오공, 모자를 잊었구나. 그것까지 다 갖추지 않으면 제천대성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느니라. 자, 모자를 쓰고 어미의 원수를 갚도록 해라.”


   오공이 머리에 쓴 것은 긴고아(緊箍兒)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욱하는 성격을 컨트롤하기 위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삼장법사에게 준 모자[僧帽] 안의 금테를 가리킨다.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8회에서 석가여래釋迦如來가 관세음보살에게 ‘경을 가지러 오는 사람에게 주라’고 준 불보佛寶 중 하나이다.) 손오공이 모자를 씀과 동시에 삼장이 긴고아주(緊箍兒呪)를 외우자, 머리를 죄여오는 고통에 모자를 죄 뜯어버려서 금테만 남았다. 관세음보살은 16회 흑풍대왕(黑風大王)에게는 금고아(禁箍兒)를 씌웠고, 42회 성영대왕(聖嬰大王) 홍해아(紅孩兒)에게 금고아(金箍兒)를 씌었다. 후에 손오공은 투전불승(鬪戰佛僧)이, 흑풍대왕은 수산대신(守山大神)이, 홍해아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됐는데, 모두 불가(佛家)와 관련됐으니, 긴고아는 불보임에 틀림없다.

   『요원전』에서 긴고아는 제천대성 무지기의 힘을 끌어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망자들의 원한을 들어야하기에,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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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46

제2회 - 화과산花果山에서 신선申仙이 이치를 논하고 수렴동水簾洞에서 요마妖魔가 모습을 드러내다


   신선이 神仙이 아닌 申仙으로 적힌 것은 1화에 나온 신양선인申陽仙人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수렴동에 대한 설명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p.052

“아마도 야인이겠지. 녀석들의 소굴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p.050~051에서 묘사한 야인들의 모습은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1983년에 발표한 「진수의 숲(鎮守の森)」에서 묘사한 두옥(頭屋, 만화에서는 인신공양을 위한 산 제물을 가리킴)의 모습과 비슷하다. 「진수의 숲」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산으로 도망치는데, 열매나 나물, 때로는 사냥으로 생명을 부지하다가 결국 인육을 먹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멧돼지나 사슴보다 사냥하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인성은 점점 사라지고, 짐승 혹은 귀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간다.

   뒤에 나오지만, 『요원전』에서 묘사한 야인들 또한 민란 혹은 압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점점 야생으로 변한 존재들이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묘사한 ‘야후(yahoo)’와 비슷한 존재들로 보인다.)




p.053

“사실 이유라기보다는 내 고집이지. 나는 예전에 하북에서 두건덕 장군을 섬겼단다... 그러다가 장군께서 패망하신 뒤로는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고 있었지. 이미 천하가 당의 것임은 자명해 보였어. 그렇다고 하여, 아니 그렇기에 더욱 더 이제 와서 당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었단다.”


   수나라 말기에 여러 군웅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협(俠)’의 기치를 드높인 이는 두건덕(竇建德)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7의 기록을 보면, “나(두건덕)는 수의 백성이고 수는 우리의 군주이다. 지금 우문화급이 시역을 하였으므로 바로 나의 원수니, 내가 토벌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양제를 죽인 우문화급을 쳤고, “성으로 들어가서 우문화급을 산 채로 잡아서 먼저 수의 소(簫)황후를 알현하였는데, 말하면서 모두 칭신(稱臣)하였으며 소복을 입고 양제에게 곡(哭)하면서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그는 하(夏)라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황제를 칭한 것은 아니었다), 스러져가는 국가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바친 유일한 군웅이기도 했다.

   또한 “두건덕은 매번 싸워서 승리하고 성곽에서 이길 때마다 얻은 재물은 모두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갖는 것이 없었다”는 기록과 “두건덕이 명주(洺州)에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니 그 경계 안에서는 도적이 없었고, 상인과 여행객들이 들에서 잠을 잤다”는 기록으로 보아, 두건덕 주변에는 진심으로 따르는 장수와 백성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621년 당(唐)의 이세민이 왕세충과 사수(汜水)에서 일전을 벌일 때, 왕세충을 구원하러 온 두건덕을 사로잡자 이세민은 두건덕을 당의 수도 장안(長安) 길바닥에서 참수했다. 항복한 왕세충을 서인으로 삼고 촉(蜀에) 가서 살게 한 처사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일이다. 이세민은 당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두건덕이라는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두건덕 휘하의 장수들과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당의 처사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에 (훗날 당 개국공신이 되는) 이세적(李世勣)이 두건덕에게 투항한 후 다시 당으로 투항했을 때, 인질로 잡혀 있던 이세적의 아비를 두건덕은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줬다. 또한 그는 이연과 연합했을 때 인질로 잡고 있던 이연의 누이 동안・장공주를 조건 없이 보내주었다. 그렇게 인의(仁義)로 상대를 대했는데도, 최소한 왕에 어울리는 죽음조차 허락해주지 않은 당을 이빙은 절대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p.056~059


   확원들이 사는 화과산의 모습은 『제괴지이』「이계록(異界錄)」편에 나오는 현도(玄都)와 느낌은 비슷한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현도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이곳으로 빨려 들어온 인간은 잠시 동안 고치 같은 상태로 지냅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원래의 사람 같은 모습이 되어 고치에서 깨어나지만, 바깥세상의 인간들과는 다른 몸이 되지요. 그리고 잠시 동안 이 현도(玄都)에 살게 되는데 그 시기는 2~3년, 또는 10년 정도로 사람마다 다릅니다. (...) 그 후 현수(玄水)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게 되어, 나중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속계(俗界)의 것들을 이것저것 몸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불순한 것들을 배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이계록」에서 현도의 존재들은 인간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면 순수함이라는 인간의 정수만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요원전』에서 화과산의 존재들은 인간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누가 이끄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도는 현빈(玄牝)이 이끌지만, 화과산은 무지기(無支奇)가 이끌기 때문이다.

   「이계록」의 이야기는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수신기(搜神記)』에서 큰 틀만 빌려왔을 뿐, 완전한 본인의 창작 작품이라 한다.




p.063~064

“오공,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어째서 수렴동으로 오지 않는고. 내 주인 대성大聖께서 기다리고 계시니라.”


   자고 있던 오공에게 말을 건 것은 1회에 등장했던 주염(朱厭)이라는 짐승이다. 『산해경(山海經)・서산경(西山經)』에 기술되어 있듯이, 주염이 나타나면 큰 전쟁이 일어난다(見則大兵)고 했다. 요괴를 퇴치하러 화과산에 온 이빙, 오공을 부르는 제천대성(齊天大聖), 이제 『요원전』은 무언가 모를 불안함과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다.



p.069

“폭포수로 가려진 뒤편에 동굴이... 여기가 수렴동이라는 곳인가...”


   ‘복지동천(福地洞天) 화과산 수렴동(花果山水簾洞)’은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화과산 폭포수 밑에서 찾은 동굴이다. 이 동굴을 찾음으로써 손오공은 원숭이들에게 미후왕(美猴王)으로 추대된다. 수렴동에 대한 설명은, 가짜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 58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이 수렴동이란 곳은 연못에서 용솟음쳐 흩날리는 샘물이 거꾸로 떨어지면서 폭포를 이루고 그 물줄기가 동굴 입구를 가려, 멀리서 보면 마치 흰 무명천으로 만든 발을 드리워놓은 것처럼 보이고, 가까이 다가서서 보아도 그것은 역시 한줄기 수맥일 뿐,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에게는 그 뒤쪽에 감추어진 출입구를 알아낼 길이 없었고, 그 때문에 수렴동(水簾洞), 곧 ‘물의 장막으로 가려진 동굴’이란 명칭이 붙었으며, 사화상은 그렇게 드나드는 출입구의 내력을 모른 까닭에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p.074

“내 이름은 제천대성齊天大聖이다.”


   여기서는 ‘제천대성’이라는 명칭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제천대성이란 ‘하늘과 동등한 위대한 성인’이라는 뜻이다. 齊를 ‘같다’의 뜻으로 볼지, ‘다스리다’의 뜻으로 볼지 고민했었는데, Arthur Waley가 『Monkey』에서 ‘The Great Sage, Equal of Heaven’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같다’의 뜻이 맞는 것 같다.

   『서유기』에서 ‘제천대성’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 손오공이 자신의 신통력으로 용궁과 유명계에서 분탕질을 치자, 옥황상제(玉皇上帝)는 더 이상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손오공을 하늘로 불러들여 천마(天馬)를 돌보는 필마온(弼馬溫)이라는 벼슬을 준다. 후에 필마온이라는 품계가 하찮은 것을 알자 성을 내고 근무지를 무단이탈, 다시 화과산으로 돌아온다. 그 때 마침 찾아온 독각귀왕(獨角鬼王)이 “대왕처럼 놀라운 신통력을 지닌 분을 한낱 비천한 말먹이꾼에 임명하다니, ‘제천대성’이 되신다 한들 어떤 작자가 안 된다고 막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스스로 ‘제천대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훗날 태백금성(太白金星)의 중재로 옥황상제에게 ‘제천대성’이라는 벼슬을 정식으로 받지만, 그것은 손오공을 천궁에 잡아두기 위해 만든, 허울뿐인 유관무록(有官無祿)의 벼슬일 뿐이었다.

   어찌됐든, 손오공은 이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자신의 여섯 '의형님들'께도 ‘대성’을 붙이라고 꼬드기는데, 첫째인 우마왕(牛魔王)은 하늘을 평정하는 ‘평천대성(平天大聖)’, 둘째 교마왕(蛟魔王)은 바다를 뒤엎는 ‘복해대성(覆海大聖)’, 셋째 붕마왕(鵬魔王)은 하늘을 휘젓는 ‘혼천대성(混天大聖)’, 넷째 사타왕(獅狔王)은 산을 옮겨놓을 수 있는 ‘이산대성(移山大聖)’, 다섯째 미후왕(獼猴王)은 바람을 꿰뚫는 ‘통풍대성(通風大聖)’, 여섯째 우융왕(〇狨王)은 신선을 몰아내는 ‘구신대성(驅神大聖)’이라고 서로 자화자찬하며 호칭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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