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이주헌씨가  러시아 관련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은 지난 8월에 접한 바 있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한겨레' 08. 11) 그 '예정'이 이제 '완료형'이 되었다. 그의 책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학고재, 2006)이 출간된 것이다. 한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속으로 '올해의 책들'을 꼽고 있던 차였는데, 때마침 러시아 관련서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짐작에 이 책은 러시아 미술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친절한 '매뉴얼'이 될 것이다(개인적으론 재작년에 둘러본 러시아 미술관들을 다시 되새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일단 발빠른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2. 22) 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러시아는 문학의 나라, 음악의 나라, 혁명의 나라다. 1917년 일어난 10월 혁명은 20세기 역사의 향배를 결정지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에서부터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프 톨스토이를 거쳐 막심 고리키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학은 세계 문학의 젖줄이고 우리에게도 친숙하기 그지없다. 페테르 차이코프스키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우리 음악처럼 가깝다. 심지어는 스탈린 시대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러시아 미술은 어떤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마르크 샤갈이 있지만 이들은 서유럽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민중과 호흡을 함께한 러시아 화가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 거대한 미술의 보고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가 쓴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동토 깊숙이 숨어 한번도 전모를 내보이지 않던 러시아 미술을 지면에 초대해 그들의 장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게 해주는 책이다.(*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미술관'. 동상은 시인 푸슈킨의 동상이다)

여러 권의 전작에서 이미 미술 안내자로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는 지은이는 러시아의 정치·문화 쌍두마차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들어간다. 두 도시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 에르미타슈(*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푸슈킨 박물관으로 하여 미술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고도 남을 만한 곳이다. 에르미타슈와 푸슈킨 박물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자>에서부터 앙리 마티스의 <춤>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사의 걸작 가운데 상당수를 품고 있다. 러시아 회화만이 지닌 고유한 정취를 느끼려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지은이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도 이 두 미술관이다.

지은이의 설명을 빌리면 러시아 회화는 문학적 특성이 강하다. 그림의 형식 못지않게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뜻이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이야기가 화면 전체를 가로지른다. 러시아 회화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파가 1871년 결성돼 50년이나 지속된 ‘이동파’다. 이동파라는 이름은 참여 화가들이 수도를 떠나 지방 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변방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려 한 이 화가들의 노력은 현실에 눈을 돌려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했다. 이들의 의지는 역사화라는 장르에서 탐스런 결실을 얻었는데, 그 미적 성취를 보여주는 한 경우가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의 작품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1887)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수리코프와 함께 이동파를 대표했던 화가 일랴 레핀(1844~1930)은 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역사화 속에 담았다. 그의 작품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는 1877년 열린 ‘193인 재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귀족층·지주층의 자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인민 봉기와 차르 전복을 기도했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운동은 러시아 혁명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1970년대에 정점에 이른 이들의 활동은 대대적 체포와 ‘193인 재판’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이후 혁명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레핀의 그림은 이 시기에 체포된 젊은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상기된 얼굴의 운동가는 결코 비굴하게 선처를 호소하거나 절망하여 좌절할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상 언젠가 이 수고와 희생의 결실을 보릭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열정과 믿음으로 부릅 뜬 눈은 200년 전 차르에 대항했던 구교도 여성 귀족의 눈과 겹친다. 그렇게 러시아 미술에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흐른다.(고명섭 기자)

06. 12. 22.

 

 

 

 

P.S. 러시아 미술사에 관한 참고자료로는 조토프의 <러시아미술사>(동문선, 1996)가 있다. '그림책'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그냥 소장도서로 분류해놓고 있다. 현대미술을 전반적으로 다룬 책으론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 러시아미술 1963-1922>(시공사, 2001)이 유익하며 유일하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을 읽으면서 참조할 만하다. 원서는 1962년에 나왔으며 영어로 된 저작으론 '고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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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미술은 거의 처음 접합니다.
오.. 아름답군요.
멋진 러시아 그림을 감상하게 해주신
로쟈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추천!!


로쟈 2006-12-2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감사받을 일은 아니구요, 저자의 노고와 발품이 고마운 것이지요...

Runa 2006-12-2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겨레에서 본 기산데 또 깔끔하게 퍼갈 수 있게 올려놓으셨군요.^^
고전문학전집이 있는 집이 다 그렇듯이 제게 문학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에프스키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교시절 고리키의 영향도 지대했지만, 재수하고 나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며 조소와 부끄러움이 공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대로부터 이제 나는 너무나 멀어져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지요.
러시아 음악은 너무 좋아하는데 레핀 말곤 러시아 미술에 대핸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미국이 아님 유럽에 너무 경도돼 있어요.
뜬금없지만, 로쟈님 같은 분이 들뢰즈가 자주 언급하는 '체스토프' 같은 이의 책을 번역하심 좋으련만.. 그냥 해 본 소린 거 아시죠?

로쟈 2006-12-2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가 자꾸 다운돼서 하나 교체했습니다. 들뢰즈가 자주 언급하는 철학자는 '셰스토프'이고 국내에 번역서가 있습니다('비극의 철학' 등). 제가 갖고 있는 선집도 두 권 분량 정도이고, 물론 어디서 지원해준다면 번역을 궁리해볼 수도 있습니다.^^

Runa 2006-12-2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발음 여쭤볼까 했는데, 역시 틀렸군요. 번역서가 있는지는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하고, 번역도 생각이 있다시니 반갑군요. 명성을 더 쌓아서 지원받길 기다리겠슴다.^^

로쟈 2006-12-24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지적한 적이 있는데, <차이와 반복> 국역본에 잘못 표기돼 있습니다. 그게 불어로는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로선, 보다 적합한 다른 분이 먼저 번역해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최근에 읽은 러시아 관련 외신들 대부분이 부정적이거나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가 자원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면모를 되찾아가는 이면에서 푸틴을 권력의 정점으로 한 구 KGB 파벌의 득세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관료-과두부유층 집단(올리가르히)의 전횡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의 말을 빌면,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절을 포함하여 현재까지도 여전히 '귀족사회'인 모양이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로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은 동시대 러시아의 여러 징후들 속에서도 감지된다. 모스크바의 오스토젠카 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새로운(?) '계급전쟁'(이미 '계급투쟁'이 아니다!)은 한갓 에피소드일까(우리의 '철거민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차이라면 러시아에서는 법적인 권리조차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외신을 요약하고 있는 국내기사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원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12. 20) 러시아 모스크바 원주민-신흥갑부 ‘계급전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인근 오스토젠카구에는 ‘공산당 선언’을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동상이 서 있다. 요즘 이 동상 주변으로 이곳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시당국이 부자들을 위해 재개발을 추진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원주민들이 이주 보따리를 싸야 할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5년전만 해도 공산주의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의 도심에서 원주민과 신흥 부자들 사이에 새로운 계급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서쪽지역 오스토젠카구 히코프로 3가에 사는 주민들은 지난 9월부터 엥겔스 동상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5월 시 당국이 부유층들을 위한 최고급 주거지역을 짓기 위해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당국이 모스크바 남쪽 외곽 부토보에 이주용 아파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 반발을 무마하지 못했다. 부토보가 모스크바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나 떨어진 데다 1930년대 말 스탈린 시절 1천만명의 유대인들과 한인들이 학살돼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오스토젠카는 모스크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주거지였다. 지금 이곳에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떼돈을 번 신흥 갑부들의 자금과 낡고 우중충한 건물을 대신해 최신식 건물을 들이겠다는 시 당국의 의지가 맞물려 수백만달러짜리 펜트하우스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오스토젠카 외에도 트베르스카야 등 도시 서쪽지역에는 ‘골든 마일’ 재개발 사업이 진행중이다.



신흥 갑부들을 위한 아파트는 철통 보안과 각종 편의시설을 자랑한다. 아파트값은 ㎡당 1만달러(평당 약 3천만원)가 넘어서는데도 없어서 못팔 정도다. 부동산업자인 게오르기 자구로프는 “돈과 권력이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역 부동산을 매입하고 있다”며 “신흥 부자들에게 1백만~2백만달러는 돈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부자들에게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재개발 붐은 러시아 부동산업자들에게 큰 돈벌이 기회가 되고 있다. 부동산 개발회사 RGI 인터내셔널은 이달초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지난 10월 RGI인터내셔널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오스토젠카에 사는 주민들은 당국과 개발업자들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고 있다.

최근 러시아 경제신문 코메르산트가 연방 반독점 감독원이 킬코프 페레록 3가 개발 사업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폭로했지만 개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시 관계자는 오스토젠카의 항의는 ‘지역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모스크바 소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가고 있으며 주민들과 개발업자·시 당국 사이에 갈등이 커지면서 각종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유명 성형외과 의사가 청부살인업자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19일 이같은 오스토젠카의 분위기를 안톤 체호프의 소설 ‘벚꽃동산’을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소설이 아니라 드라마이다. 원기사에도 '소설'이란 언급은 없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설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기자들이 점점 용감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신분제 파괴 이후 제정 러시아가 맞은 혼란한 사회상을 그렸다. 사회적 혼란을 겪는 오늘의 러시아에 부동산 문제가 계급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김정선 기자) *아래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구세주 성당과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는 오스토젠카 구역의 야경.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were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 Misha Japaridz/The Associated Press)

A class struggle on Moscow's Golden Mile

Locals fight a luxury housing project fueled by oil money

By Sophia Kishkovsky

MOSCOW: The statue of Friedrich Engels that graces one of central Moscow's most prestigious neighborhoods has not been of much use to any but pigeons in recent years. But Engels, co-author of "The Communist Manifesto," was a handy rallying point not long ago for some residents of that neighborhood, Ostozhenka, who were protesting its transformation into a hotbed of luxury housing thanks to an oil-fueled real estate boom.

"Leave Us Alone," read banners unfurled by the protesters in September. That cry is also the name of their movement, spurred by the latest luxury housing project, slated for the site of an apartment building in which some of them still live, at Khilkov Pereulok 3.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just as the district began to take off, overlook the area. Ostozhenka, once home to many artists and intellectuals, is now known in the parlance of real estate agents and their wealthy clients as the Golden Mile. Its winding lanes are now home to modern multimillion-dollar penthouses, Ferraris, gourmet restaurants and bizarre crimes: Last year a celebrity plastic surgeon was stabbed by roller skaters, and later died, in what appeared to be a contract killing.

The neighborhood's rise is only one of many morality tales of money, power and real estate now playing out across post-Soviet Russia. In recent months, incidents included an elderly Moscow couple who had been evicted from their home and were camping in the yard of their old apartment building, which was slated for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and villagers being pushed from their homes on the edge of Moscow to make way for high-rises.

In both cases, residents were infuriated by orders to move to apartments in Yuzhnoye Butovo, a district that is near a former Stalinist killing field and an hour from central Moscow by subway. They are still fighting the orders. The fight continues in Ostozhenka as well. "The Golden Mile is the most brilliant business project in post-Soviet Russia," Denis Litoshik said in November at one of the neighborhood's upscale coffee shops.

Litoshik, 27, has a personal stake in its transformation: He lived, until recently, at Khilkov Pereulok 3, and he is a leader of Leave Us Alone. As a journalist for the business newspaper Vedomosti, he is awed by what he says is a reported price tag on apartments going up next door to his former home: $33,000 a square meter, or $3,000 a square foot. "They're not selling drugs, but they're making much more money," he said of developers who have converged on Ostozhenka. But a few buildings, some ramshackle, some solidly middle class, hinder a complete makeover.

One of those is Khilkov Pereulok 3. Litoshik lived there with his wife and their baby until the city authorities issued a decree in May declaring the building subject to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even though the 19th-century building was overhauled in the 1960s and renovated again in the past few years.

Litoshik said he and other residents had been pressured by officials and developers to leave. Fearing that the building could be burned down, as sometimes happens across Russia when new construction has been slated, he moved away and began to fight. This month, the business daily Kommersant reported that the federal anti- monopoly watchdog had deemed the plans for Khilkov Pereulok 3 illegal, but that ruling could yet be challenged and may not halt the development. Sergei Tsoi, press secretary for the mayor, Yuri Luzhkov, was quoted by Kommersant earlier this year as calling the Ostozhenka protesters' actions "egoism."

Ostozhenka stood virtually untouched until the late 1990s, frozen in time by a Soviet decree that called for the construction of a vast Lenin-topped Palace of Soviets in place of the razed Christ the Savior Cathedral. It was never built, but the plan was never revoked; a swimming pool was instead built on the site. Ostozhenka figured in Mikhail Bulgakov's surrealist novel, "The Master and Margarita," which gave the Russian language its ultimate real estate catch phrase: "The housing problem has corrupted them."

Bulgakov depicted the early Soviet years, when aristocratic abodes were forcibly transformed into communal apartments for the masses, with shared bathrooms, kitchens and secrets. Now new money is squeezing out the remaining kommunalki, as the communal apartments were called.

Aleksandr Khosenkov, 56, lives in a friend's communal flat. "I live here, but all the streets have been renamed — I can't find the houses," he said. "It doesn't matter if a person has a Mercedes. Their soul should matter, not their car."

Georgy Dzagurov, general director of Penny Lane Realty, offers properties in Ostozhenka. "Practically anyone who is powerful has bought there," he said, adding that "$1 million or $2 million is nothing for them."

In October, Morgan Stanley announced its purchase of a stake in RGI International, owned by Boris Kuzinez, a developer whose ultramodern buildings are credited with transforming Ostozhenka into Billionaires' Row. RGI's Web site, posted in time for its London Stock Exchange initial public offering earlier this month, lists Khilkov 3 among its projects.

While describing his clients only as "mostly businessmen, bankers, in oil and metals," Kuzinez acknowledged an oligarch's need for the right milieu. "It's hard for oligarchs to live in a regular building," he said.

Maksim, a banker, though not an oligarch, declined to give his last name but agreed to show his sleek two-bedroom apartment in an a Kuzinez development. "There are guards everywhere," he said. "Filtered water, central air-conditioning, good parking. The main thing is it's homogenous. This is a plus."

Litoshik, wearied by battle, is accepting a buyout of $800,000 for his apartment, or more than $10,000 per square meter. A victory, he said, because in Russia a fair price is almost miraculous. A loss, he said, because "we never wanted to sell our apartment."

It is a story that has been familiar to generations of Russians, both before and after the Soviet era. "Khilkov 3 is 'The Cherry Orchard 2,'" Litoshik said, referring to Chekhov's play about — what else? — money, real estate and the squeezing out of one class by another.(06. 12. 18)

06. 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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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인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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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1 15:4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어느 땐가 읽은,
소설 읽는 것은 "일종의 시간낭비"라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에 세뇌되어
소설은 좀체 읽지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학생 때는 세계문학전집은 공부삼아 일견했었지요.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소설이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었답니다. 깊이있는 소설이지요.
당시에는 낑낑대며 어렵사리,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외국 소설은 두어 권 서가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
아니 에르노의 소설 두 권
강유원 선생의 소설에 관한 관점에 얼마간 공감합니다.


로쟈 2006-12-21 16:10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는 게 시간낭비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쇼펜하우어적인 인생론을 본따서 인생이란 것 자체가 시간낭비일 터에... 그게 아니라면, 이유를 갖다붙일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충분하지요(저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고 또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죠)...

비로그인 2006-12-21 17:2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의 반론을 기대해봅니다....
덧붙여 소펜하우어는 괴테의 소설에는 환장했던 사람이지요. ㅋㅋ

로쟈 2006-12-21 17:33   좋아요 0 | URL
반론이랄 게 없지요. 취향에 대한 자기고백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태백산맥>이 읽기 힘들다, 고로 <태백산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다, 이게 논리적인 결론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현상학>은 읽기/견뎌내기 힘든 책입니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시간낭비하지 말고 '유명학원' 혹은 부동산 '목'이나 알아보는 게 유익하고 실용적이겠죠...

sommer 2006-12-21 17:32   좋아요 0 | URL
취향을 곧장 위계로까지 비약시키는 것...진지함이 그 자신을 견디는 허약함이 아닌지 생각이 드네요. '상징계의 대진표'를 만들어 가면서...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2-21 18:01   좋아요 0 | URL
간혹 강유원 홈페이지 가서도 느꼈던 거지만, 소설 독자로서 강유원은 확실히 별로예요. 물론, 서평가나 강연자로서 강유원은 좋구요.ㅎ
아, 새로나온 책 페이지 수가 늘어난 건, 글자 크기와 행간의 간격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 건 한 페이지에 31줄 이번 건 21줄. 살까말까 하다가 번역 상의 미묘한 차이에 흥미를 느껴 사긴 했는데, 에, 독일어도 좀 알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토마스 2006-12-21 23:15   좋아요 0 | URL
강유원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들뢰즈는 왜 그토록 소설과 영화에 미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들뢰즈가 중시하는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예측 불허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그 점에서 보자면, 강유원씨는 생성의 사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위의 글로만 알 수 없는 단견이기는 합니다만 비트겐슈타인도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영화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니체와 들뢰즈처럼 다양한 문학(혹은 영화)을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는 철학자들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yoonta 2006-12-22 01:22   좋아요 0 | URL
강유원이라는 분의 그 솔직담백?한 성향을 처음에는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학자의 모습으로 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나친 자기 방어본능에 의한 독선에 가깝더군요. 로쟈님 말씀대로 소설에 대한 자기 취향일 뿐인 이야기를 소설에 대한 일반론으로 확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방식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한때 강유원홈피에 들락거리다가 사고쳐서 강제퇴출당한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생각해보니 그분의 성향이랄까 스타일에 대해서 쪼금이나마 이해할수있게 되더군뇨..-_-;;

로쟈 2006-12-22 17:43   좋아요 0 | URL
연랑님/ 그렇군요. 역시나 비밀은 행간에 숨어 있나 봅니다...
모모님/ 저 또한 소설/예술과 근친적인 철학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yoonta님/ '쓰라린' 기억이 있으시군요.^^

Runa 2006-12-22 22: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뒤늦게 사족 한마디 붙여 봅니다.^^
제 전공도 프랑스쪽이고 원래 문학철학에 관심있어 성향대로 전공도 찾아가는 법인가 싶다가도 시대적인 영향, 이런 게 또 개인을 넘어서는 거 같거든요.
전 지방에 있어 강유원씨랑 무관하지만, 그 연배의 선생들의 일반적인 경향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독일철학 전공잔 더욱 그렇지요(물론 아도르노나 벤야민 공부하는 분들은 다르겠죠).평소에도 인간적으론 좋아도 정서적 결이 다르다 느끼죠.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일화 하나,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거의 10년 전에 <시네마>1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책에 나온 영화들 외국에서 비됴 주문해 편집복사해서 보여주고 열성적으로 들뢰즈 영화철학에 입문하게 해 주셨죠. 근데 선생님, 영화 보는 시간 너무 아깝다고 맨날 FF로 보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 넘 지겹고 길다고 핵심 요약 정리 같은 거 없냐고 농담하시곤 했죠.^^
여러분껜 어떻게 들려도 문학과 영화, 이런 거 철학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셨죠. 근데 철학동네엔 이런 선생님이 그리 많진 않답니다. 논리성에 대한 일면적인 맹신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맹신을 요구했던 70, 80년대의 비합리적인 사회상도 한 몫 했겠죠. 선배 철학도들은 아마도 철학이 논리와 합리를 담보한단 자부심으로 그 어려운 책과 싸우며 어두운 시대를 비켜가거나 이겨갔을 겁니다. 그때 문학과 철학이 소통하긴 어려웠겠지요.
전 다른 세대라 예전엔 답답했지만 이젠 이해해봅니다. 그래서 소위 전통철학(플라톤, 칸트, 헤겔 등) 하는 분들이 이런 전통(?)의 자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강유원씨도 그런 분위기의 철학적 세례를 받은 세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뢰즈는 물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소개되고, 유행이니 뭐니 하지만 철학동네가 위기 속에서도 풍성해진다고 봅니다. 블랑쇼 같은 이들도 조명되고 로쟈님 같은 분도 있고(^^;), 이제 문학철학이 한 자리를 만들어 가리라 예상해 보는 거죠.

yoonta 2006-12-23 01:14   좋아요 0 | URL
저두 갠적으로 문학보다는 철학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만 강유원씨같은 냉철한? 철학자분들보다는 때로는 좌충우돌?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풍길줄 아는 사람들 (그게 꼭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에게서 더 많은 매력이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자신의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지한 농담"으로 보일때 조차도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붓는게 아니라 웃어넘길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소위 책많이 본다는 식자층에서는 그런 인간적 매력을 느낄수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과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할까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자기방어에만 치중하게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철학자 강유원' 같은 분들보다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들이 더 좋더라구요.. 비록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면 세상에 "남는게 별로 없는" 인생을 산다구 하더라두요..^^

로쟈 2006-12-23 11:50   좋아요 0 | URL
고해성사 무드네요.^^ 이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길이 겹치면서 갈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가보는 거라면 별문제겠죠. '그쪽은 아냐'라고 참견하는 대신에...

yoonta 2006-12-24 13:52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로쟈님 서재에 놀러와서 끄적이다보니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다 나온것 같네요. 남이야기하기전에 자기 자신이나 돌아봐야되는데..ㅋㅋ

기인 2007-01-04 21:23   좋아요 0 | URL
음; 쫌 뒤늦게 퍼갑니다. 경철수고 읽어볼까 해서 ^^; 땡스투도 합니다.
경철수고 강유원 선생 번역본을 살까, 아니면 역시 빨간책에 있는 발췌본으로 만족할까 고민중입니다...
에잇; 그냥 사야겠습니다 ㅜㅠ

로쟈 2007-01-04 21:29   좋아요 0 | URL
월급도 고려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블루비니 2007-10-26 14:39   좋아요 0 | URL
로자/ 무대뽀식 알라딘 도배질뒤의 잔상은 공허한 느낌나열과 애처로운 자기PR(돈이 있는,책 좀읽은, 비정규직 강사라는..)일뿐, 이런 '자기고백'은 속으로만 하고,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 훨씬 '공익'스럽지 않을까?

로쟈 2007-10-26 14:48   좋아요 0 | URL
'공익'근무하시나 보군요. 수고하시길...
 

국내 최대 규모의 르네 마그리트전이 열린다. 오늘(12.20)부터 내년 4월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얼마전부터 관련기사들을 읽어볼 수 있었는데, 전시회 개막일을 맞아 기사들이 정점을 이루고 있다. 두 가지 기사를 옮겨놓고 새삼 전시회의 의의를 환기해두고자 한다. 방학때는 시간을 낼 수 있지 않을까도 싶고.

경향신문(06. 12. 20) '르네 마그리트’전, 상식을 비트는 ‘이미지의 배반’

“우리는 우리 밖의 세상을 보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액자 속 그림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을 즐겨 그려 넣던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종종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시킨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파리가 된 새, 나무가 된 여인, 구두가 된 발, 낮과 밤 등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거리. 그의 그림에는 기이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분위기, 상식을 깨는 묘한 매력이 서려 있다.

시뮬라크르, 기호와 상징 등 현대미학의 여러 주제를 설명할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왔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벨기에 왕립미술관 및 르네 마그리트 재단과 공동으로 ‘르네 마그리트’전을 20일부터 내년 4월1일까지 연다. 초기부터 말기까지 마그리트의 작품세계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전시로 회화와 드로잉, 판화 등 120여점과 사진 및 영상자료 150여점 등 총 270여점이 선보인다. 작품 중 초기작인 ‘보이지 않는 선수’는 1백20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으로 벨기에인들이 국보처럼 여기는 작품이다.

작품들은 대부분 마그리트가 즐겨 그리던 캔버스 속의 캔버스 구도를 차용해 액자 형태의 파티션 위에 설치됐다. 전시실을 훑어보다 보면 대부분 작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도가 높고 한 주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비해 마그리트는 20, 30대 시절 묘사했던 소재와 주제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자기복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달리나 미로 등 여타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에 비해 논리정연한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의 오랜 목표이던 실물의 재현에서 벗어나려한 근대 화가들이 추상회화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정교하고 세밀한 구상회화를 그리되 실물의 재현이기를 거부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를 써놓은 ‘이미지의 배반’ 같은 작품이 바로 마그리트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갖고 있는 통념, 상식을 끊임없이 분석해 이를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한 마그리트는 사실 화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 실물과 언어, 이미지의 관계, 현실과 가상, 꿈과 무의식 등 현대미술의 주요 주제를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해 표현하곤 했다. 데페이즈망은 친숙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를 한 화면에 늘어놓거나 혹은 전혀 엉뚱한 맥락에 위치시켜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 또한 마그리트는 정교하게 그린 그림과는 전혀 호응하지 않는 텍스트를 화면 안에 써넣거나 제목을 달았다.

회화 사이사이에 설치된 작은 크기의 사진들은 마그리트의 독특한 상상력을 더욱 잘 보여준다. 주로 친지와 지인들을 마그리트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로, 오늘날 디카족들이 장난치듯 만들어낸 이미지와 비슷하다. 한 전시실에는 사진가 듀안 마이클이 찍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상 사진과 영화에 관심이 많던 마그리트가 훗날 소형 영사기로 직접 찍은 영화도 상영된다.(윤민용 기자)

동아일보(06. 12. 11)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뭔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낯익은 형상들을 결합한 그림인데도 이미지나 느낌은 낯설다. 그림과 관객의 역동적 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철학자 미셀 푸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닮음과 비슷함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세계와 우리 자신들이 전혀 새롭게 존재하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바로,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다. 그는 20세기 초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빛의 제국’ 연작 등으로 관습적으로 각인되어 온 사물의 존재 방식을 깨는 그림들을 제시했다. 철학적 사유의 화가로 통하는 그는 “그리기의 예술은 사유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 마그리트가 한국에 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함께 19일∼내년 4월 1일 ‘르네 마그리트’전을 마련한다. 마그리트 전시회가 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갤러리 현대의 도형태 대표는 “마그리트 작품들은 개인 소장품이 많아 모으기 어렵다”며 “마그리트 전시회는 전시 기획의 끝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빛의 제국’ ‘회귀’ ‘신뢰’를 비롯한 유화 대표작 70여 점과 드로잉 판화 등 120여 점. 작가의 사진이나 친필 서신도 함께 선보인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무의식 꿈 판타지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몰인간성에 기겁한 일단의 예술가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무의미를 추구한 다다이즘의 뒤를 이어서 초현실주의가 나타난 것. 마그리트는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추구해 온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달리, 사과 돌 새 벨 등 낯익은 대상을 엉뚱한 환경에 배치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으로 충격과 함께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물을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고립’, 이질적 사물을 결합하는 ‘사물의 잡종화’,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을 한 그림에 넣은 ‘패러독스’ 등이 그의 기법이었다.

전시작은 마그리트 작품 중 정말 수수께끼 같은 ‘보이지 않는 선수’, 날아가는 새와 알의 둥지를 대비한 ‘회귀’, 신사의 초상에 파이프를 갖다 둔 ‘신뢰’, 평야에 직육면체의 거대한 돌덩이 구조물을 그린 ‘대화의 기술’ 등이다. ‘고문당하는 여사제’ ‘신은 성자가 아니다’ ‘두려움의 동반자’ ‘곤충들의 삶’도 선보인다. 문제작 중 하나로 기존 언어와 그림문법에 대한 반성을 호소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29년)는 해외 다른 곳에서 전시되고 있어 오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언어(문자)로 진술되거나 형상을 통한 이성의 사고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으며 이 시도는 결국 신비와 환상과 미스터리를 자아냈다. 광고 디자이너로 일한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가상 현실을 다룬 영화 ‘매트릭스’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종래 언어 관습이나 형상을 부정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은 문자로 된 제목이라는 점이다.(허엽 기자)

06. 12. 20.

 

 

 

 

P.S. 마그리트의 세계에 관한 가장 요긴한 안내서는 아직까지는 수지 개블릭의 <르네 마그리트>(시공사, 2000)인 듯하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밖에 예경에서 나온 화집 정도가 내가 갖고 있는 마그리트의 전부인 듯하다. 이 '철학자' 마그리트를 다룬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민음사, 1995)는 현재 절판 중이다. 그밖에 <노성두-이주헌의 명화읽기>(한길아트, 2006)나 서지형의 <속마음을 들킨 예술가들>(시공사, 2006) 등에서 '마그리트 읽기'를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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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2-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립미술관이죠? 곧 방학이 시작되니 다녀와야겠군요.

로쟈 2006-12-2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죠.^^

비로그인 2006-12-2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적 관점에서 마그리트의 화법은 다소 유치하고 만화적이지요.
그가 그림에 담아내는 이야기는 독특합니다.


로쟈 2006-12-2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으로도 썼지만 '철학자 마그리트'에게 화법은 중요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이네파벨 2006-12-2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전시 소개...감사드립니다...
마그리트...저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전시회네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달리의 "기억의 고집"인가...(흐물흐물한 시계)를 보고 난 후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한동안 들이팠었죠...

마그리트는 흥미롭고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낸 화가이지만...딱 제 타입ㅇㄴ 아니지요...^^
너무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어서요...
머리..특히 좌뇌로요...

전 초현실주의 화가 중에서 단연 달리..그리고..에른스트의일부 그림...그리고...몇 점 안남겼지만(아니 기억에 남는거 정말 한두 점이지만) 키리코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머리(이성, 사유, 논리, 좌뇌적 사고)로 닿을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표현하기에...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다. '프리랜서' 강사에게 그런 날이 따로 지정돼 있는 건 아니고, 집에서 기말시험과 페이퍼 등의 채점을 하기로 그냥 혼자 정해놓은 날이다(거기에 집안일도 겹쳐 있고). 하지만, 모든 '근무'가 그렇듯이 '열심히' 하면 왠지 '손해'라는 느낌 때문에 적당히 (양심의) 눈치를 보면서 빈둥거리게 된다. '이걸 다 언제 한단 말인가!' 속으로 푸념하면서. 점심도 먹은 김에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잡담을 늘어놓기로 한다. 푸념보다는 잡담이 그래도 '생산적'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잡담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잡담들을 늘어놓은 책, 플라톤의 <향연>에서 서두에 나오는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에 관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관련 텍스트는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과 이세진 역의 조안 스파르판 <향연>(문학동네, 2006), 그리고 옥스포드 문고본 클래식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등이다. 조안 스파르의 '낙서본' <향연>이 출간된 김에 사놓기만 했던 책들을 뒤적이게 됐는데, 여러 텍스트들을 같이 읽다 보니까 대동소이한 줄거리 외에, 당연한 일이지만 미묘한 차이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은 그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관련대목은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여! 자네는 언제나 똑같네 그려. 왜냐하면 자네는 항상 자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쁘게 이야기하니 말일세. 자네는 소크라테스님 이외의 자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조건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려. 그런데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사실 자네는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소크라테스님을 제외한 자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말일세!

아폴로도로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 (박희병, 41쪽)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 외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네가 어쩌다 '투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는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입만 열면 너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구 화를 내는 버릇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소크라테스님에 대해서는 물론 예외지만.

아폴로도로스: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이세진, 15쪽)

박희영본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것이고 이세진본은 불역본을 옮긴 것이다. 해서 내용의 정확성을 따지자면 박희영본이 더 유리해야 정상이지만, 고전 그리스어라는 게 '악마의 언어'라 불릴 만큼 난해하고 또 중의적이어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이 과연 어느 만큼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가 들춰본 (원전을 옮긴!)두어 가지 영역본들도 국역본들만큼이나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번역에서의 차이'라는 원론적인 문제를 따져보려는 건 전혀 아니고, 여기서는 다만 '나약한 자라는 별명'과 '투덜이라는 별명'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할 따름이다. 참고로, 인터넷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벤자민 조웻(Benjamin Jowett)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Companion. I see, Apollodorus, that you are just the same-always speaking evil of yourself, and of others; and I do believe that you pity all mankind, with the exception of Socrates, yourself first of all, true in this to your old name, which, however deserved I know how you acquired, of Apollodorus the madman; for you are always raging against yourself and everybody but Socrates.

Apollodorus. Yes, friend, and the reason why I am said to be mad, and out of my wits, is just because I have these notions of myself and you; no other evidence is required.  

그러니까 조웻의 영역본에서는 '나약한 자'와 '투덜이' 대신에 '미치광이(madman)'가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으로 칭해진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도 조웻의 영역과 가장 유사하다('미치광이'란 표현의 러시아어 'becnovatyj'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이미지는 히틀러이다!).그렇다면, 아폴로도로스는 나약한 자이면서, 투덜이면서 미치광이인 것인가?(여기서 먼저 지적해두자면 박희병본에서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란 표현은 '나약한 자'라는 친구의 말을 다시 받는 것이기에 수정될 필요가 있다.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를 우리말에서 '나약한 자'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로빈 워터필드의(Robin Waterfield)의 옥스포드판 <향연>이다. 역자는 1952년생의 중견 학자인데(비록 원로급은 아니더라도), 옥스포드판의 <국가>를 영역하기도 했으므로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Companion. You never change, Apollodorus: you put yourself and others down all the time. I get the impression that you regard literally everyone, from yourself onwards, as unhappy - except Socrates. I've no idea how on earth you came to get your nickname 'the softy', since your conversational tone is invariably the one your're displaying now, of impatience with yourself and everyone else - except Socrates.

Apollodorus. So if I think this way about myself  and about you, then I must be raving mad - is that it , my friednd?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the softy'이다. 'softy'는 'soft person'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바보, 멍청이, 유약한 사람, 감상적인 사람' 등의 뜻으로 옮겨진다. 축어적으로 옮기자면, '물렁한 사람', '물렁이'가 되겠다. 워터필드가 붙인 주석을 보면, 원텍스트에서 이 단어는 원래 'the fanatic'(미치광이)란 뜻을 갖는데, 역자는 아폴로도로스에 관한 다른 기록을 염두에 두고 보다 자연스러운 그리스어 표현, 곧 영어로는 'the softy'라 옮겼다고 한다. 그 다른 기록이란  아폴로도로스가 당시에 악명높은 동성애자였으며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엄청나게 울었다는 증언 등을 말한다. 박희영본에서 '나약한 자' 또한 이 'the softy'와 맥이 닿아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세진본의 구어투에다 워터필드의 영역을 살짝 입혀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을 빼고는 너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해죽겠다는 식이지 뭐냐. 난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렁이'란 별명을 얻었는지 상상이 안된다. 넌 입만 열면 언제나 지금처럼 너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참지 못하겠다는 식이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님만 빼고.  

아폴로도로스: 그래서, 내가 이런 식으로 나 자신과 네놈들을 대하면 그게 내가 미치광이라는 뜻이라도 되는 거냐,  그런 거냐, 친구야?

조웻과 워터필드의 두 영역본의 차이는 이것이다. (1)조웻: 네 별명이 왜 '미치광이'인지 알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2)워터필드: 네 별명이 왜 '물렁이'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향연>의 이본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동사는 '알겠다'와 '모르겠다'를 왔다갔다한다. 문맥의 논리상 그렇다.

국역본의 경우, 박희영본은 워터필드 계열이다: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반면에 이세진본은 조웻 계열이다. "네가 어째서 '투덜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알 만하다."(한데, 조안 스파르는 '알 만하다' 대신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런 구도라면, 박희영본에서 친구의 말을 이어받는 아폴로도로스의 대사는 어색해 보인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라고 맞장구칠 때는 아니지 않은가? 그 다음 친구의 대사가 "아폴로도로스여, 그러한 문제를 놓고 우리가 지금 논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이므로 이 장면에서 아폴로도로스는 친구의 말에 (동의가 아닌) 시비를 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세진본에서도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할 때도 친구의 말에 대한 동의가 아닌 시비의 어조(뉘앙스)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런 게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냐?"라는 식. 즉, 워터필드처럼 반문으로 옮기거나, 조웻처럼 긍정문으로 옮길 경우에는 '반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로쟈,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져서 뭐하겠어, 아폴로도로스, 자꾸 딴소리 말고 내가 물어본 거나 대답해줘. 그래, 어떤 연설이었는데?" 우리는 <향연>의 문턱에서 어정댈 게 아니라 <향연> 속으로 빨리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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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은 굉장히 신경쓰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오늘도 긴장하며 읽었거든요.
'투덜이'에서 긴장이 확 풀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하네요.

로쟈 2006-12-1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 읽기는 고전(苦戰)이기도 하지요...

열매 2006-12-2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의 문학과지성사판 번역자는 '박희병'이 아니라 '박희영'입니다. 외대에서 그리스철학을 가르치는 원로학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로쟈 2006-12-2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옆에 책을 두고서도 다른 분과 헷갈렸네요.^^;

Poissondavril 2007-05-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다가 이제야 이 페이퍼를 봤네요. 정말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물렁'한 역자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꼭 반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로쟈 2007-05-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서가 또 나오는가 보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