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식 글쓰기의 정점... 뭥미???

결국 중요한 건 해결책이다.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문제 제기할 땐 신나게 하면서 결론에 있어선 너무나 무책임하다.
문제 제기와 현실분석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책을 많이 읽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소한 '학자'라면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공론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새로운 해결책 정도는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이 쓴 책을 돈 내고 사는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내꺼님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리뷰를 신나게 읽다가 결말부에서 갑자기 멈췄다. 내 글읽기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글을 읽다가 갑자기 맥락에서 벗어나 딴생각을 하는 것인데, 이 글을 읽을때도 딴생각에 빠져버려 글의 맥락을 놓쳤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꺼님의 리뷰에 대해 언급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딴생각을 하고 있는 Tomek의 글임을 거듭 밝혀둔다.  

 

   '책'은 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까? 누군가는 책 안에 길이 있다고 하고, 누군가는 한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책은 누군가에겐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이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냄비 받침으로 쓰는 '기능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같은 보통사람들에겐 엔터테인먼트와 기능적인 요소가 클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책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보통 그들은 '내 인생의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경운데, 책 한권으로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복음을 전파한다. 뭐 살다보면 그런 위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지만, 난 정말 궁금하다. 정말 그 '책'이 인생을 바꾸었을까? 

   책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책은 항상 문제제기만을 한다. 아니, 결론을 내리건 문제제기를 하건, 책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책을 읽어도 변하는 건 없다. 늘 세상은 흘러간다. 결국 그자리다. 그렇기에, 변하는 건 '나'에게 달려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변해야하는 것이다. '독서'라는 행위는 늘 자신을 반추하는 것이다. 그 비친 모습을 보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반성'을 해야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책이 내 인생을 바꿨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참 겸손한 사람들이다. 책은 그저 동기부여만 할 뿐, 인생을 바꾸는 건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가 오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과 부딪히고, 밥을 번다. 그뿐이다. 

   내게도 '내 인생의 책'이 있다. 여러권 있지만, 최근의 내 인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책을 꼽는다면,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그당시 난 중등 영어교과서를 편집하는 일을 했었다. 모든 교과서 개발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이 영어교과서는 더욱 일하기 드러운데, 진상인 저자들을 만나면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2007년 10월에서 12월초까지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잔날은 채 10일이 되지 못할정도다.(그 전 3월부터 10월까지는 항상 야근에 토요일 저자회의를 했다) 밤을 새고 일하다 잠깐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서 일하다 기절하는 일을 두달간 하니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첫 해를 어찌어찌 넘기고 그 다음해 결혼을 하게 됐다. 그때 또다른 교과서를 개발 중이었는데, 마감기간을 피하기 위해 좀 여유로운 8월에 결혼식을 잡았다. 그때 윗분한테 불려서 고마운 결혼 덕담을 들었다. "이 바쁜 때 결혼 하는 게 제정신이냐? 다들 여름 휴가도 반납한 상황에서 결혼하면 어쩌자는 거야? 신혼여행 갈거야? 도대체 무슨생각이야? 애인이랑 해외에서 한 번 하고 싶어 그런거야?" 난 아마 이 '덕담'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결혼 후 밀려드는 야근에 지쳐갈 때, 무심결에 읽은 책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지."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물론 이 책은 내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다. 선택을 내리는 것은 '나'다. 책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직서를 낸 것을 후회한다고 박민규 작가에게 "내 인생을 망쳐놓았으니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인생은 다른 사람이 살아주는 게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이다. 책속에 길이 있다하더라도, 그 길은 결국 '내'가 걸어야 한다.

   그러니 책을 너무 신성시하지 말자. 책안에 길이 없다고 너무 투덜대지 말자. 길이 없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그저 그 길을 걸을지 말지를 '선택'하자. 

 

 

*덧붙임: 

1. 책에 대한 생각도 쓰고 싶고, 잊을 수 없었던 제 전 직장 이야기도 쓰고 싶었는데 생각과 감정이 뒤엉켜 토해놓은 글이 된 것 같습니다. 

2. 지금 직장은 전 직장에 비해 규모도 작고 환경도 열악하지만, 이유없는 야근은 시키지 않습니다. 덕분에 (전보다) 많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보내고 있습니다. 벌어오는 밥은 전보다 적지만, 밥은 굶어죽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3. 내꺼님의 리뷰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톨트 2009-12-2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토멕님 인생에 한표 던집니다.

Tomek 2009-12-30 09: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전호인 2010-01-0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멕님, 이 글이 다음 블로거뉴스 특종10에 선정이 되었네요.
추카추카 ^*^

Tomek 2010-01-05 11:00   좋아요 0 | URL
이런 개인적인 글이 '특종'이라는 감투를 써도 되는 것인지... 부끄럽습니다.
고맙습니다. ^.^;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나영이의 크리스마스 카드로 대신합니다. 

2010년은 모두들 긍정할 수 있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9년 12월 24일 

Tomek 올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ovio 2009-12-25 0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rry X-mas ^^

Tomek 2009-12-28 14:17   좋아요 0 | URL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
 

   이제 2009년도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회사와 각 부서에서는 연말결산을 준비중이고, 매체에서는 올해의 사건, 올해의 영화, 올해의 드라마... 뭐 이런 목록들을 양산하고 있고, 이곳 알라딘에서는 올해의 책 투표를 진행중이다. 나또한 개인적인 책, 영화 목록을 정리하려다 갑작스런 일로 인해 작성을 중단한 상태다. 조금 방향을 틀어, 올 한해 작별한 사람,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작성하려 한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 

           

   비록 말년에 '가슴 아픈' 말씀을 하셔서 여론에 뭇매를 맞으셨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행적은 고작 그정도의 '실수'로 덮어버리기에는 정말로 거대하다. 그 연세였으니 '호상'이란 말도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어둠을 밝혀주신 '어른'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큰 구멍을 만들었었다. 지금은 편히 쉬고 계실려나, 아니면 또 바쁘게 움직이실려나. 그곳에서는 좀 쉬시길 바랍니다.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 氏

       

   한 여배우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은 '역시나' 흐지부지하게 종결됐다. 죽음으로써 진실이 밝혀지길 원했던 그 절박함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전보처럼 텅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가 죽었어도 세상은 아무일 없이 공장 미싱 돌아가듯 잘만 돌아간다. 다음 생에서는 부디 이 나라에 태어나지 마시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우리는 그저 무력감과 허무감만 느낍니다.

 

2009년 5월 23일 - 노무현 전 대통령 

           

   누구에게나 2009년 5월 23일의 기억은 제가끔 존재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난 이날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여느때처럼 웹서핑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포털에 올라온 속보를 보았다. <盧 전 대통령 응급실 행> 처음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생각했었다. 원래 그 양반 지병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나니 <노무현 전 대통령 응급실 행>이라고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그 기사를 보고 웃었었다. "아~ 이 양반 이제 재판 받으려니까 링겔걸고 휠체어타고 가시려나. 가지가지 한다." 컴퓨터를 끄고 그날 아침 10시. 버스에서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사인은 자살"이라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 일을 하다가도 버스 안 출퇴근 길에서도 갑자기 올라오는 감정에 못이겨 손등을 물고 울음을 참았던 기억. 한 사람의 진심을 알기보다는 주위에서 수근대는 말에 한 사람을 재단하고 내친 그 미안함. 난 그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그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한 3년 독방에서 생활하고 사면 받은 후, 어른으로써 한국 정치에 대해 몇 마디 쓴소리 내지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었지만, 너무 많은 숙제를 남기고 갔다. 숙제를 할지, 미루고 놀다 혼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위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2009년 6월 25일 - King of Pop 마이클 잭슨 

           

   10대 때에는 영웅이었다가 20대 때에는 성형중독자이자 소아성애자인 괴물로 이미지가 박혀버린 마이클 잭슨. 그도 죽어서야 그런 불명예를 벗을 수 있었다. 단 한순간에 전설에서 괴물로, 다시 괴물에서 인간으로 그를 써내린 매체들의 장단에 맞춰 놀았다는 사실이 전 대통령의 죽음과 겹쳐 매우 심란해 했었다. 바닥을 친 영웅의 불명예를 되찾을 기회라 여겼던 <THIS IS IT>콘서트는 그의 죽음으로 무산이 됐지만, 유작 영화로 제작되어 그의 팬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됐다. 차라리 괴물이어도 괜찮으니 그냥 살아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2009년 6월 28일 - 유현목 감독

             

   유현목 감독의 영화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고루하다. 하지만, '고루하다'는 말이 '재미없다, 지루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고인에게 큰 실례다. 그는 『오발탄』으로 한국 영화를 서방에 알렸고, 한국 영화에 '모더니티'를 끌고 온 선구자다. 일본영화와 표절시비도 있긴 했지만, 실험성을 표현하는 담대함은 뛰어났다. 안타깝게도 시대에 도태되어 마지막 10여년은 전혀 작품 활동을 못하셨지만, 대신 남아있는 작품이 대신 그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2009년 8월 4일 - 수영선수 조오련 氏 

  

   사람과의 비교 대상이 더이상 없어 바다 생물과 비교를 하곤 했던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단신으로 대한해협을 건넌 것이 몇번이었는지 셀 수 없을만큼, 그는 박태완 이전의, 수영계의 아이돌, 아니.. 이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수영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아이스 에이지2』에서 바다 거북이 역을 맡아 기꺼이 목소리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물론 영화사의 홍보효과의 일원으로 섭외되었겠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몇 편의 뉴스클립을 제외하고는, 이것 뿐이다. 그저 죽어서도 사망신고를 올리지 못하는 그의 딱한 처지가 안타까울뿐이다. 

 

2009년 8월 18일 - 김대중 전 대통령 

          

   천수를 누리셨지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의 충격과 그 빈자리의 상처가 치료되기도 전에 또 한 분의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꿈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뵜었다. 아침나절의 싱그러운 약수터였던 것 같은데,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김전대통령이 누군가와 함께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지팡이도 없이. 너무 놀란 내가 '감히' 말을 걸었었다. "아니, 병원에 누워계신다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걸어다니셨어요?" 그러자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 "아~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수 있는가. 이제 움직여야지. 걱정해줘서 고맙더라고." 그리고 꿈에서 깼다. 아내한테 그 꿈 얘기를 하고나서 며칠 후 김전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뉴스를 속보로 접했다. 땅에 묻히시는 그 날까지도 나이 지긋하신 'tomb raiders'의 공격을 받으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 그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편이 쉬시길 바랍니다. 먼저 가 있는 노통을 만나시거든 조금만 혼내주시길. 

 

2009년 8월 21일 - 배우 이언 氏 

       

   『천하장사마돈나』에서 이언은 정말 씨름선수 같았다. 이 말은 그가 씨름선수 출신이라서 씨름선수 같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씨름선수를 '연기'했다. 기능적인 역할이 아니라, 주인공과 반대되는 지점에서 부딪히는, 씨름만 알고, 씨름만을 위하는 진짜 씨름 선수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류덕환과의 씨름장면에서 그의 마지막 웃음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야지. 하루종일 똥싸는 얼굴로 살지마. 즐겨!"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건강한 웃음을 볼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2009년 9월 1일 - 배우 장진영 氏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반칙왕』에서였다. '여자' 배우같지 않은 여배우. 중성적 매력의 털털함이 시선을 끌게 했다. 그러다 그녀를 내 세포에 각인시킨것은 『소름』이었다. 늘 얼굴에 멍을 지닌채로 미친여자처럼 오래된 아파트를 서성거리는 그녀. 벗어날 수 없었던 인연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 자꾸 그녀의 죽음이 오버랩되는 까닭은. 힘든 투병생활을 견뎠을 그녀.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길 바랄 뿐이다. 

 

2009년 12월 20일 - 배우 브리트니 머피 

                      

   솔직히 얘기해 그녀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원래는 히스 레저가 차지할 자리였으나,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로 대체되었다. 

   지난 일요일에 아내와 함께 집에서 『씬 시티』를 봤다. 우리가 그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미키 루크와 조시 하트넷 때문이었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 「The Big Fat Kill(성대한 살육)」을 보는 도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여배우를 보고 대화를 했었다. 

"누구죠? 저 여자?"
"브리트니 머피. 애슈틴 쿠처랑 결혼하고 이혼했잖아요. 그 이후로 애슈틴은 연상에 빠지고."
"결혼 했었어요?"
"아닌가? 뭐 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가 죽었다는 뉴스를 봤다. 왜,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다른 배우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는데, 왜 하필 그녀에 대해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명단이 많이 빈다. 망자는 말이 없고, 남은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짐을 매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에게 해묵은 작별을 건넨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9-12-2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특종으로 선정 될만큼 좋은 페이퍼네요.
참 많은 분들이 가셨죠~ 삼가 그분들을 기리며...

Tomek 2009-12-24 10:03   좋아요 0 | URL
아홉수라 그런걸까요? 2010년에는 좋은 소식만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novio 2009-12-2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고, 우리 옆에 언제나 있을 것만 같았던 분들이 이미 세상을 달리했군요. 솔직히 실감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역사에서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그리고 브리트니 머피의 죽음은 한 해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올해는 정말 이래저래 슬픔이네요.

Tomek 2009-12-24 14:54   좋아요 0 | URL
올해의 슬픔이 내년에는 기쁨으로 돌아와주길 바랍니다.
Adieu, 2009.

글샘 2009-12-29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죽었으면 떡돌린다는 넘은 안 죽고, 피눈물로 저문 한 해였습니다. 불은 유난히 많이 나구요. 슬픔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내년엔 또 얼마나 슬픈 한 해가 될는지요.

Tomek 2009-12-29 11:10   좋아요 0 | URL
2010년엔 좋은 소식만 들려오길 기대합니다. 그래도 아직 상자안에 '희망'은 남아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시간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발로 꾹꾹 밟어 쓴 풍경과 상처 그리고 아름다움

   요즘들어 김훈의 책을 '과하다'싶을 정도로 많이 읽었다. [작가와의 만남]에 다녀오면 좀 그 양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어찌된 게 더 늘어났다. 10대 초반에는 이문열(이게 다 『삼국지』 때문이다), 중반에는 이현세, 10대에서 20대를 관통하는 조정래. 20대 초중반의 하루끼. 20대 말의 이토 준지와 고우영 그리고 30대에 만난 박민규, 성석제. 그 외에는 이렇게 전작을 파고든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영화와 음악은 그 목록이 좀 더 많은 것 같다... 원래 천성이 그런가.) 

   짧은 시간에 그의 저작들을 읽다보니 괜시리 겹치고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원래는 『공무도하』 리뷰에 적었어야 했는데, 대충 날림으로 생각하고 적다보니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 같다. 리뷰의 완성은 죽기 직전에야 완료되는 것인가. 아무래도 리뷰는 끊임없이 덧붙여져지는 숙명인가 보다.

   『풍경과 상처』에서 김훈은 강진을 돌아보며 정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에 대한 글을 썼다. 성리학의 시대이념이 만들어낸 정약용이 천주교도가 되고 그의 형 정약전과 매형인 이승훈도 역시 천주교도가 된다. 그러나 1801년 정약용의 적극적인 배교로 주문모 신부의 존재가 폭로되어 잡혀들고 매형인 이승훈 또한 잡혀들게 한다. 국청 마당에서 형틀에 묶인 정약용과 이승훈의 대질 심문. 매형과 처남이 서로를 저주하는 지옥같은 광경. 그 속에서, 이승훈 역시 자신이 정약용에게 영사를 주었다고 폭로한다. 이당시 정약용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이러한 적극적인 배교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기나긴 유배생활을  한다. 살기 위해서 국청 마당에서 느꼈던 치욕. 조선시대 엘리트였던 정약용은 얼마나 치욕적이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함께 수학한 사람들과 자신의 매형을 배신해서 얻은 목숨을 이어간다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평판은 어떠했을까.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수 많은 빛나는 저작을 저술했어도, 자신의 생애에 파고든 치욕에 대해선 한 줄 쓰지 않았다. 그는 그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갔다. 

   『자전거 여행 2』에서 김훈은 정약용의 고향 양수리 두물머리를 보며 정약용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한다. 이런 치욕을 감수하고 유배생활을 마친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열수(洌水)라 하고 죽을때까지 그 호를 썼다. 열수는 한강의 옛말이고 그가 태어난 양수리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정약용은 조선 성리학이 키워낸 시대이념의 엘리트였으나, 천주교와 기나긴 유배생활로 조선의 현실을 비판한 '리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그가 태어난 두물머리 처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듯, 그렇게 합쳐졌다.

   『공무도하』의 장철수는 창야(倉野)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농대를 졸업하고 학교 주변에 머물렀다. 공장의 파업으로 노학연대에 참가하고, 사고인지 의도인지 모를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추도사를 한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그는 세상을 단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을 긍정하기 때문에 단념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세상은 아니라고 한다. 노목희는 그가 '이런'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연행됐다. 그가 풀려남과 동시에 일급 수배자들이 일제히 연행됐다. 형사와 장철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결과는 안다. 그는 밀고를 하고 배신을 했다. 공권력의 힘 앞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배신한 그 치욕을 장철수는 '한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아득한 곳을 향해 돌아서는 느낌'이라 했다. 그리고 그는 유배가듯 해망(海望)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 때의 일은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 치욕을 몸에 담고서 살아간다. 

   장철수가 해망에서 고향 창야로 돌아오는 계기는 그의 신장을 떼고 받은 돈으로 '바다에서 고철을 건진 죄'의 값을 갚고 나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그의 죗값도 그의 신체도 일정한 돈으로 환산되고 그의 신체와 죗값의 등가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약용이 그의 치욕과 죗값을 빛나는 저작으로 대신했다면, 장철수는 그의 노동과 신체로 그의 치욕과 죗값을 대신했다. 조선 성리학이 지배이념인 시대와 돈이 지배이념인 시대의 절묘한 대구처럼 보인다. 다산이 지금 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장철수처럼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읽은이의 흰소리로 들릴 수도 있고 비약이 너무 심한것 같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장철수의 모습에서 다산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치욕을 드러내지 않고 몸에 담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남아있는 자들의 이런 저런 평가는 하나마나한 소리로 들린다. 김훈은 다산과 장철수를 통해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치욕을 감내하고 같이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런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 덧붙임 

   1. 2000년 여름에 다산초당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다산 초당을 직접 보고 들었던 생각은 "캬~ 이거 완전 꿀 빨고 계셨겠구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한여름인데도 시원한 위치에 초당의 크기도 예상보다 굉장히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찾아 읽어보니 지금 초당은 증축된 것이라 합니다. 조금 옮겨 봅니다. 

 

   
 

   여기서 잠깐 한 호흡 돌리고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내 다산초당이 보인다. 이름은 초당이라고 하였건만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툇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여 도저히 유배객이 살던 집 같지가 않다. 나도 본 일이 없지만 실제로 이 집은 조그만 초당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너져 폐가로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이처럼 번듯하게 지어놓은 것이다. 다산을 기리는 마음에서 살아 생전의 오막살이를 헐고 큰 집을 지어드린 것이라고 치부해보고도 싶지만, 도무지 이 좁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크기여서 그것이 못마땅하다. 더군다나 예비지식 없이 온 사람들은 유배객 팔자가 늘어졌다는 생각만 갖고 가니 이것은 허구 중의 허구이다   

유홍준 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산 초당의 허구와 진실」 中

 
   

 

   2. 그러면 다산 초당의 크기는 얼마했을까. 미당 서정주 시인의 외할머니가 살았던 크기로 짐작해봅니다. 그래도 그보단 조금 더 컸겠지요. 『풍경과 상처』에서 조금 옮겨봅니다. 아마도 『공무도하』에서 방천석이 살다가 오금자에게 주고, 장철수와 후애가 같이 사는 그 집도 이랬을지 모르겠습니다.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아서 옛모습 그대로라고 마을의 어른들은 말했다. 눈물송이 같은 버섯의 초가집이었다. 쌀뒤주만한 방 두 칸은 흙벽이 드러나 있었고, 그 끝에 흙으로 부뚜박을 빚은 부엌 한 칸이 달려 있었다. 처마가 흘러내려 그 끝이 땅에 닿을 듯했다, 건넌방 앞으로 땟국에 절은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어른 한 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의 작은 툇마루였다. 시 속에 나오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였다. 미당의 어머니의 처녓적 손때와 외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툇마루였다. 미당의 생가는 이 외갓집에서 질마재 네거리를 건너간 산 아래 있었다.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는 아이가 어머니의 매를 피해 이 외갓집까지 달려오려면 한 십여 분 걸릴 것이었다. 마루에 비치는 외할머니의 얼굴과 나의 얼굴이 나란히 손자의 낙원이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나' 그리고 '외할머니'의 모습이 함께 비치는 이 때거울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었다라고 미당은 적었다. 

   그 툇마루는 지금도 사람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때에 절어 있었다. 

『풍경과 상처』 「오줌통속의 형이상학」 中

 
   

 

   3. 김훈의 데뷔작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 '장철민'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고향은 강원도 어느 산골 태생이고 농고를 졸업했습니다. 군대를 갔다온 25세부터 6년간 포크레인과 택시를 운전하다 소방관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소 '의도적인 사고사'를 당합니다. 그는 죽어서 모든 비난을 받지만, 그는 죽었기 때문에 그 치욕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직으로 처리되지요. 데뷔작에서 김훈은 정약용의 '순결과 치욕'에 대한 입장이 덜 정리된 것 같습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0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5 0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5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5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5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5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본의 아니게 불쾌한 기분이 들 수 있는 이미지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며칠 전에 '세계 최장신 213cm 여성 모델'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그냥 보기에, 누군가 포토샵으로 장난을 한 것처럼 보였는데, 관련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사실이었다. 실재가 가짜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마존 이브(Amazon Eve)고, 국적은 미국, 키는 213cm라 한다. 처음엔 그녀의 유난히 큰 키때문에 시선이 끌렸지만, 보면 볼수록 독특한 그녀의 표정에 자꾸 눈길이 갔다.    

 

   

 

   실재같지 않은 훤칠한 키, 그리고 분명 웃고 있는 모습이지만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는 모습과 치켜뜬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 강한 기시감(旣視感)을 불러 일으켰다. 맞다. 난 그녀를 언젠가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서 후치를 기억하게 했다.  

 

  

이토 준지의 그녀, 후치


   2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한 번 보면 기억에 각인을 시켜놓을듯한 강렬한 인상을 지닌 후치는 공포만화로 명성을 쌓은(현재 진행형 동사임) 이토 준지의 단편 만화에서 나온 캐릭터다. 그녀는『소이치의 저주의 일기』중「소문」에서 데뷔했다. 소이치가 단순히 반 친구를 놀리기 위해 연못에 무시무시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냈는데 실제로 나타나는 역이다.  

   그리고 같은 책「패션모델」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고정시킨 강렬한 역을 맡는다. 키 큰 모델이 아마추어인들이 찍는 영화에 배우로 발탁되어 촬영을 위해 산에 갔는데 그녀가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이다. 시공사 구판에서는 『소이치의 저주의 일기』에 두 편이 다 들어있지만, 새로 나온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시리즈에는 5권 『뒷골목』과 6권 『소이치의 저주 일기』에 두 에피소드가 나뉘어져 있다. 이전 구판이 후치의 이야기를 소이치 이야기 결말부에 대한 덧붙임 식으로 다루었다면, 이번 신판에서는 그녀를 당당한 개별적 캐릭터로 다룬 셈이다.   

 

    

 

   이토 준지의 후치 사랑은 워낙에 각별해서 후에 그녀를 한 번 더 출연시킨다. 『어둠의 목소리』 「도깨비집」에서 그녀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경탄과 경악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 어둠의 목소리:궤담』 「소이치 전선(前線)」에서의 등장 이후로 (아마도 아쉽지만) 그녀의 모습은 더이상 보기 힘들 것 같다.  

 

   왜 아마존 이브를 보고 후치를 기억해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 건강한 모델일 것이다.  

 

   


 

*덧붙임 

   1. 이토 준지는 개별적 캐릭터로서 후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후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인터뷰를 조금 옮겨놓겠습니다. 전문은 더링님의 블로그에 가셔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이야기의 소재들을 생활을 찾는다고 하는데, 당신은 생활 속에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흥미로운 소재를 생각한 후에 무서운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 「패션모델」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나? 

이토: 잡지를 읽는데 어떤 모델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그녀의 표정은 매우 섬뜩했다. 패션모델치곤 독특해 보였다. 그래서 그걸 과장시키고 식인이라는 설정을 추가했다. 그랬더니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토준지 다빈치 매거진(1998)인터뷰
인터뷰: 이와네 아키코
번역자: 더링

 
   

 

   2. 후치의 입을 보니 또 한사람이 생각나는군요. 7080세대라면 다들 기억 하실 듯 합니다. ^.^



에이미, 지못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orgettable. 2009-12-0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섭군요 ㅠ_ㅠ

블루베리나이츠 리뷰를 보고 상큼했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이토준지의 만화가..^^;; 중학생때였나, 이 만화책을 보면서 두근두근하며 최대한 손이 그림에 닿지 않도록; 책 모서리를 잡고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역시나 이렇게 이미지를 따로봐도 무섭군요 ㅠㅠ

Tomek 2009-12-04 09:37   좋아요 0 | URL
본의 아니게 무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저도 처음엔 이토상의 만화를 보고 무서워했었는데, 계속 읽다보니 그 상상력의 힘에 압도되더군요. 특히 「기나긴 꿈」이나 「길 없는 거리」같은 작품들에서 소재주의를 넘어서 인간의식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은 소재주의에 머무는 듯한 경향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다른 작가들이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