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마지막주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올해의 책' 한권을 발견했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가 그것이다(사실 귀가할 때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집어들긴 했는데 얼핏 롤프 데겐의 <오르가슴>(한길사, 2007)이 메인으로 다뤄진 것만 보고 그 아래 나보코프의 자서전에 관한 기사는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내년쯤에 번역서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그리고 예기치않게 책이 나와서 반갑고 흐뭇하다. 마치 연말의 '선물' 같은 책이다. 이번주에 <롤리타>에 대한 강의도 했고 내달에도 '보강'이 예정돼 있는지라 재빨리 읽어봐야겠다(물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지만 완독하진 않았었다)...

문화일보(07. 12. 28) '롤리타’ 작가 나보코프의 자서전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이때에 아무렇게나 골라진 풍경처럼 시간이 없는 상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란, (…)그 무아경의 뒤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중년남자의 사랑을 그린 소설 ‘롤리타’로 20세기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듯, 이 자서전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때로는 현재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시공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순간적인 진공,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자연의 상태를 거부하는 나보코프만의 시공을 만들어낸다. ‘가장 예술적인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기억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간 사이의 싸움과도 같다. 이는 그의 굴곡 많았던 삶의 역정에서 기인한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가정교사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와 유럽 휴양지를 오가면서 나비와 나방 채집을 즐기며, 사랑에 빠져 시를 짓는 행복한 청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1919년 그의 가족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삶은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러시아 극우파에게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남동생 세르게이는 1945년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나보코프가 1940년 미국에 망명했을 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롤리타’(1955)로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에야 겨우 삶을 지탱할 경제적 여건이 생겼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1966년 이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보코프가 1947년 ‘롤리타’와 이 자서전을 동시에 시작했다는 점이다. ‘롤리타’에서 롤리타를 영영 잃은 험버트는 그녀와 영원 속에 남게 될 최후의 방법으로 자서전 집필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야. 나의 롤리타”라는 험버트의 최후의 독백처럼, 시간 안에 갇힌 비극적 존재라는 점에서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다르지 않다.(엄주엽기자)

경향신문(07. 12. 29) 기억, 불현듯 솟구치는 빛

파격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죽기 11년 전 내놓은 이 책은 흔히 자서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책은 몇쪽을 넘기자마자 자서전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책은 시대 상황이나 개인 역사의 기술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초점은 기억의 단편들이고, 펜 끝은 내면으로 향한다. 나보코프는 기억을 둘러싼 한 편의 옴니버스 드라마를 펼쳐놓았다. 물론 주인공은 나보코프 자신이다.

책은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총 15장으로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는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나보코프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자서전이라는 성격에 어울릴 것을 선별했으리라. 그런데 그 선별 기준은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기억의 대상은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 등이다.

나보코프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기억은 그렇게 불현듯 솟구친다. 나보코프는 그런 기억의 재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는 시각, 청각이 중추 역할을 한다. 책은 과거로 가는 길목마다 시청각적 묘사가 빛을 발한다. 책이 시적이면서도 육감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유년) 시절의 인상들이란 시각과 촉각의 참된 에덴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각은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가령 ‘내 해군복에 달려있던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 잠이 깬 아침 창 밖 푸른 인동덩굴, 해가 번쩍거리는 강물, 낚시꾼이 버리고 간 눈부신 양철 깡통’ 따위가 기억의 열쇠이자 주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주제적 무늬를 이해하는 것이 자서전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주제적 무늬’란 과거 강렬하게 스쳤던 인상 같은 것이다. 책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주제적 무늬는 나보코프에게 성장의 나이테와 다름없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시적 언어로 묘사하는 대목이 많아 책은 한 번 읽고 이해하기 다소 버겁다. 이해하기보다 음미하는 자서전이라 해야 할 듯하다.

또 기억을 불러오는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와 나보코프는 기억을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라 감각 혹은 인상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유년의 기억을 어찌 이렇게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세세하다. 혹 기억을 변주한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닮았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 소설이라 한다면 이 책은 경험과 허구, 즉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15장 각각은 하나의 단편소설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특색있는 글쓰기만큼이나 그의 이력도 유별나다. 나보코프는 곤충학자로도 유명하다. 나비 채집은 그의 오랜 취미이자 열정의 분출구였다. 7살 때 호랑나비를 보고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는 그는 “나비의 의태(擬態)의 신비에 끌렸다”고 말한다. 진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비의 보호색이 그를 매료시켜 평생 나비를 쫓아다니게 만든 것이다. 형형색색의 감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나보코프의 글은 형형색색의 나비를 쫓아다닌 그의 일생과 닮았다.(서영찬기자)

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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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9 17:01   좋아요 0 | URL
왜 나보코프가 좋은 걸까요.. 망한 귀족이라서? 롤리타 때문에?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합니다..
방학은 하였고 영화도 굉장히 좋은것들이 특집으로 걸리고 사야될 책들도 엄청나고 읽고싶은 책들도 많고
일본정도의 여행은 세 자매와 한 조카의 일정을 맞추다 보면 늘 떠나지 못하고 입씨름속에 계획만 세우고..
뭐 그렇습니다. 내일 책사러 나가야겠어요!!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망명작가의 '노스탤지어'에 공감하시는지도...
 

가끔씩 옮겨놓고 있는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내일은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다루고 있다. '방앗간'을 또 지나칠 수 없어서 옮겨놓고 몇 자 보탠다. 아래 열음사판 시집 표지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애석하게도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아니다. 대신에 창비사의 오장환 전집을 갖고 있고 거기에 뛰어난 예세닌 번역시들이 수록돼 있다. 물론 이 책 또한 절판되었지만...

한국일보(07. 12. 28) [오늘의 책<12월 28일>] 자작나무 숲에서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1925년 12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여관에서 자살했다. 30세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ㆍ서사시를 발표해 러시아혁명기를 대표했던 시인이다. 한 세기 저편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 시인’이지만 그는 세 인물과 얽힌 인연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첫번째 인물은 현대무용의 개척자인 ‘맨발의 이사도라’ 이사도라 던컨(1877~1927). 예세닌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음주벽과 신경증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던컨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던컨은 러시아 혁명 후 1921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세닌은 자신보다 열일곱살 연상인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22년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1924년 결별했다.

이듬해 자살한 예세닌이 여관방에 남긴 마지막 시는 ‘잘 있거라, 벗이여’였다. 던컨은 예세닌이 죽은 지 2년 후 파리에서 죽었다. 스포츠카를 시승하기 위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어깨 뒤로 둘러 내려뜨린 숄이 차 뒷바퀴에 낀 채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진 것이다.

두번째 인물은 러시아 현대시의 개척자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는 5년 후 역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번째 인물은 한국의 시인 오장환(1918~1951)이다. 예세닌에 크게 영향을 받은 오장환이 1946년 번역한 <에쎄닌 시집>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번역시 작업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시집은 오장환이 월북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였다. 노문학자 박형규 번역으로 ‘어머니’ ‘목로술집의 모스크바’ 등 예세닌의 절창을 모아 1985년 출간된 <자작나무 숲에서>도 절판 상태다.(하종오기자)

07. 12. 27.

Виталий Безруков Есенин

P.S. 자료를 찾으니 예세닌에 대해서는 소설도 나와 있고, 영화도 제작되었다(영화의 몇몇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5IrtAU36438 참조). 그리고 예세닌의 자료 사진들(http://www.youtube.com/watch?v=0fXAS7HRl5o)과 함께 '진짜' 장례식 자료화면도 떠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jJepN2ZrCY). 

"Сергей Есенин". (Фото — 1tv.ru)

영화속 장례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XFwLTDilATk 참조. 러시아 그룹 '류베'가 부르는 노래 '자작나무'는 http://www.youtube.com/watch?v=LuxlG2Y7j0U 에서 들어보시길...

P.S.2. 예세닌 삶과 시에 대한 촌평은 천양희 시인의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 '세르게이 에세닌에게'는 물론 <마야코프스키 선집>(열린책들, 2006)에 번역돼 있다. 오장환 시에 대해서는 유종호의 <다시 읽는 한국시인>(문학동네, 2002)을 일독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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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장환 시인의 고향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어서 오장환문학제를 구경한 적이 있었어요.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는데 월북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로쟈님 서재에 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반가운거 있죠.^^

로쟈 2007-12-28 00:51   좋아요 0 | URL
별칭이 '비극의 미남시인'이네요.^^

깐따삐야 2007-12-28 12:50   좋아요 0 | URL
하핫. 별칭 귀여운데요. 비운의 꽃미남이시구나. 오장환 시인.^^
 

러시아의 문화, 예술/미술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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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실험- 러시아 미술 1863-1922
캐밀러 그레이 지음, 전혜숙 옮김 / 시공아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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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강좌의 리스트를 만든 계기가 된 리뷰를 옮겨놓는다.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얼마전에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에 대한 리뷰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7). 리뷰에서도 언급되는 문학상식이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카버의 일어판 전집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옮겼다. 해서 '체호프-레이먼드 카버-하루키'(http://blog.aladin.co.kr/mramor/1054184)에다 우리는 김연수를 덧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사인(07. 12. 24) '가장 완벽한 단편’ 빈말이 아니네

비평가란 본래 과장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경천동지할 걸작’ 혹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최상급 형용사들과 싸워야 한다.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못 참겠다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비평가 아무개 씨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일러 ‘가장 완벽한 단편’ 운운하는 걸 보고, 또 한 비평가가 백기를 들었구나,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제야 ‘대성당’을 찾아 읽었다. 뭐랄까, 완벽한 단편이었다. 

10년 전에 소개된 바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이 최근에 새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카버는 1938년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치코 캠퍼스에서 존 가드너에게 소설을 배웠고 22세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38세에 첫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1976)를 출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으로 자리를 굳혔다. 세 번째 단편집 <대성당>(1983)이 대표작이다. 이 책으로 그는 ‘아메리칸 체호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체호프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체호프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놀랍게도 레이먼드 카버는 처음부터 진짜 오리지널 레이먼드 카버였다”.

<대성당>에는 표제작 ‘대성당’을 포함해 단편이 총 12편 수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작품이지만, 그 중 한 편만 읽어야 한다면 역시 ‘대성당’일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맹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아내는 이름이 로버트인 그 맹인 친구가 곧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맹인이라니, 내가 아는 맹인이라고는 영화에서 본 사람들뿐이다. 아내는 오래된 친구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나는 모든 게 그저 귀찮고 불편하기만 하다. 저녁 식사를 마쳤고, 아내는 잠이 들고, 마침내 로버트와 단둘이 남았다. 어찌해야 하나.



‘아메리칸 체호프’ 칭호 안겨준 대표작

나는 하릴없이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린다. 어떤 채널에서 세계 각지의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대성당이라.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로버트에게 묻는다. 맹인은 잘 알지 못하니 설명해달라고 청한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려나, 비로소 나와 로버트의 진지한 대화가 시작된다. 로버트는 한술 더 떠서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말한다. 둘은 손을 포개어 잡고 펜을 든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당신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 소설은 편견과 소통에 대해 말한다. 부정적인 견해만 편견인 것은 아니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앎,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앎은 모두 편견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맹인이 아닌 자가 맹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란 것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편견의 테두리 밖에 있기 어렵다. 그 편견은 어떻게 깨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편견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힘 있게 그려낸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저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쓰지 않는 것이다.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일본에서 카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국어판 <대성당>을 번역한 사람은 소설가 김연수다. 김연수는 누구인가. 이를테면,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다. 하루키와 김연수라니, 어쩐지 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국가 경쟁력이랄까, 뭐 그런 차원에서 말이다. 이제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카버를 읽는 일본 독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12. 27.

P.S. 지난 학기에 카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서도 한권 구했는데, 내가 소장본으로 고른 단편선집은 <대성당>이 아니라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다. 말 그대로 '선집'이기 때문에 <대성당>에 실린 작품들도 다수가 포함돼 있고, 이전에 묶이지 않은 신작들까지 해서 모두 37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대성당>보다도 더 좋아하게 된 작품이 표제작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어서 특히나 이 선집에 애착을 갖게 된다(김연수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대성당>은 1982년판 <전미 최우수 단편소설>에 수록된 바 있고,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1983년판 같은 모음집에 실렸다).

작품집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은 체호프의 임종 장면을 다룬 단편 <심부름(Errand)>이다. 나는 이 작품이 카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까지 생각하며, 체호프의 마지막 단편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더랬다(가령, 내가 체호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주교> 같은 작품). 물론 그런 욕심을 버리더라도 카버의 단편들을 음미하는 일에 지장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듣듯이 새로운 번역본의 문장들을 원서와 대조해가며 중얼거리는 일은 이 겨울의 한 가지 즐거움이다. 가끔 이렇게 읊조리면서 말이다. "It's really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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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7 20:59   좋아요 0 | URL
저는 집사재에서 나온 전집으로 세 권 갖고 있는데 김연수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7-12-27 23:01   좋아요 0 | URL
말하자면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판으로 듣는 것이죠. 애서가들은.^^

2007-12-27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oni 2007-12-28 22:48   좋아요 0 | URL
아, 전 카버는 이상할 정도로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글을 보고 결국 장바구니를 열고 맙니다.

로쟈 2007-12-28 22:59   좋아요 0 | URL
물론 '아메리칸' 작가라는 건 고려해야겠지만(그러니까 문화적 차이/거리는 있는 것이죠), 군더더기 없는 문체의 몇몇 단편들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시골사람 2007-12-29 01:50   좋아요 0 | URL
그 몇몇의 단편이 그 누군가의 소설쓰기에 강도 7 정도의 지진파 역할을 했지요. 레이먼드 카버...어느 날 그 누군가의 삶에 화락 뛰어든 먼 나라 사람 중 한 명. 음음...고맙습니다. 이 늦은 밤 그를 죄다 책장에서 뽑아 제 책상 위에서 되살렸습니다.

로쟈 2007-12-29 10:13   좋아요 0 | URL
알게모르게 애독자들이 많네요.^^
 

리스트를 만드는 김에 2학기 것도. 오늘이 종강이기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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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외투- 아버지에 관한 라캉의 세가지 견해
필리프 쥘리앵 지음, 홍준기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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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서의 아버지'가 강의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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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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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를 읽었다. 국내에 댓 종의 번역이 있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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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꼽은 3대 걸작: <오이디푸스왕>, <햄릿>,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모두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
소포클레스 비극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년 10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26일에 저장
구판절판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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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6 01:12   좋아요 0 | URL
오아! 넘흐넘흐 재밌겠어요. 로쟈님 강의 들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 건가요?

로쟈 2007-12-26 01:24   좋아요 0 | URL
모처에서 비밀리에 다음학기 수강생(회원)을 모집하고는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2-26 01:25   좋아요 0 | URL
모처가 어딘데요? 비밀 댓글로라도 알려주세요!

2007-12-26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7-12-26 01:30   좋아요 0 | URL
어어 저도 모처 궁금해요 ㅠ_ㅠ

2007-12-26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2-26 01:32   좋아요 0 | URL
<우리들>과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어디에 초점을 맞춰 같이 읽으면 좋을까요?

로쟈 2007-12-26 01:33   좋아요 0 | URL
아, 2*2=4 얘기가 공통적으로 나오고요, 두 작품 모두 합리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몽당연필 2007-12-26 11:55   좋아요 0 | URL
모처? 저도 궁금해요. ^^

2007-12-26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urk182s 2007-12-26 17:54   좋아요 0 | URL
아,강사신가 보네요,좋겠다..

로쟈 2007-12-26 21:33   좋아요 0 | URL
강사야 흔한 직업인데요...

웃겨 2007-12-26 23:49   좋아요 0 | URL
읽기만 하다 불쑥 글을 남기게 되네요. 로저님의 수업 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그 모처 저도 알수 있을까요^^;;;

2007-12-27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6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2-28 14:17   좋아요 0 | URL
비밀댓글이 이어지는 광경이 재미있군요ㅋ
뭔가 일을 꾸미고 계시는 듯하다는^^;

2007-12-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29 13:18   좋아요 0 | URL
'수요일 오전'에 대한 반응들은 모두 일치하네요.^^; 빠라바람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북극곰 2007-12-28 14:24   좋아요 0 | URL
읽기만 하다가 저도 모처가 궁금해서 글 남깁니다... @.@

2007-12-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9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29 13:19   좋아요 0 | URL
네, 북극곰님도 건강한 한해가 되시길...

ECO 2007-12-28 18:12   좋아요 0 | URL
아오. 진짜진짜 안하는 로그인하게 만드시네.ㅋㅋ
모처가 어딥니까~?

2007-12-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