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 사회학 자체가 자신이 탐색하는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야 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한 결과, 사회학은 자성 능력을 잃어버린다. 사회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사소해지고, 전문용어 속으로 이데올로기가 몰래 스며들어 결국은 권력자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사회학이 초래한 이 결과는 헛발질 irrelevance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도 지속되고 사회학도 지속되지만,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p16. 사회학에 의한 사회학의 구원은 1950년 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구별하면서, 이 둘이 반드시 연결돼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었다.
p17.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의 삶과 각자의 일대기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펼쳐지는 동시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책무인 것이다. 또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포부를 품고 있다.
p19. 당신을 생각으로 이끌거나 혹은 자극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어떤 것과 마주쳤다면, 그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 계속 실패하다가도 돌연 인식의 도약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를 경험한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나 혹은 우리에 과한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되어 있는 무엇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한 사회학은 쓸모가 있다.
p20. 반면 정보만을 제공하는 사회학은 쓸모없으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연결하고, 자신의 시대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채택될 경우 성공적이다.
P25. Q: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늘 정의해오셨습니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먼저, 여기서 ‘인간 경험’이란 당신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경험과 체험이라는 개념을 다소 단순화하면,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체험은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겁니다.
p29. 라 보에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런 태도를 ‘자발적 복종’이라 불렀지요. 하지만 존 쿳시의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의 등장인물인 C는 라 보에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발적 복종과 이 복종에 대한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제 3의 길도 있다. 그것은 무저항, 일부러 세상과 멀어지기, 내면으로의 이민이라는 길이다.”
P30 사회학적대화는 ‘무저항’을 지지하는 이러한 세계관을 문제 삼습니다.
P34. 사회학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것처럼, 사회학은 또한 윤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윤리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윤리란 곧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윤리성은 타자를 향한 책임성에 관한 문제이지요.
P35. 책임이란, 회피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떠맡는 것임을 확실하게 합시다..사회학자는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윤리 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고요. 그래야만 윤리적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또한 타자를 책임질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우리는 가능한 범위까지 이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사회학자는 이 길을 탐색하고, 지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사회학자의 임무는 그것입니다.
P3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쿳시의 또 다른 성찰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싸우는 쌍둥이’에 관한 우화에서 영감을 받은 쿳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두 집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적을수록, 그들은 더욱 심하게 서로를 증오한다.”
P39. <커튼>이라는 책에서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전설로 짜인 한 마법의 커튼이 세계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게 하여 그 커튼을 찢도록 하였다.” 쿤데라는 ‘예단Pre- judgement’이라는 커튼을 찢는 행위가 현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파괴적 제스처를 끝없이 반복해왔지요. 이 반복을 힘들다 하더라도 무한히 행해져야 하는데, 마법의 커튼은 찢기는 즉시 뒷면에 조각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p40. 그는 사전해석preinterpretation의 커튼에 덧대어져 있는 진리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예단의 커튼’에 구멍 내기는 끝없는 재해석이라는 노고를 요구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면밀히 조사하여 ‘있는 그대로의 희극적 산문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둠으로부터 퍼 올리는 것, 그리하여 사실상 인간의 자유 영역을 확장하고 이 모든 노력을 자유로운 인간성을 구성하는 행위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끝없는 노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해냈느냐 혹은 실패했느냐에 따라 사회학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42. 당신은 특히 오노레 드 발자크, 에밀 졸라, 막스 프리쉬, 사뮈엘 베케트 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은, 만약 사막의 섬에 고립되게 된다면 소설책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로베르트 무질, 조르주 페렉,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회학자가 되는 동안 이 작가들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요? 또한 그들은 당신의 사유 방식과 사회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실제의 세상살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미셀 우엘벡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 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겁니다.
p45. 어떤 명칭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험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임을 상기해보십시오...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경험(‘나에게 일어난 일’, 즉 사건의 ‘객관화될 수 있는 측면’과 체험(사건이나 상태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향이자 ‘주관적’측면)같은 독일어 개념들 말입니다. 사회학담론에서 흔히 경험과 체험의 구별 부재는 인간 리얼리티에서 생긴 일, 즉 ‘체험된’ 리얼리티를 단순 경험의 조사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저하되고,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제시도 일그러집니다.
p46.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픽션 속의 다양한 ‘리얼리티의 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진리’의 다른 의미나 리얼리티와의 조우를 픽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정말 픽션에도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유일신교와 다신교, 혹은 하나의 진리와 복수의 진리라는 의미론적 영역이 보다 적절하고 적합해 보입니다. 아니면 고정되어 있는 진리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진리의 문제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꽉 끼는 보호장비와 느슨한 보호장비, 하지만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인 보호 장비의 대조는 어떤가요? 쿤데라의 설명을 빌려온다면, 커튼을 짜서 리얼리티 앞에 드리우는 것과 커튼을 찢고 통과하는 것과의 차이도 괜찮겠습니다.
p50.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흔히 ‘데카르트의 오류’라고 알려진 부수효과입니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연구자는 주체의 위치를, 연구 대상은 객체의 위치를 지닌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와 메이오의 실험에서 ‘연구 대상’들이 실험적인 게임의 공동 참여자임을 알아채는 순간, 그 전제의 가면은 벗겨지고 일축됩니다. 그들은 게임에 매우 중요한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되어 있다는 암시에 부합하기 위해, 돌연 자신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책임감 있게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들에게 어떤 역할이 부여되어 있든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p53. 사회학은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을 자크 데리다 식으로 지속적으로 해체하는 일을 수행하는 한 비판적 활동입니다. 혹은 리처드 로티가 정의했듯이 지속적인 ‘캠페인의 정치’를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p54. 사회학은 사회의 현재 모습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개선을 동경하게 됩니다.
유동적인 현재적 삶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은 끊임없이 해석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판사회이론일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이란 현존하는 리얼리티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에 대량으로 잉태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비판 없이는 삶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시작될 수 없겠지요.
p56. 왜 변신론이죠? 왜 라이프니츠의 방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건가요? ..변신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바로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 중에서는 그나마 최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몰이해 때문에 창궐하는 악과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명백히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능하고 박애적인 신이 통치한다고 인정된 세계에서도 악의 존재는 세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변신론입니다.
팡글로스는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의 선구자이자 창시자이며 또한 그 이상의 영감을 준 인물이지요.
“범사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지라,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코가 안경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에겐 안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 다리는 분명 바지를 입도록 고안되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지가 있습니다. 돌은 큰 조각으로 잘려 성들을 짓는 데 사용되기 위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각하께서는 아름다운 성 하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위대하신 남작께서는 가장 훌륭한 거처에 사셔야 합니다. ”
사회학은 변신론에게 농담과 재담만을 던질 뿐 그것과 단호하게 대립합니다.
P58. 사회학은 좋든 싫든, 대중이 ‘필연성’이나 ‘자연적 질서’라고 믿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중적 신념이 구성되고 지속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비합리성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사회학은 규칙과 규범의 뒤에 숨어 있는 돌발 사태와 단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선택된 한 가지 가능성만 있다는 주장 주변에 넘쳐나는 다른 대안들을 들춰내야 합니다. 쿤데라의 알레고리를 빌려온다면, 사회학의 소명은, 재현으로 위장하고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찢는 것’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사회학이 ‘간결하고 정밀한 설명’을 추구할 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P61. 사회학을 수립한 ‘창립자’ 세 명은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에 대해 서로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자가 탐구하는 리얼리티도 ‘기성’ 아카데미의 분과학문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반면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특수성을 인정했습니다.
게오르그 짐멜은 두르켐과 베버의 입장에 대한 모호한 지지를 피하려 했습니다. 짐멜은 이른바 ‘2차 해석학’이나 ‘2단계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상식’과의 대화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석되어왔던 것을 재해석하고 인간의 생활세계Lebenswelt, 즉 체험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보편적이고 유일한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1차 해석과 2차 해석은 끊임없는 탄생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해석의 결과는 일시적인 안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영속적인 위기상태’야말로 사회학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서식 환경입니다.
p67. 저는 밀즈가 구체화했던 ‘개인의 일대기’와 ‘역사’를 함께 엮으려는 사회학자의 임무를, ‘사회학적 해석학’을 수행하면서 완수하려 노력합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행동을 상황 속에서의 도전(객관적 요소)과 삶의 전략(주관적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자 상호교환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적지 않은 사회학자들이, 마법사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처럼 열정적으로 알고리즘을 찾다가 결국 허무에 빠졌어요. 저는 그보다는 발견적 충고, 권유나 가이드라인이 지닌 본래적 특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p73.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왜 사회학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를 확실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만약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산다면 호기심을 상실하게 될 것 같습니다.
p76.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과학은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창조적인 작업에 합류하도록 허락하는 신기한 장치입니다.
p78. 우리 세대는 ‘역사의 대리인 historical agent’이 천천히, 그렇지만 무자비하게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행위의 규칙에 따르면, ’역사의 대리인‘은 ’유기적인‘ 표준 집단을 꿈꿔온 지식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땅을 향한 길고 긴 행진 끝에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목표에까지 도달하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p82. 베른슈타인은 화해를 지향하는 ‘개량주의’의 창시자로서, 페이비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도를 자본주의 사회 내의 정치, 경제적 틀 속에서 추구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단 한 번에 바꾸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한 것이죠. 레닌의 낙담과 베른슈타인의 낙관적 기대 모두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지속되면서, 죄르지 루차키는 역사의 이와 같은 분명한 저항(마르크스의 애초 예언을 따르지 않는)을 ‘허위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하지만 결국 동굴 벽에 드리운 플라톤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으로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기만적인 ‘총체성’이 그러한 허위의식을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무시킨다는 것입니다.
p
85. 톰슨은 현실의 실천과 결합되지 못한 이론적 실천을,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처녀수태(단성생식)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p88. 저는 이 질문과 직면했던 길고도 철저한 시도로서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대리인’에 대한 영국 지식인들의 열정이 무미건조해지기 훨씬 이전에, 아도르노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발터 베냐민에게서 그가 ’브레히트적 모티프‘라고 이름 붙인 경향을 발견하고는 이를 비판했습니다.
브레히트적 모티프란 노동자들이 아우라 상실 위기에 처한 예술을 구원하리라는, 또는 혁명 예술과 결합한 ’직접적인 미적 효과‘가 노동자들을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일컫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지막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덕목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도르노는 오히려 반대의 사례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적 악이 유해하게 지속되고 있음은 우리가 더욱 열심히 시도해야 할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근거가 된다고요.
아도르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학대적인 격리는 배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포기했다는 신호도 아니며 겸손의 제스처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의사소통을 멈추겠다는 의도도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전망에 대한 ‘진실’을 훼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결의일 뿐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설적으로 앙가주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p93.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의사소통 전략을 제안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는 두 가지 전제를 함축하는 은유입니다. 첫 번째로 이 은유는, 기록될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있고 병에 담아 멀리 보낼 가치가 있는 고민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두 번째로는 언젠가 ‘병 속에 든 메시지’가 발견되었을 때, 그때에도 그 메시지가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위탁하는 이 같은 전략은, 동시대인들이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설사 메시지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간직하거나 유지하려 하지 않기에 선택된 것입니다. 이렇듯 메시지를 어딘지 모르는 장소와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그 메시지가 현재의 무시를 견디고 살아남아 메시지의 잠재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희망에 의존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는,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라는 증명입니다. 또한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으며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역경은 단단하지 않다는 증명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 속에서 비판이론은 바로 이에 대한 증명이며,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은유를 정당화해줍니다.
p95. 부르디외는 마지막 저작인 <세계의 비참>의 후기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정치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아주 빠르게 파악하고 구체화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영역은 비밀스럽게만 보이고 폐쇄적이 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정치 영역은 다시 개방되어야 합니다.
p96.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심지어 살기 힘들도록 만드는 매커니즘’을 인식한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해서 모순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과 문제를 박멸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길고 복잡한 길이 뻗어 있습니다.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궤도 수정으로 가는 길을 알아내고 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실로 부르디외의 명령을 기억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회세계의 연구에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사람은 그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p98. 저는 제가 수행하는 종류의 사회학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 부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상황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삶의 전략을 구성하는 인간의 선택을 해석합니다.
p99. 사회학적 해석학은 사회학적 수단으로 인간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p100. 사회학적 해석학은 통계적 코드화에 집요하게 저항해가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저장하기 좋도록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환원은 통상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곤 하지요. 책임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까요.
P104. 사회학의 소명은 명백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방향 설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은 이러한 소명을, 변화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꼼꼼히 분석할 때 완수할 수 있습니다.
P107. 이에 대해 시배스천 폭스는 <폭스가 픽션에 대해 말하다>에서, 이를테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는 논평이 금지되기는커녕 토론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분수령과도 같은 변화가 “추측과 가십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작가의 개인적인 성격을 표현한다는 가정에 따라, 전기적 비평은 창작의 행위를 쇼로 환원”시켜 놓았다는 거죠. 저커버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P111. 유명인이 되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명인들이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유명인에 대한 대니얼 부어스틴의 정의를 따르고 싶은데요. 그는 유명인이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라 정의했죠. 유명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0~30여 년 전에 저는 사회학적 전문용어의 사용을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사회학으로의 진입을 가능한 한 폐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회학적 전문용어는 의사소통을 붕괴시키고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 중요한 것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P113. 유명인처럼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귀 담아 듣는 유명인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은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레지스 드브레의 미디어크라시라는 개념은 유명인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는 감추고 오직 전자만을 장려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