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아는 나이가 오긴 할까. 그런 기대를 갖고 살아도 괜찮을까. 일정 나이가 되면 모든 걸 다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 같은 걸 품고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숨기고 사는 일이 상대에게는 괜찮은 걸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 숨겨왔던 나의 상처와 조금씩 대면할 수 있는 것, 이곳으로 오기 위해 떠나왔던 그곳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 인생은 정말 알 수 없고 쉬운 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는 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은 앞에 언급한 그런 것들로 채워진 소설이다.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무엇인지, 버려야만 했던 것들이 무언인지.


루시가 자신의 첫 번째 남편 윌리엄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퍼즐의 조각으로 지난 삶을 반추한다.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살아왔는지 왜 서로를 떠나 이별했고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담담하게 들려준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이 단지 두 사람만의 만남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루시와 윌리엄도 그랬다. 세계는 하나로 합쳐질 수 있고 충돌할 수 있다. 그리하여 루시와 윌리엄은 이혼했다. 루시와 오랫동안 살았던 두 번째 남편 데이비드는 죽고 없다. 윌리엄에게는 세 번째 아내가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있고 상처가 회복된 건 아니지만 각자의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지속했다. 이상하게도 루시에게 윌리엄은 유일한 집이었고 윌리엄에게 루시는 자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노년의 나이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을까 싶은 정도로 소설 속 루시와 윌리엄은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그러니 윌리엄의 세 번째 아내가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갔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은 루시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나이를 먹고 살 만큼 살았다 해도 치유될 수 없는 상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이는 얼마 없다. 그저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상처를 꺼내 실체와 마주하는 일은 지우고 싶었던 과거,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일부와 대면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게 삶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윌리엄이 돌아가신 어머니 캐서린에 대해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루시가 떠나온 고향(특히 어머니)의 모든 것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우리를 과거의 한 지점으로 불러 모은다. 저마다의 상처, 혹은 환희의 순간이다. 소설에선 윌리엄이 세 번째 아내에게 받은 ‘조상찾기’가 그 매개체다. 자신에게 이부누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루시와 동행하는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게 된다. 꽁꽁 숨기려 감추었던 내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슬픔의 덩어리들. 철저하게 차단하고 선을 긋고 싶은 지점,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인간의 처절한 간절함에 대해. 


우아하고 완벽하게 보였던 캐서린이 나고 자란 그곳은 루시가 떠나온 곳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루시에게 보였던 그 모든 행동이 조금씩 이해됐다. 과거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사람, 어린 딸마저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간절히 바랐던 사람.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죄책감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던 캐서린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엄마에게 위로받았던 루시는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윌리엄에게는 두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아주 먼 존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윌리엄과 캐서린과 루시의 관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몰랐던 것들의 대부분을 지금에야 알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 (257쪽)란 문장처럼.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며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전부를 알 것 같은 이들에게 마음을 연다. 루시가 윌리엄에게 귄위를 느꼈고 데이비드를 통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인생은 결핍과 상처로 시작해 그것을 채우고 위로받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생은 얼마나 많은 결핍과 상처로 가득할까. 숱한 경험과 상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저마다의 상처와 슬픔은 고유하고 차별적인 것이니까.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298쪽)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소설을 통해 조금이나마 배우고 알게 된다. 인생이 뭔지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서 그 비밀을 알아가기 위해 살아간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용서하고 성장하며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애쓴다는걸. 그게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루시’가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조금 더 많이 읽고 싶다. 자신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소설들. 우리는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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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출발해 주말에 도착한 친구와 보낸 시간은 짧게 지나갔다. 왜 이리 좋은 사람과의 시간은 아쉽고도 아쉬울까. 11월의 선물처럼 다녀간 친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시각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친구가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는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서로에게 취해 서로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취한 모든 것들이 좋은 건만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당도한 어려움은 나무늘보의 속도보다 더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나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나가고 있다는 것, 미세한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는 것, 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는 주말의 도로 사정도 그러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이동했다고. 막히는 차들과 피곤한 몸으로 졸음이 몰려와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도 그 시간과 공간을 지나왔고 통과했다. 


주말 밤에 내린 비로 저만치 겨울이 빠르게 걸어오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서울의 도로처럼 낙엽으로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밤에 빗소리와 바람 소리는 약간의 공포를 조성했다. 그 밤이 지나고 찾아온 아침엔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된다. 끓여놓은 보리 차를 한 번 더 데워 마시거나 커피가 빨리 식을까 봐 손에 꼭 쥐고 온기를 느낀다. 친구와 맥주에 취했던 시간은 책으로 바뀌었다. 무언가에 취하는 날들, 깊어가는 가을에 취하기 좋은 건 이런 장편소설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오, 윌리엄!』과 한은형의 『서핑하는 정신』은 두 권 모두 흠뻑 취하고 싶은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처음 만난 『올리브 키터리지』는 무척 좋았던 기억이 있다. 실은 그 뒤로 그녀의 소설을 몇 권 더 읽었다. 아니, 읽으려고 시도했다. 이상하게 집중하기 못했다. 그래서 중도에 덮은 책도 있다. 그리고 『다시, 올리브』를 읽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리뷰를 쓰려고 이런 글을 임시저장하기도 했으니 결국 리뷰는 쓰지 못했다. 언제 다시 읽고 리뷰를 쓸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 윌리엄!』은 리뷰에도 취하는 날들로 이어져야 한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 아닌 지척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시, 올리브』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 동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행복을 생각한다. 좋은 소설이다. (임시저장의 일부)


문학동네와 한겨레 출판사로 화려하게 등단한 한은형은 장편소설 『거짓말』가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모두가 좋았다. 그녀의 상상력이 좋았고 당돌하면서도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그런데 그 뒤로는 이상하게 읽은 글이 없다. 소설, 산문 모두 그러했다. 이번 『서핑하는 정신』을 읽고 한은형을 향한 나의 마음도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다. 


짧게 내려앉은 햇살에 취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 햇살이 곧 사라질 거라는 걸 알기에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좋은 글에 취하고 전부를 내던지는 몸짓의 붉은 단풍에 취하고,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에 취한다. 무언가에 취하는 날들, 무심하지만 다정한 당신의 마음에 취하는 중이라는 건 비밀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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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1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계속 따라 읽고 있어요. 나이 들어가는 작가가 노년의 이야기로 진화하는 과정이 좋아요. 나도 이 정도 나이면 이런 생각을 하겠구나, 이런 상상이 가능해져서요. 오랜만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늦가을에 어울리는 만남입니다.

자목련 2022-11-15 16:49   좋아요 0 | URL
작가와 함께 나이를 든다고 할까요. 김연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소설을 통해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한 해가 기우는 계절이라 그럴지도 모르고요!

책읽는나무 2022-11-15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트라우트 소설은 ‘다시 올리브‘ 까지 너무 좋아서, 정말 아껴 읽고 싶어 전 소설을 구매해 두었습니다. 근데 아직 다른 소설은 집중하지 못하고 있네요. 그런데도 읽기만 한다면 올리브 책들처럼 취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오 윌리엄‘ 책 제목 종종 눈에 띄어 이 책도 조만간 선 구매부터 해야겠어요^^
친구분과의 만남도 왠지 스트라우트 소설 속 장면 같습니다^^

자목련 2022-11-15 16:51   좋아요 1 | URL
너무 좋아서!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전 소설을 다 구매한 나무 님이 있다는 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좋은 책에 흠뻑 취하는 나무 님의 시간을 응원해요^^
 

조금 엉뚱하지만 소설가의 첫 에세이는 언제쯤 출판되는 게 좋은가 생각해 보았다. 독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는 등단이나 활동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반갑다. 글이라는 건 같지만 그 주제가 다르니 기존에 만났던 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을 떠올리면 어떤 작가는 주 종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시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에세이가 연이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출판사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반갑다는 말이다.


SF 소설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준 작가라고 할까. 그러니 김초엽이 들려주는 SF 이야기, 책과 소설 작업에 대한 이야기,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과 우연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게 되었는지, 거기가 SF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진솔한 진심이 담긴 책이다. 특히 내게는 SF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작가라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할 거라는 생각에 편협한 독자라는 답이 왠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글로 통해 만나보니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읽은 책도 많았다. 역시 쓰기 위해서는 읽는 일도 중요하구나 싶다. 과학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작가, 과학과 SF의 경계는 미묘하다면서도 그가 과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독자는 작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 김초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대학원 시절 직접 소설 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말마다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소개하는데 한 번씩 소설을 쓰다가 난항에 빠질 때 참고를 하는 정도였다. 결국엔 쓰기는 누군가의 기술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을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드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


에세이에서 김원영 작가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는 과정을 들려주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을 읽고 한참 후에 알았던 나는 그가 기고한 글을 검색해 읽은 기억이 있다. 해서 초고를 거의 뒤엎는 과정, 편집자가 제시한 방향성, 기술발전으로 인한 장애의 미래를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4쪽)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글 쓰는 일은 때로 세계 전체를 뭉쳐 내 손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는 빽빽한 거미줄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작업 같다가도, 때로는 나를 뚝 떼어내 좁고 작은방,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재미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고 외롭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154쪽)


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책방이나 읽은 책에 대한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책을 사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책을 손에 넣게 되는 일, 일이든 여행이든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작은 책방을 찾아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사는 일. 책 목록에서 내가 읽고 좋았던 책(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책과의 우연한 만남도 즐겁다. 에세이의 제목처럼 말이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234쪽)


작가의 에세이는 그가 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예정된 소설 읽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김초엽의 소설로 SF 소설에 대한 친근감이 생긴 후 예전보다 SF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과 우연들』 통해서 읽고 쓰는 일의 기쁨이 커졌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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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1-04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런 문장을 쓰시면 괜히 저는 감동을 받잖아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무물론 저한테 쓰신 말이 아니라 아니에르노와 김초엽과 여타의 훌륭하신작가님을 포함해!!! ㅋㅋ.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감동받을 문장이지만... 괜히 오늘 쓴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감동을 받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는 그래온 것 같아요. 어느 시기마다 분명 어떤 책이 있었고 어떤 문장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저도 그 경험들을 토대삼아 읽고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멈추지 말아요, 우리! ​힘!!

자목련 2022-11-06 10:37   좋아요 2 | URL
♡♡♡♡♡♡♡
네,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말씀처럼 어떤 시기에 어떤 책의 어떤 문장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것이 서툴고 애쓰는 몸짓일지라도 말이에요!

서니데이 2022-12-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9 08:57   좋아요 1 | URL
^^*
 

‘놀라운 책이다’란 최재천 교수의 추천으로 시작하는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는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1만 2000년 전부터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물 지리적으로 추적한다. 하여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관심 있게 읽은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과정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인문 지식의 안내서로 충분하다. 


‘WEIRD’(위어드)는 서구의(Western)의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사회를 이끄는 이들(강대국의 모습), 아마도 현대인이 추구하는 대표적 모습이라고 하면 맞겠다.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과 전쟁 정도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워어드 심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할 때 부족과 씨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과 대표의 권한이 가장 컸고 그들은 대부분 연장자였고 남성이었다. 부족 내 결혼을 통해 인구를 확장시켰고 부족 내의 결속을 중시했다. 그러나 집단 형태의 삶은 어느 순간 개인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심리적 변화도 일어났다.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알 수 있다. 개인주의와 개인적 동시가 발생하여 자기중심, 자존감, 자기 고양의 태도가 생겼고 전통과 연장자에 대한 순응과 복종은 낮아졌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전체론적 사고보다는 분석적 사고를 키우게 만들었고 단체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단에서 벗어나니 자유의지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누구가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개인이 아닌 부족사회로 돌아가 보면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일, 그것은 친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강력한 동기로 종교를 언급한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문해율을 높이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내세운 '결혼 가족 강령'을 통해 집단적 친족 기반 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기독교의 이러한 관행은 기독교 제도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한 방한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방침들은 설득, 배척, 초자연적 위험, 세속적 처벌과 결합되며 점차 의례로 포장되어 가능한 모든 곳에 전파되었다. 이 관행이 서서히 기독교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이후 세대들에게 상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전달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삶과 심리가 크게 바뀌었다. 이 방침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집약적인 친족 기반 제도가 없는 세계에 적응하고, 이 세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습을 재편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서서히 변형시켰다. (220쪽)


친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집단적으로 보였던 도덕적 심리적 기준이 개인의 몫으로 바뀐 것이다.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와 그림도 사촌 간의 결혼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만큼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많은 그림과 표, 그리고 그래프가 등장한다. 하여 어렵고 힘들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았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의존적 심리를 전쟁과 연결한 부분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전쟁이 인간 심리에 작용하는 부분은 크다.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에 대한 결속력이 커지고 그 분야에 투자한다. 사회 규범은 집단의 생존을 증진하도록 문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전쟁을 비롯한 충격적 사건은 심리적으로 이런 규범 및 관련된 믿음에 대한 헌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상호 의존으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전쟁, 지진, 그 밖의 재난을 통해 종교에 더 헌신하고 참여하게 된다고.


전쟁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도시 중심지의 시민 전체를 포함한 자발적 결사체 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을 것이다. 전쟁은 또한 자발적 결사체의 성원을 늘렸을 것이다. (431쪽)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혁신이라는 것은 결국 집단 지성으로 이끌어 낸 법률, 과학, 사회 전반의 규범 같은 것들이다. WEIRD(위어드)의 심리가 더 낭느 사회로의 진화를 이끌어내고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라는 걸 저자는 말한다.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놀라운 책이며 방대한 자료에 감탄한다. 무려 10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연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자가 고백한 대로 편향된 인구 집단을 표본으로 했다고 하지만 아시아(특히 한국)의 경우는 많이 부족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책 전체를 다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인류 심리 진화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배우고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인류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며 인문 교양서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오늘날의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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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10-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올해 <총 균 쇠>를 읽기로 했던 연초의 계획이 생각나네요… 이 책도 흥미롭네요~

자목련 2022-10-28 14:09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흥미로운데 어렵기도 했어요.
목표치를 정해두고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고요. ㅎ

stella.K 2022-10-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긴한데 책값도 장난 아니고
벽돌책이네요.ㅠ

자목련 2022-10-28 14:11   좋아요 1 | URL
벽돌책은 하루에 읽어야 할 양을 정해두어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책값이 너무 비싸요. ㅠ.ㅠ
 

가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들고 있다. 환기를 시킬 때 창문을 열어두는 짧은 시간에 느끼는 바람은 가을이 곧 떠날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니 집 밖을 나갈 때는 단단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드러나 맨살을 꽁꽁 숨길 기세로 말이다. 


가을이, 인사도 없이 사라질 가을이 아쉬워서 이런 단편을 곁에 두었다. 단편을 읽는 시간이라는 제목이 괜히 근사하다. 단편 읽는 시간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나 차분한 음악이 있었으면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김연수의 단편집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란 제목도 좋다. 사실, 뭐가 안 좋겠는가. 김연수를 기다린, 그의 단편을 기디란 독자라면 다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사인 인쇄본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김연수의 사인본에 약간의 사연이 있다. 김연수의 소설과 그런 에피소드(나만이 아는)가 있다는 게 좋을 뿐이다.책 사이에 스며든 엽서에는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당신에게”라는 인사말이 있다.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계절마다 좋은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우리는 곧 겨울이 되면 눈 내리는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계절이 오고 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봄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다면 가을에는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다. 이 작품집에 김연수의 단편도 있다. 오랜만에 김애란의 단편도 만난다. 문지혁 작가의 단편은 처음이지 싶다. 아니 작가의 소설 자체가 처음인 것 같다. 작년 대상 수상자의 이름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같다고 할까. 단편을 더 즐겁게 읽을 이유를 찾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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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10-25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사진에 등장하는
책 읽는 소녀를 제가 좋아합니다 ㅎㅎ
가을에 읽는 한국 단편 좋으네요.
편혜영 작가도 반갑고요**

자목련 2022-10-27 11:58   좋아요 1 | URL
저도 많이 좋아합니다.책장에 소녀가 몇 명 더 있습니다. ㅎ

scott 2022-10-2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왼쪽 한낮 우울 부터 맨 오른쪽 끝과 시작 까지 전부 저의 최애작들!ㅎㅎ 올해 젊은 작가 수록작중에 백수린 작가 단편이 인상 깊었습니다. 연수옹의 <진주의 결말>은 우수상작 ^^

자목련 2022-10-27 11:59   좋아요 1 | URL
우와 정말요? 백수린의 단편은 아직입니다. 편혜영와 김연수만 읽었어요!

blanca 2022-10-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김연수 단편 중에 뭐가 제일 좋으셨어요? 궁금해요. 저는 아직 아껴두었죠. 가을이 가는게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말 이 가을 하늘, 햇살을 어디에 비할 바 있을까요?

자목련 2022-10-27 12:00   좋아요 0 | URL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블랑카 님처럼 아끼는 이유도 있고 한 편씩 읽다보니 조금 천천히 읽고 있어요.
쏟아지는 햇살을 한 줌 나만의 공간에 숨겨두고 싶은 날들입니다. 이 가을 충만하게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2-10-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보고 금방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곧 떠나갈까 두렵네요. 단풍이 제법 많이 떨어졌더라구요ㅜㅜ 은행잎은 아직 물들기 전이긴 합니다만^^;;;
저도 김연수 작가의 싸인 문구를 보고, 음🤔
했습니다. 좀 섭섭할 정도로~ㅋㅋ
근데 이승우 작가님 싸인본 신간 책을 보고 헉!!!!! 차라리 김연수 작가님 싸인 문구가 친절하셨어요^^
김스옥 문학상 표지의 편혜영 작가님 넘 예뻐서 늘 입꼬리가 올라가던데, 이 사진이어 더 반가운 책입니다.^^

자목련 2022-10-27 12:01   좋아요 1 | URL
가을을 데리고 돌아오셨을까요? 사인본에 대한 매력이 크게 없습니다. ㅎ
편혜영 작가의 표지 사진 좋아요. 저도 따라해보고 싶은 ㅎㅎ

coolcat329 2022-10-2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아 너무나 와닿는 말입니다.
저도 책장에 있는 단편을 찾아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2-10-27 12:02   좋아요 1 | URL
우리 가을 밤에는 단편을 읽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