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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문성현 - 창비소설집
윤영수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윤영수라는 소설가 하면, 내게는 무조건 <사랑하라, 희망 없이>라는 첫 창작집 제목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달포 전 잠실의 교보문고를 구경하러 갔다가 그 부근이 직장인 남동생의 안내로
마포소금구이 식당에 들렀을 때 사방 벽이 낙서판인 걸 보고 주인에게 펜을 달라고 부탁,
한 줄 갈긴 것이 "사랑하라, 희망 없이" 였다.
나잇살이나 먹은 여자의 유치찬란함에 남동생과 내 남편은 혀를 끌끌 찼지만,
어쩌란 말인가, 펜을 잡는 순간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을.
그의 첫 창작집은 한 편 한 편 단편들의, 드라이한 듯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느낌들이 참 좋았다.
두 번째 단편집 <착한 사람 문성현>은 10년 전 막 나왔을 때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잽싸게 빌려 읽었는데, 눈물을 철철 흘리며 읽었던 표제작과 함께,
시립도서관의 하릴없는 군상에 대한 얘기인 '기사와 건달의 섬'을 다시 읽고 싶어 주문했다.
오래 전 부산 초읍의 한 기사와 건달의 섬에 초췌한 몰골로
무수히 드나들었던 기억 때문인가.
10년 만에 어떤 책을 다시 집어들어 읽게 되면 묘한 감상이 스쳐 지나간다.
사실 10년 세월이라봤자 그 꼴이 그 꼴이고, 별 신통방통할 것도 없는 자신의 과거를
고양이 죽사발 핥듯이 안고 뒹구는 버릇이 있는 게 인간인 것인데,
신기한 건 내가 읽으며 웃었던 부분, 눈물이 핑 돌았던 부분, 혹은 대성통곡하는 부분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그랬나, 미처 모르고 놓쳤던 주옥같은 문장과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맨 앞의 연작 형식의 세 작품과 '콩켸팥켸'가 그랬다.)
그 재미란......
사실을 말하면, 윤영수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은 처음 읽었을 때 표제작 '착한 사람 문성현'과
'삼가 조의를 표함', 그리고 '기사와 건달의 섬' 세 편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천하의 독하고 악한 x"으로 예산댁이 머릿속에 입력되었고,
문성현이 사는 동네의 "양품점을 운영하는 과수댁 김입분"은
그 반대의 의미로 내게 각인되었다.
주인공 문성현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비중있는 인물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준 두 사람이었다.
선인과 악인으로.
'삼가 조의를 표함'을 다시 읽고 나니, 인생과 인간에 대한 씁쓸함과 혐오가
엄청난 파고로 나를 다시 덮친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통렬한 순간이 좋아서 책을 읽는 것 같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며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그 깨달음.
그럼에도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떼야 한다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덤덤한 얼굴로 사노라면
예기치 않은 즐거운 순간도 주어지더란 말이지.
이 작가의 싸늘한 체념과 퍼붓는 듯한 독설 속의 그 미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좋다.
다시 한 번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