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이 돌아왔다. 이미 인터뷰까지 진행한 마당에 (인터뷰 보러가기) 이렇게 서두를 떼는 일이 좀 겸연쩍긴 하지만. 허나 지난 인터뷰엔 '생태 경제학 시리즈'를 받아보지 못했던 탓에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이야기만 가득하니, 좀 쑥스러워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우석훈이 돌아왔다, 고.

<생태요괴전>과 <생태페다고지>의 '생태경제학 시리즈'는 말하자면 우석훈의 '전공 과목'이다. 실제 파리 유학시절 전공했던 분야인 동시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시리즈란 말. 야심차게 동시출간한 것으로 모자라 한 권은 청소년용, 한 권은 성인용(?)으로 나누어 낸 것만 봐도 파이팅을 엿볼 수 있지 않나. 원래 계획은 4권 동시출간에 박스세트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뒷 이야기는 더더욱…

드라큘라전, 좀비전, 프랑켄슈타인전, 생태요괴전, 동방불패전, 마시멜로전, 여고괴담전, 개발요괴전 등으로 나누어진 각 장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생태요괴전>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그만의 개념화와 스토리텔링. 논란 혹은 호불호는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우석훈은 단연 발군이다. ('요괴전'이라는 말이 들어간 사회과학 서적을 내 MD 경력에서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다)

<생태페다고지>는 제목 그대로 '생태교육학'이다. 꼭 선생님이 아니어도 좋다. 부모 혹은 언젠가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선남선녀(?) 하다못해 교회 중등부 선생님이라도. 이 사회의 교육이, 그리하여 미래가 걱정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장 흐뭇한 장면은 지금 당장 이 책을 구입해 모두 읽고, 한 권은 아이에게/제자에게/후배에게/동생에게 건네주는 모습이겠지만… (땡스투는 필수…)

반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한 마디로 <88만원 세대 : 실천편>이라 할 수 있겠다. 잔뜩 쫄아있는 우리 20대들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거는 우석훈의 메시지는 사실 단순하다. 괜찮다고,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쫄지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너희들이 일단 모여서 무엇이든 함께 한다면, 새로운 상상력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그때 이미 변화는 시작된 거라고.

이거 뭐, 다같이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선장님-" 이라도 외쳐야 하는 걸까?

물론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겠다. 가뜩이나 쌀쌀한 가을인데. 지난 인터뷰에서 '악마의 변호사' 역할을 맡은 인터뷰어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아무런 생산수단도 갖지 못한 20대들이 단순히 함께 모인다 해도, 결국 '게토'랑 뭐가 다른가요?" 그는 대답한다. "그것이 게토라도, 20대들만의 게토를 만들면, 그곳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간혹 이렇게 되묻는 이들이 있다. "무슨 말 하는진 알겠다. 다 좋은 말이다. 그래서 당신의 대안은?" 그건 참 한심한 일인데, '기계장치의 신'이 대안을 주던 시기는 이미 그리스 시대에 끝나지 않았던가? ('유행하던 시기'라고 정정해야겠다) 대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적어도 이들은 책을 통해 새로운 목소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시크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아무리 댄디하게 차려입고 버스를 타도 요금은 내야하는 것처럼.

그래도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실천방안을 하나 소개하자면 그것은 바로 '진'이다. 다른 말로는'마을'. 진짜로 시골에 삼삼오오 모여 농사나 지으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동체 의식, 그러니까 '연대'다. 아…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

그렇다. 그것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맞다. 잘개 쪼개진 욕망의 조각들에 휘감겨 살아가는 20대들은 이기적이고, 이 사회의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지 모른다. 결국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하는 것이다. 경제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네 친구도 먼 미래의 적일 뿐야, 라고 언젠가 김종서는 노래했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찍이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이 부분은 분명 흥미로운데, 홉스의 주장은 그것의 타계를 위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21세기, 우리에겐 분명히 국가라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 상태에도 협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온통 이기적인 생물들로 가득해보이는(뜨끔!) 지구상에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해답은 로버트 액설로드의 고전 <협력의 진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 뒤늦게 번역 된 <협력의 진화>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자연 상태에서의 협력의 진화이다. 어떻게? 게임이론을 통해. 그렇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게임이론이다. 게임이론의 목표 또한 대립과 경쟁 상황에서의 필승전략 수립만은 아닌 것.

상황은 간단하다. 흔히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 두 명의 죄수 A, B가 잡혀 각각 따로따로 심문을 받는 상황이다. A와 B 모두 협력해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둘은 경범죄로 1년 미만의 형을 살고, A와 B가 각각 상대방을 배신하면 둘 다 3년의 형을 산다. 하지만 A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 B가 배신하고 A의 죄를 이야기하면, A 혼자 죄를 뒤집어 써 5년 형을 살고 B는 석방된다.

이것이 딜레마인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은 상대가 죄를 뒤집어 쓰고 나는 석방되는 것. 그렇다면 나는 배신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상대방도 배신을 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렇다면 3년을 살게 되고, 3년 보다는 협력해서 둘 다 1년 형을 받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이 때 상대방이 배신한다면 나만 5년 형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배반.

협력의 경우 1년을 살거나(상대도 협력), 5년을 살아야 하지만(상대가 배반) 배반의 경우 0년을 살거나(상대는 협력), 3년을 살면(상대도 배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 요즘들어 우리사회에 게임이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로버트 액슬로드는 프레임을 바꾼다. 단발로 그치는 죄수의 딜레마가 아닌,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나를 배신/협력했던 저 친구와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복해서. 직장동료와 애인과 거래처와 동네사람들과 만나듯이, 그렇게.

그리하여 그는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를 바탕으로 한 대회를 열고, 세계 각국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을 초대한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게임이론 전문가들은 나름의 전략/규칙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을 출품하고, 프로그램들은 돌아가며 각각 1:1 로 일정한 수의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 A와 B가 100게임, C와 D가 100게임, 다시 A와 C가 100게임, B와 D가 100게임 이렇게 A, B, C, D, E… 이때 A와 B가 협력하면 3점, A와 B가 서로 배반하면 1점, A가 협력하고 B가 배반하면 각각 0점과 5점을 주는 것이다.

다양한 전략들이 출품 되었다. 무조건 협력만 하기도 하고 무조건 배반만 하기도 하고, 협력하는 척 하다가 가끔씩 배반을 하기도 하며 배반으로 상대를 떠본 후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하기도 하고, 일단 협력으로 시작하지만 상대가 배반하면 끝까지 배반으로 보복하기도 하는 각양각색의 프로그램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전략이 우승을 차지했을까? 영리하게 상대의 등을 쳐먹는 전략이 아무래도 우승을 차지했을 것 같다. 왜, 주변에도 그런 사람 있잖는가. 친한척 하며 쏙쏙 빼먹고 정작 필요할 때는 입을 닦아 버리는 사람. 어른들 말로도 그런 놈들이 잘먹고 잘산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우승을 차지한 것은 '팃포탯'이라는 전략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Tit for Tat. 즉 팃에는 탯, 탯에는 팃.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후손인 셈이다. 일단 협력으로 시작한 팃포탯은, 상대가 협력하는 한 계속해서 협력한다. 하지만 상대가 배반하면, 그 즉시 다음 게임에서 배반하여 복수한 뒤, 일단 복수를 했으니 다시 협력한다. 상대가 계속해서 협력한다면 팃포탯도 지속적인 협력을, 계속해서 배반한다면 끝없는 배반의 메아리가 울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 단발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과 다른 것은 협력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협력은 3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협력할 때 배신하면 5점이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무조건 협력만 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따라서 적절히 협력할 줄 모르는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점수는 상호배반인 1점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끔 봉을 만나(?) 5점의 점수를 적립해 놓아도, 그 외에는 줄곧 1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많은 협력을 통해 3점을 쌓아놓은 신사적인 프로그램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협력의 중요성을 일단 체크~
(여기에 진화의 개념이 들어가면, 결국 팃포탯의 성공적인 생존전략이 자연선택을 통해 확산되고 배반적인 규칙들은 떨어지게 된다. 실은 생태학적/생물학적 모델을 사용해 이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책의 백미다. 물론 백미를 여기에 옮길 순 없다. 저도 땅파서 책 파는 건 아니니까요… 쿨럭)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 중 하나는 '안정성'이다. 안정성이란, 어떤 한 '사회'가 한 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들로 가득차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전략을 가진 개체가 그 사회를 침투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근데 나는 지금 책을 전부 요약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을 말하자면 여러 전략 중 총체적 안정성을 지닌 전략은 두 개 뿐이다. 바로 팃포탯과 언제나 배반을 선택하는 '올디'.

팃포탯이 99개 있는 사회에 다른 규칙을 가진 프로그램이 들어왔다고 생각해보라. 그 친구가 충분히 협조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시작부터 배반을 구사한다면 처음에는 5점을 가져갈 것이다. 각각의 개체와 10게임 씩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 다음 게임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점이다. 10게임이 끝난 후 그가 얻는 점수는 14점. 그와 경기했던 팃포탯은 9점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가 나머지 98개의 팃포탯과 각 10게임 씩의 모든 경기를 끝낸 후 얻는 점수는 14*99 = 1386점이다. 반면 팃포탯은 그와의 경기에서 9점을 얻지만, 나머지 98개의 팃포탯과의 경기에서는 30점을 얻으므로, 그들이 기록하는 점수는 9+(98*30) = 2949점인 것이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비신사적인 전략은 도태된다(협력적인 전략으로 바꾼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배반하는 '올디'의 사회는 어떻게 총체적 안정성을 갖는가? 마찬가지로 올디가 99개 있는 사회에 팃포탯이 들어갔다. 올디는 첫게임 부터 배반하고, 팃포탯은 협력한다. 마찬가지로 10게임 씩 진행한다고 했을 때, 올디가 얻는 것은 5점 + (1점*9게임) = 14점이다. 반면 팃포탯이 얻는 것은 0점 + (1점*9게임) = 9점이다. 올디끼리 게임했을 때 그들은 모두 1점 * 10게임 = 10점을 얻지만, 팃포탯은 항상 9점 밖에 받을 수 없으므로, 그 사회에서 팃포탯은 도태된다.

자,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여기까지 읽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손 좀 들어보실래요?)

지금 우리사회가, 설령 '올디'라고 해보자. 그래서 사회의 '뉴비'(* 뉴비지터 : 신참을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인 우리 20대들은 선택해야만 한다. 위에서도 살펴 보았듯, 올디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다른 전략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88만원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도 올디가 되어버리자니, 너무 서글프다. 그래서 바로 케케묵은 연대가 중요한 것이다.

총체적 안정성을 지닌 이기적 배반자들의 집합체인 '올디 사회;라고 할 지라도, 5%의 팃포탯 무리가 침투하면, 도태되지 않은 채 자리를 잡고 동등하게 게임할 수 있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고? 95개의 올디가 있는 사회에 5개의 팃포탯이 들어간다고 하자. 하나의 올디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4*5) + (9*94) = 916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팃포탯이 얻을 수 있는 점수는? (30*4) + (9*95) =  975 점이다! 만세! (* 팃포탯 끼리는 매번 협력 3점*10게임*4개체 이고 올디와는 10게임에 9점*95개체)  

* 10/22 추가 : 올디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모딕 님이 지적해주신 대로 (14*5) + (10*94) = 1010 점입니다. (본문과는 반복되는 게임의 수 등 변수의 차이가 있어서 이 경우에 팃포탯 5%는 약간 부족하네요;) 아무튼 기조는 마찬가지라 수정은 하지 않고 오류만 밝힙니다.

그렇다. 액슬로드가 말하는 것은, 우석훈이 20대들에게 말하는 것은, 팃포탯의 연대를 만들라는 것이다. 괜히 쫄지말고, 너도 같은 '올디'가 되지 말고, 같은 '팃포탯' 친구들과 뭉쳐서, 이 사회에 새로운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햐나고 물을 필요 없이. 이미 게임이론으로 Q.E.D.- 증명 끝! 했듯이.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고급영어로 표현하자면-

"Are you Tit for Tat? I am Tit for Tat, too! Let's make some fun!"

(죄송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아니라 MD인 거죠…)

핵심요약정리에 익숙한 20대 동지 여러분들을 위해, 이 긴 페이퍼를 이 만큼 읽어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팃 포 탯 전략의 핵심을 마지막으로 공개.

1. 질투하지 마라
2. 먼저 배반하지 마라
3. 협력이든 배반이든 그대로 되갚아라
4. 너무 영악하게 굴지 마라
















협력과 협상, 설득에 대한 게임이론이 더 궁금하다면 <가위 바위 보>를 읽으면 좋겠다. 액슬로드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 받아, 좀 더 다양한 사례에 접목시킨 책이라고 하겠다.

팃포탯 전략에는 사과가 필요 없지만(절대 먼저 배반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인간이기에 많은 실수를 하게 마련. <사과 솔루션>은 바로 그때 필요한 책이다.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한 마디로 사과 매뉴얼이다! (사과에도 매뉴얼이 필요하다! 좀 더 말랑말랑한 사과 매뉴얼이 필요하신 분은 이기호 연재소설 <사과는 잘해요> 참고…) 어쩌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워킹 푸어>. 제목 그대로 열심히 일하지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즉,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협력이고, 우리가 마침내 협력해서 목소리를 낼 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어쩐지 평소와도 다르게 잔뜩 '이론적인' 이야기를 써버리고 말았는데 사실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은 걷는 사회학자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였다. 그 페이퍼의 첫 머리에서 인용될 예정이었던 것은 바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한 대목.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걷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큰 추력을 얻게 된다. 그에 반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 자그마한 바나 웃음을 던지는 여자들의 유혹의 힘은 점점 더 작아지며, 다음 골목, 저 멀리 으슥하게 우거진 나뭇잎들, 어떤 거리의 이름 등의 자력에는 점점 더 저항하기 힘들게 된다.

곧 배가 고파온다. 그러나 허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금욕적인 동물처럼 그는 미지의 구역을 배회하다가 결국 지칠 대로 지쳐 자기 방으로, 그의 방이지만 왠지 서먹서먹하고 그를 차갑게 맞이하는 방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에 빠진다.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에서

서먹서먹하고 차갑게 맞이하는 방에서, 이렇게. 끝.


* 다음 페이퍼의 주제는 '근대 문학의 종언 - 한국 문학에 더이상 대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 스티븐 J. 굴드 이론을 중심으로'가 될 예정이었지만 예고 없이 바뀔 예정입니다.

*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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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라의 생각
    from tzara's me2DAY 2009-10-14 09:28 
    '시크한 당신, 게임이론을 읽어라! 혁명 혹은 협력에 대하여' http://ow.ly/ugw4
  2. 기이한 결탁의 고리 끊기 : 「생태요괴전」 중에서
    from 세상을 보는 검은 눈, Skyjet 2009-11-20 14:21 
    외로운 엄마와 점점 영악해진 딸의 관계, 근본적으로 이 기이한 결탁의 고리가 끊어져야 비로소 둘 다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편이 사회적으로도 건전하다. 그래야 딸들도 스스로 한 인격체가 되어, 돈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기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엄마는 그럴 수가 없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외로운 엄마는 더욱더 딸에게 집착하고, 딸은 엄마와의 '스폰'..
 
 
로쟈 2009-10-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문학의 종언 - 한국 문학에 더이상 대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예정대로 다뤄주시면 좋겠는데요.^^

활자유랑자 2009-10-21 18:24   좋아요 0 | URL
하하... 언젠가 그런 걸 쓸 공력이 될 날이... 오겠죠? ; 로쟈 님이 다뤄주세요~ :)

freesolo 2009-10-2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생님 책을 읽고 있지만 팃포탯 이론을 들으니 더 귀에 들어오는군요. 불쌍한 어린것들 ㅠ.ㅠ

활자유랑자 2009-10-21 18:24   좋아요 0 | URL
네. 마침 같은 시기에 나왔는데 읽다보니 두 권이 자연스레 겹치더라고요. ㅜ.ㅜ

모닥 2009-10-2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5개의 올디가 있는 사회에 5개의 팃포탯이 들어간다고 하자. 하나의 올디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4*5) + (9*94) = 916 점이다.
올디끼리 게임했을때는 10점이므로 (14*5) + (10*94) = 1010점 아닌가요?

활자유랑자 2009-10-22 14:5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계산에 오류가 있었어요. -_-; (의도한 건 아닙니다)
좋은 지적 감사 드립니다.

alice1101 2009-11-0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활자유랑자 2009-11-04 18:11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

리치킹 2010-01-06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7 17:45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새해에는 tit for tat

hsnskifk 2012-03-0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팃포탯이 가득한 사회로..ㅋ 재밌게 읽었어요 꼭 소개해주신 다은 책들도 읽어봐야겠네요^^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이 '인생막장 혹은 어느 주변인의 고백 #1'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글을 쓴지도. 세상에 제목하며. 고해성사라도 하자는 건가? 설상가상으로 설정한 업데이트 주기는 2주. 오 하나님 맙소사. 보일러를 틀기는 지갑이 얇아 전기장판을 찾는 이 가을에 문득, 참담한 기분이 든 나는 #2를 써버리기로 결심한다. 두 달 만에. 물론 여기에는 정교한 계산이 숨어있다. 어쨌거나, 지금 하나 써놓으면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이 지긋지긋한 고백에서 벗어나도 되겠지. 업데이트 주기는 2주, 라고는 하지만. 아마 하나님도 신경쓰진 않으실 게다.

그래서 가을이다. 친구에게 바람맞은 일요일. 밀린 설거지를 하고, 한 숨 자고, TV를 보다가 세탁기를 돌리고, 삑삑 소리에 섬유유연제를 넣었을 뿐인데 가을이, 성큼 와버린 것이다. 나는 침착을 가장하며 담배를 찾는다. 하지만 담배는 없고,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가기에 가을은 너무 춥다. 컴퓨터 앞에 도로 앉아 도리 없이 묻는다.

"그런데 잠깐, 어디까지 썼더라?"

그래서 이 글은, 지극히 편의적으로, 이렇게 시작한다. 
먼저, 돌아온 하우스 박사(M.D.) 이야기. 짧은 머리로 돌아온 하우스 박사(M.D.)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망친게 아냐. 난 이미 망가졌다고."
(They didn't break me. I am broken)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만 M.D.냐 나도 M.D.인데"
(Are you M.D.? I am M.D., too)

뭐, 어디서든 시작은 해야 하니까.

이런 시작이 마음에 들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MD's cut이 있긴하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지루하긴 하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의 제 3부 정리 28에 대한 재증명 같은.

정리 28. 우리는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우리들이 표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에 모순되며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표상되는 모든 것은 멀리하거나 파괴하려고 노력한다.

증명 : 나는 언제나 완벽하게 멋진 글을 쓰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영혼을 팔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사지 않았고, 이내 나는 그것을 버렸다. - Q.E.D. 증명끝.


*

학교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과정, 도덕 교과서의 어디메에서. 우리 도덕 선생님은 69년 우드스톡 공연장에서나 볼 것 같은 양반이었다. 긴 머리에 히피. 강의는 수업 시작 후 한 10여분 남짓 할까? 그 후론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읽도록 시킨 후 창가에 앉아,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그러나 문득 딴 짓을 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카누의 노 같은 매로 엉덩이를 마구 때리곤 했다. 일단 시작하면 대개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던 그 스윙의 끝은 이랬다.

"내가" 퍽퍽 "니들 같은 놈들 때문에" 퍽퍽 "원폭을 맞아서" 퍽퍽 "이러고 있는데" 퍽퍽 "니들은" 퍽퍽 "어째서" 퍽퍽… 그는 잘해봐야 30대 후반으로, 역사 교과서 수준의 상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내 눈에도 '이따이이따이' 하지도 '미나마타' 하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소동이 끝날 때면 꼭 눈물을 흘리곤 했다. 흑흑, 퍽퍽, 흑흑, 퍽퍽… 누나 가슴에 삼천원 쯤은 있다는데, 사연이야 있겠지만. 만약 정말 45년에 피폭하고 69년에 우드스탁을 본 후 96년에 도덕 선생님이 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튼, 그렇게. 창밖과 교과서를 건성으로 바라보며 보내던 어느 날. 맹자와 공자의 지루한 말들이 지나간 자리에 난데 없이, 사르트르가 나타났다. 어느 각도로 고개를 돌려도 피할 수 없는 눈으로 나에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며. 실존이 뭔지 본질이 뭔지 알리 없던 열여섯 살의 덜 자란 꼬맹이는, 도덕 선생이 무서워 교과서를 덮지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다만 따라 할 수 밖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고. 순식간에 세계가 CTRL + F5 하는 느낌. 그렇게, 그래서 그렇게

실존이 본질을 앞서 버렸다.

나의 모든 실존적 게으름이 시작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할 수 있는 일? 안 해. 어차피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없는 일? 안 해. 어차피 못하니까.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그것이 나의 숨을 멈추게 했다. 3, 4일 전만 해도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절대로 예감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 모든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 없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한참 유행하던 알라딘의 주제곡처럼.


a whole new world
a dazzling place i never knew.

정말 그랬다니까.
그래서 여즉 '알라딘'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무심하게도 사르트르의 저작을 읽은 것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단 두 권이고(각각 문예출판사와 보성출판사 판으로), <구토>는 읽다가 토할 뻔했으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말이 실은 사르트르의 어느 작품에 나오는 건지 여즉 알지 못하지만.

여러 2차 저작 중에서,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대해 가장 인상깊게 서술한 것은 푸릇하던 스무살에 읽었던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의 한 구절이다.

"어떤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여기에서는 사르트르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다!) 이 기묘한 말은, 어떤 실존주의자의 경험이 혼동에서 명료성으로 나아가는 전기적 추이에 있어서는 명백한 것일지는 모르나, 철학적으로는 아주 애매한 소리다." 

"하지만 극단의 형태에 있어서, 그것은 맹렬하게 반주지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낭만주의이다. 윤리학에 있어서 그것은 아직을 내세우는 것이요, 존재론에 있어서는 변덕을 일삼는 것이다."  블라, 블라, 블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인간이고, 때론 낭만적이며, 아집을 부리기도, 변덕을 일삼기도 한다. 그게 뭐 대수라고?
(라며 쿨한척 이번에 처음 번역되어 나온 사르트르 소개)  

 

 

 

 



그렇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전에도 게을렀고, 이후에도 게으를 것이었으니. 딱히 독서의 수준이 높아진 것 도 아니다. 글쎄, 뭘 읽었더라? 몇몇 이름들이 떠오르긴 한다. 홈즈나 뤼팡, 장무기나 현암 같은. 삼국지, 수호지… 무엇보다 슬램덩크. (가장 실존주의적인 텍스트는 역시 <슬램덩크>다. 실존주의적 게으름을 집중 조명한 국내 작품으로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책들은 내가 읽었던 판본이 아니다… <삼미>는 뭐 나중 얘기고) 

그렇다. 동서양의 위대한 독서가들처럼 자연스럽게 세계명작으로 눈을 돌리기를 나는 거부했던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니까. (응?) 나는 독서-기계가 아니라는 자기 선언. (응?) 차라리 TV에서 하던 '마법 소녀 리나'를 보고 말지…  

그렇지만 무엇보다 당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고에이 사의 PC게임 [삼국지 3]와 [대항해 시대 2] 그리고 [프린세스 메이커 2]였다. 가계부 보다 두꺼운 전화번호수첩 한가득 ㄱ, ㄴ, ㄷ 순으로 장수들의 '이름 / 지력 / 무력 / 정치 / 매력'을 정리하고, 최고의 배인 '쉽ship(;)'을 건조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있는 돈 없는 돈을 가져다 바쳤으며, 거지에서 공주까지 딸과 함께 인생역전을 맛보며 (훌쩍)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했던 것이다… 아. 사실 게임으로 치면 루카스아츠의 어드벤쳐도 있고, 할 말 많지만 이쯤에서 당시  

내가 만났던 명문장을 소개한다. 지금까지, 깊은 곳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는 명문장이다. 

"... 오스만 투르크의 주인공 알베자스는 돈이 한푼도 없는 가난한 녀석이다. 다른 캐릭터와는 다르게 돈을 꿔서 모험을 시작한다. 꾼돈을 다시 갚을 때는 10배로 갚아야 한다. 개략적인 줄거리는 알베자스의 목적이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니 부디 하시는 분도 억만장자가 되길 바란다. 도 알베자스로 할때만큼은 돈을 억수로 모았다. 일본과 아프리카의 금은 무역을 통해 8900만 정도 모아서 지중해로 왔으나 스페인 국왕에게 다 빼앗긴 경험이 있다. 그러나 로드를 해서 다시 1억 2천만 까지 모았다. ..."  

(출처 : 대항해 시대 2 매뉴얼, 작자 미상) 

이 문장이 좋은 이유는 우선, 간결하다.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지 않고 예리하게 팩트만을 전달한다. 그렇다고 건조하기만 한 것은 또 아니어서, 미국 컬리지 밴드의 음악이 그렇듯, 종종 슬프다. 특히 '도 알베자스로 할때만큼은 돈을 억수로 모았다', '스페인 국왕에게 다 빼앗긴 경험이 있다. 그러나 로드를 해서 다시 1억 2천만 까지 모았다' 같은 부분이 그렇다.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 문장의 호응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작부터 낮추고 들어가는 저 부분이 눈물나게 아름답다. 모든 것을 되돌릴 세컨 챤스가 있다는 것도…

그렇다고 저 문장들에 무슨 인생의 비의, 따위가 숨어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오스만 투르크의 주인공 알베자스는 돈이 한푼도 없는 가난한 녀석이고, 다른 캐릭터와는 다르게 돈을 꿔서 모험을 시작하는데 꾼 돈을 다시 갚을 때는 10배로 갚아야 하며, 개략적인 줄거리는 알베자스의 목적이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니 부디 하는 사람도 억만장자가 되면 좋겠다, 고.  그러니까,   

실존은 본질에 앞서지만 어쨋든 세이브는 필수, 라고. 

그러고 보니 당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책은 고려원 판 정비석 선생의 <김삿갓>이다. 돈이 한푼도 없는 가난한 녀석이었던 나는, 어느날 놀러간 친구네 집에서 <김삿갓>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친구에게 권당 500원, 총 3000원을 주고 사들여 읽고 또 읽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님이 '용두질'을 한다던 그 장면 때문이었나…)  

그 이후로 내 꿈이 항상 '프리랜서'(직군/분야 없음)였던 것은 아마 김삿갓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  

전등을 켜놓고 이불 속에서 책을 읽는 대신, 집나간 아버지의 방을 물려 받은 나는 밤을 새도록 컴퓨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PC 통신. 아이들이 나와서 놀고, 모험을 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노는 이야기들을 읽는 대신에 아이들이 접속해서 놀고, 모험을 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노는 곳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의 이름은 "나, 너 우리가 함께 만드는" 나우누리였다.  

그곳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부끄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너무 많은 부분을 바꾸어 버렸기에. 제임스 팁트리 2세의 단편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에 나오는 뇌에 기생하는 외계생명체처럼, 어느새 자리잡아 복잡하게 뿌리 내렸기에 그것을 적당히 잘라 보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박노자의 사민주의에 대한 일부 트로츠키주의 진영(?)들의 비판은 여기에 기인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 5.3'의 파란 화면을, 그 속에 오르는 타인의 생각을 바라보며 나 역시 서툰 생각을 올리던 그 시간에, 나는 우울을 배웠다. 실은 우울의 효용을 배웠지만. 우울은 타인의 호감을 사는 가장 값싼 방법이라는 것. 사실 중학생이 우울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중학교 시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들임이 분명하니까. 즐거울 이유가 하나토 없다는 사실만 빼면.

다시 생각해도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나, 너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그 시절은. 사르트르와 라디오헤드의 'Creep' 정도만 알면 전혀 부족함이 없던 시절. 너무 많이 알아버린 지금은 그 시절을 자꾸만 부러워하게 된다. 오컴의 말을 응용하자면, 행복에 이르는 여러 길이 있다면, 그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적게 아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말은 글러 먹었다. 

그 시절, 그러니까 중3 무렵의 나를 좋아한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 너 우리가 함께"만들던 세상에서, 나를 정확하게 지목하며 "너"라고 했던 첫번째의 그녀는 스무살이었다. 주주클럽이 "너 이제 열여섯, 난 스무살야"라는 노래를 부르던 해였다. 그녀는 노래방에서 주주클럽의 노래를 불렀고, 나는 도망쳤다. 이게 다 도덕 교과서를 읽은 탓이다. 

두번째는 열여덟이었다…
 

To be continued... (하하하하;)  


* 어쩌다 보니 하*텔, 나우*리 등에 유행하던 연재글 같은 형식이 되어 버렸다… 이것 참 ;
* 인생도 로드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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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열 2009-12-0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왠지 공감가는 부분이 많네요..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탓일까요? 전 [샤르트르]나 PC 통신 쪽은 접하지 않았지만.. ^^; 암튼 여기 블로그도 넘 맘에 드는 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종종 놀러올게요~

활자유랑자 2009-12-08 13:26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나 PC 통신은... 모르시는게 더 나을지도. ;
또 오세요~ ㅎㅎ
 


20대여, 쫄지 마, 상상해 봐!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생태요괴전>으로 돌아온
경제학자 우석훈 인터뷰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가을.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우석훈 박사를 만났다. 20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대신 ‘공포 경제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명랑을 모토로 삼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20대 보다 20대를 더 믿는 경제학자, 그대로였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을까?
(인터뷰 : 알라딘 금정연)


알라딘 : 지난 번 인터뷰는 5월이었죠. 그 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우석훈 : 근황이랄 건 없고… (웃음) 다만 ‘한국경제대장정’이라고 이름 붙인 시리즈를 내기로 했으니까, 끝은 내야하니까, 그걸 붙잡고 있었죠. (‘한국경제대장정’은 기존에 ‘한국경제대안’이라는 시리즈 이름으로 출간 되었던 <88만원 세대>, <조직의 재발견>,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의 4권과 얼마 전 동시 출간된 <생태요괴전>, <생태페다고지>의 ‘생태경제학’ 시리즈를 포괄하는 12권짜리 기획) 올해는 사실 1년 내내 슬럼프였어요. 여름방학 이후로 겨우 정리를 하고 있는 상태에요.

알라딘 : 슬럼프라고는 하시지만, 이번에 무려 세 권의 책이 한꺼번에 출간 되었습니다. 흔한 일은 아닌데, 혹 사연이 있나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출간일정을 조정하기도 하는데.

우석훈 : 원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더 늦게 나올 예정이었어요. 원고를 먼저 넘긴 것은 ‘생태경제학’ 시리즈니까. 그런데 자꾸 출간이 늦어져서 추월을 한 셈인데… 저는 상관없어요. 책 판매에 대해서는 별 관여를 하지 않으니까. 판매는 출판사 소관이죠. 저는 그냥 되는대로 하고, 안되면 말고… (웃음)

알라딘 : 2007년 <88만원 세대> 이후 모두 8권의 단행본을 출간 하셨습니다. (* 단독저작 기준. <조직의 재발견>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의 개정판이므로 제외) 강준만 교수를 제외하곤 국내에선 독보적인 생산성입니다. 비결이 있으세요?

우석훈 : 원래 다 머릿속에서 계획되어 있었던 책이니까요. 자료도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던 상태고. 그 전에 해놓았던 것들을 은퇴 준비하며 정리하는 건데… 사실 굉장히 느린 셈이에요. 기자가 이렇게 작업하면 아마 신문사에서 쫓겨나겠죠. (웃음) 써야할 것들, 빨리 정리해버려야 할 것들은 아직도 이만큼 쌓여있어요. 결코 빠른 게 아니에요.

알라딘 : 여러 우여곡절 끝에 출간 된 <88만원 세대> 이후,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C급 경제학자라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명실상부한 A급 저자가 되신 것 같습니다. 생산성이나 독자호응 모두에서요. <88만원 세대>는 ‘꿈의 10만부’를 넘기기도 했고요. 자평을 하자면?

우석훈 : 우여곡절이 많았죠. 이 시리즈가 재미있는 게,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는 거. 우스운 알, 슬픈 일… 크고 작은 사연들이 많아요. 주로 슬픈 일이지만. <88만원 세대>는 처음 표지를 바코드를 넣어 디자인했더니 ISBN 대신 그 바코드를 인식해서 표지를 엎었는데, <촌놈들의 제국주의> 할 때도 초판 인쇄가 잘못 되어서 한 쇄를 엎고 전부 다시 찍기도 하고. 시리즈 내내 일일이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게 마가 낀 건지 뭔지 정말… 지금은 다른 생각 안하고 그냥 편하게만 가자, 생각이 들 정도로. (웃음)

A급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사실 팔릴만한 것을 앞으로 배치했던 거죠. <88만원 세대>처럼 개념을 제시하는 책을.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처절해지겠죠. 나는 잘하는데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게 힘들어요. 앞으로 남은 책들은 모두 세부 주제로 깊숙이 들어가는 책인데, 거의 안 팔릴 것 같아요. (웃음) 최대한 쉽게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알리는 일은 역시 어려워요.

알라딘 : 하지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굉장히 쉽게, 잘 읽혔어요.

우석훈 : 이 책은 정말 작정하고 쓴 거예요. 쉽게, 재미있게. 삼국지 얘기도 넣고, 공각기동대 얘기도 넣고. 그런데 자꾸 이 책을 읽은 대학생들이 울었다고 해서 걱정이에요. 아니, 이렇게 재미있게 썼는데 자꾸 울면 어쩌자는 거야. (웃음) 아마 다들 자기 이야기라고 공감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에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알라딘 :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에 출간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생태요괴전>, <생태페다고지> 이 세 권은 모두 표지가 인상적입니다. 도저히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표지. 의도하신 바가 있나요?
















우석훈 : 표지 작업에는 관여를 안 해요. 다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같은 경우에 출판사에서 시안 몇 개를 보여주셨는데, <88만원 세대> 표지를 응용한 디자인들은 제가 제외를 시켰죠. <88만원 세대>가 표지가 너무 암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번엔 좀 밝게 가보고 싶었어요. 샤넬에 관한 이야기도 본문 중에 나오고.

<생태요괴전>과 <생태페다고지> 같은 경우에는, 사실 좀 파격적이죠. (웃음) 그래도 처음에 컴퓨터 모니터로 시안을 봤을 때보다 실물이 훨씬 낫더라고요.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꼴통 코드가 확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인데, 망하려면 확실히 망하는 거지 무난하게 맞춰서 하는 걸 안 좋아해요. 만약에 누가 저한테 “황당한 거하고 무난한 게 있는데 뭘 하겠어요?”라고 물으면 전 무조건 황당한 걸 하겠다고 해요. 재밌잖아요.

알라딘 : <혁명은 이렇게>의 핵심 메시지는 쫄지 마, 상상해, 믿고 나누어봐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사회적으로 만연한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과 나눔이 시작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출간 된 로버트 액슬로드의 <협력의 진화>에서는 그 물음을 게임이론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현실은 다르지 않을까요?


우석훈 : 게임이론의 틀을 가지고 말하자면, 모두가 이기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상황에서 협력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일단 다른 전략을 쓰는 돌연변이들이 생겨나야 해요. 이기적인 전략들이 연속성에 일단 단절, 작은 균열이 생겨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룹핑이 필요하고요.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니, 돌연변이들끼리 서로를 보호해주는 모임.

그걸 저는 ‘마을’이라고 표현해요. 그런데 요즘 20대들에게는 마을, 고향 이런 것에 대한 정서적인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책에서는 그걸 ‘진법’이라고 표현한 거죠. ‘진법’은 <삼국지>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딱 알더라고요. 아무래도 <삼국지>는 논술필독도서니… (웃음)

알라딘 : 항상 책을 읽으면 적절한 비유를 통한 개념화가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전략적으로 의도하신 건가요?

우석훈 : 독자들이 잘 알고, 공감할 수 있을만한 걸 찾는 거죠. 사실 이번엔 <삼국지>가 아니라 <수호지>를 넣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수호지를 많이 읽지 않아서. 이번 책은 <삼국지>와 [공각기동대]를 많이 참고했어요. 본문 마지막에 ‘다치코마의 노래’(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 나오는 노래)를 넣은 것도,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구상은 처음부터 [공각기동대] 이야기를 많이 넣어 진행시키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이 적어서 뒤로 뺐어요.

<88만원 세대>도 원래는 셜록 홈즈를 넣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이름은 많이 알아도 정작 코넌 도일이 쓴 셜록 홈즈를 생각만큼 읽지는 않아서 보류. 그래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어간 거죠. 디킨즈는 몰라도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렸을 때 한 번씩은 읽잖아요. 원래 제 취향은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건데… (웃음)

20대를 대상으로는 같은 텍스트를 놓고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요. 베스트셀러도, 영화도, 드라마도… 하다못해 요즘 [선덕여왕]이 인기 있지만 그걸 또 다 봤다, 이건 아니거든요. 그게 20대의 특징이에요. 다 함께 보고, 들은 경험이 없는 것. 공통의 텍스트가 없다는 거요. 오히려 30~40대 아주머니들은 공통된 텍스트가 있어요. 그 분들을 만나면 드라마 이야기나 신경숙․공지영 작가의 소설 이야기를 하죠.

알라딘 : 일단 혼자는 못하고, ‘마을’(모임)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은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마을’에 모이기만 한다면, 20대들은 아직 적절한 생산수단을 갖추지 못했는데, 결국 게토화 되고 마는 것 아닌가요?

우석훈 : 게토라도, 일단 20대 만의 게토를 만들라는 거죠. 처음엔 암울해 보일 수 있어도, 앞이 막막해 보여도, 결국 어느 순간 그곳에서 다양한 목소리, 상상력들이 나오기 시작할 거예요. 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거죠. 지금 20대만을 위한 공간이 어디 있나요? 홍대? 홍대는 ‘(고기를) 굽고 싶은 거리’죠. (웃음) 대학로? 아니거든요. 일단 20대끼리 뭉쳐야 해요.

알라딘 :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중 ‘68혁명과 차티스트 운동’, ‘아직 씌어지지 못한 권리선언문’이란 제목의 장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결한 메시지로 전달하자”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래알처럼 쪼개지고 분화된 욕망들 사이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요?

우석훈 : 기본권이죠.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지금의 20대들에겐 그게 정말 필요해요. 만약 10대한테 물어본다면, 그 친구들은 아마 ‘생리권’이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요. 잠을 못 자게 하잖아요.

사실 제가 가장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은 보건권이에요.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는, 의료의 사각지대에 있는 20대가 의외로 많아요. 이런 것들이 무너지면 국가가 있을 이유가 없는 거죠. 무엇 때문에 세금을 내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명색이 국가라면 국민들을 좀 챙기라고, 밥은 먹이라는 거죠 밥은! (웃음)

알라딘 : 지난 인터뷰를 했던 때가 마침 재보궐선거 5-0 스코어를 기록한 직후였지요. 그때 말씀으로는 “일종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후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 지지도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우석훈 : 한마디로 대안세력이 망한 거죠. 사람들이 현 정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지금의 대세가 그대로 유지되는 거죠. 다시 ‘대세론’의 시대가… (웃음)

사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요. 경제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이고, 이런저런 변수들을 고려하면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죠. 집권 여당이 생각하는 건 일본의 자민당 같은 장기 집권인 것 같은데, 그렇지만 어딘가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우석훈의 대안’이 궁금한 분들은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를…)
















알라딘 : 함께 일하는 동료의 질문입니다. 만약 촛불집회나 다른 시위 상황에서 ‘실력행사’를 해야 할 경우, 폭력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석훈 : 쉽지 않은 이야기죠. 제 생각은 일단,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방화는 진짜 나쁜 거고. 유리창에 돌 던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 거대한 권력 구조 앞에서, 어떻게 최대한 스펙터클하게 보여줄 수 있냐는 문제에요. 일종의 쇼가 필요한 거죠.

돌을 던진다고 할 때, 전경을 향해 던져야겠다면 맞지 않게 던져야죠. 정조준 해서 맞출 의도로 던지는 건 반칙이에요. 그러니 유리창을 향해 던지는 건, 사람도 다치지 않고 시각적인 자극이 크죠. 이런 퍼포먼스 형태의 폭력까지 다 막아버리는 건 너무하는 거죠. 핸드마이크를 허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다들 모여서 손에 핸드마이크 하나씩 들고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떠들면, 그것 자체로 굉장한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저런 것들을 다 막아버리면… 던질 수밖에 없는 거죠. 어떻게든 보여줘야 하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폭력으로 폭력을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알라딘 : 10년 전 상상하던 자신의 모습이 있으세요? 아니면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우석훈 : 10년 전이면 제가 서른둘인데, 개인적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언제나 내 인생은 마흔 살까지 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이후는 생각도 안 해본 거죠. 그냥 지금 제 모습을 본다면… 글쎄요. 10대에서 20대, 20대에서 30대가 될 때는 굉장히 싫었어요. 그런데 서른다섯이 되니까 아… 그냥 모르겠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흰머리가 자꾸 나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 너무 늙었다, 이런 생각만. (웃음)

그런데 신기한 건, 마흔 넘으니 많은 게 바뀌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느새 중요하지 않게 되고, 기호나 취향도 바뀌고.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신기해요. 하나 바뀌지 않은 건 만화책은 여전히 재밌다는 거. 정말 좋아했던 책이나 영화도 지금 다시 보면 싫어지는데, 집에 있는 <미스터 초밥왕>은 언제 봐도 재밌더라고요. (웃음) 만화가 진짜 예술이에요.

사회에 대해서는 5년 전쯤에, 한국이 앞으로 힘들 것 같다 생각한 적이 있긴 해요. 지금 보면, 그때 그 생각이 거의 맞는 것 같은데, 지금부터 10년 후라고 하면 정말 모르겠어요. 한국은 너무 빠른 사회잖아요. 당장 다음 대선에 누가 여당 후보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다만, 나쁜 미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알라딘 : 20대들을 위해 책을 추천하신다면.

우석훈 : 문화를 생산하거나, 기획하는 일을 하고 싶다면 움베르토 에코를 꼭 읽어야 해요. 인문서라고 하면, <로마인 이야기>말고도 로마에 대해 다루는 책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 중에서도 로마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다루는 책들을 읽으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지영 작가나 신경숙 작가의 책도 읽어야겠죠. 한국인이 말하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텍스트를 통해 분석해 봐야 해요. 생산자․기획자의 눈으로. 문학계에서 한국을 이끌어가는 두 사람이잖아요. 베스트셀러는 안 본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웃음)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결국 대중과의 대화에 성공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어떻게 가능할까? 그 텍스트들을 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는 거예요. 이 두 사람을 보면 여전히 책의 힘은 강력하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이 문화생산자 혹은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바로 지금, 자기가 누구한테 이야기할 건지를 분명히 알아야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 성공한 텍스트를 일종의 레퍼런스로 삼을 수 있는 거죠. 문화를 생산하고 기획하는 일은 지금 이 사회에서 충분히 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물론 모두가 구원받을 수는 없겠지만.

알라딘 : 앞으로의 집필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우석훈 : 일단 12권짜리 ‘경제대장정’ 시리즈가 있죠. 이제 반 왔는데… 그게 본 시리즈이고, 그밖에 번외 편들이 있어요. 밀려있는 것만 해도 ‘인민노련’에 관련한 일종의 운동사가 있고, 사회과학 방법론에 대한 책이 있고, 화폐론에 관한 책이 있어요. 우리는 신자유주의만 이야기했지, 그 안의 화폐정책 이런 건 이야기 안했잖아요. 어쨌거나 오늘날 사회를 움직이는 두 가지는 돈과 말인데.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의 경제학> 이라는 책도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일종의 드라마 감성이죠. 제가 아침 드라마까지 즐겨보는 드라마 광이거든요. (웃음) 이 책들도 지금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년 여름쯤이면 어떻게든 일단락이 될 것 같아요. 물론 밀릴 수도 있지만. (웃음)

알라딘 :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이후로는, ‘88만원 세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책을 더 쓸 생각은 없으신가요?


우석훈 : 일단은 계획이 없어요. 할 이야긴 이미 다 한 것 같고. 어쨌거나 저는 지금의 20대들과 좋든 싫든 함께 가야만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10년 후에, 지금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조명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긴 해요. 10년 전에 ‘88만원 세대’라 불리던 이들이 30대가 되어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보고 싶어요.

알라딘 : 자, 마지막은 공식질문입니다. 우리사회를 살고 있는 20대들에게 한 마디!

우석훈 : 저는 대학생들에게, F학점 한 번 맞는다고 죽는 거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죽기는커녕 사실 아무 일도 없잖아요?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재수강하거나, 지우면 되고. (웃음) 그러니 한 번 F학점도 받아보고 시험거부 같은 것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이 달라져 보일 거예요. 아, 별일 안 생기는 구나 깨닫는 것만으로도.

알라딘 : 네, 대학생 및 직장인 여러분, 고과평가 F 맞아도 이렇게 월급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 약간의 뒷 이야기 ***

- 인터뷰에 이어 진행된 강연회에는 쌀쌀한 날씨, 인문대 가을축제 기간(?)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대학생 분들 뿐 아니라, 교복을 입은 학생도 학부모 님들도 모두 모인  훈훈한 자리였다는…

- "같은 글 안쓰고, 같은 강연 안한다"를 모토로 삼으신다는 달인(?) 우석훈 박사가 잡은 이번 강연회의 키워드는 바로 "쯤, 불완전, 호구, 진법"

-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날 Y대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다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 남학생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 "나쯤 되면" "Y대 쯤 다니면" "공대생 쯤 되면" "키도 이 쯤 되면" "얼굴도 이 쯤 되면" "옷도 이 쯤" 처음 부터 끝까지 '쯤'으로… 이것이 바로 지금 평범한 대학생들의 자기 인식이 아닐까?

- 하지만 그 '쯤'들을 다 모은대도 결국 불완전 할 뿐이다. 결국 쯤일 뿐이 아닌가. 그 쯤은(?) 우리도 안다. 2% 모자람을 인식하고, 그렇기에 자신을 완벽하게 해줄 2%를 찾는다. 이런 욕망을 유혹하는 것이 바로 명품 마케팅. 이 가방 하나면, 이 옷 하나면 나도 완벽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 그런 이들을 가리켜 전문 용어로는 '엔트리', 일반적으로는 '호구'라고 한다는…

- 그리하여 그런 20대들이 소비 문화 속에서 소비 되지 않고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진법'이 필요한 것이니- (이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참고)

-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참 많은 책을 내셨는데, 그 중 어떤 책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우문이지만, 물었다. 흔쾌히 대답하는 우석훈 박사. 그 책은 바로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조직의 재발견>의 구판. 표지와 제목, 서문이 다름)

- 그 난해하기로 '소문났던' 서문이 실은,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의 정수라고 한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의 책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그 책의 서문 만은 구할 길이 없다. 이런 아이러니가!

-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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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바람 2009-10-14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꾸, 눈물 나려고 했던 것이 저 뿐만은 아니었군요.ㅋㅋ

활자유랑자 2009-10-16 17:00   좋아요 0 | URL
자꾸 눈물 흘리시면 우석훈 박사님도 눈물 나실 듯. ㅎㅎ

Suz 2009-11-2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
말로만 듣던 88만원세대, 우석훈 박사님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박사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활자유랑자 2009-11-30 13:13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기뻐요 :)

be갠후 2010-08-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겼네요. 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박사님 감사합니다.
 




거침 없는 문화평론가, <무례한 복음> 이택광 인터뷰




얼마 전 출간된 <무례한 복음>을 통해 대선에서부터 용산참사까지,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엄마가 뿔났다'까지 한국의 욕망구조를 분석했던 이택광을 만났다. 책에서 다룬 놀라운 스펙트럼처럼, 역시 많은 이야기가 오간 인터뷰. 주요 등장 인물만 꼽아도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우석훈 박사, 김어준 씨, 박재범 씨, G-Dragon… 숨기지 않는 사투리로 거침 없이 쏟아내는 그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알라딘 : 얼마 전에 우석훈 씨가 “블로그를 책으로 묶어서 내지 말라”는 식의 포스팅을 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블로그의 글을 엮어 책을 내신 입장에서 한 말씀 하신다면? (웃음)


이택광 : 첫 질문부터 왜… (웃음) 개인적으로는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책으로 내는 일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에요. 블로그는 개인이 발행하는 일종의 잡지, 매체이고 책은 그 중의 일부를 골라서 내는 선집인 거죠. 집중적으로 주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선집. 그러니까 재출간의 개념이에요.

특히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대체로 외부 매체에 기고한 글들이에요. 그런 글들은 대개 부분적인, 작은 일들을 다루지만 한데 묶어 놓으면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았을 땐, 오히려 더 커다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죠.

또한, 블로그란 매체의 특성상 독자참여가 가능하고, 다시 책으로 엮을 때는 그런 부분을 반영해서 수정하고 추가하니까 일종의 완성본이 되는 거죠. 이를테면 블로그는 사유의 과정,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이고 책은 완성품인 거예요. 그 과정을 공개한다는 건 지적 민주화의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는 거겠죠. 글이라는 게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산물이 아니라, 공동의 사유와 노력이 들어간 사회적 산물이니까.

외국 유명 저자들도 대부분 블로그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은 블로그를 빼놓고는 글쓰기를 생각할 수 없어요. 데리다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최종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도 인터넷에서의 글쓰기, 그곳에서의 주체의 출현이에요. 결코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요. 그런데 낡은 매체 구분법으로 블로그의 글을 낙서 정도로 생각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라딘 : 방금 ‘독자참여’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종종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를 구경하는데, 단순히 ‘독자참여’라고 말하기 힘든 댓글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웃음)

이택광 : 제 블로그의 원래 고정 독자들은, 제 주위 분들도 있고 말하자면 ‘고급독자’ 층이에요. 제 글쓰기도 역시 그런 분들을 타깃으로, 그런 분들에게 호소하는 글쓰기인 건데… 악플러들은 그냥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왜 방치하는지 묻는다면, 그들이 드러내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욕망이거든요. ‘열폭’(* 인터넷 신조어로 ‘열등감 폭발’의 준말) 한다고 하지요. (웃음)

그런 것을 통해서 얻는 건 역설적 효과예요. ‘한국사회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거죠.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관찰하고 있으면 대타자의 욕망이 드러나요. 저에게는 하나의 실험, 분석대상이에요. “정신분석학은 치유는 할 수 없지만, 무의식의 실험적 모델을 보여줄 수는 있다”라는 라캉의 말처럼, 저 역시 하나의 실험적 모델을 보여주는 거죠.

사실 제 블로그에 악플을 다시는 분들은 대화를 필요로 해서 오시는 분들이에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죠. 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포지션이 왼쪽인 분도 있고, 오른쪽인 분도 있는데, 분명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지켜보면 같은 내용의 발화를 하고 있어요. 신기하죠.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한국사회의 문제가 결국 욕망의 문제임을 알 수 있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제 블로그가 아고라 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알라딘 : <무례한 복음>의 첫 글 ‘이상한 대선’에는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를 넘어 한국 사회가 다른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덧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택광 : 외국 사회에서 한국을 바라볼 때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한국은 민중이 파시즘적이고 부유층들이 미국식 자유주의적이라는 점이에요.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격적 평등주의가 강하죠. 사실 잘 모르겠어요. 파시즘으로 갈 수도 있고, 극적인 반전이 생겨서 사민주의 같은 형태로 나아갈 수도 있는데…

한국의 지배세력은 오히려 파시즘을 원하지 않아요. 미국적 모델을 추구하죠. 제가 보기에 현재의 지배체제는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파시즘적 경향 혹은 열망은 있지만 담아낼 제도가 없습니다. 혁명은 이미 끝났어요. 허경영이라는 존재는 민중의 파시즘적 열망을 패러디하고, 사람들은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현재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주체는 강남좌파예요. 동의, 비동의를 떠나서 주류에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죠. 바디우 식으로 말하자면 ‘목소리가 있는 사람’. 제가 보는 강남좌파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우석훈 씨에서 한비야 씨까지 아우를 수 있어요. 굉장히 넓어요.

앞으로 한국사회가 가장 이상적으로 간다면 지금의 영국사회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강남좌파의 주도로. 한나라당은 보수당이고, 진보신당은 신노동당이 되겠죠. 계급적 투쟁은 사라지고, 정치적 헤게모니는 중산층이 쥐게 되는. 지금 논의하는 중도변혁의 비전이 결국 이 형태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창비담론 같은 거죠. 창비담론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도래할 보수주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어요. 결국 그 보수주의는 선진국형 보수주의죠.

주대환 씨가 “이제 우리도 정상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사민주의로 가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사회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말처럼, 그렇게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 지금 존재하는 모든 담론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강남좌파를 포섭하려는 거예요.

한국사회 지식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대중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실은 지식인들이 더 멍청하게 보이거든요.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으로는 일반 사람들을 도저히 설득할 수 없으니까요.

알라딘 : 작년 ‘9월 위기론’, 올 ‘3월 위기론’ 등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결국 주가는 회복했고 부동산 값도 다시 치솟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론에 둔감해지거나, 오히려 더욱 ‘먹고사니즘’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택광 : 위기론에 대한 명쾌한 근거 혹은 진단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한국사회의 우파는 열심히 일하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부자에 대한 약속을 하죠. 그런데 진보개혁세력은 자본주의 망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어요. 물론 둘 다 지켜지지 않고, 따라서 둘 다 신뢰할 수 없게 된 거죠.

위기에 대한 총괄적인 접근 없이 미네르바 같은 메시아적 존재에 의존하며 막연한 위기담론만 생산했던 게 문제라고 봅니다. 일종의 신화죠. 결국 진보개혁세력의 안이함이 부추긴 거예요. 일례로 뉴레프트리뷰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신자유주의 체제에 필연적으로 닥쳐올 경제위기에 대한 지상논쟁이 계속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죠.

알라딘 : 또 다른 위기 담론인,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택광 : 사실 위기는 40년대에 있었죠. 아우슈비츠 이후에 인문학은 끝났습니다. (웃음) 사실 제도로서의 ‘인문학’은 무너지고 있고,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게 바로 ‘인문학적 사유’죠. 알튀세르 이후의 인문과학적 사유, 즉 비판적․성찰적 사유를 뜻합니다.

결국 인문학의 종언이라는 건 자유주의 인문학의 종언이에요. 근대에 상정된 완결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멸해 가는 거죠. ‘인문학적 사유’라는 말도 정확하게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요. 어떤 사람들은 인문학을 공부하려면 고전을 보라고 하는데, 돌아갈 수 있는 인문학이 없습니다. 차라리 당대철학을 먼저 읽으세요.

알라딘 :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아이돌 그룹 2PM의 박재범 씨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와, 김어준 씨의 애국 발언 논쟁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택광 : 박재범 논쟁은 애국주의 논쟁의 파탄을 보여준 거죠. 민족국가는 근대의 절대적 근거이고, 주체를 구성하는 데 가장 토대가 되는 개념이에요. 애국주의 비판은 근대국가 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그것의 모순을 ‘내파’하려는 시도,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미 자명한 애국주의를 다시 옹호한다는 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요.

김어준 씨의 ‘소비자’ 발언(* 관련기사 보기)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논리에요. 촛불정국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구호는 ‘이명박 과장님, 경리과에서 퇴직금 받아가세요’였는데, 결국 같은 논리인 거죠. 한국의 경제주의를 보여주는.

유승준 논쟁과의 차이는, 그때는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고 봐요. 그러니까,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하지만 박재범 논쟁 때는, 한국을 정상국가로 상정해 버렸어요. 그래서 일종의 자기 정체성의 파괴로 인한 파국이 온 거죠. 결여에서 나오는 유토피아적 열망이 차라리 나아요. ‘미녀들의 수다’만 봐도, 충분히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왜 박재범만?

알라딘 : 그렇다면, 지드래곤을 둘러싼 표절 논쟁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택광 : 표절논란은 항상 있어 왔어요. 비판적 거리를 둘 수가 없는 상황에서, 대중들이 사회적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표절논란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성적 측면이 아닌, 경험의 측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나올 수 있는 거죠. 나 노래 많이 들어, 나 비슷한 노래 들어봤어 이렇게.

주체가 비판적 사유를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일 수 있는 거예요. 결국 베꼈나 베끼지 않았나는 중요한 게 아니죠. 일종의 놀이, 유희 같은. 비판적 사유의 대체로 기능하는 거라고 봐요.

알라딘 : 바로 어제, 故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록이 아홉시 뉴스에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노무현 대통령과 故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 관련 도서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를테면 애도가 소비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담당자로선 참 많은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택광 : 저는 일종의 재발견이라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이념과 순결주의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지키려고 했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는. 그에 비견할 만한 정치인은 김대중 대통령이겠지요. 물론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에는 근대적 정치국가에 대한 확고한 정치철학이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것이 명확하진 않았지만 비타협주의가 그를 돋보이게 했던 측면이 있어요. 또한 김대중 대통령을 잘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지요. 다만, 앞으로는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것에 집중하기 보단, 노무현 정부가 한 일, 못한 일에 대한 논의들이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는 정치적 이념과는 상관없어요. 이명박 정부 지지율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다만 현재 자신의 삶의 팍팍함, 상실감에 대한 표현이죠.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굉장한 포퓰리스트에요.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중도실용 카드를 꺼내고, 정운찬 씨를 데려갔죠. 중간계급을 포섭하려는 시도에요.

알라딘 : 한국사회의 경제주의, 다시 말해 ‘먹고사니즘’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아 보입니다. 이 먹고사니즘의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개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택광 : 먹고사니즘에는 외부가 없어요. 먹고사니즘은 탈이데올로기가 아닌 아주 경험적인, 거대한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의 놀라운 과학이라고 할까요(웃음). 사실 푸코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예견한 거죠.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결국 가장 쉽게 통치되는 존재에요. 새로운 자율주의 규율체제라고 할까요. 그렇게 훈육된 주체들이 바로 먹고사니즘의 주체들이죠.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것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결코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실 먹고사니즘이 굉장히 매끄럽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진 않거든요. 그 속에서 끊임없는 갈등들이 있어요. 다들 살아가며 그런 것을 느끼고, 자기가 느낀 것을 설명하고픈 욕망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는 능력론이 차단하고 있는 거죠. 이른바 ‘자기계발’이라고 불리는 자기 규율화 담론이.

이 안에 독창적인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한 ‘공가능성’이라는 것이 있어요. 단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진리적 공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죠. 예술, 사랑, 철학, ‘공부하는 주체’, ‘책 읽는 주체’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적 욕망 같은. 그런 욕망은 먹고사니즘이 강해질수록 더 커지게 마련이죠. 그때 그것이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필요한 거예요.

‘공부하는 주체’라고 표현했듯이 공부한다는 것 자체도 습관적 틀을 벗어나는 거죠.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많아질 때… 결국 다른 것들이 보이는 거겠죠. 먹고사니즘을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알라딘 :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알라딘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이택광 : 음, 어려운 질문인데… (웃음)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 특히 뒤의 두 책은, 지금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에서 비전에 대해 얼마만큼 고민하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알라딘 : 고맙습니다!

* 이 인터뷰는 추석 이후 알라딘 저자 파일 란에도 등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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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2009-10-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진이 왜 이런가요. 목을 뚝 떼버렸네 -.-

저도 윗님에 2009-10-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윗님에 동감. 전 무슨 랙 걸린 줄 알고 한창 마우스 휠 버튼을 올렸다 내렸다 했네요. ;;

이거 누가 인터뷰? 2009-10-04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치적 포지션이 왼쪽인 분도 있고, 오른쪽인 분도 있는데, 분명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지켜보면 같은 내용의 발화를 하고 있어요. 신기하죠.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한국사회의 문제가 결국 욕망의 문제임을 알 수 있는 거죠."에서

무슨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심? 좌든 우든 모두, '반대'하는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죠.
"욕망", "파시즘"을 수시로 사용하는 것도 안이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다 틀렸고 자신은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욕망이고 파시즘적 태도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파시즘 2010-02-06 23: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개념정의나 하고 시작하는게 나을뻔...

이거 누가 인터뷰? 2009-10-0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읽어 보니 우석훈, 한비야를 엮어서 "강남좌파"? ...변희재도 아니고.
이택광은 무늬만 좌파지 우월감과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트 우파"죠.

ㅂㅈㄷㄳ 2009-10-05 10:4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목이 있으시군요!

활자유랑자 2009-10-0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 및 사진 편집은 알라딘 인문MD가 했고요, 아무래도 본업(= 책파는 일)이 아니라서 좀 미숙한 점이 있습니다. 양해부탁드려요 ;;; 인터뷰 내용에 대한 건... 제가 답할 성질은 아닌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

sad 2010-08-1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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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노무현 전 대통령 못다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이 오늘 출간되었습니다.  

아래는 노무현 대통령 공식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http://www.knowhow.or.kr/)'에 게재된 책소개 게시물의 내용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못다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다쓴 회고록-성공과 좌절>이 출간됐다. 회고록은 제1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와 제2부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글들로, 회고록을 쓰기 위한 목차와 대강의 구성까지만 완성하고 서거했다. ‘미완의 회고’에 실린 메모(지난 5월 20일 최종수정)들을 보면 노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어떤 고민을 했나, 그 편린들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제3의 길 - (중략) 생산적 복지, 참여복지, 비전2030. 비전 2030은 국민에게 인사도 못하고 보수화의 바람에 묻혀버렸다. 진보언론도 적극적으로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목표는 2020까지 극우의 나라에서 보수의 나라로, 2030까지 중도진보의 나라로 가자는 것.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대통령 이야기-참여정부의 노선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얼마나 했을까? (중략) 절반의 성공도 못되는 절반의 미완성이다. - 오히려 밀린 것도 있다. 감세정책이 그것이다. 그나마 무너지고 있다. (중략) 부동산은 비틀거리며 겨우 밀고 갔다. 이제 다 무너지고 있다.”(대통령 이야기-왜 실패했을까?)

“인류의 미래는 지속 가능할 것인가? 전쟁, 기아와 질병, 환경의 파괴, 자원의 고갈, 인간의 도덕적 역량은 스스로의 파멸을 막을 만큼 현명한 것일까? 당면한 과제-양극화와 빈곤의 문제. 일자리가 줄어든다-세계화, 기술혁신/고용 없는 성장.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중소기업, 서비스산업, 새로운 산업/신성장동력, 녹색경제, 수소경제, 스마트그리드, 똑똑한 지구, 사회적 일자리/핀란드의 신성장동력, 사회적 기업, 근로시간 단축에 관하여”(아직도 답을 찾고 있는 과제들)

봉하 단상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 비공개 카페에 올린 글들을 모은 ‘봉하단상’에선 퇴임 후 여러 사건과 보도들에 대한 노 대통령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다양한 주제에 천착했다. 진보진영의 분열, 민주주의와 시민주권, 북한의 로켓발사, 이명박 대통령의 교육정책, 신영철 대법관의 압력 논란, 남북 군사력 비교…. 대통령의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정책은 전문가들의 특별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4월 4일에 올린 ‘춤추는 미사일, 누구를 위한 것일까’라는 글에서 노 대통령은 “과연 북한의 로켓 하나가 정말 온 세계가 떠들 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일까? 미국과 일본, 한국이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가운데 연료 주입에 며칠씩 걸리는 로켓 하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라고 묻는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대응 때문에 시비가 많았던 2006년 당시 청와대 상황을 회고한 뒤 다시 묻는다.

“정치와 언론 간에 각기 눈앞의 손익계산으로 주고받는 공방들, 과연 누구에게 무엇이 얼마나 남는 놀이가 되는 것일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언론은 먹을거리를 챙길 것이다. 국민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 결과는 점점 높아지는 긴장과 적대감, 그리고 전쟁의 위험과 불안일 것이다.”

언론은 흉기다

노 대통령이 서거 전에 겪었을 마음고생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절절함으로 다가온다. 4월 말에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노 대통령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저의 안마당을 돌려주세요. 안마당에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자유, 걸으면서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최소한의 사생활이라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간곡하게 호소했다. 사저가 카메라와 사진기자들에 둘러싸여 24시간 감시받는 감옥이 된 상황에 대한 심경은 4월 12일에 쓴 ‘언론은 흉기다’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죄수가 1.5평 밖에 안 되는 감방 안을 천천히 한 발씩 내딛으며 자유를 갈망하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은.

“산다는 것이 뭘까? 안방에서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뒤로 돌아서 다시 하나, 둘….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기자들 때문에 마당에도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엊그제 뒤뜰에 나갔던 모습이 조선일보 카메라에 잡혔다고 한다. 1킬로미터가 넘는 산꼭대기에서 망원카메라로 잡은 사진이란다.”

시대는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제2부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은 퇴임을 앞둔 2007년 노 대통령이 자신의 인생역정과 정치역정, 참여정부 5년의 국정운영에 대해 스스로 평가한 육성기록을 주제별로 재구성한 것이다. 퇴임 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정리해 책으로 낼 계획이었으나 서거로 중단됐다. 결국 노 대통령이 자전적으로 정리한 마지막 기록이 됐다.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에서 노 대통령은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다고 회상한다. 그 시절의 표상이었던 큰 형님, 4·19와 5·16의 기억, 울산 막노동판 경험과 고시 공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싶었지만 판사 발령을 받게 된 사연을 떠올리며 격동의 80년대로 회고는 이어진다.

특별한 자각이 없었던 판사를 그만두고 법대로 살고자 했던 노 변호사는 부림사건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면서 ‘그냥 양심적으로 살면 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느낀다. 대학생들 변론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다 점차 운동이 본업이 되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 당시 대우조선 이석규씨 장례식에 갔다가 구속되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것이 국회의원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노 변호사가 국회에 진출하게 된 동기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분을 취득하려는 목적이 컸다. 노 의원의 초창기 의정 활동은 모두 노동현장이었다.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거치면서 명성을 얻은 노 의원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후 20년 동안 ‘노무현 정치’는 지역주의와의 싸움, 기회주의와의 싸움이라는 두 개의 큰 싸움으로 귀결된다.

노 대통령이 보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시각은 상반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투사가 아니라 사상가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3당합당으로 민주세력의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철새정치로 한국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고 비판한다.

‘바보 노무현’과 노사모에 대한 단상, 대선출마 동기, 청와대를 떠나는 홀가분한 소회, 고향으로 가는 이유를 끝으로 노 대통령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회고를 접는다.

‘구시대의 막내 노릇’과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에서 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공약했던 우리 사회의 과제들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며 서두를 풀어간다. 담담한 톤으로 이어지던 회고는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 마지막 청소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착잡했던 심경도 내비친다. 경제 파탄론과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서는 다소 목소리를 높인다. 5년 내내 경제가 파탄났다는 이야기를 해댔지만 사실이 아니었고, 어떤 평가기준을 대도 참여정부 실패론은 반박할 수 있다고.

“후보 시절에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 서문에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라고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습니다. (중략)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것은 조금 가혹하고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싶습니다.”

한국경제 낙관론

노 대통령은 한국경제에 대해선 낙관적으로 진단한다. “경제는 정책을 투입해서 효과가 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참여정부가 노력한 결과는 앞으로 2~3년 동안 계속 나타날 것”이라며, 한국경제를 “기초 체력이 튼튼하고 기술 수준도 상당히 높은 축구팀”에 비유한다.

“경제는 정치적 목적으로 무리하게 하지 않으면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이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됩니다. 한국은 시장의 역동성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나라입니다. 국민의 자질이 높은 만큼 우리 경제는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는 참여정부에서 미래의 성장과 복지를 함께 이뤄가기 위해 제시한 ‘비전 2030’이 주목받지 못한 점을 든다. 노 대통령은 ‘복지냐, 성장이냐’ 논란은 박물관에 보내야 될 이론이라며, 이미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및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정책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북정상회담과 김정일 위원장

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만난 김정일 위원장의 첫 인상은 ‘국정 전반을 소상하게 꿰고 있으며 자신의 소신과 논리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며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유연하게 느껴진 사람은 김정일 위원장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과 끝난 지 2주 가량 지난 후의 구술기록이 같이 실려 있어 회담 전후 노 대통령의 생각을 모두 엿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향후 NLL에서의 충돌 방지를 위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술회한다.

노 대통령은 북폭설까지 나오던 북핵위기 상황을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어떻게 헤쳐나왔나를 얘기하면서 대북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의 축적’이라고 설명한다. “일관된 원칙, 대안이 있는 원칙,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축적되는 신뢰”, 이런 것이 남북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소회

이라크 파병에 대한 소회는 남다르다. 대통령으로서 한·미간에 필요한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자이툰부대가 한·미관계에서 여러 현안을 처리할 때마다 정서적 지렛대 역할을 상당히 했지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참으로 어렵고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인간 노무현’이 아닌 ‘대통령 노무현’의 고뇌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역사의 기록에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대통령이 역사의 오류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즉 스스로 역사의 오류로 남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숙명 같았던 언론과의 갈등

노 대통령은 언론과의 갈등을 숙명이 아니겠냐고 스스로에게 답하는 듯하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두 가지로 “하나는 적어도 정치권력이나 정부권력과 언론이 유착하는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고, 또 하나는 언론이 지난날 누려오던 특권적 지위는 더 이상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꼽았다. 지금 시기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언론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고,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부연이다.

“우리 언론은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가 그로부터 해방된 다음에는 이 권력, 저 권력과 제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중동입니다. (중략) 그들이 권력의 대안과 결탁해서 직접 게임에 참여하는 주전선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중동이 주전선수입니다.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습니다. (중략) ‘당신들은 선수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 언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것이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

탄핵, 대연정, 선거법 개정과 개헌, 가치가 실종된 대통령선거, 우리 사회의 진보와 진보세력 등으로 회고가 이어지면서 노 대통령은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을 얘기한다.

“5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면 제가 공약했던 민주주의의 과제, 즉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왕적·권위적 지도자의 정치문화를 바꾸고, 낮은 권력과 법치주의와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실현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분명히 진보한 것이 맞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해보자고 인생을 걸고 도전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결국 거의 원점에 돌아와 있습니다. 분열주의와 기회주의가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입니다.”

사람사는 세상’ 사인을 쓰는 이유

‘한국 정치에 대한 단상’에서 노 대통령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라며,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의 눈높이를 넘어 역사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하면 주권자인 시민이 가장 존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치가 가장 상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사인을 매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 각자가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자기가 할 역할을 해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못다쓴 회고록>은 ‘시민주권 사회, 사람사는 세상’으로 끝을 맺었다.


노무현의 두 번째 이야기


<성공과 좌절>을 읽다보면 지역주의와, 그리고 기회주의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정치인을 만날 수 있다. 현실정치에선 비주류였지만 국민들에게 사랑받았던 ‘바보 정치인’이 서있다. 남과 북의 평화와 공존을 갈구한 대통령을 만난다. 강대국에 비굴하지 않고 자주적인 생존을 추구한 지도자를 대면한다. 시대를 고민했던 대통령 노무현, 죽음마저도 시대와 함께한 인간 노무현을 만난다.

노무현,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갈망했던 사람사는 세상을 찾아가는 여정은 끝난 게 아니다. 그가 가고자했던 길을 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갈 것이다. 노무현의 두 번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긴 여정을 위한 안내서 <노무현 대통령이 못다쓴 회고록-성공과 좌절>의 일독을 권한다.

“사람답게 대우받는, 사람 노릇을 하는, 사람이 돈과 시장의 주인 노릇을 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 나의 실패가 여러분의 실패는 아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가야 한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성공과 좌절> 표지에서)


출처 : 사람사는 세상(http://www.knowhow.or.kr) 홈페이지 책소개 공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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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책이 나왔네...
    from 시간의 흐름, 그 속의 책 2009-09-22 00:52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서 아픔으로 남아 있는데, 글이 나왔다.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고, 솔직한 글들이 눈에 띈다. 아마도 '좌절' 이라는 저 단어가 지금 이 세상에 목숨을 남기지 않게 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미래에는 그의 '성공'을   이야기하고 싶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바꾸려 했기에 일어났던 많은 덧없는 일들이 나중에 나중에 (어쩌면
 
 
미국에서도 볼수 있나요? 2009-09-2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사는 세상에서 알라딘에 책이 나왔다는 글을 보고 찾아왔어요..여긴 미국인데 미국으로도 택배가 되는지 궁금하네요..어떤 방법을 써서도 꼭 책도 구입하고..내일 창립발기인 대회 한다는 노무현 재단에도 반드시 후원하겠습니다.노무현대통령님..당신 스스로는 실패했다고 말씀하시지만 아니요..제가 변했고..제 주변 사람들이 변했고 그렇게 당신으로 인해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시간이 걸릴지라도 당신이 원하는 사람 사는 세상은 꼭 올거예요..지켜봐 주세요...사랑합니다..내 마음 속의 영원한 대통령..노무현대통령님...당신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메로로롱미ㅏㅇ 2009-09-2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구입하는데도 참 .. 오랫만에 눈물이 납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요.... 책이 얼른 와서 읽고 싶습니다.. 받는순간,,, 읽는 매 순간마다 얼마나 눈물이 날지 ...... 왜 이렇게 눈물나게 하는 사람이 되셨는지.. 잘지내시죠? 잘 지내실거라 믿습니다^^

라종철 2009-09-2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신지 반년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맛있는것 먹고. 좋은곳 보며 잘 살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하늘에서 편안하신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없는 지금 그 빈자리가 너무도 크군요, 어서 점심먹고 서점에 달려가겠습니다. 당신을 느낄수 있을것 같이 지금부터 가슴이 뛰는 군요... 사랑합니다... 우리 대통령.....

늘새로운아침 2009-09-2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왔다는 소식 듣고 알라딘에 와서 찾아봅니다. 또 눈물이 나서 책 표지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네요. 보고 싶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