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우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그로부터 70년 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다카기마사오를 쏘아 죽인다.
안중근은 영웅이 됐지만 김재규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김재규는 영웅인가? 역적인가?
김재규는 박정희를 왜 쏘았을까?
1979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7주년 기념행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다.
하루 전, 부산에선 학생들이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을 낭독했다.
“한민족 반만 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노동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 공포, 폭력으로 짓눌러왔음을 YH사건에서 본다. 타율과 굴종으로 노예의 길을 걸어 천추의 한을 맺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와 날조와 악의 표본에 의연히 투쟁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장도에 나설 것인가?”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를 벌이고 마산에서의 시위로 까지 번졌으니, 우리가 익히 들은 <부마사태>의 시작이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와 박정희에게 보고한다.
“각하, 제가 시위대 속에 직접 들어가서 시위대의 성분을 체크하고 왔습니다. 노동자도 있지만 사무직 종사자들도 있고 상인들도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시위대가 밀리면 시민들이 음식을 날라다주면서 격려하고, 쫓기면 숨겨줍니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한 몸입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4.19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그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안 그래?”
차지철이 박정희를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차지철의 말에 다카기 마사오는 심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강신옥 변호사였다. 강신옥 변호사를 대면한 김재규는 강신옥 변호사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5년 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강신옥은 변호를 맡았고 당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아무 죄 없는 젊은이들을 빨갱이로 뒤집어씌워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을 총동원해 조작한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만 하루가 안 된 20시간 만에, 즉 사형선고를 받은지 20시간 만에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등이 사형을 당했다. 명백한 사법살인이었다.
(이 군법회의의 판결을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전에 ‘법이 그랬으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은 1988년 3월, 14년 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박근혜는 이 판결은 인정하지 않고
1975년 판결이 옳다고 말한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세계 사법 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업적’을 쌓았다.
1.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천 6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 최대.
2.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 나간 전무후무한 재판.
(강신옥 변호사를 끌어낸 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 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세계 법학자들이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말했건만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자는 ‘법이 그랬으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가x를 확 찢어xxxxx 이 개 xx x!!!!)
“그때부터 제가 정말 유신체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품게 됐습니다.
그 민청학련 사건 이후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김재규의 저격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재규는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장이었으니까. 강신옥 변호사 역시 김재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이번이 네 번째 시도였다.
1974년 9월 14일 건설부장관 임명장을 받을 때
1975년 정월 27일 대통령 초도 순시 때.
1979년 4월, 궁정동 만찬 때.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거사를 실행한 것이다.
김재규는 차치하고 김재규의 부하였던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은 사형이란 판결에 억울하지 않았을까?
김재규를 원망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김재규에 대한 존경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박선호는 아내가 보낸 성경 속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구절을 되뇌이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박흥주는 살고자 했다면 살 수 있었을 테지만, 김재규를 배신하라는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딸들은 ‘아빠 냄새 난다고’ 아빠가 늦는 날이면 아빠 옷을 끌어안고 잘 만큼 아빠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 딸들을 두고 가야 했으니.....
박흥주는 사형 당일, 평소에 좋아하는 시편을 펼쳤다.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50장 15절>
박흥주는 사형직전 눈을 가리지 않았다. 12명의 헌병들이 사격자세를 취하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김재규는 다카기 마사오를 왜 쏘았는가.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만을 위한 독재정권에 불과했으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다.
한 가지는 정치적인 것이고 두 가지는 개인적인 것이다.
1. 부마사태.
분명 박정희는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하겠다고 말했다.
차지철은 백만 명, 이백만 명 죽여도 문제가 안 된다고,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다고 말했고,
박정희는 흐뭇해했다.
김재규가 보기에 이건 애들 허풍이 아니다. 그가 지켜본 바로 박정희는 충분히 학살을 실행할 만한 ‘도살자’였다. 차지철 역시.
만일 그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부산, 마산에선 광주보다 더한 살육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부산, 마산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밀어주고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
2. 여탐
박선호는 한 달에 적어도 열 번 이상 궁정동 모임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연예인 중에 궁정동 안가를 안 거쳐 간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예인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일반인들도 눈에 띄는 대로 끌고 와 강간했다.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기관이 동네 양아치마냥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와 두목한테 상납한 것이다. 박선호는 후에 채홍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고 말했다. 선비 타입인 김재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3. 박근혜와 박지만
박정희 아들인 박지만은 육사 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박지만의 행실에 대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박근혜가 명예총장, 최태민이 총재에 있는 구국여성봉사단을 조사해 박정희에게 보고를 올렸다. 최태민은 사이비 이단 교주로서 1974년부터 ‘태자마마’를 자칭하던 사기꾼이다. 최태민은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정보부가 이런 것 까지 간섭하냐며 불쾌해 했다고 한다.
강직한 김재규의 입장에선 박정희 자식들의 부정부패를 눈뜨고 봐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 그렇지만 생각을 막을 순 없다.
만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국민들이 나서서 민주주의를 회복했을까?
나는 김재규가 거사를 하는 바람에 신군부가 집권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생각했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요.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몰라요. 광주항쟁이나 4.19때보다 더한 희생이 따랐겠지. 전두환의 신군부는 어떤 식으로든 정권을 탈취하려고 덤볐을 테고, 12.12 사태 이후에 군인들은 물론이고 여당 정치들인, 기업인들이나 대학교수까지 전두환 밑에 줄 서기를 했어요. 역사가 왜곡된 것은 김재규 탓이 아니고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유신 세력들을 몰아내지 못한 정치인들과 국민들 탓이지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도 여전히 뻔뻔스럽게 살아있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보면 맞는 말인 듯싶다.
김재규와 부마사태 때 국밥집에서 만났던 사람은 노인이 되어 그의 무덤을 찾았다.
“저는 압니더. 얼라 씻겨주는 거 보고 알았심더. 그분은 나쁜 사람 아니라예. 죽기 전에 꼭 한 번 와봐야겠다 싶어서 벼르고 벼르다가 요번에 왔심더. 참말 가심이 아픕니더. 오죽했으면 대통령을 직일 맘을 먹었겠십니거? 김 장군이 그카지 않았시믄 광주 사람덜 대신 우리 부산 사람덜이 다쳤을지도 모르지예.”
김재규의 고향은 경상도 구미다.
그의 추모비를 세운 건 경상도 사람들이 아니라 광주 전남지역의 재야인사 모임인 송죽회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적어도 경상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들을 총칼로 학살 했었을 살인마들에게 투표하는 대신, 김재규의 무덤 앞에 국화 한송이라도 바쳐야 하는 거 아닌가?
김재규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를 쏜 것일까?
김재규를 믿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누가 박정희를 쏘았나? 자네가 쏘았나? 아니면 자네가? 아니면 내가 쏘았나? 아니야. 김재규가 쏘았네. 그는 박정희를 쏘면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쏜 거야. 그가 박정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고 잡혀가서 지금 감옥에 있네. 실제로 자네들이나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행할 용기가 있었을까? 그건 목숨을 건 싸움이야. 그가 박정희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의 죽음이후 35년이 지났건만 민주주의는 멀고 신자유주의는 가깝다.
그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나 유신세력은 귀신이 되어, 괴물이 되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非理法權天
비리법권천,
이치에 어긋난 것은 이치를 이기지 못하고
이치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권세는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