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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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다. 지난 번에는 아주 제대로 당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었다. 그런데 얼추 사건이 조금 느껴졌다. 뭐, 그래봤자였지만. 나도 그냥 속았다고 말하려니 마지막이 찜찜했다. 봉인을 해제한 뒤가 왜 맥이 빠지게 느껴지는 건지. 현대인의 집착과 광기를 제대로 그려내긴 했는데 마지막은 참 슬펐다. 

맞은 편 아파트 201호를 엿보다 시체를 발견하고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속앓이를 하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치료소에 들어갔다 나온 번역가 오사와 요시오는 1년 뒤 치료소에서 나와 새롭게 시작을 하려는데 다시 맞은 편 아파트 201호에 새로 여자가 입주한 사실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큰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엿보기가 취미가 되어 버린 이 남자는 자신이 그 여자로 인해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두려워한다. 

이제 막 도쿄에 취직을 해서 온 마유미는 여행사에 다니면서 직장에 나름 잘 적응하면서 회사의 유명한 바람둥이 유부남 다카노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요시오와 같은 알코올 치료소에 있다 나온 절도범 소네는 우연히 마주친 요시오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잡으려다가 마유미를 요시오가 엿본다는 사실을 알고 그 집 열쇠를 복사해서 마유미 집을 드나들며 마유미의 일기장을 훔쳐보며 다카노에게 분노한다. 그런 와중에 사건이 일어나고 각자 그 사건에 대처하는 자세는 그야말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광기어린 것들의 표현이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얽히고설켜서 현대인의 억눌린 심리와 범죄 사이의 다리를 작가가 놓고 있다. 작가는 다시 한번 독자로 하여금 글과 글 사이의 행간을 눈여겨 보게 만들고 있다. 요시오와 마유미의 일기가 번갈아 등장하고 여러 사람들의 돌발적 행동이 미스디렉션으로 작용하도록 교묘하게 꾸며 놓았다. 그 미스디렉션을 간파하고 마지막까지 잘 도착하는 것이 관건인데 작가가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 이야기는 <도착의 론도>보다 쉽게 전개되는데 그 쉬운 전개가 또 다른 미스디렉션으로 작용하는 것만 같다. 

이번 도착에는 관음증이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엿보기다. 인간은 모두 엿보기를 좋아하고 엿보기를 일상화하고 있다. 매스컴의 보도를 보는 것, 인터넷을 하는 것도 엿보기의 일종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그야말로 병이 된다. 관음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엿보기를 하며 괴로워하고 자신의 그런 습관을 여자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인물인 요시오와 아주 당당하게 남의 집에 들어가서 엿보기를 하는 소네가 등장해서 서로 다른 엿보기 행태를 보여준다. 여기에 책의 마지막을 봉인해서 독자를 책속의 엿보기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마지막까지 관음증이란 소재를 놓치지 끝까지 이어가고 있는 점이다. 

작가는 현대인의 고독과 정글처럼 싸워야 하는 대도시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냐고. 어쩌면 그런 것이 관음증이라는 도착에 빠지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이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게 하고 있기도 하다. 약한 동물에게서 먹이를 가로 채는 맹수를 탓할 수 있으며 궁지에 몰린 약한 동물의 몸부림은 얼마나 가련한지를. 도착의 사각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도착 시리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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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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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 울리치의 작품은 어둡다. 그의 작품은 제목에도 많은 들어 있지만 색으로 표현하면 검은색이다. 까만 밤처럼. 그 밤을 배경으로 작가가 독특한 작품을 썼다. 시간의 제한을 두고 점점 불안과 공포로 숨막히게 만들고 그런 한편에서는 경찰들이 실체가 모호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초를 다툰다. 과연 작품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짧은 시간 동안의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조여오는 실체없는 공포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숀은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자살하려는 걸 막는다. 그 여자는 자신을 살려준 것을 원망하며 자신이 왜 자살하려는 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공포의 시작은 부잣집 외동딸인 진의 집에서 하녀 한명이 그녀의 아버지가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저 불쾌하게 여겨 그 하녀를 쫓아내지만 그녀도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결국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탄 비행기가 사라졌다 추락해서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녀는 결국 그 하녀의 집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는 앞날을 예언하는 이상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는 무사할 거라는 걸 알린다. 예언은 적중되고 아버지는 불안해하는 딸을 위해 그 남자를 찾아가 사기꾼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그와 의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남자는 진의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얘기하고 여기에 불안해진 진이 자살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숀은 자신이 경찰임을 알리고 그가 그들을 보호해주겠다고 나선다. 숀은 상관에게 이 일을 보고해서 그 남자가 사기꾼이자 살인자임을 밝히려 애를 쓰고 그동안 진의 집에서 함께 있으며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로 한다. 숀의 상관은 각각의 경찰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이 조사에 의해 현혹시킨 속임수임을 알아내도록 지시하고 경찰들은 그 일을 입증하기 위해 나선다. 또한 죽음에 연관되는 사자에 대해서도 조사하기에 이른다. 이미 그녀의 아버지는 시시각각 줄어드는 자신의 삶의 시간을 재며 넋이 나간 상태였고 하인들은 불안해서 공포에 떨며 집을 거의 모두 나가고 만다. 도대체 사자가 죽일 거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그의 예언은 진짜였는지, 어떻게 경찰들이 모든 것을 밝히게 될지 불안과 공포는 점점 그들은 짓누르는 가운데 시간은 분단위로 쪼갤 수 있는 아주 모래알 같은 시간만이 남는다. 

누군가 죽음을 예언한다고 해서 이렇게 공포에 떨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저 흔한 집시 노파의 수정구슬 점으로 치부하고 웃어 넘길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과 그의 아버지는 부자다. 부자들은 외롭다.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누군가의 말을 더 잘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그리고 자기도 잊고 있던 기억까지 맞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리라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 불안 심리와 거기에서 오는 공포를 작가는 잘 표현하고 있다. 잘못된 믿음의 결과가 어떤 일을 가져오는지 편집광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은 정말 믿기 힘든 결과로 다가온다.  

아주 단순한 불안을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나는 코넬 울리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밤 하늘의 별조차도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들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들에서도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것과 같다. 밤 하늘의 별이 무섭다면, 그것이 자신을 감시하는 눈처럼 보인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겠는가. 작가는 이런 불안과 공포를 단순하게 그것이 시작된 진과 그의 아버지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모든 등장 인물들에게 전염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옆 사람이 불안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공포를 느낀다면 그 주위 사람들도 느끼게 되어 있다. 이런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면서 작품 전체를 극한의 서스펜스로 마지막까지 몰아가고 있다. 밤과 어둠에 역시 탁월한 작가다. 그 동안 이 작품을 볼 수 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보게 되서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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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2-14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오래전 헌책방에서 구입했던 중학생이란 잡지에서 번역되었던 한회를 봤던 기억이 나는 작품입니다.드디어 나왔는데 물만두님 리뷰를 보니 더욱 보고 싶어지네요

물만두 2009-12-15 10:23   좋아요 1 | URL
코넬 울리치란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만드는 작품이지요.
 
수상한 미술관
이은 지음 / 노블마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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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누가 스피노자를 죽였을까?>를 보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작품을 나는 감히 그해 최고의 국내 추리소설로 꼽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 안타까워 하던 중 <미술관의 쥐>, <코미디는 끝났다>를 계속 발표해서 나는 기쁘게 해줬다. <수상한 미술관>은 연이어 발표된 두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술관의 쥐>는 미술을 소재로 한 작품이고 <코미디는 끝났다>는 휴대전화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두가지 소재가 결합해서 <수상한 미술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별 볼일 없이 시간 강사를 전전하며 미술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미술평론가 김이오는 전날 아내와 싸우고 난 뒤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낯선 휴대전화로 걸려온 이상한 남자의 전화는 그를 악몽속으로 끌어당긴다. 남자는 김이오의 평론으로 몰락한 교수이자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내 수진을 납치했다고 한다. 그의 요구조건은 아주 황당하다. 자신이 김이오의 미술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고쳐주겠다며 여러 미술관을 다니며 내는 문제를 맞추면 아내를 풀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냐고 하고 싶지만 직접 겪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게 빠른 전개를 보이고 있다. 하루 동안, 시간 별로 벌어지는 미술관 순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미술에 대한 지식과 패러디와 표절에 대한 차이,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문제를 푸는 남자의 심리와 태연하게 문제를 내며 토론하려 하는 범인이라는 색다른 느낌과 주인공의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과 문제를 푸는 동안 드러나는 심적 부담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낯선 등장 인물은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에 몰입하게 만든다. 도대체 범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작품이 이런 물음을 던지며 눈을 떼지 못핳게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과 미술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나는 유진 스미스의 <목욕하는 도모코>라는 사진을 처음 봤다. 그런데 동생은 그 사진을 보자마자 알아봤다. 미나마타병에 걸린 소녀에 대한 사진이라고. 사진 작가든 화가든 소설가든 그들은 어떤 이유로 작품을 찍고 그리고 쓴다. 단순히 보는 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일수도 있고 자기 만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작가가 마지막에 보여준 반전으로 드러나는 것이리라.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만한 것을 작가는 잘 담아내고 있다. 시원스레 끝맺고 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얼마나 좋을까? 현실이 과정이 아닌 결과만 이리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의 답은 모르겠다. 또 왜 제목이 수상한 미술관인지가.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마치 수상한 미술관이 언제 등장하는지 기다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표절이 패러디로 둔갑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진리는 들통나지 않은 거짓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들통이 나더라도 우길 수 있다면 거짓말도 진실로 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란 미술사뿐 아니라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면서 명쾌하고 깔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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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비밀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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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한 남자 조스의 이력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배를 타던 선장이었다가 망가진 배로 항해를 하게 만들고 결국 선원 둘을 잃게 만든 선수를 폭행했다가 감옥에 가고 결국 영원히 바다와는 멀어지게 된 뱃사람. 그래서 그는 조상들이 하던 소식꾼이라는 일을 현대에 다시 하게 되었다. 소식함을 매달아 놓고 그 안에 누구든 읽게 하고 싶은 글을 약간의 돈과 함께 넣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 소식들 중 읽을 것과 읽을 수 없는 것을 가린 뒤 하루 세차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준다.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을 지 모르지만 디지컬 시대에 아날로그적 향수를 그리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이상한 글들이 과한 돈과 함께 들어오는데 악의적 글은 아니지만 뭔가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느낌을 주고 못 배운 조스지만 뭔가를 감지한다. 그때 그가 몰락한 귀족이라 생각한 드캉브레가 그 글의 출처를 알아내서 경찰에 신고하자고 제안을 한다. 

그들이 그 소식들을 읽으며 고민을 하던 그 순간 아담스베르 총경은 새로 부임한 곳에서 적응하려 애를 쓰고 있다. 그는 부하 경감들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 처지다. 그나마 당글라르가 그를 보좌하고 있기에 난관을 헤쳐가는 중이다. 이때 한 여인이 그를 찾아와 문에 검은 칠을 하고 뒤집어 쓴 '4'자와 'CLT'라는 문자에 대해 대첵을 호소한다. 마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처럼 한 집만 제외하고 아파트 전체가 그렇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의 낙서거나 이상한 예술의 일종이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그림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그려져 있었고 그때 마침 찾아온 드캉브레가 알려준 이야기는 그들을 과거의 페스트의 악몽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가운데 마침내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누가 살인을 저지르는 걸까? 왜 페스트라는 사라진 역병을 이용하는 걸까? 마치 살인자가 살인을 저질러도 잡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질병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병에 걸려 심각해져야만 염려하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기 전까지는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보여지게 만들고 있다. 추리소설의 속성이 그 안개를 차츰 걷어내는 것임을 인식시키듯이 말이다. 여기에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페스트를 등장시켜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속임수인지 가늠하게 하고 여전히 예전이나 과학이 발달한 21세기의 오늘날이나 인간의 주술적 믿음은 견고함을 깨닫게 한다. 아마 지금 이런 일이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도 예전에 조상들이 하던 미신적 행동들을 하지 않을까 싶게 느껴진다. 나약한 자여, 그대는 인간일지니.  

현대 추리소설은 빠른 스피드와 스릴 넘치는 강렬함으로 무장을 하고 있어서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반면 고전 추리소설은 그런 소설을 읽다보면 본격 추리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밋밋한 감을 떨쳐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현대에서 과거를 느끼게 하고 과거의 매력을 현대와 조화롭게 읽을 수 있게 안정감을 준다. 이 작가가 추구하는 독특함이자 아담스베르 총경 시리즈의 매력이다. 그런 이유로 아담스베르 총경이 과학보다는 직감에 의지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사건이 안 풀릴때는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며 생각을 하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에르큘 포와로가 회색 뇌세포를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여기에 에드가키네 광장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현대 소외된 계층들이 그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이들이다. 이름을 속이고 얼굴을 감추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주는 양 사는 이들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도전장같이 느껴진다. 사회가 소외시키더라도 우리끼리 알아서 잘 살겠다는. 학교 교사였다가 남학생들에게 폭행당하는 여학생을 구했지만 결국 그 자신이 추문에 휘둘리고 법정에 서게 되어 감옥까지 가게 되어 이름까지 바꾸게 된 드캉브레, 매춘을 위해 팔려 왔다가 내쫓겨 갈 곳이 없어지자 드캉브레의 하숙집에서 일을 하며 밤에는 노래를 하게 된 리스베트, 남편의 폭행에 시달라다 도망을 와서 드캉브레의 하숙집에 숨어 사는 에바, 추운 겨울에도 반 팔을 입고 있는 모자라 보이는 다마 등등 마치 뱅자맹이 사는 곳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세월이 흐르면서도 가지고 가고 싶은 인간적인 면이 남아 숨쉬는 곳이다. 이런 곳이기에 소식꾼도 어울리는 것이다.  

프랑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프레드 바르가스의 명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야기가 멋있고 페스트라는 소재를 사용한 점이 신선하면서도 고전적 향기를 느끼게 한다. 인물들 묘사도 탁월하고 사건의 구성도 짜임새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 지 그 연결점이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탁월하다. 이런 고전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세련된 작품을 읽을 수 있어 영광이다. 어쩌면 이 작품이 추리소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담스베르 총경 시리즈는 정말 모두 출판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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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9-12-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 소개해 주신 거 감사합니다, 또요..^^

물만두 2009-12-14 10:5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요구르트소녀 2009-12-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좋은 작품을 소개받은 것만 같습니다요~!

물만두 2009-12-15 15:24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장소] 2013-08-0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의규칙도,,있는뎁..^^
 
스켈리톤 맨
토니 힐러먼 지음, 설순봉 옮김 / 강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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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신화는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무시무시한 전설과 설화가 어떤 사건의 은폐라거나 이해 불가능한 관점에서 발생한 것이 와전되고 변형되어 그렇게 만들어져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나는 일본 추리소설에서 많이 느꼈다. 이제 다시 돌아온  그리고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린 토니 힐러먼 옹의 이 작품 <스켈리톤맨>에서 인디언식의 신화 또는 그런 과점에서 유추하게 되는 많은 신화들의 생성 과정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났다. 

한 호피족 남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이아몬드 원석을 단돈 20달러에 팔려다가 강도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그랜드캐니언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 남자를 찾아 온다. 이야기는 이제 현재에서 50여년 전의 과거로 흘러간다. 그 당시 그랜드캐니언 상공에서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망한 대형 참사였다. 하지만 그 참사는 한 여인에게는 비극을, 한 남자에게는 행운을 안겨준다. 그 비행기에는 대부호의 아들이 타고 있었고 그와 결혼하려던 여자는 아이를 임신한 채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의 부모에게 버림받는다. 유산은 모두 비영리재단에 돌아가는데 그 재단에서 비리를 저지르던 남자와 이제는 중년의 여인이 된 딸이 아버지의 딸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나서고, 남자는 그녀가 찾지 못하게 저지하려 한다. 

그 와중에 조 리프혼은 이미 은퇴해서 무료하게 지내던 중 그런 다이아몬드가 예전에도 도난 사건에 포함된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사건을 조사하고 다니고 짐 치는 카우보이 친구의 사촌이 연루된 사건이라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그 다이아몬드를 준 계곡 아래에 사는 스켈리톤맨이라 불리는 노인을 찾아 나선다. 과거에서 시작된 사건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 리프혼이 늙고 짐 치가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과거를 생각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그건 조 리프혼이 자신이 알던 노인이 죽었다는 소리에 그를 찾아나서 그가 살아있음에 안도하고 그에게서 오래전 다이아몬드를 받은 이야기를 듣게 되며 역시 단서는 리프혼이 모으고 행동은 짐 치가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이 얼마만에 만나는 조 리프혼과 짐 치란 말인가. 정말 리프혼이 아는 이의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 달려가던 마음으로 나는 이 작품이 나온 걸 멍하니 보면서 정말 나온 것인가 생각했었다. 시리즈 후반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마무리하는 것처럼마냥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느새 리프혼은 은퇴한 뒤고 짐 치는 또 다른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드디어 결혼을 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이 사정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보호구역에서 여러 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들만의 방식을 고수한 채 말이다. 나바호족인 경찰들과 달리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호피족이다. 죽지 않고 사람이 늘어 스켈리톤맨이 생겨난 부족. 스켈리톤맨은 그들에게는 죽음의 신이 아니라 지하세계의 수호신이다. 여기에 그랜드캐니언이 그저 관광지가 아닌 삶의 터전이자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쉬는 곳임을 느끼게 하고 있다. 

비행기가 충돌하고 사람들이 떨어지고 한 일이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면 하나의 전설과 신화로 재창조될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인간과 동물은 공존하는 존재이지 공유하는 존재가 아님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짐 치가 버려진 고양이를 야생 고양이로 스스로 살게 하기 위해 애를 쓴 이야기는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모든 살아 숨쉬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갖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연이 아닌 그 누구도 박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찾는 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토니 힐러먼의 조 리프혼과 짐 치가 등장하는 나바호족 경찰 시리즈가 단순한 추리소설로 읽히지 않는 점은 이 때문이다. 단순하면서 명료한 인디언식 가치관이 더 마음에 남게 되는 작품이다. 물론 추리적 요소가 덜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고자 읽는 작품이 아니다. 짐 치가 자신의 트레일러 주택 앞 통나무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평화를 만끽하듯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그런 독특한 추리소설이라고나 할까.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인 시리즈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웠다. 더불어 토니 힐러먼의 명복을 늦게나마 빈다.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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