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의 생활경험은 여러 문제를 늘 새롭게 연구하도록 자극했다.마침내는 현실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다시 그 이론을 실제에 시험하려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나는 이론 속에서 질식된다든가,현실 속에서 천박화된다든가 하는 일을 모면했던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대부분의 사람이 책을 읽은 후 그 책이 당신의 삶과 지식에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가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책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결과정을 담고 있다. 히틀러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읽지는 않았지만 뚜렷한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맞추어 여러가지 지식을 분류하여 기존의 체계에 통합하였기에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를 지도할 나름의 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기본적인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활자가 만들어내는 관념세계에 뛰어든다면 가장 핵심적인 명제조차 얻어 듣지 못한 채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독서 행위가 막 끝난 상태에서 읽은 사람이 가지는 것은 나도 이 어려운 책을 읽었다는 포만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생활 속에서 문제와 맞부딪치는 경우 두텁게 구축한 지식이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포만감은 공허함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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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책을 상당히 읽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하나 들어보자.

 

독서나 학습의 기술이라는  것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즉 본질적인  것은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잊는 것.

 

한정도 없이 많이 읽는 사람,한 권 한 권,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고 할 수  없다.물론 그들은 다량의 지식을 갖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두뇌는 자기가  거두어들인 이 재료를 분류하거나 정리하거나 하는  일을 모른다.그들에게는 책 속에서 자기에게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선별選別하는 기술이  부족하다.그리고 어떤 것은  항상 머리 속에 지니고 어떤 것은 가능한 한 무시하는  식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쓸모없는 골치아픈 것을  끌고 다니지 않는 기술이  결여되어 있다.독서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첫째로 독서는 각자의 소질,능력을  발휘하고 인격 형성을 충실케 하기  위하여 조력해야만 한다.그러므로 독서는 각자가  자기의 직업에 - 이것이 원시적인 생존투쟁이든,혹은 비교적  고급의 사명에 만족하기 위해서든 마찬가지이지만 - 필요한 도구나 자재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둘째로 독서는 일반적인 세계상世界像을 전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올바른  독서 기술을 갖고 있는  자는 어떠한 책,어떠한  잡지나 팜플렛을 읽더라도 쓸모가 있다든가 혹을 알아둘 가치가  있다는 이유에서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즉시 주의가 집중되리라.

이러한 방법으로 얻어진 것이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서  이미 여하튼 머리 속에 있는 관념들 가운데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자마자 잘못을 고치든가,그  상의 정확성이나 명료함을 높여주는 것이다.인생에 돌연 그 어떤  검토나 해결을 요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면,이런 식으로 독서할 경우 즉시  기존의 관념을 기준으로 정하고 거기에서 이 문제에 관계하고 있는 과거  몇십 년간에 모아진 개개의 도움되는 것을 끌어내어 문제를 해명하든가 해결할 때까지  검토하거나 재고하거나 하기 위해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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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는 책읽기를 철저하게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명저가 오늘날 그렇게 적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한다.

명저라고 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읽을 거리가 어떤 때는 훨씬 개개인에게 효용이 있을 있지만 사실이 결코 명저가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굳이 것을 읽지 않았다고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아니고 읽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만으로 가치가 마구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현재 나한테는 고전을 읽는 것이 효용이 없고 나에게 굳이 것을 읽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창조력이 고전에서 나오고 내게 의무가 없다는 것은 냉정하게 보면 결국 내가 세상에 창조할 가치가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그런 반성에서 나도 고전에 도전을 해보았다. 결과는 비참하였는데 이제 이야기를 해보자. 가령 칸트의 철학사상을 알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용기를 찬양하고 다음으로 진지하게 다른 방법을 권유하고 싶다.

 

전에 철학사를 여러 날에 걸쳐 열심히 읽고 나서 이제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으려고 하였다. 나는 두터운 철학책을 여러 보았고 친구는 철학을 만화로 풀어놓은 권만을 읽은 상태였다. 내가 한참을 열을 내며 다양한 개념에 대하여 설명을 진행하였는데 친구는 아주 짤막한 지적을 철학자에 대하여 하였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 이었다. 평소에 투자해 놓은 것이 워낙 많은 탓에 내가 전체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는 말은 많았지만 상대방이 쉽게 깨달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친구는 만화책 별다른 고민 없이 읽은 뿐이고 나는 많은 시간을 고민 속에서 두터운 책과 씨름한 결과가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것일까? 고민에 들어가지 않을 없다.

 

나의 문제는 우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이문열씨의 <젊은날의 초상>에서 인용했듯이 진리를 쫓기 보다는 카페에서 마주친 어줍잖은 숙녀를 위한 다시 말해 주변의 어줍잖은 찬사에 도취하는 수준에서 머물게 하였다는 의미다.

독서는 무엇보다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독서 자체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리를 구하는 방법으로 독서만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음으로 자기 수준을 바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읽는 방법이 좋지 않았다.

비유적으로 이야기 하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출발점 - 수준 - 도착점 - 목적의식 - 그리고 도달하려는 방법 - 독서법 - 모두 불완전 했다는 것이다.

결코 시간과 노력을 내가 적게 쏟아 부은 것은 아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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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자다.
내가 하나의 물건을 있기 까지는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있어야 한다. 지식에도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유통업자 소비자라는 서로 다른 계층이 있다.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단계 중의 하나에 자신을 자리 매김하는 것으로 생산과정에 종사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공부하시던 교수님 분이 자신은 소비자 약간 유통업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문에 뜻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가지 원인이 있는 하나는 고전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다. 고전은 앞에 묘사 한대로 지식의 산에서 중간 중간의 굵은 능선이다. 다른 사람의 지적인 축적물을 정확히 파악하지 한다면 그들이 도달해 놓은 한계가 어느 곳인지 방법도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다. 기껏 고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누가 깔끔히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할 있다.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도 역사 속에서 지적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 났던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사람의 노력이 만들어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중턱의 무수한 쉼터나 앞선 등반객의 자취를 무시하고 밑바닥부터 혼자 힘으로만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기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겠지만 적어도 현명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있다. 가령 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들고 산에 올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만들어 내려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시대는 헤겔의 시대를 넘어 마르크스를 거쳐 포스트 모던까지 흘러갔다. 심하게 말하면 그는 고대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창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이 소화한 고전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한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있는 힘이 된다.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자신이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를 이룰 있는 가능성의 한계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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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사람 대부분이 2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안다. 2 방정식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답이 있다. 그러면 3 방정식의 경우는 어떨까? 4 에서는 5 에서는 이런식으로 계속 올라간다면 수학을 어지간히 잘했다고 자신하던 사람도 모호해 진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일부 수학자들이 문제와 씨름하여 3,4 방정식에 대한 일반적인 답을 얻었다. 하지만 5 차에 이르러서는 쉽지 않아 수백년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다 1800 경에 프랑스에 와서야 풀리기 되었다. 답은 일반적인 해법이 나올 없다는 것이다.

백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 문제인데 나는 지금 그들이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내가 그들보다 수학을 탐구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가?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하학이나 수에 대한 원리를 보면 현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전혀 지능적인 차원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보다 결코 머리가 좋아서 그들이 평생 고민하던 문제를 있는 것이 아니다. 앞과 그들 사이의 누군가가 풀어낸 해법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후대에 태어났다는 점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적 능력의 사이에는 이와 같은 불일치가 존재한다. 물리物理에 비유하면 지식은 위치位置고 지적능력은 물체를 운동運動하게 하는 힘으로 있다.

 

지식의 추구라는 것은 거대한 산의 등반과 같은 것이다. 결코 한두 사람의 발걸음에 의해 정복되지는 않는다. 한참 근력이 좋을 때는 무조건 앞으로만 나간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도저히 넘을 벽을 만나서 되돌아오기도 한참을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곳에서 그리 벗어나지 했구나 하는 아쉬운 순간도 있다. 문득 되돌아보면 세월을 보냈기에 어느 정도 아래가 보이고 앞서갔던 현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쉼터를 만나기도 한다. 아래에는 자기와 같은 목적으로 이제 어귀에 접어든 많은 후배가 보인다.  선한 마음으로 오를 두개만 가르쳐 주어도 자기 자리까지 올라오는데 훨씬 적은 시간이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간이 허락하는 때까지 밀고 나가고 다한 것은 나은 후배가 언젠가 해결해 주리라 기대할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식이라는 거대한 산에 대한 추구는 무수한 세대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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