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삶은 핸들이 무거운 차와 같아서,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는 ‘비비디바비디-시크릿’은 TV와 베스트셀러에만 있는 얘기일 뿐. 정말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앉아, 어김없이 넘긴 마감시간에 괴로워하며 원고를 쥐어짜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처음 회사를 그만 두겠다 마음먹은 것은 입사 1주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곧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하나, 매달 나오는 월급에 길들여져 평생 이대로 고분고분하게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또 하나. “나는 살 수 없어. 네가 있어도, 네가 없어도”라던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그 사이데 끼어 한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그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의식 수준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게 아인슈타인이었던가.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 그래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었다. 매주 보던 주간지가 100권이 모이면 그만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다. 걱정과 불안을 모두 깨끗이 씻어준,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심플 플랜'이었다.

  90권이 모였을 때, 문득 찾아 온 어머니께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 말씀하셨다. 고민하지 않을 수 있나. 내가 생각하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고, 사는 대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한 달이 흘렀고, 잡지는 94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결단을 미루고 있었다. 100권이 되기를, 그리하여 직관적으로 결단이 내려지기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잡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폐간된 것이다. 잡지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필름 2.0. 벌써 지난 2월의 일이다. 그 이후에는? 보시다시피. 무너져버린 100권의 상징 아래에서 가정경제의 압박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박인환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 인생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굿바이 스바루>는 그런 나의 통속을 철저하게 비웃는 책이다.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분쟁 지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워싱턴 포스트’, ‘월드 리포트’ 등에 기사를 쓰던 덕 파인은 어느 날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생활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고 월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돈을 벌되,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탄소 마일리지를 소모하는 뉴요커의 삶”에 안녕을 고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덕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향한 곳은 뉴멕시코의 농장. 언젠가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들인 새끼염소 두 마리와 함께 뉴욕 촌놈 덕은 좌충우돌 농장생활을 시작한다. 가뭄과 홍수를 견뎌내고, 범람한 강을 자동차로 도강하고, 코요테로부터 염소와 닭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깐풍기 냄새가 나는 폐식용유 트럭을 운전하고, 목숨을 걸고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하면서. 사서 고생도 가지가지다 싶다가도, 이 남자가 신나서 늘어놓는 이야기를 계속 보고 있자면 어느새 웃음이 터지고 만다.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열망 하나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가 건네는 웃음은 건강한 웃음이지만, 동시에 웃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웃음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그 말 어디에도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된다’는 부분은 없음을 새삼, 그리고 내가 여전히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리 허황된 생각은 아니다. 다만 남들과 조금 다를 뿐.

  그렇지만 아직 준비는 필요하고, 그 전까지는 우리 사장님이 이 글을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끝.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0
('주간지 100권이 쌓이면…')




처음 이 카테고리를 만든 것은 다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다 감아 반납하는 것이 매너이듯.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옛 서랍을 들추는 일이 언제나 그렇다는 것을 왜 잊었을까. 이건 그냥 독후감 수준의 글인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2009년에 내가 한 일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특히 4번째 문단은 지워버리고 싶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촌스러운 형식 탓이다. (<굿바이 스바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필름 2.0은 왜 망한거지? 박인환 전집도 품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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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3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비슷하게 생긴 집에서 자고, 비슷한 철깡통속에서 일하며, 비슷한 회의를 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걸까요?

활자유랑자 2009-12-30 15:41   좋아요 0 | URL
바야흐로 21세기인 거죠. 2020 원더키디까지 앞으로 10년!
 

어느덧 시상식의 계절입니다. 연예대상, 가요대상, 연기대상 등 화려한 시상식은 차고 넘치는데, 왜 어디에도 책 관련 시상식은 없는 걸까요? 리영희 선생이 평생공로상을 받고, 카라가 축하 공연을 하는 '도서대상'을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일까요? 아쉬운 마음에 여기, 현장MD로 살았던 2009년의 기억을 남깁니다. 조금 편파적이고, 아이돌 그룹의 축하 공연도 없는 소소한 시상식이지만 그 끝은… 창대할까요?


- 모든 선정은 알라딘인문MD의 자체 기준을 따릅니다.
- 부분별 수상작은 모두 2009년 출간 도서 기준이며, more about 에는 간혹 구간이 섞여 있습니다.



* 올해의 쇼 - 리차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independent.co.uk

"아마도 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인생을 즐기세요"


올 초, 영국에서 벌인 버스 캠페인 만으로도 도킨스는 '올해의 쇼' 부분을 수상할 자격이 있다. 지난 가을에 <The Greatest Show on Earth>가 출간 되었고, 이제 번역된 <지상 최대의 쇼>가 우리의 12시 당일배송을 기다리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전문 번역가 선생님'은 이 책을 가리켜 "친절한 진화론 입문서, 명쾌한 창조론 반박서"라고 했고, 나는 그 문장 앞에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일 뿐이다.

+ 올해의 추천사 :
 "내가 신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리처드 도킨스를 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을 것이다"
 - 존 호건
+ more about 쇼


















* 올해의 '던적' - 김훈, <공무도하>


©문학동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 문제다."


언젠가 나는 김훈을 '늙은 개'라고 표현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개>를 보면 안다. 그것은 자서전일 수 없는 동시에 자서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김훈이 그려내는 세계는 바로 저 '동시에'의 세계이고, 당위와 인과를 떠난 자연사의 세계다. 그것은 또한 살아 갈 수도, 살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세계이다. 저널리즘의 언어를 통해 그가 기록하는 것은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과 비열함이지만 그가 기다리는 것은 최종적인 희망이다. 그것은 물론 희망을 가질 수도, 갖지 않을 수도 없는 자의 '던적스러운' 희망일 것이다.

+ 올해의 김훈 리뷰 :
 "나는 조리를 혐오하고 레시피를 불신한다. 딴 동네로 가서 새로 가게를 열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 문제다."
 - 내일 님
+ more about '던적'

















* 올해의 컴백,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문학동네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해줘도 모르는 거야"


한때 우리에게 하루키는 딜레마였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만 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하루키였으니까.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던 <상실의 시대>는 결국 '상실에의 열망'으로 가득한 시대였다. 짐을 줄이기 위해 좌석을, 냉장고를, 스튜어디스를 내던지는 비행기처럼. 아무 것도 손에 쥔 것 없이 그저 상실를 열망했던 우리가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 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그를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루키는 육십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고, 우리는 찌든 생활인이 되었으니까. 그가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뉴스는 그래서 꽤나 그럴듯 했다. 그것은 분명 한 시대의 종말에 대한 거창하고 쓸쓸한 기념비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을 타지 않았(못했)고, 대신 <1Q84>를 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우리의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올해의 하루키 잡담 : "무라카미 하루키 재습격"
+ 올해의 베드씬 : 덴고(29세) 후카에리(**세)
+ more about 베드씬


















* 올해의 여자친구,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Joana Linda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이것은 완벽한 팝 앨범이다.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들었던 지난 소설집(<나는 유령작가입니다>)과 달리 어깨에 힘을 뺀 그는, '4집 앨범'을 통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3분 짜리 팝송을 들려준다. 각각의 트랙들은 설레임과 체념, 기대와 엇갈림을 노래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하나, 사랑이다 .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그럼에도 인간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낙관 사이에서.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는 '노력하는 작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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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가난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최규석

"만국의 듣보잡이여 궐기하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70.1%가 자신을 '워킹푸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 중의 59.3%는 앞으로도 오랜기간 워킹푸어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대답했다. 밥벌이는 물론 고단하지만, 이런 식은 곤란하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가난은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일 때문에 괴로월랑 마시고 인생을 즐기세요.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니!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킨스의 말보다 더 충격적일 말을, 그는 웃으며 실천한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가난뱅이다.

+ 올해의 가난탈출법 :
 "고품질 공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
 - 이명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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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다윈 -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제임스 무어, <다윈 평전>



©http://www.australiazoo.com.au

2006년, 176세로 세상을 떠난 다윈의 거북이 해리엇의 175번째 생일상


2009년 우리는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동시에 맞았다. 다윈과 진화론 관련 도서만 50여 종이 출간 되었고, 다윈 전시회, 서울시극단의 공연 '다윈의 거북이'에 이르기까지 관련 행사도 풍성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1300여 페이지의 볼륨으로 다윈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다윈 평전>이다. 진화론을 두고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던 노학자의 고뇌와, 그 고백으로 인해 영원히 바뀌어버린 인류의 삶을 만날 수 있다.

+ 이듬해의 인물 :
 장 폴 사르트르 - 사후 30주년
 알베르 카뮈 - 사후 5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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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노익장 - 오에 겐자부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http://www.brooklynrail.org

 "비록 지금은 어두워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끝에 빛이 보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 빛을 향해) 우리는 나즈막이 나즈막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한다."


<책이여 안녕>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평생에 걸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코쿠 숲과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 아들 히카리, 그리고 신 없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천착해 온 노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책이여 안녕> 보다 나은 제목을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는 멈추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썼고, 새롭게 시작되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놓였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까? 그저 고마울 뿐이다.

+ (언젠가 오에 겐자부로에게) 했어야 했던 말 :
 "와따시와 아나따노 고또가 다이스키데스"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 more about 말년의 양식


















* 올해의 '디스'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사랑, 그 혼란스러운>


Gustav Klimt, 'Virgin'

 "도킨스의 신은 바로 유전자다. 이 신은 만물을 관장하고 전능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관여한다."


2008년 출간 되어 얼마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던 <나는 누구인가>를 기억하고 있다면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이름이(적어도 얼굴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자아'의 문제에 천착했던 지난 작품과 달리 <사랑, 그 혼란스러운>에서 그는 영화와 대중가요, 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손에 넘어간 '사랑'을 철학의 자장으로 탈환하려한다. '사랑 일병 구하기' 정도 될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은 물론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다.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 데이비드 버스, 데스먼드 모리스 등 진화심리학의 스타들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꽤나 즐겁다(이 부분은 진화 심리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할 듯 하다). 그러니 그의 논의가 조금쯤 미심쩍더라도 일단 총알을 다 쓸때까지는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다.

+ more about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올해의 편지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글쓰기>


©http://www.dailymail.co.uk

"소설을 써서도 충분히 살아갈 만큼 돈을 벌 수 있네. 이 어리석은 친구야, 어서 소설을 쓰게."


"개인적인 비극은 잊어버리게. 우리 모두 애초부터 실패한 인생이네. 특히 자네는 지독하게 상처를 입어야 진지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걸세. 지독한 상처를 입으면 그걸 활용하게. 숨기려 들지 말고. 과학자처럼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자네 자신이나 자네 가족들에게 생긴 상처라고 해서 그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 헤밍웨이가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글쓰기에 관한 특별한 지혜"라는 의심스런 부제를 달고 있는 <헤밍웨이의 글쓰기>는 완결된 저작이 아니다. 헤밍웨이가 편지, 기사와 잡글, 소설 속에서 글쓰기에 관해 말한 부분을 모아 놓은 편집본이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도 좋다. 대부분 200자 내외에서 마무리 되는 그의 짧은 말들은 대개 글쓰기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으니.

+ 올해의 일화 :
"피츠제럴드는 애통할 정도로 철자를 몰랐다" 그의 편지 선집을 편집한 앤드류 턴불의 말이다. "귀에 들리는 대로, 그는 습관적으로 'definate' 나 'critisism'이라고 적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고유명사는 그에게 쥐덫이었다." 종종 가장 친한 친구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게 편지를 쓸 때 조차 피츠제럴드는 'Ernest Hemmingway'나, 심지어 'Earnest Hemminway'라고 쓰곤 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되기의 중요성, (혹은 철자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 by Craig Brown
+ more about 편지



















* 올해의 재활 - 나카지마 라모, <오늘 밤 모든 바에서>



©http://www.wolverhamptonhealth.nhs.uk

"오늘 밤, 보랏빛 연기로 부예진 모든 바에서"

나카지마 라모의 제1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수상작을 집어 든 사람의 십중 팔구는 "낚였다"라고 내뱉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책을 집어들 이유는 뻔하다. 1. 제목이 끌려서 2. <인체 모형의 밤>을 통해 나카지마 라모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서. 게다가 장르물에 일가견이 있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아닌가.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 달리, 이 책은 알코올에 사로잡힌 남자 고지마 이루루의 갱생기이자 자전적 소설이다. 추리도, 미스터리도 공포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내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오늘 밤 근사한 바에서 벌어지는 시크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병원에서 탈출해 오뎅바에 가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저 망가진 한 사나이가 우여곡절 끝에 갱생의 끈을 붙잡는 이야기일 뿐인데. 무엇이 그토록 마음을 붙잡아 놓아 주지 않는지, 그것이 미스터리다.

+ 함께 곁들이면 좋은 것 :
  싱글 몰트 위스키 두어잔, 몇 개비의 담배 그리고 (망가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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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글쓰기/책읽기 -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닉 혼비, <런던 스타일 책읽기>




나는 글쓰기, 책읽기 분야의 챔피언이다. 나보다 해당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자랑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평에 가깝다. 올해에도 관련 도서는 끊임 없이 쏟아졌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이만교와 닉 혼비의 책이다. 둘 다 재기발랄한(?)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고, 어느새 '재기발랄' 따위 안어울리는 나이에 접어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닉 혼비는 금연을 하기 위해 금연도서를 주기적으로 읽는다(그것도 같은 책으로!). 하지만 금연은 쉽지 않고, 자괴감만 늘어 간다. 그러던 와중에 미국에서 열린 한 작가 모임에 참석, 지루함에 치를 떨다 담배를 피기 위해 발코니에 나간다. 그곳에서 낯익은 인물을 만나니, 그가 바로 커트 보네거트였다! 아 세상에 하나님. 커트 보네거트라니요.

반면, 주기적으로 금연을 선포하는 이만교 님은… 뭐, 금연은 어쨌든 해야 맛이니까. 아마 흡연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금연의 즐거움(자기 절제) 때문에 계속해서 담배를 피시는 것 같다.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2010년 부터 금연을 하게 되었다. (이게 글쓰기/책읽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시는 분은, 아직 글쓰기/책읽기 책을 덜 읽으신 거다)



* 특별언급 - 세계문학의 어떤 경향















물론 시차는 존재하지만, 올해 번역된 '젊은' 소설가들의 (문학계 만큼 '젊음'이란 개념을 폭넓게 쓰는 곳도 드물다) 책을 앞에 놓고 보면, 세계 문학의 어떤 흐름을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물론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야 할 무엇이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여기에 기록한다.




* 올해의 시인 -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난 그대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싶은), 행운의 여시인"



* 기타 시상

>> 접힌 부분 펼치기 >>
- 올해의 식단










- 올해의 서재









- 올해의 탐정









- 올해의 사전









- 올해의 재출간









- 올해의 지각생 (이제야 출간!)










- 올해의 데뷔









- 올해의 천재






- 올해의 방법
















<< 펼친 부분 접기 <<


* 고맙습니다. 올 해도 만선이었습니다!
*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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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Q84> 흥행의 비밀
    from 독서공방 2009-12-31 16:37 
      연말의 묘미는 역시 시상식이다. 영화․음악․드라마․버라이어티에 이르기까지, TV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한 해가 절로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때론 공정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아이돌 그룹이 축하공연을 하는데 공정성 따위에 신경 쓰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정성이라니, ‘초신성’도 아니고.   시상식이야 차고 또 넘치지만, 애석하게도 책을 대상으로 한 행사는 찾기 힘들다. 2010년을
  2. 고이고이의 느낌
    from goigoi's me2DAY 2010-01-20 01:19 
    알라딘 현장 MD가 뽑은 올해의 좋은 책 2009
 
 
무해한모리군 2009-12-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인문엠디님 저 칭찬해 주세요. 여기 나온 책 열여섯권을 읽었고 3권은 사놓았어요 이히히
특별언급 부문에 매우 동의!
그런데... 우리나라의 주목할 만한 젊은작가를 잘 못찾겠는 것이 아쉬움이예요.
(감성, 역사적 인식, 개인의 개성이 뒤엉킨 어떤것..)

인문엠디님 내년엔 만사 더 수월하게 풀리시길 빕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9 14:51   좋아요 0 | URL
올해의 독자상을 드리겠습니다!

뭐, 상품은 없지만요...
대신 2010년에는 신나는 일만 생길 거예요. :)

Arch 2009-1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진즉에 인문MD님의 유머감각을 알아봤어요. 식단이라니, 여시인이라니! ^^
이렇게 쭉 정리되어 있으니까 정말 좋은데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15   좋아요 0 | URL
여시인은 농담이 아니었는데... 쿨럭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글샘 2009-12-2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시상식이네요. ^^ 소원을 말했는데, 행운의 여시인이 말했을 뿐인가... 아쉽습니다. 1년에 한 번 이런 페이퍼를 만난다는게 좀 아쉽지만... 페이퍼 잘 보고 있습니다.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길...

활자유랑자 2009-12-29 14:16   좋아요 0 | URL
인간은 계량화된 시간을 살고 있으니,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일 년, 일 년... 그저 숫자일 뿐이라고는 해도.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도 복 많이 짓겠습니다.

텍사스양 2009-12-2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스트에 읽은 책은 한권도 없지만
잘 보고 갑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9 14:17   좋아요 0 | URL
내년 이맘때 쯤엔 많은 책들이 구간이 되겠네요 (1년 6개월)
그때 할인 받아 읽으셔도 감동은 전혀 줄지 않을.. (응?)
고맙습니다. ^^

우연아닌우현 2009-12-2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서 빵!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콘솔에서 제 손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이런 지름신을 불러오시다니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18   좋아요 0 | URL
어떻게, 마지막은 좀 직접 시상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ㅎㅎ
책은 쌓아두기 좋지요.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쿠사노사랑 2009-12-28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머나 참 재기발랄한 시상식이네요. 저는 두 권 정도 밖에 읽지 못했지만 꿋꿋이 살아가렵니다.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18   좋아요 0 | URL
오늘은 눈이 십센티나 내린다고 해요. 눈길 조심하시고 새해 복도 많이 받으세요!

starla 2009-12-29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긴이의 말' 제목이었던 그 카피 그거 전문 번역가가 쓴 게 아니라 편집자께서 써주셨지만...
아무튼 뿌듯합니다?!

결국 올해는 '쇼를 하라'는 명령에 충실했던 한 해인가요.

아래 리스트들이 다 주옥 같지만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완벽한 팝 앨범'으로 묘사한 건 정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표현이네요. '그래, 바로 그 느낌이었어...' 존 호건의 추천사(이거 굉장하죠)에 맞먹는 멋진 카피입니다.

인문 MD님 새해 복 많이 받기를!

활자유랑자 2009-12-29 14:23   좋아요 0 | URL
사실 올해는 쇼가 차고도 또 넘쳐서 (저 요즘 이 말을 너무 자주쓰는데 어쩌죠? ;;)
단호한 설명구와는 달리, 고민이 많았습니다. ㅎㅎ

존 호건의 추천사는 아마 길이길이 기억될듯...

전문 번역가 선생님도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언제 한 번 시간나시면 글쓰기 특강이라도... -_ㅠ
(편집장의 선택 카피 쓸 때 자꾸 옮긴이의 말을 베끼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좌절)

산체보고파 2009-12-2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 이젠 정말로 '슬슬' 정리하려던 2009년 다이어리를 멈칫,하게 하시네요.
이토록 재미있는 책들, 더 채워보렵니다. 아직 이틀하고도 반나절이나 남았거든요~ ㅋ
내년에도 기발한 책등대 되어주시길!

활자유랑자 2009-12-29 14:24   좋아요 0 | URL
책등대라니, 좋은데요? 불을 밝혀야 할 것 같고, 찬바람에도 꿋굿하게 버텨야 할 것 같고. ㅎㅎ
방심하지 마세요. 끝나기 전엔 끝나지 않은 거라는 말도 있으니... (응?)
남은 연말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길!

그림 2009-12-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네요. 읽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기는 시상식이었습니다. ^^ 저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테이블에 앉아서 박수를 보냅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즐거운 책소개 부탁드려요.*

활자유랑자 2009-12-30 15:42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거기 앉아 계셨군요. :)
내년에도 잘 부탁 드립니다.

하루(春) 2010-01-05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혹시 영화 보셨나요? 저는 얼마 전 dvd 빌려서 봤는데, 아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남자가 이 영화에 나오는데 어찌나 귀엽고 독특하게 생겼던지.. 하하하 영화 짱이에요! 책은 어떨까 궁금한데 영어로 된 책을 읽자니 아직 부담스러워서 계속 고민 중입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7 17:35   좋아요 0 | URL
아직 못봤어요. 일라이저 우드의 안경 쓴 사진이 너무 귀여워서 꼭 한 번 보려고 벼르고 있던 참입니다. 미쿡은 살기에 좀 어떠신가요. 새해가 밝았는데, 이곳은 그냥 똑같네요. ㅋ

닉네임 2010-01-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뱅이의 역습이란 책은 처음 알았네요.
찾아보니까 작가분이 예전에 티비에서 한번 봤던 분이네요.ㅋ
책은 끌리는데.. 표지가.. 표지가..... /쿨럭

활자유랑자 2010-01-22 23:12   좋아요 0 | URL
아! 그래도 발랄하잖아요. ㅎㅎ
만국의 듣보잡이 궐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ㄷㄷㄷ

9 2010-01-2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D 재밌게 읽었어요 ㅎㅎ
그리고 리처드 도킨슨 <지상 최대의 쇼> 꼭 읽어보고 싶네요!
"아마도 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인생을 즐기세요"ㅋㅋㅋㅋ
뭔가 속이 다 시원한 :)
그리고 마지막에 여시인에서 빵터졌어요 ㅋㅋ ! 농담이아니였다지만 웃기네용

활자유랑자 2010-01-26 14:44   좋아요 0 | URL
그런데 마음이 놓아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ㅎㅎㅎ
신은 없다지만... 돈도 없어서? ㅜ_ㅜ

소녀시대 2집은 커밍순...

2010-02-04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마도 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즐기세요. 버스 광고 함 보고 싶었는데.
게다가 도킨스 아저씨가 타고 있잖아요! 우앙ㅋ굿

D가다머냐? 님 ㅎㅎ
관심의 방향이 비슷한 거 같네요.
흐름을 타다 보면 어디선가 만날지도~~

활자유랑자 2010-02-05 18:19   좋아요 0 | URL
한국 반기독교 연합? 저는 정확히 잘 모르는 단체에서도 버스 광고를 한다는 기사를 봤어요.

아인슈타인이 그려져 있고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라는 문구가.. ㅎㅎ

저도 이제 슬슬 흐름타려 하고 있습니다~ ㅎㅎ

sprout 2010-03-3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장MD님: 활자유랑자님, 책선이 눈길을 끄는군요. 처음부터 줄줄이 제가 읽은(혹은 읽을!) 책들을.. ㅎㅎ 뒤로 가면서 전 풀썩, 먼지 내며 쓰러졌지만 앞에서라도 팡, 팡 터진 게 기분 좋았어요. 도킨스과이신듯 하니 우선 공감. 친구들 사이에 제 별명은 활자중독이지만, 활자유랑자 앞에서 왠지 쿨럭, 갑자기 친구들 앞에서 활자방랑자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집니다. 팝앨범이라는 명언을 2009년에 남기시고, 거북이 해리엇의 마지막 생일상을 보여주시고, 듣보책들을 정리해서 소개해주시고, 기타 앞을 보니 댓글에 꼬박꼬박 답글 남겨주시고... 하여 어쩐지 그냥 반갑습니다.
 

화장실에서 책을 읽다 신기한 구절을 만나 여기에 옮긴다.



우리가 똥을 누면, 오줌도 자연히 따라 나온다. 똥 누기 직전에 오줌을 누었을지라도, 몇 방울쯤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방광과 직장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거의 동시에 작용하여 배설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다르다. 똥은 똥대로 오줌은 오줌대로 따로 눈다. 우리처럼 똥을 눌 때, 오줌이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똥만 누고 오줌은 나중에 다시 누는 백인종의 습관을 신기하게 여기듯이, 저들도 우리 쪽을 기이하게 생각한다.

일본인 야스가와 미쓰끼(安川實)의 경험담이다. 그는 1953년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 입학허가를 받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변기 20개가 칸막이 없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당연히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똥을 누게 마련이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

"어이 미쓰끼, 너는 똥 누기 전에 오줌을 누냐?"
"나는 둘 다 한꺼번에 하니까 편하다."

그러나 주위 학생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미쓰끼는 그 가능여부에 대해 내기를 걸었다.

나는 40여명 가까이 모여선 학생들 앞에서 변기에 앉아, 나오는 것이 잘 보이도록 허리를 조절하면서 분명하게 '우쓰 자아, 보단 보단' 소리와 함께 똥.오줌을 함께 떨어뜨린 다음, 밑도 닦지 않은 채 눈앞의 30불을 거머쥐고 변소에서 뛰어 나와 달아났다(礫川全次, 1996:22).

유럽 사람들은 어떠한가? 독일의 한 대학교수에게 묻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으나, 나와 아들은 아침에 일을 볼 때, 똥만 누고 오줌은 뒤에 따로 눈다"고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미국 아리조나주 피닉스시 부근에 거주하는 원주민(아파치족)의 관습을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우리와 같았다. 멕시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몽골로이드와 코카소이드 사이에 나타나는 인종적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 어떤지 궁금하다.

- 14장 '똥.오줌 누는 방법' 전문



40명 앞에서 똥과 오줌을 함께 눈 남자, 미쓰끼도 대단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저자 김광언과 독일 대학교수의 대화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벽안의 대학교수에게 "유럽 사람들은 똥을 눌때 오줌도 함께 누는가?"라고 묻는 학자의 모습이 미소짓게 한다. 대답은 또 어떤가. 유럽의 학자답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으나'라고 운을 뗀 그는 "나와 아들은 아침에 일을 볼 때, 똥만 누고 오줌은 뒤에 따로 눈다"고 진중히 답한다. 아들의 배변까지 챙기는 아비의 마음이 애틋하다.

뒷간의 어원과 역사에서부터 각 지역별 뒷간의 특징, 절간과 궁궐의 뒷간, 그리고 뒷간과 연관된 속담에 이르기까지. <뒷간>은 우리가 매일 들락거리지만, 정작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뒷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뒷간 하면 '똥오줌'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니 '똥오줌의 문화사'라고 해도 좋겠다. 글로 채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수많은 도판들이 채우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매우틀'이란 말을 처음 알게 되어 인터넷 검색을 하니 "왕이나 왕비가 사용한 이동식 변기"라고 나온다. 책에 따르면 "매우(梅雨)는 똥.오줌을 이루는 한자이다. 매는 큰 것, 우는 작은 것을 빗댄 향기로운 이름이다"라고 한다. 雨는 시적 표현이라고 해도,  梅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임금의 똥은 매실만큼 달콤하다는 걸까?

그런데 이 매우틀, 왕이 썼다고 하기엔 조금 조잡해보인다. 청자나 백자요강을 두고 굳이 임금이 거친 나무결에 엉덩이를 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왕실의 매우틀은 따로 있었다. (검색 결과와는 달리 상류층에서도 매우틀을 썼던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의 매우틀. "귀인이 쓰는 것이라, 나무틀에 우단을 씌웠다"고 한다. 우단은 바로 벨벳이니, 생각만 해도 엉덩이가 부드러워지는 기분이다. 저런 곳에서 일을 보니 매실처럼 달콤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여기서 우리는 지젝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신비에 싸인 X, 우리 존재 내면의 보물은 자신을 이질적인 침입자로서, 심지어는 배설물이라는 기형(奇形)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항문과 연관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즉 내부의 무매개적 출현the immediate appearance of the Inner이 형태 없는 배설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배설물을 선사하는 어린 아이는 일면 자신의 X 인자의 직접적인 등가물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이트Freud가 배설물을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선사하는 선물의 최초 형태로, 가장 깊은 내부부터의 물체로 간주한 것은 외견만큼 소박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종종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타자the Other에게 제공된 자신의 조각은 근본적으로 숭고한 것the Sublime과 (우스꽝스러운 것the Ridiculous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배설된 것the excremental 사이를 왕래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라캉에게,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특성들 중 하나는 인간에게만 배설물의 처리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 슬라보예 지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중에서

다시 말해, 매우틀에 싼 임금의 똥은 그것을 치워야 하는 이들(타자the Other)에게 '숭고한 것the Sublime'이 되고, 요강에 싼 범부의 똥은 '배설된 것the excremental'이 되는 것이다. 똥은 종종 농담의 소재가 되지만, 남편의 요강을 치워야했던 부인들에게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것the Ridiculous일 리 없다. 그것은 실재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의 지적은 실로 적확하다.

그렇다고 모든 임금의 '매우'가 숭고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은 대신들을 뒤에 두고 요강에 오줌을 눈 경종의 일화.

   
  (전략)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몸을 조금 돌려 오줌을 누므로, 잠시 물러가려고 하자 막았다. (중략) 이거원이 아뢰었다. "한 나라 무제는 관을 쓰지 않고 급암(汲黯)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소피를 보실 때 하교도 않으셨고, 환시(宦侍) 또한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신료(臣僚)를 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1722] 6월 24일)  
   

임금이건 개건, 자고로 똥오줌은 가려야 하는 법. 똥오줌을 잘못 가리면 이런 일도 생긴다.

   
  옛적에 장길손이라는 거인이 있었다. 먹을 것이 모자라 언제나 배가 고팠다. 돌.흙.나무 따위를 닥치는 대로 먹고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였다. 설사가 흘러내려 태백산맥이 되고, 똥 덩어리는 튀어서 제주도가 되었다.
 
   
 
똥과 관련된 속담 중에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한살 더 먹고 똥 싼다"
- 나이를 먹어 가면서 철없는 짓을 더 한다.

"똥 누러 가서 밥 달라고 한다."
- 일의 순서를 모른다.

"적게 먹고 가는 똥 누어라."
- 욕심 내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라.

"빨리 먹은 밥 똥 눌 때 보자 한다."
- 서두르면 탈이 생긴다.

"똥도 못 누고 불알에 똥 칠만 하다."
- 목적도 못 이루고 도리어 낭패를 본다.

"무섭지는 않아도 똥 쌌다는 격이다."
-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한살 더 먹고 똥 싸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마지막 속담을 요즘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다. "똥은 쌌지만, 무섭지는 않다" 과연... 신년을 맞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오래도록 음미할만 하다.


이외에도 책에는 과거에는 여성들도 서서 소변을 보았다는 이야기와 소변을 음복하고 대변을 습진에 약으로 썼다는 이야기 등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바로 한 장의 그림.


아프리칸_스타일.jpg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2010년에는 순리대로 삽시다!

-

여기까지 쓰고, 글을 올리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아, 프로이트!)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나 추가한다.

아무리 2010년에는 순리대로 살자고 마음을 먹어도, 인생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수많은 장애물들, 방해자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여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제안이 있다.


   
  똥포는 얼굴에 쏘는 무기이다. 성 안에 항아리 네 개를 두고 위, 아래 사람과 남녀가 따로 뒷간으로 쓰게 한다. 그 안의 똥에 때로 허드레 물을 섞은 다음, 잘 저어서 흙탕처럼 만들어 대나무 통에 담는다. 통 끝의 작은 구멍을 적에 대고 내용물을 쏜다. 통 안에 풀 뭉치는 넣어서 입구를 막으며, 둥근 나무로 만든 밀대를 통 안으로 밀면(풀 뭉치 대신 둥근 나무 끝에 삼 새끼를 동여매어도 좋다) 똥물이 튀어나간다. 힘이 있으면 대 여섯 걸음 밖으로 나가며, 또 얼굴을 맞출 수도 있다(풀 뭉치에는 끈이 달려서 쏘고 난 뒤에 다시 당긴다). 바가지를 쓸 수도 있지만, 허비되는 양이 많을 뿐더러 적중률도 낮다.  
   


준비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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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9-12-2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똥 이야기의 담당분야...를 따져보니, 역시 인문이 적격이군요. 광폭의 소재를 다루어 오시다 기어이 똥을 다루게 되셨으니 큰 성취라 일컬을 만 하네요. 축하드려요~

활자유랑자 2009-12-28 13:07   좋아요 0 | URL
똥도 못 누고 불알에 똥 칠만 하는 격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송구스럽습니다.

고랑이 2009-12-23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계속 똥, 똥 거리는 페이지를 읽으니까 기분이 묘한데요. 아프리칸 스타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것 같지만..물고기들까지 생각한 마음씨가 아름다워요(?) 왠지 저도 여기에 또 하나의 배설을 한 기분이네요ㅋㅋ 그래도 무섭지는 않아요..

활자유랑자 2009-12-28 13:08   좋아요 0 | URL
2010년도 그런 마음(?)으로 복 많이 받으세요..
 

  고작 10년 남짓한 인터넷 서점의 역사에도 나름의 전설은 있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있다. 읽는 순간 장바구니 버튼을 클릭하게 했다는 리뷰의 달인, 출판사도 몰랐던 책의 미덕을 짚어내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는 선책選冊의 달인, 할인 쿠폰과 1+1 신공의 발명으로 무림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는 이벤트의 달인…. 제각기 자신만의 비기로 업계를 주름잡았던 이들이지만, 강호를 떠나며 남긴 말은 한결같았다. “이제 책을 읽고 싶다”는, 조금 쓸쓸한 그런 말.

  물론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 두려워서… 라기 보단, 책이 탄생한 이래 어느 시대나 상황은 마찬가지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독서의 전통이 고고하게 흐르는 나라, 프랑스의 모리스 블랑쇼는 언젠가 “비평가란 비非독자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피에르 바야르는 한 술 더 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썼다. (이에 비해 윤 모 선배가 쓴 <2주에 1권 책읽기>는 어찌나 순진한 기획인지!) 세계적 고수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개 MD야 말할 것도 없겠다.

  물론 선량한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책을 추천하는 MD가 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태도는 너무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닌지? 악명 높은 심신이원론처럼 물物로서의 책보다 내용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명제를 떠올려 보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를 업계 용어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 앞에 책이 있다” MD는 바로 그 책을 파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란 책 자체와 관련된 것이지, 내용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거성 롤랑 바르트는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덧붙인다.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의 실례가 있다. 형형색색의 표지 속에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작업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을 보라. 제작비 4억, 제작기간 5년, 원고지 3만 6천여 매로 이루어진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기획을 앞에 두고 나는 묻는다.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심지어 소설은 단 한권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또, 이토록 어여쁜 표지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스물다섯 권의 책을 책꽂이에 일렬로 꽂아 넣는 호사를 뿌리칠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책은 보기에 좋은 책이다!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영화 속 졸부들이 하드커버 껍데기로 서재를 채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런 당신을 위한 에코의 일화 :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에코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이런 현답이 있나!

  그래서 우리는, 서점을 서성이고 인터넷을 뒤지며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에 오늘도 몇 권의 책을 꽂는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꾸며, 즐거운 독서를 상상하며. 그러니 읽는 속도보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움츠려들지 말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사는 일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 무비위크 403호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무용담은 물론 뻥이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이 업계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니. 과거의 유산 따위 있을리 없다. 지젝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정도 될까. 저렇게 서두를 뗀 것은 순전히 저널리즘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ㅋㅋ)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봐 두려워서는 물론 아니다. (ㅋㅋ) 출판연감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책의 종수는 4만 여종. 블랑쇼의 "비평가는 非독자다" (위에서는 생략 되었지만) 모리스 나도의 "잡지나 신문사의 편집장은 제곱의 비독자다"라는 말에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은, '책'으로 밥먹기를 선택한 자의 업보다. 아무 도리 없는.

그렇다면 MD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패러디한 것은, 조금 우스운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냥 농담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사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라는 문제는, 책을 파는 사람에게 언제나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잘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인가? 좋은 책을 잘 팔리게 해야 하는가? 답은 요원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가장 그럴듯한 답은 그것이다. 우리 앞에 닭이 있으면 삼계탕을 먹고, 계란이 있으면 계란 후라이를 먹으면 된다!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는 탄생한다....... (농담이라고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A4 1장이 채 안되는 글임에도 수없이 많은 외국 이름과 인용이 등장한다. 이 블로그에 '인문MD'라는 타이틀을 걸고 글을 쓰게 된 이후 갖게 된 버릇. 불평도 많이 듣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중요한 점은 나 역시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거다. 어쨌거나 잘난 척은 아니라는 얘긴데... 이런, 글쓰기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를테면 벤야민의 몽타주 기법 같은 것. (ㅋㅋㅋㅋㅋ) 역사적 맥락에 의해 쓰여진 무엇을 아무 설명 없이 끌고 들어 오는 것.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 역시 정확하게 그것이 뭔지 몰라도 '흐흥, 재미있네' 하고 넘어가는 것. 이쯤 되면 재미 없다, 라는 반론이 나올 텐데...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진심입니다. 그런데 정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재밌다. 따라서 나는 <2주에 1권 책읽기>라는 윤 모 선배의 기획이 여전히 너무 나이브하다고 말하는 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데카트르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오바인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을 스피노자로 맺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데카르트가 등장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부분은 마음에 든다.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이것이야말로 대인배의 자세! 물론 현실은 시궁창. 중고샵에서 긁어 버린 수십권의 책들이 우리 집 마루에는 여전히 쌓여 있고... 마야인에 의하면 종말도 머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러모로 고민 되는 요즘이다. (급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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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권 동시에 읽기>도 위 리스트에 끼워 넣고 싶군요.

무튼, 내가 책을 못 읽는 이유가 그거였나봐요. 나는 책팔이근성이 너무 강한거죠! 막 사는 속도는 자동찬데, 읽는 속도는 마차에요. 달그락달그락

활자유랑자 2009-12-21 13:36   좋아요 0 | URL
문화지체라는 말이 생각 나네요. 도덕 시간에 배웠던 거 같은데... 네이버를 찾아 보니 "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독서지체'?

우연아닌우현 2009-12-2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토록 솔직한 글 완전 사랑합니다. 저도 알라딘에서 많이 사긴 했는데! (억울해요!!!) 그래도 여느 인터넷 쇼핑 품목과 마찬가지로, 몇 번 책을 사고나면 소개글에 현혹되지 않는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는 겁니다. 다만, 그 때까지 초기 장벽에 부딪혀 책과 멀어지는 안타까운 중생들이 있다지요 'ㅂ'

활자유랑자 2009-12-22 15:14   좋아요 0 | URL
음, 적절한 말씀이세요.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2009-12-2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5   좋아요 0 | URL
혹시 문학MD님하고 헷갈리신 거 아닌가요? (농담)
기회가 닿으신다면... 말씀 좀 더 해주세요.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

2009-12-30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31 15:45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행(?)이에요. 약간 안도. ㅎㅎ
2010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 :)

아람 2009-12-2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ㅋ글이 무척 재밌군요. 저널리즘적인 접근방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스피노자로 끝나는 글, ㅋㅋㅋ 누가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 라는 해석이 뒤따르지 않으면 전혀 이해 못 할 글이지만, 재밌어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갑자기 부끄럽네요...;
좀 더 깊이 들어가야겠어요.

하이드 2009-12-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

이 페이퍼가 자꾸 보여서, 결국 들어와 다시 한 번 댓글 남깁니다.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요? 진짜 궁금해졌어요. 사는 사람 말고, 읽어내는 사람이요. 설마 손꼽을 정도는 아니겠지요? 우리나라 인구가 얼만데 (죄송합니다. 인구드립;ㅎ)


활자유랑자 2009-12-23 16:11   좋아요 0 | URL
기간을 정해 놓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향후 3년 간을 기준으로 놓고 생각하면... 손에 꼽을 수 있을지도? ; (일단 저는 읽을 생각이 없고요;)

엘 우즈 2010-02-16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솔직하고 재미있네요 *

활자유랑자 2010-02-16 19:15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일주일에 수십권씩 출간되는 책을 읽을 수 없는 MD의 진심...입니다. T.T

valeria 2010-03-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니홈피에 출처 밝히고 퍼가겠습니다. ^^ 좋네요.
www.cyworld.com/valeriah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8월 6일 새벽. 원고마감은 2시간을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또 다른 원고들이 줄지어있으며, 온도계는 32도를 가리키고, 선풍기는 더운 숨을 뱉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 없이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을 내뱉었을 상황. 그렇지만 나는 입을 다문다. 그것이 언어의 오남용임을 깨달은 것이다. ‘해도 너무함’의 정수를 몸소 보여주시는 높은 분들 덕분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하셨으면, 바랄 뿐. 이대로라면 언젠간 이 지면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무한 반복) 너무 한다”로 채워야 할 것만 같아 두렵다. 어휘가 부족한 탓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글은 무력하다고. 김훈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근사록>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독서를 해온 모양이다. 읽어 온 것과 현실을, 아니 나 자신을 도무지 조화시킬 수 없으니.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마치 자일리톨을 소화시킬 수 없는 충치균이 계속해서 자일리톨을 먹듯. 그리하여 충치균은 굶어 죽고, 아직 살아있는 서점 직원은 여전히 무력한 독서를 한다. 

  <괴짜사회학>의 저자 수디르 벤카테시 역시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설문조사를 위해 무턱대고 찾아간 흑인빈민가에서 갱단 보스 제이티를 만난다. 우연한 만남. 박사 논문 주제를 찾고 있던 수디르와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외부인을 찾던 제이티는 학생과 갱이라는 신분차를 넘어 의기투합한다. 경찰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 빈곤의 섬. 어떤 이론도, 어떤 논문과 통계도 설명할 수 없는 땅에 제이티의 도움으로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빈민가의 경제는 마약과 섹스를 기초로 돌아간다. 갱단은 마약을 파는 동시에 일종의 경찰 노릇, 보호자 행세를 한다. 투표로 선출된 주민대표는 부패한 주택공사와 결탁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지만, 그들 역시 국회의원 노릇을 한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택공사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섹스와 식료품, 공산품을 교환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그런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한 구석, 마치 경계선처럼 커다란 공터 가운데 세워진 흉물스러운 고층 공영주택단지에 빈민들을 몰아넣은 것은 바로 정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갱단과 주민대표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철저한 혼란뿐임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일종의 차악次惡인 셈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주민대표 베일리 부인과의 대화다. 수디르는 최근 통계자료를 들먹이며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25퍼센트라는 것. 그러자 부인이 말한다. “만약 자네 가족이 굶주리고 있고 내가 자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쩌겠나?” 당연히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학업을 미루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부인은 되묻는다. “하지만 자넨 학교에 다녀야 하잖아, 안 그런가? 그게 자네를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테니 말이야.” 이토록 책은, 막연한 일반론과 비정한 현실 사이에 낀 수디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그만의 딜레마는 아닐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들어간 수디르는 10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마침내 내부의 시선을 이해하게 되지만 마지막까지 그 둘을 조화시키지는 못한다. 물론 빈민가에 대한 그의 논문은 호평을 받는다. 그리하여 수디르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되고, 빈민가는 고급주택단지를 조성하려는 주정부에 의해 철거되며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들과 약간의 희망, 커다란 부채의식만을 남긴 채.

  그리하여 책장을 덮은 나는 불평한다. 아, 대체 어쩌란 말이지. 뉴스에선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소식들이 들리고, 나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될 일도 없는데, 답도 없이 책이 끝나버리다니. 하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병통치약은 없고, 정답으로 보이는 것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는 수디르의 고민은 정직하고, 약점을 숨기지 않는 이 책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김훈 선생의 말처럼, 책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엇임을.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나는 훌륭한 독서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훌륭한 독서가들에게 좋은 책을 권할 수는 있을 거라고. 이것이 얼마만큼의 ‘타협’인지는 아마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세상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어느덧 해가 밝아 온다. 가자, 출근 시간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9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2월 21일 오전, 마감 시간이 임박한 원고를 겨우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다른 원고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고, 설상가상 온풍기는 서늘한 바람을 뱉어내고 있다…. 워낙 많은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사회인지라 글을 쓸 당시 무엇 때문에 '해도 너무함'의 정수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잊었지만(나랏님들 얘기다). 여전히 해도 너무한 일들은 차고 넘치시니 상관은 없겠다.

한 때는 모든 일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답이 중요할 뿐 과정은 별 소용 없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잘 모른다. 답이 있는지, 과정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에 말 할 수 없고, 말 할 수 없기에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김훈이 말하는 끔찍한 동어반복이다)

<괴짜사회학>은 재미있는 책이지만, 아무래도 사회학이라고 하기엔 좀 억지스럽다. 사회학자가 쓴 논픽션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리라. 미국식 서지사항을 따르자면 실제로 그렇다. 원제는 "Gang Leader For A Day" 하루만 갱단 두목이 되어 보기. 실제로 수디르는 일일 갱두목 체험을 한다. ㅋㅋ

나는 여전히 저 책의 마지막이 속상하다. 어린 시절 무라카미 류의 <69>의 에필로그를 보고 불편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작가가 된 류는, <69>의 공동 주인공인 친구가 찾아오자 차갑게 식은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별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돌려 보낸 후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고 후회한다) 물론 그 시절 <괴짜 사회학>을 읽었다면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처음 <69>를 읽었다면 불편해하지 않았으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은 장기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고작해야 한탄할 것이 '밥벌이의 지겨움' 뿐이라는 사실은 조금 민망하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조건. 그런 면에서 밥벌이의 지겨움과 그 도리 없음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김훈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세상 다 산 어른의 것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비롯한) 김훈에 감탄하는 젊은 세대는 너무 조로했다. 살아보지도 않고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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