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0. 최승자는 예의 <내 무덤 푸르고><자본족>에서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고 벌써 예언했다.

 

p192. 김정환은 마지막 시집의 뒤표지에 추천의 말으 쓰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기어코 울음이 터지긴 전에, 승자야, 승자야, ‘오늘도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한 권 빌리는 것은 얼마든지 좋겠으나 행여 꿈에 꿈에 떠날 일이 있더란다 갓신 고쳐 매고 떠날 일이 있더란다그딴 얘긴 다시 말고, ‘그리하여 오늘 오늘 오늘 내가 주고그딴 생각 정말 말고 들어다오, ‘하룻밤 검은 밤’, ‘죽지 말라고’, ‘누가 자꾸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를. 그 목소리가 바로 더 미친 바깥 시인들 목소리고 네 목소리 다 승자야, 네 이름이 승자 아니더냐.”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기억의 집>, 기억하는가, 최승자

 

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박우물, 정화진

 

토막난 길들을 이으며 강은

탐욕스레 삶의 안팎으로 흘러간다

때로 사람들이 정처없이 발을 빠뜨리고 마는

저 강의 하구에

물컹거리는 무덤들의 바다가 있다

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펄럭이며

고요한 바다가

동백을 품은 채 누워 있다

낡은 옷의 사람들이 절름거리며

그들 몫의 생애를 건너가고 있을 때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정화진

 

p203. 이제 작가가 되려고 제 펜의 날을 가는 사람도 제 욕망과 세상의 욕망이 출렁이는 강을 건너가려고 특별한 다짐을 할 것이다. 그의 탐색이 어디에 이를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스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벌개늪역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쇠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아서 부증이 나서 찰거머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저린 팔다리에 거머리를 붙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까리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멀아마 무서운 말인가

 

- <정본 백석시집>, 오금덩어리라는 곳, 백석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햐안

할미귀신의 눈귓신도 냅일 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애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 <사슴>, 고야, 백석

 

산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 <사슴>, 노루, 백석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반달>, 윤극영

 

엄마 하고 불렀더니

아빠 얼굴 떠오르고

아빠 하고 불렀더니

엄마가 웃으며 달려 오신다

 

왜 안 그래

산이 산이 높아도 물 속에 깃들고

물이 물이 깊어도 그 소리 산을 넘는데

바람은 울긋불긋 무지개 다리

 

옥이야 철이야 모두 오너라

줄 대어 그 위에서 발을 구르면

무겁다곤 안 할거야 떠받쳐 줄거야

좋아라 가락 높여 삼천리 꽃길을 가자

 

<꽃길>, 윤극영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벗이 갔단다

도래샘도 띶십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 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케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오랑캐 꽃>, 이용악

 

아들이 나오는 올겨울엔 걸어서라두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이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

 

<강가>, 이용악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이 깨어

그리운 곳 참아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리움>, 이용악

 

p241 그러나 그(김춘수)가 정작 목표로 삼았던 것은 비유적 이미지도 서술적 이미지도 아닌 , 염불을 외우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부터 해방된 탈이미지이자 초이미지인 무의미의 시다. 이 이미지 넘어서기 속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자면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 시론에서 이렇게 썼다.

이미지를 지워버릴 것, 이미지의 소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버리는 일. 그러니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해 가게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그것에 의하여 꺼져가야 한다. 그것의 되풀이는 리듬을 낳는다.”

 

남자의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눈물>, 김춘수

 

한밤에 깨어보니

일만 개의 영산홍이 깨어 있다.

그들 중

일만 개는 피 흘리며

한 밤에 떠 있다.

밤은 갈라지고 혹은 찢어지고

또 다른 일만 개의 영산홍 위에 쓰러진다.

밤은 부러지고 탈장하고

별들은 죽어 있다.

별들은 무덤이지만

영산홍은 일만 개의 밤이다.

깨어 있는 것은 쓰러지고

피 흘리고

한밤에 떠 있다.

 

 

p249.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허균의 <성소부부고>가 모두 황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은 작게 여길 일이 아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견우를 떠나보낸 뒤에

시름하며 푸른 허공에 던져두었네

 

영반월, 황진이

 

공주님 한창 당년 젊었을 때는

객기로 청혼이사 나도 했네만,

너무나 청빈한 선비였던 건

그적에나 이적에나 잘 아시면서

어쩌자고 가을되어 문을 삐걱 여시나?

수두룩한 자네 딸, 잘 여문 딸

상객이나 두루 한 번 가 보라시나?

건넛말 징검다리 밖에 없는 나더러

무얼 타고 신행길을 따라 가라나?

 

<석류개문>, 서정주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행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 유치환

 

p271.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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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같은오늘 2016-03-23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이었던가요,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황현산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도 한 편, 한 편 아껴읽고 있는 중이에요. 이런 글을 써주시는 어른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시는 북플 친구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시이소오 2016-03-23 10:59   좋아요 1 | URL
농담같은 오늘님 저도 반가워요^^ <밤이 선생이다>도 좋았죠? 황현산 쌤님이 우체국을 휙 뛰어넘을 때, 어찌나 신나던지요 ㅋ

농담같은오늘 2016-03-23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사회를 보는 눈과 시대에 대한 감각, 젊은 사람들과의 소통에도 전혀 거리감이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드시는 어른이셨어요. 책 읽으며 웃었다 울었다 했던 기억이 있네요. 우리 사회엔 이런 어른들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 서로 배우고 이끌어주고..참 좋은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3-23 12:02   좋아요 1 | URL
신영복 선생님도 영면하셨지만 훌륭한 어르신분들이 많으니 기운을 내야겠어요. ^^

[그장소] 2016-03-2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이 선생이다 ㅡ는 제목만 아직도 음미중인 ㅡ책 ㅡ아직 더 여물자 ㅡ하면서...밤이 왜 선생인가 ㅡ상상하는 즐거움을 조금더 누리고 파서..말예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들~!

시이소오 2016-03-23 12:03   좋아요 1 | URL
밤이 왜 선생인가? ㅋ 그장소님도 즐거운 하루 되소서

[그장소] 2016-03-23 12:14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 님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이 육사

 

 

p. 21.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낙관적 진보론의 신용이 떨어진 20세기의 초엽에도 열성적인 사회운동가들은 자신이 희구하는 미래의 모습을 이 책에서 발견하곤 했다. 콩도르세는 이 책(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도표 개요)에서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 정신에 내재된 힘으로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 정신에 악덕과 정염이 담겨 있어 그 활동이 자주 빗나가지만, 이성의 개발과 자유의 증가를 통해 끝내는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는 확신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 김종삼

 

p37. 한 인간이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소설가의 수만큼 많다. 멀리는 괴테도 있고, 가까이는 밀란 쿤데라나 이청준도 있다. 좋은 시민이 될 수 없어 시인이 되는 이야기인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이상한 사회인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가장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모욕 받는 자의 상상력이 곧 소설의 상상력임을 말하는 리처드 라이트의 <검둥이 소년>은 작가 성장의 서사와 저항의 서사를 겹쳐놓는다. 작가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를 말하면서 작가가 된다.

 

p39. 랭보는 열여섯 살이 되된 해에, 후세의 문학연구자들이 투시자의 편지라고 부르게 될 편지를 선배 시인 드므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은 투시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 김수영

 

p41. 이 삶을 불태워버리는 게 얼마나 싫은일이며,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지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미학적 재능은 그 일을 감행하는 재능이다. 다시 저 영화 <베티 블루>로 돌아가면, 주인공 조르그는 제 삶을 불태워 파괴하고, 다른 삶을 열망하던 제 애인마저 죽이고, 더 정확하게 말해 이 삶에서는 행복과 제 열망마저 죽이고, 한 인간의 삶에서 작가의 삶으로 건너갔다. 한 사람이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꾼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네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해 보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

 

-내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어요

-친구들은?

당신은 이 날까지도 나에게 그 의미조차 미지로 남아 있는 말을 쓰시는군요.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미인은?

그야 기꺼이 사랑하겠지요, 불멸의 여신이라면.

황금은?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별란 이방인아?

구름을 사랑하지요....흘러가는 구름.....저기.........신기한 구름을!

 

<이방인>, 보들레르

 

p58. 단장하던 채경이 깨져 보이고, 창 앞의 앵두꽃이 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가 달려 보이고 태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 보이니

나 죽을 꿈 아니냐.

 

능히 열매가 열어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질 때 소리가 없을쏜가,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볼 것이고,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요,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라

 

춘향전


p59. 이 꿈의 해석은 어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읊는 정치시(금잔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그릇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피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이 또한 높구나) 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p65. 술병을 보내고 얼마 후 장만옥은 서독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죽는다. 두 해나 지나서 도착한 이 편지에서 장만옥은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쓰고 있었다. 이 말은 거의 영화 전체의 주제가 된다.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라는 말이 랭보의 진정한 삶은 여기 없다는 말에 대한 번안이라면, 장만옥의 이 말은 쿤데라의 그것을 동양식으로 탁월하게 다시 번안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여기 없는 것이며, 잊지 않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일 테니까.

 

p66. 그는 끝내 마적의 칼에 맞아 죽는다. “칼이 빠르면 피 솟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는 자기 피가 그렇게 아름답게 솟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과 삶을 맞바꿀 때만 삶은 진정한 것이 된다고 안타까운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또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 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의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하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고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랑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유고시인 진이정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희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울릉도>, 유치환

 

p85. 한국의 대표적인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19815월에 탄생했을 때도 그 첫 악보에 달린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한 대목을 다듬어 가사를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마지막 날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된 윤상원과 들불 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겨울에 숨진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극 <넋풀이>를 통해 처음 발표되었다.

 

p90. 2002년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의 일부가 개표에 부정이 있다며 시위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이 종주먹을 들이대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그들은 이 노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민간인>, 김종삼

 

어린이놀이터에, 자은 요람 하나 비어 있다.

루나 파크에, 목마 하나 기수 없이 서 있다.

나무 아래, 꿈에 잠겨, 그림자 하나 앉아 있다.

빛 속에, 실현되지 않는, 먼 침묵 하나.

그리고 언제나, 목소리들 웃음소리들 한가운데, 간격 하나.

 

연못 위에서, 오리들이 잠시 멈춘다.

아이들의 어깨 위를, 나무들 저 너머를 바라본다.

한 아이가 말없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슬픈 발자국소리만 들린다. 아이는 오지 않는다.

 

말 하나가 메리고라운드에서 달아나,

눈을 비비고 줄지어 선 나무들 뒤로 사라진다.

아마도 숨어 있는 소녀 곁에 동무하러 가는가,

고적한 저녁 어둠 속에, 달의 세 번째

네 거리에,

가로등도 꺼진 저 은빛 막다른 골목에

 

- <부재의 형태>, 야니스 리초스

 

98.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다 묻지 마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 주

내 친구가 찾아 와도 나 죽었다 말하지 마

 

작가 불명.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사람이여

날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셔요.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셔요.

내 위에 프른 잔디를 퍼지게 하여

비와 이슬에 젖게 해 주세요.

그리고 마음이 내키시면 기억해 주세요.

 

나는 사물의 그늘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거에요.

슬픔에 잠긴 양 계속해서 울고 있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겠지요.

뜨지도 지지도 않는

어스름 빛 너머로 꿈꾸며

아마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니, 잊을지도 몰라요.

 

<고블린 마켓>, 노래, 크리스티나 로세티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 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나

눈 내리면 언 땅에나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로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참된 시작>, 그대 나 죽거든 첫 연 , 박노해

 

님은 그 물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건너시었네

물에 빠져 시어지시니

님을 장차 어이하올꼬

 

<공무도하가>, 김 인환 역

 

p125. 모파상은 자기 스승 플로베르의 말을 빌려 어떤 사물이건 그 사물에 맞는 단 하나의 표현이 있다고 했다. 유명한 일물일어설이 그것이다.

 

당신이 가실 때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스도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가을바람이 처음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습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토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 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 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붓대를 잡고 남의 불행한 일만을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신의 가진 때는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님의 침묵>, 당신이 가신 때, 만해 한용운

 

p130. 예술의 희생보다 세상의 희생이 먼저 있다. 예술이 세상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있다.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믿음과 사람이 그렇게 어렵고, 믿음과 사랑이 그렇게 절박하다.

 

놈은 녀석을 낚아울러대 땅바닥에 등짝빡치고,

놈은 녀석을 쭈물떡하고 꼬르락까지 개상직이고,

놈은 녀석을 쪽팍뭉게고 아갈치고 녀석의 귓쌈 으르때리고

놈은 녀석을 쌔리박고쳐 폭시가마솥하고,

하는 일마다 찍에다 갈아대고 갈에다 찍어댄다.

마침내 놈은 녀석을 껍질창시뺀다.

상대 녀석은 우면좌면, 뽀사지고, 흩어지고, 비틀꼬지고, 스러진다.

이러다 녀석은 끝장 보겠다.

녀석은 저를 추스르고 쪼갈맞추고.....그러나 헛일이다.

그리도 내내 굴러가던 굴렁쇠가 넘어진다.

아브라! 아브라! 아브라!

발이 무너졌다!

팔이 부러졌다!

피가 흘렀다!

뒤져보고, 뒤져보고, 뒤져보라

녀석의 배 그 냄비에 거대 비밀이 하나 있단다

손수건에 파묻혀 울고 있는 주변의 할망구들아.

질겁하고, 질겁하고, 질겁해서

그대들을 바라본다

또한 찾기도 한다, 우리들은, 거대 비밀

 

<거대 전투>, 앙리 미쇼

 

p140. 그래서 나는 높고 낮은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묻고 말한다. 병사들을 관리하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생각하라. 낮에만 생각하지 말고 밤에도 생각하라. 생각하기 어려우면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라. 그렇게라도 하다보면 마침내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도 민주주의이고 해답도 민주주의다.

 

눈동자 이글거리는 점쟁이 피붙이가

어제 길을 떠났다, 등짝에 어린 것들

둘러업고, 또는 저 자랑스러운 배고픔에

는 마련된 보물, 늘어진 젖꼭지를 내맡기고

 

사내들은 번쩍이는 무기를 높이 들고,

제 식구들이 웅크린 마차를 따라 걸아가며,

있지도 않는 환영을 쫓는 서글픈 아쉬움에

무거워지는 눈으로 하늘을 더듬는다.

 

모래 굴방 구석에서는 귀뚜라미가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 두 배로 노래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키벨레는 이 길손들 앞길에,

녹음을 북돋아, 바위에서 샘물 솟고

사막에 꽃피게 하니, 그들에게 열린 것은

컴컴한 미래의 허물없는 왕국.

 

<길 떠나는 집시>, 보들레르.

 

p155. 이성복 시인이 20131<래여여반다라>라는 이상한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다.......2006년 여름, 진흙으로 빚은 신라시대 불상들이 경주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전시회의 표제가 래여애반다라였다. 신라 향가인 풍요의 한 구절로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의 이두문자. 시인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말을 앞세우면서도, 이 이두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의역하여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불어오게 두어라

이 바람도

이 바람의 바람기도

 

지금 네 입술에

내 입술이 닿으면

옥잠화 꽃을 꺼낼까

 

하지만 우리

이렇게만 가자.

잡은 손에서 송사리 떼가 잠들 때까지

 

보아라,

우리 손이 저녁을 건너간다

발 헛디딘 노을이 비명을 질러도

 

보아라,

네 손이 내 손을 업고 간다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집 찾아간다

 

오늘이 어제라도 좋은 날,

걸으며 꾸는 꿈은

수의처럼 찢어진다

 

<래여애반다라>, 이성복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님의 침묵>, 사랑의 측량, 만해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없음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 만해 한용운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처음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한 덩이의 숯과 소금이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불의 장미는 미인의 꿈속으로 파고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한 그릇의 장국 속에서도 그의 견해를 올바르게 피력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끝에는 으레 공작의 꼬리 같은 무지개가 피었으며 그 혈통을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주장했다. 난만하게 퍼지는 것은 빛깔이 아니라 공기 중의 풀잎의 순도 때문이다. 미인은 한 가닥의 순은처럼 꼭 그러한 길에만 나타난다. 청명 때였다. 먼 산이 갑자기 내 이마에 와 멎고, 홀연히 어디선가 청아한 꾀꼬리 울음소리가 한마장의 거리를 달려와 내 귀에 멈추었다. 아무래도 시국이 심상치 않았다.

 

- <우리들의 평화주의 5>, 박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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