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현대 그리스의 ‘문제적 인간’ 조르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고, 내가 그 말을 들은 것은 공교롭게도 동원훈련 기간 중이었다. 그것은 담배 피고, 툴툴대고, 벌렁벌렁 아무 데고 드러눕기만도 짧은 2박 3일 일정에 책을 붙잡고 있는 인간한테 하는 말이 틀림없었으니 그저 뜨끔, 할 수밖에. 돌아온 사무실, 책상 위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아마 나는 주머니속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던가.

하지만 끝내 불꽃은 피어나지 않았으니, 다름 아닌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한 녀석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기왕에 덜 된 인간, 이왕이면 좀 더 책과 뒹굴어 보는 건 어떻소?”라고. 저자는 칼 폴라니, 제목은 <거대한 전환>이란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몽환적인 그림이 표지로 쓰인 탓일까? 그 말에 홀딱 넘어간 귀 얇은 짐승은 그리하여 이렇게 서툰 글을 끼적이고 있다. 인간이 되기를 잠시 포기한 채.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인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푸릇푸릇하던 스무 살 시절에 이미 “꿈이 뭐냐”던 여자아이의 물음에 “놀고먹는 거”라 답하고, “그래도 돈은 필요하지 않냐”는 말에는 “안 벌고 안 쓰면 돼”라고 말하던 내가 폴라니의 이름에 반응하게 된 것은 사회 탓이다. 일종의 반복학습. 평생가도 들을 일 없던 그 이름이 어느 순간, 레알 마드리드에 영입된 호나우도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폴라니가, 오늘 우리에게 폴라니는, 폴라니에 따르면……. 마치, 이번에야말로 우리 팀의 우승을 확실하게 견인할 ‘킬러’ 스트라이커의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듯. 일개 팬에 불과한 사람으로서는 무의식중에라도 그 이름을 새겨놓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전환>을 바라보며 ‘드디어’와 ‘과연?’, 두 개의 부사를 떠올린다. 절판되어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그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그것이 정말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물론 의구심이 더 클 수밖에. FA 선언을 한 홍현우와 진필중을 어마어마한 돈으로 영입해서 말아먹었던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는 LG의 팬들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꽤나 세차게.

폴라니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가 소비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어떤 이론도 완벽할 수는 없고, ‘거대한 전환’은 ‘소소한 전환’들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폴라니 그 자신이 바로 ‘거대한 전환’일 수는 없는 것. 그의 이름이 아무리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고 해도, 진보와 보수가 함께 입 모아 소리쳐도, 단지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책망에 더 가깝다. 괜히 ‘과연?’이라며, 끝까지 읽지도 않고 건방을 떠는 모습이 스스로도 같잖은 모양.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름의 ‘소소한 전환’을 마음먹어 본다. 귀동냥으로만 듣던, 남들의 필터로 걸러 보고 그래서 오해했을 폴라니를 이번 기회에 찬찬히 읽어 볼 것. 그래서 ‘과연?’이 ‘과연!’으로 변하(전환 되)는 과정을 스스로 지켜볼 것. 물론 ‘과연?’이 ‘역시~’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우리가 바로 지금 폴라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94쪽) 같은 근사한 문장을 읽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결코 책을 팔아먹으려 하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책을 산다면 기쁘겠지만, A서점에서 산다면 더더욱 기쁘겠지만. (쿨럭) 아마 나는 인간이 되기는 그른 모양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8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 '소소한 전환!')




동원 훈련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간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작년, 재작년에 들고 간 <금각사>와 <인 콜드 블러드>를 생각하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남들 다 쉬러 오는 예비군 훈련, 어두컴컴한 막사 불빛 아래에서 3일 내내 책을 들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burn after reading 하려고 했다는...)

인문MD를 맡은 이후로 뿌듯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시 나온 <자본>을 메인 프로모션 한 일이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대한 전환> 역시 메인 프로모션을 했지만, 그만큼 뿌듯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도 폴라니 폴라니 해대서 짜증이 좀 났달까? 그런 짜증이 좀 담겼다.

중간에 나온 "과연?"과 "역시"는, "아직?"과 "아직도?" 농담을 변형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모던 소년/소녀들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난 벨 엔 세바스챤. "불길한 느낌이 든다면 가서 목사님을 만나봐"(If you're feeling sinister, go up and mee minister)라는 우아한 라임을 구사하던 그들이었지만, 너무 유행을 타버렸다. "아직 벨엔세바 안들어봤어?"와 "아직도 벨엔세바를 들어?"의 간극이 그만큼 짧았던 것. 뭐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교훈조로 흘러간 것은, 실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이 문장은 언제 봐도 멋지다. 이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는 프로이트 <꿈의 해석>의 첫 문장이 있다.

"다음에서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학적 기술이 존재하며, 이 방법을 적용하면 모든 꿈은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는 뜻 깊은 심리적 형성물로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아, 나는 여전히 <거대한 전환>을 읽지 않았다. 실은, 이제야 조르바의 말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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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거대한 전환이 나온걸 보고, 그 이후에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제사 이걸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고, 아직도 보관함 대기중 --;;
(그러나 왜 이 페이퍼를 읽으며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까요? ㅎ
인문md님의 능력은 탁월하고도 높아라!!)

활자유랑자 2009-12-21 13:37   좋아요 0 | URL
이쯤에서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을 후루룩 읊는다면 폼 나겠죠.
그러니 하지 않겠습니다... (응?)
실은 어제도 원고 하나 붙잡고 낑낑 대느라 오늘은 컨디션이 영 꽝이네요 ㅜㅜ


드팀전 2009-12-2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품목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군요. ^^ 벨앤 세바스천도 처음에 나온 음반들이 레드음반, 그린음반 등이 좋았어요... 조르바는 10년에 한번씩 읽기로 한 책이어서 내년이 되면 3번째 읽을 생각입니다...이윤기 역이 너무 지배적이라..고려원에 이어 출판사만 계속 바꾸고 있으니...흐.. 새해에는 맘 고생 덜하는 MD가 되시길..사는게 다 그렇습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2   좋아요 0 | URL
아직도 벨앤세바를 들으시나요? (웃음)
얼마전 나온 BBC SESSIONS 앨범도 좋아요. 옛 추억에 잠시...
사는 게 다 그렇다는 얘기는 슬퍼요. 고맙습니다. :)

mong 2009-12-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전환은 책 표지가 뜰때마다 묘한 감정으로 저를 괴롭히는 군요
(저걸 읽어 말어)
조르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 한권이고 벨앤세바는
어느 동생 녀석이 사줬는데 몇년만에 들어봐야겠어요
새해에는 책얘기(읽으시라는게 아니라!) 더 많이 해주세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3   좋아요 0 | URL
회오리 바람 속의 여인들 때문 아닐까요? ㅎㅎ
책 이야기라... 결국엔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할까요?

Mrs.M 2009-12-2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벨엔세바 이퓨어필링시니스터 앨범 표지. 오랜만에 봅니다. 대학시절에 참 많이 들었었는데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2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가서 미니스터를 만나실 시간? ㅎㅎ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터넷서점 인문MD에게 폐허는 좀 더 구체적인 담론으로 다가온다. 문학의 종언, 인문학의 몰락, 영화의 위기, 출판의 불황…

  문학은 잊고, 인문학은 버리고, 영화는 끊고, 출판계를 떠난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강력하게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삶은 황폐해지며, 문화는 빈곤해진다. 설상가상 마야인이 예언한 지구멸망은 2012년. 전세계가 폐허를 목전에 둔 셈이다.

  ‘모두 알다시피’ 철학계의 마돈나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라 표현한 바 있고, (‘모두 알다시피’ : 고대 그리스의 수사법에서 전승된 표현의 하나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갑시다”란 뜻) ‘두 말 할 필요 없이’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더 이상 아는 게 없다”라는 의미의 시크한 제스쳐 혹은 지친 가장의 언어)

  물론 지젝과 바우먼의 ‘탁월한’ 분석 외에도 수많은 담론들이 존재한다. (‘탁월한’ :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해 보임”을 뜻하는 현대 저널리즘 용어)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에서부터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이야기 되는 담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갖 고담준론으로 가득한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담론도 오늘,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 나날이 갱신되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너무 똑똑하다. 낯선 이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평론가들과, 그들의 말에 코웃음 치는 대중 모두.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뿐. 그것은 물론 깊은 냉소주의의 언표다.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김훈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고,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김훈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훈을 읽으며 아름답지 않은 자신에, 나은 세상에 손을 보태지 못함에 자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가르치지 않는다. 냉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통해 몸으로 배운 것을,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에 대해, 들려줄 뿐이다.

  펜으로 꾹꾹 눌러 뒷장에까지 자국이 남아있는 <공무도하> 사인본을 앞에 두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강 이편의 폐허를 단지 외면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니 우리는, 공허한 말을 내뱉기를 그치고 먼저 김훈이 그려낸 풍경을 껴안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김훈의 정치성’ 혹은 ‘김훈 소설의 성취’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라던 그의 말은 그래서 내게, 자신이 써 올린 먹이와 슬픔과 더러움과 비열함 위에 누군가 희망을 써주기를 바라는 늙은 작가의 간절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또한, 아무 도리 없는 희망일 것이다.

- 무비위크 401호



무비위크에서 격주로 글을 쓰게된 건 사실, 좀 신나는 일이었다.
여기 이 서재나, 인물과사상과는 달리 '인문/사회'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문제도 있었다. 도무지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
제가 알라딘에서나 인문MD죠...

그래서 생각난 게 김훈. 나도 모르게 100% 직설적인 제목을 쓰게 되었다.
(책 소개가 정말 아닌 걸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이 글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일단 인문MD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웃음), 김훈에 대한 팬심(?)도 넣고 싶었다. 
물론 제대로 맞아 돌아갈리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냉소주의의 언표다'와 다음 문단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사이의 비약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뭐랄까, '목숨을 건 도약' 같은 느낌으로 (ㅋㅋ)

'뼈아픈 후회'로 시작해서 '도리 없는 희망'으로 끝나기 위해, 내겐 꼭 그만큼의 도약이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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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의 하루는 베스트셀러 순위를 체크하며 시작된다. 종합 순위가 먼저, 인문․사회․역사․과학이 그 다음이다. 스포츠 기자가 프로팀들의 순위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문 분야를 관리하는 마음은 ‘엘롯기’(엘지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 기아 타이거스의 줄임말) 팬을 더 닮았다. 가장 유심한 것은 역시 종합 순위이고, 나는 엘지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를 바라듯 내 분야 책을 응원하지만 둘 다 꽤나 요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종합 순위에 속속 사회과학서들이 표지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재고는 준비되지 않았고 출판사도 마찬가지였지만 주문을 하고, 책을 찍는 와중에도 순위는 계속해서 올랐다. 20위 안에 몇 권씩 나타나나 싶더니 어느덧 종합 1위를 차지하는 책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6월 5일,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20에는 7종의 인문․사회과학서가 있다. 통계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과학의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치. 하지만 1위를 차지한 책은 다름 아닌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여보, 나 좀 도와줘>이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언제나 내 분야 책이 1위를 차지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고.

5월의 네 번째 토요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오후 다섯 시에 잠에서 깨 흐릿한 눈으로 핸드폰을 켠 후 물을 마셨다. 전원이 꺼진 사이에 몇 통의 전화가 온 모양이었지만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식탁에 앉아 TV를 틀었다. 숙취가 있었고, 입 안은 텁텁했으며 TV는 지루했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수십 개의 채널을 돌아 MBC에 멈추어 설 때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눈을 비빈 후, 다시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핸드폰을 들어 나를 찾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당신이 흘려보내는 오늘이 어제 죽은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하던 오늘이었다.” 같은 말에 감흥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내가 피는 이 담배가 누군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것이라는 생각엔 목이 메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가득 채워진 한 컵의 물과 표면장력을 그렸던 것 같다. 언제라도 넘칠 것 같은 불안함. 하지만 시간이 고요히 흘러준다면 언젠가는 증발되어 위태로움은 사라질 것이었다. 반면, 그것을 기어이 넘치게 하는 데에는 오직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 미세한 진동이어도 좋다. 결국 폭탄을 터트리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생각이 바로 뒤를 이었다. 만약 그에게 담배가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한 ‘까치’정도는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담배 피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니까 그는, 어딘가에 그를 위해 남겨진 마지막 한 개비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 망상의 끝에서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누가 그의 ‘돛대’를 앗아 갔을까? 라고. 물론 나는 답을 알지 못하고, 다시금 자리에 앉아 베스트셀러 순위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담당을 맡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일 종합 베스트 1위를 기록한 그 책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문득 생각이 물처럼 흘러 나를 부목처럼 이끈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까지 1위를 기록할지, 몇 부나 더 주문해야 할지, 더 잘나갈 수 있는 관련도서는 없는지 생각하는 또 하나의 나를 본다. 다음번에 다시 1위를 기록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야 할까 무심히 상상하는 나를.

밥그릇의 무게가 가끔은 너무 아찔하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07



"내가 담당을 맡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일 종합 베스트 1위를 기록한 그 책"이라고 썼지만,
그 후로 내겐 한 권의 책과 하나의 달력이 더 생겼다.
10월 1주에 그 자리를 차지한 <성공과 좌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노무현 2010 달력>.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진보의 미래>는 애꿎게 2위에 머물러 있는 셈인데, 달력도 책도 모두 내 분야이므로 나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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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1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인문책이 20위안에 반 차지하는 세상이 왔으면..
그 땐 이놈으 세상이 이놈으 세상이 아니라야 할테니까 --;;
뭔소리래..

활자유랑자 2009-12-19 20:28   좋아요 0 | URL
이놈으 세상이 아니면 그놈으 세상인가요 ㅋㅋ
 

꼭 9년만이었다. 일본어를 그렇게 오래, 바로 옆에서 듣게 된 것은. 그때, 나는 일어를 필수교양으로 수강해야했던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알라딘에서 인문․사회과학․과학․역사 분야를 담당하는 MD가 된 오늘, 우연히 일본어를 사용하는 두 명의 저자를 인터뷰하게된 것이다. 9년 전 ‘D+’를 기록했던 일어실력은 말라버린 개천처럼 얕은 바닥을 보인지 오래건만… 겁도 없지.

먼저 만난 것은 <성난 서울>(아마미야 카린․우석훈 공저, 송태욱 옮김, 꾸리에북스)의 아마미야 카린이었다. 낯선 이름이지만 활발한 저술활동과 사회참여로 일본 내에서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신조어) 운동의 아이콘으로 불린다고 한다.

어린 시절 왕따를 경험, 비주얼 록그룹의 그루피 생활과 반복된 자살시도로 10대를 보내고, ‘프리터’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20세에는 ‘유신적성숙維新赤誠塾’이라는 극우펑크밴드를 조직, 천황을 찬양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가진 것 없는 프리터의 기댈 곳 없는 불안과 불만을 극우가 제공하는 천황이라는 거대한 심볼에 의지해 표출하던 그녀가 오늘의 모습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좌파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우연한 만남. 훈계도, 동정도 없이 그저 그녀에게 비디오카메라를 건넨 그의 손길이 그녀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그것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실제로 만난 그녀의 외모도 꼭 그만큼 드라마틱했다. 로리타 복장의 그녀는 영락없는 ‘불량공주 모모코’.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잠시 후, 또박또박- 분명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D+’의 이방인에게도 통역 없이 전해지는 진심 같은 걸 느꼈다고 하면, 과장일까. 결코 젠체하거나 현학적인 수사를 사용하지 않는 그녀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말로 누구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허울 좋은 이론이나 공허한 이상이 아닌, 스스로의 삶에 충실히 발 딛고 있는 이들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성난 서울>은 그런 그녀가 바라 본 2008년 여름, ‘우리’의 모습이다. 일하는 사람 두 명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인 나라,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이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워킹 푸어’의 나라, 군대 아니면 감옥이라는 답을 제시하는 나라. 하지만 그 나라는 또한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수많은 이들이 소리 높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나라이며,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따로, 또 같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가 발붙이고, 숨쉬며 살아가는 공간이지만 그녀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서울은 꽤나 새롭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지레 판단해버린 것,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을 그녀는 찬찬히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프리터(와 오타쿠)의 천국’이라고, 피상적으로만 바라보던 ‘바다 건너’ 일본의 오늘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세계화’! 그래서 그녀는 연대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만 국경을 넘으란 법 있나!

어느덧 촛불 1주년이 지났고, 여기저기 후일담이 들려온다. 이런 말, 저런 말 많지만 곰곰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는 몹시 화가 나 있었고, 지금도 그 화는 풀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닐까.

아마미야 카린은 인터뷰 말미에 한국의 친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조금 더 난폭해지세요. 조용히 참고 있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의 붕괴 이후 10년 동안 참았어요. 그러는 동안, 내 친구가 홈리스가 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좌절 끝에,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라고. 자찬도 자학도 없이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성난 서울>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 PS 1. 그렇다고 <성난 서울>에 ‘촛불’ 얘기가 가득한 건 아니다. 2008년 여름, 그녀가 돌아 본 서울의 ‘구석구석’이 담겨 있다.

* PS 2.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다른 한 명의 저자는 바로 <고민하는 힘>(이경덕 옮김, 사계절)의 강상중이다. 지면관계상 눈물을 머금고 이름만 언급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두 명의 저자를 만나며 “고민 끝에 성내자!”를 올해 목표로 세워야 하는 걸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06



성산2동 동사무소 언덕에 자리한 '영화*을' 아르바이트 출신으로 말하건데
미셸 공드리의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주는 교훈은 노골적이다.
비디오를 반납할 땐 되감아 줘야한다는 것.
동양에서는 이를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한다.

지난 일년간 여기저기 썼던 글들을 모아볼까, 생각했다.
카테고리의 이름으로는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적절하다 싶었다.
첫 글의 제목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된 건... 물론 단순한 우연. (하하)

아마미야 카린을 만난 것은 지난 4월이었다.
햇살이 참 눈이 부셨고, 문득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D+의 일본어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모든 것이.

아마미야 카린처럼 살지 못해서?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인터뷰를 마치고 맞은 4월의 햇살은 참 눈이 부셨고,
그늘 속을 걸어 회사를 돌아오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부끄러움.

이 글은 구체적으로 부끄럽다. (웃음)
제목 그대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게 되는 글. (특히 세번째 문단이 엉망이다! ㅜ_ㅜ)

인물과사상사에 죄송할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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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책을 쌓는 계절이다. 땔나무를 쌓아두던 옛 사람들처럼, 추위를 견디기 위해.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마로우>에도 나오지 않던가. 빙하기를 보내기 가장 좋은 장소는 도서관이다(그러니 책이 나무를 베어 환경을 파괴한다는 주장은 사태의 한 측면만 보는 것이다. 정말 빙하기가 닥친다면 인간이 태울 것은 책밖에 없다!). 설령 난방비 대란이, 빙하기가 오지 않아도 좋다. 쌓아올려진 책은 그 자체로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니. 쌓여진 책 사이에선 웃풍도 견딜만 하다. 

당신이 종이책 아닌 '이북' 매니아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이북 단말기에 발열기능이 없다고 해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울에 책을 쌓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니까. 일 없는 겨울이면 모닥불에 둘러앉아 우습고 슬프고 놀라운 이야기로 추위와 밤을 이겨내던 선인들의 기억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자고로 겨울은 일을 하지 않는 계절이고, 그 시간들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또 퍼졌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고 하니,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겨울인 셈이다. 일하는 시간이 아닌 일하지 않는 시간.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따뜻한 이불을 나와, 쌓인 책을 뒤로하고 일터를 찾는다. 뭐, 어쨌거나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책소개가 시작됩니다. 자신의 책은 그저 뒤에 쌓아둔 채, 존경해 마지않는 독자제위 여러분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려 40km 를 뛰어간 페이디피데스도 아니면서 이렇게. 아직 이 세상은 따뜻한 모양?


* 집나간 개념, 확실하게 찾아 드립니다! <개념어총서 WHAT!>

실용 최우선의 시대(가만보자... 올해가 '실용 2년'이던가?)를 살아가는 요즘. 인문MD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알라딘이야 인문 독자 분들이 계셔주는 까닭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언젠가 윤상이 왜 미국에 계속 안계시고 오셨냐, 라는 질문에 "제가 여기서나 윤상이죠…"라고 대답했듯, 요즘 세상에 인문은 알라딘에서나 인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문과대를 나온 탓에 주변을 둘러 봐도 별 기술 없는 직장인이 대부분이지만 "요즘 뭐 재밌는 책 없수?"라고 물어 오는 건 대학원 공부하는 후배 뿐이다. 슬픈 일이다. '개발자' 혹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들만이 간간히 일 배우는 데 필요한 책들을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올 뿐…

가끔 매맞을 각오를 하고 '인문학을 읽어라', '인문학이 블루오션이다'(?), '인문학을 읽어봐 넌 키가 커지고…'(??) 같은 말들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소. 루저남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물론 종종 구원의 눈길도 존재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촉촉한 눈들은 대개 이렇게 되묻곤 한다.

"그래… 나도 읽고 싶어. 근데 뭐부터?"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 가만히 그 사람의 성향, 취향 등을 곰곰 따져보고 있자면 그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지금이라면 대답할 수 있다. 조금 늦었지만 이렇게.

"네네, '개념어 총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개념이 군대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 인문학/철학에서도 필수랍니다. 아, 물론 저도 읽어야겠지요. 인문학/철학은 몰라도 일단 회사생활을 하고 있으니… 저는 몰랐는데 윗분들이 싫어하시네요(해맑은 웃음). 혹시 동생이나 후배가 군대 가면 미리 좀 사주세요. PX에는 아직 안파는 모양이더라고요."

이미 '리라이팅', '달인'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들을 선보여왔던 출판사의 책답게 작지만 충실하다. 가격도 6900원 ~ 7900원으로 착하기 그지 없고, 이건 비밀인데, 정가 35,500원이 30,000원으로 출간 된 특가 박스세트는 한정판으로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에이, 그럼 낱권으로 구입하면 되지요. 책이 중요하지 가격이 중요하겠어요?

1차로 출간된 다섯 권이 다루고 있는 '개념어'는 각각 재현, 권력, 공, 내재성, 주체다. "아니, 쉬운 책처럼 이야기하더니 무슨 이렇게 어려운 단어들로 책을 만들었어?"라고 혹시나 물을지 모르겠다. 그건 전반적인 학술용어의 번역 문제에 해당하므로 여기서 답할 성질은 아닌 것 같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재현'이란 개념어가 옆집에 살던 재현이 보다 친근하게 느껴질 거라는 것. 차근차근 개념어를 정복해가다 보면, 어렵게만 보였던 인문학 책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진짜에요.








<재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채운 님의 동영상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 책장에 꽂지 않곤 도무지 견딜 수 없어!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콜렉션 세트>


총 제작기간 5년, 제작비 4억에 원고지 3만 6천여매의 명실상부한 '인문학의 블록버스터' 기획을 보며 드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다. "헉, 갖, 갖고 싶다"와 "근데 다 읽을 수 있을까?"가 그것.

기존의 <프로이트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카잔차키스 전집>에서 좀 더 진일보한 디자인이 갖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고지 3만 6천여매 = 책으로 9,300여 페이지 = 25권'을 앞에 두고 두려움이 드는 것 또한 당연지사. (더군다나 소설은 한 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난방비에 겨울옷 장만에 각종 연말 술자리 및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에 얇아진 지갑을 둘고 울상짓는 당신. 우리 모두는 겨울에도 도리 없이 먹이를 구하러 일터를 어슬렁거리는 직장인일 뿐 아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에코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렇게 멋진 책을 어찌 곁에 두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에코와 함께라면 난방비 걱정도(책이 많은 곳에 있으면 빙하기가 와도 끄떡 없다는 얘기를 위에서 했던가?), 겨울옷 걱정도 뚝인 것이다! (외출을 자제하고 이불 속에 누워 한 권, 한 권 에코를 읽는 기쁨이란…)

물론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가슴엔 삼천원쯤, 호주머니 속엔 자신만의 도덕률쯤 갖고 있게 마련. 그 중에는 분명 '읽지 않은 책이 이렇게 넘치는 상황에서 더 사들이는 것은 죄악이다!'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도덕률은 아주 꼬깃꼬깃하게 이미 구겨져 있어 세심하게 펴야만 하겠지만… 그럼에도 읽지 않은 책을 쌓아두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당신을 위한 에코 박사님의 일화.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유명한 '에코의 서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그 질문은 물론 순수한 경탄이 아닌, 압도적으로 보이는 책에, 지식에 대한 두려움이다. 에코 박사는 단지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우리가 이미 읽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는 '나 이 정도 읽었네'의 과시일 뿐이다. 당신이 그것을 건성건성 읽었는지, 훌훌 읽었는지, 전혀 다르게 읽었는지,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렇기에 당신 자신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직 읽지 않은 책, 그러나 읽으려는 책이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를 읽으려하는 당신은, 나쁜 사람일리 없는 것이다.

* 에코 박사님이 보고 계셔 (부담 갖진 마세요…)


























 
* 시리즈만 책이냐! 잘 빠진 단행본 한 권, 백 시리즈 안부럽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조금 미안한, 한 권 한 권 마다 하고 싶은/해야 할 이야기가 넘치는 책들. 하지만 어쩌겠어요. 시간은 짧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 걸. 사람의 목숨은 물론 소중하지만, 타이타닉 호가 침몰 할 때에도 구명선에 모두 다 태울 수는 없었잖아요?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이 없지만, 품위 있는 인문MD라면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여러분, 여러분을 '책탑' 꼭대기에 쌓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라고 따뜻한 방구들에 누워 커피나 홀짝이면서 당장 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눈밝은 독자들이 알아봐 주시길.
오늘은 여기까지.


* 고맙습니다. 이번 주는 만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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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쟌느의 생각
    from avecjang's me2DAY 2009-11-28 13:39 
    남은 결 동안 새책 사지 말고, 쌓인 책 읽어 치우기로 먹은 맘을 든든히 다져주는 글.
 
 
무해한모리군 2009-11-1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팬이예요라고 댓글을 달고 싶어요.
그런데 왜 자유연상법에 따라 이번엔 안쓰신거예요?
전 그게 더 좋은데 ㅎ

활자유랑자 2009-11-20 00:19   좋아요 0 | URL
이것 참, 엠디를 설레게 하는 리플이군요. 송구스럽습니다.
자유연상법은 겨울에 쓸 수가 없어요. 뇌수가 얼어서... 죄송합니다.
실은 뉴런 문제, 정확히는 시냅스 문제인데 전문적인 얘기니까 다음 기회에...
전 아마 안되겠죠

무해한모리군 2009-11-20 19:10   좋아요 0 | URL
그런 사연이..
녹이시게 비니라도 알라딘으로 하나 붙여야겠네요 ㅎ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11-21 02:29   좋아요 0 | URL
저도 하나좀..

활자유랑자 2009-11-23 00:51   좋아요 0 | URL
모두 감사 드립니다.
FTA반대휘모리님 / 기프티콘으로 보내주세요...
알라딘예술역사MD님 / 여기서 이러시다 불려 가세요...

최상철 2009-11-2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주신 집나간 개념을 찾으려고 하는데, 진짜 돌아올까요? ㅎㅎ;;
믿음이~~~

활자유랑자 2009-11-23 0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상철군.
이 아저씨가 상철군 독후감을 처음 본 건 상철군이 오봉초4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아마 놀랐겠죠 지금? 실은, 그땐 아저씨가 어린이MD였거든요. 그리고 상철군 서재이름은 "오봉초4년최상철"이었잖아요. 아주 옛날일이죠. 그땐 상철군도 어린이였는데,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잖아요? 아저씨는 중학생이 되는 대신 인문MD가 된 거예요. 시간이 참 빠르죠. 앞으로 상철군이 세상을 살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가장 많이 들을 말이 바로 이 시간 참 빠르단 말일 거예요.

상철군이 쓴 리뷰 중에서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글은 <원숭이의 하루>에 쓴 리뷰에요.
상철군이 초등4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이제 2학년이 되죠?)이 될 때까지 아저씨가 이 일로 밥을 벌어 먹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닿은 리뷰 두 개 중 하나에요. 다른 하나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란 책에 어떤 아저씨가 쓴 "책을 읽다가 아래의 구절에 시선이 멈췄다. 그 다음날 공무원을 그만 두었다."라는 리뷰인데... 이 얘긴 한 15년 후에 하도록 해요.

상철군이 쓴 <원숭이의 하루>라는 리뷰는 이렇게 시작했죠.

"원숭이는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 오줌을 싸고 아침식사를 한 후 다른
친구들끼리 이를 서로 뽑아주며 개구리 던지기 놀이를 한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한 후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원숭이들이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 오줌을 싸고, 아침식사를 한 후 이를 뽑아주며 개구리 던지기 놀이를 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잠이 드는 것- 이 모두가 좋지만 특히 '반복하는 것이다' 라는 부분이 좋아요.

"이런 원숭이들의 생활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다. 바로 2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바다거북 할아버지다. 바다거북 할아버지는 전
세계를 여행하므로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원숭이에게 들려준 후
떠난다.

이번에 찾아온 거북 할아버지는 아주 큰 배와 머리를 부딪쳐 원숭이
섬에 오자마자 곤히 쉬었다. 거북 할아버지가 간 후에 원숭이들은
다시 평소와 똑같은 생활로 돌아간다."

이 부분은 참 슬펐어요. 2년 만에 한 번 오는 바다거북 할아버지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갖고 오실지 손을 꼽아 기다렸을텐데, 그냥 잠만 주무시다니. 물론 거북 할아버지의 사연도 딱해요. 연세도 많으신 분이 머리를 다치시다니, 그래도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으셨나 봐요. 다음에 할아버지가 오려면 2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상철군은 고등학생이 되겠네요) 원숭이들은 도리 없이 다시 일상으로. 하지만 역시 제일 슬픈 부분은 마지막이었어요.

"이 원숭이들은 우리 인간들과 매우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 인간들도
언제나 일을 위해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매번
전혀 새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숭이들이 바다거북 할아버지가 오면 매우 기뻐하듯이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찾아온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색다른 일의 필요성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색다른 일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도 무척 놀라운 일이지만, "언제나 일을 '위해'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는 부분은 특히. 보통 아저씨 아줌마들은 "생활을 '위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색다른 일은 정말 중요하죠. 바다거북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상철군이 우연히 이렇게 아저씨의 서재에 찾아오니 기쁜 것처럼요. 기억나요? 그때 '이주의 마이리뷰'에 아저씨가 추천했는데... 뭐 이제 지난 일이죠.

여전히 책 잘 읽고,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집나간 개념은... 아직 안찾아도 될 거예요. 보통 개념이 집을 나가는 건 고등학교 무렵이거든요. 그러니까 2년 후에, 다음 번 바다거북 할아버지가 올 때, 그 때 찾아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믿음이란 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아저씨가 괜히 말이 길었죠. 일을 위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자꾸 쓸데 없는 말을 하게 되네요. 15년 후 쯤에는 아마 아저씨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안녕.

2010-01-06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7 17:45   좋아요 0 | URL
ㅎㅎ 좋은 걸요 저는. 고맙습니다.

이지알로 2009-11-2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인문MD를 알게 된지 3개월도 안되었는데...이제 완전 팬입니다...그대는 나만의 북돌!!!(북+아이돌???)...개인적으로 ㄱ린비 책들을 좋아하는데 위의 개념시리즈도 마구 당기네요~~

활자유랑자 2009-11-24 18:53   좋아요 0 | URL
북... 북돌이라니요 ㅜㅜ
저는 차라리 '복돌이' 타입이죠.
ㄱ린비 ㅋ... 개념어총서 재미있어요!

뒷북소녀 2009-11-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읽은 책들도 많지만, 표지 속에 콕 박혀 있는 에코의 얼굴을 보니 다시 또 사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활자유랑자 2009-11-24 18:55   좋아요 0 | URL
저는 상단 좌측에서 세 번째 에코가 제일 좋아요. 몇 명쯤 묻어버리실 것 같은 ㄷㄷㄷ
중단 우측에서 네 번째 에코님도 무심한듯 시크하시죠! ㅎㅎ

섬연라라 2009-11-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쩜 움베르토 에코 세트 장바구니에 넣을 뻔 했어요. - _ -a
인문MD님 글 넋 놓고 읽으면 안되겠음... ;ㅁ;

활자유랑자 2009-11-26 20:07   좋아요 0 | URL
ㅎㅎ 좀 더 분발하겠습니다!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