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팬티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한 잎의 여자'를 쓰신 오규원 시인의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라는 시집에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를 인용하겠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와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재미있는 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동자를 굴리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걱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병원에 실려 갈 것을 걱정할 정도의 사고 경험이 없기도 하지만, 매일 팬티를 갈아 입으니까 언제 갈아 입었는지 걱정도 안 한다. 하지만 내가 입은 팬티의 은밀함에 대해서 만약의 경우에 대한 우려를 시인의 시에서처럼 아예 안 할 수는 없을 듯.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책 [팬티 인문학]
에 나오는 첫 이야기, 1950~1960년대의 소비에트를 무대로 한 소설이나 에세이, 회상기에 자주 등장한다는 팬티 이야기( 남자와의 첫 관계를 하는 데 있어서 팬티의 중요성??ㅎㅎ)를 읽으면서 무척 공감이 갔는데(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공감이 간 게 아니라 아마도 그런 얘기를 많이 읽었어서 그런가???) 이번에 읽고 있는 황인숙씨의 [인숙만필]
에도 팬티에 얽힌 얘기를 읽으면서 키득거렸다. 황인숙씨의 친구가 대학에 다닐 때의 이야기라는데 어느 날 하숙집에 돌아와 보니 남녀 하숙생들이 그녀의 팬티를 한 가운데 놓고서 대청마루에 모여 낄낄거리며 팬티의 임자를 찾고 있었다고. 황인숙씨의 친구는 기품있는 미녀였다고 하는데 그 팬티는 낡고 펑퍼짐한 팬티였단다. 그래서 그 누구도 팬티의 주인이 그 친구라고 생각을 못했다고. 그리고 또 다른 에피소드를 인용하면서 미녀들은 수더분한 팬티를 입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결론처럼 "
세상엔 60억의 사람이 있고, 60억의 팬티관이 있다."고 쓴다.
마리여사가 자신의 책 [팬티 인문학]에서
"속옷은, 특히 하반신에 입는 속옷은 사회와 개인,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 사이를 분리하는 최후의 물리적 장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역사나 경제를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포착해볼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심각한 역사적 사건과 사소한 이야기를 연결하는 접점이 되는 게 아닐까? 아랫도리 속옷에는 모든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는 속내도 있었다." -p.254
라고 쓴 것처럼 모든 흥미로운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일단은 팬티가 아주 개인적이면서 은밀하기 때문이겠지.
이렇게 길게 서두를 꺼낸 이유는 내 얘길 하기 위해서. 였지만 어떤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페이퍼는 미완으로 끝을 맺는다.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아쉽고 틀에 갇혀 있는 내가 한심하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이렇게 사나 보다라는 쓸쓸한 자괴감까지,,,어어 처음 얘기를 하려고 할 때는 이게 아니었는데,,,ㅠㅠ 하지만 이 페이퍼를 그냥 올린다. 미완성이지만 어느 날 한 뼘 더 자유로워진 나를 찾게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