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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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쪽)


한정현의 『마고』는 궁금한 소설이 아니었다. 단편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한정현이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그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정현의 산문 『환승 인간』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산문을 읽고 그의 장편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고』를 만났다. 제목 『마고』는 한국 신화에서 여신, 거인신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고를 뜻한다. 여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싶었지만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란 부제를 보며 추리소설이 아닐까 살짝 기대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배경으로 윤박 교수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미군정이 시작된 시대 범인은 미군이었다. 그러나 미군 입장에서는 그 사실은 밝혀져서는 안 되었고 다른 용의자가 필요했다. 사건 당인 윤박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세 명의 여성이 용의자가 된다. 세 명의 용의자는 잡지 편집장 선주혜, 과거 식모였고 술집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정주부인 윤선자, 윤박 교수의 조교이자 신인 소설가 현초의는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서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여성 탐정 연가성은 문화부 기자 권운서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추적한다. 가성과 운서는 오랜 친구 사이로 서로를 위해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사이다. 둘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호텔 포엠의 사장 에리카를 만나 당시 상황과 세 명의 여성에 대해 묻는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리카는 세 여성과 윤박 교수의 관계와 행적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 강의와 문단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윤박 교수와 세 여성,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수록 윤박 교수의 추악한 본성은 밝혀진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협박한 사실이 세 여성에게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된다. 세 명이 협공해서 윤박 교수를 죽였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범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을 비롯한 여성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일본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고스란히 미국을 향해 복종하는 역사의 모습도 조명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 되는 가성과 운서의 사랑을 시작으로 동성과 이성으로 규정된 사랑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성의 사랑이자 소수자의 사랑이며 미군정기의 지배와 폭력의 이야기, 시대에 저항하고 고발하는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을지조차 의문인 시대에 아이를 구하려는 여성의 모습.


“이곳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 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 같은 거 안 합니다.” (129쪽)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그건 한정현도 마찬가지다. 한정현의 소설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그 시대를 상상하고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삶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현이 소설에 대해 들려주는 작가의 말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작중 세 개의 달은 이 소설 속 세 명의 용의자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모양이 변하며 종내는 하나의 원형을 만드는 달처럼 이 세계 속 모든 소수자, 약자들의 연대하는 얼굴이기를 바라며 써넣었다. 강렬한 태양에 맞서지는 못할지언정 늘 우리 곁에, 서로의 곁에 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작가의 말」, 211쪽)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뻔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자 삶이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가성과 반대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운서의 사랑은 시대가 바뀐 현재에도 흔쾌히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충분할 텐데.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와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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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보고 리뷰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주할 때마다 소설로 꼭 읽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소설을 읽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아름다운 산문시 같은 소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게 되는 문장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을, 내가 닿을 수 없는 그곳의 공기와 냄새를 상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에 누가 반하지 않겠는가.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ㅡ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ㅡ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13쪽)




그러나 그곳의 어린 소녀 여섯 살의 카야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떠난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녀, 조디 오빠까지 떠나고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행동하는 소녀,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소녀 카야가 어떻게 살아게 될지 걱정이 돼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자 홀로서기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196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 속에서, 그러니까 백인 우월주의와 습지에 사는 카야에겐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카야는 습지에 산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거부한다. 어린 소녀에게는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엄마가 돌아올지 모르는 집을 지키며 외부인이 찾아올라치면 용케 숨어버린다.


가끔 알 수 없는 밤의 소리가 들려오고 코앞에 내리꽂힌 번개에 소스라쳐 놀랄 때도 있었지만,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스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도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49쪽)


홍합을 따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요트의 기름을 채우고 자신을 품어주는 습지에서 깃털과 조개껍질을 모으며 살아간다. 카야를 아끼고 돕는 이도 있었다. 홍합을 사주고 교회에서 옷과 신발을 가져가 카야에게 주는 흑인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 그리고 테이트. 자연에 대해, 요트를 운전하는 법에 대해 카야에게 알려준 조디 오빠의 친구 테이트.


그는 카야에게 깃털로 마음을 전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단 하루 학교에 갔던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가져다준다. 둘은 금세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다. 테이트는 카야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대학에 가야 하고 그동안은 카야와 떨어져지내야 한다. 돌아올 것을 굳게 다짐하지만 테이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테이트도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에 카야는 절망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깊게 들어간다.






그런 카야에게 바람둥이 체이스가 다가오고 결국 그와 사귄다. 달콤한 말로 결혼을 약속하고 멋진 집을 지어주겠다는 체이스는 카야를 농락하고 버린다. 카야는 예전처럼 혼자가 된다. 카야 곁에는 갈매기와 바람과 버섯과 자연뿐이다. 여전히 카야를 사랑하는 테이트는 학업을 마치고 고향 근체 연구소에 취직하고 카야를 찾는다. 자신을 거부하는 카야에게 용서를 구하고 카야가 습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것들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책을 낸 카야는 집을 고치고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책 덕분에 자신을 떠났던 조디 오빠가 집을 찾아와 재회한다. 카야가 습지를 떠나지 않았기에 둘은 만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만은 아니다. 체이스의 시체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범인을 밝히는 추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소설은 현재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카야의 어린 시절을 교차하며 이어지는데 예상했듯 카야는 범인으로 지목된다. 세상의 시선에 체이스를 죽인 범인은 카야였고 카야여야만 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카야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20미터 망루의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체이스, 카야와 체이스가 다투는 모습을 본 증인들, 체이스의 옷에서 발견한 붉은 털실이 카야의 모자의 것과 같다는 증거로 검사는 카야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그 시간 카야는 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있었다. 카야는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는다. 변호사만이 강력하게 증거에 맞선다. 재판이 끝나고 카야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말은 모두를 아프게 한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날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434쪽)


카야는 그저 혼자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야를 폭력과 따돌림으로 무시하고 괴롭혔다. 1960년대가 아니라 지금이라면 어떨까? 습지의 소녀를 우리는 어떻게 대할까. 그 당시 사회와 얼마나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카야의 슬픔과 고통을 헤아리는 이는 그와 같은 외로움을 아는 흑인 점핑 부부밖에 없었다. 카야가 기댈 곳은 카야 곁으로 날아오는 갈매기, 은은하고 찬란한 빛을 품은 습지, 그 자연이었다.





아름답지만 슬픈 소설이다. 서정적이지만 아픈 소설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카야가 카야답게 살 수 있는 곳. 카야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던 그곳, 별이 된 카야는 지금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카야는 조수간만처럼 확실한 이런 자연적 과정의 일환으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만큼 이 지구라는 별과 그 속의 생명체들을 끈끈하게 유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대지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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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 이 책 독서괭 님이 선물해줬는데........

독서괭 2024-02-16 11:59   좋아요 0 | URL
읽겠다고 했었는데…

잠자냥 2024-02-16 12:17   좋아요 1 | URL
읽기는 할 거라던데....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혹 주말에 읽을지도...

잉크냄새 2024-02-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13의 내용이 영화의 첫 내레이션 부분 같네요.
영화도 영상미가 좋았는데 소설 또한 아름다울것 같아 읽고 싶게 만드네요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프롤로그의 처음이기도 하고요.
영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소설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4-02-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 전에 읽었을 때, 리즈 위더스푼이
영화 만들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영화로도 나왔나 보네요.
구해서 한 번 보려구요.

슬펐던 소설로 기억합니다.

자목련 2024-02-16 14:28   좋아요 1 | URL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어요. 영화도 좋았고 소설도 좋았어요,
소설 쪽으로 살짝 기울어요.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아직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독서괭 2024-02-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참 좋아요^^
영화에서는 카야가 저렇게 소리를 치는군요?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 없지요? 어떤 자기변호도 안 했던 것 같아요. 그게 더 카야에게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저는 소설 먼저 읽고, 이미지가 깨질까봐 영화는 안 봤는데,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았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ㅎㅎ

자목련 2024-02-19 17:06   좋아요 1 | URL
소설이 더 좋았는데, 영화도 괜찮았어요. 저는 다시 돌려서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독서괭 님의 리뷰도 이 소설을 읽게 만든 이유였어요. 감사해요^^

steal0321 2024-02-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기만 했는데, 자목련님의 후기를 읽으니 당장 읽고, 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3-04 15:39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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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고 부축인다. 내가 해 보니 좋았다고, 내가 이끌어주겠다는 식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선택한 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 알 수 없다. 산다는 건 역시나 내가 사는 일이니까. 그런 점에서 문진영의 단편집 『최소한의 최선』 속 인물은 애틋하다. 그들은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하다. 이상한 건 그 쓸쓸함이 나쁘지 않다.


첫 단편 「미노리와 테츠」 속 ‘수민’과 ‘나’는 학창 시절부터 내내 단짝이었지만 성향은 전혀 다르다. 수민과 같이 간 일본 여행에서 우연히 알게 된 미노리와 테츠 부부의 근황을 수민을 통해 듣는다. 수민은 그 후로 혼자 일본에 가서 그들을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 둘이 이혼했다는 소식이다. 여행에서 수민과 테츠는 죽이 맞는 사이였다. 수민은 그랬다. 적극적이며 모두가 수민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소심한 쪽이었다.


서울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미노리의 연락을 받고 나는 고민한다. 수민 없이 미노리와 둘만 만나는 것이라서. 예전에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며 사과하며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미노리에게 나는 말한다. “나도 알아. 우리는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지.” (「미노리와 테츠」, 30쪽). 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작가라니. 신선하다 못해 감동적이다.


빛이 환할수록 더 짙어지는 그림자에 관해. 임계점에 닿기도 전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마음에 대해. (「미노리와 테츠」, 31쪽)


어떤 감정에 대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문진영은 자신만의 핀셋으로 집어올려 보여준다고 할까.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단편 속에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감정, 마음을 담아 이야기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나 관계라고 선을 긋는 그런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가만가만 들려준다.





그런 문진영의 시선은 엄마와 삼촌이 어렸을 때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외할머니 '배정심' 여사의 이야기인 「내 할머니의 모든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삼촌의 유산 문제로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할머니는 삼촌의 유산을 포기했고 이혼한 엄마의 몫이 되었다. 손녀인 나는 외할머니가 궁금했고 더 알고 싶었다. 나의 눈에 할머니는 멋져 보였다. 패션이나 말투, 행동, 나를 태하는 태도가 그랬다. 그러나 할머니는 곧 사라졌다. 내가 제안한 할머니의 생일 축하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이 된 나와 엄마는 할머니의 아파트를 찾았다. 할머니가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던 아파트. 단출하게 정리된 공간.


그날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것들이자 유일한 것들을. 단 한 벌이의 코트, 하나의 모자, 하나의 목도리, 한 켤레의 장갑.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96쪽)


그날 우리가 목격한 할머니의 집안 풍경이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쓸쓸해 보일지는 모르나, 할머니 자신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는 할머니에게 딱 맞는 일일분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116쪽)


할머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식인 엄마조차도. 그녀가 원한 삶이 어떤 삶인지, 자식을 버리고 혼자 살기로 결심한 그 마음을 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걸 받아들일 뿐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 외롭고 고독하지 않았을까 상상하지 말고.


누군가 삶은 한 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의 삶이다.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거나 뿌리나 열매 없이 줄기만 지닌 삶도 있는 것이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속 육 년의 직장 생활을 끝내고 떠난 인도 여행에서 만난 '안와'도 다르지 않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나’를 친구라 대하는 안와가 살아가는 삶을 모르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불편하고 낡은 도시가 편안해지고 자신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가 건넨 말 “이 세상은 다리. 이곳에 집을 지으려 하지 말고 건너가라.”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148쪽)이 위로가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시작할 수 있고, 이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확신을 얻는 과정이 삶은 아닐는지. 그러니 꼭 이곳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난 룸메씨와 나가 즉흥적으로 바이킹을 따라 떠난 월미도 여행을 다룬 「고래 사냥」도 같은 맥락이다. 원하지 않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룸메씨나 주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나에게 삶은 무엇일까. 아무도 나를 붙잡아주지 않고 끌어당기지 않는 느낌. 바이킹을 타면서 느꼈던 어떤 간절함.


한껏 끌어당겨지고 싶었다. 삶 쪽으로. (「고래 사냥」, 159쪽)


문진영의 소설 속 인물을 굳이 설명하자면 환하기보다는 어두운 쪽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건 아니다. 어둠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도 빛이 있다는 걸 안다. 어둠에 속한 시간이 조금 길어질 뿐 그들이 환한 쪽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천천히 그들의 속도로 환한 쪽으로 나오는 중이다. 그게 그들의 삶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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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책을 읽으려고 했다. 아예 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독을 하거나 집중을 해서 읽지는 못했다. 역시 연휴에는 뒹굴뒹굴이 최고다. 2월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벌써 절반이다. 올해 2월은 29일까지 있으니 하루를 번 셈인가. 아무튼 명절도 지나고 연휴도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느끼는 2월이다.


2월의 책은 단출하다. 단출하다고 해서 2월에 다 읽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하지 않겠다. 아무튼 2월에는 이런 책을 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의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벌써 50번째다. 꼬박꼬박 챙겨 읽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일까 눈여겨보는 시리즈다. 이장욱의 소설은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구매했다. 그러니까 이장욱의 소설은 오랜만이다.


나머지 두 권은 계속 리스트에 읽던 책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Hunger)』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중고로 샀다. 중고 알림 받기를 신청했지만 매번 구매에 실패했거나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은 영화로 먼저 만났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일부 장면은 기억에 담아 두었다. 소설로 읽고 싶었고 소설을 다 읽으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지금 읽고 있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감탄하는 중이다. 작가가 생태학자라 그런 걸까. 지나친 비유가 아닌 꼭 맞는 적절한 비유와 묘사, 주인공 카야의 심리를 솔직하면서도 풍부하게 그려냈다. 습지에 흐르는 빛과 바다, 그 안에서 서식하는 모든 생물의 호흡과 성장이 눈부시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는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에서)


영화를 보았기에 사건의 전개나 결말에 대한 기대를 갖기는 어렵지만 영상이 아닌 소설을 통해서 전해지는 느낌이 있다. 소설의 감각이라고 하면 맞을까.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문장을 읽는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그 문장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싹을 틔우거나 준비하는 2월, 시골에서 2월은 아직 여유가 있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고 할까. 어쩌면 숨 고르기 중인지도 모른다. 2월은 그런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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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2-14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영화보다 소설이 훠얼씬 좋았어요 저는 소설 먼저 읽고 영화 봤는데 영화가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자목련 2024-02-15 11:55   좋아요 0 | URL
그러니 영화를 먼저 본 저는 이 소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stella.K 2024-02-1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설 연휴 마지막은 저도 암것도 안하게 되더군요. 뭐 평소 때랑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ᆢㅋ 이왕 아무 것도 못할 거 영화나 보자했죠.
가재가...는 좋다는 사람 참 많았는데 여기서 보니 정말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4-02-15 11:54   좋아요 0 | URL
<가재가 노래하는 곳> 좋았습니다. 기회 되시면 읽어보세요.
남은 2월 활기차게 보내시고요^^

coolcat329 2024-02-15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서정적인 작품이죠. 작가가 생태학자 출신이라 자연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구요. 저는 영화는 안봤는데 책이 더 좋을 거 같긴 해요.

자목련 2024-02-15 11:53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어보니 영화를 먼저 본 게 다행이구나 싶기도 해요. 좋은 소설이었어요^^

은오 2024-02-15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헝거 저도 이번달에 읽었는데 자목련님 페이퍼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역시 자목련님이랑 저는 통하는 사이~! 💕 2월 3일에 읽었네요. 저도 전부터 담아놨다가 절판된 바람에 중고로....🤣🤣
저도 어쩐지 연휴가 지나니까 더 잘 읽히는 느낌이에요. ㅋㅋㅋ 연휴는 싱숭생숭....

자목련 2024-02-16 08:50   좋아요 1 | URL
은오 님 헝거 읽으셨군요. 그것도 최근에. 근데 왜 백자평, 리뷰, 페이퍼 없죠?
뭐가 그리 바쁜가요? 잠자냥 님 흠모하느라 바쁜가요? 글도 써주면 안 되나요?

은오 2024-02-16 21:11   좋아요 0 | URL
계속 글 안쓰는 은바오에게 점점 단호해지시는 자목련님ㅠㅋㅋㅋㅋㅋㅋㅋㅋ제가 요즘 읽느라 바빠서 쓰는 게 귀찮아졌습니다.. 다 읽고서 빨리 또 다음 책 읽고 싶은 다급한 마음......인데 이제 정말 써야 할 시기인가봐요? ㅠㅠ
 
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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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엄마는 꿈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희미한 존재가 엄마가 아닐까 하는 그런 등장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엄마를 만나는 꿈이라 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큰언니는 뚜렷한 존재로 꿈에 나왔다. 이상하게도 큰언니의 꿈을 꾸고 나면 뭔가 위로 받거나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가 엄마의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면서도 엄마가 아닌 큰언니가 생각난 것도 그 때문이다.


큰언니의 부재는 여전히 크다. 큰언니가 선택한 살림살이와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남은 가구와 화분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다.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나는 큰언니의 존재를 느낀다. 그러니까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이다. 조해진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다. 곁에 없지만 여전히 곁에 있는 것, 남겨진 것들에서 전해지는 사랑과 온기 말이다.


소설에서 화자인 ‘정연’은 엄마의 마지막을 지키고자 애썼다. 일을 정리하고 엄마 곁으로 내려왔고 엄마의 통증을 지켜보며 어루만질 뿐 통증의 고통을 줄일 수 없고 함께 느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아니,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일상, 엄마가 보낸 하루를 정연은 살게 된다. 엄마가 돌보던 '정미'란 이음의 개와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며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만들어 팔던 칼국수를 만들었다. 엄마의 손길이 남은 식당, 냉장고에 남은 엄마의 김치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정연이 엄마의 털신을 신는 것을 시작으로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화장품을 바르고 정미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일, 엄마의 가까운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하는 일, 그것을 통해 엄마의 일상을 짐작한다. 엄마가 운영하던 ‘정미식당’을 아는 사람들, 손님들,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 엄마가 만든 칼국수의 맛을 아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사소한 대화, 그 안에 존재하는 엄마.


정연은 엄마의 맛을 재현할 수 없지만 엄마의 레시피대로 칼국수를 만들어 그 맛을 아는 이들과 함께 먹으며 엄마를 느낀다. 상실의 기억이 아닌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모과나무 아래 작고 둥근 봉분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애써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을 것이다. 정미식당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정연은 현재의 삶이 충분하다고 느낀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132~133쪽)


부모의 부재는 언젠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부모뿐일까. 가까운 이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상실과 이별은 삶의 수순이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이별의 고통은 삶의 일부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동지冬至로 시작해 대한大寒을 지나 우수雨水로 끝나는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삭막하고 황폐한 상실과 슬픔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따뜻한 동행자가 된다. 그들이 나가지 못할 때 가만히 멈춰 그들을 기다려주고 다시 걷기 시작할 때 함께 걷는다. 날카로운 추위가 끝나고 곧 입춘이 온다는 걸 가만히 알려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을 지나고 환하고 포근한 봄이 온다는걸. 그리하여 다시 만날 겨울은 조금 덜 쓸쓸하고 조금은 덜 추울 거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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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2-0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해요. 인생이니 당연히 상실이 있는데, 나이들수록 더 무서워져요.

자목련 2024-02-07 14:08   좋아요 0 | URL
평범하면서도 담담한 내용인데, 경험한 바가 있어 더욱 공감하는 소설이었어요.
저도 큰언니의 옷을 입고, 물건을 사용하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