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관련서는 하나의 트렌드를 이룬다. 가령 지난주에 나온 쑨리핑의 <단절>(산지니, 2007)이나 이번주에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 10, 11권>(새물결, 2007)은 모두 주목에 값하는 책들로 개인적으로는 여러 편의 서평을 이미 읽어두었다. 하지만 당장 읽을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생각에 '낚시질'조차 미뤄두고 있다.

대신에 밀린 글들의 진도나 나갈까 하다가 머리가 가뿐한 것도 아니어서 잠시 '단순작업'을 하기로 했다. 한편으론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단박에 재출간도서임을 알아본, 비탈리 루빈의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사상 연구>(도서출판 율하, 2007)에 대해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때문이기도 하다(알라딘에는 저자가 '비탈 루빈'으로 오기돼 있다).

표지 자체가 예전에 출간된 현상과인식사의 표지를 바로 떠올리게 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같은 제목의 책이 1988년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출판사 소개에는 "이 책은 다른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대만의 여러 대학ㆍ대학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과서로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것도 이 책이 주는 가치를 입증해준다. 18년전에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오래 동안 절판 상태에 있는 가운데 본 출판사가 이 책의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전문분야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독자들에게도 좋은 책으로 평가받으리라 믿는다."라고 돼 있다.

물론 다시 출간되었다거나 '중국' 관련서란 이유 때문에 내가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펴낸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를 번역한 책으로 중국 지성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네 사상가의 정치사상을 논의하고 있다."란 소개에서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란 말에 눈길이 간 것뿐이다. 국역본은 'Individual and state in ancient China : essays of four Chinese philosophers'(1976)이란 영어본을 옮긴 것이지만 원저 자체는 러시아어로 씌어졌다는 것이니까,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1970년 저작이라면 관련정보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게 일차적인 판단이었지만.

예상대로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의 이미지들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러시아어본의 제목이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문화>(1970)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은 <고대 중국에서의 개인과 권력>(1999)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던 듯하다(이미지가 너무 작아서 옮겨놓지 않는다). 

저자인 바실리 아로노비치 루빈은 1923년생으로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철학을 전공으로 1969년 박사학위(칸지다트)를 받았다. 유대계로서 유대인 이민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결국 1976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예루살렘대학의 교수를 지내다가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에서 왠지 '러시아에서의 개인과 국가'란 뉘앙스가 읽히는 건 그런 맥락에서이다.

07.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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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9-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과 사상 9월호 이상수 전 한겨레 기자의 글도 재미있던데요.
현재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속마음. 니네는 우리의 속국이었다.
캠브릿지 중국사는 가격의 압박이 윽.

로쟈 2007-09-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수 기자의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젠 전업 '학자'로 나선 건가 보군요...
 

어젯밤에 미처 올라오지 않은 북리뷰 기사들이 있나 훑어보다가 한겨레의 이번주 '김윤식의 문학산책'을 읽고 옮겨놓는다(가장 최근에는 아마 콰이강의 다리에 관한 칼럼을 옮겨놓았던 듯하다). 인문학에 대한 노교수의 정의를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롭다.

한겨레(07. 09. 08) 인문학의 자리 되새겨준 논문

밀도 높은 인문학의 저술은 어째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한동안 묻어두었던 이 과제가 새삼 떠오름은 웬 까닭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행구호와는 무관한 것. 제 책상 앞에 놓인 한 권의 책, 요컨대 구체적 현실 앞에 제가 알몸으로 마주했음에서 온 것이오. ‘내셔널리즘과 반복하는 식민지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현해탄을 건너온 이 책은 <식민지 조선/ 제국 일본의 문화연환(文化連環)>. 도쿄대학 학술박사 논문으로 제출된 이 저술의 핵심 부분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에 금방 응해오는 것이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논한 제1장 ‘반제국주의의 폭력과 동시대의 폭력 비판’. 원제목은 ‘반제국주의 폭력과 멸죄적(滅罪的)인 힘’(<사상>, 2000. 11).

근대화의 난제 중의 난제인 저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가 마침내 가능하다는 것. 저주의 방도가 그것. 그 목소리가 하도 커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오. 저주란, 또 그 연속성이란 무엇이뇨. 단재 왈, “갑이 을에게 심구(深仇)가 있어 이를 갚으려면 힘이 부족하고 그만두려 하면 마음이 불허하는지라 이에 을의 화상(畵像)을 향하여 그 눈도 빼어보고 그 목도 베어보고 혹 을의 이름을 불러 염병에 죽어라”라고 거듭 뇌기가 그것. 여기까지 오면 저자 J(제이) 교수가 어째서 일본 국수주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다룬 석사논문을 버리고 단재 자리에 서서 재출발했는가에 마주칠 수 있소.

J교수, 그녀는 무엇이며 또 누구인가. 스스로를 다만 386세대라 했소(1964년 서울생, 83학번). 경제성장 덕분에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읽은 세대. 대학에 와서야 역사의식(광주의 5월)에 눈뜬 세대. 운동권 룸펜으로 남느냐, 거리에 혹은 구로공단에 나서냐의 갈림길 헤매기의 세대. 도서관 옥상에서 꽃잎처럼 떨어지는 학우를 목도한 날, 밤을 새워 토론한 세대. 다음날 새벽 책가방과 신발을 나란히 벗어 두고 한강에 투신자살한 급우를 둔 세대. 그 급우의 유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소. 전위에 서지도 못하고, 민중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는 척하는 흉내도 낼 수 없어 자살한다고.

세상은 그녀를 ‘회색인’이라 했소. ‘가짜 희망’이란 무엇인가. 세상엔 과연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이 물음을 J교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음에 틀림없소. 이 책을 회색인으로 죽은 급우에게 봉헌했음이 그 증거. 당대의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 회색인을 이렇게 읊었소. ‘민주 열사 박혜정(朴惠貞)’이라고. 이마가 유달리 나온 수줍은 학생. 젊은 날 제가 지도교수 노릇 한 그 박혜정. 제자의 죽음을 해명하라는 총장과 당국의 요구를 묵살했던 무능한 지도교수.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이뇨. 거짓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학문이 아니었겠는가.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쉼 없이 묻는 공부가 아니었겠는가. 민중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도 할 수 없는 자리. 거기 깃드는 정신의 이름이 인문학이 아니었던가. 어느 쪽에 편들지 않으면서 쉼 없이 감행하는 자기 넘어서기, 거짓 희망에 눈멀지 않기, 요컨대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는 이상한 나무. 인문학이 이 나무를 닮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닮아야 할까.(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07. 09. 08.

P.S. 아래는 80년 광주의 경험과 이후의 죽음들에 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오마이뉴스(04. 12. 08) 광주의 경험, 죽음 우리 곁에 다가오다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현대사에서 정치권력과 시민의 생명 문제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숫자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와 견주어 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의문사 사건은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10·26, 자제력을 지키던 대중과 권력의 긴장관계가 깨지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학살로 인하여 한국사회가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 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 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19혁명을 거친 후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되어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집권 동안 계엄령은 모두 3회 실시되어 총 31개월간 지속되었고, 위수령 역시 3회 실시되어 총 5개월간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에 걸쳐 발동되어 69개월 간 지속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5개월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비상수단이 상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가두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북의 김일성 정권도 마찬가지이다. 김일성 정권도 철저한 주민통제로 유명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6년 헝가리 반공봉기나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광장 사건 등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남북의 분단과 전쟁, 전쟁 기간 중의 인구이동, 그리고 각각의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살로 인하여 이북 역시 이남과 마찬가지로 저항세력에 대한 교통정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정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대중들 역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나름대로 넘어야 할 선은 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져 갔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3백만 명만 깔아 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진술하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1980년 5월 광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 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정권탈취기도에 저항하여 떨쳐 일어선 광주시민을 상대로 학살을 감행했다. 약 2백여 명의 시민들이 국군의 총칼에 의해 살해당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www.518.org)에 의하면 사망자 및 행불자는 207명으로 되어 있다.

1960년 이후 한국정치를 특징지어 온 군과 학생의 대립이 이제 최루탄에서 실탄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거의 지워지거나 왜곡되어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인민군이나 좌익이 저지른 것으로만 생각하던 광주시민들에게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광주의 많은 어린이들은 이 학살이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 국군 복장을 하고 저지른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충격을 가져 왔지만, 의문사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죽인 쪽과 죽음을 당한 쪽 모두에서 감지된다. 양쪽 모두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 나름대로 유지되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거센 저항과 탄압에 대한 자제력이 상실되었으며, 정치적인 죽음을 대량으로 목도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쪽은 당장 방자해지기 시작했다.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임기윤 목사가 1980년 7월 27일 의문사를 당했고, 1980년 7월 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는 단식농성 중이던 비전향장기수 변형만과 김용성이 감호소 당국의 강제급식과정에서 의문사를 당하는 등 광주학살 직후인 1980년 7월 한 달 동안만 모두 3건의 의문사가 발생했다.

반란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살육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불량배 일제 소탕'이라는 미명 하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폭력행사를 계속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최소 수십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엄격히 요구하는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하 의문사법) 상의 의문사는 아닐지라도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광주학살에 뒤이은 삼청교육대 사건은 비록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 대한 공포감 확산과 더불어 권력이 지목한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광주에서의 죽음을 겪으면서 저항세력 역시 죽음과 새롭게 대면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기간 동안 1975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 등 여러 차례의 사법살인이 있었지만, 당시에 널리 알려진 의문사로는 최종길 교수 사건과 장준하 사건이 있었고, 이 이외에 저항과정에서 직접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한 민족민주열사는 전태일(1970년)·김상진(1975년)·김경숙(1979년) 등에 불과했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불러내다

한국전쟁 기간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거치면서 한국은 죽음조차 죽인 사회로 전락했다. 죽인 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억울한 정치적 죽음은 널리 알릴 수도, 슬퍼할 수도, 추모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잊혀진 죽음이 되고 말았다. 전태일·최종길·김상진·장준하·김경숙 등의 죽음이 이어졌지만, 아직 죽음은 우발적인 비극처럼 여겨졌고,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를 겪으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너무나 멀리 있었던 죽음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만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싸우는 정권이 살인정권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은 이미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학살자들은 광주에서 잔혹한 학살을 감행한 것이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과시하며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의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저항세력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본때를 보여 대중들이 겁을 먹게 하면 한국전쟁 직후처럼 모든 반대파가 사라져 버린 무저항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오히려 불러냈다.

광주의 죽음도 광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민군의 저항이 진압된 직후인 5월 30일에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투신했고, 6월 9일에는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했다. 1981년에는 광주가 고향인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고, 1983년에는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장기간의 옥중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으며, 서울대생 황정하도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서관에서 추락, 사망했다.

특히 박관현은 단식투쟁 중에 열린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죽어간 영령들에게"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최후진술을 했다.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책임감이 깊어갈수록, 일반국민들이 독재정권과 어용언론의 정보통제와 여론조작 속에 광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어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political suicide)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1986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오한섭·박영진·김세진·이재호·변형진·이동수·박혜정·이경환·강상철 등 무려 9명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투쟁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거센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 1986년 6월 11일 노동자 신호수가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가 19일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6월 18일 기관원에 연행된 서울대생 김성수는 20일 부산 앞바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 부천서에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 있었다는 점 기억해야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발생한 사건으로 1·2기 의문사위에 진정·접수되어 의문사로 인정되거나 최소한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은 사건은 모두 19건인, 이 중 녹화사업을 비롯한 군대 내 사건이 10건, 삼청교육대 관련 사건이 2건, 교도소나 감호소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3건 등으로 군대·삼청교육대·교도소 등 특수시설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78.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실종사건도 2건이나 된다.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실종사건의 경우 1기 의문사위에서는 모두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2기 의문사위는 정은복 사건을 의문사로 인정했다. 실종사건은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많은 의문사 사건에 사인뿐만 아니라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이런 시도가 성공했을 경우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실종사건이 되고 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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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9 02:52   좋아요 0 | URL
김윤식 선생이 틈날 때마다 되짚는 저 어떤 '죄의식'의 자리가, 인문학에 대한 노교수의 '어떤' 정의 내리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항상 받아오고 있습니다. 좋은 기사 소개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어쩌면 근대문학의 연구에 있어 가장 '헤겔적인' 자리에 서 있다고도 할 선생의 자기-부정 혹은 거듭나기에의 지향 역시, 어쩌면 그 가장 '헤겔적인' 자리에서 재-전유되고 재-사유되어야 하지 않나,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로쟈 2007-09-09 14:13   좋아요 0 | URL
어떤 죄의식의 자리가 강조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어떤 자리를 확인해두는 건 의미있어 보입니다. 람혼님 덕분에 좀더 머뭇거리게 되는 자리네요.^^
 

주저리주저리 적다가 또 날려먹었다(빌어먹을, 알라딘! 잠시의 틈도 안 주는구나!). 그냥 줄여쓴다. 이번주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본 결과 별로 눈에 띄는 책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는 것. 시인이자 철학도인 진은영씨의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에 대한 리뷰 정도를 챙겨둔다는 것. 너무 식상한 제목이긴 한데(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란 리뷰는 '유혹적'이라서... 

한겨레(07. 09. 08) 현대 차이철학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관문이다. 그를 통과해야 현대철학의 지평이 제대로 열린다. 진은영(37)씨는 니체 철학 전공자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펴냄·1만5900원)은 그가 모교인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갈무리해 펴낸 책이다. 니체 철학의 함의를 풍성하게 담은 그의 책을 사이에 놓고 한겨레신문사 자료실에서 그와 만났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차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이 성과는 특히 하이데거·바타유·푸코·데리다·들뢰즈 같은 일군의 탈근대 철학자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들을 모두 니체의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니체 철학을 베이스캠프로 사용해 현대철학이라는 산을 등정했다는 것이죠.”

그는 현대철학의 출발점에 니체 철학이 있는 이상, 니체를 공부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탈근대 철학에 도입된 차이 개념을 사유하고 차이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차이’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폐해를 극복할 길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이란 요약하자면, 동일성의 철학이다.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거기에 폭력적으로 복속시키거나 복속되지 않으면 배제하고 추방해버리는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폭력성을 극복하자는 것이 탈근대 철학이고, 그때 탈근대 철학이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자면, 차이의 철학으로 가는 직행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니힐리즘(허무주의),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영원회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차이의 철학’이다. 이 가운데 니힐리즘은 니체가 평생을 두고 싸운 사유의 주제였다. “니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목표는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었습니다.” 왜 니힐리즘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니체는 자기 시대가 니힐리즘에 철저하게 감염돼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탄식하는 단순한 허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진짜 세계’, ‘초월적 본질’을 찾는 모든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상계 너머의 영원한 이데아(본체계)를 찾는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쌍둥이인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현세 부정의 관념으로서 전통적 니힐리즘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써 이 전통의 니힐리즘은 끝났지만 그것을 대체해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법칙을 찾아내 거기에 매달리거나 자본·화폐·국가 같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니체가 인식한 현대의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할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그 질병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니체가 발견한 개념이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말로 풀면 이렇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이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어떤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의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

이 힘들의 흐름은 영원히 되돌아와 영원히 되풀이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그때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그리하여 삶은 끝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서 반복하되 항상 차이나는 반복이 된다. 삶과 세계는 차이의 바다, 차이의 축제가 된다. “그런 식으로 니체는 차이를 새롭게 사유했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근대의 동일성 철학을 돌파하는 차이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이 차이의 철학은 차이라는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유행하는 탈근대적 차이철학에도 동일성 철학의 폐해가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불변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승인’하는 형태의 철학에서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걸로 끝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는 차이와 차이의 진정한 만남도 없고 그 만남을 통한 또다른 차이의 생성도 없다.

이런 ‘차이 승인’의 철학을 그는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이 현대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차이·다름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차이를 즐기는 것,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생산 활동’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차이의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생산 철학’도 오늘날 자본주의적 지배 전략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끝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면서 ‘차이’와 ‘다름’의 판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거기에 합당한 정치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책은 차이의 철학이 자본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고 자본의 포획욕망에 저항해 그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수 정치학’을 내세운다. 지배의지로 뭉친 다수성의 논리와 맞서 싸워 다름의 풍요로움을 지켜내고 또 그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소수성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차이의 철학’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글 고명섭 기자)

문화일보(07. 09. 07) 소멸은 곧 생성… 삶을 끝없이 긍정하라 !

이 책의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시집을 통해서다. 지난 2003년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이렇게 기사 첫머리를 풀었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같은 새로운 세계가 한, 두편의 ‘우연’에 머무르지 않고 시집 전반을 관통할 때 설렘은 기쁨과 탄성으로 연결된다.”

이 책 역시 설렘을 넘어 기쁨과 탄성을 자아낸다. 더욱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 빼어난 감수성과 예민한 지성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니체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소장 철학자다. 결코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철학에 별 조예가 없는 일반인의 시선까지 잡아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조금만 정신차려 읽는다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우선 니힐리즘을 화두로 니체를 푼다. 니힐리즘을 통해 서구 철학사의 지배적 흐름을 형성했던 경향을 규명하려고 했던 니체의 생각을 보여준다. 니체는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니힐리즘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져간다’는 정서다. 따라서 니힐리스트들은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을 완화시켜 줄 안정감을 갈구하게 된다. 즉, ‘영원불변한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안정감을 가상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 예컨대 ‘가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자연현상의 배후로서의 법칙 등을 상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시도들이 삶을 병들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전(流轉)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두려움을 제거하고 변화 자체를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성에 대한 욕망, 안정화되고 고착되려는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다”며 “(영원성에 대한 욕망의 제거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유전과 파괴가 허무한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 납득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유전과 파괴를 ‘생성(生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성에 대한 긍정만이 유전하고 소멸하는 자연과 삶에서 슬픔과 고통 대신에 평안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생성은 질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질료들이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다수자들의 차이는 생성을 보장하며 생성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이 같은 차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근대성의 사유가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절대적인 보편성을 통해 억압함으로써 현실적 차이를 지닌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탈근대 철학자들은 파악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차이 개념을 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 개념은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가 돼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탈근대적 지배전략은 근대성의 산물인 국가, 민족, 인종 등의 배타적 경계를 강화하거나 실체화하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며 오히려 “차이들이나 복수성을 강조, 상품생산과 시장형성의 논리에 이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의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들간의 어떠한 관여나 상호 작용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처럼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하는 오늘날의 흐름을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더불어 니체의 통찰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긴 회랑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니체를 보려 하는 것일까.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정치학을 만들기 위해서다. 저자는 용수와 들뢰즈의 입을 빌려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의존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자. 원인(풋사과) 때문에 결과(배탈)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풋사과를 먹은 뒤 장을 보완해주는 다른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아니라 소화라는 결과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들의 배치에 현재 발생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순간은 언제나 생성의 순간이며, 과거 사건의 배치 속에 원인들을 새로운 사건의 원인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숙명론을 극복하고, 현재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해석한 니체는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김영번기자)

07. 09. 08.

P.S. 여기도 간단히 적는다. 참고문헌에 대해서 세 문단쯤 적었었는데(참고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나의 '취미'다), 오기된 부분만 지적한다.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의 역자들이 '김다운, 황순회'로 잘못 기재됐다. '김다은, 황순희'가 맞다. 그리고 알랭 르노의 <개인>(동문선, 2002)의 원저가 잘못 기재됐다. 'L’ère de l’individu. Contribution à une histoire de la subjectivité'(1989)로 돼 있는데, 국역본의 부제가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이니까 원저는 'L’individu. Remarques sur la philosophie du sujet'(1995)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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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9-07 21:30   좋아요 0 | URL
허 이분 칸트 전공자 아니었나요? 언제 갈아타셨지? (물론 칸트에 대한 개설서에서 니체, 들뢰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긴 하더군요.)

로쟈 2007-09-07 22:11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엔 원래 니체 전공자인데요...

자꾸때리다 2007-09-08 07:33   좋아요 0 | URL
리라이팅 시리즈로 처음에 칸트 개설서를 내서 칸트 전공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ㅋ

로쟈 2007-09-08 20:50   좋아요 0 | URL
석박사가 모두 니체입니다...

nada 2007-09-08 14:09   좋아요 0 | URL
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는 구절에서 키득거렸어요.^^
고병권 씨 책하고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어반복일 거 같기도 하공.

로쟈 2007-09-08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요.^^; 여하튼 '차이의 철학'이 거꾸로 유행어가 되다보니...

yoonta 2007-09-08 17:47   좋아요 0 | URL
기사에 있네요. 저 책이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이라고..

로쟈 2007-09-08 20:51   좋아요 0 | URL
혹시 석사는 칸트를 했는지 확인해보니까 모두 니체입니다.
 

오랜만에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을 다시 집어들었다(앞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적겠다). 지젝에 관한 짤막한 글들을 쓰면서 그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돋았기 때문인데, 부분적으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세번째 읽기 정도 된다. 지젝의 생각과 어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그런 수월성에 한몫하고 있는 건 물론 깔끔한 번역이다. 가끔씩 실족하지만 않았다면 모범이 될 만한 번역이었다. 조금 손을 봐서 개정판을 내는 건 어떨까 싶다(<삐딱하게 보기>도 그런 경우이다).

지젝 입문서들도 몇 권 나와 있지만 내 생각에 지젝 읽기의 첩경은 그의 저작 한 권을 꼼꼼하게 완독하는 것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번역서 한 권을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고시서적 읽듯이 완독한다면 나머지 책들을 읽어내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아 보인다(나름대로 '지젝이고 라캉대기' 시작할 수 있다). 지젝 읽기의 장벽이라면 그 한 권 읽어내기다.

 

 

 

 

그러한 읽기의 대상으로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을 제시하고 나름대로 운을 뗀 적은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http://blog.aladin.co.kr/mramor/1262413, 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등의 페이퍼 참조) 지젝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가 아닌지라 매듭은 짓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내가 '짓지 못할' 또다른 매듭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초판 1쇄이어서 나중에 첨부된 참고문헌이 빠져 있다. 복사한 원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본이나 원서나 페이지가 튿어져 나가는 등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은 건 부분부분만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이다(내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책이다). 대략 그런 연장들을 들고서 지젝의 광맥을 캐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영어로 씌어진 이 처녀작의 서문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썼다. 하지만 이 서문은 당연히 본문보다 나중에 씌어진 것이며 읽는 순서도 그에 따르면 된다고 본다. 처음엔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면 되겠다. 이어지는 건 이후의 지젝의 책들에선 잘 보기 힘든 '감사의 말'이다. 지젝은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파리 8대학의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자크-알랭 밀레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라캉의 개념적인 장치를 이데올로기 분석의 도구로서 활용하도록 방향을 제시해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17쪽)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은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자리를 못 잡고 있다가 밀레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신분석학 수련을 받게 된다(간단한 사연은 http://blog.aladin.co.kr/mramor/424267, http://blog.aladin.co.kr/mramor/677684 참조). 기억에 그가 불어로 쓴 최초의 단독 저작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이 지나간다>(1988)는 밀레의 지도하에 받은 그의 정신분석학 박사학위 논문이다(<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특이하게도 불어본이 없는 듯하다).

라클라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가 번역된 걸 계기로 쓴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고하시길. 지젝이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은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인데(국역본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판권 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몰라도 절판된 국역본이 재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라클라우를 위해서나 지젝을 위해서나(그리고 물론 그들의 독자들을 위해서나).

안 그래도 어제 부분 복사한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온, 사이먼 크리칠리 등이 편집한 <라클라우: 비판적 독해>(2004)인데, '철학' '민주주의' '헤게모니'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4부는 비판적 독해들에 대한 라클라우의 답변이고 주디스 버틀러와의 서신대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지젝의 글은 포함돼 있지 않다). 덧붙여 말하면, 버틀러와 라클라우, 그리고 지젝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도서출판b의 근간 도서이다(올해는 나오는 것인가?). 세 사람의 '화끈한' 논전을 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배경으로 읽어야 할 책으론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외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도 필수적이다. 지젝의 서론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책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에서 라캉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고작 다섯 차례 언급되는데, 그것도 항상 다른 이름들과 함께 등장한다."(19쪽)

지젝은 아예 다섯 차례 거명되고 있는 쪽수까지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징후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라캉의 이론은 제 고유의 독립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항상 일련의 등가물들 속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진짜 논쟁대상인 푸코를 포함해 바타이유, 데리다 등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왜 유독 라캉과는 직접 대면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름이 하버마스의 책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결론: "따라서 우리의 첫 논제는 오늘날 지성사를 전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이 이론적으로 더 심원한 논쟁인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젝이 보기에 '하버마스 vs 푸코'라는 이론적 대립은 '알튀세르 vs 라캉'이란 본원적인 대립에 비하면 가면이자 유사 대립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이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를 통해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으로 전환된 것일까?" 지젝은 이 문제가 "네 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입장과 네 가지 서로 다른 주체개념"의 문제와 연루된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에겐 단절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윤리학, 보편적이고 투명한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주체개념은 당연히 초월적 반성이라는 고루한 주체의 언어철학적 판본이다. 반면, 푸코와 함께 우리는 보편주의적 윤리학으로부터 돌아서서 일종의 윤리의 미학화에 도달하다.(...) 스스로를 계발하여 주체로서 창출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을 발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푸코는 주체성의 특수한 방식을 구성하는 주변적인 삶의 방식에 매혹되었던 것이다."(19쪽) 

마지막 문장에서 '주변적인 삶의 방식(marginal lifestyles)'은 '주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예를 들어 사도마조히즘적 세계, 동성애적 세계 등등"인데, 원문이 "the sadomasochistic homosexual universe, for example"이므로 그냥 "예컨대, 사도마조히즘적인 동성애적 세계"라고 하는 게 낫겠다(알려진 바대로 푸코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푸코의 대담집 <권력과 지식>(나남, 1991)이다(절판된 책이지만 오역 범벅이라고 하므로 아쉬울 건 전혀 없겠고 다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 것인지?).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건 물론 영어본(1984)이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들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20-21쪽)

 

 

 

 

푸코의 주체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고해볼 수 있는 책은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겠다. 그리고 <성의 역사>(나남)와 같은 그의 후기 저작들과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 같은 책들.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미셸 푸코, 혹은 주체의 이론가'(http://blog.aladin.co.kr/mramor/1120854)라고 옮겨놓은 리뷰를 참조하는 게 유익하다.

여하튼 그래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결구도는 '가짜'라는 것이다. 대신에 "진정한 단절을 도입하는 사람은 바로 알튀세르이다. 그가 분열-간극-오인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논제를 전개할 때, 바로 거기서 진정한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는 끝났다!"는 사고 자체가 이데올로기 중의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이다. 국내에서 지난 90년대 중반 알튀세르 '열풍'과 함께 <맑스를 위하여>(백의, 1997)라고 번역/소개된 책이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다. 국내에서의 알튀세르 수용 또한 프랑스 현지에서의 경로를 밟은 것인지?

지젝의 지적대로,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소멸엔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패배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알튀세르의 이론엔 곧바로 잊혀져야만 하는, '억압되어야만' 하는 외상적인 중핵이 있는 듯하다."(20쪽) 하다 못해 알튀세르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론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아미앵에서의 주장>)를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빌려서 읽어볼 수 있다. 이건 국내에 적지 않은 알튀세리앵들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혹은, 지젝이 인용하는 셜록 홈즈의 용어를 빌면 '기이한 사건(curious accident)'이다(홈즈의 국역본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번역되지 않았을까?). 

"알튀세르는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해 폭넓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폐지나 소외의 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급진적인 윤리적 태도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구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주체의 폐지'는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이다. 다른 책들에서 주로 '주체의 궁핍'이라고 직역된 표현인데, 말 그대로 '텅 빈' 주체를 떠올리면 된다(아니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주체'이다).

"핵심은 주체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으로서 산출해내는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폭로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인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적인 활동의 조건으로서, 역사적인 과정의 작인이라는 역할을 떠맡는 조건으로서 일정한 착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말하자면 미셀 페쇠가 지적했듯이 반드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라는 식의 환영을 내포한다."(21-22쪽)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 implies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 (2쪽) 'interpellation'에 걸리는 관계사절을 빼면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이란 문장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내포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문제는 관계사절, 즉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의 번역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원인'을 주체소환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가 주체로 호명된다는) '호명이론'에서 어떻게 주체가 소환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소환의 주체는 당연 '이데올로기'이고 '이데올로기적 명분(ideological cause)'이 아닌가? 다시 옮기면,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정" 정도가 되겠다.

해서 전체를 다시 옮기면,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라는 것 자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식의 환영을 내포하며 이것은  미셸 페쇠가 지적했듯이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미셸 페쇠(1938-1983)는 '호명이론의 가장 정교한 판본을 제시했던' 철학자로 '호명'되고 있는데(보통은 '담론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지젝이 염두에 둔 책은 <팔리스의 진실(Les vérités la Palice)>(1975)이고 이 책은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1982)로 영역돼 있다(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하다). 

한데, 페쇠와 관련하여 국역본의 이어지는 대목은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호명이론이 함축하는 단락에 대한 설명이다. ""당신이 프롤레타리인 이상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지 않은가?"라는 식의 단락인 것이다. 페쇠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농담을 남긴 막스 브라더스를 언급하며 마르크스를 보충한다. "당신을 보니 엠마누엘 라벨리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내가 바로 엠마누엘 라벨리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22쪽)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the short circuit of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 Here, Pecheux is supplementing Marxism with the Marx Brothers, whose well-known joke goes: 'You remind me of Emanuel Ravelli.' 'But I am Emanuel Ravelli.' 'Then no wonder you look like him!'(3쪽) 

내가 보기에 역자는 '여기서(Here)'를 '다음과 같은'으로 잘못 옮겼다. 해서 막스 브라더스의 유명한 농담을 페쇠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돼버렸지만 페쇠의 책은 제법 '진지한', 막스 브라더스의 농담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이는 책이다(지젝이 아니라면 누가 이론서에 막스 브라더스를 끌어오겠는가?). 다만, 페쇠는 호명이론을 설명하며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이라고 말했을 뿐이고, 이게 지젝이 보기에는 "마르크스를 막스 브라더스로 보충하는" 듯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일이다.     

우리말로는 '마르크스'와 '막스 브라더스'라고 옮기지만 원어는 'Marx'와 'Marx Brothers'여서 그 희극적인/패러디적인 대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 형제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 가계이며 192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들이다(http://www.youtube.com/watch?v=ycZJZY5uPh0 같은 동영상 참조). 아버지의 이름이 원래 사이먼 매릭스(Simon Marrix)에서 샘 막스(Sam Marx)로 개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막스 브라더스'가 되었다고.

여하튼 요점은 알튀세르-페쇠에게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한 주체형성은 자기-소외의 과정을 함축하며 이것은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알튀세르의 소외의 윤리학에 라캉의 분리의 윤리학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라캉의 윤리학은 따로 다루어야겠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요컨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계속 진행될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07.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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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 한창 푸코가 유행하던 90년대 초반을 기억해보면, 정말로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연상으로,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중에 우리가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의 '수용사'를 반추해보게 될 때,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단순히 '지젝이고 라캉대기'의 시기로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런 잡념들이 바로 저 '생각들'에 해당될 테지요.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로쟈 님의 저 제목('Marx and Marx Brothers')은 시사하고 암시하는 바가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이론적 형상과 그 그림자가, '마르크스'보다는 '마르크스 브러더스'로, '히치콕'보다는 '채플린'으로, 그리고 어쩌면 '라캉'보다는 '알튀세르'라는 레테르로 더 기억되고 논의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은유'의 바람 한 자락 풀어놓게 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외형적으로 '퇴조하여 사라진' 듯이 보이는 '알튀세리앙'들의 계보가 어쩌면 현재 '스피노지스트'들의 모습 안에 '변형'된 형태로 '보전'돼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ㅡ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ㅡ이를 이론사적 혹은 이론수용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것이겠지만요(우리는ㅡ혹은 그들은ㅡ마르크스에 대한 '파생적/현대적' 대안으로서의 알튀세르로부터, 알튀세르의 '근원적/근대적' 보충으로서의 스피노자로, 이행해 간 것일까요?).
덧붙여, "진행중"이라는 '부제'는 언제나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알튀세르를 [다시] 읽자'라는 제목으로 페이퍼 하나 써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9-07 19:37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 람혼님의 알튀세르 페이퍼를 고대하게 되네요.^^

람혼 2007-09-08 01:41   좋아요 0 | URL
이런 주제의 페이퍼에는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지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식견을 갖고 계신 로쟈 님의 글임에야...^^

미지 2010-08-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늦었지만, 이제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께서 오랫동안 지젝을 붙잡아두신 덕에 제가 아주 훌륭한 지젝과 라캉 입문 경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난달 말에 읽어보려고 했던 영화 리뷰를 좀 뒤늦게 시간을 내서 읽고 옮겨놓는다. 얼마전 개봉됐던 영국 감독 대니얼 고든의 <푸른 눈의 평양시민>(2006)에 관한 것인데, 전작인 <천리마 축구단>(2002)과 <어떤 나라>(2004)를 포함하면 '북한 3부작'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김동원 감독과 대니얼 고든의 대담은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33175 참조). 여하튼 2년 터울로 북한에 관한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낸 열정은 감탄할 만하다. 나로선 아직 한 편도 보지 못했지만 이왕이면 TV에서 방영해도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도 곧 다가오고 하니 말이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컬처뉴스(07. 08. 30) 삶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영국 감독인 대니얼 고든의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66년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이룩한 북한 선수들을 촬영한 <천리마 축구단>(2002),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매스게임의 두 소녀를 기록한 <어떤 나라>(2004)에 이어 그는 1960년대 초중반에 월북한 미국인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을 2006년에 완성했다. 서양인이 입국하기도 어려운 북한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도 보통일이 아니지만, 연이어 세 편을, 그것도 거의 6년여의 시간을 들여서 기록했다는 것은 엄청난 작가적 고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니얼 고든은 하고 많은 나라 가운데 왜 북한을 선택한 것일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축구광이었던 그의 처음 관심사는 1966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였다. 당시 놀라운 활약을 했던 선수들이 이후 국제대회에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는 그들이 당시 어떻게 8강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고든의 순수한 관심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대상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엄청난 규모의 매스게임을 벌이는 북한을 보면서 그는 북한이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북한을 알 수 있는, 다르게 말하면 북한을 서구에 소개하는 소재로서 매스게임을 하는 두 소녀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인 <정신의 나라 A State of Mind>는 북한의 현실을 그 어떤 것보다 정확히 집어낸다. 미국의 통제 때문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정신을 지닌, 단체 활동의 나라이며, 그것을 매스게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모습 아닌가.

평양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고든은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60년대에 월북한 미군들이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즉시 이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얼마나 좋은 소재인가. 미제국주의를 원수로 생각하는 나라에서 미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남한의 DMZ에서 스스로 월북해서 수도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의 원제가 <경계를 넘어서 Crossing The Line>인 것도 그들이 남한의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든은 북한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도 북한 사회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가령 <천리마 축구단>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축구선수들이 자신들을 격려해주었던 김일성 주석을 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고든은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구미(歐美)인이지만 평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통해 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솔직한 입장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때문에 <푸른 눈의 평양시민>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자신과 미국인의 격차를 해소하거나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1962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제임스 드레스녹이다. 그는 자신이 월북한 상황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감독에게 “난 당신들을 믿소. 진실을 찾아온 거니까”라고 말한다. 그의 생애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고아였던 그는 첫째 양부모에게 학대당해 둘째 양부모가 길렀지만 중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입대해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서독으로 파병 간 사이 부인은 다른 사람을 만나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으로 온 그는 허가 없이 휴가를 나갔다가 이것이 발각돼 군사법정에 설 위기에 처했다. 군사 재판 하루 전날 결국 그는 DMZ을 넘어 월북했다. 그는 북한 체제가 좋아서 월북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월북했다. 이것은 다른 세 명의 경우도 비슷한데, 영화에서 인터뷰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 하층민이었던 드레스녹은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큰 불만이 없다. 미국으로 돌아갔으면 하층민으로 살았을 것이 뻔하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중산층 이상이다. 자식들은 엘리트 코스인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니고 있고, 그는 보통강변에서 낚시를 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에서 배급을 주기 때문에 걱정 없이 살 수 있고(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그는 많은 쌀을 배급받았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지만 언제든지 병원을 찾을 수 있다. 하층민으로 살았을 미국이나,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활이다. 그가 북한 체제에 만족을 표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며 그의 환경의 영향 때문이다.

감독은 그것을 아주 편하게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감독은 미국의 드레스녹의 집,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 같이 군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을 인터뷰한다. 심지어 DMZ으로 들어가서 월북하던 상황을 재현하기도 하고, 당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감독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속마음을 토로하지 못하는 위선이 아니라 진짜 그의 진솔한 고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든의 이전 영화와 달리 매우 정치적이다. 하긴 소재 자체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들 존재 자체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사건은 발생하고 만다. 드레스녹과 비슷한 시기에 월북한 젠킨스이 일본으로 가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해석의 장에 놓이게 된다. 제킨스의 부인이었던 소가가 일본에서 납치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젠킨스는 북한 생활은 지옥이었고, 드레스녹에게 많이 맞았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북한이 외국인을 납치해 망명자들과 결혼하게 했고, 그렇게 해서 낳은 2세들을 스파이로 활용할 계획이었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젠킨스의 아내 소가도 북한 스파이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 입장을 취하고자 노력한다. 일본으로 가기 전의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진술을 담고, 이후 엇갈린 진술을 다시 담는다. 그렇게 해서 감독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가급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담아 관객이 직접 판단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라스트 장면에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내내 김일성 수령에 대해 특별한 말을 하지 않던 드레스녹이 “위대한 수령께선 늘 우리를 각별히 염려해주셨어. 죽는 날까지 나라에서 지켜줄 거야”라는 말을 하고 넓은 광장을 걸어간다.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광장의 확성기에서 “북한은 지상 낙원입니다”라는 내용의 선전문구가 나온다.

감독은 객관적일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이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드레스녹의 말이 모두 허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드레스녹이 했던 말이 모두 체제의 선전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드레스녹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의 자포자기적 발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 드레스녹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을 통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회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작을 통해 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북한을 이해하려고 했던 고든은 3부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북한 체제에 대해 다소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 주도하는 통제된 국제 사회도 싫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반대편에 세운 후 그것을 핑계로 주민을 통제하고 신격화하는 북한의 모습도 긍정할 수 없는 현실이 고든이 접한 상황이다. 고든은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인지, 그런 삶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이 영화를 통해 묻고 있다.(강성률_영화평론가) 

07. 09. 06.

P.S. 참고로 '필름2.0'에 실렸던 감독 대니얼 고든과의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기사를 읽어보니 대니얼 고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름2.0(07. 08. 24) "다음엔 평양 밖에서 촬영할 것이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으로 ‘북한 삼부작’이 완성됐다.
계획한 건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앞으로도 내게 엄청난 이야기라고 판단되는 소재라면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 생각이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기획하면서 의도한 건 무엇인가?
북한으로 망명한 미국인 네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 소재가 민감하지만 어떤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한 건 아니다.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고 몰래 생각하고 있다가 나중에 덧붙인 것은 없다.

지금 와서 이들에 대한 사연을 밝히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항상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고 대상을 솔직하게 대하려 한다. 어떤 사실을 파헤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역사적 기억이 없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단지 이 사람들의 얘기가 놀랍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편견이 없다는 것이 당신 영화의 강점이다. 하지만 미국인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가?
물론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드레스녹에 대해 워낙에 알려진 바가 없었고 1962년 망명 후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 외모가 어떤지도 몰랐다. 물론 촬영 전 그의 스무 살 사진을 본 적은 있지만 실제 만나보고 몸이 그렇게 큰 줄(키 196cm, 몸무게 128kg) 짐작도 못 했다. 그만큼 그가 주는 분위기가 강렬했다. 2004년이 돼서야 만났는데 버지니아 억양으로 1950년대 영어를 쓰면서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젠킨스는 어땠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게 젠킨스가 북한을 떠남으로 인해 스토리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젠킨스의 미국 고향에 가서 가족들도 만나고 군대 친구들도 만나며 언젠가 젠킨스가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젠킨스는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았고 그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드레스녹과 젠킨스 간의 진실공방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제의 우월이 아닌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인가?
바로 그게 의도였다. 양쪽의 소리를 모두 들려줬기 때문에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직속 상관을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영화에 넣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밝힌다면, 드레스녹 상관의 경우, 드레스녹의 월북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져 곤란함을 겪었지만 40년 넘게 북한에서 생활한 것만으로 충분히 벌 받을 만큼 받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젠킨스의 상관은 죽는 날까지 젠킨스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한 가지 의문은, 북한 삼부작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종의 특권층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면 그 외 지역의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도 다뤄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상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평양이 특별한 도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거다. 북한 내에서도 모든 사람이 평양에 살고 싶어하고 평양 주민들도 자신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 삼부작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양 내에서도 평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드레스녹의 경우, 식구가 다섯이지만 방은 두 개밖에 없는 집에서 산다. 물론 평양 외에 대여섯 도시를 방문했었고 3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백두산에도 가봤다. 북한에서 기차를 탄 서양인은 내가 처음이었고 다시 말해, 외부인들이 전혀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봤다는 얘기다. 당연히 평양 밖에서 촬영을 하고 싶은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기도 해봤지만 평양 외의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너무나 어려웠다. 그나마 북한에서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곳은 평양이 유일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면 평양 외의 도시에서 진행할 것 같다.

당신이 겪어본 북한 주민들은 어떤 사람이던가?
우리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외교관들이 접한 북한 사람이나, 자선단체가 접한 북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뭐든지 급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 자기들이 준비가 되면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남한 사람과는 정반대다.(웃음) 우리는 북한 사람을 대할 때 먼저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솔직하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뭔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삼부작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던 드레스녹이 지금은 찍기 싫다고 하자 바로 촬영을 중단한 건가?
그건 다른 문젠데 나는 촬영 대상이 불편해하면 당연히 찍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것 외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자신만이 고수하는 원칙이 있나?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이고 원래 했던 이야기가 무언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재밌게 만들려고 한다. 관객들이 내 영화에 한 시간 반이나 투자하는데 즐겁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레이션으로 크리스천 슬레이터를 기용한 건 그 때문인가?
미국인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미국인의 내레이션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슬레이터의 열혈 팬인데 그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영화에 무게감을 부여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출연료를 줄 수 없어도 참여해줄 수 있냐고 물으니 영화가 좋으면 상관없다 그러더라. 그 답례로 김정일이 쓴 <감독의 자세>와 <배우의 자세> 책 두 권을 선물했다.

미국에서는 8월 10일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 개봉했다. 그쪽의 반응을 접했는지?
그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없는 것이 인터뷰를 위해 8월 11일 영국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접하진 못했지만 당연히 다들 좋아했을 것이라고 본다.(웃음) 뉴욕에서는 3주 전 브루클린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300명이 모인 가운데 상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참석했다. 완전히 매진됐고 반응 역시 무척이나 좋았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 때문에 미국 정부나 군부가 관심을 가질만한데 공식반응을 나타낸 적이 있나?
내가 알기로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 <천리마 축구단>과 <어떤 나라>도 물론이고. 하지만 <어떤 나라>의 경우, 영국 정부에서 미국 정부에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히 영국 외교부는 북한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북한 삼부작을 만드느라 영국에 갈 시간이 있기라도 했나?(웃음)
안 그래도 영국에서 한 편을 만들었다.(웃음) 한 달 후에 완성될 예정인데 영국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개 경주를 하는 내용이다. 너무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영국에서 찍었는데 주로 밤에 촬영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역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우간다 출신의 육상선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이 작품을 마친 뒤에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우간다 출신의 육상선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역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다.
그렇다. 아프리카인으로는 최초로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다. 아버지의 부인이 8명이고 자녀가 43명이나 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장애물 400m 육상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그런데 이디아민 정권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자기 타이틀을 지킬 수 있는 기회도 박탈당했다. 전세계적으로 기억돼야 할 위인임에도 그렇지 않아 영화로 만들게 됐다.(허남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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