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 한편을 떠올리게 됐다. 바스코 포파(1922-1991)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이 이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인데, 내게 포파는 무엇보다도 '작은 상자'의 시인으로 기억돼 있다. 그가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세르비아)의 시인이라는 건 이 참에 알게 됐다(동유럽쪽이란 기억만 갖고 있었다). 마치 오 헨리 단편에서처럼 한 20년만에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삐 시인과 그의 시에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몇 가지를 옮겨놓는다. 일단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은 상자'를 다시 읽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래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바스코 포파). 영역시도 연이어 붙여놓으면서.  

 

작은 상자

작은 상자는 이제 젖니가 나고
키가 작고
면적도 부피도 작다.
그게 작은 상자가 갖고 있는 전부다.

작은 상자는 점점 커져서
이제 작은 벽장도 갖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작은 상자가 그 작은 벽장 속에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는 날마다 조금씩 크고 쉬지 않고 커졌다.
이젠 그 속에 방과
집과 마을과 땅과
그리고 전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던 세계까지 갖게 되었다.

작은 상자가 제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작은 상자는 작은 상자로 되돌아갔다.

작은 상자 속에는
아주 작은 세계만 있다.
당신은 작은 상자를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작은 상자를 조심해야 한다.

The Little Box by Vasko Popa

The little box gets her first teeth
And her little length
Little width little emptiness
And all the rest she has

The little box continues growing
The cupboard that she was inside
Is now inside her

And she grows bigger bigger bigger
Now the room is inside her
And the house and the city and the earth
And the world she was in before

The little box remembers her childhood
And by a great longing
She becomes a little box again

Now in the little box
You have the whole world in miniature
You can easily put in a pocket
Easily steal it lose it

Take care of the little box  

다시 읽어보니까 초현실주의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 시집에 주목하고 있는 리뷰는 드문데,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12. 29) 은유·환상의 유고 詩세계

전쟁의 포성으로만 기억되는 유고슬라비아. 그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만큼 유고슬라비아 문학은 우리에게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오민석 옮김)은 호기심의 한 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포파는 현대 유고슬라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작은 상자’를 비롯, 그의 대표시 몇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시집의 형태로 전모를 선보이기는 처음이다.

Self-portrait as a wolf, by Anthony Weir

“…암늑대가 살아 있는 한, 할머니는/ 리넨 천 같은 왈라키아 발음으로/ 나를 작은 늑대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비밀스레/ 날고기를 먹였고 나는 성장하여/ 언젠가 무리를 이끌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이/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을/믿었다…”

포파의 ‘늑대의 눈’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 포파는 세르비아 전통에서 문학의 전범을 찾는다. 이 시집에 실린 ‘늑대 시편’이 그 한 예다.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늑대는 숭배와 경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세르비아인들은 늑대의 전사적 기질을 동경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늑대로 부활한다고 믿는 그들은 코소보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늑대를 자신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늑대는 시적 화자의 먼 조상이며 한편으론 시인의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늑대는 죽음이라는 절대 폭력과 싸우는 절름발이 늑대다. 시인은 이 실존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애국성인 성(聖) 사바의 존재를 새삼 일깨운다. “별들이 그의 머리 주위를 돌며/ 그에게 살아 있는 후광을 만들어준다// 천둥과 번개가/ 보리수 꽃 흩뿌려진/ 그의 붉은 턱수염 안에서 숨바꼭질을 한다…”(‘성 사바’ 중에서)



세르비아 국민이 그토록 추앙하는 성 사바가 보여준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포파가 초현실주의 언어를 통해 닿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닐까. 이 시집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시인 찰스 시믹이 번역한 영역본 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 그가 비록 포파 시의 가장 이상적인 번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 번역의 아쉬움은 남는다.(김종면 기자)

06. 12. 30.

P.S. 아쉬움을 덜어줄 만큼 더 소개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유고(세르비아) 문학. 작년에 원전 번역으로 출간된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2005)와 바스코 포파의 시집. 그리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초현실주의적(!) 영화들. 그 쿠스투리차가 2006년에 찍은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 <마라도나>이다. 하긴, 유고와 아르헨티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공유하는 나라들이므로 이 둘의 조합이 어색하지만은 않겠다. 작은 '축구신동' 마라도나, 축구장에선 그를 조심해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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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30 10:38   좋아요 0 | URL
오..저 시가 오늘 아침 마음에 들어오네요.바스락 바스락...

로쟈 2006-12-30 12:19   좋아요 0 | URL
우리는 각자의 작은 상자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죠...

Joule 2006-12-30 21:42   좋아요 0 | URL

작은 상자, 저 시를 꽤 오래 찾아다녔더랬어요. 한 번 첫눈에 반한 사람은 시간이 흘러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대도 또다시 눈길이 가는 것처럼 시도 그래요.


nada 2006-12-30 21:45   좋아요 0 | URL
쿠스트리차와 마라도나라니. 마라도나의 짧은 목에 걸린 은 목걸이마냥 생경하군요. 마이클 만의 알리 꼴 나는 거 아닐까요.

로쟈 2006-12-31 00:18   좋아요 0 | URL
joule님/ 맞습니다.^^
꽃양배추님/ 좀 의외이긴 하지만 생경하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극영화가 아니라 그냥 다큐입니다...
 

오늘자 한겨레를 읽다가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물론 책에 관한 것이고, 세계 각국의 베스트셀러로 2006년 한해를 되돌아보는 기획기사인데, 그 중 독일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서 <분노와 시간>이다. <냉소적 이성비판>으로 명성을 얻은 바로 그 철학자의 최신간이다. 기사를 봐서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책인데 내년에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 1권만 나오고 소식이 없는 <냉소적 이성비판> 2권이 먼저 번역돼 나와야겠지만.  

 

 

 

 

한겨레(06. 12. 29) 베스트셀러로 짚어본 2006 세계…유럽편

독일에서는 가을 출간된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이라는 에세이 형식의 역사 철학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철학서가 베스트셀러에 들기 힘든 건 어디나 매한가지이지만, 이 책은 독일 출판계에서 하나의 신화를 이뤄냈다(*주어캄프출판사에서 출간했고 356쪽 분량이다).

 

 

 

 

 

 

 

 

 

저자인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68세대로 칼스루에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텔레비전 철학토론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은 그는 <냉소적 이성 비판>으로 이미 1980년대에 베스트셀러 철학서를 내놓았다.



‘정치, 심리적 시도’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세계 역사를 심리, 인류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라는 감정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즉 억압되어 쌓인 분노가 근대 해방운동,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까지의 역사에 기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서구사회의 역사는 ‘분노 감정의 경영관리’의 역사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분노의 집합은 재화의 축적에 비유된다. 대표적인 예로, 레닌의 코민테른은 인민들의 분노가 모여 작용하는 ‘분노의 세계은행’이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차세대 역사 변화의 원동력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냐면 이슬람은 엄청난 선교력이 있고, 특히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의 좌절한 젊은 남성들이 서구세계에 대해 갖는 시기심과 분노는 역사를 바꿀 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이들이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세력은 정치·문화적 알맹이가 부족해 공산주의 같은 ‘저항세력의 세계은행’을 설립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다.(베를린/한주연 통신원)

06. 12. 29.

 

 

 

 

P.S. 출간돼 있는 역사철학서 몇 권을 나열해본다.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은 아마도 이 계열의 맨마지막 장에 와야 할 듯싶다. 그리고, '냉소적 이성' 외에 '분노'란 말은 슬로터다이크의 키워드로 더 등록해야겠다. '분노의 관리로서의 세계사'는 '자유의 확장으로서의 세계사'(헤겔)와 짝패를 이룰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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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9 16:03   좋아요 0 | URL
'분노라는 감정의 경영관리'라는 그의 역사인식은 니체-하이데거의 오묘한 결합으로 보이네요. 덤으로, 니체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는 뤼디거 자프란스키와 함께 '철학 사중주'라는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로쟈 2006-12-29 16:45   좋아요 0 | URL
독일에선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이기도 한가 봅니다...
 

지난주부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정작 읽어보지 못하고 있는 책이 있다. 나타샤 시네시오스의 <거울(Mirror)>(2001)이 그것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에 대한 '깊이 읽기'이자 '자세히 읽기'이다. 저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시나리오 선집(Andrei Tarkovsky: The Screenplays)>(2003)의 공역자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예고한 바 있는데, 오늘은 타르코프스키가 20년전에 세상을 떠난 날이다. <거울>을 들고 다닌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연말에 짬을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아니, (물리적) 시간조차도 연말에는 더 빨리 내빼는 게 아닌가 싶다(부끄러워서?). 책은 문고본 판형의 120쪽 분량인데, 주된 내용은 <거울>의 제작과정과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돼 있다. 마지막 장은 이 영화의 수용에 관한 장이다. 아무려나 영화 <거울>에 대한 가장 상세한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의 존재는 사실 몇 달전에 알게 되어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고 이달 중순에 대출할 수 있었다. 같이 주문한 책이 댓권 되는데 모두 I. B. Tauris출판사에 내는 'KINOfiles Film Companions' 시리즈의 '러시아영화' 편에 들어 있는 책들이다(전체 시리즈의 책임자인 리처드 테일러 자신이 러시아영화 전문가이다). 현재까지는 10편의 영화를 다룬, 10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 그 10편의 영화는 차례대로, <전함 포템킨>, <카메라를 든 사나이>, <위선의 태양>, <참회>, <침대와 소파>, <거울>, <학이 날다>, <리틀 베라>, <희생>, <폭군 이반> 등이다. 그러니까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각각 2편씩 목록에 포함돼 있다(<침대와 소파>만이 내가 처음 접하는 영화이다).  

이후에 한 문단을 더 적어내려갔는데, 알라딘의 서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어쩌겠는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여하튼 20주기를 맞이하여 경건하게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영화들을 한번쯤 돌이켜보면 좋겠다는 것. 아래 사진은 <거울>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실수를 한 줄 알고 인쇄소로 바쁘게 뛰어가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 촬영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게 된다(*자고 일어나니 이미지가 먹통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바꿔놓는다.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아내, 젊은 엄마의 뒷모습으로. **또 먹통이어서 다시 교체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어머니-시간의 뒤통수를 좇아가며 그것을 '봉인된 시간'(=영화) 안에 성공적으로 보존해놓았지만 극장 밖의 우리는 매번 놓치거나 헛걸음만 하게 된다. 시간은 언제나 발빠르게 우리를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몇 자 적으려던 생각도 저만치 뒤처져 있다. 세밑의 시간은 왜 그리 걸음이 빠른 것인지(부끄러워서일까?). 이제 곧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될 시간, 2006년에 작별을 고한다. 아듀, 아듀오스, 우리는 또 한 해를 살아냈다네!...

06. 12. 29-30.

 

 

 

 

P.S. 국내에서 읽어볼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 책은 여전히 3권 그대로이다. '러시아 영화 시리즈'에 대한 기대는 한참을 더 미뤄야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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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6-12-30 09:38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을 읽고 싶네요. 저 시리즈들이 번역이라도 되어 나온다면 좋으련만..

로쟈 2006-12-30 12:18   좋아요 0 | URL
**님/ 100불이면 좀 쓰셨군요.^^ 전 국내에서 출시됐을 때 구입했는데.
수유님/ 누가 출간하겠다고 하면 제가 번역이라도 하고 싶은데요...

수유 2007-01-01 11:25   좋아요 0 | URL
정말 로쟈님이 번역하셨으면 좋겠네요. 출판사를 세울만한 역량이 된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그런 꿈을 꾸어보아도 좋을것 같아요.
 

지난달인가 MBC에서 창사특집 다큐멘터러로 '러시아 혁명' 편을 방송한다는 얘기를 후배로부터 들었지만 결국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강의자료로도 요긴할 듯싶어서 녹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흐지부지됐다. 오마이뉴스에 이 다큐를 직접 제작한 한홍석 PD와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길래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특집다큐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보든가 해야겠다. 다큐에서 공개된 아래 사진은 박헌영과 그의 딸 박비비안나라고.  

오마이뉴스(06. 12. 28) "왜 러시아 혁명이냐고? 분단국이니까"

2006년이 저무는 시간,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올해도 TV의 위력은 대한민국에서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도 친숙한 매체로 TV는 자리했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 등을 전달한 TV는 여전히 사랑받은 매체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TV에서 어땠을까? 보통 야심한 밤에 편성되는 시간표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듯,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소위 시사 교양물들은 우리나라 TV의 비인기 종목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문화적 역량의 지표로 다큐멘터리가 자리매김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지난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근 한 달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5부작 <세계를 뒤흔든 순간- 러시아 혁명(한홍석 연출)>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17년 혁명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혁명이 다다른 곳까지를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깊이와 재미는 물론이고, 충실한 자료화면, 고증을 통한 역사 재연, 4개국을 넘나들며 직접 따온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해설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춘 빼어난 수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의 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러시아 혁명'을 조명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 몰락해가던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끔찍한 테러가 만연하던 스탈린 시대까지, 그 먼 북구의 땅에도 '우리'는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의 꿈을 꾸며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소련의 각 지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우리 동포들이 스탈린 숙청의 희생물로 스러졌다. 박헌영의 딸은 아직도 그곳에 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신자유시대를 사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대미문의 노동자 혁명이었던 '러시아 혁명'의 이상은 본산지에서조차 실패했는데 말이다. 재미있고 내용도 알찬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신자유경제 체제와 분단 체제라는 두 짐을 걸머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1년간의 기획, 세 대륙을 돌며 100일에 걸쳐 진행한 촬영, 그리고 지난 두 달 반을 '노가다' 모드로 편집실에 틀어박혀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주인공, 한홍석 PD를 지난 12월 19일 오후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러시아 혁명>이 종영되고 이틀 후다. 다음은 한홍석 PD와 나눈 일문일답.

- 대장정을 끝낸 소회는?
"아직도 끝났다는 실감이 안 난다. 너무 큰 주제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응도 아직 잘 모르겠다. 편집실에서만 두 달 반을 지내서 시청자들 반응은커녕 동료들의 반응도 아직 모른다."

- 이 다큐멘터리를 자평한다면.
"정치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라 생각한다. 이걸 보고 이 주제에 흥미를 느껴 전문적인 관심까지 두게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성상 빠진 부분들이 안타깝다. 정말 많이 촬영했는데…. 러시아 문화·사회 문제 쪽으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시간 제약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제약 때문에 완성본에 결국 포함하지 못한 것들이 안타깝다."

- 이 작품을 기획하며 세웠던 목표나 의도는 무엇인가?
"이전에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다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러시아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까지 미국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다. 우리의 분단 체제를 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0~50대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많이 듣고 읽었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책으로만 읽었던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이런 사건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40~50대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웃음).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40~50대들이 많이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재미'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역사는 재미있는데, 이제 '재미'가 뭔지도 헷갈리지 않은가.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자 '장르 실험'을 했다. 러시아 현지 배우들을 출연시켜 역사를 재연했다.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것이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적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현지 배우들을 고용해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이다."

- <러시아 혁명>을 만들기 전과 만든 후, 러시아 혁명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게 된 지점이 있는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다양한 가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아직도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은 몰락했지만 사회주의 이상이나 평등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지고지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생각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아직도 구소련 체제를 그리워하고 그 때의 좋은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들이 반동적이어서가 아니다."

- 매편 폭넓은 학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영국·미국 학자들 수십 명이 등장했는데.
"섭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을 취하면 그쪽에서 놀라고는 했다. '왜 한국에서 러시아 혁명을?'이라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설명했다. '우리는 아직 분단국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금방 이해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방송국 게시판에 보면 '왜 러시아 혁명을 다루면서 러시아 학자들보다 영미 학자들이 더 많으냐'고 불평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러시아는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관변학풍이 심했다. 그에 비하면 영미 학계에서는 지난 몇십 년간 광범위하게 축적된 객관적, 역사적 학문 전통이 있다. 대가도 그쪽에 분포되어 있고. 그들은 우리와 인터뷰를 아주 즐겼다. 소련이 붕괴한 후 영미권에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 요즘 침체해 있었던 터라 우리와 인터뷰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다."

- 그 학자들을 전부 다 직접 만났나?
"그렇다. 미국 학자들의 경우는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학자들을 만나느라 미국을 횡단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 보스턴으로 나왔다. 미국 학자들은 쉬웠다. 연락만 되면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쉽게 인터뷰에 응했다. 도리어 러시아 학자들 중에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국 학자들은 인터뷰를 즐기면서 진행했다. 그들은 말을 시키면 자기가 즐거워서 마구 말을 하는데 보고 있으면 흥이 날 정도였다."



- 박헌영의 딸이 구소련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어떻게 찾아냈나?
"사실 박헌영 딸에 대한 소식은 몇 년 전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외에도 스탈린 딸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락처까지 알아내 다섯 번인가 부탁을 했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됐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우리와 인터뷰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 총5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4부가 가장 인상적이다. 관심도 가장 많았고. 4부는 러시아 혁명 후 진행된 소련의 산업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국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다."

- 차기 작품도 기대된다. 어떤 걸 구상하는지.
"구소련과 한국 전쟁을 묶어서 다뤄보고 싶다. 가제는 '스탈린과 한국전쟁: 1945-1953'. 러시아에서 한국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이 요즘 많이 공개되고 있다.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청자 요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나는 요구한다!). MBC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그것이 사회 공익에 얼마나 기여 하는가도 보지만 시청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은 시청자가 원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드라마 왕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드라마가 강세고 세계사 시리즈 같은 교양물은 점점 위축되고 약화하여가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윤새라-조경국 기자)

06. 12. 29.





 

 

P.S.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 흥미를 끈다. '스탈린과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것. 시청자의 요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요구해줄 수 있다. 러시아쪽 자료들이 다수 공개되고 있는 걸로 알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에는 러시아 TV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잠시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정권의 성립과정에 러시아가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생존하고 있는 고위 관계자들 인터뷰와 함께 자세히 보여주었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자료/도서들은 얼마간 나와 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3-4)를 아직 갖고 있지 않은데, 그게 좀 아쉽군. 거기에다 따져보니까 러시아쪽 시각의 혁명사 소개는 빈곤한 듯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시대에 대한 관련서들은 러시아나 영미권에서 차고 넘친다. 가장 정평있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권 저작으론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의 저자인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들이 기본서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간략한 역사'라고는 하지만 430쪽이 넘는 분량이다). 왜냐고? 우린 아직 분단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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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29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강력히 요청합니다. 이거 MBC에 '스탈린과 한국전쟁' 다큐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라도 해야 할까요... 여튼 정말 간만에 보는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가 만든' 좋은 다큐인 것 같아 기분이 뿌듯하네요...^^

기인 2006-12-29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퍼갑니다.^^ 이 다큐 다운받아서 봐야겠네요.

로쟈 2006-12-3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내년엔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알라딘의 힘'을 보여줘야 할까요.^^

sb 2006-12-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MBC에 [다시보기] 서비스가 있습니다. 저도 제때 보지 못해서 이제서야 봤지요. 한번 정리하려던 참에 반가운 글입니다.

로쟈 2006-12-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료' 다시보기인가요?^^

aporia 2006-12-3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글을 보고, 왠일이야 하며 우선 1편 다운해서 봤습니다. 소장할 가치도 있을듯해서...

유료이기 하지만  "http://www.wedisk.co.kr/" 참고하시길^^


sb 2006-12-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C의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유료서비스이지요. 한편 보는데 500원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world/russia/index.html"

aporia 2006-12-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디스크 광고같아 좀- 거시기하네요. 용량이 큰 2/3편(70케시)을 제외하고는 각 40케시네요. 넘 ~ 알찬 정보죠.ㅋ

로쟈 2006-12-3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아무려나 필요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거니까 다행입니다...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지난 1983년 초판을 찍은 이후에 20쇄를 거듭 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예술철학에 관한 국내서로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벌써 23년이 넘었고, 그동안 예술계에도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책의 후기에 실은 최근의 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를 원래의 내용을 새롭게 요약하는 의미에서 추가한 것 이외에는 개정판의 내용이 초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어도 예술의 개념의 철학적 정의에 관한 한 나의 생각에는 핵심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어서 한자들은 모두 한글로 바뀌었고 도판들도 (비록 흑백이긴 하지만) 더 보충되었다. 게다가 별첨된 논문(27쪽)까지 보태져서 분량은 100쪽 가량 늘어났다. 10년도 더 전에 이미 두번쯤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덧붙여진 논문에 대한 흥미도 있고 해서 나는 책을 다시 구입했다(이전에 갖고 있던 책은 박스 보관도서이다).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라고 제목이 붙어 있긴 하나 그 부제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의 개념'이며, <예술의 종말 이후>는 지난 봄에 열심히 읽은 바 있는 아서 단토의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그 '단토'란 이름은 박이문 예술철학의 '기원'과도 연관되는 이름이다. 저자는 초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었다.

"예술이 갖는 신비한 힘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지난 약 10여 년 간 예술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르쳐왔다.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의 일관성 있고 통일된 대답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1977년 여름 '인문학국가연구비'를 받고, 단토의 주도하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렸던 12명의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의 두달 간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였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단토나 디키의 새로운 이론에 접하게 되었고 그후 대충 그런 테두리에서 예술에 대한 총괄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개정판, 10쪽)

그러니까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박이문-단토-디키'의 삼각형이다('트리오'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이문 예술철학은 미국의 두 현대 예술철학자의 영향/압력하에 그들과의 이론적 긴장/대결을 자양분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해서 나의 생각으로 <예술철학>을 읽는 중요한 독법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조지 디키의 <예술사회> 등과 같이 읽는 것이다(예술제도론자인 디키 또한 그 책에서 단토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바 있다). 이론은 언제나 그것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을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학 연구자' 진중권은 뒷표지에 새겨진 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술철학>은 단토의 생각에서 출발하되 '양상 논리'의 관점에서 예술을 그와는 다르게 정의하려는 시도다. 텍스트는 자기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예술의 정의로 제시하는 '가능세계'란 말 속에서 '가능성'을 '잠재성'으로 살짝 옮겨놓으면, 20년 전에 쓰인 책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새로이 풀어놓는 의미에 문득 놀라게 될 것이다." 

예술철학에 초면인 독자들도 이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 명쾌한 언어로 씌어진 이 입문서의 일독을 권한다.

06. 12. 28.

P.S. 개정판의 서문에는 출간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멋쩍게도 '아서 단토Arthru Danto'라고 병기된 영어 이름에서 오타가 났다('Arthur Danto'이다). 이런 걸 '삑사리'라고 부르던가. 학술지 편집에 오래 관여하다 보니 책을 펼치면 오문/오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또 '삐딱이'라고 불러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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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2-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박이문 선생의 글에 대해서는 학부 1학년 때 안 좋은 추억(비문 투성이의 글을 읽다가..) 때문에 그 이후로 접하지 못했는데 한 번 읽어봐야 겠네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로쟈 2006-12-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학과현실>에서 데리다를 추모하는 글을 읽으며 좀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아무래도 연세 탓인 듯). 한데, 그걸 제대로 교정보지 않는 편집자들의 직무유기가 더 무책임하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