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학습으로 우정이 싹트는 교실 만들기
협력활동 속에 상호존중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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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경·서울 대영중, 협동학습연구회 전문위원
협동학습은 협동적인 학습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하여 구성원 간의 역할을 세분화하고 명확히 함으로써 책임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공동의 목적(학습의 극대화)을 이룰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학습구조 중심의 수업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조별학습이나 모둠학습은 프로젝트에 따라서 모둠을 구성하고 적당한 역할을 주어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서로 협력하게 한다.

그러나 조별학습을 할 때 너무 열심히 하는 일벌레가 있는가 하면 참여는 하지 않고 공짜로 이득을 얻으려는 무임승차자가 나오고, 모둠원 간의 역할분담이 불분명하여 서로의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협동학습은 역할도, 활동도, 학습내용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의도적으로 구조화한다. 서로 협력할 때 우정도 싹트고 실력도 향상되게하는 것이다.

케이건이 창안한 협동학습에는 6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있다. 4인 1모둠을 기본으로 하는 모둠구성, 서로 협동하려는 의지 만들기, 모둠 운영기술, 서로 협력할 때 꼭 필요한 사회적 기술, 협동학습의 잣대가 되어 4가지 기본원리, 수업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구조’들이 그것이다.

협동학습 활동은 참으로 다양하다.
예를 들면 ▷4자 성어나 모둠원 수에 맞게 각자 한 글자씩 동시에 외치고 맞추는 이구동성 ▷모둠원들이 사용하도록 플래시카드를 작게 만들어 암기하는 플래시 카드 게임 등은 누구나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게임이다.

또한 ▷모둠원들이 학습한 내용에 관해 문제를 내서 다른 팀으로 보내 풀게 하는 문제보내기 ▷ 두 사람이 한 장의 학습 내용을 공유하도록 만들어 함께 푸는 짝 점검 ▷모둠원 중 한 명이 다른 모둠으로 가서 정보를 나누는 하나 가고 셋 남기 ▷칠판을 모둠 숫자만큼 나누어 각 모둠의 정보를 칠판에 적고 나누는 칠판나누기 ▷학습할 내용을 모둠원들이 나누어 각자 학습한 후 그 내용을 나누는 직소 ▷학습할 내용에 대해 이야기꺼리를 주어 이야기를 엮어가는 이야기 엮기 등 활용 방법이 무척 다양하다.

협동학습은 모둠원들을, 그리고 학급 전체 친구들을 서로 존중하며 도와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빛이 나는 교수-학습법이다.

선생님들도 협동학습을 이용하여 양보하고 도와주고 평가하며 서로의 학습을 위해 노력하는 교실을 만들어보길 권한다.

홈페이지는 ‘즐거운 학교’ 내에 개설되어 운영중이다.(educoop.njoys cho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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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스승들이여, 들으시오!
교권은 존엄, 평가대상 될 수 없다
[특별기고] 도올 김용옥 "교원평가는 우리 사회 기층 도덕의 파괴"

도올 김용옥 (news)


 


 
반대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이수일 전교조 위원장은 교원평가 강행에 반대하며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철야·단식농성을 벌였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광풍노도처럼 대지를 쓸어버릴지, 떠도는 낙엽을 휘감으며 소리없이 스러질는지, 그 전망이 불투명한 채 회오리바람은 우리의 심연(心淵)에 파문을 던지며 떠돌고 있다.

그 바람에 휘감긴 자들은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판단의 이중성 때문에 수치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투지에 대한 정확한 의미부여를 보류한 채 방황키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확고한 가치판단이 결여된 탓이다.

그 가치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운운하기 전에 그 가치판단을 밑받침하는 자신의 주체적 체험의 절박성과 정당성에 대한 당당한 외침이 없는 것이다. 외칠 수 있으려면 철두철미한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티끌 하나라도 전 우주의 거울에 비춰볼 수 있는 전체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의 교육은 교사들에게 이러한 인식의 바탕을 마련해주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요즈음 세간(世間)의 모든 쇄사에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말이 들릴 리도 없고, 들릴 수도 없고, 들려야 할 까닭도 없는 세태가 스스로의 관성에 의하여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쇄사에 대한 잡언(雜言)이 대간(大幹)을 휘어잡을 까닭이 없으니 나 도올은 방관 속에 흘러가는 역사를 방치할 뿐이다.

유교윤리의 핵심, 교권의 존엄성

그러나 '교원평가제'라는 이 한마디에 대해서만은 나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 회갑의 생애 동안 교육자로서 일관된 가치관을 유지해왔다. 내가 이 땅의 후학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일순간도 떠난 삶을 산 적이 없다. 나는 교육에 관한 한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해왔다. 그러한 삶의 역정의 축적이 나에게 던져준 강인한 신념을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모든 스승들과 공유코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칼 맑스(Karl Marx. 1818∼83)는 정치·법률·문화 등 상부구조라 부르는 사회적 의식형태의 토대에는 물질적 생산력과 생산관계라고 하는 하부구조가 있으며, 그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을 역사발전 법칙으로 표방하였다. 이러한 경제사관적 교조주의나 경제결정론과는 아랑곳없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오히려 인간의 경제적 행위의 토대에는 지배적인 정신적 가치가 있다는 종교사회학적 주장을 폈다. 서구적 자본주의의 성공의 배면에는 프로테스탄트윤리라고 하는 정신적 가치가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상부구조니 하부구조니 하는 따위의 말은 원래 건축용어에서 온 것인데 지상으로 드러난 건축의 외관만을 보아서는 그 건축의 구조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 반드시 지하에 숨어있는 토대를 알아야만 그 건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일면적 타당성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사회의 네트웤이라고 하는 것은 건물처럼 상하로 완벽하게 이분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하가 상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단순한 도식도 유치한 발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하부구조가 물질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정신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다. 상하의 이원론이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모두 화엄(華嚴)철학의 원융(圓融)한 관계론을 망각한 지난 20세기의 유치한 발상들이다. 그런데 베버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형성에 실패한 동양의 유교적 윤리를 그 반증의 예로서 상술하였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난 오늘날, 발전된 사회학·역사학·인류학의 제반성과가 입증하는 것은 유교윤리(Confucian ethics)야말로 아시아적 자본주의 성취의 핵을 이루는 정신가치라는 것이다. 유교윤리는 자본주의 정신과 근원적으로 상치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세계(Lebenswelt)를 침식하면서 발생시키는 비인간적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합리적인 규범윤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유교윤리의 핵심에는 바로 '교권의 존엄성'(the Dignity of Teacher's Right)이 자리잡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단언컨대 교원평가제란 넌센스요, 어불성설이요, 망국의 근원이다. 그것은 관료주의의 안일한 타성이 빚어낸 소치일 뿐이며,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라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시대에서 과연 우리 조선문명이 지닐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역사의 키를 장악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부표하게 될 것이다.

동그라미 색칠식 수량적 직접평가는 아니된다


 
찬성 '합리적인 교원평가 실현을 위한 학부모·시민연대'는 8일 오전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원평가제 시범실시 수용을 촉구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첫째, '교원평가'라는 것이 가능하면 좋겠는데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객관화될 수 있는 수량적·계량적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교사라는 인격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평가될 수도 없고, 평가되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의 사상가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인정>(人政. 사람의 정치. 1860년작)이라는 저술에서 이미 측인(測人. 사람을 헤아림)의 방법으로 '감평(鑑枰)'이라는 계량화된 점수표를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방법의 한계를 절절이 논구하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수평가 설문지만 하더라도 하등의 의미가 없다. 우선 학생들이 설문지에 진지하게 응하질 않는다. 진지하기에는 너무도 그 설문의 내용이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 평가가 반드시 교수의 정신세계에 대한 공정한 기준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한 교수의 점수가 예외없이 60점 이하로 나온다면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한 80점에서 100점 사이의 경우 그 사이에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참으로 구차스럽고 추저분한 것이다. 내 체험으로 말하자면, 요즈음 대학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95점 이상의 점수를 따는 교수가 85점 정도의 평가를 받는 교수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오히려 낮은 점수를 받는 교수가 더 무게있고 더 진실하고 더 실력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식의 경쟁체제는 교수에게 '인기영합'이라는 부담을 주며, 교수방법의 다양성을 말살시키며, 자기가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며, 또 교수 동료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심기를 조장시킨다.

내가 다닌 하바드대학에서도, 물론 학기초에 모든 강의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는 책자가 발간된다. 그런데 그것은 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만드는 것이며, 그 강의를 가장 잘 이해한 학생이 수강소감을 문장으로 써서 타인의 수강신청자료로 활용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지막지하게 획일적인 동그라미색칠 식의 수량적 직접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강의의 장·단점이 인간적이고 격조높은 언어로 잘 기술되어 있다. 교육이란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자율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그 자율의 인격적 관계를 타율적 기준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무리 일시적 긍정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구원한 부정효과에 비한다면 너무도 사소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 더 권위 보장받아야

나 도올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나의 사상의 자유와 학생들의 배움의 자율과 교권의 불가침의 권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대학강단을 떠났다. 나는 그 뒤로 교수로서의 나의 권위를 한치도 양보한 적이 없다. 도산서원이라는 배움터는 기본적으로 퇴계를 흠모하는 학생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어 형성된 장(場)이다. 도산서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이퇴계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는 학생으로부터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대학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의의 권유를 받는다. 그때마다 내가 내거는 조건은 나의 강의에 대한 일체의 제도적·수량적 평가가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강의의 주재자요 신(神)이다. 그러한 프라이드가 없이 강의를 한다는 것은 비굴이요 아첨이요 굴종이요 생계수단으로의 하락이다. 최근에도 중앙대학교에서 이러한 조건으로 내 강의를 설강하여 크게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교육은 다양한 가치의 함양인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너무도 지고한 교육철학과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자존의 바탕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것일 뿐 일반적 교사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깐 공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나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述而>)

여기 '세 사람'이라 함은 실제로 3명의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하고 같이 가도 그들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자의 집주(集注)에 "세 사람이 같이 간다 함은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이니, 나를 제외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하다는 뜻이 되니, 결국 두 사람 다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배움을 얻는 스승이라 함은 반드시 최선의 인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불선한 사람이라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선한 스승을 보고도 나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되니 그것 또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합리적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합리의 용인이나 비합리의 대비 속에서도 합리성의 추구가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난 선생이 있으면 못난 선생이 있게 마련이다. 또 못난 선생이 있기에 잘난 선생이 돋보이게 마련이다. 내가 학생들의 평가를 거부한다는 뜻은, 내가 실력있는 교수이기에 항시 학생들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대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봉사와 헌신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순간 이미 나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으니,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끊임없는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다이내믹한 변증법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을 매학기 매강의마다 수량화되는 기준으로 즉각적으로 평가하여 고정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행일 뿐이다. 지금 한 학생의 의식세계 속에서 불만스럽게 보이는 선생의 세계가, 성장하고 난 20년 후에 지고한 교훈으로서 자리매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근원적으로 일시점적·수량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피고나 원고가 판사의 판단을 평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평가에 의해 판사의 판단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내가 생각키엔 스승의 가르침은 판사의 판결보다도 더 지엄한 권위를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는 안회(顔回)였다. 매우 이지적이고 과묵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잘 돌아가고 수완이 좋은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공자가 자공을 독대했을 때 이와 같이 물었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女與回也孰愈?) 그러니까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이옵니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그래, 나와 너, 두 사람 모두 안회만 같지 못하다."(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여기에 스승인 공자의 정직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제자만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안회는 공자를 평가하여 이와 같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어볼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우리나라 '스승의 노래' 가사의 출전이 된 이 안회의 말은 결국 사제지간의 호상겸손과 존경의 염을 표현한 것이며 유교적 덕성의 전범을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술이>(述而)편에서 자신의 배움의 세계를 가리켜,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스승의 세계도 결코 일시에 잘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둘째,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형의 지지가 그러한 평가를 통하여 좀 저질스러운 교사를 솎아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대는 근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다. 아무리 평가를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저질적 교사의 징계에까지 이르는 법적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가는 결국 교육의 장에 불필요한 잡음과 불신과 교육적 열의나 신바람의 냉각만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헛지랄'만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헛지랄에 교육부공무원들의 번문욕례가 기생하고 이간질을 통한 원격조정의 계책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국력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원평가의 근원적 목적이 저질적 교사의 퇴출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원조직과 교육부 사이에서 어떤 법적·제도적 투쟁의 문제가 되어야 하며, 피교육 당사자인 학생이 연루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인격 대 인격의 도덕적 관계가 되어야 하며 계량가능한 지식전달의 효율로써 평가되는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초·중·고등교육의 주된 가치는 지식전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바른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과 인격의 함양에 있는 것이다. 숙명여고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며 조사해본 바로도,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들이 배우는 선생을 곧바로 평가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 부당성이나 제자로서의 어색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요즈음의 어린 학생들은 어른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교원평가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삼 숙지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학교 다니던 60년대만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토론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동양에서는 권위주의적 주입식 교육이 주류라서 낙후되었다는 통론이 휩쓸었고 그래서 세미나적 교육방법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대만대학에 유학갔을 때 세계적 대석학이신 나의 스승 황 똥메이(方東美. 1899∼1977) 교수가 강의시간에 동양의 서원전통 교육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을 하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서양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쓸데없는 질문이 많다. 그리고 학생의 질의가 타인의 학업을 방해할 때가 많다. 교수란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학생에게 더 많은 학문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토론이란 강의 후에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있는 성의를 다해 그 시간에 모든 학생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지혜를 짜야 한다. 명강의란 주입식교육 만큼 더 좋은 딴 방법이 없다. 주입식이라지만 학생들은 항상 교수를 평가하며, 선생이 전달하는 정보를 끊임없이 취사선택한다. 주입식이라 해서 생도들의 자율적 권한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생을 평가한다. 되돌아서면 학생들끼리 수군거리고, 별명으로 평가하고, 걸어가면서도 토론하고, 시험 보면서도 학습내용을 비판하고, 선생의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으로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전통으로 후배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요즈음은 학생이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객관적으로 부당한 사례에 직면했을 때는 인터넷에 올리거나 다양한 게시판을 통해 사회화시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정보가 일방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웤이 형성되어 있는 나라다. 따라서 교원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토론식이니 주입식이니 하는 것도, 교육방법의 효율성과 다양성에 관한 문제일 뿐이며,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

넷째, 교원평가제에 관하여 학부형들은 모두 찬성하고 있고 교사들만이 저항하고 있다는 여론은 근원적으로 매스컴의 정보조작에 의한 호도된 인상일 수가 있다. 학교교육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을 망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자녀를 3명이나 키웠지만 자녀들의 문제로 학교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다. 참으로 훌륭하게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훌륭한 자신의 사회적 삶에 열중하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의 모범을 보이지, 학교교육에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부모일수록 학교교육의 자율적 특성을 신뢰하며,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훌륭한 부모들이야말로 침묵하는 대중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설치는 부모들의 참여를 바람직하게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유한(有閒) 족속이 될 삶의 여가가 없다. "학부형들 모두 찬성-교사들 모두 반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교원평가제에 관한 논의를 밥그릇싸움이나 이권싸움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원평가제에 관한 교사들의 반대의 근원적 모티브에는 참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우리는 믿어주어야 한다. 2천여 년의 유교전통을 지닌 우리나라의 교육자의 양심과 양식이 아직 그런 수준에까지 변질되어 있지는 않다.

다섯째, 여태까지 우리가 우려했던 중고등교육의 부정한 실태는 근원적으로 교육제도의 문제이며 교원의 내면적 도덕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교사가 시간에 들어가도 학생들이 다 졸고 있었고, 또 교사가 그런 학생들을 질책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나 권한이 주어져 있질 않았다. 학생들이 저녁에 과외로 사교육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제도가 수능위주에서 내신성적 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그러한 현상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지금도 고교 2·3학년 반에 들어가면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지만, 1학년 반에 들어가면 조는 학생도 없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일 뿐 아니라,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편다. 학교 강의시간에 충실하는 길이 대학입시의 첩경이라는 생각이 생도들에게 편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조차 촌음을 아껴 예습·복습을 하며 점심시간에도 영어독해책을 놓고 씨름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선생의 눈에는 오랜만에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다. 이와 같이 제도적 변화가 학습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지 학생과 교사의 도덕적 심성의 우열의 문제가 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를 강행하려는 자들의 발상의 근저에는 수능위주에서 내신위주로 전환됨에 따라 교원자질의 향상이 교육계의 주된 테마가 되어야 하므로 교원을 채찍질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우선 타이밍이 나쁘다. 최소한 내신위주의 긍정적 변화를 2·3년이라도 지켜본 후에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문제지 지금 당장 교원평가제를 도입하여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졸속한 발상이요, 하릴없는 공무원들의 생색내기 작전에 불과한 것이다.

노자의 말에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라는 말이 있다. 자꾸 뭘 쓸데없이 하려고 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쓸데없이 세금낭비 하느라고 보도블록을 뒤집는 짓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말 수가 있다. 교원평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들의 충심의 협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분란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교원평가제는 수능위주가 내신위주로 전환하는 것과도 같은 그러한 제도적 변화와 동일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원평가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닌 교권이라는 인격의 도덕성과 실력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은 결코 단순한 제도적 장난으로 달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교원평가제를 운운한 공무원님들이시여! 이제 그만 입을 다무시는 것이 어떠하실런지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도 필요

여섯째, 제도의 문제가 거론된 김에 일갈을 가하자면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문제는 99%가 중고등학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대학입시제도의 여하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입시제도의 문제는 곧 대학교육의 전체체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대학의 서열화와 사회진출의 학벌패거리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에는 서울대학교라고 하는 암적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에 못들어갔다는 피해의식 하나로 평생을 그늘진 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서울대학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서울대학을 없애버린다는 것이 관악캠퍼스를 폭파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서울대학을 현금의 대학이 아닌 프로펫셔날 스쿨의 집단인 상위개념의 대학원대학으로 승격시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학병의 핵을 보다 창조적인 국가에너지로서 진화시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대학교를 대학원대학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머지 국립대학들을 현금의 서울대학교 수준의 국립대학으로 통폐합하면 우리나라 교육의 절반은 해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학교육 체제개선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다 수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묵살하고 있다.

왜냐? 우리나라의 모든 체제를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보이지 않게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암암리에 이러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황당한 무계지언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체제개선에 관한 정직한 논의가 없이 일선 교사들만 닦달치는 말엽적 논의는 벼룩 하나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홀랑 태워버리는 짓거리와 똑같다. 본(本)을 개선치 못할진대 말(末)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지어다. 군자는 무본(務本)이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일지니.

일곱째, 교원평가제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는 궁극적으로 교원의 자질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깔려있을 것이다. 자질이란 전공과목에 관한 학구적 실력과 도덕적 인격의 양면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결코 교원평가로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 평가가 자질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

일요일 저녁마다 KBS에서 방영하는 고교생들의 골든벨 퀴즈 프로를 나는 곧잘 보곤 한다. 그곳에서 항상 영어문제가 하나 출제되는데 출연한 고교의 영어선생이 나와 그 문제를 읽고 학생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내가 본 수십 번의 프로그램 중에서 영어발음이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씨부렁거리는 영어의 수준이 매우 천박한 회화수준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학생들이 나와서 하는 쇼를 보거나, 그들의 조크를 보거나, 천편일률적인 몸짓이나 천박한 언행밖에는 없다. 그런 행동거지도 귀엽게 봐줄 수도 있으나 문제는 보다 고상하고 기발한,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아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웃김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처리가 대부분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학생들의 선생에 대한 평가나, 교사들 상호간의 평가, 학부모들의 평가로서 개선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어발음과 회화가 그 수준인 사람이 아무리 평가해도 달라질리 만무하다. 다시 말해서 교원양성의 교육과정과 선발과정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이는 교사들의 자질개선은 이루어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구체적 논의는 삼가겠지만 결국 우리사회 변화의 추세가 폐쇄 시스템(closed system)에서 오픈 시스템(open system)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급하여 둔다. 오픈 시스템으로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은 교권의 존엄이지만, 나의 논의는 교권의 자기부정과 자기반성의 촉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학생에게 평가받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


 
▲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상명고등학교에서 특강하는 모습.
 
ⓒ 통나무 출판사
 
여덟째, 교원평가제에 관한 나의 논의는 결국 우리사회의 미래모습에 대한 총체적 블루프린트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사상사적으로 말하면 근대성(Modernity)의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근대성은 항상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우리사회가 지금 많은 좌절이나 인기없는 듯이 보이는 정치판세의 엎치락뒤치락 속에서도 꾸준히 합리성의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시스템의 복잡화, 권력의 분권화, 가치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이라 함은 리(理)에 합당(合當)하다는 뜻인데, 이때 리가 반드시 서구에서 말하는 계량적 이성, 도구적 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리(理)는 정(情)적인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것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퇴계·율곡의 모든 논의가 서구적 이성(Reason)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도덕적 주체의 총체적 책임의식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유교적 윤리라는 것도 협의의 언어중심적인 진위체계의 진리를 넘어서는 매우 총체적인 몸(Mom)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것이다. 나의 몸철학적 논의는 근대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서구인들이 근대를 초극하려는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과를 포괄하는 논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초월적 실체의 전제나, 개인의 자율적 가치의 묵살이 없이 어떻게 간주관적 공공세계에 규범윤리적 합의를 도출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서구인들이 근대성의 벼랑 끝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가 이미 우리 실존에 내재되어 있다는 우리 사회의 강점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민족의 교육을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서만 오인하는 현금의 모든 교육계 동향은 깊게 반성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동질적 장의 연속체일 뿐이다. 학생이 결국 교사가 되며, 또 교사는 학생을 생산한다. 그러한 연속의 순환체계가 우리나라의 문화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의 장으로서 기업의 합리성의 증대는 당연한 추세이지만 그러한 기업의 합리성의 가치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기업이 타국이 아닌 자국민의 생활세계까지 식민지화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학의 운영이 모두 기업의 합리성과 경쟁성의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모두가 반성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기업의 장점의 근저에는 유교적 합리성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 근면, 공검, 절약, 대의를 위한 헌신, 초월적 세계의 부정, 인간의 정감에 대한 배려, 재빠른 판단력, 예의바름 등등의 미덕이 기업을 구성하는 성원의 인격의 바탕이 되고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유수기업의 위용에 대한 과신 때문에 교육의 장마저 그러한 효율성과 계량성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러한 기업은 미래에 다시 탄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도덕적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의 장이다.

내가 하바드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나는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하며 캐나다에 망명하고 계시던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우리나라 자유신학·해방신학의 근원이며, 간도 용정에서부터 규암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선생의 지도하에 민족정기를 키우신 장공 선생, 나는 한국신학대학에서 그로부터 동양사를 배웠다. 그때 장공 선생께서 나에게 건네주신 글씨가 있다.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백년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나를 심어 하나를 얻는 것은 곡식이다. 하나를 심어 열을 얻는 것은 나무다.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 것은 사람이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百年之計, 莫如樹人. 一樹一穫者, 穀也; 一樹十穫者, 木也; 一樹百獲者, 人也.)

내가 학생에게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비굴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는 가르치기를 포기하거나 죽음을 택할 것이다. 물론 교사들에게는 나와 같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져 있지를 않다.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에 관하여 심중한 절기라고 판단될 때마다 발언을 계속하여 왔다. 이미 20년 전에 중고생을 위하여 <철학강의>를 썼으며, 전교조가 최초로 구성될 때에도 교육자의 행위가치는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권면했으며, 네이스(NEIS)에 관해서도 치열하게 반대하였다.

나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다. 그것은 보수나 진보의 잣대로 평가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네이스투쟁을 통하여 학생들의 인권을 지켰다. 이제 우리 스승들! 이 땅의 40만 교사들은 일치단결하여 교원평가라는 저질적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우리 스승들의 인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것은 스승들의 삶의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백년대계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외친다. 유교적 가치의 핵심은 교권의 존엄이요 지엄이다.

2005년 11월 14일
새벽 3시 20분
낙한재(駱閒齋)에서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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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10-1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스승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디~~~ ㅎㅎㅎ
왜 도올이 우리라고 하죠?

해콩 2007-10-1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우리가 도올과 '우리'라는 단어로 같이 묶일 수 있는건지..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구요, 암튼 저는 제가 '스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발령 받고 첫 해는 아이들이 '선생님'하는 것도 영 쑥스럽고 어색했다니깐요... 감히 스승이라니요.. 아이들의 '영혼'을 각성시키기는커녕 흔들기에도 역부족인걸요. 그럼 교원평가 찬성해야하나...ㅠㅠ 암튼 도올의 논리를 꼼꼼 읽고 싶어서 퍼두었어요.

글샘 2007-10-1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에서 왜곡시키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봐요.
교사는 스승 아니면 노동자 택일하시오! ㅋㅋ
아버지가 노동자라고 하면... 아니, 어떻게 아버지가 노동자하고 같냐고 할 넘들이지요.
논리라고는 없는 김덕배들...

BRINY 2007-10-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승이고 노동자고의 이분법을 떠나서, 유교윤리의 핵심이 교권의 존엄성이라고요? 현대의 교사가 조선시대 서당 훈장도 아니고...유교윤리 자체가 가치관으로서의 기능을 많이 상실하지 않았나요? (교사들이 똑똑치못해 그런거라고 돌 날라올라)

해콩 2007-10-12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저는 도올이 말하는 스승은 못 되는 것 같구요, 역시 노동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2층에서 5층까지 하루 4시간씩 일주일에 20시간 수업. 수업 시작 종이 친지 한참이 지나도록 그 왕성한 혈기로 교실이며 복도를 방방 뛰어다니는 녀석들... 겨우 붙잡아 앉혀놓고 판서하다 돌아보면... 조는 아이, 아예 엎드려 자는 아이, 핸폰이나 거울 힐끔거리는 아이들... 역시 노동자죠? ㅋㅋ
아이들이 무기력해지는만큼 저도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자괴감 들어요. 그런데 이것도 모두 노동자인 제가 나태하고 부족한 탓일까요? 그래서 결국 저 역시 저들의'평가'가 필요한 인간일까요?

근데요 브리니님, '교사들이 똑똑치 못해 그런거'라는 말씀은 무슨 뜻? 똑똑치 못해서 결국 평가를 받게 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며 똑똑치 못하니 평가를 받아야한다? ... 아니면 또 다른 깊은 뜻?

BRINY 2007-10-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똑똑치 못해서 결국 평가를 받게 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며 똑똑치 못하니 평가를 받아야한다? -> 둘 다인데, 제 의도는 전자쪽이 강했습니다.

아나키 2007-10-1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가 평가의 대상이냐 아니냐라는 식의 논쟁은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듯..
평가의 대상이라는것을 인정하되 현 사회의 기득권층이 주장하는 교원평가의 기준에는 반대해야 교원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나키 2007-10-1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교사가 노동자냐 아니냐는 논쟁은 할 가치조차 없네요 ㅎㅎ
 

그러니까 아마도 9월 28일이었나보다. 금요일 아침, 갑자기 직원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아래와 같은 유인물과 함께 생활지도부 부장샘이 '그동안 민주적으로 아이들 지도를 해왔는데 아이들이 교칙을 어기고도 자신의 죄를 반성할 줄 모르며 너무도 뻔뻔스럽게 교문 밖으로 나갈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교문지도를 강화하려고 하니 샘들께서 좀 도와주시라. 교무실 화이트 보트에 요일별 교문지도 당번 신청을 받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셨다.

이게 갑자기 뭔 소리공??? 하는 맘으로 듣고 있는 속이 부글부글 울렁거렸다. 개학 후 아이들의 교문 밖 군것질로 인한 식중독 사고가 있긴했다. (급식으로 인한 사고는 아니었다. 같이 학교 급식을 먹는 샘들은 모두 멀쩡했고, 어떤 반은 한 명의 환자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점심시간, 청소시간, 석식시간에 틈틈히 학교를 나가 학교 바로 옆 서동도서관도 다녀오고, 도서관 뜰에서 산책도 하고, 서동시장까지 가서 떡뽁이, 만두 등등을 사먹는 모습을 나도 많이 보았다. 학교 측에서는 가정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고 평소 건강상태도 그리 좋지 못한 데다가 환절기에 다소 불안한(?) 음식들을 즐겨먹어서 '설사'병이 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무튼...

그 일로 일주일 정도를 생활지도부에서 점심시간, 청소시간, 석식시간에 교문단속을 슬슬 시작하시더니만 결국 이런 대책을 마련하셨나 보다. 담임샘들과 부장샘들 사이에서 의논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담임도 부장도 아닌 우리들은 처음 듣는 결정사항이었다. 소심한 나는 '누가 문제제기 좀 안하나...'하며 두리번 두리번 기다리다가 그만 회의가 끝나버렸고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힐끗 칠판 쪽을 보니 샘들이 와글와글 당번할 날짜에 이름을 적어넣고 있었다. 애써 무관심... 하며 외면하려는 순간, 교장샘과 눈이 마주쳤다.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어느덧 내 자리 옆에 서 계시는 교장샘. 예의 그 '소녀같은 웃음'을 삺포시 지으시며 "샘, 좀 도와주시죠"라는 멘트를 나에게 날리셨다. 그렇지 않아도 부글거리던 속에 표정관리, 감정관리도 잘 되지 않는 나는 대뜸 "저는 교문지도 반대합니다."라고 응대해버렸다. 여유있고 세련된 대응, 이게 안된다 나는!! 당돌한(?)내 말에 '교화의 의무'를 강하게 느끼셨는지 교장샘께서는 옆자리 샘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시더니 '아이들이 빠마 머리에 위에는 교복도 아닌 티셔츠 걸치고 실내화를 질질 끌고 학교밖을 배회한다, 인근 주민으로부터 우려성 전화도 자주오고 아이들을 방치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담임들만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_|#$@%^&' 등등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나도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좀 길게 하고 싶었다. '이 학교로 옮겨와 좋았던 모습 중의 하나가 아이들이 자유롭게 교문 밖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동도서관으로 산책가는 모습, 책 빌리는 모습 등등이 너무 좋아보였다.'라고 말한 순간 내 말은 팍 잘렸다.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콩샘의 말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내가 뭔 말이나 제대로 했어야 말이지. 순간 픽 웃음이 나왔다. 교장선생님의 동어반복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아이들의 품행이나 식습관이 문제라면 그 부분을 지도해야지 이렇게 교문부터 닫아거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육의 효과는 일,이주만에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며 기다려야하다는 사실은 교장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의 결정을 어떤 경로로 의논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식의 교문지도는 반대합니다. 그외 복장이나 식습관 등의 지도는 하겠습니다. 그럼 수업이 있어서 이만..."

회의 시간에 배포된 유인물의 내용을 기록해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직원회의 내용'을 보며 웃을 수 있을까? 이런 촌스런 일이 그땐 있었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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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교문지도를 강화하려 합니다.

학생들의 등교이후 교문 밖을 나가는 사례가 너무 많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되어 여러 선생님들의 관심과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1. 학생들이 교문 밖 출입의 이유

가. 금정시립도서관에 도서대여 및 반납을 위함.
나. 준비물 때문에 집에 다녀옴

다. 군것질 및 라면, 떡뽁이 등의 민생고 해결을 위함.

라. 오락실에서 게임 및 채팅을 위함

마. 수업시간에 임의로 이탈(주로 이동수업 및 출석체크를 잘 안하시는 선생님의 시간에)하여 학교 주위를 배회함.

 

 

2. 학생들의 교문 밖 출입을 제한하여야 하는 이유

가. 학생들의 탈선을 사전에 예방.

나. 검정되지 않은 음식물들을 함부로 취식하여 식중독 및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다. 단정하지 못한 교복 및 체육복, 반티, 사복 등을 착용한 상태에서 무단 외출하다보니 주민들로부터 교사들이 하생들을 무한정 방치한다는 원성을 낳았다.

라. 돌아오는 시간이 초과될까 뛰어 들어오고(수업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땀이나 가쁜 숨으로 수업에 방해의 요소가 됨) 심지어는 수업 중에 들어오는 학생들도 만다.

마. 지난 몇 일 동안 중식시간 교문지도를 해 본 결과 학생들의 의식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라면 먹으러 갑니다.”, “학교 급식이 맛이 없어서 밥만 먹고 올께요.” 등 무단 외출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나 미안한 마음, 교칙적용에 대한 두려움 등이 전혀 없다.

 

3. 이에 따른 교장 선생님의 의지가 완고한바 담임선생님을 통한 외출증이나 조퇴증 없이는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철저히 지도 하려 합니다.

 

4. 본교 생활지도부의 인원만으로는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고자하며, 향후 약 3개월간 매일 실시를 계획, 추진하려 합니다. 교무실 칠판에 부착한 직원명렬에 전 선생님들께서 한 번씩은 봉사 해주실 날짜를 기록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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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 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1-다의 사안에 대해서는 아이들의 입장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급식'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맛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다. 급식의 질을 개선하는 문제가 그리 녹녹치 않다는 건 알지만 이 부분에 먼저 접근해야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식생활, 식습관에 대한 교육이 병해되어야 하고.

     1-라에 해당하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다. 그 몇 명을 찾아내서 중점적으로 지도해야지 전체 아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정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쉬는 시간이야 너무 짧으니 안되겠지만 점심, 석식 시간에야 밥 다 먹고 조금 남는 시간에 가볍게 오락 한 판 땡기는 것이 또 무에 그리 잘못인가. '죄' 운운해가면서 나무라기엔 낯간지럽다. 샘들도 점심, 청소시간에 컴터로 '맞고' 치고 카드놀이도 한다. 너무 길지 않게 하는 거라면 샘들의 '오락'도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1-마는 유인물에도 나와 있듯이 '출석체크' 제대로 안하는 교사가 시정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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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2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방과후엔 시립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네요...

BRINY 2007-09-2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규 수업시간에만이겠죠?

글샘 2007-09-2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 샘네 학교는 좀 외진 데여서 바바리맨을 만날까봐 못 나가게 한다면 몰라도...^^
탈선이야 어른들이 더 많이 하는 거 아닌가요? ㅋㅋ

아나키 2007-09-30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동고 다니던 생각나네요 호홍

느티나무 2007-10-0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생각하세요? 궁금하네...

해콩 2007-10-0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대한민국 고딩들 중 대부분은 평일 방과 후엔 도서관 갈 시간이 없을 겁니다. 우리학교같은 경우는 학교 옆 담벼락에 바로 시립도서관이 붙어 있으니 정말 좋지요. 아이들이 도서관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모습만 봐도 너무 좋아요. "고딩들에게도 도서관 갈 시간을 허하라" 피켓 들고 목청이라도 높여야 할 판이라니깐요.

브리니님 오랜만이죠? 정규수업 시간에 출석체크를 제대로 한다면 나머지 쉬는 시간엔 교문을 자유롭게 왕래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샘네 학교는 어떠신지...

글샘샘~ 어떻게 지내시는지... 무섭게 올라오는 리뷰는 가끔 읽고있습니다요.. ㅋㅋ 아직까지 학교 근처에서 바바리맨은 못 만나봤구요, '탈선 사전 예방' 에구... 이 문구는 이제 그만 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도대체 무엇이 탈선이란 말인지...

너는 교문지도에 걸려 머리카락 잘린 적은 없었지, 아나키? 교문앞에서 열심 선도의 가위질하시던 '생활지도'부 샘들과 운동장까지 흩날리던 남학생들의 머리카락이 눈에 선하다.

궁금증은 풀리셨나요? 진복이 아버님.. 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사실 저는 교복도 없어져야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드는데 말이죠.
 


북마크하기독서에 관한 격언 잡다한자료및작성글창고


santaclausly l 2007-09-22 12:18


http://blog.aladin.co.kr/santaclausly/1586578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서에 관한 격언


1. 책이란?

책은 이를 펴보지 않으면 나무 조각이나 다름없다. (영국 속담)
책은 책 자신의 운명이 있다. (테렌티마누스 마우루스)
책, 그대는 사원의 황금 그릇이요, 언제까지나 손에 들고 있어야 할 타오르는 등불이다. (rd 베리)
책은 아마도 피어난 꽃송이. 먼 마을로 가는 길. 지붕이요, 우물이요, 탑이다. 책은 지팡이. 독자의 자랑이로다. (l.w. 리즈)
그대(책)는 생명의 나무요, 사방으로 뻗은 낙원의 강이다, 그대에 의 해 인간의 마음은 자라고 갈증나는 지성의 물을 길어 활기를 찾는다. 열매맺 게 하는 무화과나무로다.(베리)
책은 남달리 키가 큰 사람이요, 다가오는 세계가 들리게끔 소리 높이 외치는 유일한 사람이다. (eb 브라우닝)

2. 책의 선택

인생은 매우 짧고 그 중에서 조용한 시간은 얼마 안되므로 우리는 그 시간을 가치 없는 책을 읽는데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j. 러스킨)
인생은 저질의 책을 읽기엔 너무 짧다. (j 브라우스)
인도의 재보를 준다 해도 독서의 즐거움과는 바꿀 수 없다. 인생은 짧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 책을 읽지 못한다. (러스킨)?
친구를 선택하듯이 작가를 선택하라. (w.딜런)
과학에서는 최신의 연구서를 읽자. 문학에서는 최고(最古)의 것을 읽 어라. 고전 문학은 항상 현대적이다. (리튼)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난 사람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찬미한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읽는다. (볼테르)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이다. (데카르트)

3. 독서의 효용

읽은 책이 한 권이면 한 권의 이익이 있다.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면 하루의 이익이 있다. (과문절)
나는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다 가졌으나, 그래도 한 생애중 가장 행복 했던 때는 독서로 인하여 얻은 것이다. (미클리)?
독서처럼 값싸고 영속적인 것은 없다. (몽데스키외)
벗삼아 읽은 책 평생의 스승 (서울 청량리 지하철 표어)
독서와 마음의 관계는 운동과 육체의 관계와 같다. (r 스릴 경)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다. - 에머슨(일기)
읽는 것은 빌리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하는 것은 자기가 진 빚을 갚는 일이다. (g.c.리히렌베르크)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줄 뿐이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 의 힘이다.(로크)
독서의 진정한 기쁨은 몇 번이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읽는 데 있다. (.h. 로렌스)
책 속에 길이 있다.

4. 독서의 방법과 기술

사고(思考)하는 데 필요한 기술, 책을 쓰는 데 필요한 기술뿐만 아니라, 독서하는 데도 필요한 기술이 있다. (디즈레일리)
책을 읽되 전부를 삼켜버리지 말고, 한 가지를 무엇에 이용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h.입센)
자기의 전력을 다 사용하지 않으면 훌륭한 독서행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독서 후에 피로하지 않으면 그 독자는 상식이 없는 것이다. (a. 베네트)
천천히 읽는 법을 배워라. 모든 다른 장점들이 적당한 곳에서 따라올 것이다.(w.워크)
많이 읽어라. 그러나 많은 책을 읽지 말라. (c. 폴리니우스)
읽고 표(標)해 두고 배우고 마음속으로 소화시켜라. (영국 국교 기도서)
독서에도 방법이 있다. 수동적 독서법은 효과가 적다. 읽은 것을 눈앞 에 그려보도록 해야 한다. (에이버리)
무엇이든 하루에 다섯 시간 독서하라. 그러면 당신은 곧 박식하게 될 것이다. (s.존슨 보즈웰)
책을 읽음에 있어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이랴. (이황)
열 번 읽기보다는 한 번 베끼는 편이 낫다. (讀十遍不如字一遍) 學林玉露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한국 속담)
생각하지 않고 읽는 것은 잘 씹지 않고 먹는 것과 같다. (바이크)
한 권 읽기를 마치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책을 읽지 말라. 한 권을 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체득하지 못하였으면 또 다른 책을 읽지 말라. (북 스톤)
아무리 어려운 글이라도 일백 번 되풀이하여 읽으면 그 참뜻을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다. (朱子訓學育記)

5. 양서와 악서

유익한 책이란 독자에게 捕捉을 요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하는 책이다.(볼테르)
책은 반드시 고전적 명저가 아니라도 좋다.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도 상당히 좋은 책이 있다. (w. 차몬드)
신간 서적이 매우 괘씸한 까닭은 우리의 해묵은 책을 못 읽게 하기 때 문이다.(a.쥬벨)
베스트셀러는 평범한 재능인의 금박 입힌 무덤이다. (l.p. 스미드)
나쁜 책보다 더 나쁜 도적은 없다. (이탈리아 격언)
아주 중요하다는 책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 자신이 무엇을 생 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e. 허버트)

6. 장서

책만큼 매력적인 가구는 없다. (s. 스미드 호전드 부인)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기케로 루보크)
돈이 가득 찬 지갑보다는 책이 가득 찬 서재를 가지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j 릴리)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a. 랭)
장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 (a. 비절)
소유할 수 있는 책 전부를 읽을 수 없는 한, 읽을 수 있는 만큼의 책만 을 소유하면 충분하다. (세네카)
큰 서재를 가진 것으로 자기가 학식이 많다고 세상 사람에게 설복하는 것은 허영이다. (j. 풀러)

7. 독서 생활과 지혜

목적이 없는 독서는 산책이지 학습이 아니다. (b. 리튼)
단 한 권의 책밖에는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을 경계하라. (디즈레일리)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그 말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있다고 느끼는 사 람이다.(s.버틀러)
청년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울타리 사이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으로서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 년에 글을 읽는 것은 발코니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가 체험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임어당)
책이 없는 궁전에 사는 것보다 책이 있는 마구간에 사는 것이 낫다. (영국 격언)
책을 읽고 싶다는 열성적인 사람과 책을 원하는 지극한 사람과의 사이 에는 굉장한 거리가 있다. (g.k. 체스터톤)
사람의 품격이 그 읽는 바의 서적으로 판단되는 것은 마치 그 사귀는 바 벗으로써 판단할 수 있음과 같다. (스마일즈)
지금까지 세계 전체는 책의 지배를 받아 왔다. (볼테르)
독서상우 (讀書尙友) (맹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다, 그들의 사상 속에 들어가 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지 그대들의 생각을 그들 속에서 찾아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러스킨) 

                                                                                     (출처) 네이버 카페 공부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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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목록>

갈 곳 없는 우리들/김남선/사계절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신영복/햇빛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Ⅰ.Ⅱ/오스트로프스키/온누리
객지/황석영/창작과비평사/
거꾸로 읽는 세계사/유시민/푸른나무/
겨울날/김광섭/창작과비평사/
고난의 꽃/고은/한길사/
고향 상.하/이기영/슬기/
과학사의 뒷얘기Ⅰ-Ⅳ/A.& A.P.D.섯클리프/전파과학사/
광장/최인훈/문학과지성사/
광화문을 지나며/김진경/풀빛/
국토/조태일/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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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끌로드 모르강/형성사
꽃들에게 희망을/포올러스/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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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바스콘셀로스/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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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조세희/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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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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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이청준/문학과지성사
대륙과 해양의 기원 상.하/A.베게너/박영사
대학 문에 서서/류병주/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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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김소월/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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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기행/신경림/한길사
백두산 가는길/황여애/깊은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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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상.하/안수길
분노의 포도/존 스타인백/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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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한원수/청년사/
사람됨의 철학Ⅰ.Ⅱ/채광석 외/풀빛
사랑의 변주곡/김수영/창작과비평사
사이공의 흰 옷/구엔 반 봉/친구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한마당
살아있는 과학/현종오 외/청년사
삶의 지혜/교양과학연구회/사계절
삼남에 내리는눈/황동규/민음사/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문학과지성사
생강 캐는 날/전인순/온누리
선생님 정답이 틀려요/박인숙 외/들불
섬진강/김용택/창작과비평사
성공시대/장선우/학민사
세계사 편력/네루/석탑
소설가 구보씨의 1일/박태원/슬기
수학의 흐름/김용운 외/전파과학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청사
아버지에게 던지는 4가지 질문/호르스트 부르거/중원문화
아버지의 땅/임철우/문학과지성사
아아 내 나라/조태일/시인사
아침으로 가는 길/유시민/학민사
阿Q正傳/노신/마당
어느 소녀의 가출 일기/마릴린 해리스
어린 왕자/쌩 떽쥐베리/범우사
어머니/막심 고리끼/석탑
엄마의 말뚝/박완서/문학사상사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정음사
여성/여성편집위원회/창작과비평사
여성론/아우구스트 베벨/까치/
여울에서 바다로/이상석/온누리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고은/한길사
외투/고골리/범우사
우리 동네 아이들/나지브 마흐푸즈/열린책들
우리들의 문학교실/문학교육연구회/까치
우리 시의 이해/신경림/한길사
우상의 눈물/전상국/민음사
울면서 하는 숙제/이오덕
원미동 사람들/양귀자/문학과지성사
이 땅의 아이들/도종환/온누리
이야기 일본사/김희영/청아
이용악 시전집/윤영천/창작과비평사
이육사.윤동주/이육사 외/지식산업사
인간문제/강경애/열사람
인간의 역사Ⅰ-Ⅲ/일리인/연구사
인간조건/앙드레 말로/을지/
인류의 위기/로마클럽/삼성미술문화재단/고/220
인물 한국사/이이화/한길사
林巨正1-9/홍명희/사계절
임화선집Ⅰ-시/임화/세계
자랏골의 비가/송기숙/창작과비평사
자연과학과 우리들/교양과학연구회/사계절
장길산1-10/황석영/현암사/고/130
장마/윤흥길/민음사/
쟝글/업턴 싱클레어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천상병/일선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자끄 프레베르/열화당
정지용전집-시/정지용/민음사
조국의 별/고은/창작과비평사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김용옥/통나무
중국과학의 사상/박성래/전파과학사
지구와 물과 바람과 태양/D.S.핼러시 2세/전파과학사
지구의 끝없는 재앙/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편집부/지학사
지나쳐 간 사람들/앧 슬리벤/분도
천국이 열쇠/A.J. 크로닌/성 바오로
철학에세이/동녘 편집부/동녘
철학이야기/다나카 하지메/친구
철학하는 삶을 위하여/조요한/한길사
충복/하인리히 만/한길사
칼럼으로 쓴 과학/박성래/지학사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창작과비평사
탈출기/최서해/문학과지성사
태백산맥1-7/조정래/한길사
토박이/리차드 라이트/한길사
토지/박경리
푸른나무1.2/푸른나무 이야기모임/푸른나무
푸른별/김용락/창작과비평사
한국근대사.한국현대사/강만길/창작과비평사
한국의 과학문화재/전상운/정음사
한국의 아이/황명걸/창작과비평사
한국 현대 시선Ⅰ.Ⅱ/신경림 외/창작과비평사
해란강의 아이들/류원무/남녘
홀로 앓는 풀잎들의 이야기/남녘 편집부/남녘
황지의 풀잎/박봉우/창작과비평사
흐르는 북/최일남/문학사상사
희망이라는 종이비행기/문학교육연구회/연구사
히르벨이란 아이가 있었다/페터 해르틀링/중원문화

1/ 소설
{선생님과 함께 읽는 우리 소설1-2}, 실천문학사.
김성동, {그리운 등불 하나上}, 살림.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사.
최시한,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문학과지성사. _
황석영, {객지}, 창작과비평사.
박태원, {천변풍경}, 깊은샘.
김한수, {봄비 내리는 날}, 창작과비평사.
김영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실천문학사. _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창작과비평사.
{쉰한명의 평론가가 뽑은 80년대 대표소설}, 현암사.

2/ 시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문학과지성사.
서정홍, {58년 개띠}, 보리. _
양정자, {아이들의 풀잎노래}, 창작과비평사. _
김용택,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곽재구, {받들어꽃}, 미래사. _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 미래사.
{쉰한명의 평론가가 뽑은 80년대 대표시선}, 현암사.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기세춘,신영복 역, {중국역대시가선집1}, 돌베개.
{한국현대대표시선1-2-3}, 창작과비평사.

3/ 자연과학·의학·환경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
{제4의 공해 전자파의 공포}, 대학출판사.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 일빛.
이관수,오동훈, {사회 속의 과학 과학 속의 사회}, 한샘.
{테마가 있는 20가지 과학이야기}, 세종서적.
윤소영, {교실 밖 생물여행}, 사계절.
조흥섭 편역,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 한길사.
브레히트, {갈릴레오 갈릴레이}, 두레.
{따로 또 같이 환경교육}, 지성사.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의료}, 실천문학사.

4/ 철학·종교
김상욱 옮김, {코페르니 작은 철학자}, 나라사랑.
위기철, {철학은 내 친구}, 청년사. _
조성오, {철학에세이}, 동녘.
바바하리다스, {성자가 된 청소부}, 정신세계사.
유동환, {잃어버린 미래를 찾아서}, 푸른나무.
김용옥,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 통나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 동녘.
이진경,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 새길.
생활선모임, {113편의 선 이야기}, 한마당.
법정, {무소유}, 범우사.

5/ 산문·수필
윤구병, {꼭 같은 것보다는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푸른나무. _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푸른나무.
노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창.
홍세화,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비평사. _
님 웨일즈, {아리랑}, 동녘.
김민웅,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당대.
곽재구,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한양출판.
송언,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내일을 여는 책.

6/ 비평·예술이론
유종화, {시마을로 가는 징검다리}, 내일을여는책. _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친구. _
김흥규, {한국현대시를 찾아서}, 한샘.
최성수, {강의실 밖에서 만나는 문학이야기} 내일을 여는 책.
이오덕 외,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보리.
우리문학연구회, {문학에세이}, 아침.
김병종, {미술강의}, 통나무.
강홍구, {미술관 밖에서 만난 미술이야기1-2}, 내일을 여는 책.
유홍준,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학고재.

7/ 여성·성
유시춘 외, {여성이야기주머니}, 녹두.
{세상의 반쪽 여성이야기}, 우리교육. _
{반쪽이의 육아일기}, 여성신문사.
서진영, {여자는 왜}, 동녘.
최순덕, {암탉이 울면}, 동녘.
{일곱 가지 여성 콤플렉스}, 현암사.
{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 현암사.
한국여성연구회, {여성학 강의}, 동녘.
{새로 쓰는 성 이야기}, 또하나의문화.
조엘 프리드만, {이것이 성희롱이다}, 여성사.

8/ 문화·매스미디어·교육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한샘.
이상석,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1}, 친구. _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창작과비평사.
이기연, {날아라 장산곶매야}, 한울. _
대안교육을생각하는모임, {새로운 학교 큰 교육이야기}, 내일을 여는 책.
김동훈, {여간내기의 영화교실}, 대경출판.
김정환 외, {누이를 위하여}, 실천문학사.
주강현,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1-2}, 한겨레신문사.
하이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내일을 여는 책. _

9/ 사회·역사·경제
류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푸른나무. _
강만길, {역사를 위하여}, 한길사.
정운영, {경제학을 위한 변명}, 까치.
이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현암사.
강준만, {콜럼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 개마고원. _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1-2-3}, 돌베개.
한국정치학연구회, {한국현대사이야기주머니1-2-3}, 녹두.
네루, {세계사편력1-2-3}, 일빛.
류시민,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 한샘.
장수환, {역사에세이}, 동녘.

10/ 그밖에
김성동,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 청년사.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2}, 청년사.
위기철, {생명이 들려준 이야기}, 사계절.
오세영, {부자의 그림일기}, 글논그림밭. _
박재동, {목 긴 사나이}, 글논그림밭.
김종만, {우리 아이들 민속놀이 백가지}, 우리교육.
조광동, {더디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지리산.
{20세기의 사람들}, 한겨레신문사.
이링 페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누가 깨웠는가}, 철학과현실사.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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