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p256. 960년에는 은자 베르나르라 하는 수도사가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설교하며 돌아다녀 또 소동이 일어납니다. 960년에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이 세상의 종말이 바야흐로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번에야말로 100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도 독자적으로 계산하여 1033년에 인류가 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p257. 문학이 끝났다는 말도 고래부터 한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조차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신인작가도 새로운 문학작품도 완전히 엉터리다, 모방이나 속악한 것뿐이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 고 말이지요. 괴테도 똑같은 말을 하는데, 하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속악함으로 흘러가버렸다, 나는 이제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대의 마지막 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입니다.

 

그 후 독일 문학이나 독일 철학에서 누가 나왔는지 아시죠, 횔덜린, 헤겔, 셸링,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하이네, 슈티프터, 니체, 릴케, 첼란......끝이 없습니다. 경탄할 만한 재능이 무수히 나왔습니다.


p259.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 권 중 한 권입니다. 많이 잡아도 두 권을 넘지 않습니다.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0.1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p260.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겨우 5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습니다.

 

p268. 그 후 19세기가 되면 출판 종수가 급락하는데, 그것은 또 왜일까요? 1805년에는 유럽에서 4081종이었던 서적의 출판 종수가 1813년까지 2233종으로 뚝뚝 떨어집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혁명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전야, 독서에 대한 열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변절, 프랑스 황제에 대한 대관으로 프랑스혁명이 어떤 의미에서 좌절합니다.

 

p269. 17세기라고 하면 코르네유나 라신, 라파예트 부인의 시대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한 융성기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1672년 파리의 식자율은 25퍼센트였습니다. 게다가 이 식자율이라는 게 사인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판정된 것이었습니다.

 

p272. 1850년대의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출판한 해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퍼센트였습니다. 어떤 책이 출판되었을까요? 우선 이해에는 발자크가 죽은 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1835년에 나왔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1839,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1857,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초판도 1857년에 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문맹률은 70~75퍼센트였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퍼센트였습니다.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최신 연구에는 95퍼센트라고 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p273.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 리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그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엡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 밖에 자산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p275.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p276. 그리스인들이 99.9 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 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 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 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p278. 우리 인류는 생겨난 지 20만 년이나 되었습니다. 문자를 발명한 지는 5000년이 되었습니다.

 

p279. 요컨대 대체로 75천년 전부터 35천년 전까지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행위가 거의 다 나왔습니다. 농경, 목축, 부의 축적에서 오는 경제활동이라는, 이른바 정주에 의한 문명은 12000년 전부터 9000년 전, 대체로 1만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7분의 1의 역사밖에 안됩니다.

 

p282. 우리의 문학은 이 세상에 생을 얻은 지 고작 5000년밖에 안 된 젊은 예술이고,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5000년은 20만 년의 40분의 1입니다. 여든 살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p283. 전대미문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전대미문이지만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세계의 종말은 이미 있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오지 않지만 말이지요. ‘대대적인 절멸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이나요. 어떤 고생물학자에게 물어도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전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첩기), 트라이아스기(삼첩기), 백악기. 이를 빅 파이브라고 합니다.

 

p284. 생물 의 평균연령은 대체로 400만 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년간 자연사하는 종은 400만 종에 한 종 꼴입니다.

 

p287 전쟁 전이 발레리라면 전후 프랑스 최대의 비평가라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단적으로 “‘는 죽을 줄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행동이라는 것은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끝납니다. 결말을 지켜봐야 끝납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행위는 그 결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p2188. 블랑쇼는 사람은 죽을 수 없다라는 이 사고를 더욱 확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p291.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합니다만, 네 살 짜리 남자아이가 찾아와. “우리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바로 파멸의 위기 한복판에 있다.”라고 우쭐하여 빙글거리며 말했다면, 물론 물리적인 징계는 몹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웃으며 엉덩이를 살짝 꼬집어주지 않으면 교육상 좋지 않을 겁니다.

 

p291. 379만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그렇다면 1만년 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엡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1만 년이나 있으니까 예술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들뢰즈처럼 쾌할하게 철학이 끝났다고? 그건 첫 번째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으로 두 번째 황금시대가 찾아올 거야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요?

 

p293.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행해진다! 어떤 때라도!”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말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것입니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p295. 자신이 한 일을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그 말 그대로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그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제작하고 lT을 때, 자신의 몸도 마음도 함께 부서지고 변용해가는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평가를 받는다느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p296.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요? 그것은......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p297.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초판으로 몇 부나 인쇄되었는지 아십니까? 700부입니다. 350부가 반품되어 태워졌습니다. 2판에서 대폭 증보 개정합니다만, 그 또한 비슷비슷합니다. 그중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바로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쓰게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지요.

 

p298.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요. 이것이 미래의 문헉학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의 문헌학이란 대천사의 문헌학이다, 라고요.

 

말은 그것을 빠져 나옵니다.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들려옵니다. 낮게,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러나 확고한울림으로, 한밤중에. 그래요, 들려오고 말았으니까요.

 

p301. 그래도 패배가 두렵습니까? 내기에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최후에는 그를 등장시키지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 4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이란 니힐리즘에 도달하기까지 철저히 높은 인식 수준에 있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설명해두기로 합시다.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잉태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조금 뒤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 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어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p303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히 속으로.

 

p306. <야전과 영원>에 반응해준 이가 사상이나 비평 주변에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뭔가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작가, 음악가, 미술가, 디자이너, 활동가들이었다는 역력한 사실은 어느 위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등뼈에 철심을 넣고 내 피에 유황을 부어넣었다.” ()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감히 피하기로 한다. 본문에서 은밀하지만 명백한 경애와 연대의 신호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p309 옮긴이의 말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이 책에서 저자는 거듭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다. 이때의 문학은 문자로 쓰인 모든 텍스트에다 춤이나 음악 등까지 포함한 것.

 

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책인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대상이 종이에 쓰인 것에 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한정된 시공에서고 춤, 음악, 노래, 복식, , 회화, 영화 등 온갖 예술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p316.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쥬


요나스 요나손 성석제 이기호

 

의아했다. 피에르 르메트르가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공쿠르상이 일본 나오키 상처럼 말랑말랑한 상이 아닌데?! 르메트르 소설 중 몇 권은 재미없어 읽다 말았고 그나마 끝까지 읽은 소설은 <알렉스>였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런 미스테리? ‘끝에 가서 삑사리를 내서 그렇지 르메트르 보다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훨 낫지 않나?’

 

읽으면서 연신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게 같은 사람이 쓴 거라고? 정말, 리얼리?!

이 정도면 가히 비상, 도약이라 할 만하다. 미스테리 소설만 쓰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마르케스 혹은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같은 소설을 쓸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읽기때문일까.

 

이 텍스트를 써가면서 나는 몇몇 작가들을 차용했다. 에밀 아자르, 루이 아라공, 제랄드 오베르, 미셸 오디아르, 호메로스, 오노레 드 발자크, 잉마르 베리만, 조르주 베르나노스, 조르주 브라상, 스티븐 크레인, 장루이 퀴르티스, 드니 디드로, 장루이 에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박토르 위고, 가즈오 이시구로, 카슨 매컬러스, 쥘 미슐레, 안토니오 무뇨스 물리나,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마르셀 프루스트, 파티리크 랑보, 라로슈푸코 등등

 

p669. <오르부아르>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전사자 국립 묘지를 만들기로 한다. 이 사업에 악마의 화신 같은 도니프라델 중위가 뛰어든다. 정부 고위 인사에게 온갖 뇌물을 먹여 사업권을 취득한 도니프라델은 오늘날 탐욕스런 자본주의, 대기업의 상징같은 존재다.

 

관은 170cm에서 130cm까지 줄어든다. 전사자들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관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전사자들 시체와 무덤 명패도 맞지 않는다. (유족들이 무덤을 파볼 것 같아!) 심지어 프랑스 군인의 묘지에 독일 군 시체를 집어넣는다. 이후엔 아예 시체없이 무덤을 흙으로 채워 넣기까지!

 

전쟁 중 도니프라델의 부하였던 미야르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생계고에 시달리다 전사자 추모 기념비를 만들어 준다며 전국적인 사기를 친다. 과연 누가 더 사악한가?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풍자적인 문체 때문에 요나스 요나손이 떠올랐다.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의 노인> 보다는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한국 작가들 중에도 <오르부아르>나 요나스 요나손에 비견할 만한 작가들이 있다. 성석제와 이기호. 한국의 웃픈 현실을 이 두 작가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던가? 성석제로 치자면 아무래도 <투명인간>이 아닐까. 짐승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혹사당하는 만수는 <오르부아르>의 알베르를 떠올리게 한다









<오르부아르><투명인간>보다 더 가혹한 소재를 다루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작품은 단연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이 소설에서 알베르, 만수에 비견될만한 인물은 나복만이다. 더 바보같고 그가 당하는 고통은 더 처절하다.


최근에 이기호의 신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가 출간되었다.

부디 <오르부아르>만큼 대박 나시길.

 

(20대 때 불문과 다니는 친구는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라는 말을 못 견뎌했다.

“‘떼레쥐라고 해 줄래?”

 

어찌나 때리고 싶던지. 내가 불문과 가고 나서야 그 친구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제목 <오르부아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건지 모르겠다.

의역을 한 것도 아니고 원제를 다 살린 것도 아니고.

근데, 이 바보 같은 제목이 왠지 소설과 잘 어울린다.

 

아무튼 에두와르와 알베르가 부디 다시,

천국에서 만나길

오흐부아, 라 오

 

 

밑줄 그은 문장

 

p264. 앙리가 보기에 세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뼈 빠지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일하면서 그날그날을 불쌍하게 연명해 가는 마소 같은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의 <개인적 요소들> 때문에 말이다.

p277. 그녀는 별로 질색하지 않았다. 어머니 쪽으로는 리무진적인 면을 물려받았지만, 평범한 편이었던 아버지 쪽으로는 수레적인 면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p294. 꼭 그녀의 아버지처럼, 정말로 한 켤레의 양말처럼 닮은 부녀였다.

 

p521. 라부르댕은 문장을 만들 때 오로지 음절을 고려하지, 그 안에 담기는 생각을 고려하는 적은 거의 없으니까.... 라부르댕은 일테면 원구형의 천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항상 멍청한 모습만 보이니까 말이다. 그에게선 아무것도 이해할 게 없고, 기대할 것도 없었다.

 

p550. 난 왜 갈보집들이 그렇게나 기독교적인 이름을 가진 거리들에 그토록 많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아마도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주겠죠.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떼레쥐...ㅎ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3-17 10:13   좋아요 1 | URL
다시 생각해도 `떼레쥐`고 싶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시이소오님 댓글보고 빵~
ㅋㅋㅋ

시이소오 2016-03-17 15:21   좋아요 0 | URL
웃으셨다니 좋네요
아주 웃긴 글을 쓰고 싶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잘 쓰실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3-17 18:3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오르부와르 ~~흐흐^^

서니데이 2016-03-1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오늘도 제 서재에서 퀴즈 준비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7 19:2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요. 퀴즈 보러갈께요^^

eL 2016-03-1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군요. 상상도 못했네요 ㅎ 저도 떼레쥐에서 빵 터짐 ㅋ

시이소오 2016-03-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어요. 이엘님, 오르부아르~~
 

5장 삶과 죽음

 

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여성의 섭식 장애 관련서 중에서 관점, 현실 인식, ‘해결책과 스토리가 모두 좋다. 중독 증상 때문에 사회의 경멸적 시선과 자기 비하에 지친 이들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와 은유는 흥미진진하고 깊이와 통찰이 넘친다. 알코올, 담배, 마약 중독은 니코틴 같은 특정 성분에 대한 중독이다. 그런데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내가 반복해서 읽은 부분은 통나무 이야기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 도 있고 대상의 변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잇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이 책의 한 땀 한 땀은 모두 심오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매 순간 감탄하느라 숨을 두 번씩 쉬게 된다. 처음 읽었을 때 연필로 밑줄을 그었는데 그 표시가 두 번째 읽을 땐 방해가 되었다. 책을 다시 사서 표시하지 않고 또 읽었다. 원서로도 읽었다. 참고문헌과 주 내용도 중요해서 분책해,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원제는 정오의 악마- 우울증의 모든 것’. 이 책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몇십 년간은 우울증 관련 저술에 도전하는 이가 드물었으리라.

 

내가 아는 한 우울증에 관해 정치적, 학문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한낮의 우울>보다 잘 쓴 책은 없다. 하나의 문장을 고를 수 없는 책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 면역력 저하다. 면역성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생의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우울증은 내 두뇌의 암호 속에 영원히 살고 있다. 그것은 나의 일부다......나는 우울증을 제거하려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들을 손상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미봉책(half-measures)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나는 이제까지 미봉책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었다.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 미봉(未縫), 혹은 미봉(未封)인줄 알았던 것이다. 아뿔싸! 사전적 의미의 미봉책은 미봉책(彌縫策)이었다. ()와 봉(),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뜻으로 흔적과 자국이 남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 해결이 우월하고, 미봉책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다.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찬사인 이유다.

 

흔적 없음은 존재 없음이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꿰맨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언니의 폐경, 김훈

 

나는 최근 몇 년 사이 세 번 삭발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였다. 주변의 반응은 머리 감기보다 더 번잡스러웠다. “암이니?”, “(머리가)아프니?”, “논문 스트레스?”......내 진심 (게으름)을 몰라주고 사람들이 너무 걱정해서 잠시 나의 사회성을 의심했지만, 실상 나는 매우 사회적인 인간이다.

 

<칼의 노래>같은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다음 세 가지를 주장한다. 김훈은 소설, 논픽션, 기사, 수필을 불문하고 모든 글을 잘 쓰는 예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장르의 구별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물상이든 묘사 대상에 대한 대상화를 최소화하는 윤리적인 작가다. 그의 글이 풍경과 상처가 되는 이유다.

 

박완서가 일상에 관한 뛰어난 서술자였다면, 육체에 해당하는 작가는 김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장>을 읽은 독자는 더욱 동의하리라. 몸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다.

 

삶에 대적하는 화자의 태도. “남편의 속옷에 붙어 있던,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관하여 나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데, 마지막 예절과 헤어짐의 모양새로서 잘한 일이지 싶다.” 나는 이 문장을 넘기지 못하고 몹시 몸부림치고 몹시 몸서리쳤다. 나이 들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들과 세월로 인해 잃고 얻을 모든 것들과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 틱 낫 한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예전에 읽든 틱 낫 한의 책(<>< <평화 이야기>은 그래도 덜 했는데, <>는 화를 돋우었다. 물론 책마다 타깃 그룹이 있고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분노를 다룬다는 책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겨우 이정도인가.

 

분노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만이 늘어놓을 수 있는 아름답고 한가하고 피상적인이야기들. 이 책은 한때 70만 권 넘게 팔렸다. 위로를 갈구하는 현대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시아 출신 도인들은 서구에서 증명받은 뒤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온다. 그들의 내공과 관련 없는 오리엔탈리즘, 불쾌한 지식의 정치학이다.

 

그러다 반전. 나는 단 한마디에 깊고 냉철한 위로를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달려 왔던 개인적 의문까지 풀렸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서 있는 토대다.”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체),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의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행동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이 부담스런 소유에 나는 안도한다.

 

오늘 부는 바람, 김원일

 

인생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소설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을 들겠다.

 

<오늘 부는 바람>1970년대 도시 빈민의 가난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문학과 지성의 본뜻, 문학과 지성의 관계를 배웠다. 빼어난 문장이란 그 자체로 영상이며 읽는 이의 몸에 배어들고 몸을 베는 글이다.

 

작품의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분위기는 힘이 있다. “.....이제 엄마 생각에도 서러워지지 않았다. 껌보다도 더 질긴 삶이 내 발을 땅에다 굳건히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 후기 역시 매혹적이다. “나는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도 어둠이나 죽음의 아름다움,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 (나는 이런 작가를 사랑한다!).....비극의 세계가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 거대한 질서의 운동이요, 생을 절실히 사랑하는 애정의 소산임을 확신한다.”

 

인생의 고통을 놓지 않는 사랑스런 후기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애정의 소산임을 확인할시간이 없는 비극이다. 날마다 전쟁이고 흐느낌이다.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공공 의료는 좌파 정책이다. ‘우파 민중은 안 아픈가? 공공 의료는 국가의 기본 역할인데? 그는 아나키스트인가? 내가 분노하자 주변에서는 뭘 기대하냐는 반응이다. 일부 지도층의 이런 발상에 대한 현저한 면역 결핍이 내 지병이다. (내 지병은 홧병)

 

질병은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의료는 복지 이슈가 아니다. 쌀 수급을 복지 정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질병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홍 지사의 사고는 철학의 문제, 그것도 국정 철학의 오류다. 그는 좌파의 국가관을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공동체관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일본 출신의 티베트 의사이자 승려인 다이쿠바라 야타로의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는 티베트 의학의 인식론과 증상에 따른 실제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구현물로 보지 않는다. 동식물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 불완전해도 상관없다.

 

몸의 생애는 곡선이다. 내려갈 때가 있다. 성형 열풍이나 완벽한 몸 이미지는 몸의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행위다.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알퐁스 도데는 말한다. “아프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과 제도를 자랑하는 쿠바는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때 모든 국가가 기피한 원전 난민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국격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원래 진주의료원 같은 기관은 동리마다 있어야 한다. 폐업이 아니라 더 만들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 프리모 레비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이런 사람은 홀로코스트가 아니었어도 매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레비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오시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에서 110개월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 그는 투신 자살했다. 지금 우리 사회 보통 사람의 자살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난 무려 100년 참고 참는다....../난 내일 죽음과의 약속을 지킬거다! /하지만 너네 인간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 내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용설란)

 

망각을 거부한 투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남은 인생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이다. 불확실한 삶이라면 가능성을 희망이라 믿고 살겠지만 확실한 상태에서 선택은 많지 않다.

확실성의 볼모가 된다는 것. <기차는 슬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

 

셋째는, 공부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최근 임지현은 <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라는 글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가 한 말을 전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 생각, 사랑(관계), 자기 변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다. 나도 조금 생각한 적이 있다. 피학의 쾌락이 있었지만,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태백산맥, 조정래

아는 의사 셋이 같은 주제로 흥분하는 걸 보고, 염 대장의 말이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 커피 성분이 카제인나트륨과 우유를 대립시키는 광고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였다. “카제인(단백질 화학명)이 우유잖아.”, “용각산이 바로 도라지 가루지.” “리튬(조울증 치료제)이 버드나무 잎에서 나는 거거든.” 그들의 요지는 같은 성분인데 우유(‘자연)와 카제인나트륨(’화학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교묘한 광고라는 것이었다.

 






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자살의 이해>는 제목 그대로, 자살의 이해를 돕는 책이다. ......이 책은 저술의 모범이다. 사회적 필요, 다학제 관점, 정치적 열정, 전문 지식, 고통에 대한 공감. 생명체인 인간과 사회적 인간, 개인과 구조, 이 쟁점들을 상호 융합적으로 다룬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러브 스토리, 에릭 시걸.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함에 관련한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러브 스토리>의 연인들은 계급 차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올리버)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다. 올리버가 제니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제니는 사랑하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제니가 죽자 올리버의 아버지는 안됐구나. (i’m sorry.)”“라고 말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사랑은 미안해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라며 원망스레 울먹인다.

최근 의문이 조금 풀렸다. ‘사랑미안은 같은 말일 수도 있고 무관할 수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8년 째 아프다. 심각한 병이지만 사회적 낙인이 심해 위로받기는커녕 변명과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돈 잘 벌고 착하고 자랑스러운딸이었던 그녀는 걱정거리와 민폐로 전락했고 경력, 경제력, 인간관계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며 인생을 배우는 나는 미안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 아프다/죽고 싶다는 호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질병의 증상(신체적 통증)으로 고통받는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혼내는 사람도 있다. 낙오자 취급은 엘리트였던 그녀의 자아에 사망 선고가 되었다.

 

그녀의 증상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것이다. 약자는 보호받고 지원받아야 하지만 통치 세력이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을 지시하는 사회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아픈 사람이 미안해할 때야말로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 이 말이 필요하다. 인생은 열렬한 사랑의 순간보다 괴로운 시간이 훨씬 많다. 공감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잎새, 오 헨리.

 

몇 해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이 득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 보기에도 비교적 성공한인생들이다. 그들 역시 공부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 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애상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김승옥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 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를 해야 하는 데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이 문장에 동의한다. 일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열 받지 않아도 되는영화와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동감하는 구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름다음만 소비하고 싶다. 비생산의 삶. 죽을 때 연기조차 없는 삶. ‘독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로 사는 피로와 죄악을 피하는 길이다. 호랑이나 사람이나 무엇인가를 남긴다? 끔찍하다.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김승옥도 알고 있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되어 남을까?”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모 신문에 게재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치유란 사람의 매력 그 자체의 효과이지 시대의 멘토해주는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는 모두 깊고 힘이 있었다. 나를 붙잡은 구절은 모든 것은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였다.

 

지식, 사회,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존경스러운 불문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은 승, 부 중 어느 한쪽을 격려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당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그들의 입장에서 사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보고했다는 점이다. 소위 내재점 관점(질적 방법)‘이 잘 적용된 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력 저하는 노력의 성과. 그러나 자기 선택은 어느 정도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약자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약자다. 자유는 고립 이데올로기다.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도 혼자 책임질 것. 위험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혹은 죽음의 방식이다.

 

저자처럼 계몽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기존 자본주의의 수혜자는 그들의 선한 의지와 달리 시혜자가 되지 못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절박하지만 진짜 현실인식은 안이한 듯하다. 충격은 이제부터다. 룸펜, 의지박약자, 잉여는 구제 대상이 아니라 파국의 주체다.


 

에필로그, 다르게 읽기와 독후감 쓰기.

 

 

좋은 독후감의 전제는 일단 다르게 읽기. 단언컨대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좋은 책이 반드시 좋은 독후감을 낳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후감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과 읽기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에, 책의 수준과 무관하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읽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차이는 왜 발생할까. 대개는 콩쥐한테 동일시하고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계모의 내면 세계나 아버지, 친척,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한 이들도 있다. 나는 팥쥐는 꼭 딸이어야만 하는가, 아들일 경우 어떻게 될까가 궁금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들은 가치 다양성, 관용, 배려 차원의 내용 확대가 아니다. 정치적 모순, 갈등, 위계의 내용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정치적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독후감은, 내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즉 지면을 투사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안경을 쓰고 읽음으로써 텍스트를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경합하는 읽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도리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독자의 위치성, 그 위치성을 의식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는 읽기가 책의 위상을 결정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죽었다.” ,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 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 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 물론, (주체, subject)는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시회적 몸(social body)이다.

 

책이 되지 못한 책들의 피해, 비평이 되지 않는 비평의 폐해는, 수많은 책을 읽는 들에 의해 청산될 수 있다

어느 출판사의 사훈은 책 때문에 망가지는 나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독자는 지구를 구한다.

 

 -----------


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리뷰가 아닌 필사가 돼버렸다. 우선 내게는 생소한 작가가 너무 많았다. (나의 무지에 죽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말했듯 그녀가 온몸으로 책을 통과하는 글들에 섣불리 개입할 수가 없었던 것도 결정적 이유다. 단 한 챕터도 그냥 흘러갈 수 없었다. 환호작약, 촌철살인의 문장들로 흘러넘친다.

 

내가 읽은 서평집 중에 최고다. (장정일, 이현우, 이다혜, 정혜윤, 장석주, 정여울, 이동진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독후감의 원칙 때문이 아닐까. 어떤 책을 읽는가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독자의 독서 이후의 변화. 정희진은 자신의 원칙들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희진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독후감을 써냈다.

 

타성적인 서평 백 편을 읽느니

개성적인 독후감 한 편을 읽는 편이 낫다.

그녀가 어떤 책을 칭찬하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그 책을 읽고 싶었다.

 

그녀가 통과한 책들을

이제 내가 통()하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3-17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7 02:4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고 싶네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이 육사

 

 

p. 21.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낙관적 진보론의 신용이 떨어진 20세기의 초엽에도 열성적인 사회운동가들은 자신이 희구하는 미래의 모습을 이 책에서 발견하곤 했다. 콩도르세는 이 책(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도표 개요)에서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 정신에 내재된 힘으로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 정신에 악덕과 정염이 담겨 있어 그 활동이 자주 빗나가지만, 이성의 개발과 자유의 증가를 통해 끝내는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는 확신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 김종삼

 

p37. 한 인간이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소설가의 수만큼 많다. 멀리는 괴테도 있고, 가까이는 밀란 쿤데라나 이청준도 있다. 좋은 시민이 될 수 없어 시인이 되는 이야기인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이상한 사회인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가장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모욕 받는 자의 상상력이 곧 소설의 상상력임을 말하는 리처드 라이트의 <검둥이 소년>은 작가 성장의 서사와 저항의 서사를 겹쳐놓는다. 작가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를 말하면서 작가가 된다.

 

p39. 랭보는 열여섯 살이 되된 해에, 후세의 문학연구자들이 투시자의 편지라고 부르게 될 편지를 선배 시인 드므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은 투시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 김수영

 

p41. 이 삶을 불태워버리는 게 얼마나 싫은일이며,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지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미학적 재능은 그 일을 감행하는 재능이다. 다시 저 영화 <베티 블루>로 돌아가면, 주인공 조르그는 제 삶을 불태워 파괴하고, 다른 삶을 열망하던 제 애인마저 죽이고, 더 정확하게 말해 이 삶에서는 행복과 제 열망마저 죽이고, 한 인간의 삶에서 작가의 삶으로 건너갔다. 한 사람이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꾼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네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해 보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

 

-내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어요

-친구들은?

당신은 이 날까지도 나에게 그 의미조차 미지로 남아 있는 말을 쓰시는군요.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미인은?

그야 기꺼이 사랑하겠지요, 불멸의 여신이라면.

황금은?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별란 이방인아?

구름을 사랑하지요....흘러가는 구름.....저기.........신기한 구름을!

 

<이방인>, 보들레르

 

p58. 단장하던 채경이 깨져 보이고, 창 앞의 앵두꽃이 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가 달려 보이고 태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 보이니

나 죽을 꿈 아니냐.

 

능히 열매가 열어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질 때 소리가 없을쏜가,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볼 것이고,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요,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라

 

춘향전


p59. 이 꿈의 해석은 어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읊는 정치시(금잔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그릇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피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이 또한 높구나) 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p65. 술병을 보내고 얼마 후 장만옥은 서독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죽는다. 두 해나 지나서 도착한 이 편지에서 장만옥은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쓰고 있었다. 이 말은 거의 영화 전체의 주제가 된다.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라는 말이 랭보의 진정한 삶은 여기 없다는 말에 대한 번안이라면, 장만옥의 이 말은 쿤데라의 그것을 동양식으로 탁월하게 다시 번안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여기 없는 것이며, 잊지 않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일 테니까.

 

p66. 그는 끝내 마적의 칼에 맞아 죽는다. “칼이 빠르면 피 솟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는 자기 피가 그렇게 아름답게 솟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과 삶을 맞바꿀 때만 삶은 진정한 것이 된다고 안타까운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또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 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의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하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고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랑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유고시인 진이정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희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울릉도>, 유치환

 

p85. 한국의 대표적인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19815월에 탄생했을 때도 그 첫 악보에 달린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한 대목을 다듬어 가사를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마지막 날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된 윤상원과 들불 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겨울에 숨진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극 <넋풀이>를 통해 처음 발표되었다.

 

p90. 2002년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의 일부가 개표에 부정이 있다며 시위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이 종주먹을 들이대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그들은 이 노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민간인>, 김종삼

 

어린이놀이터에, 자은 요람 하나 비어 있다.

루나 파크에, 목마 하나 기수 없이 서 있다.

나무 아래, 꿈에 잠겨, 그림자 하나 앉아 있다.

빛 속에, 실현되지 않는, 먼 침묵 하나.

그리고 언제나, 목소리들 웃음소리들 한가운데, 간격 하나.

 

연못 위에서, 오리들이 잠시 멈춘다.

아이들의 어깨 위를, 나무들 저 너머를 바라본다.

한 아이가 말없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슬픈 발자국소리만 들린다. 아이는 오지 않는다.

 

말 하나가 메리고라운드에서 달아나,

눈을 비비고 줄지어 선 나무들 뒤로 사라진다.

아마도 숨어 있는 소녀 곁에 동무하러 가는가,

고적한 저녁 어둠 속에, 달의 세 번째

네 거리에,

가로등도 꺼진 저 은빛 막다른 골목에

 

- <부재의 형태>, 야니스 리초스

 

98.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다 묻지 마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 주

내 친구가 찾아 와도 나 죽었다 말하지 마

 

작가 불명.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사람이여

날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셔요.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셔요.

내 위에 프른 잔디를 퍼지게 하여

비와 이슬에 젖게 해 주세요.

그리고 마음이 내키시면 기억해 주세요.

 

나는 사물의 그늘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거에요.

슬픔에 잠긴 양 계속해서 울고 있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겠지요.

뜨지도 지지도 않는

어스름 빛 너머로 꿈꾸며

아마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니, 잊을지도 몰라요.

 

<고블린 마켓>, 노래, 크리스티나 로세티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 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나

눈 내리면 언 땅에나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로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참된 시작>, 그대 나 죽거든 첫 연 , 박노해

 

님은 그 물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건너시었네

물에 빠져 시어지시니

님을 장차 어이하올꼬

 

<공무도하가>, 김 인환 역

 

p125. 모파상은 자기 스승 플로베르의 말을 빌려 어떤 사물이건 그 사물에 맞는 단 하나의 표현이 있다고 했다. 유명한 일물일어설이 그것이다.

 

당신이 가실 때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스도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가을바람이 처음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습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토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 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 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붓대를 잡고 남의 불행한 일만을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신의 가진 때는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님의 침묵>, 당신이 가신 때, 만해 한용운

 

p130. 예술의 희생보다 세상의 희생이 먼저 있다. 예술이 세상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있다.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믿음과 사람이 그렇게 어렵고, 믿음과 사랑이 그렇게 절박하다.

 

놈은 녀석을 낚아울러대 땅바닥에 등짝빡치고,

놈은 녀석을 쭈물떡하고 꼬르락까지 개상직이고,

놈은 녀석을 쪽팍뭉게고 아갈치고 녀석의 귓쌈 으르때리고

놈은 녀석을 쌔리박고쳐 폭시가마솥하고,

하는 일마다 찍에다 갈아대고 갈에다 찍어댄다.

마침내 놈은 녀석을 껍질창시뺀다.

상대 녀석은 우면좌면, 뽀사지고, 흩어지고, 비틀꼬지고, 스러진다.

이러다 녀석은 끝장 보겠다.

녀석은 저를 추스르고 쪼갈맞추고.....그러나 헛일이다.

그리도 내내 굴러가던 굴렁쇠가 넘어진다.

아브라! 아브라! 아브라!

발이 무너졌다!

팔이 부러졌다!

피가 흘렀다!

뒤져보고, 뒤져보고, 뒤져보라

녀석의 배 그 냄비에 거대 비밀이 하나 있단다

손수건에 파묻혀 울고 있는 주변의 할망구들아.

질겁하고, 질겁하고, 질겁해서

그대들을 바라본다

또한 찾기도 한다, 우리들은, 거대 비밀

 

<거대 전투>, 앙리 미쇼

 

p140. 그래서 나는 높고 낮은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묻고 말한다. 병사들을 관리하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생각하라. 낮에만 생각하지 말고 밤에도 생각하라. 생각하기 어려우면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라. 그렇게라도 하다보면 마침내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도 민주주의이고 해답도 민주주의다.

 

눈동자 이글거리는 점쟁이 피붙이가

어제 길을 떠났다, 등짝에 어린 것들

둘러업고, 또는 저 자랑스러운 배고픔에

는 마련된 보물, 늘어진 젖꼭지를 내맡기고

 

사내들은 번쩍이는 무기를 높이 들고,

제 식구들이 웅크린 마차를 따라 걸아가며,

있지도 않는 환영을 쫓는 서글픈 아쉬움에

무거워지는 눈으로 하늘을 더듬는다.

 

모래 굴방 구석에서는 귀뚜라미가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 두 배로 노래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키벨레는 이 길손들 앞길에,

녹음을 북돋아, 바위에서 샘물 솟고

사막에 꽃피게 하니, 그들에게 열린 것은

컴컴한 미래의 허물없는 왕국.

 

<길 떠나는 집시>, 보들레르.

 

p155. 이성복 시인이 20131<래여여반다라>라는 이상한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다.......2006년 여름, 진흙으로 빚은 신라시대 불상들이 경주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전시회의 표제가 래여애반다라였다. 신라 향가인 풍요의 한 구절로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의 이두문자. 시인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말을 앞세우면서도, 이 이두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의역하여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불어오게 두어라

이 바람도

이 바람의 바람기도

 

지금 네 입술에

내 입술이 닿으면

옥잠화 꽃을 꺼낼까

 

하지만 우리

이렇게만 가자.

잡은 손에서 송사리 떼가 잠들 때까지

 

보아라,

우리 손이 저녁을 건너간다

발 헛디딘 노을이 비명을 질러도

 

보아라,

네 손이 내 손을 업고 간다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집 찾아간다

 

오늘이 어제라도 좋은 날,

걸으며 꾸는 꿈은

수의처럼 찢어진다

 

<래여애반다라>, 이성복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님의 침묵>, 사랑의 측량, 만해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없음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 만해 한용운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처음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한 덩이의 숯과 소금이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불의 장미는 미인의 꿈속으로 파고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한 그릇의 장국 속에서도 그의 견해를 올바르게 피력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끝에는 으레 공작의 꼬리 같은 무지개가 피었으며 그 혈통을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주장했다. 난만하게 퍼지는 것은 빛깔이 아니라 공기 중의 풀잎의 순도 때문이다. 미인은 한 가닥의 순은처럼 꼭 그러한 길에만 나타난다. 청명 때였다. 먼 산이 갑자기 내 이마에 와 멎고, 홀연히 어디선가 청아한 꾀꼬리 울음소리가 한마장의 거리를 달려와 내 귀에 멈추었다. 아무래도 시국이 심상치 않았다.

 

- <우리들의 평화주의 5>, 박정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p191.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에 참가한 법학자, 신학자 들이 이미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근대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확실히 그들은 근대적인 법 시스템의 창시자이므로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르장드르가 만약 지금 뭔가가 끝나려 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세다라고, 다소 미소 섞인, 그러나 충분히 신랄한 아이러니를 담아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요?

 

p192.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베케트가 말하는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뭔가의 계속이고, 뭔가를 계속하는 일입니다.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p193. 우리가 통상 근대라 부르는 시대의 모든 것, 근대법이나 근대 정치제도뿐만이 아니라 근대국가, 근대 철학 그리고 근대의 대학, 근대과학, 문학을 포함한 학문은 여기에 연원을 갖습니다. 여기에 혁명이 있습니다. 이를 교황 혁명 또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는 최초의 근대 법’, 당시의 호칭으로 하면 새로운 법jus novum’을 낳는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르장드르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다고 한 부분과 그 에피소드에 머무르지 않은 혁명의 본질부분을 나눠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사용해온 두 가지 호칭을 억지로 각각에 할당하겠습니다. 전자를 교황혁명’, 후자를 중세해석자 혁명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p195. 보름스협약으로 교황이 성직자를 서임할 권리를 되찾았다는 표면적인 의의밖에 보지 않는다면, 왜 이것이 혁명인지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일반적인 고등학교 세계사 자료집에도 실려 있는, 힌트가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보름스협약을 승인하기 위해 250년이 넘은 세월을 거쳐 공의회가 부활했습니다. 새롭게 소집된 제 1차 라테라노 공의회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의회의 기원이었습니다.

 

p196.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한 무더기의 책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입니다. 즉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가 편찬한 <로마법>대전 전 50권이 발견된 것입니다. ...6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600년 가까이 완전한 망각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찾아내 들고 읽었습니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믿기 힘든 노력을 아낌없이 투입하였지요.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p197. 앞에서 말한대로 여기서 새로운 법이 성립합니다. 그것은 쓰였습니다. 물론 교회법뿐만 아니라 이 혁명에 자극받아 세속법, 예컨대 군주법이나 제국법, 봉건법, 장원법, 도시법, 상법 등도 차례로 고쳐 쓰입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모순 조항의 해류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 그 성과가 집성됩니다. 이리하여 르장드르의 말을 빌리면 혁명은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는 절대적으로 자기를 갱신하고, 대사되고, 체계를 이루고, 다른 법의 집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를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과실인 새로운 법을 추축으로 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p202.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 =번식을 보증하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 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p205. 말하자면 재생산하는 원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원리, 계보 원리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엔은 계속해서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정부라는 구상은 늘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p207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드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교황이 바로 최초의 주권자입니다.

 

<로마법 대전> 칙법휘찬에 있는 유명한 조문에는 분명히 황제의 권력은 법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황제는 법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망각되고 있던 이 법전의 조문은 오랫동안 중세의 위대한 법학자나 신학자에게 전통으로 계승되어 교황[게 해당하는 것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이나 왕이라도 권리상 법을 무시할 수 없고, 사실상 무시하기 힘들어진 것도 이 혁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p211. 12세기 혁명으로 가능해진 실증주의의 영향은 역사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이때 다른 분야에서 구별되어 전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련되어 강철처럼 강인해진 법학이야말로 유럽의 첫 과학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과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p212.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p213. 이리하여 근대법, 근대국가, 근대주권, 회사, 신탁, 계약, 조합 등 근대자본제의 원형도 이 혁명이 창출해냈습니다. 근대 의회나 선거를 비롯한 근대 정치제도도 말이지요. 어이가 없을 만큼 단순한 것조차 이 혁명의 발명품입니다.

 

p218. 혁명의 담당자는 법학자로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철저하게 읽습니다. 읽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 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어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식자율이 매우 낮은 세계였습니다. 사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법문입니다. 앞으로 적용될 법입니다. 한 자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상하게 오역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르장드르는 이것은 문법학자의 혁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합니다. 절대 오역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일이라는 걸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쇄술 같은 것도 없으니까 사본을 만듭니다. 손으로 베껴씁니다. 거기서 또 틀렸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지니까 이보다 더 철저한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 부분, 읽기 어려운 부분에 주석을 붙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을 의역하거나 하여 수정합니다. 해석을 조금씩 갱신해갑니다. 현행법으로 적용하는 판례가 쌓여갑니다. 법문과 판례를 대조하여 모순이 없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점점 두꺼워져 재판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발췌하여 요약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법 격언이나 법문, 판례의 발췌 요약본을, 또 이상한 누락이나 날림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다시 자세히 읽으면서 한 번 정리하여 가필하고 편찬하고 제본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페이지 수를 적는 것도 자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손으로 매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누락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이것만으로도 발광할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읽고 쓰고 번역하여 책을 만든다는 것이 대체 얼마나 무리한 일인가에 대해 말해온 우리가 보면 말이지요.

 

그리고 또 색인을 만들어야 합니다.....그것이 바로 12세기 해석자 혁명의 혁명가들이 최초로 한 일입니다. 데이터베이스로서 법문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 작업은 짧게 잡아도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1세기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실증주의의 탄생, 그 이상의 것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통치하는 도구가 정보뿐이게 된 것입니다.

 

르장드르는 얼핏 아주 기묘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텍스트문서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지요.

 

보통 텍스트라고 하면 쓰인 문서를 말합니다. 문서라는 것은 보통 정보가 쓰여 있습니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도구, 정보를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이는 라틴어의 동사 ‘texere’의 수동완료분사 ‘textus’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원래 직물 또는 뒤얽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부터 순서대로 문명, 이야기, 신의 말, 복음서, 본문이라는 의미는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르장드르에게 텍스트라는 것은, 예컨대 흑인의 춤입니다.......그렇다면 이들 액세서리, 각양각색의 복장, 문신, 악기, 음악, 멜로디, 리듬, 가사, 춤의 안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들의 신화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화를 좀 더 말하자면 을 춤추고 있는 셈입니다.


모리스 블랑쇼가 독서란 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였을 르장드르는 이렇게 하여 그들은 법과 춤추러 찾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 호흡법이나 발성법, 옷이나 장식품이나 소리나 리듬이나 노래, 춤의 안무는 그 자체가 법전이고 성전이며 신화이고 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체에 법과 신화를 걸친 그들의 행동거지, 힘껏 내밟는 일보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심신에 새기게 한 규칙, , 문장을 소리 내고, 흔들고,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창의를 덧붙이는 것은 무엇일가요? 액세서리의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고, 리듬을 개량하고, 춤의 안무를 바꾸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로 하면, 바로 읽고, 고쳐 일고, 쓰고, 고쳐 쓰는, ‘문학행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 - 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p223. 또 한 가지. 르장드르가 들고 있는 예입니다. 전전까지 - 유대인 게토에서 이루어졌던 의례가 있었습니다. 즉 아이들을 모아 눈가리개를 하고 토라, 즉 유대교의 율법 문장에 꿀을 발라놓고 핥게 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문서에 꿀을 바르고 핥는다고 문서의 내용을 알 턱이 없잖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상당히 소견이 좁은 사람이 됩니다.....이게 효과가 없느냐 하면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당연히 효과가 있지요. 효과가 있을 게 뻔합니다. 왜냐하면 먹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르장드르에게는 이 모든 것이 텍스트인 것입니다. 시도 노래도 춤도 악기도 리듬도 꿀맛도. 또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인사라든가 행동거지라든가 표정이라든가. 이런 것이 모두 을 의미하고, ‘을 읽는 것이며, 고쳐 읽는 것이며, 고쳐 쓰는 것이며, 쓰는 것일 수 있습니다.

 

p224. 자신의 신체라는 종이에 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춤으로 써도 됩니다. 자신의 혀라는 종이에 신의 말이 스며든 꿀로 써도 됩니다. 무엇에 무엇을 썼다면 그것은 규칙일까요? 이것은 방대한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다시 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 무엇을 써도 그것은 문학인 것입니다.

 

p225. 텍스트는 문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문학은 종이에 쓴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블릴이 무함마드의 심장을 꺼내 씻어도 그것은 문학입니다. 우리의 텍스트는 넓습니다. 우리의 규칙은 넓습니다. 우리의 우리의 예술은 더욱 넓고 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법은 춤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33. 정보로서의 법’, ‘폭력’, ‘주권의 삼위일체를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인 것으로서 전 세계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한 편의야말로 세속화였던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는 비종교적인 것이고 근대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므로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하여 전 세계에 수출되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식민지화라는 폭력에 의해.

 

르장드르는 세속화를 유럽의 전략 병기’, ‘개종, 정복을 위한 병기라고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이탈했다, 우리 세계는 세속화되어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이 되었다. - 이런 사고는 타자들의 삶을 짓밟기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p236. 한 행을 쓸 때 자신은 그것을 정말 믿는 것일까요? 한 행을 지울 때 자신은 그것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다면 고쳐 쓸 수 없지만,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거기에 무한한 회색의 투쟁 공간이 출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최후에는 고독한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혁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공은 끝나지 않습니다. 정의상,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p238. , , 연극, 노래, 음악, 회화 등 예술의 놀랄 만한 힘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에서 회귀하여 우리를 강습합니다. 그 힘은 파시즘 또는 스탈린 주의라는 형태로 놀랄 만큼 무참한 죽음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p241. 이는 푸코가 자기 통치의 문제로 논한 것과 겹칩니다. 시장 안에서 우리는 매일 자신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을 위해, 효율을 위해, 그것도 하나의 인간을 훈련한다예술 =기예인 것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제조란 하나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거지, 우리의 언어, 우리의 예의범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훈련의 효과고, 그 잔혹한 훈련의 모든 것은 역시 예술에 속하는 뭔가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의해 안무되고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결정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p243. 대체로 예술이란 수태의 예술입니다. ‘잉태된 것concept’을 위한 기예입니다.

p246.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