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의 '서평'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945).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에 대한 '품평'을 담고 있는데, 유명시리즈에 대한 비판과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시리즈에 대한 호평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번쯤 읽고 참고할 만하다.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의 가벼움 혹은 뚝심'이 부제다...

교수신문(08. 10. 06) 저자의 유명세를 감당할 진정성은 있는가

아마도 대다수가 동의할 인문사회과학의 성격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그 본질이 기성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식 자체의 창조와 환기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경쟁과 생존의 방정식으로 환원되는 이 시대의 일차원성이 심화될수록,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제틀 전복해 새롭게 읽어내겠다는 인문사회과학의 야심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의 이러한 야심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연구 성과를 흡수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내뱉을 대중의 존재와 그 대중과 인문학을 접선시킬 ‘가독성’ 있는 책들의 존재가 요구된다. 요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시리즈물은 바로 이 가독성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관심을 끄는 시리즈로는 우선 생각의 나무의 ‘問라이브러리’ 시리즈가 있다. H(Humanities), A(Arts), L(Literature) 등 세부 시리즈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에 대해 출판사는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20세기 극복과 21세기 비전 추구를 통해 지식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우창, 도정일, 최장집, 장회익, 강수돌, 윤평중과 같이 무게감 있는 논자들을 통해 ‘정의와 정의의 조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등 오늘의 우리가 제기해야 될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고, 이후에도 박명림, 임지현, 이어령 등 저명한 필진들의 책을 준지하고 있다.

우선 윤평중 교수가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에서 리영희, 송두율 교수에 대해 차분하게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윤 교수는 리영희 교수에 대해서, 분명 한국 지성사에 남긴 흔적이 작지 않지만, 그 과오도 분명히 해야한다면서, 특히 리 교수를 옹호하는 일부 교수들의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미 일간지를 통해 문제가 됐던 윤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앞으로 지식인 사회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강수돌 교수가 경쟁의 내면화를 자기소외와 연결하는 대목도 주목해야 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목소리 높이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들) 특유의 풍토가 실은 자기비판과 성찰이라는 의무는 방기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정일 교수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에서 시장전체주의를 인문학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우창, 장회익, 최장집의 책들은 촌철살인의 맛이 다소 떨어지긴 해도 무난하게 시대의 문제점과 해법을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윤 교수가 표현한 자기 비판적 계몽의 정신을 바로 이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자체에 적용하면 어떨까. 이 시리즈는 저평한 필진에서 수려한 표지 그리고 일목요연한 내용 전개에 이르기까지 가독성을 최대한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하는 바로 그 깔끔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의 생명은 우리의 ‘지금과 여기(jetzt und hier)’를 불편하게 만들고, 페이지 하나를 두고서도 며칠 밤을 고심하게 하는 거친 생경스러움에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은 유명 지식인들이 직접 집필한 책이라는 점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있지만, 저자의 유명세가 책의 무게를 더하는 그러한 책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일종의 우울증 속에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와 학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져보기 위해 기획됐다는 새물결의 ‘What’s up’시리즈는 보다 발랄한 외양을 띠고 있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필자들을 통해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호모사케르-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등의 제목으로 한층 세계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인가.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의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이미 지겹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필자들의 새로움은 자본주의, 제국,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명, 사도 바울, 쓰레기와 같은 독특한 우회로를 통해 행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와 개념의 독창성이 국내 논자들의 신문 사설 같은 건조함보다 인기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외국 학자들의 논의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책의 내용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 대체 우리의 어떤 현실 문제와 연관할 수 있을지 쉽사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젝, 아감벤이나 바디우의 이름이 그 자체로는 신선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일종의 지적 트랜드로서 유행하고 있는 국내에서는 그다지 신선해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이다. 지젝, 아감벤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들일까

이후 출판사의 ‘아주 특별한 상식 NN(NO-NONSENSE)’ 시리즈는 세계화, 기후변화, 공정 무역, 테러리즘 등 시대의 중요한 쟁점들을 친절하게 검토하고 있다. 일목요연한 구성은 짜임새가 있으나, 문제를 절실하게 제기하는 인문학서적이라기보다는 논술용 참고서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와 비슷한 포맷으로 시중에는 웅진 지식 하우스의 고정관념 Q시리즈 외에 다양한 시리즈물들이 나와 있는데, 가독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서라고 보기에는 무게가 한참 떨어지는 책들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유려하지만 가독성에 대한 요구에 강박당한 시리즈물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귀감이 될 만한 시리즈물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선인 출판사의 구술자료 총서다.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등의 제목을 단 시리즈는 유명한 학자도 아니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필자들은 아니지만, 진실함의 곡진함 곧 삶의 진정성을 가장 절절하게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신산했던 삶이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가독성을 이유로 밋밋한 시리즈물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풍토를 반성하게 한다.



아르케의 ‘희망제작소 뿌리총서’도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뭉친 시리즈이다. 일본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는 점이 다소 눈에 걸리지만, ‘창발마을 만들기’, ‘1% 너머로 보는 지역활성화’등 이른바 풀뿌리 자치 운동에 대한 실천적 모색을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한편 가독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뚝심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시리즈물들도 꽤 눈에 띈다.



성균관대 출판부의 ‘유학사상가 총서시리즈’나 다할미디어의 ‘호남 역사문화 연구총서’도 유행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다만, 학술적 가치는 높으나, 인문학적인 문제의식을 불어넣기에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시리즈들이다.(오주훈 기자)

08.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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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7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7:00   좋아요 0 | URL
부모님들의 신산한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매하네요.

로쟈 2008-10-08 17:35   좋아요 0 | URL
기자의 선호 같습니다. 구술자료 자체가 인문학은 아니죠...
 

영문학자(미국문학자라고 해야 하나?) 김욱동 교수의 신간 <소설의 제국>(소나무, 2008)이 출간됐다. 짐작엔 예전에 나온 <미국소설의 이해>(소나무, 2001)와 짝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그밖에 <윌리엄 포크너>란 묵직한 연구서가 있다), 요즘 미국 경제가 전세계적인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탓에 미국소설을 다룬 교양서조차도 눈길을 끈다. '소설로 읽는 아메리카의 초상'이란 부제에 맞게 '미국'에 방점을 두고 읽을 수도 있겠다. 11편의 작품(작가)을 다루고 있는데, 대부분이 번역돼 있기에 작품 감상과 병행해도 좋겠고. 미국소설에 관한 교양강좌라고 해야 할까?..

 

경향신문(08. 10. 06) "미국문학의 고전을 통해 본 비틀어진 청교도 이상 그려”

김욱동 한국외국어대 통번역학과 교수(60·사진)가 신간 ‘소설의 제국’(소나무)을 선보였다. 부제를 ‘소설로 읽는 아메리카의 초상’이라 붙이고, ‘주홍글자’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위대한 개츠비’ ‘앵무새 죽이기’ 등 11편의 작품을 인종·계급·젠더·자연이라는 네 개의 코드로 바라본 책이다. 이 가운데 ‘주홍글자’ 등 4종은 김 교수 스스로 새 번역본을 선보였다.

2005년 서강대 교수직을 명예퇴직한 그는 미 듀크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에 3년간 머물렀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수사학·생태주의 등 새로운 문예사조와 이론을 국내에 활발히 들여와 주목받았는데, 지난 3년 동안은 한국계 미국작가 연구에 힘을 쏟는 한편 미국문학의 고전을 새로 번역하고 분석했다. ‘소설의 제국’도 그 작업의 성과다.

“텍스트의 무의식을 읽으려고 했어요.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추구했으나 표면적인 이상 밑에는 원주민 학살, 흑인노예제도, 물질주의 등의 어두운 측면이 있지요. 비틀어진 청교도들의 이상을 미국소설의 고전에서 분석하려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소설은 어떤 것인가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남부를 배경으로 유복한 변호사 가문과 흑인, 농부를 대비시켜 인종문제를 생각해 보는데 유익합니다. 마여 앤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역시 흑인·여성이라는 이중의 질곡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위대한 개츠비’는 행복의 추구라는 미국적인 꿈이 물질주의와 손잡으면서 변질, 타락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미국소설이 그 뿌리인 영국소설이나 유럽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유럽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에서 항상 사회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지요. 그러나 미국소설은 개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허클베리 핀…’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지요.”

-한국독자들이 미국소설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계에서 여섯번째의 다문화사회라고 합니다. 이제 배달민족의 신화는 사라졌어요. 계급·인종·젠더 때문에 억압받는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자연 역시 그동안의 인간중심주의에서 타자로 배척됐지요. 미국소설은 다문화주의,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작가 연구는 어떻게 진척되고 있습니까.
지난 3년간 연구를 토대로 ‘강용흘 연구’와 ‘김은국 연구’를 냈고, 총론격인 ‘한국계 미국문학’도 완성 단계입니다. 요즘은 유일한의 ‘한국에서의 나의 소년시절’, 박인덕의 ‘9월 원숭이’ 등 한국계 미국작가의 자서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개 한국계 미국문학의 시초는 강용흘의 ‘초당’(1931년)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체류동안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한수의 여행’(1922년)이란 소설을 썼던 걸 알게 됐습니다.”

-미국문학과 문화 연구자로서 최근 미국 월가의 붕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자본주의 자체의 붕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대공황을 겪었던 것처럼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하는 과정이겠지요. 미국 본토보다 오히려 아시아가 몸살을 앓을 가능성이 높잖아요.”(한윤정기자)

08. 10. 06.

P.S. 인터뷰기사에도 언급이 되고 있지만 김욱동 교수는 한국계 미국작가 연구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제까지 나온 <김은국>, <강용흘> 외에도 더 나오는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바흐친) 전도사, 포크너 전공자, 미국소설 번역자이자 연구자 등이 그간에 알려진 그의 면모인데, 거기에 한국계 작가 연구자란 또 하나의 마스크를 보태야겠다(하긴 <광장> 연구서를 쓰기도 했다). 부지런하기로는 영문학계에서 선두에 설 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소개서 몇 권의 이미지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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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8-10-07 01:24   좋아요 0 | URL
김욱동 교수님이 명예퇴직을 하셨었군요. 많아야 50대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환갑이 넘으셨네요... 전 개인적으로 영국 소설보다는 미국 소설에 더 친근감이 갑니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10 몇년 전에 열심히 읽기는 했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는...^^

로쟈 2008-10-07 20:5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정년퇴직하실 연배까지로는 안 봤는데요...
 

교수신문에서 학술동향 기사 한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환경과 생태의 역사'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정리해주고 있다. '환경사'(란 말을 쓰는 모양이다)와 '생태사'에 대한 비판적 소개로도 유용해 보인다. 논문의 발표자인 김기윤 박사는 크로스비의 책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지식의숲, 2006)의 역자이면서 과학사 전공자이다.

교수신문(08. 09. 29) 20세기 생태학, 제국과 식민지의 은밀한 시선 결합돼 있다

지난 19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12회 한국서양사학회 학술대회의 주제는 ‘환경과 생태의 역사’였다. 역사 연구를 본업으로 하는 학자들이 ‘환경과 생태’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흥미롭다. 기존의 환경 담론이 지닌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적하면서도, 제국과 식민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각적 차원에서 환경사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한 김기윤 한양대 강사의 논문 「환경의 비교사적 연구 :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이 눈길을 끈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김 박사는 국내 서양사학계에서는 드물게 환경사를 주제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의 논문은 환경을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자는 주장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역사적 논의가 가질 수 있는 위험성과 전망을 짚어줌으로써 향후 환경사 관련 논의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환경을 역사적 맥락 특히 세계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는 90년대 들어와 활발해졌다. 세계사 관련 학술잡지인 <Journal of World History>가 기후, 환경, 질병 등을 비중 있게 다루게 되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환경이 중요한 정치적, 대중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환경사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환경 담론은 흔히 갖는 반제국주의적 외양과 달리 그 이면에는 빈부 격차의 은폐라든가, 사회적 모순의 외면, 거대 기업 및 국가의 주도 등 제국주의적인 면도 갖고 있다. 이는 환경사를 비롯해 환경 관련 담론이 갖는 제국주의적 측면의 문제성을 지시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국과 식민지라는 단일한 실체들을 전제해 대립시키면서 큰 이야기로만 환경을 말하려는 관점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한다. 그간 환경을 세계사에 접목시키는 시선은 엘니뇨, 소빙하기와 같은 큰 시간의 흐름 즉 자연사적 관점을 강조하거나 혹은 제국 대 식민지라는 일면적인 대립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박사는 이러한 관점이, 환경과 자연을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역사나 개인들의 실천을 사상함은 물론이고, 제국과 식민지의 관점을 넘나들며 전개된 다층적이고 복잡한 역사의 지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요점은 환경사가 거대 역사(Macro History)의 관점이 아니라, 파편화된 작은 역사(Micro History)들의 접합과 굴절을 통해 연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곧 제국과 식민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환경사를 다중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박사는 논문의 초두에서부터 “중심부의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결국 주변부의 시각을 발굴해내는 시도로 이어진 것이다. 주변부의 역사적 문화적 또는 물리적 힘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결국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더 흔히 볼 수 있다”면서 제국주의적 기획이 식민지적 의도로 이어지거나, 식민지적 기획이 제국주의적 의도에 봉사하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자연, 환경, 생태를 조망하려는 역사의 프리즘이 결코 일면적이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 예로 18세기 린네의 식물분류학과 19세기 훔볼트의 자연학 그리고 20세기 생태학 및 환경 보호론을 든다.

우선 린네의 자연사에 대해서 김 박사는 “학문 분야로서의 자연사는 개인적 집단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순수한 자연의 연구라는, 일견 제국의 정복의제에 반하는 활동형태를 취하면서, 실상 지구를 자원의 창고로 보는 제국의 눈이 돼 주었으며, 또 그 자원을 수탈해 내는 도구가 돼줄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린네가 과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과학으로 인해 지구 전체가 상업, 정치, 식민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이어서 유럽 부르주아 계급의 경쟁, 착취, 폭력의 그림자가 지표 여기저기에 각인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경제나 관리를 논하는 린네의 입장이 제국주의적 자연관으로 전용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김 박사는 바로 린네의 경우조차도 주변부적 시선이 교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린네는 전형적인 제국의 부르주아와는 거리가 먼 학자였고, 스웨덴 역시 제국의 중심지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제국의 눈이라는 집합적인 실체를 상정함으로 해서 너무 많은 역사적 행위자들의 실체가 가려져 왔음”을 의미한다.

김 박사는 환경사학자로 저명한 프랫(Pratt)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19세기의 훔볼트를 “제국의 눈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보고 있다. 훔볼트는 “그가 여행했던 지역의 지형과 기후 그리고 동식물들을 높은 곳에서 조감하듯 측정하고 도표화하면서 훨씬 공격적인 방식으로 제국의 도구로 활약했다.” 특히 “제국의 의지가 담긴 훔볼트의 자연학 특히 자연지리학은 남아메리카 문화에 갖가지 흔적을” 남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남미 사람들로서도 훔볼트가 남겨 놓은 그 지역 자연에 대한 서술은 훌륭한 도구”가 돼 주기에 이른다. 이는 결국 남미인 등의 현실과 관련이 깊을 포스트 식민주의적 기획 자체가 제국의 또 다른 이면이자 사생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김 박사는 여기에서도 “훔볼트는 남미의 자연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상당량의 저술을 남겼으며, 노예제도나 부당한 경제제도 등에 대해서도 강경한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일한 제국의 눈이란 없으며, “제국의 눈이라는 분석틀 속에서도 다층적인 서사와 다양한 분석 단위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20세기 생태학의 경우는 보다 극명하게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이 자웅동체처럼 은밀한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생태학은 흔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며 지극히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현대적인 학문분야로서의 생태학이 형성되고 정립돼 온 과정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생태학은 본래 “1900년대에 식물상의 천이 과정을 이주민이 정착민을 제거하면서 서식지를 점유해 나가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1920년에서 1930년대에 생태계의 개념을 확립한 영국인 탠즐리의 경우는 “영국 연방의 효율적인 관리를 염두에 두었다.” 이는 설령 환경이 인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자각 자체가 중심부 제국에서 연원하지 않았더라도, 제국의 시선이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극단적으로 순수 자연을 찬양하는 목가적 경향의 경우에도, “동물보호구역을 설정하면서 그리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승리를 향해 진행되는 환경사로 그리는 행태”를 통해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김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의 개입이 배제된 원생지 또는 원생 자연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열광적인 숭배 역시 제국주의적 시선이 만들어낸 관념인 듯싶다”고 평하는데, 이는 곧 제국의 질서를 회의시하는 환경 담론이 제국의 질서 내에서 배태됐으며, 제국과 식민지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를 바라보는 중층성이 20세기 생태학의 진실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김 박사는 논문 말미에서 “사회경제적인 상황, 법률제도, 제국주의적인 힘 등, 지형, 기술은 물론 시간, 공간, 진보에 대한 개념과 같은 추상화된 길과 같은 구체적인 마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을 나누어 대조시켜 보거나 국가단위의 차이를 살피는 데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장소에서 다층적 층위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김 박사의 논의는 환경사, 생태사를 둘러싼 논의가 조야한 환경 보호 담론이나 혹은 제국과 식민지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거친 분류법의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 다만 김 박사의 다원론적 접근법이 환경 담론에 대한 제국주의적 접근법의 위험성을 흐릿하게 하는 것 아닌가라는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환경사를 미시적 관점에서 조망해야할 필요성이 보다 풍부한 사례와 분석을 통해 그려지지 않고, 주장에만 그친 감이 있는 점도 한계로 보인다.(오주훈기자)

학계동향

국내 학계에서는 동양사 분야의 유장근 경남대 교수, 정철웅 명지대 교수 등이 환경사 연구자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서양사 학계에서는 주경철 서울대 교수와 김기봉 명지대 교수 등이 오래 전부터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번 학회를 계기로 성영곤 관동대 교수, 박흥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자들의 등장이 기대된다.



거대사 또는 지구사로서의 환경사의 문을 연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책이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를 변화시킨 흥미로운 교환의 역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생태학의 역사를 사상사의 시각에서 다루면서 동시에 환경에 미친 산업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고전이 된 도널드 워스터의 책도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로 소개돼 있다.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연구 결과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이비드 아널드의 책은 『인간과 환경의 문명사』로 번역됐다.

08.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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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대표적인 완소작가 김연수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 잡지 연재시에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줄거리도 모르고 있었는데, 리뷰기사들을 보니 1930년대 북간도의 민생단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종의 역사소설인 것이다. 책을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사는 챙겨놓는다(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의 사진은 한겨레의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13917.html)에서 가져왔다.

한국일보(08. 10. 04) 촛불시위의 낙천적 젊은이들 보고 주인공이 복수하는 결말 수정했죠

"그 시절의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지금은 이 세계에 객관주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도 든다" (212쪽)

소설가 김연수(38)씨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가슴 뜨거웠던 어떤 젊은이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그 운명은 민족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숭고한 꿈을 품은 채 일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혁명에 투신했던 젊은이들이 종국에는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고 죽이게 되는 가혹한 운명이다. 작품의 배경은 일본제국주의와 동북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격렬하게 대치했던 1930년대초의 동만주. 개별 혁명가들의 견결한 이념과 달리 조선, 중국 그리고 국제공산주의운동가 등이 뒤엉킨 혁명조직에는 비극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남만주철도의 측량기수로 용정에 파견된 김해연이 혁명조직의 일원이던 신여성 이정희와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일본군 장교에 접근해 토벌대 정보를 조직에 보고하던 그녀는 정체가 발각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독립이라든지 해방이라든지 하는 말이 좀 시큰둥했던" 착한 식민지인이었던 김해연은 이정희의 자살로 우연찮게 항일혁명조직과 연계된다. 그리고 그는 이후 만주항일운동사의 귀퉁이에서 서로를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하며 자신들의 동지 500여명을 학살한 혁명가들의 정치투쟁으로 기록돼 있는 '반(反) 민생단 투쟁'의 세계를 몸으로 통과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친구를 죽일 수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 친구라도 죽일 수 있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이 소설은 따라서 잘 짜인 역사소설이자 애틋한 연애소설, 그리고 인상적인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의 화자가 경험하는 두 개의 세계는 낮과 밤이라는 상징으로 대비된다. 연인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은 김해연은 황해와 중국해가 마주치는 다롄 앞바다에서 "나는 그 두 바다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두 개의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시내의 화려한 불빛들이 또 견딜 수 없이 공허했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은 작가 김씨가 대학졸업 직후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1995년 일본 학자 와다 하루키의 연구서에서 접한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라는 김일성에 관한 짧은 프로필 한 줄에서 잉태됐다. 그 한 줄의 섬광은 간도를 다룬 안수길 염상섭 등의 소설, 북한의 항일혁명사 소설 '불멸의 역사 시리즈' 에 대한 취재 등을 거쳐 그를 2004년 중국 옌지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의 9개월 간의 옌볜 체류는 시대의 광풍에 희생됐던 젊은이들의 사연을 다룬 이 소설로 결실을 맺었다.



김연수씨는 지난 봄 촛불집회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그 경험은 이 소설에서 화자 김해연이 연인 이정희를 자살로 이끈 변절한 혁명가 최도식을 살해한다는 최초의 결말 대신, 최도식을 살려주는 것으로 바꾸도록 했다고 그는 말했다. 효자동의 전경들 앞에서 대중가요를 부르며 춤추던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에게 "반드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낙천적 세계관을 긍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발표작마다 역사적 문제의식과 신선한 소재, 탄탄한 취재, 그리고 빼어난 소설적 형상화로 주목받는 그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장군의 포로로 잡혀간 두 조선인 형제의 곡절많은 귀향기를 소재로 한 새 장편을 이미 준비중이라는 그는 "<밤은 노래한다>를 쓰면서 나를 억압하던 내 안의 상처가 많이 치유됐음을 느낀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10. 04.

P.S. 기사에서 개인적인 흥미를 끄는 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소설이 와다 하루키의 연구서에서 읽은 김일성에 관한 짧은 프로필에서 시작됐다는 것. 짐작에 그 연구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비, 1992)일 것이다. 환생 모티브와 연쇄 살인범, 그리고 만주에서의 항일투쟁 등을 엮은 노희준의 소설 <킬러리스트>(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 대한 해제를 쓰느라 나도 재작년 가을에 뒤적거렸던 책이다(이 해제의 파일은 잃어버렸다). 이 시기 역사에 대해서라면 두 작가가 정담을 나누어도 들을 만하겠다.  

그리고 둘째는 "<밤은 노래한다>를 쓰면서 나를 억압하던 내 안의 상처가 많이 치유됐음을 느낀다"는 작가의 고백. 이런 건 쉽게 내비치는 게 아닌데, 여하튼 이번 작품이 작가의 '자기 치유적 소설'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작가의 데뷔작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세계사, 1994)와 같이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밤은 노래한다>의 구상도 1995년의 일이었다고 하니까 이 두 작품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는 어떤 소설이었나? 출간 당시에 챙겨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눈대중으로는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고(故) 이문구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이 작품은 정보기관의 공작정치가 일시적으로 환상을 실현했던 어두운 과거사의 풍자적인 재구성을 통해서 냉전체제 붕괴 이후 그에 대신할 이념의 부재로 인하여 새롭게 꿈꿀 가능성이 있는 또다른 지배구조에 대한 예상문제의 제시로 읽을 수 있다." 젊은 작가이기 이전에 89학번 세대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작가는 당선소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제까지 멋모르고 쓴 글로써 이 소설의 사회적 정치적 입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믿는다. 나는 궁극적으로 소통불가능한 문학을 지양한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그러한 생각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뽑아주신 분들과 나를 키워준 모든 스승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이 소설을 나와 함께 뉴트롤즈의 아다지오를 들으며 87년 대선을 투표권이 없는 눈으로 지켜보았고 '영웅본색', '개 같은 내 인생', '천국보다 낯설은'의 순으로 영화를 보았던 나의 세대에게 바친다.

이런 고백이 작가 김연수의 '기원'이자 김연수 문학의 중핵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지금의 작가라면 이렇게 '대놓고' 쓰지 않을 것이다). 키워드는 '사회적 정치적 입지'(사회정치적 상상력) 그리고 '나의 세대'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중문화' 체험이 덧붙여진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개인'에 함몰되거나 '대중성'에 투항한 문학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덧붙여 말하자면, 자기 세대, 혹은 자기 학번을 표나게 내세우는 작가로 내가 꼽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 김연수와 김종광이다. 김종광의 소설엔 <71년생 다인이> 같은 작품도 있다.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같은 시리즈의 작품으로서 그에 대응한다). 그러고 보면, 이 '의리형' 작가는 자신의 초심으로부터 몇 걸음 떼지 않았다, 라고 나는 눈감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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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0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저 '오래된' 당선소감에서 단 하나의 구절, 곧 "소통불가능한 문학을 지양한다"에 가장 먼저 주목하고 싶군요. 대중문화를 처음으로 가장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었던 세대, 민주화의 꽃이 피어난 시기에 오히려 '제도 정치' 안으로는 참여할 수 없었던 세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위치를 탐색하고 또 규정 짓고자 했던 세대... 이러한 세대에 속해 있다는 정체성을 지닌 작가가 상상하고 기획하는 소통이 오히려 저 '소통불가능성'의 자리에 놓여 있다는 점, 저로서도 그 이유를 눈 감고도 말할 수 있고 귀 막고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하지만 동시에 이는 제게 '체험'이라기보다는 '풍문'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겠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더) 그보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렇다면 이러한 세대와 그보다 10년 정도의 터울 뒤에 온 '나의 세대'는 과연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말하자면 상대적 '비교우위' 또는 '비교열위'에 관한 하나의 물음입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The Who의 "My Generation"을 듣고 싶기도 하군요...)

로쟈 2008-10-04 09:51   좋아요 0 | URL
'지향'으로 읽으신 건가요? '지양'이란 말이 복합적이긴 하지만, 오타가 아니라면 김연수는 소통을 지향하는 쪽인데요(타협하지 않는 한에서)...

람혼 2008-10-04 09:5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로 지양의 그 '복합적'인 느낌 때문에 생각해보게 된 몽상 한 자락이었습니다. "소통불가능한 문학을 지양한다"라고 하는 '소통'의 전제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저 '소통불가능성'에 대한 부정의 언급을 통해서[만]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 제게는 개인적으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문제처럼 다가와서요. 특히나 로쟈님이 지적하신 '자기 치유'로서의 작가적 기원을 생각해볼 때 김연수의 저 소통에 대한 짧은 '첫 번째' 언급이 마치 제게는 그가 '소통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어떤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로쟈 2008-10-04 10:01   좋아요 0 | URL
이 소설과 당선소감의 전문을 읽어보면 사정이 좀 명료해질 것도 같네요. 그나저나 많이 바쁘시겠는데요...^^

람혼 2008-10-04 10:10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김연수의 소설에 대해서는 과거 <꾿빠이, 이상>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었을 때 얻었던 어떤 '호감'이 작년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며 약간의 '의문'으로 바뀌었던 경험이 있는데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네요. 로쟈님 말씀대로 시간을 내서 그의 '데뷔작'과 당선소감 전문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사실 정신이 좀 없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다 하루끼의 유격대 국가론은 북한에서 싫어해요.그런데 우리나라엔 친 김일성 학자로 오해하고 있더군요.일본 사회당 브레인이어서 그런가봐요.참여정부 초기에 와다의 제자인 서동만 씨가 국정원에서 일하려고 할 때(그때 고영구 씨가 국정원장 지명을 받았죠)한나라당 홍준표 씨는 서동만 지도교수가 와다 하루키인데 좌익이다...그러니 서동만도 문제가 있으니 국정원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10-05 08:56   좋아요 0 | URL
'사고금지'의 전형적 사례들 같습니다('좌익'은 생각도 하지마). 제 생각엔엔 와다 교수의 항일투쟁사에서도 김일성의 행적은 과장된 것 같던데요. 중국측에서 자료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고 하던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민생단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임종국<실록 친일파>였죠.그 창단 주역 중 한 명이 박윤석이라고 최남선의 매부예요.조선과 중국의 항일 연합전선 파괴를 위해 관동군이 만들었는데 나중에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에 가입했다는 누명을 쓰고 중공측에게 사형당한 이들이 많았죠.30년대엔 소련에서고 중국에서고 일본 끄나불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사람이 너무 많더라구요.
 

<고교 독서평설>(10월호)에 게재한 '끝장토론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세계시민주의 VS. 애국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으며 부제는 '세계시민은 탄생할 수 있는가?'이다. 제목과 부제, 소제목 모두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나름대로는 '세계공화국'(세계국가)을 다룬 9월호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2272048 참조). 

현실과 이상 - 국민 국가와 세계 국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 지난 8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베이징〔北京〕 올림픽의 슬로건이다.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이 슬로건처럼 지구촌 스포츠 축제를 즐기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였다. 그런데 이 ‘하나의 세계’는 동시에 말 그대로 ‘하나의 꿈’이기도 했다. 한여름 낮의 꿈. 한편으론 올림픽 개막 이전에 베이징 시내의 150만 빈곤층이 강제로 퇴거당했고, 또 올림픽 기간 내내 중국 당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탄압하고 심지어 발포까지 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뿐인가? 올림픽 개막일에 터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사이의 전쟁은 현재의 지구촌 사회가 ‘평화와 화합’과는 아직 거리가 먼 세계라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화와 마찬가지의 딜레마를 보여 주는 듯하다. 세계화가 국가 간 장벽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된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 동시에, 강대국 중심의 재편이라는 부정적 함축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올림픽에서 금메달 수로 우열을 다투는 국민 국가가 우리의 ‘현실’이고, 세계 국가(세계 공화국)라는 ‘하나의 세계’는 한낱 ‘하나의 꿈’, 곧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번에는 ‘국민’과 ‘세계시민’(또는 ‘세계인’)이란 범주를 갖고서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물론 여기서 국민과 세계시민은 각각 국민 국가와 세계 국가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정체성의 충돌 -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인가.’란 것은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고 있는 소속 관계에 따라서 한 가족, 한 지역 그리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그 궁극에서 우리는 세계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곧 세계시민과 만나게 된다. 물론 세계 국가는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가상으로 존재하는 이념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시민은 국민과 달리 법에 의해 보증되거나 ‘자격증’이 부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세계시민의 ‘자리’에 갖다 놓고서, 그러한 자리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들은 서로 공존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갈등 관계에 놓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충돌할 수도 있다. 예컨대, 제2차 세계 대전 때 병든 어머니를 보살펴야 할 것인가, 조국의 부름에 응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던 한 프랑스 청년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역시 어떠한 정체성이 우선하는가와 관련된다. 마찬가지로 국민과 세계시민이 갈등·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면, 여기서도 무엇이 우선인지가 문제 될 수 있다. 애국주의(국가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대립은 ‘세계시민’이란 말의 어원 자체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시민’(코스모폴리테스, kosmopolitēs)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키니코스학파(Kynicos, 견유학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그리스에서 ‘폴리테스’, 곧 시민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특정 폴리스(polis)에 속했다.

그런데 ‘코스모스(kosmos)의 시민(politēs)’을 뜻하는 ‘코스모폴리테스’는 코스모스가 ‘지구(earth)’가 아니라 ‘우주(universe)’란 의미에서 공동체의 바깥을 지시하는 한, 특정 공동체의 소속을 배격했다. 곧 세계시민주의(또는 세계주의)는 본래 모든 시민이 여러 공동체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굳이 그 소속을 밝히자면 세계시민주의는 ‘공동체의 바깥’ 내지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렇게 ‘바깥’과 ‘사이’에서 바라볼 경우, 공동체 내부에서 볼 때와 달리 모든 공동체는 평등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스토아학파 이전에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그리스 인과 야만인(barbarian)으로 나누는 것이 자연의 명령(또는 제우스의 섭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한 현자(賢者)는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시민이어야 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스토아학파는 패배한 적과 노예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어디서 왔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출신 지역과 소속 집단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려는 일반 그리스 인들의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관심에 따라 스스로를 정의하려 한 것이다. 그의 뒤를 따랐던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세계시민의 관점을 더 발전시켜서 우리가 사실상 두 개의 공동체, 곧 ‘우리가 출생한 지역 공동체’와 ‘인간적 주장과 포부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적 주장과 포부의 공동체가 우리 도덕적 의무의 근본적인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태도는 기독교적 세계시민주의에서도 반향을 얻는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유태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노예거나 자유인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가 바로 세계시민주의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그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을, ‘독일의 볼테르’라고 불리는 사상가 크리스토프 빌란트(Christoph M. Wieland, 1733~1813)는 이렇게 정리했다. “세계시민은 지구의 모든 사람을 단일한 가계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한다. 다른 수많은 합리적 존재와 더불어 세계시민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연의 일반 법칙에 따라 전체의 완전성을 함께 도모하면서도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복지에 몰두한다.”

공동체의 확장 - 세계시민주의 VS. 애국주의
이러한 기원적 의미에 충실할 때, 세계시민주의는 우리가 특정한 지역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더욱 확장된 정의와 선(善)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권유한다. 곧 정부 형태 같은 일시적 권력이 아니라, 전체 인류의 인간애에 의해 맺어진 도덕 공동체에 일차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국주의와 대비해서 보자면, 세계시민주의는 민족주의나 국민 국가라는 협소한 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예컨대 한국과 일본, 두 국민 국가 사이에서 영토 분쟁 대상이 되고 있는 독도 문제를 세계시민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의 철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는 예전에는 국경이 중요했지만 국적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면서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일본 학생이나 한국 학생은 다 똑같은 학생이다. 차별이 없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내게 ‘일본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철학자로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게 세계시민적인 사고 태도다.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그의 관점에 따른다면 독도 문제 같은 영토 분쟁은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아예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상징적으로 각각 1년씩 지배하도록 하자는 해법도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오히려 이 문제는 민족주의를 넘어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즉각적인 반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법학자 박홍규 교수는 세계화 시대에도 국경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땅 위에 사는 인간에게는 국경 구분이 여전히 중요하다. 국경 없는 곳에 인간은 살 수 없고, 인간이 사는 곳에 국경 없는 곳이 없다. 국경은 역사·정치·경제 등 많은 것과 관련된다. 독도는 작지만 그 의미는 크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국경이 엄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마치 국경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풀자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그루지야 영토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국제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은 그 당사국이 각각 1년씩 지배하는 것이겠다.”라고 비판한다.

물론 박홍규 교수의 비판을 ‘애국주의’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세계시민주의의 ‘비현실성’을 비판한 것이라 할 때, 그 현실주의는 통상 애국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취한다. 가령 올림픽에서 모든 선수의 선전을 기대하며 응원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에 이끌리기 십상이다. 한일 대표 팀 간에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 국가적 소속감을 벗어나 두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한국인에겐 확실히 덜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국가주의적 고려가, 다른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때 과연 최상의 방책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황사 바람은 국경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아마존 열대 우림의 파괴는 브라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세계는 더 이상 서로에게 무관심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 가스 제한을 위한 국제 협약인 교토 의정서(1997)가 체결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세계 최대 온실 가스 배출 국가인 미국은 이 협약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한 방침을 공언하면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우선적인 것은 미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입장이 ‘현실주의’로 옹호될 수 있을까?

세계시민주의 - 보편적 윤리의 요구에 대한 응답
세계시민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오직 이성과 인간성뿐이어서, 덕분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이란 비판에 자주 직면한다. 이러한 비판은 유구한 것이다. 세계시민이 된다는 것은 종종 외로운 일이며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일종의 ‘추방’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추방인가? 그것은 지역적인 진리들이 주는 위안, 애국주의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 자신과 자기 소유물에 대한 열광적인 자부의 드라마로부터의 추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적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까? 애국주의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듯이, 세계시민주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세계시민주의적인 애국자’, 곧 ‘지역적 헌신을 요구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물론 애국주의도 아니고 세계시민주의도 아니라는 입장 역시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한 제3의 입장을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봄(누스바움)은 ‘긍정적 애국주의’ 또는 ‘순화된 애국주의’라고 말한다. 과잉된 감정으로 무장한 애국주의는 다른 국민과 소수 민족을 억압하는 데 반해, 순화된 애국주의는 이보다 관용적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만큼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처럼 순화된 애국주의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타인의 다른 조국에 대한 사랑을 침해하지 않는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도덕’이란 말을 공동체의 규범이란 의미로, ‘윤리’를 보편적 의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어떤 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내부의 ‘규칙’이다. 가령 ‘공중도덕’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공중의 복리를 위하여 여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을 가리킨다. 길을 걸어갈 때 사람은 왼편으로 차량은 오른편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공중도덕이다. 이는 보편적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도덕은 특정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지역적인 특성일 뿐 보편성을 따르지 않는다. 당장 일본만 하더라도 우리와는 반대로 사람은 오른편으로 차량은 왼편으로 가는 것이 공중도덕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공동체는 각자의 도덕규범을 갖는다.

거기에 비해 윤리는 보편적인 준수를 요구하는 의무다. 그것은 공동체의 규칙이 아니라, ‘공동체 바깥’ 또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의무다(그런 의미에서 ‘국민 윤리’라는 말은 모순이다.). “인간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이 그러한 윤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윤리적 명령은 그것이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 한에서 언제 어디서나 지켜질 것이 요구된다.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한 특정한 공동체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세계시민주의는 어떤 고귀한 재능이나 게으른 자기변명이 아니라 보편적 윤리의 요구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분명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덕의 준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은 언제나 보편적 윤리의 관점에서 제어되고 반성되어야 한다.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관계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08.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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