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아들의 천재성 부인한 나르시시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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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17) 쇼펜하우어와 어머니 요한나

아들 쇼펜하우어(사진)가 필경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괴테의 예언에 요한나(JohannaT.Schopenhauer, 1766~1838)는 발끈한 채 그 유명해진 문장으로 대꾸한다: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어요!” 사랑을 ‘자기 자신이 타자 속에 존재함(Seinselbstsein in einen Fremden)’으로 여기는 헤겔적 공식에 따르면, 어머니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를 자신 속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막은 셈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세상 속에 성인으로 독립하는 법인데, 요한나는 아들 쇼펜하우어의 (통과의례적) 통로를 봉쇄한 것이다.

모자 사이의 이 갈등은 우리에게만 낯선 게 아니라 그 자체로도 기이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일심동체’라는 유용한 거짓말처럼, 모자 관계의 환상은 실로 적잖은 현실적 갈등을 숨기며, 또 결국 숨길 수 없으므로 더욱 더 그 환상을 고착시키려 한다.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동무론과 관련해서 ‘세속(世俗)’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재서술해왔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호의의 희비극 공간’을 가리킨다.

요한나는 그 철학자 아들을 통해서야 흘낏 알려지곤 하지만, 당대에는 그 나름대로 명망있는 저술가였다. 다만, 그녀는 괴팍하고 침울했던 아들의 재능만은 끝내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서는 나르시스적 집착과 허영을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나로서는 이 내부-갈등이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피를 나눈 사이에서도 기질과 취향의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종교나 이해관계의 치명적인 편차, 심지어 계급갈등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 내부의 갈등을 은폐하거나 무마하려는 제도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의 가족주의적 엔딩에서와 같이 미끈하고 뒤끝없이 미봉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아들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은 나름의 경지(!)를 이룬다. <수상록>(1845)에 요약되어 있는 그의 여성관에 의하면 여자는 종족보존의 도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여자들에게 정의, 용기, 절제 같은 덕목을 부여하기를 꺼렸고, 이후 여성 혐오증은 중세적 암흑기의 참학(慘虐)을 거쳐 근대 깊숙이 이어져 왔지만, 쇼펜하우어의 논설은 그 문투와 기운에서 사적 비난의 기미가 짙고 심지어 경미하게나마 병적인 구석조차 엿보인다.

그 자신 명망있는 저술가였던 요한나
아들의 세상 속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 통해
쇼펜하우어는 평생 애인도 친구도 없이
불신벽과 병적인 여성혐오증에 갇혀 생 마감해

물론 쇼펜하우어의 여성 혐오증을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태도와 성정으로 소급시키곤 한다. 인간사에서 한 곳으로 수렴되는 인과는 대개 사후의 재구성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설명’이며, 설명은 대체로 ‘기원’을 죽인다. 그러나 그 인과 속에서 까탈스러운 아들의 몫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증상의 중요한 부분을 그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 귀속시키려는 해석은 큰 무리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문제의 열쇠는 문필가의 재능과 허영이 만만치 않았던 요한나가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어 보인다.

사랑을 인정의 틀을 통해서 사유했던 청년 헤겔의 직관을 임상적으로 활성화시킨 인물은 영국의 심리분석가인 위니콧(Donald W. Winnicott)이다. 위니콧에 따르면, 아이가 나르시스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독립된 인격으로 성숙하기 위한 조건은 어머니가 아이의 원형적-파괴적 행동을 견디며 그 재능과 개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이가 세상 속에서 주체화할 수 있는 능력은 곧 그 어머니의 지속적인 보살핌에 대한 시원적이며 진득한 신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내 짐작에 이 초기 신뢰의 부재는 쇼펜하우어의 성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의 불신벽(不信癖)은 호사가들의 소재가 되곤 할 정도다: 장전한 권총을 머리맡에 감추고 잠에 드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발사의 면도날에 극심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심지어 파이프를 통에 넣고 자물쇠를 다는 것은 사뭇 병적이다. 괴테의 고지(告知)처럼 요한나의 아들은 결국 ‘위대한’ 사상가가 되긴 했지만, 어쩌면 끝내 세상 속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는지도 모른다. 반복하지만, 특히 어머니와의 초기-신뢰 관계, 혹은 특수한 상호인정관계이자 의사소통구조로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이가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벌인 추태 역시 가히 편집증적이다. 그가 경도한 불교의 무상론(無常論) 역시 충족되지 못한 지적 허영의 이면이었을 가능성조차 매우 농후하다.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물론 그의 유아적 인정투쟁의 강박적 태도는, ‘한 가족에 두 명의 천재는 없다’는 어머니 요한나의 지적 허영과 질시로 재차 소급된다.

이 기묘한 철학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 왜 그는 애인도 친구도 없이 개와 더불어 살았을까? 그 개는 그의 어머니 요한나와 어떻게 관련될까? 아니, 그저, 위니콧을 빌려 조금 애매하게 말함으로써 이 민망한 질문을 에두르자: “의사소통적으로 잘 보호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정(사랑)이 형성되는 조건이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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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진실의 글쓰기로 호출한 ‘동무’
당대 최고 작가이면서 애국자인 에밀 졸라가
왜 암살 위협에도 일개 유대인 장교를 변호했나
그것은 바로 글쓰기라는 무국적 매개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 타인과 지식인이 연대하는 길
한겨레
» 에밀 졸라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동무와 연인(16) / 에밀 졸라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군복무 시절 내내 중대장은 내 고향이 서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 중의 나는 종종 일본인으로 혼동되곤 했다. 이곳 전주에서 만난 몇몇은 내 고향을 강원도라고 넘겨짚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구내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아이들은 나를 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기원(起源)! 내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부로서의 역사는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어 공부는 오히려 단박 기원을 죽이고 이드거니 무늬(人紋)를 키우는 일이다.

일찍이 생 빅토르 후고(1096~1141)는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오란 미숙아’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로써, 이른바 지역 감정의 마음보가 얼마나 노오란 미성숙인지 단번에 드러난다. 그는 중급의 인간을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자’(코스모폴리탄)로 정의한 다음, 마지막으로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방인)를 상급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낡디 낡은 말처럼, 선구자는 늘 탕자(蕩子)이거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흔히 철학을 ‘낯설게 하기’의 훈련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지어 볼 만한 대목이다.

‘고향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 ‘피와 땅(Blut und Boden)’으로 귀속되지 않는 삶의 양식은 무엇일까? 철학하는 자의 실존적 태도로써 낯설게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글쓰기는 반(反)고향의 고향이다. 물론 모든 철학이 ‘낯설게 하기’도 아니며, 글쓰는 자가 상급의 인간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기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는 고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대변되는,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를 변호하는 그의 일련의 글은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넘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사적 연민의 대상이나 일개의 부당한 소송이 아니라 조국 프랑스를 그 중심에 두고 사고해야 할 자유와 인권의 세계사적 대의로 해석한다;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진실을 웅변하는 중에 적절하게 애국주의의 양념을 치기도 한다. 한 유대인(드레퓌스)의 대변자가 되느라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는 명예의 배수진을 친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40권의 제 프랑스어 작품을 고려할 때 제가 과연 프랑스의 영광에 충실한 프랑스인이 되기에 그토록 모자란 사람일까요?”

그러나 사건의 요체는 이 점에서 오히려 역설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졸라의 조국과 고향은 아도르노의 말처럼 오히려 글쓰기이며, 그 글쓰기의 행위 속에서 개현하는 보편성, 세계시민성, 그리고 외부성인 것이다. 언필칭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라고 한다면, 진정한 프랑스인은 곧 프랑스의 바깥에서 프랑스를 되돌아/굽어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의 펜은 명쾌하고 진득하게 증명한다. 그는 프랑스적 이념을 들먹이면서도 내내 프랑스의 바깥에서 사유하는데, 바로 그것이 글쓰기의 본령이며 지식인의 조건이다.

대체 졸라에게 생면부지의 드레퓌스라는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당대 최고의 작가가 일개 장교의 진실에 손을 내민 뜻은 무엇이었을까? 투옥과 망명과 암살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면식도 없는 드레퓌스를 위해 과감하고 끈질기게 투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둘 사이에 사적 접촉이 없었기에, 그리고 그의 매체가 글쓰기였기에, 오히려 졸라의 공분(公憤)은 내내 외부적 보편성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장 칼라스 사건의 부당함을 항의하기 위해 <관용론>을 쓰고 법정 나들이를 불사했던 볼테르처럼, 졸라 역시 드레퓌스라는 낯선 타인의 인권과 진실을 글쓰기라는 보편성의 프리즘을 통해 풀어놓았던 것.

바로 그것이 지식인들이 ‘역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의 타인들을 동무로서 호출하고 환대하는 길이다. 졸라가 일면 애국주의에 기대면서도 프랑스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라는 무국적의 매개를 통해 ‘역사의 빛’ 속에서 사유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드레퓌스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졸라는 그를 존경하고 찬미한다며 너스레를 놓긴 하지만 그는 소심하고 성실한 군인일 뿐 결코 영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소하고 평범한 한 개인의 불행을 보편성(역사) 속에서 헤아리고 또 그것을 외부성(글쓰기) 속에서 밝혔던 것은 진정 지식인의 몫이었다. 실로 드레퓌스라는 타자(유대인)를 대하는 졸라의 방식은 일관되게 ‘역사 속에서 나아가고 있는 진실’의 행보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이윽고 졸라가 드레퓌스를 동무로 호출하고 그의 운명에 동참하는 방식은 (르네 지라르 식으로) 사뭇 ‘신화적’이다. 희생양의 미래적 전망 속에서 둘을 일치시키는 졸라의 직관적 태도도 흥미롭다. 1898년 2월 졸라가 배심원 앞에서 읽은 글이다: “저를 단죄하는 것, 그것은 저를 더욱 더 대단한 인물로 키워주는 일일 뿐입니다.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한 자는 결국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1899년 9월에 발표한 글에서 졸라는 드디어 그 평범한 드레퓌스의 운명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지금까지 그(드레퓌스)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의 벼락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오늘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지고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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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철학노트’ 건네고 북으로 간 윤노빈과 김지하의 ‘물매’
윤노빈은 1982년 월북 며칠 전 밤 김지하를 찾아와
철학노트 ‘님에게’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노빈에게 한울님은 고통 속의 한반도였고
김지하에게 한울님은 윤노빈이 아니었을까
한겨레
» 윤노빈 / 김지하
동무와 연인 ⑮ / 윤노빈과 김지하

당신은 윤노빈 교수(사진 왼쪽)를 모를 수도 있을 겝니다. 그러나 김지하 선생(오른쪽)을 모를 리는 없겠지요? 두 분은 막역한 친구랍니다. 그 중의 한 분은 북한의 어느 곳에, 그리고 또 한 분은 경기도 일산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윤 교수는 대학에서 나를 2년간 가르친 은사입니다. 김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원주중학교의 동기생이었고, 서울대 문리대를 함께 다녔으며, 무위당 장일순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고 합니다. 서울의 유학살이에서는 서로 격조하다가도 방학중에는 원주에서 다시 만나 아침마다 헤겔을 공부했다고도 합니다: “노빈은 방학 때는 아침에 나와 함께 공부하고, 낮에는 저희집 가게인 중앙시장의 피륙전에서 방석을 내다 깔고 앉아 장사를 하고, 밤에는 나와 함께 토론을 하며 술을 마시곤 했다.”

알다시피,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서부터 본격화된 김 선생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갖은 곡절을 거치면서 신군부의 폭압정권이 들어선 1980년 12월에 형집행정지와 더불어 일단락됩니다. 스스로 통과한 폭압적 죽음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명운동의 물꼬를 트며 사상사적 기행을 시작하는 시점이었지요. 바로 이 무렵, 그간 성실한 학자로서 운신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여온 윤 교수가 돌연 월북합니다. 1982년 9월 경이었고, 나는 당시 군생활 중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윤 교수의 월북과 그 뒷소식을 두고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나는 그 모든 추정과 진단을 믿지 않으며 그 사건의 이면과 깊이에 대한 내 나름의 한 ‘생각’이 있습니다. 윤 교수의 속 마음을 누구보다도 곡진히 헤아릴 김 선생도 세간의 소문을 일축하고는 나름의 탁견을 제시합니다. 김 선생이 보기에 그의 친구인 윤 교수는 반체제적 도피의 이미지보다 “훨씬 큰 사람”입니다. 김 선생이 스스로 반신반의하면서도 잠시 자문(自問)처럼 내비치는 직관은, “북쪽에 가서 그의 ‘브니엘(Peniel, ‘사람은 사람에게 한울이다’)’을 실천하여 미구에 남쪽에서 올라올 민주화와 생명운동의 물결에 북한측 나름으로 부합(符合)하려는 통일을 위한 대응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윤 교수의 월북행에 대한 김 선생의 해석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로서는, 친구가 읽는 친구도 의미가 있지만, 제자가 읽는 스승도 그 나름의 뜻이 있겠다 싶고, 내가 읽는 윤 교수의 결행은 보다 근본적인 무엇이며 그렇기에 더욱 상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 선생이 소개하는 두 친구의 마지막 상면 장면은 징후적이다 못해 차마 묵시록적입니다. 다소 길지만, 꼭 새겨둘 대목이라 여기에 인용합니다: “그(윤노빈 교수)는 중국을 통해 월북하기 직전 며칠 전 밤에 내게 왔었다. 무위당 선생을 보고 오는 길이라는 한 마디와 나에게 읽어 보라고 건네준 그의 철학 노트 <님에게> 이외에 우리 둘 사이에 오고간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때 마침 정전이 되어 약 두 시간 이상이 캄캄칠흑이었다.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리고 불이 들어오자 그는 떠났다.”

믿을 수 없는 이 풍경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김 선생은 이 얘기를 믿으라고 하는 말일까요, 혹은 나같은 제자나 후학들에게 풀어보라고 던지는 수수께끼일까요? 대학에서 희랍철학이나 현상학 등을 강의하던 윤노빈 교수가 남한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이자 국제적 상징인 그의 친구 김지하 선생을 찾아왔는데, 두 시간 이상을 한 방에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조차 없었고, 현장을 지탱했던 유일한 매개는 정전 속의 어둠과 <님에게>라는 이름의 노트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곧 월북하였는데, 실은 이제 그 노트조차 분실되고 없다는 것이지요!

친구와 동무가 갈라지는 지점은 두 사람의 존재를 잇는 매개의 종류와 그 사용법입니다. 그래서 글친구도 있고 말벗도 있고 술친구도 있고 주먹친구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두 시간 이상이나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던 이 두 친구 사이의 매개였던 그 어둠과 <님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어둠과 <님에게>를 만든 당대적 현실의 고통과 질곡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느 사석에서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내게 윤 교수는 ‘대학교수가 될 것’과 ‘스피노자처럼 살 것’을 이율배반적으로(!) 주문하고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나는 내내 대학교수와 스피노자의 사이를 비틀거립니다.) 윤노빈 교수는 긴 옥살이에서 풀려난 김지하 선생에게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물론 <윤리학>은 세속의 선악과 시비를 아득히 포월(包越)하는 브니엘(하느님의 얼굴)의 무한성이며, 그 무한성을 엿보는 개인 실존의 책임성이지요. 늘 서양철학자 그 이상이었던 윤 교수는 그 브니엘을 ‘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브니엘은 더 이상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20세기의 고통이 결절하는 지점인 한반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신생철학>에서 너무나 절절히 외치고 있듯이, 그의 브니엘, 그의 한울님, 그의 님은 고통 속의 한반도이지요.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그리고 그 님의 반쪽을 찾아 월북한 윤노빈 선생은 김지하 선생에게 한울님이었고요: 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서 김지하 선생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든 평양에서든 개성이나 금강산에서든 사람은 사람에게 한울이다. 노빈은 지하에게 한울님이다.” 윤 교수는 그의 <신생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들의 눈이 가장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것은 한울님의 얼굴(브니엘)이다.” 아, 남과 북에 흩어진 채 늙어가고 있는 윤노빈 교수와 김지하 선생, 그 동무관계는 내게 한울님입니다.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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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스승의 기운이 현신한 제자
함석헌 등 다석 유영모의 여러 제자 중
특히 충량하게 스승을 따랐던 현재 김흥호
일상과 강의도 진득하게 스승을 모방해
다석을 묻는 질문에 “진인, 지인이었지요!”
한겨레
동무와 연인⑬ / 다석 유영모- 현재 김흥호

출근할 때마다 현재 김흥호(1919~) 선생의 방을 지날라치면 '사각사각', 늘 먹가는 소리와 함께 진한 먹물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 사이, 그는 묵향(墨香) 가득한 작은 서재의 창 밖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있곤 했다. 나는 그의 연구실에서 먹가는 기계를 난생 처음으로 보았고, 그를 통해서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도(道)는 실천'이라는 그 진부한 얘기가 한 사람의 생활 양식을 통해서 진득하고 이드거니 구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1990년대 초에 나는 현재 선생과 같은 학교에 재직했는데, 우연찮게 그의 연구실은 바로 옆 방이었다. 근 3년간 옆집살이(!)를 하면서 매일같이 스치고 대하는 중에 이런저런 인연을 쌓을 수가 있었다. 산행을 같이 했고, 일식(一食)하던 어느 자리에 운좋게 동석하기도 했으며, 일본어책을 읽다가 궁색한 곳이 생기면 냉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촉급하게 상경해서 이사할 곳을 얻지 못해 난감했을 때에는 이화여대 후문 쪽에 있던 그의 집에서 근 보름간을 기숙하기도 했는데, 그 정갈하고 소담한 정원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어느 학기엔가 그가 강의하던 <선(禪)과 철학>이라는 수업 중에 들어가 몇 차례 서양철학을 강의하면서부터 그는 내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내 강의의 인상을 얹었다면서 <유심현묘(幽深玄妙)>라는 붓글씨를 써서 액자에 담아 선물로 보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로 그는 내게 편지를 보낼라치면 꼭 나를 “천재”라고 칭하곤 했고, 위당 정인보나 다석같은 분을 스승으로 두었으면서도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 학교에서는 내가 김 교수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정색을 하곤 했다. 불과 손자뻘의 나이였던 나는, 아마도 ‘내가 몹시 귀엽게(!) 보이는가 보다’라고 여겼을 뿐, 그 드문 인연에서 내 공부길의 새로운 진경(進境)을 탐문할 지혜도 깜냥도 요량도 없었다.

근현대 한국 지식계의 근원적 불행처럼, 내게도 스승이 없었으며 스승을 찾을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H.G. Gadamer) 식의 해석학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철학의 전수(傳授)는 스승-제자라는 제한되고 형상화될 수 없는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바디우(A. Badiou)식의 철학관이 오히려 타매되는 냉소와 권력욕망의 지옥, 그것이 한국 철학계의 비밀이다.

물론 내가 그의 스승인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필시 그같은 인연 덕분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을 비롯해서 다석 선생을 따른 제자들이 여럿 있지만, 특히 그는 스승의 자취를 진득하고 충량하게, 조용하고 지며리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 일식(一食)도 결국 다석 선생을 모방한 버릇이었지만, 그가 여든이 넘도록 일반 청중을 상대로 동서양의 경전과 사상을 넘나드는 강의-증여에 열심이었던 것도 역시 스승 다석을 모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다석 선생을 뵐 기회조차 없었지만, 만 3년간 현재 선생의 일상을 그 편린이나마 지켜보는 가운데 글로 읽은 그 스승의 기운이 현신(現身)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논문 한두 편만 썼다 하면 냉소와 객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 토끼들의 마을- 호랑이들은 모두 파리나 런던, 베를린이나 뉴욕에 있다는 신화! -속을 살아가면서 가장 놀랐고 또 부러웠던 것은 그 도저한 권위와 그 신뢰였다. 그가 스승을 회고하는 글이나 말 속에는 스승의 권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태고의 것처럼 어둑하지만 깊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선생님이 너무 여러번 한글에 신비가 있다고 하셔서 요새는 나도 무엇인지 한글에 신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유영모 선생과 더불어 30년>. 김흥호)

스승의 길을 무턱대로 모방할 수 있는 쾌락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같은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에서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교학(敎學)의 경지일 것이다. 청산주의와 따라잡기로 일관한 한국의 정신문화적 근대가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은 무엇보다도 마음놓고 본받을 수 있는 ‘생산적 권위’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이며 창의적 긴장의 원천으로서 후학들의 삶과 앎의 행로를 부단히 채근하거나 계고(戒告)할 수 있는 권위있는 참조인간들(Bezugspersonen)이 없었던 것이다. 수입된 종이 호랑이들이 판치는 세상! 그같은 세상 속에서는 진검승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먼 나라 맹수들의 소문만을 먹고 사는 토끼들의 마을에서는, 160㎝의 단구였던 다석 선생 앞에서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이 숨을 죽이며 죽도록 경청했던 것과 같은 진검승부의 공부와 사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죽도(竹刀)를 든 토끼들의 표절과 짜깁기 싸움판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은 스승의 권위만으로 가능해지는 진정한 모방의 힘이다. 과연, 한국의 근현대 학문사는 스승들의 주검과 무덤 위에 초고속으로 뻗어올라간 눈치보기와 베끼기의 고층 아파트.

» 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왜 일본은 모방의 천국이되 표절이 적은가?) 속에 있다. 가령,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지젝의 생산성이 그렇지 않던가? 지적 식민성이란 이 모방의 시대, 혹은 근대라는 번역과 인용의 시대를 충실하게 뚫어내지 못한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박과 냉소가 판칠 일은 당연지사.

언젠가 나는 늦은 오후의 사양(斜陽)을 끼고 앉아 그와 담소하다가 문득 선문답같은 어투에 다소간의 호기심을 얹어 물었다: “선생님, 다석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진인(眞人), 진인이었지요!” 대답도 역시 선문답처럼, 그것, 뿐이었다.

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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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3-1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곳에서 다석을 보게 되다니...요..
고맙습니다.
 
 전출처 : 글샘 > 상상력은 무한대...^^ 제목 붙이기 놀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상상하는 글쓰기 할때 써먹으려고 저장해 둔다.



1 제목 : 환경 오염 시대의 타잔(나무가 너무 말라 비틀어짐)



2 제목 : 꽃잎 휘날리며, 달려라, 똥개!



3 제목 : 아직도 선악과를 먹고있는 하와의 후예들



4 제목 : 꼬마 원피스의 꿈, 조로



5 제목 : 삽질은 힘들어 =3=3



6 제목 : 공중 그네의 아찔한 찰나



7 제목 : 우주 정복, 그 진공의 상상



8 제목 : 보물 찾기, 로또의 로망



9 제목 : 힘자랑, 남자의 탄생



10 제목 : 풍선을 타고, 무한 공간 저 너머로...



11 제목 : 가족 사진, 기억의 원형



12 제목 : 자, 힘내, 뛰어 보는거야!



13 제목 : 태권 소년과 추풍 낙엽



14 제목 : 하늘을 나는 자전거



15 제목 : 악몽, 마녀에게 쫓기기



16 제목 : 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

이것들을 재배열해서 이야기를 꾸미게 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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