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 마음을 찾아서
글.사진 윤영관.이민우 / 동아시아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민 한 중년여성의 클로즈업 된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신현임(48세)이라는 여성.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달 동안 단기 출가를 체험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시간의 얼룩이 느껴지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았다. 나는 그의 수양이나 신심이 얼마나 깊고 심오한 것이든  인간사 모든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한  말간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뇌와 욕망이 노루 꼬리만큼은 남아 다소 복잡하고 아득한 눈빛을 가진 사람의 얼굴이 좋다. 그녀의 얼굴이 바로 그랬다.

이 책은 바로 그 프로, 오대산 월정사에서 연례행사로 이루어지는 일반인들의 단기출가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한 프로듀서와,  '묘명'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출가자들과 함께 한달 동안 행자 노릇을 하며  사진을 찍은 한 카피라이터의 담담한 기록이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방을 하나 얻어 한두달 간 틀어박혀 가지고 간 책이나 실컷 읽고, 잠이나 자고, 그것도 싫증나면 산보를 나서는 생활,  나는 아주 옛날부터 그런 생활을 꿈꾸었다. 어쩌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었던 인도나 네팔에 가지 못한 것보다 그런 생활을 해보지 못한 것이 내게는 더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나는 더이상 내 영혼의 암자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서재활동을 하느라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하루에도 몇 번씩 기어드는 이 방, 책으로 가득 쌓인 내 조그만 방이 나의 암자이고 베이스캠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내 절친한 여고 동창이 오래 전  마인드컨트롤을 배운다고 2박 3일인가  3박 4일 양산  모처에서 단기코스를 밟은 적이 있다. 그때 룸메이트로 배정받은 여성이 낯이 많이 익어  자세히 보니 시인 강은교였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눈빛이 아주 형형했지만 뼛속 깊이 외로워 보였다고 국문학도인 내 친구는 문학도답게 시인을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배우려고 한 것이었다니 너무너무 궁금해서 나도 어느 날 부산일보 강당에서 열린 마인드컨트롤 설명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강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마인드컨트롤은 별게 아니었다. '아아, 오늘 날씨가 춥고 비까지 내리니 감기에 걸리겠는걸?'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꼼짝없이 감기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따라 인생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마인드컨트롤을 모두 마스터했다 생각하고 유료 강습은 신청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는 모든 여행이 출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기웃거린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잠자리에 누워 낮에 만난 아버지와 딸(아버지가 딸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는 장면을 산보를 하던 두 행자가 보고  뜯어말렸다)을 떠올린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서로에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가장 훌륭한 선방과 가장 험악한 저잣거리가 겹친다. 한 스님이 강의 시간에 스님들이 쌀쌀맞아 보이도록 당당하고 꼿꼿한 이유는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고, 자신이 있을 곳이 어딘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받아들이고, 제 자리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극락이라 여기기 때문이라 했다. 또 다른 스님은 절에 오면 부처를 만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가는 것이라 한다.(119쪽, 묘명 행자의 기록)

열네 살 중학생 소년부터, 여대생,  장성한 두 딸을 둔 중년여성,  70세의 뚜르르한 기업의 부회장 등 그들이 이 바쁜 세상에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한 달 동안 깊은 산사에서 스님들과 똑같은 생활을 체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를 벗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아직 그런 소망은 아주 쬐끔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내가  어렵사리 구축한 이 조그만 방이 주는 쾌락과 가짜 평화에서 좀체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는데, 괜시리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피드림~ 2005-05-2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단기출가 프로그램 한번 경험해 보고 싶네요. 하지만 제가 가있는 동안 제 가족은 어쩌죠? 여하튼 아줌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해도 걸리는게 너무 많다니까요. ^^

클리오 2005-05-2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전, 송광사에서 일주일간 하는 산사체험을 신청한 적이 있었어요.. 7기까지인가, 여름 내내 진행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것이 전부 마감되어 저는 못갔다는 것이죠... ^^;; 마음의 평안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가봐요...

날개 2005-05-2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멀었나 봅니다. 이 안이한 생활에서 아직 벗어나고 싶지 않은걸 보면..^^;;

balmas 2005-05-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하셨어요.
암자 가셨으면, 한 달 넘게 로드무비님 서재가 터~엉 빌 것 아녜요?
말도 안돼!!

kleinsusun 2005-05-29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여름휴가에 7박 8일간의 명상수련에 들어갔었어요. 3일만에...뛰쳐나왔어요.
하루 종일 좌선을 하고 앉아 있는데 온갖 잡생각만이 드글드글...
그때 간절했던건 콜라와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ㅋㅋ
몸만 산사에 가있다고 달라지는게 없더라구요.
마음을 내리지 않는다면...

로드무비 2005-05-29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그 페이퍼(맞죠?) 정말 재미나게 읽었는데.
저라면 이틀을 못 넘겼을 것 같아요.
아무튼 어떤 간절한 염을 가지고 깊은 산속을 찾는 이들이
아름답고 애달프게 보여요.^^
발마스님, 달마스님과 좀 자주자주 모습 보여주세요.
두 분이 활약하지 않으시니 기운이 빠지네요.(바쁘세요?ㅎㅎ)
아유, 그나저나 발마스님 참 예쁘게도 댓글을 쓰셨네요.^^
날개님, 우리 함께 위로하며 그냥 이대로 살아요.^^
클리오님, 오, 님도 신청을 하셨었군요.
송광사도 참 좋을 것 같아요. 하긴 어딘들...^^;;
펑크님, 우리 주부의 역할이 막강하죠?
자신의 쓸모있음에 만족하며 당분간 이곳에서 버텨보자고요.^^

하루(春) 2005-05-2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프로그램 작년에 봤어요. 신현임씨도 기억나요. 얼굴까지.. 엠비씨에서 해줬을 때 꽤 인기 많았던 걸로... 나레이션이나 BGM 없이 그냥 그 오대산 월정사의 단기출가생들의 소리로만 채워졌던 그걸 기초로 쓴 책이군요.

비로그인 2005-05-2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때문에, 그 눔의 술 때문에 저두 쪼매 힘들 거 같긴 한데, 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그냥 책을 읽을 수 있다면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거 같아요. 전 갠적으로 눈 맑은 사람, 무서워해요. 제 안에 있는 열등의식, 그러니까 어떤 내보이기 싫은 조잡함을 꿰뚫어보는 듯해서요.

로드무비 2005-05-3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새벽 예불이나 108배등 장난이 아니던데요?
전 참선보다는 그냥 뒹굴뒹굴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호쾌한 복돌이님께 무신 조잡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요.^^
하루님, 전 중간부터 봐가지고요.
한 번 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월정사 너무 멋졌죠? 거기 참석한 사람들도...^^

플레져 2005-06-03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그 프로 봤어요. 한 사람이 부처가 되고 한 사람이 절을 할 때 그 중년의 여자분이 몹시 울었었지요. 이 책 사야겠어요. 살 때 땡스투 누를게요 ^^
참, 스님의 그 자세가 그러한 연유로 꼿꼿하신거군요. 흠...

로드무비 2005-06-0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보다 그 프로그램을 한 번 더 보고싶군요.
중간부터 봤거든요.^^
 


홍상수 영화에 빠지지 않는 동창회 장면, 뭐 그 비슷한 인간이 모이는 자리가 나는 참 재밌다.  중병에 걸린 영화감독을 돕기 위해 모인 자리, 몇 년 전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 영실도 부탁을 받고 봉투를 들고 참석하는데......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되었으니 그도 어느새 10년차 중견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제목에 대해 코웃음을 치던 한 소설가가 생각난다. "상상력의 부재야, 상상력의 부재! 세상에 제목이 그게 뭐야?"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제목 따위 상관없다, 는 쿨한 영화감독 탄생인데요?" 

간암으로 오늘내일 하는 선배의 영화 회고전을 보러 간 동수(김상경), 극장 앞에서 조금 전 보고나온 영화 속의 여배우 영실(엄지원)을 만난다. 영화 속 19세 소년과 소녀는 몇 년 만에 우년히 만나 술을 마시고 여관에 가는데 느닷없이 죽어버리기로 결심한다. 

함께 죽기로 뜻을 모으고 편의점에 가서 유서를 쓸 공책을 사오는 영화 속의 소년. 그 사이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드라이하는 소녀. 

"이제 우리 약 먹을까?"

"응,  머리 좀 말리고!"(이 대목에서 나는 뒤집어졌다. 아무리 영화 속 장면이라지만 그녀의 쿨함이라니!)

 


수면제를 몽땅 털어먹고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람...깊은 잠에 빠진 남자친구를 그냥 두고 혼자 쓸쓸히 여관을 빠져나오는 극중의 영실.

그런데 동수는 여배우 영실에게 그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이상형이라고, 연락처 좀 가르쳐 달라고......지갑을 잃어버렸으니 돈을 좀 꿔달라 했다가 어떻게 어떻게 함께 술을 마시고 영화 속 소년과 소녀가 묵었던 그 여관 그 이부자리 위에서 동침하고......사랑한다고 말하고, 영실에게서 "아이구 참, 당신이 사랑하긴 뭘 사랑합니까?"하는 타박을 듣고......

김상경이란 배우의 느물느물한 매력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엄지원의 맹하고 쿨한 매력은 김상경을 능가한다.

 


자기 뒤를 하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지갑을 잃었으니 밥사달라,  술에 취해 동침하고 나서는 자기 옆에 계속 있어달라., 또 그뿐인가 이상형을 만났다며  계속 치근대는 동수에게 영실은 한마디한다.

"자긴 이제 재미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그리고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휑하니 가버리는 그녀.  이런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5-05-2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경 살을 좀 뺐군요. <생활의 발견>에서는 샤프한 이미지를 몽땅 버리고 살만 퉁퉁 찌웠더니만.
내일 봅니다. ^^

로드무비 2005-05-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살이 많이 빠졌더군요.
극중에서도 나와요.
동창들이 얼굴 깨끗해졌다고 하자,
"몸 생각해서 술을 좀 줄였다."
아마 이 영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거예요.^^

인터라겐 2005-05-2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것 같아요... 저두 일요일 조조로 봐야겠어요..이번주 말고 다음주쯤이요...

로드무비 2005-05-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는 여행 가신다고요?ㅎㅎ
재밌게 잘 놀고 오세요.
이 영화 꼭 보시고요.^^

nemuko 2005-05-2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어요.... 안그래도 조조영화 보셨다길래 무지 부러웠거든요. 홍상수에 김상경까지 종합선물인데... 과연 언제나 보게될까요... ㅠ.ㅜ

마냐 2005-05-2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난다, 갑자기 볼게 늘었네요. 전 광분한 옆지기 덕분에 스타워즈부터 보게 될거 같슴다.흐흐.

로드무비 2005-05-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영화 중 최고였습니다.
마냐님, 네무코님 꼭 보세요.^^

하루(春) 2005-05-2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좀 말리고 죽겠다고 하다가 결국 못 죽는 게 보통 아닌가요? 자꾸 빼먹은 일이 생각나서 나중엔 죽으려던 걸 까먹는... ㅎㅎ~

2005-05-27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생각하시는 것하곤.ㅎㅎ

하루(春) 2005-05-2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귀여워'라는 영화 좋다고 하셨잖아요.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 탔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빌려다 보려구요.

클리오 2005-05-2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평이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

2005-05-2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영화평은 아이고, 간단한 스케치라 할까.
막 개봉한 영화라 스포일러를 피하려니 쓰기가 조심스럽네요.^,.~;
하루님, '귀여워' 재밌게 봤어요.
님껜 어떨지...^^

비로그인 2005-05-29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스포일러 아니죠? 헤..잼나겠어요. 맞아요, 술잔이 오고가는 모임 건, 진짜 리얼하쟎아요. 그 리얼함 속에 숨은 일상의 소외가 제대루 느껴져서..그러니까 나는 너와 다르다, 라는 아는 척 하는 것들의 나약한 시건방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꼭 봐야지.

로드무비 2005-06-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아무튼지간에 보세요.
무지 웃겨요.
서울 뒷골목 허름한 풍경도 재밌고요.^^
 

얼마 전부터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을 기다려왔다. 어제는 아침부터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조조(10시 30분)로 영화를 보기 위해 뛰듯이 걷는데 문득 마이 도러에게 학교 마치고 미술 선생님 집에 바로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얼마 전 무슨 대회에  아이들 금연 포스터를 미술 선생님이 직접 갖다내어 장려상으로 뽑혔는데 시상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던 말도......그리고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먼저 남자친구(같은 선생님께  미술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 받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일보 몇 층(송현클럽이 아닐까, 짐작)에서 오후에 시상식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미술수업 대신 그 시상식에 참석해야 한다고......그러나, 어이하리!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개봉 첫날 조조로 이 영화를 보고 싶었고... 그래도 엄마라고 순간 잠시 갈등을 하긴 했다.

도시락을 싸간 날이라 점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딸아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미술선생님 댁에 가지 않고 집에 먼저 온다면 어떡할 것인가? 열리지 않는 문앞에서 엉엉 운다면?

나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면서도 마을버스에 올랐고 전철을 갈아타고 극장으로 갔다.(그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건 미안하지만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미안하지만 오늘 자기가 마이 도러 1일 엄마 해줘!"  뻔뻔스럽게도 내가 그녀에게 부탁한 건 달랑 그 한마디.

서울에 간 김에 영화를 보고 나서  시상식장으로 가면 좋겠지만 그 시간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리는 조카아이를 맞아야 했다. 그것도 미리 부탁하여 평소보다 한 시간 연장한 것.

그녀는 수업이 끝날  즈음 학교로 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이 도러의 손목을 나꿔채는 데 성공했다. 차를 끌고 학교 앞에서 남의 아이를 기다리는 수고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친구 엄마는 시상식이 끝난 후 선생님과 아이들과 인사동길까지 한 바퀴 돌고 뭘 좀 간단하게 먹고 저녁 일곱 시경에 돌아왔다. 마이 도러는 이런 일이 하도 다반사라 "엄마는 왜 시상식장에 안 왔어?" 하고 묻지도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미술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장려상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는데(그림을 잘 못 그리는 남자친구도 함께 뽑혔다고 해서 참석만 하면 상장 한 장씩 나눠주는 대회인 줄 알았다)  소년한국일보라는 신문의  수상자 명단에도 떠억하니 실리고 문화상품권도 부상으로 받아온 걸 보니 그것이 꽤나 뻑적지근한 전국적인 대회였다는 걸 뒤늦게 안 셈이다.

'주하야, 미안해!  어제는 엄마가 너의 시상식 말고 영화를 선택했구나!  앞으로도 그러려니 하고 잘해주길 바래!'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erky 2005-05-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참 장하네요. 축하드려요. 그리고, 로드무비님 때때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일 같아요. 너무 자책은 마세요~

chika 2005-05-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주하도 대단한 인재였군요!! (근데 이 페이퍼 읽으면서 내다 팔자, 라고 하는 주하의 강한 생활력을 이해했음이예요!!)
아~! 로드무비님, 마지막 줄요... 좀 고쳐주세요. 엄마가 너 말고..에서 '너'가 아니라 '시상식'이라고요. 설마 주하와 영화중에 영화를 택했겠어요? 주하의 시상식과 영화중에 영화를 택한거겠지요. ^^;;;;;;;;;

하루(春) 2005-05-2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주하가 정말 그림에 소질이 많군요.
그나저나 '극장전' 벌써 개봉했군요. 극장전... 최종제목으론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아무튼 기대돼요. 영화 어땠는지도 써주세요.

로드무비 2005-05-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시키시는 대로 고쳤습니다. 저 예쁘죠?ㅎㅎ
퍼키님, 아니 차우차우님. 이름 멋져요.
전 대부분의 시간이 자기만의 시간인 사람예요.ㅎㅎ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용기백배입니다.^^

비로그인 2005-05-2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 미술상 탔데요? 히야.. 짜슥..제 어린 시절이랑 통하는 구석이 있다니깐두루, 긁적적.. *^^* (아이고, 커서 나 같은 악당되면 안 되는데..) 그나저나 로드무비님, 괜챦아요! 정말 마음은 번잡하셨겠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좋은 일 아닙니까!

urblue 2005-05-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사시는 모습을 보면 <앙상블>이 생각난다니까요. 주하도 틀림없이 그 딸(이름이 생각 안 나는군요. -_-)처럼 예쁘고 똑똑하게 자랄거에요. ^^

로드무비 2005-05-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영화 너무 재밌었어요.
한 번 더 보러갈 생각이에요.^^
복돌이님, 어제는 자숙하는 의미로 서재활동도 안했습니다.
저 너무 훌륭하지 않습니까?^^
(복돌이님 그림 잘 그리시는 거 이미 알아봤네요, 뭐. 사진도 그렇고...)

로드무비 2005-05-2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주하는 앙상블 딸아이 해도 별로 안 어색한데
전 도무지 그림을 대입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주하가 엄마 의지 안하고 잘 커줬음 좋겠어요.

릴케 현상 2005-05-2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좋으시겠네요^^ 저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넘 부럽더라...

인터라겐 2005-05-2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는 생활력도 강하고..독립심도 강하고...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네요.. 엄마의 힘이 느껴집니다.. 어린이 대회는 상장만 주는줄 알았는데 상품권까지 주다니...

아 로드무비님..넘 멋지게 사시는것 아네요?

숨은아이 2005-05-2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그러려니 하고 잘해주길 바래... 크하하... 주하에게 축하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남자친구 어머니도 고맙구... 주하야, 강하게 자라야 해!!

세실 2005-05-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멋진 로드무비님...
전 당연히 시상식으로 달려갔을텐데.....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주하가 부럽습니다....

Phantomlady 2005-05-2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가 되고 싶다더니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군요.. 마지막 글이 히트였어요 ㅎㅎ
극장전 어떤가요? 저도 김상경 팬이라서 보러갈 건데.. ^^

로드무비 2005-05-2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 한번 더 보러 갈 거라니까요.
김상경 저도 좋아하는데 이번 영화에선 엄지원에게 더 꽂혔어요.^^
세실님, 제가 무지 게으른 사람이라 딸아이를 알뜰하게 못 챙겨줘요.
이런 페이퍼로 나중에 마이 도러에게 점수 좀 딸라고요.
점수가 될지 족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숨은아이님, 왠지 님도 엄마가 되면 제 타입일 거 같아요.
"주하야 강하게 자라야 해!"라니...
제가 님을 모독한 건가요?-.-;;
인터라겐님, 마이 도러가 생활력이 강해서 나중에 우리 부부 노후를 책임져 주기를
강력히 바라고 있답니다.
그리고 멋지긴요, 부끄럽죠.;;
산책님, 왠지 님 글씨를 보니 이쪽으로 님도 한가닥하시는 분 같은데요?^^

숨은아이 2005-05-2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독이라뇨. ^^ 전 아이 낳으면 아예 방치해버릴까 봐 겁나서 안 낳습니다. --;;

딸기엄마 2005-05-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에게 앞으로도 그러려니 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로드무비님의 말씀에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님이 부러워요~

조선인 2005-05-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께 몰표요. 캬햐햐햐

울보 2005-05-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대단하세요,,
전 용기가 없는거겠지요,
아직도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나를 찾는 아이때문에 ,,
다른 친구들은 어린이집 보내달라는데 엄마 안가면 자기도 안간다는 주의라서,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게 놀아주는데요,,그러네요,
차츰 나아지겠지요,,,
전 그래도 님의 그 결단력에 박수를 주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로드무비 2005-05-2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이렇게 정색을 하고 말씀하시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을 들였더니 아이가 좀 독립적이에요.
사실 전 교육 차원이라기보다 귀찮아서 그런 거거든요.;;
류도 조금만 더 크면 나아질 거에요. 아무 걱정 마세요.^^
조선인님, 숨은아이님이 뭐라 하셨길래?
아하, ㅋㅋㅋ
지우개님, 전 아이 알뜰하게 거두는 야물딱진 엄마들이 부러워요.
님도 얘기 좀 털어놓아보시죠?(주하랑 동갑인 따님 이야기...)
숨은아이님, 말씀만 그렇게 하시는 거 알아요.^^

클리오 2005-05-2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진짜 맘에 듭니다. 로드무비 님이나 주하나.... ^^

로드무비 2005-05-2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마음에 드셨다니 기쁩니다.^^

비로그인 2005-05-2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울 베이비가 드뎌 언론에 이름을 드러내었군요! 이거, 알라딘에 경사가 여그저그서 들려오던데, 이제 조금씩 알라딘 키드덜이 사회에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려. 꼭 제가 상 탄 것 마냥 기쁘고 좋네요. ㅎㅎ 축하해요, 베이비님!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오병욱 지음 / 뜨인돌 / 2005년 5월
장바구니담기


책 표지 사진을 찍어 올린다. 화가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이다.

-내가 아는 오병욱은 특별한 귀재이다. 그는 화가이기 전에 시인이고 철학자이며 사진가이고 음악가이자, 일찍부터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머무르면서 자연의 언어와 빛깔 그리고 자연의 냄새와 소리를 익힌 사람이다.(화가, 김병종)

(**클릭해서 큰 사진으로 보시면 좋아요.)

--양철지붕집이라 여름엔 덥다. 그래도 우리집에 다녀간 사람들은 여름이 제일 좋단다. 양철지붕 아래서 듣던 소나기 소리 때문일까?(17쪽)

화가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1990년 5월, 할머니 혼자 살고 계시던 경북 상주의 빨간양철지붕 집으로 기어들었다. 식솔을 이끌고......

우편함을 하나 대문간에 매달았더니 딱새가 알을 낳았다. 딱새 집이라 크게 써주고 그 옆에 새로 우편함을 하나 달았다.

--새끼가 날아오르기 좋도록 팔을 쭉 뻗고 가만히 손을 폈다. 손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는 순간에 약한 무게감과 가슬가슬한 발톱을 느낄 수 있었다. 좋겠다. 쟤네들은 하루만 연습해도 저 정돈데 우린 이게 뭔지 모르겠다.(29쪽)

사진은 양철지붕집의 어둑신한 방. 목침을 베고 늘어지게 한숨 자도 좋겠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봐도 좋겠다.

--상주 시내에 있는 커피가게 주인한테 삭발한 전시 포스터를 한 장 주었더니 다음날 바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았다. 재즈 뮤지션들 사진하고 잘 어울린단다.(34쪽)

'마음 한없이 고요하여라. 그 위에 향기로운 일감이 오다.'
이중섭이 원산 화실에 써 붙였다는 이 말은 빨간 양철지붕집 화가의 마음속 등불이 되었단다.

왼쪽이 암컷 '쏭(Song)'이고 오른쪽이 수컷 '칸(Khan)'이다. 여름엔 개들이 더울까봐 등나무 아래로 개집을 옮겨준다. 쏭이 낳은 강아지 네 마리 이름은 도,레,미,파. 짧고 간단하고 기분좋은 이름이다.

--우리는 시골생활의 이런저런 단점과 불편을 뜻밖에도 쉽게 받아들였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린 그저 '잠깐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살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건 웃으며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중요한 한 줄기만 확보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122쪽)


--모 국립대학엔 가서 부임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교수보다 백수가 좋다고 했다. 난 지금도 그림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 결벽 때문에 내 인생은 힘들어졌다.(124쪽)

한쪽 벽에 책이 가득 쌓여 있고 기타가 나뒹구는 화가의 널찍한 방. 방문 창호지 하나도 어쩜 저리 멋들어진지......

'나의 희망' . 1998년의 수해로 인근 폐교 화가의 작업실 그림들이 몽땅 떠내려가고 망가졌다. '나의 희망'이라는 제목 덕이었는지 단 한 점 멀쩡하게 보존된 그림.

"저......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요. 이번...... 그림이 떠내려가서......피해신고를 하라기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면사무소 직원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 거는 나중에 면사무소로 직접 나오세요. 그리고 집이나 논밭이나 축사 같은 부동산이 보상 대상이지, 그림이나 돼지 같은 '동산'은 보상 대상이 아닙니다."
그림이나 돼지? 차라리 잘 됐다. 일단 빨리 여기서 도망치자.(97쪽)

'내 마음의 바다.' (2004, 200호 캔버스 두 개의 그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 이 책 속의 화가를 만나면 좋으리라. 화가가 직접 찍은 그의 시골집 풍경과 이러저러한 사진들과 유려한 글이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낸 출판사와 아주 약간의 관계가 있지만 책이 너무 좋아 포토 리뷰로 당당하게 올립니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아이 2005-05-2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 두 마리 앉은 사진이 젤 좋아요. 시원하고 은밀해 보이는 나무그늘 아래 개집, 개집 앞에 우아하고 꼿꼿하게 앉은 두 마리 개... 근데 책을 누른 저 빨간 건 뭘까 하는 분위기 깨는 궁금증이... ^^

Phantomlady 2005-05-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표지의 담배 피는 대머리 아저씨가 화가예요? 스타일 멋지시네~~ 이런 멋진 분인 줄 알았으면 책을 살 껄 그랬나.. 저도 다음에 사기로 하고 서점에 서서 후다닥 책을 읽었는데 (..)(") '커피 가게 주인한테 삭발한 포스터' 어쩌구 하는 글과 함께 사진이 실려서 그 커피 가게 주인인가 했다는 ^^;

강남의 유명한 입시학원을 물려준다는 것도 사양했다니 그 예술적 결벽성이 대단할 따름입니다 예술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urblue 2005-05-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세상엔 재밌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인터라겐 2005-05-2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를 마다하는 사람이 진정 챔피언입니다... 뭔소리? 사람은 물욕에 약한데... 저도 저런 마음가짐을 배워야할터인데...

로드무비 2005-05-2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엊그제 노래방 가서 우리 남동생이랑 주하가 불렀는데...ㅎㅎ
책읽고 잠시잠깐 그런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블루님, 저 화가 너무 매력적이에요. 글도 얼마나 잘 쓰는지...^^
스노드롭님, 서점에 서서 도대체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왔능기요?
저도 저 포스터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 예술가, 그거 아무나 못하죠.^^;
숨은아이님, 새끼들 사진도 있는데 올릴까 하다가...
님 이 사진 이 책 좋아해 주실 줄 알았구먼요.^^
그리고 저 빨간 건 고래 모양이 뻥 뚫려 찍히는 뭣인데요.
이름이 기억 안 남.;;

chika 2005-05-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에도 책 주문하고 왔는데.. 정말 서재질이 늘어나면서 느는건 지름신의 강림...
ㅠ.ㅠ

로드무비 2005-05-2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아무리 책이 많이 쌓였더라도 이 책 꼭 사세요.ㅎㅎ
땡스투 누르시고요.^^

2005-05-23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5-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워요..빨간 양철지붕..근데 쥔장의 쌍라이트가 너무 눈부셔요! 게다 저렇게 책을 쌓아놓으면 낭중에 보고 싶은 책을 빼내려 할 때, 저거 다 무너지는데..

히피드림~ 2005-05-2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나 돼지"? 언제부터 그림과 돼지가 한 문장 안에서 서로 다정하게 동급이 됐죠? 화가자신도 면사무소에 찾아간 자신이 참 순진하게 여겨졌겠네요...

로드무비 2005-05-2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수해로 집을 잃은 촌로들 앞에서 화가는 자신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란 걸 부끄러워하더군요.
그 심정을 잘 알 것 같았습니다.
복돌이님, 늦게라도 엽서 내놓으세요.
ㅎㅎ 쓰고 싶으실 때...공선옥 씨 책 선물은 님께 아직 유효합니다.^^
속삭이신 님,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무지 신기하네요.^^

잉크냄새 2005-05-3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지붕위의 소나기 소리...찜통같은 오후, 그 말만으로도 시원해집니다.

로드무비 2005-05-3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좋아하실 줄 알았네요.ㅎㅎ
양철지붕 아래의 서정을 님말고 누가 또 그렇게 잘 알겠습니까요.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서 아부가 절로 나오네요.^^)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어제 낮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공선옥의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를 장바구니와 함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만삭일 때도 딱 맞았던 단벌 청바지 허리가 꽉 끼어 눈을 부릅뜨고 심호흡을 하고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잠갔다. 공선옥 작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럴 때 나는 사는 게 딱 거짓말 같다.


마을버스 속에서  장애가 있는 내 또래 여성에게 신호를 보내어 내 자리까지 오게 해서 자리를 양보했다. 그렇게까지 하기는 드문 일이다. 그건 순전히 내 손에 들려 있던 책 때문이었으니 공선옥의 책을 읽으며 노인이나 아이, 임산부, 장애가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자기 자리를 사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전철을 갈아타고 나는 두 건의 선행(?)을 더 했는데 여기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그녀가 울며 읽었다는 김성칠 선생의 <역사 앞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제 잘한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붓 끝에 올리지 말 일.


십몇 년 전 나도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밑줄을 쳤다. 그러니 어떻게 전철 안에서의 그 소소한 일을 선행이라고 차마 내 입으로 떠벌릴 수 있겠는가!


‘내 이웃의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밤이면 밤마다 휘황한 네온 십자가가 다 무엇이며 따뜻한 구들방에서의 선(禪)이 다 무엇이냐’(25쪽)고 작가는 묻는다.  또 서울 어느 대학 수학교수님이 정말 좋은 수학교수법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어릴 때부터 나처럼 수학 노이로제가 있는 듯한 그녀는 생각한다. ‘저렇게 좋은 것은 지금도 좋은 저 아이들한테보다 지금 나쁜, 지금 아주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들에게 먼저 가게 했으면.’ (29쪽)


소설이고 산문이고 간에 그녀의 글들을 읽으면 나는 너무 많이 가진 자이고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유한부인으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부자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가난뱅이였던 적도 없는 것 같다. 3만 원이 넘는 호머 심슨 라디오 같은 장난감도 사고, 갖고 싶은 만화 전집도 큰맘먹고 사는 걸 보면 돈 쓰는 데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대신 10년째 청바지 하나로 사계절을 버티며 돈 아까워서 ‘빠마’도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누리는 호사가 최소한의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강변하는데(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말이지) ‘내 배가 부르면 꼭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그녀 앞에서 나는 뭔지 좀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글 읽기를 중단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 좀 더 부지런해져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소식을 먼 풍문처럼 듣지 말고 작가처럼 장례식장에 직접  조문도 가고,  좀 더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뿐.(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오래 전 아현동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독서교실인가 창작교실인가에 등록해 두어 달 드나든 적이 있다. 창작을 직접 해보겠다는 생각에서는 결코 아니었고 직장인이랍시고 회사엔 다니지만 그때 당시 하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어딘가에 소속되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천승세, 김영현, 김남일 등 작가들의 리얼리즘 문학 강의는 무척 재밌었고 그 중 마음 맞는 사람끼리 ‘풀무’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꾸려 신촌의 주막을 전전하며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누었다. 주로 월북 작가들의 소설을 구해 읽었으며 그 무렵 자주 있었던 시위 현장에도 꽤 열심히 참가했다. 1년쯤 지났을까?  우리 다음 기로 본격적인 창작반이 구성되었다는데 아이를 등에 업은 아줌마가 아주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다 그녀는 공장 노동자라고 했다. 창작은 고사하고 독서는커녕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재미로 가끔 그곳을 드나들던 나는 내 또래의 그런 여인이 있다는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녀가 바로 소설가 공선옥이다.


이 땅에 어느 정도 가진 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우고 누릴 만큼 혜택을 누린 인간들, 작가의 표현대로 하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은 오염된 공기가 어떻고 교육문제가 어떻고 닫힌 의식이 어쩌고 하며 못살겠다고 이 땅을 속속 떠나든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식들을 조기유학으로 빼돌린다. 그러면서 나라 걱정은 혼자 다 하지. 그런 이야기를 흥분하는 기색도 없이 이 작가는 조용히 읊조린다. 다 좋은데 떠나려면 조용히 떠나라고,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이 대목에서 나는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녀의 독서일기와 나의 독서일기가 100프로(!) 겹치는 걸 알게 된 것도 유쾌했고.


하도 많은 분들이 리뷰를 올려 과연 이 책을 읽고 나도 할 말이 남아 있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공선옥은 공선옥이다.  이 신새벽에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하다니! 


 


댓글(27)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rky 2005-05-20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씨도 대단하지만, 로드무비님도 정말 대단하세요. 회사다니면서 창작교실에 등록도하고, 모임도 갖고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멋져 보입니다.

호랑녀 2005-05-20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추천하고... 장바구니 들어갑니다.
공선옥의 책... 자꾸만 피하고 있었습니다. 왜였을까... 한번 잡으면 빠져버릴 것 같아서 그랬을까...

서연사랑 2005-05-2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추천받으셔야 마땅할 리뷰라고 생각해요^^

바람돌이 2005-05-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공선옥의 글이 참 좋았음에도 그 후로 그녀의 글은 저를 피해간것 같아요. 아님 제가 피했었던가....
오늘 님의 글 읽고 그리고 그동안 많은 알라디너들도 이 책을 칭찬하고...
역시 봐야겠네요.

로드무비 2005-05-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리뷰가 많이 올라오고 그걸 읽다보면 그 책을 안 읽었음에도
다 읽은 것처럼 생각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재밌게 읽었으니 말 다했죠, 뭐.^^
서연사랑님, 미누리님 방에서 가끔 뵌 분이네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호랑녀님, 한번 잡고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동안 왜 피하셨을까요?^^
퍼키님, 제가 속한 제1기는 독서 모임의 성격이 짙었어요.
사람이 그리워서 기어들어간 거였으니 멋있다는 말은
취소해 주실래요?
듣기 영 거북해서.;;

비로그인 2005-05-2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작가와의 만남 같은 모임이 마련된다면 멀리서라도 함 봤으면 좋겠습니다. 로드무비님만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 잼나게 잘 읽었어요.

urblue 2005-05-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를 들고 나왔어요.
이것도 이제 읽기 시작했고, 공선옥의 글은 하나도 보지 않았지만,
로드무비님의 리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주말을 앞에 둔 아침인데 너무 무겁다구요~~

perky 2005-05-2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게보여서 멋있다고 말했던 것 뿐인데, 듣기 거북했다고 하니까,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

로드무비 2005-05-2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키님,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말씀은 무지 고마웠지만 괜히. 헤헤^^
블루님, 전 그 책 예전에 읽었어요.(오랜만에 블루님 앞에서 잘난척=3)
아이구, 주말을 앞두고 가배얍게 시집이나 한 권 들고 나오잖고...
복돌이님,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좋습니다.
청바지 터져나간다는 이야기가 특히 재밌었죠?ㅎㅎ

부리 2005-05-2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멋진 리뷰십니다. 민족문학창작교실 같은 곳에도 가시고... 아아, 존경스럽습니다. 님의 빛나는 내공은 그 몇달 탓도 있지요?

stella.K 2005-05-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 교실 다니셨군요. 저도 예전에 잠깐 다녔었는데...그때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던 중이라 정말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아서 다녔는데 다니다보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것 같아 좋아지더라구요. 근데 다니다 말았죠. 지금 생각하니 살만해서 그만 두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다녔을지도...그땐 뭔가의 끈이 필요했었거든요.

로드무비 2005-05-2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저의 내공(ㅎㅎ)은 그 당시 신촌 술집 모임에서 키워졌답니다.^^

로드무비 2005-05-2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새 스텔라님이.^^
창작교실이 아니고 독서교실이었다니까요.
그때 사람들과 친해져서 한동안 꽤 잘 지냈답니다.
님은 계속 다니지 그러셨어요. 끈을 확실히 잡게...^^

stella.K 2005-05-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글쓰는 게 점점 자신이 없네요. 흐흐.

숨은아이 2005-05-2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수가 너무 많아 안 할라 그랬는데, 에잇!

로드무비 2005-05-2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그러심 섭하죠.;;
고마워요.^^
스텔라님 글쓰는 데 항상 자신있는 사람도 있을까요?^^;

히피드림~ 2005-05-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로드무비님은 페이퍼건 리뷰건 적당히 자신의 경험도 섞어가면서 참 맛깔나게 씁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날개 2005-05-2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마트면 못보고 지나갈 뻔 했어요..^^;;

로드무비 2005-05-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뜰하게 챙겨서 봐주시는 날개님, 고맙습니다.^^
punk님, 제 리뷰가 좀 껄렁껄렁하죠?;;
재밌게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5-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전 공선옥 작가만의 소설가의 각오, 같은 게 만져지더라구요. 다른 글들도 좋았지만 맨 마지막 북풍이 휘적 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의 글요, 가슴이 다 아파오던데요. 로드무비님 리뷰는 안 껄렁껄렁해요. 진심이 담겨 있어서 온기가 느껴지는걸요. ^^ 추천도 해요!

2005-05-2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는 이안님, 그런데 왜 리뷰는 안 올리셨을까요?
전 님의 공선옥 리뷰가 무지 궁금하답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5-05-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보야, 봤지? 리뷰 특강은 무비 언니한테 받아야 한당께! 술 한 병 들고. 그, 근데, 소, 소개료는? =3=3
무비 언니 리뷰는 정말 안 보고 싶어요. 왜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던져버릴까 하는 갈등을 하게 만들 거든요!

kleinsusun 2005-05-2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 소설을 딱 한권 읽었어요.<피어라 수선화>.
책을 읽다가 다 못읽고 덮어 버렸어요. 너무.....불편했어요.
읽으면서 계속 죄책감이 들었거든요. 또 너무 무거웠고.....

공선옥 소설을 읽으면
저의 모든 고민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고,
자꾸만 움츠리게 되고 그래요.

그런데....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산문집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보관함에 넣었어요.

로드무비 2005-05-2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답니다.
수선님의 화사하고 경쾌한 글쓰기도 얼마나 좋은데요.
아무튼 이 책 읽어보시는 건 찬성이에요.^^
노파님, 리뷰 특강은 마태우스님이 잡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정말 언제 두 분이 손 꼭 잡고 우리집에 술 몇 병 사들고
오는 것 아니우?^^

2005-05-2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어머 당연히 그러셔야죠오.=3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