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연인/⑩샤틀레 부인과 볼테르
글이 빨랐던 볼테르(1694~1778)는 그의 긴 생애 동안 100권에 가까운 책과 2만여 통의 편지를 4월 말의 벚꽃잎처럼 흩뿌리며 18세기의 시대정신 그 자체가 되었다. 볼테르보다 심오한 사상가들이 동시대를 겪으며 계몽에 진력하고 있었지만, 시대의 에스프리는 그의 분노와 재치 속에 전형적인 빛을 발했다. 워낙 다정다감한 괴테이긴 하지만, 그는 볼테르를 일러 ‘만고에 다시 없을 최고의 작가’라고 추겨세운다.
그러나 에밀리 샤틀레(Emilie du Chatelet, 1706~1749)는 글이 빠른 볼테르가 만났던 수많은 명인과 재사들 중 말이 가장 빨랐다고 한다. 단지 말이 빨랐을 뿐 아니라, 그가 종종 인정했듯이 그녀는 더 명석했다.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을 과시하며 극히 짧은 시간에 실팍한 성과물들을 내놓곤 했다. 길지 않았던 생애의 말년에 그녀는 아침 안개처럼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척에서 느끼며 뉴턴의 과학을 번역, 해석하는 작업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녀의 역작은 남성중심적 과학계의 편견과 질시를 뚫고 사후 10년 만에야 <뉴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759)라는 이름 아래 햇빛을 본다.
문제는, 당신보다 예쁘고 명석할 뿐 아니라 말까지 빠른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일에 관한 것이다. 슈레버 판사의 증례를 통해 프로이트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말로써 세상을 지배하려는 편집증적 남성 권위주의자들(=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편리한 대상은 예쁘고 말이 빠르지만 명청하든지, 명석하고 말이 빠르지만 예쁘지 않든지, 명석하고 예쁘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볼테르도 샤틀레 부인을 일러 ‘고담준론을 일삼는 폭군’이라고 비꼬았으니 그 역시 명석하고 말이 빠른 애인을 둔 탓에 제 나름의 비용을 치른 모양이다.
그나저나 변함이 없던 남성가부장 사회에서 ‘예쁘고 명석하고 말까지 빠른 여자들’은 언제,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 논의에서 로코코 시대의 살롱은 매우 중요한 결절점을 이룬다. 알다시피 근대적 지식은 개방과 공유를 특징으로 하며, 중세의 동업조합식 지식계보나 소림이니 무당이니 하는 문파별 무공의 비전(秘傳)이 주술적 밀의성(密意性)을 갖는 것과 뚜렷하게 변별된다. 병적으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숨기려 했던 뉴턴을 일러 ‘마지막 주술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한편, 지적 보호권을 제도화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적 행태야말로 업그레이드된 중세화의 조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식의 사회적 개방과 공유라는 측면에서 로코코 살롱 문화는 주목할 만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궁정 살롱에 기원을 둔 17~18세기 프랑스 파리의 살롱은 새로운 문화 시대의 징후와 징조를 한껏 배태한 곳이었다. 비록 시대적인 한계와 조건 속에서 운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18세기에 만개한 로코코의 살롱들은 그 잠재적 개방성과 평등성에서 근대의 지식인 문화를 공론화, 활성화시키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물론 최소한 18세기 중후반까지 살롱을 휘감고 있던 귀족적 형식과 아우라를 벗어버릴 수 없었고, 지식은 귀족계급간의 사교라는 매개로부터 독립할 수 없었다. 가령, 살롱 문화를 귀족적, 인위적이라고 공격하면서 대신 일반 서민의 자연적 상식에 직접 호소하려 했던 루소를 통해 그 반작용의 일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실상 19세기에 들면서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대대적으로 성업하기까지 지식은 신분제에 바탕한 인정투쟁의 맥락을 끌밋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 유통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롱은 지식의 공론화와 신분의 평등화를 통해 부르주아 지식인 문화를 기초짓는 데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팅커(Chauncey Tinker)의 표준적 평가처럼, 살롱 문화와 더불어 “귀족의 혈통보다도 기지, 지성, 인물됨이 사회적 성공의 열쇠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샤틀레 부인과 볼테르가 활동하던 18세기, 프랑스의 살롱들은 재기가 번득이는 소수의 여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적 담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나아가서, 귀족 출신이 아닌 여성들마저 자신의 지적, 문필적 재능에 의지해서 각자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었다. 요컨대, ‘당신보다 예쁘고 명석하고 말까지 빠른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일’에 관한 볼테르의 문제는 이런 식으로 생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밀리 샤틀레는 ‘당신보다 예쁘고 명석하고 말까지 빠른 여자’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독보성을 증명하는 호사가적 일화들은 적지 않고, 그것들은 여전한 남성 지식인 사회 속에서 잉여의 빛을 발한다. 그러나 연인-동무라는 관심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진리와 계몽을 향한 둘 사이의 공동 작업이다. 남여의 관계가 공사(公私)로 나뉘거나, 심지어 사감이 공의를 허무는 것이 예사인 현실 속에서 이들이 체현한 연정의 생산성은 사뭇 무서울 정도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였던 시레이(Cirey) 성의 연구소에 2만1천여 권에 이르는 책들을 사들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개 대학에서 구비한 도서관 장서와 맞먹는 규모였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 책을 쓴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녀는 도박의 재능으로 책을 사 모으기도 했던 것! 오직 200년 후의 보부아르-사르트르 커플만이 견줄 수 있을 재기와 도도함과 생산력으로 무장한 이 세기의 연인들은 서가를 종횡으로 누비며 형이상학과 철학, 신학과 도덕, 물리학과 역사학, 성서비판과 관용의 이론, 그리고 수없이 많은 편지와 문학 작품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 지적 토대 위에서 그리고 연인-동무 관계의 현명한(!) 열정 속에서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문학적,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