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바라따 1 - 1장 태동: 신과 아수라와 인간과 영물들의 탄생 마하바라따 1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마하바라따를 3권까지 읽다가 계속 무언가가 걸려서 조금씩 정리를 해봤다. 딴지는 아니고, 그냥 책을 읽다가 멈춘 지점에서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리뷰라 보기에는 뭣하지만, 그냥 몇 자 적었다. 다음 3쇄가 나올 때는 더 좋은 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리고 제발 완역이 완간 될 수 있기를 바라며.

 

 

 

 

 

 

 

 

§1p.23 꾸루 가문의 가계도

    책에서 밝힌 꾸루 가문의 가계도(본 이야기의 실질적인 시작점인) 샨따누 왕에서 (이 이야기의 청자인) 자나메자야 왕까지의 족보로, 사실상 마하바라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관계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류로 보이는 것도 있는데, ‘드르따라슈트라-간다리에서 까우라와’(두료다나, 두샤사나를 포함한 100명의 아들들)로 이어지는 선에 까르나가 겹쳐져있어서, 이 가계도만 보면 두료다나를 포함한 까우라와들이 까르나의 자식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이건 명백히 편집자의 실수다.) 그리고 간다리와 샤꾸니는 남매사이인데, 도면상으로 보면 결혼한 사이로 보인다. 점선과 실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이러한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처:Wikipedia)

 

   그런데 이 정도의 간략한 가계도는 단권짜리 축약판에나 어울리지, 완역 마하바라따에는 어울리지 않지 싶다. 이 거대한 서사시에 걸맞은 가계도 정도라면, 1-70, 1-89(마하바라따1장 태동, 7089)에서 언급된 닥샤 쁘라자빠띠, 마누 와이와스와따, 바라따, 꾸루, 뿌루, 아지마다 계보에 속하는 성스럽고 다복하며 풍요와 명예와 장수를 누린 야다와, 빠우라와, 그리고 바라따의 모든 가계를 올리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Penguin Books에서 출간한 2010년 판 Mahabharata에서는 그런 무시무시한 작업의 결과가 실려 있다.

 

         

                                       

 

 

 

§ 일러두기 (1p.24, 2p.461, 3p.5)

1. 이 책은 뿌네의 반다르까 동양학 연구소에서 편찬한 보리(BORI)본을 원전으로 삼아 옮겼으며, 이야기의 흐름상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이본의 이야기들을 삽입하고 주에 따로 표시해두었다.

 

    새물결에서 출간한 마하바라따는 뿌네(Pune)의 반다르까 동양학 연구소(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BORI)의 판본을 원전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 보리본을 Critical Edition, 일명 결정판이라고 하는데, 이 설명이 빠져 있어서 조금 적는다. 마하바라따는 약 1천여 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므로, 수많은 판본, 혹은 교정본이 존재한다. 뿌네의 반다르까 동양학 연구소가 이 수많은 판본을 취합, 후대에 추가된 이야기들을 삭제하면서 제작한 것이 바로 결정판이다. 1919년에 시작해서 1966년에야 출간했는데, 이때는 부록인 하리 왕가가 빠져 있었으며, 1970년에야 하리 왕가를 부록으로 추가, 진짜 결정판을 출간했다. 이 결정판이야 말로 진정으로 공인된판본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다른 판본에서 설명을 위해 삽입했던 구절들이 후대에 추가된 것들이라는 이유로 삭제가 되어서 이야기 진행이 널을 뛴다는 데 있다. 오히려 이본(異本)들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더 낫다는 것인데, 역자도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삭제된 부분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추가된 부분은 1-107 (2p.515), 1-119(2p.558), 1-215(2p.879)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결정판에는 매우 유명한 두 개의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다. (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3권까지 읽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이야기들이다.) 하나는 이 위대한 이야기의 저자인 위야사와 가네샤에 대한 이야기, 다른 하나는 드라우빠디와 끄르슈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자는 다른 삭제된 이야기들은 집어넣었으면서 왜 이토록 유명한 이야기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

 

    먼저 위야사와 가네샤에 대한 이야기. 위야사는 이 위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냈지만, 이를 기록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창조주 브라흐마는 가네샤를 보내어 이를 받아 적게 했다. 가네샤는 위야사가 낭송을 하되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 낭송을 한다면 받아 적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위야사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각 시구의 의미를 깨닫고 이해해야만 가네샤가 기록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가네샤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위야사는 낭송을 시작했고 가네샤는 기록을 시작했다. 때때로 위야사는, 가네샤를 당황스럽게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리송한 단어들을 선택하고 이야기 구성을 비틀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하바라따가 그토록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차도 생각에 빠져 집필을 멈춰야 했으니 인간들은 오죽하겠는가!)

이 이야기는 1-1 (마하바라따1p.45)에서 삭제된 이야기인 듯하며, 삭제된 부분은 Ganguli의 번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Ganguli가 번역했을 때에는 결정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 Peter Brook의 작품(연극/영화)에도 이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1989년 영화. Peter Brook 감독. 구술하는 위야샤와 기술하는 가네샤. 그 뒤로 이를 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

 

 

 

Kisari Mohan Ganguli Translation

 

The son of Satyavati having, by penance and meditation, analysed the eternal Veda, afterwards composed this holy history, when that learned Brahmarshi of strict vows, the noble Dwaipayana Vyasa, offspring of Parasara, had finished this greatest of narrations, he began to consider how he might teach it to his disciples. And the possessor of the six attributes, Brahma, the world's preceptor, knowing of the anxiety of the Rishi Dwaipayana, came in person to the place where the latter was, for gratifying the saint, and benefiting the people. And when Vyasa, surrounded by all the tribes of Munis, saw him, he was surprised; and, standing with joined palms, he bowed and ordered a seat to be brought. And Vyasa having gone round him who is called Hiranyagarbha seated on that distinguished seat stood near it; and being commanded by Brahma Parameshthi, he sat down near the seat, full of affection and smiling in joy. Then the greatly glorious Vyasa, addressing Brahma Parameshthi, said, "O divine Brahma, by me a poem hath been composed which is greatly respected. The mystery of the Veda, and what other subjects have been explained by me; the various rituals of the Upanishads with the Angas; the compilation of the Puranas and history formed by me and named after the three divisions of time, past, present, and future; the determination of the nature of decay, fear, disease, existence, and non-existence, a description of creeds and of the various modes of life; rule for the four castes, and the import of all the Puranas; an account of asceticism and of the duties of a religious student; the dimensions of the sun and moon, the planets, constellations, and stars, together with the duration of the four ages; the Rik, Sama and Yajur Vedas; also the Adhyatma; the sciences called Nyaya, Orthœphy and Treatment of diseases; charity and Pasupatadharma; birth celestial and human, for particular purposes; also a description of places of pilgrimage and other holy places of rivers, mountains, forests, the ocean, of heavenly cities and the kalpas; the art of war; the different kinds of nations and languages: the nature of the manners of the people; and the all-pervading spirit;--all these have been represented. But, after all, no writer of this work is to be found on earth.'

 

"Brahma said. 'I esteem thee for thy knowledge of divine mysteries, before the whole body of celebrated Munis distinguished for the sanctity of their lives. I know thou hast revealed the divine word, even from its first utterance, in the language of truth. Thou hast called thy present work a poem, wherefore it shall be a poem. There shall be no poets whose works may equal the descriptions of this poem, even, as the three other modes called Asrama are ever unequal in merit to the domestic Asrama. Let Ganesa be thought of, O Muni, for the purpose of writing the poem.'

 

"Sauti said, 'Brahma having thus spoken to Vyasa, retired to his own abode. Then Vyasa began to call to mind Ganesa. And Ganesa, obviator of obstacles, ready to fulfil the desires of his votaries, was no sooner thought of, than he repaired to the place where Vyasa was seated. And when he had been saluted, and was seated, Vyasa addressed him thus, 'O guide of the Ganesa! be thou the writer of the Bharata which I have formed in my imagination, and which I am about to repeat."

 

"Ganesa, upon hearing this address, thus answered, 'I will become the writer of thy work, provided my pen do not for a moment cease writing." And Vyasa said unto that divinity, 'Wherever there be anything thou dost not comprehend, cease to continue writing.' Ganesa having signified his assent, by repeating the word Om! proceeded to write; and Vyasa began; and by way of diversion, he knit the knots of composition exceeding close; by doing which, he dictated this work according to his engagement.

 

I am (continued Sauti) acquainted with eight thousand and eight hundred verses, and so is Suka, and perhaps Sanjaya. From the mysteriousness of their meaning, O Muni, no one is able, to this day, to penetrate those closely knit difficult slokas. Even the omniscient Ganesa took a moment to consider; while Vyasa, however, continued to compose other verses in great abundance.

 

 

The wisdom of this work, like unto an instrument of applying collyrium, hath opened the eyes of the inquisitive world blinded by the darkness of ignorance. As the sun dispelleth the darkness, so doth the Bharata by its discourses on religion, profit, pleasure and final release, dispel the ignorance of men. As the full-moon by its mild light expandeth the buds of the water-lily, so this Purana, by exposing the light of the Sruti hath expanded the human intellect. By the lamp of history, which destroyeth the darkness of ignorance, the whole mansion of nature is properly and completely illuminated.

 

 

    드라우빠디와 끄르슈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내용 누설이니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두샤사나가 회당에 끌려나온 드라우빠디의 옷을 벗기자 드라우빠디는 끄르슈나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기도에 응답한 끄르슈나가 조용히 나타나 드라우빠디의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옷이 나오게 했다.

    생략된 부분은 2-61 (마하바라따3p.258 11째 줄) 부분이고, 끄르슈나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그저 놀라운 장면으로만 묘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생략된 이야기는 워낙에 강렬한 부분이어서 그런지, 마하바라따를 다룬 (거의) 모든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이 이야기에 끄르슈나가 등장을 한다. 심지어 결정판이 나온 1970년 이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조차도 이 부분만큼은 이본(異本)의 이야기를 따르고 있다. 삭제된 부분은 Ganguli의 번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5년 영화. Babubhai Mistri 감독. 왼편에 두샤사나가 드라우빠디의 옷을 당기고 있고 오른편에 끄리슈나가 천을 내리고 있다. 드라우빠디 뒤편으로 왼편엔 까우라와들이 이를 보고 있고 오른편엔 빤다와들이 옷을 벗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1988년 드라마. B. R. Chopra 제작. Babubhai Mistri의 영화와 거의 같은 구도이다. 단 까우라와들과 빤다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1989년 영화. Peter Brook 감독. 드라우빠디 뒤에서 천을 주고 있는 끄르슈나. 뒤편에 샨따누가 놀란 표정으로 있다. 백인 배우들이 역을 맡고 있는데, 이는 연극을 영화로 담았기 때문이다.

 

 

     

 

2013년 드라마. Swastik Pictures 제작. 천상에서 끄르슈나가 천을 내리고 있다. 이 에피소드만으로 한 회를 진행한다. (한 회가 20분 분량이긴 하지만...)

 

 

 

Kisari Mohan Ganguli Translation

Vaisampayana continued,--"When the attire of Draupadi was being thus dragged, the thought of Hari, (And she herself cried aloud, saying), 'O Govinda, O thou who dwellest in Dwaraka, O Krishna, O thou who art fond of cow-herdesses (of Vrindavana). O Kesava, seest thou not that the Kauravas are humiliating me. O Lord, O husband of Lakshmi, O Lord of Vraja (Vrindavana), O destroyer of all afflictions, O Janarddana, rescue me who am sinking in the Kaurava Ocean. O Krishna, O Krishna, O thou great yogin, thou soul of the universe, Thou creator of all things, O Govinda, save me who am distressed,--who am losing my senses in the midst of the Kurus.' Thus did that afflicted lady resplendent still in her beauty, O king covering her face cried aloud, thinking of Krishna, of Hari, of the lord of the three worlds. Hearing the words of Draupadi, Krishna was deeply moved. And leaving his seat, the benevolent one from compassion, arrived there on foot. And while Yajnaseni was crying aloud to Krishna, also called Vishnu and Hari and Nara for protection, the illustrious Dharma, remaining unseen, covered her with excellent clothes of many hues. And, O monarch as the attire of Draupadi was being dragged, after one was taken off, another of the same kind, appeared covering her. And thus did it continue till many clothes were seen. And, O exalted on, owing to the protection of Dharma, hundreds upon hundreds of robes of many hues came off Draupadi's person. And there arose then a deep uproar of many many voices. And the kings present in that assembly beholding that most extraordinary of all sights in the world, began to applaud Draupadi and censure the son of Dhritarashtra. And Bhima then, squeezing his hands, with lips quivering in rage, swore in the midst of all those kings a terrible oath in a loud voice.

 

 

 

§ 일러두기 (1p.24, 2p.461, 3p.5)

2. 이 책은 전부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장의 분량이 동일하지 않아 몇몇 장은 2~3권으로 분권된다. 이와 관련해 각 장의 권수 표시와 부제는 편집부에서 따로 작성한 것이다.

 

  

   장, , 이 말들에 대한 용어가 먼저 확립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마하바라따는 약 10만여 개의 shlokas(시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정판은 정확히 (부록인 하리 왕조를 포함하여) 79,857개의 shlokas로 이루어져 있다. shlokas가 모여 작은 이야기 단위를 이룬 게 adhyaya(소단원), 현재의 챕터 구성과 같은 방식이다. 그리고 이 adhyayas가 모인 게 parva. 마하바라따는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18개 또는 100개의 parvas로 나뉜다.(결정판에서는 부록을 포함해 정확히 19/98개지만, 관용적으로 18/100개라고 한다.) 18개로 분류하는 것은 현재의 분권 형식에 가깝고, 100개 분류는 소제목 혹은 section 형식에 가깝다.

    아쉬운 점은, 새물결의 편집부는 19개의 parvas와 각 adhyaya도 결정판에서 분류한 대로 따랐지만, 98개의 parvas로 분류한 것은 따르지 않고 편집부 임의대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p.79에 그에 대한 각주가 달려있다.) 이런 분류 방식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장점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마다 소제목으로 구분을 해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원본의 형태가 어떤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원본이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서 염치없게도 Bibek Debroy가 분류한 것을 옮겨 놓는다. 

 

 

   

 

   그리고 분권 형식에 대한 걱정이 있는데, 영역본의 경우엔 parva에 관계없이 대개 10권 정도의 볼륨으로 나뉜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parva의 볼륨이 들쭉날쭉해서 parva에 맞추어 책을 출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Adi parva1권으로 맞추고 그에 맞게 볼륨을 조절하는데, 새물결 판본은 각 parva에 맞추어 책을 출간하고 있다. 그래서 각 권마다 볼륨이 제각각이다. parva에 맞춘다면 Mousala parva는 거의 팸플릿 수준일 텐데... 20권에 맞춰서 출간할 계획이라니까 아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뱀다리. 위 표에 따르면 결정판에서 부록인 하리 왕조는 6,073개의 shlokas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권과 2권 뒤에 있는 부록 1(p.462, p.918)에서 하리왕샤16,000개의 시구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p.36 각주 나라야나와 나라

마하바라따에서 나라야나는 주인공 아르주나와, 나라는 전지전능한 끄르슈나와 동일시된다.

→ 『마하바라따에서 나라는 주인공 아르주나와, 나라야나는 전지전능한 끄르슈나와 동일시된다.

 

    나라와 나라야나가 반대로 명시되어 있다.

 

 

The Hindu epic Mahabharata identifies the god Krishna (an avatar of Vishnu) with Narayana and Arjuna - the chief hero of the epic - with Nara. The legend of Nara-Narayana is also told in the scripture Bhagavata Purana. Hindus believe that the pair dwells at Badrinath, where their most important temple stands.

 

 

 

(출처:Wikipedia)

 

 

 

§1-1 (마하바라따1p.37 1째 줄)

로마하르샤의 아들 우그라쉬라와스, 떠돌이 가객이자 옛이야기에 달통한 그가 나이미샤 숲에 들었다. 숲에서는 샤우나까를 수장으로 열두 해째 희생제가 거행되고 있었다. 엄격히 서약을 지키며 함께 모여 수행하던 제석천의 선인(仙人)들에게 가객이자 가객의 아들이기도 한 우그라쉬라와스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Bibek Debroy Translation (Critical Edition)

 

The great sages, performers of difficult austerities, were present at the twelve-year sacrifice of Kulapati Shounaka and were comfortably seated in Naimisharanya. Ugrashrava, the son of Lomaharshana and the son of suta, learned in the Puranas, and also known as Souti, once approached them, bowing in humility.

 

Kisari Mohan Ganguli Translation

 

Ugrasrava, the son of Lomaharshana, surnamed Sauti, well-versed in the Puranas, bending with humility, one day approached the great sages of rigid vows, sitting at their ease, who had attended the twelve years' sacrifice of Saunaka, surnamed Kulapati, in the forest of Naimisha.

 

 

    Debroy의 번역이건 Ganguli의 번역이건, 마하바라따에서 우그라쉬라와스의 이름 표기는 처음에 한 번 나오고 이후는 계속 사우띠(Souti/Sauti)’로 표기된다. 그런데 역자(박경숙)우그라쉬라와스로 고정시켰다. 역자는 1권과 2권 뒤에 있는 부록 1(p.467, p.923)에서 가객의 아들(사우띠)이자 본인도 가객인 우그라쉬라와스라고 이야기했는데, Bibek Debroy사우띠를 우그라쉬라와스의 가문(혈통)을 나타내는 말이라 했고(Souti refers to his birth.), Ganguli는 성()이라고 번역했다. 뭐가 맞는 표현일까? 만약에 사우띠가 가객의 아들이라는 뜻이 맞는다면, ‘우그라쉬라와스가 말했다.’는 모두 가객의 아들이 말했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하바라따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되지 않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고, 역자 역시 그 이름들 옆에 친절하게 누가 누구인지를 표기해주었기 때문에 우그라쉬라와스만 특별대우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본래는 싼스끄리뜨 원본과 비교해야 하지만, 알지 못하니 차선책으로 다른 번역본을 비교해봤다. 이들 번역본이 원본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하나 마나 한 일이 될 터이나,(Debroy는 자신의 번역이 이전의 번역들보다 더 낫고 정확하다고 자부하긴 한다.) 비교해 보고픈 욕망을 차마 거스를 수 없었다. 참고로 Bibek Debroy의 영역은 2010년에 Penguin Books에서 출간됐으며, 박경숙의 번역과 같이 결정판(Critical Edition)을 번역했다. Kisari Mohan Ganguli의 영역은 1883(!)에 출간됐고(이후 1896년 완간!) 최초의 영역본이며 저작권 소멸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1-53 (마하바라따1p.267)

    adhyaya번호가 빠져 있다. 본문 위에 ‘5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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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딩실룩 2022-01-11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출판사가 있던데요… 새물결에서 나온 마하바라타가 나을까요?
 
마하바라따 1 - 1장 태동: 신과 아수라와 인간과 영물들의 탄생 마하바라따 1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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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하바라따』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서유요원전』 때문이었다.


당시 난 『서유요원전』을 읽으면서 관련된 원전을 관심있게 찾아보고 있었다. 원전인 『서유기』를 읽으면서, 손오공의 모델이 인도의 『라마야나』 에 나오는 원숭이왕 하누만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을 알게 되면서 『라마야나』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와 관련하여 『마하바라따』를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냥 '이런 "게" 있구나'하는 정도였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도서관에서 굵은 볼륨의 5권의 『마하바라따』를 발견하고 바로 대출을 해왔더랬다. 1권을 읽은 지 중반부 쯤 되서야, 이 책은 (시간에 쫓기며) 빌려 읽을 게 아니라, 내 책으로 진득하게 읽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책을 덮은 후 도서관에 반납을 했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도서정가제 "덕분에" 『마하바라따』를 반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좀 뭣한 말이지만, 난 책을 '작정하고' 읽을 때 꽤 꼼꼼히 읽는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열국지』를 읽으면서 워낙에 큰 골탕을 먹었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거의 색인을 만들 정도로 인물과 사건을 꼼꼼하게 정리를 하는 버릇이 들었다. 『마하바라따』 역시 그런식으로 읽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난 『열국지』 도 완벽히 완독했는데, 뭐가 무섭겠는가.


그런데, 세상은 넓고 책은 많았다.


『마하바라따』는 뭐랄까... 비유를 하자면, 마르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열 명의 김연수가 '작정하고' 베베꼬아 내게 그 소설의 줄거리를 번갈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조금만 방심을 해버리면, 이 이야기의 화자가 누구인지, 도대체 어디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인지, 왜 이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미로 속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이야기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하바라따』1권의 절반 분량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떠돌이 가객인 우그라쉬라와스가 희생제를 치루고 있는 나이미샤 숲의 선인들에게 자나메자야왕의 희생제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한다. ② 우그라쉬라와스가 들은 이야기는 자나메자야왕의 희생제를 치룬 제사장 중 한 명인 와이샴빠야나가 자나메자야왕에게 한 이야기이다. ③ 자나메자야왕이 희생제는 뱀 희생제인데 이는 부친이 뱀에게 물려 죽었기 때문이다. ④ 자나메자야왕의 부친인 빠릭쉬뜨왕은 성자 끄르샤에게 모욕을 줬다. 그 사실을 안 성자의 아들 슈릉긴이 빠릭쉬뜨왕에게 뱀에게 물려 죽으라는 저주를 내려, 빠릭쉬뜨왕은 뱀 왕 딱샤까에게 물려 죽는다. ⑤ 이러한 뱀 희생제는 브라만 아쓰띠까의 간청으로 멈추게 되는데, 아스띠까는 고행자 자르뜨까루와 뱀 여인 자라드까루(이름이 같다) 사이에서 난 자식이다. ⑥ 뱀 왕 딱샤까에 대한 내력과 족보가 나오는데, 쁘라자빠띠의 두 딸 위나따와 까드루가 그 기원이다. 이 둘은 브라만 까샤빠와 결혼을 하는 데, 위나따는 천 명의 뱀 아들을 낳고, 까드루는 태양의 마부 아루나와 뱀 사냥군 독수리 가루다를 낳는다. (가루다와 관련해서 신들과 아수라들이 합심해 '소마'를 얻는 이야기가 나온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끝이 없다.)


복잡한 것은, 이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는 게 아니라, ①→②의 순서로 진행이 된다. 이 순서가 끝이 나서야 우린 그제야 와이샴빠야나와 자나메자야 왕의 대화로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밑밥인 것이다. 이만큼 풀어놓은 후에야, 비로소 본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1권을 다 읽은 독자들이라면, 1권 마지막에 있는 와이샴빠야나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마하바라따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제껏 열심히 읽었건만, 이제 이야기를 시작한다니, 나는 대체 무엇을 읽었나?


이런 밑밥은 ①의 우그라쉬라와스와 나이미샤 숲의 선인들의 이야기에 나온다. 그 이야기들은 『마하바라따』 본편의 줄거리 요약이자, 하이라이트 부분을 요약/압축한 것이다. 패를 다 보여줘도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이야기 자체에 압도 당하고 만다. 아니, 압사당한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기나긴 대서사시 중에 이제 겨우 0.5/19를 읽은 것이다. 내가 만지는 부분이 코끼리 다리인지 몸통인지, 아니 코끼리가 맞는지도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성급하게 평가하고 단정짓기 보다는, 서서히 깨달아 나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부디 완간만 되기를 쏜꼽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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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12-30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마하바라따 살까 말까 망설였던 책이죠.50% 세일이어도 워낙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결국 못샀어요ㅜ.ㅜ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봐야 될것 같아요.

Tomek 2014-12-30 23:24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가에 간직할만한 책인 것 같아요. 아쉬운점이 없진 않지만...

고맙습니다. ^^

라로 2014-12-31 0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던 책이네요,,,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어요!!

둥이들은 잘 자라고 있죠???^^

Tomek 2014-12-31 07:31   좋아요 0 | URL
2022년 ˝번역완결˝ 예정이라 얼마나 기다려야햘지 모르지만, 그래도 모국어로 이런 위대한 서사시가 번역된다는 사실이 기뻐요.

둥이들은 매일 징징대서 힘이... ㅠ.ㅠ

고맙습니다.

2015-01-01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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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은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충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 200여 년에 걸친 세월동안 『프랑켄슈타인』은 연극, 영화, TV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너무나 많은 변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1831년 『프랑켄슈타인』의 2판이 출간될 당시 런던에서 다섯 편의 프랑켄슈타인 관련 연극이 상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끊임없이 매체를 바꿔가며 각색되는 이유는 시체를 살려낸다는 괴담에 있지 않을까. 음침한 실험실, 공동묘지에서 매일 재료를 취합하는 광기어린 과학자, 그리고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비극에 빠져드는 창조주. 하지만 이런 공포와 드라마틱한 비극은 이후의 각색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에 대한 묘사는 최소화되어있다. 작가는 창조의 신비, 경외 혹은 공포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그 이후의 문제, 창조자의 역할에 관심이 있다. 당신이 하나의 생명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완전무결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숨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흉내를 낼 수 있었지만, 신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흉내에 대한 대가는 가혹했다.

   계몽주의가 만연했던 18세기, 그리고 '천재'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회고로 진행되는 소설인지라 고루하고 만연한 문체로 진행되어 좀 지루한 감이 있지만, 감내하고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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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통 한글 2007 기본 + 활용 지대로 배우기 - 문서 작성부터 실무 활용까지
강성재 지음 / 웰북(WellBook)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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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은근히 모르는 게 많이 있었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지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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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서유요원전 대당편 2 만화 서유요원전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원전』 의 번역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잡지 못한 오류들이 조금씩 보인다. 2권에 대한 글도 끝냈고 해서, 그간에 썼던 글 중 오류라 생각하는 부분들만 모아서 따로 정리를 한다. 명시한 것들이, 확실하게 틀린 부분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라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다음에 재판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반영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올린다.




p.004

무지기無支奇 → 무지기無支祁 (자세한 설명은 여기 클릭)





p.005

이원길李元吉 이연李淵의 넷째 아들. 제왕齊王.



넷째 아들 → 셋째 아들 (『요원전』 1권 p.247 본문과 註에서 다루었으므로 통일해야.)





p.007

차례

제12회 용녀는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치고 오공은 아녀자를 업고 동굴로 돌아가다 008



008 → 007 (페이지 숫자)





p.246

“용아녀, 섣부른 짓을... 계곡의 영기가 잠깐 사라졌다고 해서 지금껏 쌓은 수행의 성과를 죄다 날릴 셈이냐...



죄다 날릴 셈이냐... → 죄다 날린 것이냐...



   p.051에서 진원대선이 말하길 “만일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사내와 몸을 섞게 된다면 수행 끝에 얻은 일신의 능력을 모조리 잃고 말 것”이라는 말로 보아, 남자와 동침을 하면 제천현녀의 힘을 다시는 사용 못하는 게 맞다. 통비공은 용아녀가 오공과 동침한 상황을 먼저 확인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섞인 말 보다는, 포기하는 한탄의 말을 해야 하는 게 맞다.





p.372

우르 우르 → 우르르 or 우르르 우르르 (출처 불명의 의태어 수정)





p.375

“뭐야? 관음보살님의 석장錫杖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관음보살 → 관세음보살



   중국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관음보살(觀音菩薩)로 불리게 된 것은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하고 난 후, 즉 이세민(李世民)의 世를 피휘(避諱)하기 위해서다. 피휘란 군주의 이름을 피한다는 뜻으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교문화권의 옛 관습에 따라, 때에 따라서는 글자 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요원전』의 시대적 상황에 볼 때, 아직 이세민이 즉위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관세음보살로 불려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세음보살’이란 말이 오역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바로 잡은 것이 바로 현장 스님이라는 점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권3을 보면 북인도 오장나국(烏仗那國, Uddiyana)의 한 사원에서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보살이라 불리는 불상을 한 기 보는데, 바로 그 불상이 우리가 아는 관세음보살이다. 현장이 기록한 오류 정정은 다음과 같다.



唐言觀自在。合字連聲,梵語如上;分文散音,即阿縛盧枳多譯曰觀,伊濕伐羅譯曰自在。舊譯為光世音,或云觀世音,或觀世自在,皆訛謬也。

   당나라 말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하는데 글자를 합하여 연달아 소리를 내어 발음하면 범어(梵語)는 위와 같아진다. 단어를 나누어 하나씩 발음을 내어볼 때 아박로지다(阿縛盧枳多)는 번역하면 관(觀)이고, 이습벌라(伊濕伐羅)는 번역하면 자재(自在)이다. 구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음(觀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자재(觀世自在)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장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너무 어려워, 그 주석에 주석을 단 첸원중 교수의 설명을 빌리면, 아발로지저습벌라는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 아발로키데스바라’의 음역인데, 이 낱말은 avalokita(‘본다’는 뜻의 아발로키타)와 īśvara(‘자유자재’란 뜻의 이스바라) 두 음절의 합성어이다. 산스크리트 문법에 따르면, 앞 음절의 끝 모음 ‘a’와 뒤 음절의 첫 모음 ‘ī’는 반드시 붙여서 ‘e’로 읽어야 하는데, 이 명칭을 처음 번역한 사람이 이 두 개의 모음을 잘못 읽어 Avalokiteśvara를 avalokitasvara로 보았고, 여기서 ‘svara’를 ‘목소리’ 즉 음성의 뜻으로 풀이했다. 이래서 ‘보다’와 ‘음성’을 하나로 붙여 ‘관세음’이라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오류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의 힘은 무서운 것인지, 오랜 시간 관세음보살로 받아들인 불교도들의 힘인지 아니면 고집인지, 관자재보살은 여전히 관세음보살로 받아들이고 있고, 당태종 때 피휘로 영향 받아 관음보살로도 굳어지고, 심지어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의 차이에 대한 해석도 나와 있는 형편이라, 현장 스님은 이걸 어떻게 생각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p.423

인물관계도

‘은각銀角’ 밑에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 추가

‘용아녀龍兒女’ 옆에 ‘호마虎媽’, ‘녹저鹿姐’ 추가



수말당초 대란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사이 선 밑에 ‘광통거(廣通渠)’ 추가



※ 삼문협三門峽은 창장[長江, 陽長江]에 있기 때문에 삭제해야 하지만, 밑에 화과산과 쌍차령을 표시한 것으로 보아 실제 중국 지도가 아니라 『요원전』에 특화된 것으로 감안,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상 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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