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레 겁을 먹는 책이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허먼 멜빌의 『모비 딕』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읽기도 전에 읽을 수 있을까, 읽다가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책. 고래를 잡는 포경선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면 나 같은 독자가 아무런 편견과 기대 없이 『모비 딕』를 읽기에 알맞은 독자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화자 ‘이슈메일’을 따라 나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했다. 살짝 고백하자면 이슈메일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친구 퀴퀘그와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 퀴퀘그만의 의식(피쿼드에서도 그는 대단하다)이 흥미로웠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항해가 아닌 추운 날씨도 모자라 크리스마스에 항해는 시작된다. 이슈메일과 함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모비 딕’에 미친 남자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 가려진 인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에이해브에겐 오직 모비 딕만 중요할 뿐 그 외 에이해브를 구성하는 건 없다. 한쪽 다리를 잃게 만든 모비 딕을 향한 복수,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모비 딕이 그의 인생에 전부라는 말이다. 친절하게 수록된 ‘피쿼드’호의 항해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대서양에서 출발해 희망봉, 인도양, 일본 연해를 지나 태평양에 도달하는 항해 끝에 운명의 모비 딕을 만난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모비 딕을 쫓는 에이해브의 복수심과 욕망, 그리고 피쿼드에 승선한 선원들과 그들을 관찰하고 소설 내내 이슈메일이 설명하는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정리해도 좋을 소설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항해사도 작살잡이도 아닌 포경선이 아닌 상선에만 타봤을 이슈메일은 왜 ‘피쿼드’호에 탑승했고 고래에 집착하는가. 포경선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사건들, 선장 에이해브와 항해사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에이해브를 제외한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향유고래를 잡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고래를 잡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피쿼드 호의 대장은 선장이니 선장 에이해브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기에 넓은 바다에서 다른 포경선과 만나는 이야기, 모비 딕을 만나기 전 고래를 잡고 해부하고 기름을 짜는 이야기, 모든 걸 이슈메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준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고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고래 사전, 고래 설명서, 고래 해부학, 고래 역사서라는 말이 이 소설의 부제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항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역경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났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120쪽)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403쪽)


일정 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에이해브와 모디빅이 언제 만날지가 궁금했고 그 둘의 대결, 그러니까 인간과 고래의 한판 승부를 기다렸다. 망망대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다른 포경선과 만날 때마다 에이해브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흰 고래를 보지 못했소?” 모비 딕을 기다리는 에이해브는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를 떠오르게 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모비 딕을 떠올려야 맞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낱 인간과 거대한 자연이자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모비 딕의 대결이 나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모비 딕』를 향한 다양한 해석과 찬사도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모비 딕을 만났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다. 나는 모비 딕의 결말을 모르기에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팽팽한 대결에 빠져들었다. 에이해브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비 딕이 인간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가 추앙하고 마주하고 싶은 거대한 존재 “눈처럼 하얀 이마와 혹”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모비 딕을 추적하는 하루하루의 생생한 묘사는 압권이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 속 긴장감 가득한 슬픔을 담은 잔인한 아름다움.


적에게 다가갈수록 바다는 더욱 잔잔해져서 물결 위에 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바다는 한낮의 목장처럼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숨죽인 사냥꾼이 아직 낌새를 채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냥감에 바짝 다가가자, 눈부신 혹의 전모가 또렷이 보였다. 그 혹은 독립된 별개의 생물처럼 바다를 헤엄쳐 갔고, 그 주위에서는 양털처럼 고운 초록빛 거품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맴도는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혹 너머에는 살짝 치켜든 대가리에 복잡하게 새겨진 거대한 주름이 보였다. 보드라운 튀르크 양탄자 같은 물결 위에는 그 넓은 우윳빛 이마의 하얀 그림자가 반짝거리며 머리보다 앞서 달렸고, 잔물결은 장단을 맞추어 장난치듯 움직이는 골짜기 속으로 푸른 물이 번갈아 흘러들고 있었다. 양쪽에서 비치는 물거품이 올라와 고래 옆에서 춤을 추었다. (726쪽)


나처럼 지레 겁을 먹고 『모비 딕』 을 두려워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설령 읽다가 멈추면 좀 어떤가. 한 편의 거대한 바다 뮤지컬 같은 소설, 바다라는 무대 위에 ‘피쿼드’ 승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비 딕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대신 돌아올 수 있고 원하는 순간 바로 ‘피쿼드’에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모비 딕과 에이해브의 목숨을 건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이해브에겐 항해 목표이자 삶의 목표였던 간절히 바랐던 모비 딕과 조우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에이해브의 집착은 고래를 향한 이슈메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건 하먼 멜빌의 고래를 향한 위대한 집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 놀라운 수고와 대단한 노력 덕분에 이제라도 『모비 딕』 을 만났고 흰 고래를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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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5-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드뎌 모비딕을 읽으셨군요! 뿌듯한 독서였을 거 같아요.
퀴퀘그하고 알콩달콩 재밌죠? ㅋㅋㅋ 둘이 그냥 결혼해라~!!
저는 에이헤브가(이런 인간 유형이) 싫어요;;;

책읽는나무 2024-05-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모비딕 완독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겁을 먹고 있는 독자라 선뜻 구입하기에도 좀 망설여지는 책이었는데...괜찮다고 다독여주시니...언제 한 번 용기내 보아야겠어요.^^

새파랑 2024-05-0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도 드디어 읽으셨군요~!!
인간의 복수심과 맹목성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수 있는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마지막 싸움을 위한 빌드업이 좀 길긴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stella.K 2024-05-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인데 막상 읽어 본 사람들은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책이야 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잃시찾도 그렇다고 하던데. ㅋ
근데 같은 책을 두 권이나 갖고 계시는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4월의 책 목록을 살펴보았다. 읽은 책, 산책, 리뷰를 쓴 책, 리뷰를 쓰지 못한 책. 모든 책들이 줄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만 늘고 있다. 좋았던 구절을 발췌하고 메모 형태로 임시 저장을 해두었다. 임시 저장은 임시 저장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글, 내가 보살펴야 하는 글이다.


책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5월이니 5월의 소설을 기대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그를 몰랐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의 책도 읽고 리뷰를 쓰지 못한 책에 속한다. 아무렴 상관없다. 이번엔 소설이다. 『마지막 욕망』 은 읽고 리뷰를 쓰고 싶다. 이주란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은 5월의 붉음을 닮은 표지다. 왠지 5월과 잘 어울릴 것 같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5월의 소설에 김이설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도 추가될 것이다.





4월이 봄의 끝이었다면 5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5월이 봄이었던 기억은 저기 멀이 있다. 반소매 옷을 입기 시작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송홧가루의 습격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들이다. 샛노란 가루가 멀리 퍼진다. 꽃가루가 닿는 곳, 먼 그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생명이 잉태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의 5월은 분주할 것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할 것이고 영글어가는 마늘의 마늘종을 뽑을 것이다. 그럼 나는 맛있는 마늘종 볶음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5월에는 작약을 주문해야지. 작약을 곁에 두고 매일매일 조금씩 행복해야지. 5월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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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2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구매했습니다 ~!!
표지가 기존 시리즈랑 좀 달라서 아쉽습니다ㅡㅡ
완전 기대중입니다 ㅋㅋ

자목련 2024-05-02 14:15   좋아요 1 | URL
표지는 저도 그랬어요^^
새파랑 님은 바로 읽으실 것 같습니다!

blanca 2024-05-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작약이 저도 기다려집니다. ^^

자목련 2024-05-03 09:47   좋아요 0 | URL
연휴 지나고 주문하려고 합니다^^

잠자냥 2024-05-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책 바로 받았습니다~!!
가벼운 마음도 저 표지로 바뀐 거 같더라고요?!

라파엘 2024-05-02 21:52   좋아요 0 | URL
표지의 통일성이 훼손되어서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드네요. 일관성 있는 질서를 추구하는 게 저의 마지막 욕망인 것 같아요... 😅

라파엘 2024-05-02 22:1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자냥님 말씀대로 이 작품과 가벼운 마음만 새로운 표지가 적용된다면, 출판사에서 보뱅의 작품 표지를 소설과 에세이로 구분해서 출판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네요 🤔

자목련 2024-05-03 09:49   좋아요 1 | URL
어쩌면 라파엘 님의 말씀처럼 출판사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기존 표지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책의 날이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책을 샀다. 예전처럼, 열심히 읽고 쓰지는 못해도 여전히 책은 좋다. 아, 그 예전은 언제인가.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인가.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 어디쯤 있다고 나를 위로하자. 책은 좋고 그중에서도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 가운데에서도 한국문학으로 마음이 기운다. 책의 날에 곁에 둔 책은 이렇다.


김미월의 소설은 오랜만이다. 『일주일의 세계』란 제목만 보고는 잘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을 검색하지 않았다. 중고로 구매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 대한 신뢰 같은 거라고 하면 되겠다. 나머지 한 권은 최진영의 『오로라』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위픽 시리즈다. 첫 번째가 최진영의 소설이다. 80쪽 분량의 소설, 가격을 생각하면 높게 책정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권의 책값이 매겨지는 과정을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적당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으로 위픽 시리즈를 계속 만날지는 이 소설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읽기를 시작한 책은 없다. 현재 읽고 있는 소설은 『모비딕』이다. 계획대로라면 다 읽고 리뷰까지 끝내야 하는데, 이런저런 사정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계획은 수정되고 수정되었다. 책의 날에 읽는 소설, 분량에 어마어마하다. 아직 출항 전이다. 빨리 출항을 해서 나도 바다를 만나고 싶다. 책의 날이 책을 읽어야지, 책의 날이니 책을 생각해야지, 책의 날이니 책에 대해 써야지. 책의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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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4-2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을 보고 제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암튼 저도 꾸역꾸역 책도 사고 읽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열정(?)적인
독서의 시간은 갖지 못하는 게 아닌가
뭐 그렇습니다.

오늘 연세대에 편지 부치러 갔었는데
도서관 지하에서 창비 책 판매행사를
하더군요. 뭐 살 게 있나 싶었지만,
살만한 책들은 모두 가지고 있더라는.

그래도 책의 날이니 뭐라도 한 권 사
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자목련 2024-04-25 09:04   좋아요 0 | URL
제가 잘 낚은 건가요? ㅎㅎ

책의 날이라는 좋은 핑계 덕분에 책을 사도 좋았을 날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근데, 저는 레삭매냐 님 베란다의 튤립 소식도 궁금해요!
바쁘시겠지만 소식 좀 전해주세요^^

새파랑 2024-04-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로라>를 너무 좋게 읽어서 저 가격이 전혀 아깝지가 않더라구요~!!

<모비딕> 자목련님의 감상평이 기대됩니다~!!!

자목련 2024-04-25 09:04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 좋았다고 하셔서 <오로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이유도 있습니다. ㅎ
 

3월엔 가까이 지내는 선배 언니의 생일이 있었다. 책과 커피만큼 완벽한 선물도 없거니와 선배 언니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나도 커피를 주문했다. 매번 책만 사건 아니다. 실은 3월과 4월엔 소비가 많았다. 어떤 건 충동적으로 어떤 것 미리 계획한 구매였다.


커피는 충동적이고도 계획적이다. 배송료와 사라지는 적립금이 아까워 책도 한 권 샀다. 커피가 좋아서, 커피가 도착할 때까지 커피를 생각한다.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기다리는 것같은 느낌은 과하지만 그런 비슷한 감정이다. 원두를 갈아서 직접 내리면 좋겠지만 이런 드립백으로도 진한 커피향을 느낄 수 있느니 충분하다. 커피가 좋아서, 카페에는 안 가도 집에서 커피를 즐긴다. 아침에 삶을 달걀과 마시는 커피가 좋다.


기분 좋은 꽃향기와 살구의 부드러운 산미와 단맛이 좋은 커피라고 알라딘이 광고하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할로 베리티와 무민과 즐기는 풍성한 드립백 7종 세트. 12개의 드립백으로 커피를 마신다. 사실, 각각의 커피 맛을 구분하거나 선호하는 하나의 커피가 있는 건 아니다. 그만큼 커피에 대해 잘 모른다. 좋아하지만 잘 모른다.







아무려나 커피가 좋으면 그만이다. 무민과 즐기는 풍성한 드립백 7종 세트는 이렇게 펼치고 보니 넘 예쁘지 않은가. 좋아하는 이가 곁에 있다면 슬그머니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주고 싶다. 어린 시절 사탕이나 캐러멜 같은 건 친구 손에 쥐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좋아하는 이가 커피를 좋아해야 할 것이다.






골라 마시는 즐거움, 그 중에 더 좋아하는 커피를 발견하게 될 즐거움이 있다. 커피라 좋아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가 좋아서 커피를 샀다. 커피가 좋아서 이렇게 커피를 쓴다. 커피가 좋아서 알라딘도 좋아한다. 맞나? 알라딘은 모르는 알라딘 홍보대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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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은 ‘시간’이라는 체로 걸러진 일종의 사금이다. 무엇이 명작이고 무엇이 고전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시간이다. 시간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은 던져버리고 명작이라는 알맹이만 우리에게 남겨준다. 고전소설이 보여주는 당시 사회 모습과 그 이후에 사회가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시대를 공부하고 이해하게 된다. (프롤로그, 16쪽)


선뜻 골라 읽기 어려운 문학이 있다. 바로 고전과 세계문학이다. 사진 속 내 책장의 세계문학도 그렇다. 기필코 읽겠다고 사둔 책들, 방송에서 명사나 드라마 소개로 더 궁금했던 책들이다. 하지만 작정하지 않으면 읽기 어렵다. 왜 그런 것일까. 한편으로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과 현재가 아닌 다른 시대의 삶에 대한 이해 부족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이름만 앍고 작품은 읽지 못한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 그런 이유로 세계문학에 주저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가 있다. 박균호의 『세계문학 필독서 50』 가 그것이다. ‘셰익스피어에서 하루키까지 세계 문학 명저 50권을 한 권에’란 부제가 말하듯이 이 한 권으로 세계문학의 명저를 만날 수 있다.


우선 목차를 살피게 된다. 아마도 나 같은 독자가 많을 것이다. 내가 읽은 책을 찾는 일, 누군가 골라둔 50권에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이상하지 않은가. 독서란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내밀한 것인데 그럼에도 훌륭한 소설, 추천하는 소설을 읽기를 바라기 마음 때문이다. 저마다 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누군가 딴지를 걸 수도 있다. 문학을, 그것도 고전을 찾아읽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말이다.




저자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시작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등 50권의 소설에 대해 작가의 이력과 소설 집필 당시의 사회적 배경, 소설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재미있는 소설, 다양한 문화와 사회상을 담은 소설, 새로운 사상이나 사회 변혁운동의 실마리를 제공한 소설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과 문화, 부조리한 사회고발, 그 모든 게 한 권의 소설에 담겼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어떤 소설이든 소설 속 인물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놀라운 건 그들의 고뇌가 현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하층 계층의 삶, 기득권의 횡포, 약자와 소수를 향한 차별의 문제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그러니 위고의 《레미제라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피츠제럴드는 순수한 이상을 망각하고 오로지 경제적 성공감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1920년대 미국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 화려함 속에서 스스로 타기를 주저하지 않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 움트는 사랑과 순수성이 파도와 같이 밀려들며 밀려나가는 소설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다. (106~107쪽)






《호밀밭의 파수꾼》은 강압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에 반기를 들고 혁명가나 방랑자적 기질을 자신 비트 세대의 정서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비트 세대는 홀든처럼 책과 문학을 좋아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은 산업화가 진행되기 전 시절의 자연, 인간의 존엄성, 긍정적인 세계관을 추구했다. 기성세대의 가치에 순응하지 않는 홀든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획일화에 저항하는 비트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49쪽)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책의 즐거움은 한 권의 책을 다각도로 마주하는 흥미로움이다. 가령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닿을 수 없는 인간 심연에 대해서만 집중했다면 저자는 '메이지 정신', 일본식 제국주의의 흔적에 대해 언급하다. 소설 속 K의 자살이 단순 사랑의 비애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고 나면 소설을 더 풍부하게 일을 수 있다. 거인국과 소인국이 등장하는 동화로 인식했던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치졸함을 묘사한 소설이라니. 그뿐인가. 《돈키호테》를 쓴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전쟁에 참전하여 왼팔이 부러지고 가슴뼈와 치아가 부러졌음에도 4년이나 더 참전한 사람인 줄 몰랐다. 스페인의 많은 독자들이 기사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도 몰랐다. 호탕한 기사 돈키호테와 늙은 말 로시난테의 모험기로만 알았으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평생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고 그 빚 때문에 엄청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발자크. 발자크와 커피에 대한 부분이나 《마담 보바리》가 출간되고 재판에 넘겨졌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플로베르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 무죄를 받았다는 내용도 재미있다.


발자크에게 커피는 검은 석유였다. 발자크라는 엄청난 글쓰기 기계를 작동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커피 포터도 함께였다. 그는 커피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했으며 커피를 타는 성스러운 작업을 그 구누에게도 맡기지 않고 직접했다. (273~274쪽)


『세계문학 필독서 50』를 읽고 나면 이전에 읽었던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카프카, 하루키의 소설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나처럼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것이다. 아프리카 문학이나 출신 작가의 소설이 없다는 게 살짝 아쉽지만 나만의 세계문학 목록을 작성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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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4-04-04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이 부분은 꼭 재미나게 읽어주는 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부분을 콕 찝어서 말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걸인의 책을 왕후의 서평으로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오후 되시길 바래요 .

자목련 2024-04-05 08:52   좋아요 1 | URL
제가 만나지 못한 책들의 정리를 통해 나만의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던 책이고요.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꼬마요정 2024-04-0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때론 고전이란 책들이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면 너무 좋은 작품들이 있더라구요. 시간이 지나 여전히 읽히는 책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상황에서 각자의 느낌이 다 다르지만 감동 받는다는 게 정말... 멋진 일이네요. 하지만 또 그만큼 사회의 부조리나 개인의 아픔, 혹은 개인의 기쁨이나 가족의 사랑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자목련 2024-04-05 08: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책과의 만남에도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나만의 책읽기, 나만의 감정과 생각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꼬마요정 님, 환하고 빛난 금요일 이어가세요^^

Falstaff 2024-04-04 17: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목차만 둘러봤는데요, 말씀대로 아프리카(= 식민지 문학)와 라틴 아메리카 작품이 한 편도 들어있지 않고, 진짜 고전이라고 하는 그리스 문학도 빠졌더군요. 소포클레스나 호메로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들어 있어야 할 거 같았습니다. 일본 작가가 여섯 명이나 들어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될까?˝ ㅎㅎㅎ 바늘처럼 콕 찔리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자목련 2024-04-05 08:55   좋아요 1 | URL
모든 책은 주관적인 기록이자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읽은 책이 몇 권 없어도, 설령 한 권도 없다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닐까요?
Falstaff 님은 이미 풍부한 Falstaff 님의 기록이 있으니까요!

구단씨 2024-04-0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문학 해설서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저도 항상 고전이나 세계 문학 많이 읽고 싶고, 그 안의 메시지 확인하면서 인생에 적용하여 살아가면 더 값지겠구나 싶었는데,
현실은 고전이 마냥 가까운 작품들은 아니었네요. ㅎㅎㅎ
궁금했던 책인데, 고전이 궁금하지만 다 읽을 수 없을 때 특히 더 펼쳐보고 싶어질 것 같아요.

구단씨 2024-04-04 20:13   좋아요 1 | URL
아하~!!!
숨어 있는 재미라니, 고전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것 같아요! ^^
설명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4-04-05 08:56   좋아요 1 | URL
네, 끌리는 대로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화창한 봄, 즐겁게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