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은 엄중하게 다가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해 놓은 기록이라서 그럴까.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을 읽기 전 조금 주저했다. 한나 아렌트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어려운 책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하겠다. 나 같은 독자도 읽었으니 누구라도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책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미 한나 아렌트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친절한 입문서다. 그의 저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조건』만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저자 사만다 로즈 힐은 한나 아렌트 선임 연구원으로 『한나 아렌트 평전』에서 한나 아렌트의 일생과 함께 그의 저작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관계를 다룬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나 철학에 치우치지 않고 삶과 작품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좀 남다른 내면을 지닌 소녀였다. 한나가 일곱 살에 아빠 파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 모든 여자가 겪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 마르타를 위로했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할 때 마르타는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나는 열네 살부터 철학을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서재를 통해 발견한 세계,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한 것이다. 그 공간이 한나의 철학을 향한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즈음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한 건 운명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에드문트 후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스퍼스를 만나 철학적 사유를 배우게 되었다. 귄터 안더스와 결혼 후 한나는 안더스의 글을 교정하고 안더스는 한나의 논문 출간을 도왔다. 그러나 한나의 정치적 활동으로 균열이 시작되어 안더스는 파리로 떠나자 한나는 공산주의자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 조직체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당국에 체포를 당했으나 다행히 풀려나자마자 독일을 떠났다.





한나는 파리에서 난민 신세가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에서 당한 일이라는 게 놀라웠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당함을 당해야 하다니.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 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공부와 연구를 했다. 한나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으로 특별한 유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항상 생각했다.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였다.’(157쪽)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여성이라는 데 그다지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요. 언제나 여성이었거든요.” (203쪽) 언제나 여성이었다는 한나 아렌트, 정말 멋지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와 그 안의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고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왔고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전범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다른 일정을 다 취소했다. 한나는 아이히만의 재판 참석이 과거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재판은 한나에게 유대인의 슬픔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실태 조사에 가까웠다. 그 기록을 담은 보고서 『예루살렘이 아이히만』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한나는 타인의 잘못에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240~241쪽)


한나 아렌트에게 철학과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였다. ‘한나는 낙관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131쪽) ‘한나에게는 개인의 책임이 집단 경험보다 훨씬 중요했다. 결코 가벼운 고민이 아니었음에도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는 건 한나가 그만큼 개인의 책임에 더 큰 무게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133쪽) 현재를 직시하는 힘,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212쪽) 그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사상가로 알려진 한나가 시를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땅은 곳곳에서 시를 쓴다.

가지런히 나무를 땋아놓고 

우리더러 나아가라고 한다.

이 세상 곳곳을.


활짝 핀 꽃은 바람을 맞으며 기쁨을 누리고

풀은 연하고 나긋한 바닥에 싹을 틔우며

하늘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밝게 인사하고

태양은 부드러운 체인처럼 회전한다.


한껏 취한 사람들…

땅, 하늘, 햇살, 나무…

봄마다 새로 태어나

전지전능한 놀이 속에서 즐거워한다. (〈프랑스 드라이브〉, 199쪽)





권더 안서스와 이혼 후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결혼 생활은 균형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어려운 관계를 둘은 지속했다. 노년에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기에서 사상가가 아닌 한나는 자유로웠다. 생이 끝날 때까지 집필을 놓지 않았던 한나.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가 끊이지 않는다. 사만다 로즈 힐가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은 어렵지 않은 평전으로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훌륭한 안내서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차례로 만나도 좋을 것이다.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라고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 없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따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 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었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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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0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의 지적 사유적인 삶의 이력에 비해 이 책의 서술량이 얇고 좁다고 생각 했습니다
아마도 이책의 작가는 한나 아렌트가 세상에 남긴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 읽기 바랬던 것 같네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깊고 넓게 사유하는 시간이 줄어 버렸습니다
현재를 직시하는 힘!
결국 독서 만이 오늘 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수이 2022-10-10 12:47   좋아요 2 | URL
와 스콧님 말씀 정곡을 찌르네요. 저도 같은 걸 느꼈어요, 이 책 읽으면서. 저자 역시 한나 아렌트 전공이지만 이 평전을 쓰면서 미지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한나 아렌트를 직접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사유하고 더듬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느껴졌어요. 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깊이와 폭에 지레 질리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사만다가 응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2 | URL
스콧님과 비타 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그런 부분이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데, 저 같은 독자에게는오히려 이런 접근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한나 아렌트에 대해, 그의 저서에 대해 검색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레삭매냐 2022-10-10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서 대기 중이랍니다.

곧 읽기 시작해야겠네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1 | URL
매냐 님, 즐겁게 만나세요^^*

미미 2022-10-10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서야 그녀가 시를 썼다는 걸 알았어요.
시(詩) 적인 표현력이 그녀의 글에도 드러나는것 같아 신기했고요.*^^*

자목련 2022-10-11 14:37   좋아요 2 | URL
어쩌면 철학이 아닌 시인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어요^^

수이 2022-10-10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의 시적 감수성은 한나의 사유를 더 정밀하게 다듬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게 하이데거의 영향인지 아니면 한나에게 있었던 본래적인 시적 감수성을 하이데거가 알아보고 그 촉을 건드린 걸 수도 있구요. 여러모로 훌륭한 평전이라고 여깁니다. 자목련님 말씀대로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안내서’라고 여깁니다. :)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2 | URL
저는 아버지의 서재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했어요.
이 책으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까 싶어요.

거리의화가 2022-10-10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를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 같습니다.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1 | URL
저 같은 독자에게 특히 그랬어요. 화가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책읽는나무 2022-10-1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간 없는 사유...표현 자체도 참 멋있어요.
저도 아렌트 노블책 잡고 읽고 있어서 반갑네요^^
자목련님도 아렌트!!! 그래서 또 반갑구요^^

자목련 2022-10-11 14:40   좋아요 2 | URL
한나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해와 사유도 좋았어요.
그로 인해 저 같은 독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노블책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10-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 ‘난간 없는 사유 ‘ 정말 멋있는 표현! 무엇에 기대어 사유하는것이 아니라 위험할지 모르지만 자유롭게 사유하는 것의 의미!일듯요
데려갑니다

자목련 2022-10-13 09:38   좋아요 1 | URL
평전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을 대해 연구하고 세상에 내놓은 저자도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제가 한나 아렌트의 생을 다룬 다른 책들을 만나지 못한 덕분이기도 할 테고요. ㅎ
 

책 읽기는 이어진다. 속도는 느리고 집중력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성실한 토끼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거북이가 된다. 아니, 베짱이가 더 맞겠다. 그래도 그 느림이 좋다. 적정한 속도를 이룬다고 할까. 책을 들이는 일도 그에 맞게 느려진다. 가을이니까 소설을 읽어야지,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다. 가을엔 소설,이라고 하면서 곁에 둔 두 권의 소설이다. 하나는 단편집, 하나는 장편소설이다. 


요즘 출판사 1984BOOKS에서 나온 책들이 다 좋다. 직접 읽어본 책도 좋고 이웃이나 블로그의 평도 좋다. 그래서 이번에 들인 책은 안드레이 마킨의 소설 『어느 삶의 음악』과 소설 보다 시리즈다. 『소설 보다: 가을 2022』는 이서수, 위수정 작가의 단편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나오는 이 시리즈는 그냥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작가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느낌을 받아서 신중하게 구매할 생각이다.





가을에 들였으니 이 짧은 가을이 끝나기 전에 읽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런 명분은 기껍다. 조금 빠른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사진 속 책장의 책들 가운데 읽어야 할 책이 보인다. 황정은의 글을 천천히 다시 읽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아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나는 황정은의 글을 알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는 다시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세 권은 읽기에 그친 책들이다. 리뷰를 쓸 때 책은 다시 정리되고 그 책에 대한 마음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읽어야 할 책이라는 기준은 딱히 없다. 지난번에도 말한 것처럼  그저 끌리는 대로 읽는 게 즐겁다. 아마도 곧 이어 끌리는 대로 만나게 될 책은 김연수 단편집과 2022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좋은 책이 아니라 내가 좋은 책, 그뿐이다. 그리고 그런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잃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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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06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성실한 독서가가 되고
싶으나, 집중력의 저하로(핸드폰
과 너튜브 탓을...) 책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도 느림보 거북스 스타일로
꾸역꾸역 읽고 있답니다.

저도 1984BOOKS에 눈길이 가네요.

황정은 작가의 책은 어떤 책 읽고
나서 식겁해서 소장한 책도 읽을
염두를 못내고 있네요...

자목련 2022-10-07 09:10   좋아요 1 | URL
황정은의 어떤 책일까 궁금하면서도 최근에 나온 연작이나 에세이는
그에 비하면 무난해서 읽으셔도 좋을 듯해요^^

그레이스 2022-10-0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소설!
옳습니다 ~~

자목련 2022-10-07 09:09   좋아요 1 | URL
노벨문학상 발표에 힘입어 가열차게 읽어보아요!
 

어떤 책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김수정의 『감정을 파는 소년』이 그러하다. 감정을 팔다니, 그게 가능할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서 판다는 걸까, 필요 없다고 느끼는 감정을 판다는 걸까. 만약 이 모든 게 가능하다면 나는 어떤 감정을 팔고 어떤 감정을 사고 싶을까. 감정을 산다면 어떻게 사는 걸까. 가격 책정은 적당할까. 책을 읽기도 전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꽉 차있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감정을 사고파는 가게의 이야기다. 감정을 팔러 온 이들의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과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들려준다. 후미진 곳에 자리한 가게의 사장은 ‘정우’, 하지만 감정을 매입하는 이는 ‘민성’이란 이름의 소년이다. 사장은 정우지만 가게의 모든 일은 민성의 몫이다. 


가정 먼저 만나는 감정은 사랑이다.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게 사장을 사랑하는 여자는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여겨 그 감정을 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중에 사장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사랑을 팔아버려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감정을 팔아버리면 감정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반대로 사랑이란 감정이 필요하면 민성의 가게에서 사랑을 구입할 수 있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가정폭력을 일삼으며 결국에는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향한 ‘증오’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증오를 팔기로 한 손님에게 정우는 누가 증오를 사겠냐며 거부하지만 민성은 달랐다. 증오라는 감정 역시 누군가에게는 필요하다며 구매한다. 그리고 얼마 후 증오를 사겠다고 온 이가 있었다. 7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에게는 증오가 필요했다. 증오를 사러 온 여자의 사연이 그렇다. 여자는 처음에는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헤어지지 못한다고 여겨 가게에 와서 사랑을 팔고자 했다. 그러나 민성은 여자에게 남자를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 7년이라는 시간의 정에 붙들려 살았지만 이제는 끝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떨쳐버리고 싶은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게 필요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감정이란 없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 정우와 종현에게도 마찬가지. 경제적인 지원이 어려워 고시촌 총무를 하는 정우에게는 열등감이 심했고 반대로 너무 편안하게 공부하는 종현에게는 자극이 될 열등감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격려하며 공부하던 사이였지만 정우는 종현을 의식했고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팔았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감정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 민성의 능력이다. 민성이 손님의 손에서 그 감정을 추출하는 것이다.


“슬픔과 사랑은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 또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세상의 모든 슬픔은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기는 감정이니까.” (141쪽)


민성의 말처럼 슬픔과 사랑은 한 몸처럼 붙어있어 누군가 사랑하는 일에는 때때로 큰 슬픔이 동반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시작될 때 이별은 생각할 수 없기에 이별을 감당하기 어렵다. 사랑 때문에 슬프고 사랑 때문에 아파도 우리는 사랑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연인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가족, 친구, 세상을 향한 사랑까지도. 


감정이란 참 이상하다.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객관적이지 못한 게 감정이다. 이처럼 내 안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어렵고 그 과정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것이다. ‘사랑’, ‘증오, ‘열등감’, ‘슬픔’, ‘기쁨’, ‘행복’등 다양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상대의 감정에 의해 다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다. 친구와의 관계, 정체성, 여러 가지 감정과 맞닥뜨리는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이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감정을 분류하고 정리한다는 소재가 독특하면서도 좋다. 세상에 쓸모없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저마다 소중하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사랑은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따뜻하게, 증오는 캔에 담아서 차갑게, 열등감은 나무 그릇에 미지근하게, 슬픔은 머그에 담아 실온보다 조금 따뜻하게.” (141쪽)


따뜻한 사랑과 슬픔, 차가운 증오, 미지근한 열등감, 차별적인 감정을 상상한다. 그리고 현재 나의 감정 상태는 어떤지 생각한다. 넘치는 감정은 무엇일까. 다채로운 감정 이야기, 그 안에서 솔직한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순간, 조금 편안해지는 쪽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미래에는 정말 이런 소설처럼 감정을 파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소설 적 상상으로는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무섭다. 필요에 의해 직접 경험하지 않는 감정을 사고 파는 일,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구매해서 대체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공감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면 맞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알지 못하고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하려면 그 경험을 구매한 사람만이 가능한 시대.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란 제목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정녕 감정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그런 미래가 될까 두렵다. 감정만 파는 게 아니라 도덕, 사랑도 파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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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구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 가을이니까 책을 더 많이 읽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때문이겠지만 실은 요즘 나의 읽기와 쓰기는 그저 그렇다. 아주 멋진 소설을 읽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이러다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지 못해 다시 앞으로 나가기도 한다. 


책을 구매하는 일도 충동이 아니 신중함으로 한 번 생각하려고 한다. 다른 물건들은 한 번 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시간을 갖고 생각하는데 책은 그게 잘 안된다. 그러니 끌리는 대로 사는 편이다. 최소한으로 구매하고 책장의 책을 읽거나 정리하는 게 항상 주된 목표지만 목표는 목표에 그친다.






단편집 한 권과 시집 한 권, 딱 좋다고 여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집 『지고 말 것을』의 제목처럼 결국 또 지고 말았다. 진은영의 이번 시집은 제목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란 제목에서 오래된 거리를 떠올리고 저마다의 너를 찾을 듯하다.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서 기사도 많고 여기저기 언급도 많다. 그러니 시를 소개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대신  『지고 말 것을』 속 이런 문장만 살짝 소개할까 한다.


그 밤에 달이 너무나도 밝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모래가 너무나도 하얬던 게 문제였을까요. 보름달은 흰 모래밭을 공기가 없는 색처럼 맑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물방울처럼 똑바로 떨어질 만큼 조용했던 탓인지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내 그림자는 흰 종이에 떨어진 먹처럼 쌔까맸습니다. 내 몸은 흰 모래에 세워놓은 하나의 날카로운 선이었습니다. 모래사장이 사방에서 흰 헝겊처럼 빙글빙글 말려올라왔습니다. (「푸른 바다 검은 바다」 중에서)


아무튼 가을이니 소설도 좋고 시집도 좋다. 나쁠 게 없다. 나쁜 건 나의 태도,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에 기대는 나의 태도다. 끌리는 대로 읽어야지. 문제는 끌리는 책이 아주 많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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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26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들이는 즐거움에 더 끌리는 저도 반성하며 ㅎㅎ 자목련 님 저도 요즘 뭔가 집중이 안 되고 중구난방입니다. 가을탓이라고 해둘까요. 가을에도 좋은 시집과 선별하신 독서로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자목련 2022-09-27 19:18   좋아요 2 | URL
가을이니 가을탓을 해도 괜찮겠지요. 프레이야 님이 포스팅 하신 김연수 신간도 조만간 사들이는 즐거움에 속할 것 같아요~~

scott 2022-09-26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진은영 시집 자목련님도 ^^

이번에 첫판 완판!
1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여전히 시를 읽고 사릉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서

저도 시집 찾아 ~~@@

자목련 2022-09-27 19:17   좋아요 2 | URL
1만권이 팔렸다니 대단하네요.
아마도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 마케팅이 더 성공한 것 같기도 해요. ㅎ

책읽는나무 2022-09-26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궁금한 자목련님 책장 속 시집들은 꼭 자목련님 글 분위기와 많이 닮은 듯 합니다.
정갈하네요~
선택하신 두 권의 책들 제목.
가을에 잘 어울려 보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6   좋아요 3 | URL
시집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애써보겠습니다. (정갈함과 거리가 멀지만, ㅎ)
이 두 권으로 가을을 잘 버티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26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써야 할 것이 있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벌써 2주가 넘었는데 흑흑.
두 책도 아름답지만 뒤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이 눈에 띕니다!^^
가을은 시의 계절이지요. 시를 잘 읽지는 않는데 사둔 시집이나 좀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4   좋아요 2 | URL
사진은 위장인 거 아시지요? 책장은 가장 어수선한 곳입니다. 화가 님이 사둔 시집, 궁금합니다!

mini74 2022-09-26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 ㅠㅠㅠ 저 막 찔립니다 자목련님 ㅎㅎ 시집들 보니 오랜만에 시집 읽고싶어집니다 *^^*

자목련 2022-09-27 19:13   좋아요 2 | URL
사들이는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요즘 제일 간절합니다. ㅎㅎ
가을을 핑계 삼아 시집을 읽어볼까요?
 

아침 일찍 가을이 도착했다. 도착 시각은 7시 48분, 나는 그때 커피와 배를 먹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운 큰 배는 제법 달았다. 입안에 단 맛이 가득 고였다. 집 안에 있던 나에게 집 밖의 가을이 들어왔다. 친한 언니가 보내준 한 장의 사진에 가을 전부 들어 있었다. 이런 감성을 지닌 언니가 나를 생각해 준 게 고마웠다. 언니가 마주한 가을이 내게 들어왔다. 

아침 일찍 가을이 도착했다. 도착 시각은 7시 48분, 나는 그때 커피와 배를 먹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운 큰 배는 제법 달았다. 입안에 단 맛이 가득 고였다. 집 안에 있던 나에게 집 밖의 가을이 들어왔다. 친한 언니가 보내준 한 장의 사진에 가을 전부 들어 있었다. 이런 감성을 지닌 언니가 나를 생각해 준 게 고마웠다. 언니가 마주한 가을이 내게 들어왔다. 


아마도 쪼그리고 앉아서 가을이라는 글자를 만들었을 언니의 모습을 상상한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언니의 마음은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잡념을 버리고 언니의 내면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과정에 나를 데리고 간 것 같은 기분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기쁨과 설렘, 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삶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마음이 고맙고 좋다. 나도 언니가 보내준 마음을 이렇게 나눌 수 있어 기쁘다.


가을을 선물 받은 아침, 가을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이 사진을 보면서 나는 이런 시를 찾았다. 왠지 잘 어울릴 것 같다. 자연으로의 초대, 혹은 사귐의 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은 시다. 시의 제목은 「소로의 오두막」이다. 제목만으로 자연의 일부가 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월든 호수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는

의자가 세개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찾아오면 의자 두개를 마주 놓고

나그네들이 오면 의자 세개를 다 내놓았다고 합니다

홀로 고독을 즐길 때는 의자가 하나만 필요했겠지요


미루어 짐작건대

소로가 혼자 앉아 있을 때에도

의자 두개가 비어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월든 호숫가 숲속

소로가 혼자 들어가 손수 짓고 살던

한칸 오두막에는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가 세개 있었다고 합니다 ( 「소로의 오두막」, 전문)


가을을 선물 받은 아침을 당신에게도 선물하고 싶다.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하늘과 먼 풍경을 바라보는 그런 하루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마음에도 가을 한 자락, 담아두고 가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하루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당신에게 가을을 허락하면 좋겠다. 가을이 당신 곁에 잠시 머물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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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9-22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런 풍경을 근처에서 마주하기는 어려운 곳에 살지만 매일 아침 높아져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매일 다른 구름 모양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을을 느낍니다. 물론 변덕스러운 기온도 그렇구요. 가을 아침 선물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자목련 2022-09-23 15:5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요즘 하늘이랑 구름이 정말 예뻐요! 기쁘게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무 님, 선물 같은 일상으로 가득하길 바라요^^

책읽는나무 2022-09-22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그렇게 다가왔군요?
곱고 따뜻한 기운의 가을입니다.^^
순간 멈추고 고요해지기도 하구요.
자목려님도 이 가을,
늘 건강하시고 복된 가을 되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09-23 15:57   좋아요 2 | URL
네, 따뜻하고 포근한 가을이에요. 조만간 또 바람이 사나워지는 겨울이 오겠지 생각하면 아쉬워요.
나무 님도 행복하고 평온한 가을 이어가세요^^*

mini74 2022-09-22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예쁘네요. 다람쥐가 우와! 대박이다 하며 주워갔을 상상도 합니다. 다람쥐는 자신도 모르게 가울을 주워갔네요. 사진도 글도 넘 좋아요 *^^*

자목련 2022-09-23 15:57   좋아요 2 | URL
귀여운 다람쥐까지 초대하는 미니 님의 센스!
하늘처럼 맑은 가을로 채우세요^^

프레이야 2022-09-22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배가 엄청 달아요. 도토리 넘 귀여워요.
가을 한 자락 어디다 담아둘까요 오늘^^

자목련 2022-09-23 15:55   좋아요 3 | URL
짧아서 아쉬운 가을, 잘 담아두셨을까요?
프레이야 님의 가을이 풍성하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