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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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7-03-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며칠사이 의자의 소중함을 알았다. 학교를 옮긴 후 바꿔앉은 의자, 자꾸만 아래로 꺼져들어가 책상에 대롱대롱 메달린 형국이다. 장치에 힘을 주어 애써 고정을 시켜놓아도 내 몸의 무게를 못 이기겠는지 한사코 내려간다. 내 몸을 받쳐주는 의자.. 단지 의자만은 아닐 것이다.
 

12월

               -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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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7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뻘 같은 그리움

                                                                         - 문태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잇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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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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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

                            -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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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1-27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태준, 참 낭착낭착한 시어로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좀 끈적거리고, 삶이 그렇듯 마지못해 한 호흡이라도 왔다가 가는,
그걸 보는 사람. ㅋㅋ

해콩 2006-11-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끈적거리나요? 오히려 담백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호흡... 저도 요즘 아주 깊고 긴 한 호흡을 내어뱉고 있는 중입니다.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