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가 소위 '인문주간'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과 함께 작년에 마련된 프로그램이니까 올해가 두번째 행사인 셈이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할 듯한데(나도 참여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지 않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간략한 뉴스보도를 인용하면 이런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2007 인문주간' 행사가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오늘 서울대에서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인문학자들은 개막식에서 문명의 횃불을 밝히는 동력으로서 과학기술과 산업이 중요한 것처럼, 사람다운 삶의 길을 넓혀 가는 지혜와 통찰력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런 내용의 인문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또 물량적 성장 위주의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구도 속에서 인간성을 경제적 효율성의 하위 가치로 전락시킨 우리 사회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오늘부터 오는 14일까지 부산과 광주를 비롯한 전국 8개 도시에서 계속되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 기간 동안 학술제와 대중강좌, 문화체험, 공연, 전시 등 74개의 모두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리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는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 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YTN뉴스)

 

'인문학 부흥'을 위해서 나대로 애쓴다고는 생각하지만 인문주간 행사와 관련하여 내가 힘을 보탠 건 전혀 없고 이런저런 일정상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없을 듯하다. 다만 오늘 지난번에 언급한(http://blog.aladin.co.kr/mramor/1598990) 무크지 <소문>(민음사, 2007)을 받아서 예전에 기고한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오래전 글이라 좀 낯설었다!) 마침 '인문주간'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옮겨놓기로 했다. 타이틀이 또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이기도 하고(내가 쓴 문구지만 좀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저작권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마지막 두 문단은 생략했다.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은 서점에서 살짝 들춰보시길. 다소 의외의 모양새이긴 하나 멀쩡한 글들과 인터뷰 꼭지들(방송인 손석희 교수, 민세원 KTX 여승무원 노조지부장)이 실려 있으므로 사보셔도 좋겠다. 그럼, 로쟈의 '인문학 근심기'를 읽어보도록 한다.

“당신이 신춘문예 당선자든 뭐든 상관없다.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게만 써라. 이래 가지고 꼴리겠어.” 한 중앙일간지 등단시인이 무작정 상경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야설(야한 소설)까지 쓰다가 에로배우 겸 사무원인 여직원에게 들었다는 얘기이다. 한데, 이거 야설 쓰는 동네 얘기로만 치부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요즘 위기라는 문학 동네나 인문학 동네라고 해서 사정이 다를까, 싶어서이다.

특히 인문학, 요즘 애로가 많다. 잘나가던 인문학, 한때 독서 대중의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그이들의 인생 자체를 바꿔 놓기도 했다지만, 이제는 꼬이는 인문학, 인생 망친다는 푸념을 더 자주 듣는다.(“아니, 어쩌다 인문학을 하셨어요?”)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지라 사회적 관심과 무관하게 자력 구제에라도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세계를 평평하게 해 준다는 디지털 시대. 그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변신을 해야만 한다면, 그 인문학의 변신은 무죄인가? 그걸 좀 따져 보고 싶다.


 

 

 

지난 1990년대 인문학 동네를 도배한 가장 대표적인 구호는 ‘문학에서 문화 연구로’였다. 구닥다리 같은 문학 연구 그만 하고 문화 연구로 관심을 확장하자, 라는 게 취지였다. 한데, 이 문화 연구, 비록 나중에는 새로운 직업군으로서의 문화비평가들을 양산해 내는 일에나 이바지하게 되지만, 태생은 좌파 정치학이다. 대중문화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따위를 폭로하자는 계몽적 시각이 기본적인 입지점이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문화 연구라는 간판을 단 교양서들이 좀 뜸하게 나오는 듯싶더니 이윽고 쏟아지기 시작한 건 문화산업 관련서들이다. ‘문화 연구에서 문화산업으로’가 2000년대의 새로운 구호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산업’이라는 명칭이 너무 나이브하다고 하여 간판에 페인트칠을 좀 한 것이 이름하여 ‘문화 콘텐츠’이다.(이거 본토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라고 한다.)  

 

 

 

 

‘문화’라 불리던 것의 간판이 ‘문화 콘텐츠’로 바뀌면 그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라 정치적 행보 또한 좌에서 우로 게걸음 치게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직 ‘돈 되는 문화’, ‘돈 버는 문화’만이 ‘문화 콘텐츠’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얻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국가 진흥기관까지 설립되니 이건 아주 노골적이지 싶다. 그러고는 인문학의 ‘비즈니스’에 대해 묻는다. 인문학, 너는 뭐 할래? 제법 존중해 주는 것인가? 글쎄다. “인문학이 뭐 별건가, 인문학 콘텐츠가 인문학 아냐?”라는 계산을 파일 공유 하듯이 나눠 가진다면 그나마 알아주는 게 고맙긴 하다. 중과부적인 주제에 “이건 아니잖아!”라고 딴죽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여지책의 변명은 이런 거다. “제가 좀 게으르잖아요.” 

이런 인문학 스토리를 늘어놓자니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인문학의 유구한 위엄이기도 하다. ‘니 주제를 알라’(소크라테스)거나 ‘니 운명을 사랑하라’(니체)는 게 인문학적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럼, ‘완전소중’은 아니지만 ‘대략만족’ 정도는 된다. 해서, “아무리 개 같은 짓이라도 (인)문학으로 먹고 살자.”라는 결심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상경한 우리의 시인, 인터넷에서 ‘야설 작가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러고는 수십 편의 야설을 썼지만 원고료는 한 푼도 못 받았단다. 되레 봉변만 당했단다. 다시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 언제부턴가 인문학 동네에 스토리텔링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보니 스토리텔링 관련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2000년 이후이다. 인문학 논문에도 ‘드래건(dragon)’과 ‘소드(sword)’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학의 미래를 여는 화두로 ‘컴퓨터 게임과 문학’이 회자되기 시작하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건 대세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의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먼저, 바츠 해방 전선에서 혁명에 헌신하고 있는 사용자(user)-전사들: “<리니지2>의 사용자 스토리는 약한 사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체험의 존엄성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존엄성은 굴욕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주눅 들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에 반대하는 행동으로부터 태어난다. (...) 한국 온라인 게임은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는 미래의 인간 커뮤니케이션들이 어떤 윤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가를 보여 주는 인류사의 시금석이다.”(이인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한데, 이러한 행동과 윤리가 온라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천재적인 이야기꾼’ 빈 라덴의 경우: “빈 라덴은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수십 번, 수백 번에 걸쳐 연습했다. 잘 짜인 대본에 피나는 연습으로 이루어진 공연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세계인들은 엄청난 반향을 보였다. 그것이 슬픔이든 경악이든 기쁨이든 간에 어떤 예술이 이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빈 라덴은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철저히 활용한 것이다.”(최혜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

하여, 스토리텔링 만세다! 그러니 ‘문화에서 문화 콘텐츠로’라는 구호에 상응하여 ‘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으로’라고 목청껏 외쳐 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실 따져 보면, 스토리 이전에 스토리텔링이 먼저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다시 디지털 문화로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천해 왔다고 할 때, 그 디지털 문화의 환경이 지금 다시 만나는 것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구술 문화이다. 그리하여 과거 문자의 도입이 전래의 ‘이야기’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면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또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 방식, 곧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데 이 ‘새로운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은 새로운 중세’(움베르토 에코)라는 진단이 무색하지 않게 어떤 ‘오래된 이야기’와 조우하고 있다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둘러보면 어느 틈엔가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로마의 신화들과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의 포로가 된 지 오래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이다.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 민담학자 프로프가 정리한 바대로 이러한 판타지적 모험 서사에서 인물은 캐릭터로, 행동은 기능으로 환원/축소되지만 그러한 평면성은 3D 입체 공간 속에서 새로운 깊이를 부여받는다. 아니 그런 것으로 가장/가정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이러한 근심은 디지털 스토리텔링과는 또 다른 스토리텔링에 관해서도 이어진다. ‘리더십 스토리텔링’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것은 기업 경영에서의 성공 신화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다. 이 스토리텔링은 허구적 상상의 세계나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을 무대로 하며, 스토리텔링은 그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다. 무엇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기업의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는 게 이 리더십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리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 하더라도 그 커뮤니케이션 효과 면에 있어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스토리텔링은 무미건조한 데이터들을 생생한 현장성과 현재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이미지들로 전환시키며 이를 통해 설득력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쉽고 단순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 청중에게 불씨만을 제공해야 더 효과적인 까닭에 너무 자세한 디테일(세부사항)을 묘사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이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비결이란다. 그리하여 들려오는 성공학적 정언명령.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하라!’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어디서나 이야기 좀 달라고 한다.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부추긴다. 나름 ‘이야기의 보고(寶庫)’로서 (인)문학도 덩달아 우쭐거릴 만한가? 하지만 사정은 또 그렇지만도 않다. 구술 문화(전근대)와 디지털 문화(탈근대)의 합종연횡으로 말미암아 도토리 신세가 된 건 문자 문화(근대)이다. 그리고 모험 서사와 성공 신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리알 신세가 된 건 근대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소설이다.

 

 

 

 

근대 소설이란 무엇인가? 짚신 두 짝이다. 한 짝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리얼리티(현실)이고, 다른 한 짝은 리더십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디테일(세부 묘사)이다. 그 리얼리티와 디테일의 조합으로 근대 소설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반성하고 탐구했다. 우리가 ‘재미’로만 사는 것도 ‘돈’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인간으로서의 위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인가. 스토리텔링이 번창하는 시대에 이야기 문학의 최고 정점으로서의,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밀란 쿤데라)으로서의 근대 소설이 점차 찬밥 신세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하략)   

07. 10. 08.

 

P.S. 사실 나는 '문화콘텐츠'나 '스토리텔링'이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인문학 현황에 대한 소회를 몇 자 적으려고 했을 뿐이고,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란 '선정적인' 제목을 제안한 건 편집자이다. 그 카피성 문구를 말미에 쓴 건 나지만. 그나저나 이런 '궁상맞은' 이야기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꺾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떠오른 카피 하나. "인문학, 음란과 궁상 사이에서 길을 잃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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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7-10-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요즘 문화컨텐츠학과의 스토리텔링을 접하면서 느낀 게 역시 세상은 돈과 재미가 대세인가라는 것이어서 슬프던데요...그냥 이렇게 변해가는 걸까요?

로쟈 2007-10-09 13:47   좋아요 0 | URL
쉽고 편한 걸 지향하는 게 인간의 게으른 본성일 테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죠...

마늘빵 2007-10-0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철학이 문화콘텐츠학과 교양학부 쯤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인문학이 변해야 산다고들 말하지만, 인문학을 실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기본 바탕은 깔아놓고 응용을 해야하는데, 무조건 변화를 요구하는거 같단 인상입니다.

로쟈 2007-10-09 13:45   좋아요 0 | URL
인문학 내부적으론 그런 변화에 대응할 만한 내공 자체도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10-0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것 관심없고 그냥 인문학 서적들 마음껏 신청할 수 있고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이나 많이 지어졌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콜레쥬 드 프랑스 같이 비 전공자들도 마음껏 인문학 석학들의 깊이있는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나...

로쟈 2007-10-09 13:44   좋아요 0 | URL
그런 발상의 전환은 십수 년내로 어렵지 않을까요?..

심술 2007-10-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츠 해방 전선'이 리니지2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인가요?

로쟈 2007-10-09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인용한 거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리니지를 해본 적도 없구요.^^;

hdachi 2007-11-01 23:43   좋아요 0 | URL
리니지2의 '바츠'라는 서버에서 있었던 일종의 민중 봉기 사건입니다.
당시에 봉기를 주도했던 유저가 썼던 선동문 등이 온라인 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찾아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거에요.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 결말까지, 결국은 현실의 재탕이라 그게 디지털 스토리 텔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매 2007-10-0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쥬 드 프랑스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학강좌"라는 강좌가 열린다고 하네요. 한국의 석학들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살펴보시는 것도 흥미로울듯 합니다. http://hlectures.krf.or.kr/ 여기에 소개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인문학 공부 안(못)한다고 시부렁거리는 사람들 많은데, 저는 원전번역의 미비등 인문학의 초석도 제대로 쌓지 못한 한국의 원로 학자들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국내용 석학들이셨어라는 뒷담화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로쟈 2007-10-09 23:04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다는 얘기는 접한 적이 있는데,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듯하군요. 동영상 서비스가 된다고 하니까 기대를 해봅니다...
 

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아마도 이번주부터 각 부문별 수상자들이 발표될 듯한데, 역시나 백미는 문학상이 아닌가 싶다. '노벨상 프리미엄'이 출판계에서 별로 재미를 못본 지는 오래됐지만(오르한 파묵은 좀 예외적인가?) 몇 년전부터 한국인 작가의 수상 가능성이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언론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늦어도 10년안으로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은 시인의 수상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배당률 10:1이라고 한다(그러니까 10%의 확률이다). 이번주 목요일이면 수상자가 발표된다. 바람으로는 러시아를 포함해서 '변방'의 작가들이 수상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야를 그만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도 되겠기에. 게다가 미지의 문학적 언어와의 만남은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안겨주니까...

한국일보(07. 10. 08) '대문호의 계보' 이을 100번째 주인공은 누가 될까?

노벨문학상이 1901년 프랑스 시인 쉴리 프리돔을 첫 수상자로 배출한 이래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휴지기를 거쳐 올해 100회를 맞았다. 노벨문학상 심사를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11일 오후 1시(현지 시간)에 수상자를 발표하겠다고 5일 웹사이트에 공고했다. 한국 시간으론 11일 밤 8시. 작가, 언어학자 주축의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 18명 중 호선된 5명(임기 3년)으로 구성되는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는 전 세계에 의뢰해 받은 수백 통의 추천서를 검토, 현재 5명의 최종 후보를 추려놓은 상태다.

선정 과정 일체를 비밀에 부치는 선정위의 방침 때문에 수상자 예측은 물론, 어떤 작가가 후보로 거론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문학적 성취에 있어 우열을 따지기 힘든 거장들이 경합하기 때문에 수상자 결정엔 언어권ㆍ지역 안배, 정치적 고려 등 문학 외적 요소가 반영되리란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이런 '허약한 전제' 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수상자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 누가 받을까
역대 수상자 103명(2명 공동수상 4회) 중에서 미국, 유럽을 제외한 비(非)구미권 국적 작가가 15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노벨문학상의 지역 편향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어왔다. 하지만 15명 중 9명이 80년대 이후 수상자인 만큼 노벨문학상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 문학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도니스(시리아ㆍ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팔레스타인ㆍ시인), 야샤르 케말(터키ㆍ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나이지리아ㆍ소설가), 바르가스 요사(페루ㆍ소설가) 등의 비구미권 작가들은 올해도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선 중국이 프랑스 국적의 가오싱젠(시인, 2000년 수상)을 논외로 치면 수상자가 전무하다는 점을 들어 모옌(소설가), 리뤠이(소설가)의 수상을 점치거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68년), 오에 겐자부로(94년)를 잇는 세 번째 일본인 수상자가 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미국 작가가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통산 10명의 수상자를 낸 문학 강국인데도 93년 토니 모리슨(소설가) 이후 수상자를 못 내고 있는 정황이 그 근거다. 유력 후보로 꼽히는 작가는 소설가 필립 로스, 조이스 캐롤 오츠, 토머스 핀천, 노먼 메일러가 있다. 스웨덴 현지에선 이탈리아계 미국 소설가 돈 델리오를 지목하기도 한다.

선정위원회가 불어권 작가들의 기를 살려줄 것이란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온다. 불어권은 85년 클로드 시몽(프랑스ㆍ소설가) 이후 수상 명맥이 끊긴 상황이다.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 알제리 여류 소설가 아시아 제바르 등이 기대주다. 벨기에 시인 위고 클로스, 네덜란드 소설가 세스 노테봄은 네덜란드어권 첫 수상자로 촉망 받는 작가들이다.

한편 영국의 대형 온라인 베팅업체 래드브록스(ladbrokes.com)가 개설한 노벨문학상 코너에선 이탈리아 소설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가 배당확률 5대1을 기록하며 '으뜸 후보'로 꼽히고 있다. 래드브록스는 작년 오르한 파묵(터키ㆍ소설가)을 비롯, 3차례에 걸쳐 수상자를 맞춰 주목 받는 사이트다. 이 곳에선 작년 최종 후보 5인에 포함됐다고 알려진 고은 시인이 아모스 오즈(이스라엘ㆍ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위고 클로스, 조이스 캐롤 오츠와 더불어 배당확률 10대1로 상위에 올라 있다.

고씨보다 등급이 높은 작가론 레스 뮤레이(오스트레일리아ㆍ시인), 필립 로스(미국ㆍ소설가), 토머스 트란스트로메로(스웨덴ㆍ시인), 아도니스가 있다. 시인이 많은 이유는 96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이후 10년 간 시인 수상자가 없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 한국 작가 수상 가능성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 작가로는 시인 고은, 소설가 황석영씨가 첫 손에 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들의 주요 가독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로 다수 번역돼 있다. 특히 고씨는 2000년대 들어 <만인보> <순간의 꽃> 등 시집 5권과 소설 <화엄경>을 스웨덴에 출간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황씨도 4월 첫 스웨덴어 번역작 <한씨 연대기>를 내고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올해 수상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작년 수상자가 터키에서 나온 만큼 대륙 안배 차원에서 한국인 수상자는 향후 2~3년 간 나오기 힘들 것"(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이란 분석도 있고, "노벨 재단이 스웨덴 독자에게 알려진 작가 위주로 상을 주는 만큼 작년 시상식 이후 스웨덴어 작품 2권을 더 보탠 고은 시인의 수상 가능성이 밝다"(고영일 한국문학번역원 사업본부장)는 예측도 나온다. 뮤즈의 노래를 듣는 젊은이가 새겨진 메달의 진짜 주인공은 3일 뒤에 가려진다.(이훈성 기자)

07. 10. 08.

P.S. 올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여성작가 도리스 레싱에게 돌아갔다. 한동안 단골로 거명되던 후보자였지만 최근 몇 년간 유력한 후보 명단에는 빠지더니 끝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최고령 수상. 작가도 일단은 오래살고 볼 일이다. 상대적으로 여러 작품이 소개돼 있는 편이어서 국내 출판계나 독자들로서는 반길 만한 수상 소식이다.

경향신문(07. 10. 12) 20세기 이데올로기 넘나든 ‘시대의 반역자’…도리스 레싱 작품세계

노벨문학상 발표가 임박하면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으나 정작 그 영광은 영국의 여성작가 도리스 레싱(88)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레싱 역시 ‘20세기 영어로 소설을 쓰도록 선택받은 가장 흥미진진한 지성인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아온 영국문학의 중심 인물로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올라있던 작가여서 예상을 영 빗나간 것은 아니다. 영국 문단으로서는 2005년 해롤드 핀터의 수상에 이은 2년 만의 개가다. 노벨문학상 107년의 역사상 최고령이며 여성작가로는 11번째다.

런던 북부의 자택에서 수상소식을 접한 레싱은 “(포커게임에서) 로열 플러시 패를 쥐고 있는 기분”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레싱은 노벨문학상을 발표하는 줄도 모르고 집 밖 상점에 잠깐 나갔다가 뒤늦게 소식을 전해듣고 “30년간 후보에 올랐다. 유럽의 모든 상들을 다 받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레싱을 “회의와 통찰력으로 분열된 문명을 응시한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그린 서사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또 1962년 발표된 ‘황금노트북’을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으면서 “막 싹트는 페미니스트 운동을 선구적인 활동으로 평가하고, 남성과 여성간의 관계를 20세기의 시각으로 조망한 책”이라고 밝혔다. ‘어두워지기 전의 여름’(1973년), ‘다섯째 아이’(1988년), ‘폭력의 아이들’ 연작(1952~69년)도 주요 작품으로 꼽았다.



레싱은 1950년대 전후 현실에 대한 분노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던 ‘앵그리 영 맨’의 대표작가이자 페미니즘 문학의 기수로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레싱의 작품세계는 페미니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 생명과학, 신비주의 등 20세기의 거의 모든 문제를 망라한다.



1950년 발표한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2007년작 ‘틈’에 이르기까지 57년간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장르와 사건, 주제가 다양하며 마르크시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20세기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섭렵하고 있다. 기법적으로도 자연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모더니즘 수법을 오가면서 우화, 설화, 로망스, 공상과학소설 등을 써냈다. 그래서 여성작가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선이 굵은 남성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항상 주류에서 벗어난 ‘시대의 반역자’를 자처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유럽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였으며 14살 이후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성장 배경 자체가 기성의 가치와 제도, 체제, 이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때 사회주의에 경도됐다가 전후의 행태에 염증을 느껴 1956년 결별했으며 자신을 페미니즘 작가라고 부르는 데 대해서도 반감을 갖고 있다. 남아프리카에 대한 지속적 비판 때문에 1956년부터 95년까지 남아공 입국이 금지됐다.

레싱이 1950년 발표한 ‘풀잎은 노래한다’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로디지아를 지배한 백인식민주의자와 원주민의 갈등을 사회적·정치적 입장에서 묘사했다. ‘마사 퀘스트’를 시작으로 17년간 발표된 5부작 ‘폭력의 아이들’은 한 여성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으로 ‘황금노트북’과 더불어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으로 꼽힌다.

레싱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이슬람 신비주의에 기반한 ‘카노푸스’ 시리즈를 비롯한 다수의 공상과학 소설을 썼으나 평론가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다. 1980년대 이후 인기가 서서히 시들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빼고 작품으로만 평가를 받아보겠다며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한윤정기자)

-도리스 레싱 연보-

▲1919년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출생(본명 도리스 메이 테일러) ▲1925년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로 이주 ▲1938년 프랭크 찰스 위스덤과 결혼 ▲1943년 이혼, 45년 고트프리트 레싱과 결혼 ▲1949년 이혼 후 런던 정착 ▲1995년 미 하버드대에서 명예학위 수여 ▲1999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명예 훈작’ 칭호 수여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1950), ‘마사 퀘스트’(1952), ‘황금노트북’(1962), ‘어두워지기 전의 여름’(1973), ‘다섯째 아이’(1988), ‘나의 속마음’(1994·자서전) ▲서머싯 몸상(1956), 유럽문학상(1986),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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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18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적인 페미니즘이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도리스레싱'의 '페미니즘은 다른 이념의 한 가닥'일 뿐이라는 것에 큰 호기심을 갖습니다.1962년작, '황금노트북'을 꼭 읽어 보면 그 동안 막혔던 어떤 것을 찾을 것같은 예감입니다.
 

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의 이번주 꼭지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문학평론가이자 가라타니 번역자로 잘 알려진 조영일씨의 소개를 옮겨놓는다.

대학신문(07. 10. 0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⑤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평가로서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또는 사상가)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비평가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물론 얼마 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해 한국문단을 한동안 긴장시킨 바 있지만, 그런 주장은 도리어 그가 문학을 완전히 떠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에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사상서들이 그의 주저로 간주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에서의 문학비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철학이나 사회사상 쪽으로 관심대상을 넓혀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라타니 자신은 비평가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학자이기보다 비평가이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개념을 좇기보다 문제를 좇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상황이 각각 존재했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전자의 시대였기에 후자의 시대가 가능했다는 의미다. 지난 세기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런데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사가 개념창조의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 간에 이뤄지는 힘겨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들의 배치에 의해서다. 즉 ‘이항대립’을 통해 구축되기 마련인 개념들은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이전 개념군이 파괴되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군이 자리잡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르는 철학에는 무의미한 형식적인 전복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철학과 달리 개념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들에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개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관심은 항상 개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를 향한다. 다른 말로 비평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낳는 문제(조건)들과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로지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비평을 ‘대립’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를 통해 ‘개념의 노동’(헤겔)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소개돼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상가 중에 가라타니만큼 널리 읽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책을 그토록 탐독해온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라타니의 책은 여느 철학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슷한 한자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중심개념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개념(핵심용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대신에 기존 개념들의 의미를 조금씩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쳐가기에, 딱히 철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그 흐름을 쫓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이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혹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지적 임팩트가 제거된 요약본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가라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들이 마냥 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화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전환이나, 생산자 투쟁에서 소비자 투쟁으로의 이행,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제비뽑기’, 점진적으로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룩해가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것들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동’시킨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가라타니 철학’이라는 실체와 접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가라타니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라타니를 읽은 후 이제 더 이상 이전 같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평의 철학이란 바로 이처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세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상가는 가라타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비평과 한국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조영일_문학평론가)

07.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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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2008-01-04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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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리포베츠키의 <제3의 여성>(아고라, 2007)을 잠시 펼쳐들었는데(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0797 참조), 1장이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행복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남녀의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17쪽) 

물론 12세기 때 발명됐다는 사랑, 혹은 사랑의 모체는 '궁정식 사랑'이고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들이 나온 게 있다, 고 적으려고 이러저리 검색해보지만 뜨지 않는다.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기법>(현음사, 1992)만이 생각난다. 문화사를 다룬 책들 중에 더러 이 '사랑의 발명'이란 테마를 다룬 책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궁정식 사랑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지젝의 설명(<향락의 전이>)이 가장 자세하며 깊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둔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http://blog.aladin.co.kr/mramor/974481)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http://blog.aladin.co.kr/mramor/978175)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http://blog.aladin.co.kr/mramor/986399)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http://blog.aladin.co.kr/mramor/986869)

리포베츠키의 이어지는 설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궁정의 유희일 뿐이었다. 사랑은 왕과 귀족들만 하는 특별한 행위였다. 당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성적 충동은 경시되었다. 중세 교회 시대의 사랑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열정이 되었고, 사랑이라는 스스로의 근거만으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첫번째 미주가 붙어 있는데, 바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왜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는지 기이하게 생각되는 책 중의 하나(였지만 번역돼 나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의 한 장인 '사랑의 사회학: 민족주의와 에로티즘의 융합을 위하여'에서 처음 소개받은 듯하니까 어느새 십수 년 전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6)과 함께 필독서로 제시된 책이었다(기든스 책의 원제는 국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다).  

아무튼 이후에 "사랑은 중세의 '완전한 사랑'에서 고전주의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을 거쳐 20세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어져갔다."(18쪽)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이현의 소설 표제가 되기도 한 재크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민음사, 1985)이다,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떠올린 책이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쇠뿔은 단 김에 빼는 성격이어서(물론 책에 대해서만이다) 동네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대출해왔다. 사랑에 대해서 이만한 두께의 문화사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필리프 아리에스 등이 엮은 <성과 사랑의 역사>(황금가지, 1996)도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주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탈리 에니크의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 아니 골드만의 <잃어버린 사랑의 꿈>(한국문화사, 1996), 그리고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민음사, 1995)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크리스테바의 책은 <사랑 이야기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어에서 '이야기'는 '역사'란 뜻을 중의적으로 갖기에). 

다시 리포베츠키로 돌아가면, "그때부터[12세기부터] 이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꿈을 안겨주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이야기'나 '사랑의 문화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나 읽도록 하겠다(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07. 10. 07.

P.S. 작년 봄에 출간된 <사랑의 문화사>에 관한 리뷰를 하나 참고로 읽어둔다.  

매일경제(06. 05. 26) 사랑도 진화해왔다 '사랑의 문화사'

첫키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좀더 친밀한 사이로 나아가는 과감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키스를 할 때는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지만,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 키스 역사를 살피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학작품에 묘사된 장면들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피츠 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을 보면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키스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이편'의 연인 아모리와 로잘린드는 만난 지 단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 빅토리아시대에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남녀간 예의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히스클리프는 5분에 걸친 격렬한 키스 끝에 캐서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다시 입맞춤을 해주오. 그러나 그 눈은 보게 하지 말아 주오."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사랑의 문화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사랑과 연애 역사다. 빅토리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문학과 미술작품을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의미와 변천사를 분석한다. TV 드라마와 통속소설, 실용적 연애 지침서에 이르기까지 흔히 접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파묻힌 건조한 성찰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의 다양한 일차 자료를 곁들여서 생생한 실감을 전해주는 성찰이다.

책은 사랑의 성립과 소멸에 이르는 단계를 '기다림-만남-조우-육화(肉化)-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힘-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맞는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며 시대별 모습을 살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700여 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담스럽다.

미리 숙지해야 할 소설과 그림들도 많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씨' '레 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들과 연인' '전망 좋은 방' '위대한 개츠비' 등 저자가 분석한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미술에 대해 말하자면 마네 드가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대가들의 대표작 정도는 머리에 담아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박학과 깊이가, 재미있고 발랄하되 누구나 아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인 시중 연애지침서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내공'을 쌓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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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22 04:41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hemiola 2007-10-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사랑의 문화사) 굉장히 재밌어요. ㅎㅎ^^ - 얼마전에 이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와우, 대단합니다. 즐겨찾기 했습니다~

로쟈 2007-10-07 22:54   좋아요 0 | URL
<희생>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쓰시네요. 반갑습니다.^^

섬나무 2007-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의적절한 유익한 포스트입니다.^^ 하지만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에 입 닥치고 책이나 읽는 일이 어떻게 유익한 지 이해되는 처지에선 굳이 기대지 않아도 좋겠습니다.ㅎㅎ
 

중앙일보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글로벌 책읽기'는 몇 주전부터 찾아 읽는 코너이다('세계의 책' 범주에 딱 들어맞는 연재이기도 하다). 이번주에 다루어진 책은 우리에게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는 사카이 나오키이다('국민주의 비판'이 그의 주된 이론적 화두이다). 그의 신작이 <일본/영상/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인 모양인데, 얼른 소개되었으면 싶은,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다. 나는 소개기사나 챙겨두도록 한다.

중앙일보(07. 10. 06) 영화도 제국주의의 숨겨진 무기였다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다. 미국적 보편주의는 미국산 대중문화를 매개로 확산, 보급되었다. 특히 헐리웃 영화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화의 정치적 작용을 도마 위에 올린다.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 신문기자와 중국·유럽 혼혈의 홍콩 여성의사의 사랑을 그린 영화 ‘모정(慕情)’(1955)은 그 해 골든글로브 국제이해 공헌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국여성 역으로 백인 여배우 제니퍼 존스를 등장시킨 것은 오로지 타인종과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시하는 ‘양식 있는’ 백인관객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동양인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 점에서 그녀는 미국인 해군장교에 버림받고 스스로 자결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여성 ‘초초상’의 후예이다. 여기에는 여성은 백인 남성의 ‘인지’를 통해서만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남성(서양)우월주의가 작동한다. 반면, 비서양인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백인 남성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만드는 연애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식민지 상황의 국제 연애를 그린 영화의 압도적 다수는 식민지지배 질서를 전복할 수 없는 여성의 종속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생산해왔다. 다시 말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인종간 연애영화는 국제관계의 알레고리 그 자체이며, 이 경우 영화는 국제간 권력관계를 획정하고 추인하는 장치가 된다. 1940년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 및 동아시아 각지에 배급된 영화 ‘지나(支那)의 밤’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일본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가 남경학살(영어로는 ‘남경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으로 일컬어진다)의 3년 후에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한다. 강간은 강제적인 종속을 의미하며 피지배자의 의지에 대한 폭력적인 침해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양국 남녀를 낭만적인 연애관계 속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중국 지배가 양자 간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정상적이고도 제도화된 정치현실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을 적용하면,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일본 보수층의 태도 역시 ‘강간이 아닌 연애로서 식민지 역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또 ‘반전 영화’로 알려져 있는 ‘디어 헌터’가 실은 미국(서양)이 비서양세계에 행사한 폭력의 역사를 부인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집단 심성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국인에게 ‘러시안 룰렛’과 같은 비인간적 고문을 강요하는 베트남인을 등장시킴으로써 ‘피해자 의식’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에 의한 공감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적 ‘반전영화’라 할 수 있는 ‘버마의 하프’ (1956) 역시 사카이식 비판적 감수성의 여과지를 거치면 일본판 ‘디어 헌터’가 된다.



한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미국의 헤게모니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내전의 상처라는 시각으로 접근한 제4장에서 내내 유지되어왔던 비판적 사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은 아쉽다. 그 역시 일본인 지식인으로서 숙명처럼 직면해야 하는 이른바 ‘제국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전후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공범관계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관점은 자위대를 ‘타위대’로 표현하는 등 더러 극단적인 주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국외자적 감수성을 토대로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현존하는 일본·미국의 국민주의 및 식민주의적 정치·문화현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하는 저자의 작업은 ‘밖으로부터의 사유’에 취약한 국내 인문학계에 의미있는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윤상인_한양대 교수)

07.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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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1-10 17:45   좋아요 0 | URL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들이 제국주의적 징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책이 있었군요^^ 참고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