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었다. 겨우 선풍기 하나만 정리했고 붙박이장에 넣어두려던 제습기는 어제 다시 사용했다. 태풍 11호 ‘힌남노’의 힘이 세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바람이 무서웠다. 창문을 닫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에 깨고 말았다. 스마트폰으로 태풍의 경로와 내가 사는 지방의 날씨를 확인했다. 다시 잠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고요한 마음을 지키려고 해도 마음이 요란하게 요동친다. 


8월의 마음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그 마음과 나는 좀처럼 분리가 되지 않는다. 9월이니 9월의 마음이 필요한데 도통 새로운 마음이 자라지 않는다. 달마다 새로운 마음이 자라고 키울 수 있으며 좋겠다는 생각이다. 매달 지정된 마음이 내게 도착해도 좋을 지경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은 가까이 지내며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제 오후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어려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다만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생각할 뿐이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지만 막연하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차이가 크다. 내게 맑고 잔잔한 9월의 마음이 필요하듯 친구에게도 평온하고 보드라운 9월의 마음이 필요하다. 


9월은 어떤 마음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 저마다 애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위해 내게 9월의 소설도 필요하다. 소설이 불러올 다른 마음이 나의 9월의 마음을 다스려줄 수도 있다고 믿으니까. 때로는 한 권의 소설 속 하나의 문장이 그런 힘을 불러온다. 





9월의 소설은 공교롭게도 작가의 이름부터 기쁨과 기대를 안겨준다. 장편소설 『자두』로 만나 이주혜의 단편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단편집 『어젯밤』을 읽고 반해버린 제임스 설터의 장편 『고독한 얼굴』, 문장 하나하나 너무 아름다워 읽는 게 아까울 정도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 『가벼운 마음』, 보뱅의 소설은 처음이라 설렘이 크다.












‘힌남노’가 지나간 하늘은 더없이 맑고 선명하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냉큼 잡고 싶은 구름이다. 9월에 냉큼 잡고 싶은 마음도 이런 걸까. 8월에는 숨어 있어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었던 맑고 선명한 마음 말이다. 9월에 지니고 싶은 마음, 전부는 아니더라도 맑고 선명한 마음을 가끔씩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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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9-0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세 권 중에 어떤 책이 자목력님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기대됩니다. 저는 소설 읽기 소강 상태라 그만큼 스마트폰을 보게 되네요. 다음 페이퍼 기다렸다 자목력님 추천하시는 책을 읽어볼까요...

자목련 2022-09-07 15:53   좋아요 0 | URL
설터의 장편도 기대가 되고 이주혜의 단편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요. 블랑카 님의 댓글로 즐겁게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열심히 읽어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마음, 급 땡기네요.

보뱅의 다른 책들도 검색해봤습니다.
신간이 도서관이 비치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목련 2022-09-07 15:51   좋아요 1 | URL
보뱅의 에세이는 완전 추천하는데 이 소설은 아직 읽기 전이라 모르겠어요.
소설도 좋을까 궁금해서 구매했는데 읽기는 아직이라서요. ㅎ

레삭매냐 2022-09-07 16:05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고 나서 어제
도서관에 가서 구판 <인간, 즐거움>
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가벼운 마음> 오늘 교보에 가서
샀습니다. 추석 때 읽을라구요.

바람돌이 2022-09-0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에게도 친구분에게도 얼른 9월의 마음이 찾아와 평안하시길요.
우리 마음도 쉽게 쉽게 리셋이 되면 좀 편안할텐데 늘 쉽지 않네요.

자목련 2022-09-07 15:5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댓글에 평온이 전해집니다. 감사해요.
원할 때마다 리셋되는 마음이면 좋을 것 같아요.

희선 2022-09-07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분은 자목련 님한테 힘든 일을 말한 것만으로도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희선

자목련 2022-09-07 15:48   좋아요 0 | URL
희선 님 말씀처럼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맑은 오후 이어가세요^^
 

약하든 강하든, 영리하든, 단순하든, 우리는 모두 형제요.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오. 모든 동물은 평등하오. (42쪽)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먼저 만났다. 조카를 위해 골랐던 고전과 세계문학의 목록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소설은 모두가 알다시피 우화다. 매너 농장 주인 존스를 내쫓고 동물들이 실질적인 농장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 시대를 풍자한 소설로 당시 러시아(소련)의 스탈린 시대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스탈린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차치하고도 필독서로 꼽히는 이유는 어느 시대든 통렬한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스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 꿈에 대해 말하던 메이저 영감은 혁명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물들의 봉기는 성공했다. 젊고 영리한 수퇘지 나폴레옹과 스노볼을 필두로 농장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다.‘매너 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바뀌는 순간 동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기대했을 것이다. 규제가 아닌 자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때부터 정치가 시작된다. 모든 건 정치적이라는 말처럼 나폴레옹의 정치가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대척점에 있던 스노볼은 나폴레옹과는 다르게 동물농장을 이끌기를 원했다. 동장의 다른 동물들과 조직해서 ‘동물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규칙 같은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그런 활동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통치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눈치챈 동물은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농장에는 많은 것들이 부족해졌다.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스노볼은 풍차를 만들기로 한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스노볼의 풍차에 찬성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풍차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나폴레옹의 고음을 신호로 개가 들이닥쳤고 스노볼은 동장에서 쫓겨났다. 나폴레옹이 남모르게 다른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개를 사육했다. 더 이상 토론은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게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로 흘러갔다. 가장 성실한 일꾼인 말 복서는 더 열심히 일했고 암탉은 더 많은 알을 낳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무시했던 풍차를 다시 만들었고 농장은 부유해졌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때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 사이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만 말하지 못할 뿐이다. 글자를 배우지 못해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다. 


동물 농장은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맨 꼭대기에는 돼지 나폴레옹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정보를 독점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소문을 퍼트렸다. 동물농장은 강자인 돼지들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들 곁에는 개가 있었다. 소설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과 독재자의 횡포를 그대로 보여준다. 각각의 동물은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 모습이다. 병들 때까지 일만 하던 말 복서는 노동자의 표본이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복서의 모습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모두 똑같았다. 돼지들의 얼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그리고 다시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시선을 움직였다. 누가 누군지 이미 분간할 수가 없었다. (150쪽)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는 돼지, 침대에서 자는 돼지, 술을 마시는 돼지는 그들이 혁명을 부르짖던 과거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평등과 차별 없는 사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사회이든 반드시 정치와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으로 만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서문이 아니더라도 현재 러시와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국제사회의 흐름과 자원을 무기 삼아 국가적 지위를 내세우는 나라들의 행동을 소설 속 나폴레옹의 횡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공존과 연대의 미래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것 같아 두렵다. 소설 속 당나귀 벤자민의 말처럼 굶주림, 고생, 낙담이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 될까 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이 지금보다 한결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굶주림, 고생, 낙담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141쪽)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좋은 책이니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폴레옹은 누구일까,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라진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동물들이 제게 힘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녀석에게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과 부자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방식이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이 작품에 대해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이 소설이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한다면 실패작이다.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실제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여러 일화들을 가져왔지만 이 소설에는 개략적으로만 사용했으며 시간적인 순서도 실제와 다르게 바꿔놓았다. 이야기의 균형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아마도 내가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탓인 듯하다.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이 소설이 돼지와 인간의 완전한 화해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을 독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커다랗게 울리는 불협화음 속에서 소설을 끝내려고 했다. (29~30쪽, 우크라이나어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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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서재에 가끔 그냥 고냥님 보러 오곤 합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자목련 2022-10-08 13:52   좋아요 1 | URL
냥이는 사진 속에만 존재해요. 오빠네 집에서 사라져버렸어요. ㅠ.ㅠ

서니데이 2022-10-07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22-10-08 13:52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저도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즐거운 시간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10-07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2-10-08 13:5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맑은 하루 보내세요^^
 

지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몇 시간 전에는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한낮인데 깊은 밤인 것 같았다. 무섭기도 했고 어딘가 사람들이 또 이 비에 피해를 입거나 다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비는 많은 생각을 몰고 온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상념의 시간이 이어진다. 해결해야 할 일의 맨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찾기 위해 그것을 알고자 생각하고 생각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몰라서 모든 걸 끌어안고 걱정하는 건 우습지만 연속해서 불운한 일들이 닥치면 결국 그 모든 걸 끌어안게 된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피고 들어가 보면 ‘불운’이라 이름 붙인 그 시작은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이다. 단 한 번의 요행을 바라거나 누군가의 간절함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는 일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걸 인식하는 게 어렵기에 회피하고 외면한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속상함에 파묻히는 건 어리석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나가아야 한다. 상담을 하거나 의견을 묻는다 해도 딱히 해결할 수 없는 분야의 일. 완벽한 답을 구할 수 없다. 인식의 힘이 필요하다. 부족한 인식의 힘을 기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다. 나를 인식하는 일,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절실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일이 시작이다.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일. 불운하거나 불행하다며 불평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로도 괜찮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걸 주입하는 건 나쁘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한다. 단순하게 판단하라는 게 아니다. 일의 본질은 결국 단순함이니까. 매달려있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집중하되 차분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일의 순서와 수집할 정보의 목록을 작성한다. 완료된 목록을 하나씩 지우는 일은 즐겁다. 그리고 환기가 필요하다. 심각성을 떠나 힘든 일에 함몰되어 절망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다.





충동적인 소비가 좋을 때가 있다. 책을 구매하는 경우가 그렇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책을 읽는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신간이라고 해서 다 그때 바로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신간을 바로 읽을 때 그만의 즐거움이 있다. 집중 독서를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책은 언제나 좋다. 그래서 책을 샀다. 책을 읽는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로 살기 위해서. 너무 거창한 이유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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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사용하는 인터넷 요금에 대해 문의할 일이 있어 콜센터와 통화를 시도했다. 요즘은 직원이 아닌 AI가 먼저 안내를 시작한다. 차분히 하라는 대로 했지만 결국 통화를 하지 못했고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한 번에 연결되기란 어렵다는 걸 알기에 재차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눌렀다. 기억이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상담원과 통화를 하기까지 10여 분의 대기 시간이 걸렸다. 홈페이지, 메일, ARS, 일대일 채팅까지 다양한 경로로 소비자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해결하지만 직원과 직접 통화를 해야만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다. MZ 세대가 아니라서 그럴까. 여전히 나는 사람과 통화하는 게 제일 편한다. 


‘9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인 이예은의 에세이 『콜센터의 말』을 읽기도 전에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콜센터에서 일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저자가 경험한 일들이 궁금하면서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걱정하게 되는 건 콜센터의 업무의 특수성을 알아서다. 불특정 다수와 통화를 하면서 그들의 불만사항을 접수하면서도 고객의 입장이 아닌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 무자비한 언어폭력은 물론이며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인간과 마주하는 일 말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콜센터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저자가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서 2020년 1월부터 1년 반 동안 근무하면서 겪었던 이야기와 그 안에서 건져올린 말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시기, 여행사라는 특수성을 생각하면 콜센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하지 못했던 터라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말과 다르게 일본 말의 고유한 뜻과 사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에 대한 이해와 기본적인 일본어를 배우는 이라면 작은 도움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통해 콜센터 상담원이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기분과 감정은 배제된 업무만을 위한 말이었다. 일본이라는 걸 떠올려도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히 유감이지만’,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콜센터가 아닌 일상에서도 습관처럼 튀어나올 것 같다. 일본에서는 고객과 상담을 시작할 때 이름이 아닌 성을 말하는 점은 이름 전체를 말하는 한국의 콜센터와 달라 인상적이었다. 


비대면의 시대를 연 코로나 시대의 말로 콜센터의 많은 직원이 정리해고를 당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부득이하게’가 무척 아프게 다가왔다. 여행업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을 그만두는 이들과 남게 된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들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저자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고 ‘일본인 바꿔 주세요’ 란 말이나 직원을 하대하는 ‘야, 너’라는 말은 아무리 고객이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고객이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가 콜센터기에 직원이 감당해야 할 말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고객의 입장에서 그걸 알면서도 불편사항을 말해야 하는 창구라서 감정 조절이 어려웠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최대한 차분하게 나의 상황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불만이 터져 나왔을 테니까. 


콜센터에서 일하는 내내 사무친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지구라는 행성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보통’의 정의 또한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을 전부 이해하려 들어선 안 된다. 어차피 그들도 나를 다 이해하지 못할 테니. 내 기준에서 누군가가 비상식적이라면 그 사람의 눈에는 내가 비상식적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이상하고 어긋나 있지만, 어떻게든 부대끼며 살아간다. (140쪽)


저자는 에세이를 통해 콜센터의 일상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지만 고객을 응대하면서 느꼈을 복잡한 감정과 스트레스가 전해졌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생각한다. 그 말들이 불만이 담긴 항의와 요구사항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다. 아무리 직업이라 해도 한 번쯤 그들의 고충을 생각하다면 조금 늦은 답변에도 편하게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점만 기억해도 훨씬 나을 테니까. 


말이 주는 힘을 생각한다. 업무적인 말이든 사적인 말이든, 감정이 담겼던 그렇지 않든 혼잣말이 아닌 이상 말은 누군가에게 닿는다. 저자의 바람처럼 그 말이 상처와 아픔이 아니라 위로와 공감을 주는 말이라면 좋을 것이다. 나의 말이 그렇기를 바란다. 부드러운 온기로 채워진 말이 당신에게 안착하기를.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상처 주려는 말보다 보듬고 북돋아주려는 말이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때로는 회상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기억을 모아 기어코 한 권의 책을 완성한 것은, 단지 이 말이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196쪽)


덧붙이자면 주인공이 카드사 상담원이었던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김의경의 소설 『콜센터』를 함께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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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8-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회사에서 업무상 콜센터에 전화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에이아
이가 타라~ 등장하면 왠지 거북
살스럽더라구요.

역시나 사람하고 해결을 해야 속
이 씨원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감정노동자들의
고충도 이해가 되구요 흠...

자목련 2022-08-04 11:02   좋아요 0 | URL
네, 무작위로 걸려오는 통화에 스트레스가 심할 것도 같아요.
그럼에도 저 역시 민원상담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날이 많이 덥습니다. 건강 잘 챙시기시고 시원한 여름 이어가세요^^
 

책은 세상을 배우는 좋은 교재다. 특히 문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심연에 가닿을 수록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 나와는 다른 삶, 삶의 다양성과 인간 본연에 대해 알아간다. 어떤 책을 읽느냐는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우스갯소리로 정치적 성향만큼이나 예민하다. 그렇기에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북클럽은 의미 있는 활동이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들, 느끼지 못한 것들을 교환할 수 있다. 북클럽의 즐거움이다. 


여기 단 두 명의 구성원으로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운영된 북클럽이 있다. 2002년 『파이 이야기』로 맨 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은 당시 캐나다 수상 스티븐 하퍼에게 북클럽을 제안한다. 일방적인 제안이다. 격주로 수상에게 책을 보내며 책을 보낸 이유와 책에 대한 내용과 느낌을 편지로 보낸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든 수상의 답장은 받지 못한다. 형식적인 내용의 보좌관의 편지만 7통 받을 뿐이다.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는 작가가 추천한 101권의 책을 만나는 즐거움과 동시에 문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우선 101권의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시작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그가 추천한 순서대로 읽는 게 가장 좋을 수도 있겠지만 끌리는 책부터 먼저 읽어도 나쁘지 않다. 소설, 시, 희곡, 동화, 종교서, 그래픽 노블, 오디오북 등 다양하다. 독서 에세이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책이다. 아무렴, 한 나라의 수상에게 추천하는 책인데 그럴 리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책을 읽겠지만 일반 독자에게 유명 작가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읽은 책은 한 번쯤 궁금하기 마련이다. 여름휴가에 대통령이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만큼 한 권의 책이 주는 영향력은 크다. 점점 영상에 밀려서 책 읽기의 본질이 훼손되는 요즘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에서 얀 마텔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수상 한 사람을 위한 책 목록이지만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책에 대한 얀 마텔의 생각, 문학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피력하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처럼 말이다. 내용이 잘 알려진 책에 대해서 어떤 편견이나 목적을 지니고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읽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어떤 책이든 하나의 주제로 축약할 수는 없습니다. 책의 위대함은 읽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 책이 어떤 문제를 다루려고 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Book 2 『동물농장』 조지오 웰, 47쪽)


한 권의 책에 대해 말해야 할 것들은 다양하니까. 작가가 자란 환경이나 이력,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를 다뤘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만화책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주 중요하다. 역사는 지루하고 어려운 분야라는 현 세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책이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민주 항쟁을 다룬 책 가운데 최규석의 『100℃』이 떠오르는 이유다. 


어떤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야기들이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Book 12 『쥐』아트 슈피겔만, 104쪽)


특히 좋았던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대한 언급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소개하면서 그가 울프를 정의한 부분은 울프를 처음 만나는 독자나 그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독자에게 그의 소설을 읽은 방법을 해설자가 된 것처럼 소개한다. 같은 맥락으로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 대한 부분도 그러하다. 소설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건 재미도 있지만 그 안의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사유를 발견하는 기쁨이라는 걸 알려준다. 


울프는 정신을 탐구합니다. 즉 의식이 현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탐구합니다. 그에 대한 울프의 경험은 수상님께도 낯설지 않을 것이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온갖 방해와 싸우려고 의도된 것입니다. 울프의 등장인물들은 생각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원인이 외부에 있는 사건들 ㅡ 다른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경우 ㅡ로 인해서, 혹은 내면적인 이유로 정신을 딴 데 팔게 되면서 끊임없이 중단됩니다. (…) 울프가 『등대로』에서 탐구하는 것은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걸러내는 정신입니다. (Book 27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186쪽)


먼로가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먼로는 평범한 것들에서 본연의 생동감을 되살려낼 뿐입니다. 그녀는 삶을 갈가리 찢어놓은 엄청난 격변보다,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Book 58 『떠남』 앨리스 먼로, 373쪽)


101권 가운데 신간 홍보를 위한 일정으로 바쁜 얀 마텔을 대신해 다른 작가가 추천하는 부분도 흥미롭고 당시 캐나다에서 예술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인 정책에 대해 항의하듯 보이는 추천글에서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전해졌다. 국가에서 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할까. 비단 캐나다뿐 아니라 예산 삭감이나 정책의 방향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예술을 같은 잣대에 올린 수 없다는 얀 마텔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아울러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수상님도 아시겠지만, 예술과 정치에서 타협의 가치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타협한 예술가는 실패자로 낙인찍힐 수 있지만, 타협한 정치인은 성공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정치가 타협의 예술이라면, 예술은 타협이 허용되지 않는 정치입니다. 예술은 그런 자유로움에서, 그런 개별성에서 샘솟기 때문입니다. 타협하고 순응하며 쉽게 굴복하는 마음가짐은 창조적인 충동을 억누릅니다. 진정한 예술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Book 93 『시 선집』 예브게니 옙투셴코, 586쪽)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중에서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얀 마텔의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이유를 포함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바쁜 현대인에게 문학 읽기를 강요할 수도 없고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속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도 저마다의 문학 리스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을 통해 놀라고 놓친 책들이 많아서 속상하다.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좋은 책은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쌓이고 늘어난다. 희곡이나 시선집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익숙해서 직접 읽어야 할까 싶었던 책들도 직접 읽어야만 내 것이 된다는 걸 느낀다. 


어떤 책이든 우리에게 다른 삶을 살게 해주며, 다른 이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르쳐줍니다. 어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가동되지 않은 지식 ㅡ 가령 총의 이름 ㅡ 을 얻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어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Book 15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지닛 윈터슨, 116쪽)


책을 읽으며 평정한 마음에 빠져들면 외부 세계의 소음과 혼란이 사라지고 차단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와 대화를 시작해서 이런저런 의문을 제기하고 적절한 답을 찾아내고,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감정을 차분하게 평가합니다. 따라서 독서는 우리에게 다시 자유롭게 자아에 집중하도록 용기와 기운을 북돋워주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다음에 할 일을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줍니다.(Book 39 『미스터 핍』 로이드 존스, 262쪽)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에게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는 친절하고 다정한 편지다. 이런저런 변명과 핑계로 문학의 숲 앞만 서성이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가 기다리는 답장은 친히 안내한 문학의 숲으로 진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가 소개한 책 가운데 읽고 싶은 책 목록과 책장에 잠든 책을 깨우는 시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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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자목련 2022-09-09 10:39   좋아요 1 | URL
♥♥♥~~

그레이스 2022-09-08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9-09 10:40   좋아요 1 | URL
♥♥♥^^*

얄라알라 2022-09-08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2관왕!! 더블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9-09 10:41   좋아요 1 | URL
더불의 축하,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님, 행복하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9-0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22-09-09 10:41   좋아요 2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