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안다는 것.

 

프로이트 1,2 피터 게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역사철학 테제,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 테제>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 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비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려,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찰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소개하든 사족이다. 이 책은 전공을 막론하고 공부를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인식하고 갖춰야 할 정치학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밀스가 좋아한 용어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 V.I 레닌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권한다. 마르크스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웬 레닌? 이렇게 생각한다면, 레닌주의에 관한 오해가 아니라 지식 일반에 대한 오해다.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는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전위 조직 건설이다. 두 가지는 같은 주제의 얘기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현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크레도(Credo). 근대성의 핵심은 계몽, 기획성, 인간 의지에 의한 사회와 자연 개조다. 나는 이 책이 근대적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고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구조와 개인의 관계는 이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샹탈 무페 등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자에 의해 해결됐다. 내가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이 수동태 표현이 숨막힌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두치펑, 푸코,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 이에 상반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 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권김현영 외.


선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한채윤)라는 말이 이 책의 패러다임을 요약한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제도 안에 머물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가 진행되고 굴요적인 자기 조정을 계속 요구받게 된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권력의 법칙을 해체(, 인식)하지 않는 저항은 반칙, ’불평불만‘, ’낙오자의 불복심지어 역차별의 가해자라는 엉뚱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인간의 기준이 남성인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면 이중 노동을 해야 하고 다름을 주장하면 시민권을 잃고 피보호자가 된다.

 

주류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노력하지 말고 일단,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공부하라. 이 책은 그 노고를 덜어줄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용성과 지적 수월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빅 이슈, 일본어판214

 

세계 41개국에서 발행되며 14000명의 노숙인이 판매원으로 일하는 잡지 <빅 이슈>는 노숙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다. 편집, 기획, 집필에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실제작비 외 수익은 모두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유명 여가수 가토 도키코(71)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1989년 베를린 방벽 붕괴부터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이른바 ‘3.11’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레벌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re volution)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박효종 외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멘틱한 사건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 호미 바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유형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 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 (실은, 하소연하다가 사과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하여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은유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 전의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조혜정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 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episteme는 미셀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바위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 담론은 부서진다.

 

과학과 젠더, 이블린 폭스 켈러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이 책은 초기 여성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 인류 지식의 연원을 추적한다. 개인(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 차별 주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으로 둔갑했는가를 역사, 정신분석, 과학사의 세 차원에서 분석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 착오, 시기상조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외


 

사카이 나오키, 도미야마 이치로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좀 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와 나오키의 대담집이며 부제는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저)에서 제프 베닝턴의 글을 읽고 이 암호를 해독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모든 음절이 중요하다. 첫째, 우편배달부뿐 아니라 발신자나 방문객은 두 번 행동한다. “딩동, 딩동”, “,” “여보세요?, 안 계세요?” 한 번 시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 번만 길게 누른다면 싸이코혹은 최소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당한 부정적인 행동의 전조다. 그러니까 언제나 두 번울린다.

 

둘째, 우편 제도와 인쇄술의 발달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그 이전의 사자, 사신은 집단과 집단이나 개인 간의 일대일 메신저였지만 철도의 발달과 함께 온 국민을 횡단하는 전달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사자에 비해 동시적, 다중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남성은 모두 죽는다. 프랭크는 멕시코 출신, 그의 정부의 남편은 그리스인이다. 우편배달부는 국가를 대변하는 국민이다. 이들은 소수자 우편배달부쯤 될 것이다. 벨 울리기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같은 행위다. 떠도는 삶, 이유 모를 죽음, 우편배달부끼리 쫓고 쫓기는 삶.

 

무엇이 달라졌을까. 메시지는 대개 비문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알고 죽거나 모르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성/, R, W 코넬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사상이라는 인식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저자 코넬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남성성 연구의 선구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는 남성으로서 자기 몸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녀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50대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사례가 풍부하고 성별 이론 전반에 박식한 옮긴이(현민)의 주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책으로 배웠어요유형이이서 그런지, 남성은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 흥미로운 생애사와 쉽게 풀어낸 정신분석, 정치학, 퀴어, 역사 이론은 인문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섹스Intercourse>. <삽입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인데 여기서 급진적은 발본적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 에른스트 블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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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세계사의 해체》 담아갑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절판이네요.

시이소오 2016-03-09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사회학적 상상력 읽고 싶네요^^

oren 2016-03-10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옮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온통 제가 모르는 책들과 저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고` 댓글을 달기가 몹시도 주저됩니다만, 그래도 `딱 한 곳`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딴지를 걸고 넘어가고 싶네요.(전체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문장의 어느 한 구석을 찾아내서 꼬투리를 잡는다는 게 몹시도 꺼려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요.)

도대체 니체의 텍스트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악평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니체만큼 오독하기 쉬운 책도 없다더니, 저런 고명하신(?) 분이 니체를 저토록 오독하다니, 저는 그게 너무 놀랍습니다. 저 책의 저자가 읽었다는 바로 그 책 속에 담긴 `니체의 목소리`로 반박해주고 싶군요.

* * *

뭐라고? 그 반대이다! 제기랄.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중에서

시이소오 2016-03-09 22:04   좋아요 1 | URL
저도 좀 의아스럽긴해요^^; 취향이라고 한다면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것 같고.....아마 이해가 안돼서 필사해놨던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파울 파이어아벤트 판매 책이 단 한 권도 없단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ㅠ

시이소오 2016-03-09 23:09   좋아요 0 | URL
정희진씨 추천책엔 유난히 품절, 절판도서들도 많네요. 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에 소개된 책들은 거의 번역이 안됐더라구요. 번역된 책들먼저 읽어야겠습니다^^

yamoo 2016-03-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권이 있고 3권을 읽었습니다. 근데 <방법에의 도전>의 백미는 그 논증 구조에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를 살피는 것이 이 책 읽기의 미덕이죠.

개인적으로 정희진의 <패미니즘의 도전>인가...너무 실망스러워서 이 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시이소오 2016-03-09 23:47   좋아요 0 | URL
우와, 대단하세요. ^^
 


P115. 폴 리쾨르의 제안을 따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권력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반감과 결부되지 않기 위해, 시작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 이끕니다. 그리고 불관용에 대한 거부는 분노의 샘을 마르게 하여 사유를 관용으로 나아가게 하지요. 그러므로 관용은 어떤 대상들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견딜 수 없음Intolerable’과 불관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견딜 수 없음은 헤겔적 의미로 불관용의 이중 부정의 산물로서, 관용이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서의 관용은, 얼치기 관용이 승리했을 때 생기는 무관심이라는 사유의 덫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사유가 절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어떤 답변이든 단호하게 말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일 테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유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조건에서도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최후의 의식을 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p120. 당신의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기보다 독자와 대화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하엘 하네케가 언급했던,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영화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관객에게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영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설명하지 않고 남겨둔다고 합니다.

 

p121. ‘질문의 저주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아주 유명한 답변을 남겼습니다. 의문 품기가 금지되고 의문 자체를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유는 끝이 난다는 거죠. 우리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는 한 자유롭고,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p123. 독자나 관객의 능력을 박탈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모든 사람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거주자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p125. 사회학 덕분에 행복하셨습니까?

 

괴테가 제 나이쯤 되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행복한 삶을 살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럼요. 행복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온전히 행복했던 한 주일은 기억할 수 없군요.”

 

p134. 참된 민주주의의 열정적인 옹호자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며, 질문을 그만두면 우리는 참된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요. 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p142. 요컨대 홉스적 질문이란, 해야 한다고 이미 정해진 것을 인간이 행하면서도 마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제프리 알렉산더가 <사회학에 대한 현대적 입문>에서 제시한 실마리를 취하자면, 사회학의 미래는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문화정치학으로서 사회학을 다시 정립하고 부활시키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에 도달하는 방법, 따라야 하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통념이나 행위자의 지식과의 끝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이때, 세넷이 제안한 비공식성, 개방성, 협력이라는 교훈을 따라야 하죠. 제가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최근 세넷이 휴머니즘과 그 현대적 의미'에 관해 쓴 에세이에서 제안한 이 세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흡수하고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공식성이란, 대화의 규칙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대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개방성은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진리를 갖고 있거나, 오로지 타인을 납득시키겠다는 태도를 지닌 채 대화에 참여해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협력은 대화의 모든 참가자들이 교사이자 동시에 학생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화의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지요.


 

p145. 은유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한 3의 학습상황에서만 정당성을 지닙니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개념의 네트워크가 새로운 현상을 포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거나 설익었을 때, 그러한 개념의 네트워크를 새로운 인식론적 틀에서 재조립하여 눈에 띄지 않던 특성들을 두드러지게 할 필요성이 있을 때 말입니다.

 

리이트 밀즈나 어빙 고프먼이나 로버트 니스벳 등 당신들이 사례로 들었던 학자들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은유는 사유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생각과 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수단입니다.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현상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하고도 유일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대표하지요.

 

p149 은유적인 병치는 다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그래서 인식을 위해 별 쓸모도 없고 해로울 수도 있는 효과들이죠. 은유의 대상이 가진 많은 특징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유를 통해 대상의 유사성은 암시되지만 동일성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유사성이 암시되는 경우에도 그 차이들은 부정되지 않고 단지 우회될 뿐입니다. 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거죠. 은유는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자 전체가 부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적용 범위의 형태를 변형시켜, 존재하는 유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3대상을 불러냅니다.

 

p152. 짐멜은 그의 저서 <렘브란트: 예술철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렘브란트 회화의 분명하지 않은 윤곽과 흐릿한 경계선, 그에 따른 반향의 풍부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회화의 표준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백한 반란을 칭송했지요. 짐멜은 이러한 반란을, 화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인간!)의 참된 개별성을 포착하려는 화가의 열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대상의 참된 개별성은 단순히 인간의 개별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을 마냥 재생산해서 쌓아올린다고 해서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명확성이라는 과학적 표준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p153. 짐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의 본성이 완전하고 철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의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모든 형식은 이 목적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역사적으로 유한한 그 어떤 예술 형식도 세계의 총체성을 포괄할 수는 없다는 거죠. 은유는 사유의 좋은 요소입니다. 은유는 의도와 수행 사이의 변증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결국 그것이 드러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155. 스파드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개념 성장의 은유적 뿌리>

(안나 스파드가 바우만 딸이었다니!)

 

소리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이듯 언어는 개념 형성을 위한 구성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이념들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새로운 개념들이 창조되는 수단에 가깝다. 언어는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조직할 때 사용하는 개념적 구조의 전달자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이미지 도식이라고 부른 것 이외에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맥락에서 또 다른 맥락으로 옮겨 놓을 때, 언어-의존적이고 구조에 의해 강요되는 이미지 도식을 수행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은유에 대한 최신의 연구가 도달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따르면 언어, 지각,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p160.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역사: 최후 이전의 최후의 것들>에서, “편협한 안전전 세계적인 혼란으로 향한 길을 제공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크라카우어는 분명하게 고정된 모든 것을 공포스러워했던 에라스무스를 칭송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서로 경합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도 논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궁극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궁극 원인 개념 자체를 폐기할 수 있는 사유와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요.

 

p165.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성은 전설 속 프로테우스처럼 그 모습을 바꿉니다. 얼마 전까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호칭되었던 것, 그래서 제가 그 핵심을 집어 유동적인 현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변화야말로 유일한 영원성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단단함유동성을 이분법적인 어려운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 두 가지 조건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변증법적 동맹의 쌍이라고 간주합니다.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해지지 않고서는 현대적일 수 없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동맹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단단한 사물이나 상태를 추구하면 역으로 움직임이 유발되고 유동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하지요. 유동성은 단단함의 적이 아니라 단단함을 추구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단단함 추구가 없었더라면 유동성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p168.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르고자 했다가 지옥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지요. 사르트르는 이러한 공포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물체를 만졌을 때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적대감까지 추적했지요. 사르트르가 이러한 공포는 증상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유동적인 현대의 문턱에 들어섰기에 느끼는 공포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p174.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아주 즙이 풍부한 단어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단어들은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자극합니다.

 

p175. 현대적 정신의 탄생의 고통에 대한 날카로운 아포리즘을 남겼던 리히텐베르크는 오래전에 이러한 곤경을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이미지가 인간의 세계에서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인간간의 언어 능력이 익사 상태가 되었다고요. “단어 속에서 감각이 표현되는 것은 단어 속에서 표현된 음악과도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은 표현되어야 하는 사물과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는 시인은 독자를 곧장 그림으로, 그림으로 표현되는 사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려진 풍경은 즉각적인 기쁨을 제공하지만, 시로 표현되는 풍경은 우선 독자들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만 한다.”

 

p177. 사회학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회학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도록 해야 하죠. 사회학자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각자 알아서 수행하도록 기대 또는 강요되는 직면한 과제에서,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이 무엇이고 종속시키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화는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이 대화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상대방도 동참하도록 이끄는 것을 포함합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다양화하는 것, 모든 대안을 경시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결과를 확장시키는 것, 대안적 관점을 꺽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다함께 이해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대화를 지속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무되어야 합니다.

 

p183.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은 시작이 마무리될 때 회고적 충격이 될 것 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시작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지요. 시작 이전에 있었던 것들은 언제나 시작의 결과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셸링의 이러한 주장에, ‘분명하지 않은 것드러냄은 단 한 번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원칙상 영원한 과정이라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뜻과는 모순되게 과거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재편됩니다.

 

p184. 아주 오랫동안 저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라, ‘문명이란 일종의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타협 과정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습니다.

 

p186. 역사의 진행이 보여주는 진자운동과 유사한궤적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뒤로 가는 것혹은 유토피아노스탤지아사이에는 사실상 혼동을 불가피하게 배태하고 있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p202. 한나 아렌트는 사유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고독한 것이라는 말을 꺼낸 적 있는데요, 개인적 경험에서도 저도 그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p206. 어떤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이든 부정적인 대답이든 양자 모두는 서로 반대되는 상대방 주장의 설득력을 꺽을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철학의 방법이지요. 이러한 능력에 관한 바츨라프 하벨만큼 좋은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벨은 생각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뛰어난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지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어느 누구도 국민들이 그 다음해에 어던 종류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려 할지 미리 말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덧붙이기도 하였죠.

 

p207. 리얼리티와 그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 사이의 긴밀한 연관은 단지 가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 조건의 불가피한 속성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이데거의 용어를 선호한다면, ‘세계 존재라는 인간의 특별한 양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체험된 세계인 생활 세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세계는 인식론뿐만 아니라 존재론,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은 세계에 대한 지각의 변화, 그리고 이를 통해 리얼리티 속에서 원하는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으로 압축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화시킴으로써 리얼리티를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다시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들이 수중에zuhanden 있는 상태에서 눈앞에vorhanden 있는 상태로 바뀜으로써 목적 지향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인간 세계를 통념의 비가시성으로부터 끄집어내어 관심의 초점이 되게 하고, 주목되는 영역이자 의식적 행동의 현장으로 바꾸어놓는 소명을 지닌다고 믿습니다.(통념이란 심사숙고되지 않는 공통의 감각이자 지식이며, 우리는 흔히 사유할 때는 통념을 사용하면서도 통념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사유하지 않지요.)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문제되지 않았던 것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말입니다.

 

p211. 우리 시대의 위험을 선구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탐색해온 중요한 이론가 울리히 벡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성이 시작될 때부터 지식은 개연성의 의미론적 지평 내에서, ‘알지 못함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벡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첫 시도인 확률 계산법의 탄생에서 시작했지요. 그 이후 위험이라는 범주를 통해 통제 가능성이라는 오만한 가정의 영향력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p213. ‘위험이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환경이 무조건적 규칙성에 속박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험적인 투명성과 완전한 예측 가능성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확실성이라는 조건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있다는 겁니다.

 

p214. 즉 사건들의 개연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사, 탐구, 평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가정 말이죠. 물론 이러한 가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지만,‘위험 계산이라는 전략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전략은 완전하고 오류없는 확실성이 가능하다는 약속, 또는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거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주는 정신적 위안으로 전락했습니다.

 

 

조르주 와겐버그는 학자적인 지혜로 오늘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의 책 <메두사의 영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이념>) “방정식의 해결책은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지만 단지 하나의 해결책만이 정확하고, 그것만이 체계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아는냐는 것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존 그레이는 이미 수 십년 전에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주권국가의 정부는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국민국가의 정부들은 1990년대에 멋도 모르고 행동했다.”

 

p220 사회 조직의 형태론에 있어서의 급진적 변동 또한 사영화로 인한 또 다른 결과입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극적인 변화는 생산자 사회로부터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입니다. 비판이론은 생산자 사회의 시기에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이며 생산적인 사간을 보냈지요.

 

p221. 오늘날 프레카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있습니다만,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박탈되고 강등되고 고통 받고 굴욕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p224. 경고음이 필요할 때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심지어 그 경고음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위대한 폴란드 사상가이자 시인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수십 년 전에 언급했던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계는 부조리의 화신이자 돌아버릴 것 같은 정신의 산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후려친다.”

 

하지만 2010년에 정치가로 변신한 베테랑 전사인 스테판 에셀이 93세의 나이에 쓴, 호소문 같은 제목의 <분노하라!>2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도록 했지요.

 

p226. 에셀은 자신의 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해보겠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변화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이처럼 많은 황폐함을 본 적이 없다. 파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고 있다. 대체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우리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부 바로 곁에 무시무시한 궁핍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에 동의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테러리즘이 더 번창하도록 허락한다면, 궁지에 몰려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p230. 비판이 자기 의제의 최상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존중받을 권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에 도달할 기회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존중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연대가 생겨날 가능성도 없습니다.

 

p231. 타인의 말을 듣고 우리의 말을 타인이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 듣기의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확신과 공손한 태도 사이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또한 용기도 필요하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사회학자의 작업은 변덕스러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성격의 삶이 아닙니다.

 

p252. 대중은 항상 옳지는 않다. 대중이 원하는 것 또한 항상 옳지는 않다. 현재 대중이 생각하는 방식 또한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사회학이 취하는, 대중의 수준으로의 하향운동은 적절하지 못하다. 공공의 사회학은 대중의 상향운동을 돕고, 자신도 상승하여 그곳에서 공중으로 변화한 대중과 대화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 밀즈가 핵심을 잘 표현했듯이, 사회학의 쓸모는 대중의 공중으로의 전화를 이뤄낼 때 최종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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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회학 자체가 자신이 탐색하는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야 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한 결과, 사회학은 자성 능력을 잃어버린다. 사회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사소해지고, 전문용어 속으로 이데올로기가 몰래 스며들어 결국은 권력자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사회학이 초래한 이 결과는 헛발질 irrelevance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도 지속되고 사회학도 지속되지만,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p16. 사회학에 의한 사회학의 구원은 1950년 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구별하면서, 이 둘이 반드시 연결돼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었다.

 

p17.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의 삶과 각자의 일대기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펼쳐지는 동시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책무인 것이다. 또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포부를 품고 있다.

 

p19. 당신을 생각으로 이끌거나 혹은 자극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어떤 것과 마주쳤다면, 그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 계속 실패하다가도 돌연 인식의 도약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를 경험한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나 혹은 우리에 과한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되어 있는 무엇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한 사회학은 쓸모가 있다.

 

p20. 반면 정보만을 제공하는 사회학은 쓸모없으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연결하고, 자신의 시대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채택될 경우 성공적이다.

 

P25. Q: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늘 정의해오셨습니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먼저, 여기서 인간 경험이란 당신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경험과 체험이라는 개념을 다소 단순화하면,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체험은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겁니다.


 

p29. 라 보에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런 태도를 자발적 복종이라 불렀지요. 하지만 존 쿳시의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의 등장인물인 C는 라 보에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발적 복종과 이 복종에 대한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제 3의 길도 있다. 그것은 무저항, 일부러 세상과 멀어지기, 내면으로의 이민이라는 길이다.”

 

P30 사회학적대화는 무저항을 지지하는 이러한 세계관을 문제 삼습니다.

 

P34. 사회학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것처럼, 사회학은 또한 윤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윤리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윤리란 곧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윤리성은 타자를 향한 책임성에 관한 문제이지요.

 

P35. 책임이란, 회피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떠맡는 것임을 확실하게 합시다..사회학자는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윤리 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고요. 그래야만 윤리적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또한 타자를 책임질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우리는 가능한 범위까지 이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사회학자는 이 길을 탐색하고, 지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사회학자의 임무는 그것입니다.



 

P3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쿳시의 또 다른 성찰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싸우는 쌍둥이에 관한 우화에서 영감을 받은 쿳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두 집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적을수록, 그들은 더욱 심하게 서로를 증오한다.”

 

P39. <커튼>이라는 책에서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전설로 짜인 한 마법의 커튼이 세계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게 하여 그 커튼을 찢도록 하였다.” 쿤데라는 예단Pre- judgement’이라는 커튼을 찢는 행위가 현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파괴적 제스처를 끝없이 반복해왔지요. 이 반복을 힘들다 하더라도 무한히 행해져야 하는데, 마법의 커튼은 찢기는 즉시 뒷면에 조각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p40. 그는 사전해석preinterpretation의 커튼에 덧대어져 있는 진리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예단의 커튼에 구멍 내기는 끝없는 재해석이라는 노고를 요구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면밀히 조사하여 있는 그대로의 희극적 산문 속에서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둠으로부터 퍼 올리는 것, 그리하여 사실상 인간의 자유 영역을 확장하고 이 모든 노력을 자유로운 인간성을 구성하는 행위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끝없는 노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해냈느냐 혹은 실패했느냐에 따라 사회학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42. 당신은 특히 오노레 드 발자크, 에밀 졸라, 막스 프리쉬, 사뮈엘 베케트 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은, 만약 사막의 섬에 고립되게 된다면 소설책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로베르트 무질, 조르주 페렉,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회학자가 되는 동안 이 작가들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요? 또한 그들은 당신의 사유 방식과 사회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실제의 세상살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미셀 우엘벡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 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겁니다.

 

p45. 어떤 명칭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험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임을 상기해보십시오...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경험(‘나에게 일어난 일’, 즉 사건의 객관화될 수 있는 측면과 체험(사건이나 상태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향이자 주관적측면)같은 독일어 개념들 말입니다. 사회학담론에서 흔히 경험과 체험의 구별 부재는 인간 리얼리티에서 생긴 일, 체험된리얼리티를 단순 경험의 조사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저하되고,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제시도 일그러집니다.


 

p46.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픽션 속의 다양한 리얼리티의 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진리의 다른 의미나 리얼리티와의 조우를 픽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정말 픽션에도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유일신교와 다신교, 혹은 하나의 진리와 복수의 진리라는 의미론적 영역이 보다 적절하고 적합해 보입니다. 아니면 고정되어 있는 진리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진리의 문제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꽉 끼는 보호장비와 느슨한 보호장비, 하지만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인 보호 장비의 대조는 어떤가요? 쿤데라의 설명을 빌려온다면, 커튼을 짜서 리얼리티 앞에 드리우는 것과 커튼을 찢고 통과하는 것과의 차이도 괜찮겠습니다.

 

p50.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흔히 데카르트의 오류라고 알려진 부수효과입니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연구자는 주체의 위치를, 연구 대상은 객체의 위치를 지닌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와 메이오의 실험에서 연구 대상들이 실험적인 게임의 공동 참여자임을 알아채는 순간, 그 전제의 가면은 벗겨지고 일축됩니다. 그들은 게임에 매우 중요한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되어 있다는 암시에 부합하기 위해, 돌연 자신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책임감 있게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들에게 어떤 역할이 부여되어 있든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p53. 사회학은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을 자크 데리다 식으로 지속적으로 해체하는 일을 수행하는 한 비판적 활동입니다. 혹은 리처드 로티가 정의했듯이 지속적인 캠페인의 정치를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p54. 사회학은 사회의 현재 모습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개선을 동경하게 됩니다.

 

유동적인 현재적 삶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은 끊임없이 해석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판사회이론일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이란 현존하는 리얼리티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에 대량으로 잉태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비판 없이는 삶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시작될 수 없겠지요.

 

p56. 왜 변신론이죠? 왜 라이프니츠의 방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건가요? ..변신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바로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중에서는 그나마 최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몰이해 때문에 창궐하는 악과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명백히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능하고 박애적인 신이 통치한다고 인정된 세계에서도 악의 존재는 세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변신론입니다.

 

팡글로스는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의 선구자이자 창시자이며 또한 그 이상의 영감을 준 인물이지요.

 

범사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지라,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코가 안경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에겐 안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 다리는 분명 바지를 입도록 고안되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지가 있습니다. 돌은 큰 조각으로 잘려 성들을 짓는 데 사용되기 위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각하께서는 아름다운 성 하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위대하신 남작께서는 가장 훌륭한 거처에 사셔야 합니다. ”

 

사회학은 변신론에게 농담과 재담만을 던질 뿐 그것과 단호하게 대립합니다.

 

P58. 사회학은 좋든 싫든, 대중이 필연성이나 자연적 질서라고 믿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중적 신념이 구성되고 지속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비합리성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사회학은 규칙과 규범의 뒤에 숨어 있는 돌발 사태와 단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선택된 한 가지 가능성만 있다는 주장 주변에 넘쳐나는 다른 대안들을 들춰내야 합니다. 쿤데라의 알레고리를 빌려온다면, 사회학의 소명은, 재현으로 위장하고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찢는 것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사회학이 간결하고 정밀한 설명을 추구할 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P61. 사회학을 수립한 창립자세 명은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에 대해 서로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자가 탐구하는 리얼리티도 기성아카데미의 분과학문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반면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특수성을 인정했습니다.


 

게오르그 짐멜은 두르켐과 베버의 입장에 대한 모호한 지지를 피하려 했습니다. 짐멜은 이른바 ‘2차 해석학이나 ‘2단계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상식과의 대화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석되어왔던 것을 재해석하고 인간의 생활세계Lebenswelt, 즉 체험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보편적이고 유일한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1차 해석과 2차 해석은 끊임없는 탄생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해석의 결과는 일시적인 안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영속적인 위기상태야말로 사회학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서식 환경입니다.

 

p67. 저는 밀즈가 구체화했던 개인의 일대기역사를 함께 엮으려는 사회학자의 임무를, ‘사회학적 해석학을 수행하면서 완수하려 노력합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행동을 상황 속에서의 도전(객관적 요소)과 삶의 전략(주관적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자 상호교환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적지 않은 사회학자들이, 마법사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처럼 열정적으로 알고리즘을 찾다가 결국 허무에 빠졌어요. 저는 그보다는 발견적 충고, 권유나 가이드라인이 지닌 본래적 특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p73.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왜 사회학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를 확실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만약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산다면 호기심을 상실하게 될 것 같습니다.

 

p76.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과학은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창조적인 작업에 합류하도록 허락하는 신기한 장치입니다.

 

p78. 우리 세대는 역사의 대리인 historical agent’이 천천히, 그렇지만 무자비하게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행위의 규칙에 따르면, ’역사의 대리인유기적인표준 집단을 꿈꿔온 지식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땅을 향한 길고 긴 행진 끝에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목표에까지 도달하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p82. 베른슈타인은 화해를 지향하는 개량주의의 창시자로서, 페이비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도를 자본주의 사회 내의 정치, 경제적 틀 속에서 추구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단 한 번에 바꾸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한 것이죠. 레닌의 낙담과 베른슈타인의 낙관적 기대 모두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지속되면서, 죄르지 루차키는 역사의 이와 같은 분명한 저항(마르크스의 애초 예언을 따르지 않는)허위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하지만 결국 동굴 벽에 드리운 플라톤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으로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기만적인 총체성이 그러한 허위의식을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무시킨다는 것입니다.

 

p

85. 톰슨은 현실의 실천과 결합되지 못한 이론적 실천을,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처녀수태(단성생식)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p88. 저는 이 질문과 직면했던 길고도 철저한 시도로서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대리인에 대한 영국 지식인들의 열정이 무미건조해지기 훨씬 이전에, 아도르노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발터 베냐민에게서 그가 브레히트적 모티프라고 이름 붙인 경향을 발견하고는 이를 비판했습니다.

 

브레히트적 모티프란 노동자들이 아우라 상실 위기에 처한 예술을 구원하리라는, 또는 혁명 예술과 결합한 직접적인 미적 효과가 노동자들을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일컫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지막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덕목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경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도르노는 오히려 반대의 사례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적 악이 유해하게 지속되고 있음은 우리가 더욱 열심히 시도해야 할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근거가 된다고요.

 

아도르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학대적인 격리는 배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포기했다는 신호도 아니며 겸손의 제스처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의사소통을 멈추겠다는 의도도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전망에 대한 진실을 훼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결의일 뿐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설적으로 앙가주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p93.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의사소통 전략을 제안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는 두 가지 전제를 함축하는 은유입니다. 첫 번째로 이 은유는, 기록될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있고 병에 담아 멀리 보낼 가치가 있는 고민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두 번째로는 언젠가 병 속에 든 메시지가 발견되었을 때, 그때에도 그 메시지가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위탁하는 이 같은 전략은, 동시대인들이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설사 메시지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간직하거나 유지하려 하지 않기에 선택된 것입니다. 이렇듯 메시지를 어딘지 모르는 장소와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그 메시지가 현재의 무시를 견디고 살아남아 메시지의 잠재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희망에 의존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라는 증명입니다. 또한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으며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역경은 단단하지 않다는 증명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 속에서 비판이론은 바로 이에 대한 증명이며,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은유를 정당화해줍니다.

 


p95. 부르디외는 마지막 저작인 <세계의 비참>의 후기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정치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아주 빠르게 파악하고 구체화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영역은 비밀스럽게만 보이고 폐쇄적이 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정치 영역은 다시 개방되어야 합니다.

 

p96.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심지어 살기 힘들도록 만드는 매커니즘을 인식한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해서 모순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과 문제를 박멸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길고 복잡한 길이 뻗어 있습니다.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궤도 수정으로 가는 길을 알아내고 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실로 부르디외의 명령을 기억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회세계의 연구에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사람은 그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p98. 저는 제가 수행하는 종류의 사회학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 부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상황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삶의 전략을 구성하는 인간의 선택을 해석합니다.

 

p99. 사회학적 해석학은 사회학적 수단으로 인간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p100. 사회학적 해석학은 통계적 코드화에 집요하게 저항해가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저장하기 좋도록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환원은 통상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곤 하지요. 책임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까요.

 

P104. 사회학의 소명은 명백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방향 설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은 이러한 소명을, 변화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꼼꼼히 분석할 때 완수할 수 있습니다.

 


P107. 이에 대해 시배스천 폭스는 <폭스가 픽션에 대해 말하다>에서, 이를테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는 논평이 금지되기는커녕 토론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분수령과도 같은 변화가 추측과 가십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작가의 개인적인 성격을 표현한다는 가정에 따라, 전기적 비평은 창작의 행위를 쇼로 환원시켜 놓았다는 거죠. 저커버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P111. 유명인이 되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명인들이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유명인에 대한 대니얼 부어스틴의 정의를 따르고 싶은데요. 그는 유명인이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라 정의했죠. 유명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0~30여 년 전에 저는 사회학적 전문용어의 사용을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사회학으로의 진입을 가능한 한 폐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회학적 전문용어는 의사소통을 붕괴시키고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 중요한 것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P113. 유명인처럼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귀 담아 듣는 유명인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은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레지스 드브레의 미디어크라시라는 개념은 유명인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는 감추고 오직 전자만을 장려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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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0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꼼꼼한 발췌.. ^^

시이소오 2016-03-07 18:59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저도 아주 근간 읽은 책이라 몹시 반갑습니다. ^^

시이소오 2016-03-07 22:17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어요 ? 저도 반갑네요. 북다이제스터님 서재탐방하러 가야겠어요^^

syo 2016-03-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저는 어제 사회학적 상상력 다 읽고 지금 사회학의 쓸모 읽는 중인데, 책 안 읽고 이 포스트만 읽어도 될 뻔 했습니다.*_*

시이소오 2016-03-08 01:20   좋아요 0 | URL
ㅋ 직접 읽으셔야죠 ^*^

비로그인 2016-03-0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는 이 구절~ 우울해지려고 하네요. ;^^

시이소오 2016-03-08 08: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만날 수 있는 희망이 있어요. 우울해하지 마시길 ^^;;

그루터기 2016-08-12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에 사회학입문서로 <나를위한 사회학>이란 책이 나왔던데요. 일본의 사회학 교수가 일상의 사회학에 대해서 쓴 책이였습니다. 이 책도 추천드리고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12 09:48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읽어봐야 겠어요 ^^
 

3장 권력

 

슬픔의 노래, 정찬


 

한국 소설 중 나만의 ‘3부작이 있다. <슬픔의 노래>, <얼음의 집>, <> 모두 한 작가의 작품이다. 우연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생은 생잔(生殘, 살아남기’), 권력은 폭력, 슬픔은 실패를 의미한다. 이런 현실에서 폭력과 권력 탐구를 짊어지는 작가는 흔치 않다. 어쨌든 정찬같은 캐릭터의 지식인이 많아야 한다고 절실히 주장한다.

 

내가 이해하는 정치신학자정찬의 주제는,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들의 모습은 작가를 통해 예술과 신학의 이유가 된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얼음의 집>의 주인공은 고문 기술자다. 그는 사정에 버금가는 쾌감이라는 권력 행사를 자제하면서, 진실(자백)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쾌락을 통제하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 어떤 인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20여 년간 가정 폭력 상담을 하면서 열 대를 때릴 수 있는데 여덟 대에서 멈추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정찬의 주인공들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획득되는 권력의 전능함을 알고 있다. 권력의 경험을 사유하는 그들은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 최소한 방황하는 영혼이다. <슬픔의 노래>에 등장하는 ‘80년 광주가해자의 보개.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 칼날을 통해 생명의 경련이 손안 가득 들어오지요.......생명의 모든 에너지가 압축된 움직임. .......한 인간의 생명이 이 작은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죠.......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입니다.” 이후 그는 죄의식의 갑옷을 벗는 배우가 되었다.

 

정찬의 작품을 읽을 땐 머리와 심장의 분간이 사라진다. 독자의 몸은 무간 지옥에 빠진다. 작가가 먼저 부서져 강이 된 까닭이다.정말 사족. 박정희 체제의 공과를 논할 때 공은 경제 성장, 과는 인권 탄압이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문은 정권의 흠이 아니다. 통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인간 해방에 국가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수준의 규범과 철학을 제시한다. 홉스는 중세가 저물고 원자화된 개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에 살았으며, 정신도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물론자였다.

 

그는 자연상태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 상태가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가 되었는가였다. 홉스가 분석한 원인은 이기적인 남성들의 집단적 동의에 의한 시민법의 일종인 결혼법때문이다. 자연 상태가 국가의 탄생과 시민사회로 넘어오면서 결혼 제도를 통해 여성은 개인이었다가 개인의 여자로 강등되었다. 성차는 당위가 아니라 인위적 제도라는 것이다.

 

홉스에게 결혼은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으므로 개인 간 범죄의 경중을 비교할 때 기혼녀의 정조 유린은 미혼녀의 그것보다 더 큰 범죄다.”

 

천자문, 주홍사


 

내가 읽은 책 중 최고의 라스트신이 <천자문>일 줄이야.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천자문>의 마지막 문장은 위어조자 언재호야이다. “뜻은 없지만 말을 잇는 조사가 있는데, ()은 앞 문장을 가리켜 이에’ ‘여기에서라는 뜻이다. ()와 재()는 탄식할 때, 의심할 때 혹은 반어적으로 사용한다. ()는 대개 끝내는 말(~이다)로 쓴다.


위어조자 언재호야’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그러나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사실은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장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 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실은 좋은 글귀 색거한처 침묵적요(한가한 곳을 찾아 사니 조용하다) - 말고 갖고 싶은 문장이 있었다.

 ‘탐독완시 우목낭상’ “돈 없이 책방에 가도, 한 번 읽으면 머릿속에 책 내용이 다 들어온다.”

 

극단의 시대, 에릭 홉스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정시에 도착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글귀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랑(관계)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이고 하나는 이 글 제목이다. 전자는 인간을, 후자는 세상을 요약한다. 고민의 순간마다 상기되면서 할 말을 잃게 하는 매혹이 있다. 이 매혹의 정체는 인간()의 무능과 이중성.

 

원래는 무솔리니가 기차를 정시에 달리게 했다”(Mussolini made the trains run on time)인데, 내가 조금 고쳤다.

 

에릭 홉스봄은 당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라이벌에드워드 톰슨(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함께 영국 지성의 자부심이다. 원제는 ‘1914 ~1991’이라고 시기가 표기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목 죄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포함했다면 저자는 극단의 시대를 넘어 종말론의 시대를 분석해야 했을 것이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7천 년에서 8천 년 걸릴 변화는 70여 년 동안 겪었다. 옮긴이의 전언대로, 이 책은 “20세기의 자서전이다.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정시에 도착했다.” 히틀러의 스승이자 변절한 사회주의 언론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의 우월성을 시위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였다. 이는 실제가 아니라 담론의 효과였다. 이탈리아 기차는 이미 잘 달렸고, 무솔리니 집권 후에도 기차는 시간표대로 정확히 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파시즘을 향한 대중의 지지는 질서의 효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현행 주폭단속이 좋은 예다. 싹쓸이! 질서(order)는 글자 뜻 그대로 대중의 주문이자 지배자의 명령이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편리하고, 나만 희생자가 아니라면 대중은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리라는 환상에 동의한다.

 

군대를 버린 나라, 아다치 리키야, 평화의 근원은 빈곤과 고립

 

전쟁과 평화. 이 두 단어가 늘 붙어 다니는 이유는 둘 다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같이 써놓으면 인식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 “전쟁은 안개와 같다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시작해서 로버트 맥나마라가 답한 전쟁의 의미다.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그 추이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쟁도 모르겠는데 평화는 얼마나 알기 어렵겠는가.

 

이 글의 제목은 저자가 코스타리카 여행 중 외교부 직원에게 들은 말이다. 빈곤과 고립이 평화의 비밀이라니! 코스타리카는 실질적, 합법적으로 군대가 없는 지구상 유일한 국가다.

 

모든 국민이 군대가 없다는 삿길에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환경, 인권, 평화 선진국의 정책과 이미지를 전 세계에 선전하여 이를 방위력과 외교력으로 전환시켰다. 군대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침략당할 가능성이 적다.

 

미국과 북한만 외국이 아니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사회가 있다. 책이 전하는 몇 가지 감동. 코스타리가 교도소에는 담장이 없다. ‘탈출 가능한 철조망은 있다. 교도 행정의 목표는 수감자가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갱생의 첫걸음은 자기 인식, 자기 평가, 자기 긍정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재범률은 20%에 불과하다. 보험료를 못 낸 사람이나 불법체류자도 국립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

 

군주론, 마키아벨리. 사랑과 외경 중 어느 것이 나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시장에서 감자를 사면서 냄새를 맡는 사진은 정치적, 미학적 충격이었다. 나는 대통령들의 채소류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 분노한다. 먹을거리는 민생의 기본이다.

 

냄새를 맡고 구입하는 식자재는 거의 없다. 생선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흙 묻은 감자를 코에 바짝 대고 과일 향기를 맡는 듯 포즈를 취한 여자 대통령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대통령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스러운 포즈의 진부함과 오브제의 야릇한 부조화는 비/웃음을 생산했다.

 

군주가 국민에게 사랑받은 것과 외경 받은 것 중 어느 것이 나은가마키아벨리는 둘 다 겸비하면 좋겠지만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택일한다면 외경의 대상이 되는 편이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군주론>의 요약이자 유명한 구절이다.

 

감자의 향기는 사랑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닌 웃음거리, 트러블 메이커, 국민을 당황스럽게 하는 지도자를 연상시킨다. 클린터의 섹스중독이나 부시 2세의 무식, “왜 나만 미워해!”라고 투정 부리면서 갑자기 사임한 후쿠다 전 일본 총리......이들은 바람직한 군주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군주에서 논외인 경우다.

 

폭군 정치는 당연히 저항을 불러온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국민과 다른 세상에서 사는,

현실에서 탈구된, 감자의 향기를 연출하는 여성 리더십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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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용운

 

나의 관심은 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침묵의 의미다.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 떠나는 사람이 나는 너를 버렸노라.”라고 읊는 경우는 없다. 떠난 자는 말이 없다.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부재하니까 침묵인 것이다. 반면 남겨진 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그리움, 슬픔, 체념, 자책, 희망.

 

님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 님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이다. 침묵하는 자아인 동시에 침묵을 뿜으며 더 깊은 침묵을 만들어내는 자아. 마지막, 님의 사랑과 침묵은 범람한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민주노총 김00 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이 책은 200812월에 발생한 민주노총 내 성폭력 사건을 통해 드러난 통합진보당, 민주노총, 전교조 소속 일부 간부들의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약자에 대한 횡포, 관료주의, 무능과 무식에 대한 보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 가에 대한 정밀 진단서이다. 청소년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사건의 가해자는 5년 구형에 3년 실형을 받았다. 진보 진영이 일반 사회보다 성폭력이 더 빈번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직 보호를 내세운 이들의 사후 대응 방식은 유별나다. ‘공작 정치(social rape)’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진짜 피해와 무서움은 이것이다. 남성은 물론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사건 은폐, 축소를 주도하고 가담했다. 진보라는 과도한 자의식에 비해, 기본적인 인권 개념은 물론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인식조차 없는 이들에게 사회생활의 목적을 묻고 싶다.

 

손자병법, 손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 하고 있던 전선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누가 먼저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략도 필패다. 내가 쉽고 익숙한말을 경계하는 이유다.

 

나의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발상의 전환으로 매복하고 있어야 한다. 쉽지 않다. 여성은 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은 처럼 살고 싶어 한다. 탈식민 병법이 필요하다.

 

월간 비범죄화,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진연합 발행

 

나는 모든 글은 질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술과 외설, 논문과 잡글, 사실과 허구, 본격소설과 통속소걸, 문학과 사회과학 따위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어떤 글을 읽고 즐거움, 의문, 성찰을 경험했다면 글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글의 내용과 정신이다.

 

일본어인 찌라시는 흩뿌리다의 명사형이다. 책의 기본은 권()인데, 찌라시는 묶인 것도 아니고 뿌리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읽은 글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하고, 공동선을 위한 글은 찌라시였다.

 

성판매 여성을 비범죄화하라!

 

우리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진연합은 오늘, 성판매 여성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범죄화 할 것을 엄숙하고 거룩하게 선포하는 바이다. 다만 선언하고 선포할 뿐,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선언은 그런 거니까.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젠더 권력의 문제인 성매매를 성판매 여성 개인의 문제로만 취급하는 것에 반대한다.

성판매자를 범죄자와 피해자로 나눌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을 규탄하다.

가능하지도 않을 강제냐 자발이냐 기준 세우기는 그만하고, 성판매 여성의 노동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사회적 지원에 대한 논의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성판매를 성적으로 타락한 자, 더럽혀진 자, 비난받아 마땅한 자로 낙인찍어 차별하는 자들을 낙인찍을란다.

치사하게 구매하는 입장이면서 판매하는 사람 비난하기 없기다.

 

20134월 어느 봄날에.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친연합(이하 소속단체)

 

곰팡이와싸우는세입자연대, 남성연대반대하는남성모임, 도우미안쓰는노래방협회, 딸자식이뭘하고돌아다녀도지지할학부모회, 모소리작고아름다운꼴페미연대, 목소리크고못생긴꼴페미연대, 명절날엄마의파업을꿈꾸는일안돕는딸년오미,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야근칼퇴근직장문화확립추진위원회, 서로비난안하는부모자식연합, 성구매할생각없는한줌의남성모임, 성욕의총량을측정계량중인연구자(개인), 시급만오천원시대를꿈꾸는알바연합, 애국국민이기싫은국민연합, 여가부하는일별로맘에안드는여성주의자모임, 한국에와서여성월주의로변질된페미니즘연구회(우리 졸라 많지?). 월간 비범죄화 정기구독 메일링 신청

http://goo.gl/KkFik

 

운현궁의 봄, 김동인


힘없는 대원군의 처지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당시 세도가 김좌근의 첩 양씨가 선배를 흉내 내는 장면이 나온다. 명종 때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라하는 시반선 행사다. 한강 하류에 밥을 쏟아 물고기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구경 나온 배고픈 백성들에게 물고기가 밥을 잘 먹는지 강물 속을 굽어보라.”고 말한다.

 

몇몇은 강으로 뛰어든다. 물고기 밥을 훔친 죄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엉덩이 뼈가 부서지도록 맞는다. 가족은 그 밥을 바란 죄로 오십 대씩 태형에 처해진다. 그 장면이 중학교 1학년에겐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나의 정치 의식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는 그때 고정되었다.

 

고물이 보물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문장강화, 이태준.


이태준의 1939년작 <문장강화>는 반복해서 읽기 즐거운 실속 있는 책이다. 임형택이 쓴 해제의 훌륭함도 감안해야겠지만, 70여년 전 책이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보다 깊이 있고 세련되었다. 이 책은 이렇게 써라.”라고 일러주기보다 좋은 글을 많이 보여준다. 우리 문장이 이렇게 풍요로웠구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다니는 재앙(, 그 공주!)’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나부터.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알리 러셀 혹실드, 2교대The Second Shift


남성에게 집은 쉼터지만 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규범이다. 그래서 남성은 혼자일 때 더 외롭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상하다. 난 혼자일 때 외롭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거늘. 많은 남성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많이 권하는 책 중 하나다. 감정 노동 개념으로 유명한 저자가 부부 50쌍을 인터뷰하고 일부는 같이 생활하면서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을 분석한 책이다.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가슴을 도려내는구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로잘린드 마일스


가정에 소속된 여성치고 임금 노동에 종사하든 안 하든 끼니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거의 없다. 그때 이 책이 생각났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 세계 여성의 역사>. 물론 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양에 걸친 세계 여성의 역사다. 기존 역사에서 여성 역할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여성의 노동 없이 인류 역사는 단 하루도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시선과 약간 다르다.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만일 남자 요리사였다면 열광하는 추종자를 거느린 성인이 되어 그를 기념하는 축일이 생겼지 않았을까?”였다. 물론 스타 요리사의 성별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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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3-03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떠나간 자의 슬픔.. 남겨진 자의 고통..

마태우스 2016-03-0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근데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는 품절이네요 아쉽습니다. 글구 하늘을 덮다 이 책이요, 저도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책의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도대체 무슨 얘긴지 확 와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하늘을 덮다를 덮다, 했습니다. 암튼 저와 관심분야가 비슷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3-03 22:53   좋아요 0 | URL
정희진 씨 서평집에는 절판 도서가 꽤 많습니다. 하늘을 덮다, 덮다 ㅋ
마태우스님이 서민박사님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