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의 과학철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달에 있었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거대강입자충돌기(예전엔 그냥 '입자가속기'라고 불린 듯한데) 실험과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이후 소식을 접하지 못했는데 실험 자체가 연기된 듯싶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여된 장치인 만큼 그 실험결과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지난 9월 초 완공된 거대 강입자충돌기(오른쪽)와 건설 전 조감도. 현재 LHC는 연결 장치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내년 봄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한겨레21(08. 10. 17)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지난 9월 초 과학계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막 가동을 시작한 ‘거대 강입자충돌기’(LHC·Large Hadron Collider)에 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4년 동안 순제작비만 55억달러가 소요된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LHC는 이전까지 가장 큰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7배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둘레 길이만도 2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치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킬 때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1964년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가 예측했던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HC의 실험 소식은 ‘빅뱅 실험’이니 ‘우주 탄생 순간의 재현’이니 하는 수식어들과 함께 대중 매체에서도 높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LHC 가동에 관한 언론 보도들은 이번 실험이 갖는 과학적 의미에 대한 소개와 전례없는 규모의 실험에 대한 호기심만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러한 대규모 과학의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SSC. 미국 주도 패권주의 과학의 실패
사실 1960년대에 완성된 테바트론을 넘어서는 거대 입자가속기를 만들자는 계획은 LHC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테바트론의 20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 입자가속기인 ‘초전도 슈퍼콜라이더’(SSC·Superconducting Supercollider)의 건설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약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인 W입자와 Z입자의 발견 사실을 공표하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과 유럽에 맞서 미국이 고에너지 물리학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제안된 SSC는 그러한 패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SSC는 완성될 경우 둘레 길이가 87km에 달하는 거대 장치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계획을 승인한 1987년에는 건설에 44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언 레이더먼과 스티븐 와인버그를 포함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SSC를 통한 빅뱅 직후 초기 원시 우주 상태의 재현을 ‘신의 음성’에 비유하거나 입자가속기를 성당에 비유하는 식의 종교적 수사를 동원해가며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특히 레이더먼은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God particle)라고 부르면서 SSC의 건설이 곧 신성(神性)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SSC는 이내 불운한 종말을 맞았다. 애초 44억달러였던 예상 건설비는 눈덩어리처럼 불어나 공사가 시작될 즈음인 1990년에는 79억달러로 상향조정됐고, 1993년 일반회계국 조사에서 또다시 110억달러로 뛰어오르자 미국 의회는 1993년 결국 프로젝트를 백지화했다. SSC가 실패를 맛본 데는 규모와 체제 경쟁에 집착하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계획 초기에 SSC를 국제적인 과학 프로젝트로 만들 것을 주장했던 일본 물리학자들은 “SSC는 미국의 시설”이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는데, 미국의 이러한 오만함은 이후 예산 부족에 허덕인 SSC를 구해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SSC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LHC 역시 추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LHC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81년으로 SSC보다 오히려 앞서지만,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LHC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시작된 것은 한참 뒤인 1988년부터였다. 당시에는 규모가 훨씬 큰 SSC 계획이 미국에서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LHC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LHC가 SSC가 잘 안 될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서,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실험을 할 수 있는 다용도 충돌기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1991년 11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는 LHC가 “고에너지 물리학의 발전과 연구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계”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LHC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완공 예정 2002년으로부터 6년 더 걸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모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에서 LHC 건설 계획안이 승인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993년에 1차로 계획안이 제출됐지만, 예산 증가에 비판적인 일부 회원국들은 비용의 추가적인 감축을 요구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LHC가 위치해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될 스위스와 프랑스가 추가로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할 것을 요구하면서, 제안된 예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4년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LHC에 설치될 전자석의 3분의 1 정도를 일단 제외해 건설 비용을 절감한 뒤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빠진 전자석을 채워넣는 임시변통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5년 비회원국인 일본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러시아·인도·캐나다·미국 등과의 협상이 긍정적으로 진행되면서 조금씩 호전됐다. 예산이 웬만큼 확보되면서 1996년에는 LHC 전체를 한번에 건설하는 쪽으로 수정 계획안이 다시 제출됐다.

그러나 LHC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서독 통일에 수반된 엄청난 비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독일이 국제적 과학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축하기 위해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영국도 여기 가세했다. 결국 연구소는 1997년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차관을 들여와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는 길을 택했다. 적자 운영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LHC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LHC는 애초 200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여러 차례 연기돼 결국 올해 들어서야 완성이 됐다.

태초의 비밀·신의 마음… 수사들의 향연
SSC의 ‘실패’와 LHC의 ‘성공’은 거대한 실험 장치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대과학 분야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SSC는 냉전기의 체제 대결 의식에 뿌리를 둔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변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LHC는 일견 성공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금 압박과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계속해서 위기의식을 조성했음에도 국제적 공조와 여러 임시변통 수단을 동원해 어렵게나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LHC는 탈냉전 시기에 거대과학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LHC의 ‘성공’은 다른 점에서는 더 큰 물음을 낳고 있다. 과연 LHC가 추구하는 목표들이 그것의 실현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토록 엄청난 지출을 정당화할 만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태초의 비밀을 밝혀낸다느니, ‘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느니 하는 수사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연구를 정당화해왔지만, 갈수록 엄청난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번 LHC의 가동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숙고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김명진 성공회대 강사)

08. 10. 18.

P.S. 내친 김에 한겨레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 꼭지인데, 정재승 교수의 연재를 김명남 번역가가 이어받은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된 '힉스 입자'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정확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책을 소개해준다.

한겨레(08. 10. 18) 도대체 ‘힉스 입자’가 뭐길래

지난주는 노벨상 수상자가 줄줄이 발표되는 이른바 노벨상 주간이었다. 평소에는 그에 앞서 발표되는 기상천외한 ‘이그노벨상’에 더 흥미를 쏟는 나지만, 올해만은 본상에 관심이 갔다. 일본 출신의 과학자들이 네 명이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심정인 것은 아니다. 물리학상의 세 수상자들은 줄기차게 0순위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들이고, 올해 드디어 수상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올해는 유럽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가동을 시작한 해로서 입자물리학 분야의 전기가 될지도 모르는 시기인데, 수상자들은 현 시점에서 입자물리학의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는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표준모형은 더는 쪼갤 수 없는 17개의 기본 입자들로 자연의 모든 물질과 힘을 설명한다. 여기에 쿼크 6개도 포함되는데, 이번 수상자 중 마스카와 도시히데와 고바야시 마코토는 마지막으로 발견된 한 쌍의 쿼크를 예측했다. 한편 난부 요이치로는 표준모형을 뛰어넘는 끈 이론에서까지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노벨상의 대상이 된 연구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표준모형의 기틀을 다진 업적이다.

그런데 표준모형이라는 퍼즐은 마지막 한 조각, 곧 열여덟 번째 입자가 아직 맞춰지지 않았다. 힉스 입자라는 조각이다. 9월10일에 역사적인 가동을 시작한 (비록 이후 고장이 나 두 달여간 중단된다고 하지만) 거대강입자가속기는 여러 과제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 힉스 입자 확인에 초점을 맞춘다.

대체 힉스 입자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수조원의 돈을 써서 둘레 27킬로미터의 가속기를 지어서 확인해야 할 정도인가? 거기에 정말로 물리학의 미래가 달렸을까? 이런 궁금증들이 떠오를 때 <신의 입자를 찾아서>를 펼쳐야 한다. 고등과학원 연구원인 물리학자 저자가 표준모형에서 정점을 이룬 현대물리학의 발자취와 전망을 풀어냈다. 5장을 읽으면 힉스 입자가 왜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지, 어째서 그것에 표준모형의 명운이 걸렸는지 알 수 있다. 거대강입자가속기의 실험 결과에 따라 어떤 식으로 물리학의 행보가 나아갈지도 짐작해볼 수 있다.

입자물리학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분량에 아쉬움이 있는 이 책보다 다른 책을 집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씌어졌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땅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의 시각이 담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련 주제의 책을 이미 여럿 읽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봄 직한 이유는 그것이다. 정부는 5년 노벨상 계획이 어쩌고 하며 옆집의 노벨상을 부러워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1949년에 첫 물리학상 수상자를 냈고 54년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첫 수상자를 배출했던 오랜 저력의 일본 기초과학을 단기적 대책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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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인상적으로 읽은 기사는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 코너였다.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한국 지식사회의 편식증'을 꼬집고 있어서 눈길이 갔던 것. 오랜만에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의의를 상기시켜주는 글이기도 해서 옮겨놓는다. 사실 <새로운 과학정신>은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다.  

 

경향신문(08. 10. 17) [책읽는 경향]경기·인천에서-새로운 과학정신

한국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지식 사회는 편식증에 지독히 걸려 있다. 편식증의 핵심은, 문과형 지식에만 근거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아집이다. 그들에게 바슐라르하면 물, 불, 촛불, 꿈, 상상력과 같은 단어들이 주로 연상될 것이다. 기하학, 유기화학, 진화생물학 같은 학문에 등장하는 언어들이 바슐라르를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들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는 바슐라르의 또 다른 차원 때문에 형성됐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이런 계보를 가능하게 한 학문적 기둥이 됐다.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에서 독자들은 그의 전복적인 사고를 만날 수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비뉴턴 역학, 비아르키메데스 측정학, 비맥스웰 물리학, 비피타고라스 논리학, 비데카르트적 인식론 등 기존의 과학적 세계를 뒤집어보려는 그의 독창적인 사유가 이 작은 책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전복적인 사고를 이해할 때, 바슐라르의 문학적 세계도 더욱 명료하게 밝혀진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의 지식 문화에서 바슐라르는 허공을 맴돈다.

계량적 업적과 성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를 흉내내다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바로 매장된다. 바슐라르는 단호히 말한다. “새로운 과학 정신이 가능하려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이 부러운가. 선결 과제가 무엇인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

08. 10. 18.

P.S. 바슐라의 과학철학서로 <새로운 과학정신>과 함께 나왔던 책은 <부정의 철학>(인간사랑, 1991)이다. 개인적으론 복학한 이후에 야심을 갖고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권 다 나로선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독해력/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결론을 보진 못했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확인해봐야겠다. 짐작으론 기사의 필자도 국역본으로 읽지는 않았을 성싶다. 바슐라르의 또다른 과학철학서로는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민음사, 1998)이 이후에 더 출간됐다. 서두에서의 흥미로운 구절을 자주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입자설과 파동설에 관한 것이었다).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를 다룬 책은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다. 이들 대부분이 품절/절판된 상태인데, <부정의 철학>만이 아직 구입가능한 것으로 돼 있어서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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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출간소식을 전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349160)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리뷰기사를 한번 더 옮겨놓는다. 마침 책의 영역본을 한참 찾다가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충분히 예상했던 기사이다). 책은 끝내 찾지 못했고 낮에 인터넷에 떠 있는 걸로 보았던(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것도 다시 찾지 못했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본도(보통 인터넷에 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일부만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만이 올라와 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국역본을 좀더 꼼꼼하게 읽기 위해서 찾은 것인데, 여하튼 낭패다(국역본만으로는 모호하거나 해독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 주말 북리뷰들이 올라오는 걸 보고 나대로의 서평을 쓸 것인지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08. 10. 18)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요?

‘불화’ 개념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68·사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에 이은 랑시에르 저서의 세 번째 번역본이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원본은 두 번에 걸쳐 출간됐는데, 초판본과 재판본의 차이가 크다. 1986~1988년 사이에 쓴 논문 세 편을 묶은 초판본(1990)은 1980년대 이전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사유가 압축돼 있다. 랑시에르는 1990년대에 쓴 논문 네 편을 덧붙여 1998년에 증보판을 다시 펴냈다. 특히 이 증보판에는 그의 대표작인 <불화>(1996)에서 전개한 사유가 ‘정치에 대한 10가지 테제’라는 이름으로 요약돼 실렸다. 이로써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랑시에르의 첫 번째 정치철학 저서로 태어나 그의 사유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이 됐다. 한국어판은 1998년의 증보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이 패퇴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유행한 정치철학적 담론으로 랑시에르는 크게 두 가지를 거론한다.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귀환)’가 그것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로 대표되는 ‘정치의 종언’은 계급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에선 ‘진정한 정치로 회귀할 때가 됐다’라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적 선언이 떠돌았다.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조정으로서의 근대 정치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순수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랑시에르는 언뜻 대립되는 이 두 담론이 실은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는 똑같은 기능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두 담론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고 한다. 그 사유가 응집된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며, 이 책은 그 개념을 설명하는 여정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구사하는 전략이 ‘치안’과 ‘정치’의 구분이다. 여기서 치안과 정치는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이르는 것을 두고 치안(police)이라고 지칭한다. 치안이란 간단히 말하면,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이다. 치안은 통치 과정이다. 인간들을 공동체(국가)로 결집시켜 동의를 조직하고, 그들 각자에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치안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가 전형적인 치안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이 치안에 정치를 맞세운다. 정치란 평등 과정이며 해방 행위다. 그것은 치안의 질서를 가로질러 그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배의 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바로 이 치안과 정치가 맞부딪치는 지점을 가리킨다. 치안과 정치가 부딪쳐 형성되는 선이 곧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테두리, 경계인 셈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의 이 관계를 ‘도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냥 지나 가시오! 여기에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통행 공간이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주체들(인민·노동자·시민)의 시위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성립한다. 정치의 출현과 함께 치안 질서는 순간적으로 와해되고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때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을 두고 그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정치와 치안의 관계는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에서 상술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감성의 분할)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치안은 ‘여기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감각·지각하는 일에서 어떤 특정한 질서를 고집한다. 반면에 정치는 여기에 볼 것이 있고, 할 것이 있고, 명명할 것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감각·지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정치 주제가 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써 듣게 만드는” 행위다. 그런 해방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종말이 없다. 공동체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치안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고, 그 치안의 질서는 어떤 식으로든 배제와 차별과 위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 치안에 대한 항구적인 불화의 과정이다. 그 치안과 정치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랑시에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0. 17.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대우학술총서번역 105)

P.S.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라는 구절 때문에 상기하게 되는 책은 요즘 잔뜩 벼르고 있는 모시스 핀리(Moses Finley)의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이다. 핀리는 '모제스 핀레이'라고도 표기됐는데(덕분에 알라딘에서는 따로 검색된다), 이 책 외에도 <고대 세계의 정치>(동문선, 2003), <서양 고대경제>(민음사, 1993), 그리고 편저로 <그리스의 역사가들>(대원사, 1991), <고대 노예제>(탐구당, 1983) 등이 더 소개돼 있는 고대 그리스 경제사의 권위자이다.

나는 <고대 세계의 정치>에 반해서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도 눈독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제일 먼저 고른 것이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인 것('모던 이데올로기'는 뭔가? 본문에도 그냥 '근대 이데올로기'라고 돼 있건만).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제는, 그간에 모든 노예제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너무 간과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요컨대, 노예제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핀리를 읽으려는 것은 그런 생각을 좀 보강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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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10-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한 서평을 쓰시네요^^ 너무 부러워요. 제가 오늘 헌책방에서 일을 하다가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란 책 한국번역본을 발견했어요. 완전 황금을 깬거죠. 리영희 교수님이 '대화'라는 책에서 추천하신 도서로 알고 있어서 꼭 읽고 싶었거든요. 역시나 저의 뜬금없는 댓글이지만 제가 여유분을 더 사놔서 혹시나 이 책이 필요하시면 얘기해 주세요^^ 제가 무료로 보내드릴께요. 노이에자이트께도 똑같은 말 써 놨어요. 주변에 이런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부담 갖지 마시고 혹시나 필요하시면 얘기해주세요. 물론 로쟈님은 이 책이 있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요^^

로쟈 2008-10-18 00: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고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에 들어있던 것 아닌가요? 황성모 교수의 번역으로 기억되는데요... 당장은 안 가고 있지만(아마도 박스에^^;) 덕분에 읽고픈 생각도 드네요. 고전은 나이 들어 읽게 되는 책들인가 봅니다(젊을 땐 고리타분하게만 보이더니)...

들사람 2009-01-16 22:36   좋아요 0 | URL
리영희 교수님 <대화>(p.523)읽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책 한 권 보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여분이 남아있으면 좋겠네요. 연락은 이리로 부탁드립니다. sohngs@gmail.com

루쉰P 2008-10-1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바로 그 책입니다. 1985년 판이에요^^ 제가 그걸 오늘 헌책방에서 발견을 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을 하시네요. 역시나 대단하세요. 근데 제가 욕심이 나서 이 책을 무려 6권이나 구입을 했거든요. 그래서 사자님하고 노이에자이트님, 소조님하고 로쟈님께 혹시나 필요하신지 물어보고 있어요^^ ㅋㅋㅋ 저는 책을 발견한게 너무 좋아서 지금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들어가서 계속 자랑하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퇴니스 이야기하시네요.하하하...정말 기쁘신가봐요.

루쉰P 2008-10-18 23:06   좋아요 0 | URL
^^ 이거 왠지 죄송스럽네요. 너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이죠. 근데 확실히 고수들만 계셔서 다들 이 책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전 이제는 자랑은 그만하고 독서를 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또 토요일이라서 밤을 세워가며 퇴니스를 읽어 볼 결심입니다. 흐흐흐 *-* 아 너무 흥분했나봐요. 뒷골이 댕기네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시몬느 베이유(1909-1943)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 2008)이 재출간됐다. 책의 제목은 그대로이지만 출판사와 표지는 바뀌었고, 그에 따른 것인지 저자의 표기도 '시몬 베유'로 변경됐다(나는 가급적이면 고유명사 표기를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애장하고 있는 책이니 관심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표지이고 품새이다. 이번엔 이렇게 나왔다(알라딘의 표지가 작아서 교보에서 빌려왔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어떻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번 표지보다는 조금 나은 듯도 하다. 지금은 절판된 사회평론판은 이런 표지였다. 더 나오지도 않을 책에 '사색1'이라고 붙인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한불문화출판판. 역자가 동일하므로 내용이 그다지 바뀌었을 성싶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수집가들은 순전히 '표지'만 가지고도 유혹받는다.

세 권의 이미지를 모아놓으니 신간의 표지가 나쁘진 않아 보인다. 한데 어떤 책인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시몬 베유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통찰을 묶은 책. 베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며 인간의 구원은 지성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게 해주는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생전의 베유가 남긴 노트를 사상적 동지였던 귀스타브 티봉이 발췌해 엮은 것으로 1943년 처음 출간됐다."라는 게 설명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 '중력과 은총'이란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영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영감 때문에 나는 자작 시집 한권의 제목을 '중력과 은총'이라 붙였더랬다(http://blog.aladin.co.kr/mramor/933104 참조). 역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력과 은총>은 제목 그대로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겨진 인간의 불행과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주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책은 중교적 수상록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이다."

'기독교적 비극성'에서 출발하지만 베이유의 기록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아포리즘은 이런 것이다. "사랑은 우리들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신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 또한 이러한 인간적 삶의 조건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중력과 은총>은 애장서로서 충분하다. 펴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책장 가까이에 두시길. 우리를 잡아끄는 삶의 중력 속에서도 은총의 빛을 잃지 않도록... 물론 가끔씩 들춰봐도 좋겠고...

0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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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n 2008-10-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Simone Weil의 한글표기 '시몬 베유'는 현행 국립국어원 외래인명 표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니랍니다.

로쟈 2008-10-16 20:59   좋아요 0 | URL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외래인명 표기법이 저로선 맘에 들지 않습니다. 고유명사는 원래 언어체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것인데, 일률적으로 짜맞추는 건 상식 밖입니다(폭력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sophia49 2008-10-16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시몬느 베이유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좋아요....
현행법이 그렇다하니...시몬 베유로 불러야겠네요..

로쟈 2008-10-16 21:01   좋아요 0 | URL
사람 이름 '개명'하는 걸 국립국어원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듯해요...--;

비로그인 2008-10-1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그 표기법일 때 시몬느면 여자, 시몬이면 남자라고 생각해왔는데 표기법이 바뀌어서 다시 헷갈리게 생겼네요;

로쟈 2008-10-16 21:09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도 표시했나요?.. '느'라고 늘려 발음하면 조금 우아하게 들리지 않나 싶어요...

hemiola 2008-10-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아름다운 제목이네요. 꼭 사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8-10-17 12:52   좋아요 0 | URL
그냥 꽂아두시기만 해도 됩니다.^^
 

교수신문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의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필자인 정혜숙 교수는 르 클레지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전문가'이다. 찾아보니 르 클레지오의 책으론 제일 먼저 나온,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읽은 <조서>(세계사, 1989)의 역자이기도 하다(해서 르 클레지오란 이름이 내게 제일 먼저 떠올려주는 건 '조서'와 '최수철'이다. 이 경우는 소설가가 아닌 번역자 최수철이다. 그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여러 권 번역했다). 다른 리뷰기사들 가운데는 '르 클레지오, 사라져가는 문명 증언한 ‘문학의 구도자’'(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00050295&code=960205)가 요점을 잘 정리해주고 있어서 참조할 만하다. 

진작부터 거장으로 평가받는 작가이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구도적' 경향의 작가들을 내켜하지 않는 탓이다. 그에게 붙여진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는 타이틀은 초점이 빗나간 듯하고, 영어(아버지)와 불어(어머니)에 모두 능통하지만 불어로만 쓰는 것을 고집한다는 그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프랑스어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노벨상 수상소감은 http://kr.youtube.com/watch?v=f2m78qBZPow 참조)...   

교수신문(08. 10. 13) 문명 속의 인간소외와 고독 응시한 투명한 감수성

장 마리 귀스타브 르 끌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ezio)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변의 아름다운 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니스의 태양과 바다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니스대학과 엑스 앙 프로방스대에서 앙리 미쇼와 로트레아몽 연구로 석사학위와 뻬르디냥대에서 멕시코의 유카단 반도의 마야 원주민 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대신 방콕의 불교대학에서 2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강의한 바 있고 최근에는 뉴 멕시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부분의 생활을 여행과 집필에 바치고 있으며, 프랑스 현대문학의 ‘살아있는 신화’라는 평을 얻고 있다.

23살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 『조서(Le Procs-Verbal)』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게 돼 프랑스 문단에 ‘젊은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 후 『열병』 ,『홍수』, 『물질적 환희』, 『사막』,『 황금 물고기』, 『우연』등 문제작들을 발표해 현대 프랑스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는 대중과의 접촉이나 언론매체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신비에 싸인 비밀스런작가다. 대중적인 인기에는 무관심한채 여행과 은둔 속에서 자기 완성의 길을 찾고자 하는 작가이다.



첫 작품 발표 당시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장에게 밝힌 바와 같이 르 끌레지오는 전통소설의 기법을 표방하지 않음과 또 1950년대부터 새로운 문학과 예술 기법으로 등장한 누보로망(Nouveau Roman)과도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그의 독자적인 창작입장을 밝혔다. 그의 문체는 알랭 조프로와의 ‘카메라-펜’이라는 평처럼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하며, 거울에 비치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단순하고 투명하며 시적인 언어로 육화한다.

“나는 만들어 내지 않는다. 나는 옮겨 쓸 뿐이다.” 그의 소설에는 다양한 소설기법들이 등장한다. 누보로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복법, 예언적 돈호, 상징과 은유, 꼴라주 기법, 기사와 시진의 이용, 연극과 영화기법, 문장 지우기 등의 방법으로 사물을 진실에 가까운 근본적인 의미표현에 접근하려 한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은 문명 속의 인간소외와 고독을 주제로 한다. 첫 작품에서부터 1980년의 사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의 거대한 폭력에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을 고뇌에 찬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첫 작품들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마련된 기나긴 조서이다.

23살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 『조서』에 나타난 주제들은 다음에 올 그의 소설들의 원형이 된다. 이 소설은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또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는지 모르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담 폴로는 전통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의 취향에는  맞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무정형의 무기력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들로 이뤄져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지중해의 어느 도시의 언덕 위의 빈집에서 혼자 햇빛을 즐기며 ‘괴물 같은 고독’ 속에 갇혀 산다. 유일한 여자 친구인 미셸 만이 가끔 그를 만나러 올뿐이다. 아담은 그녀와의 첫 포옹의 기억과 비 오는 날 나무 아래서 그녀에게 행한 성폭행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끔 그는 시내로 내려가 담배와 먹을 것을 사기도 하며 동물원에 들리거나 개를 쫓기도 한다, 걷는 동안 그는 세계가 끊임없이 들끓고 소요하며 소음을 내는 것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에게 낯설음을 주었고 그가 참여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는 무대 앞의 관객처럼 세계를 바라보고 그의 見者(Voyant)의 시선은 인간과 사물들이 서로 부딪치며 뒤엉켜진 혼돈의 세계를 투시한다. 그 세계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언덕 위 빈집에서 그는 삶과 죽음의 이중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광기는 아담 폴로에게 최후의 도피처가 된다. 경찰은 광장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외치는 그를 붙잡아 정신병원에 수용한다. 정신병동의 네 개의 벽, 소독된 방에 수용된 그는 드디어 그가 오랫동안 갈망했던 휴식과 평화 속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을 되찾게 된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랑스러운 여자와 산책하는 꿈과 환상들로 수놓인 자신만의 세계에 영원히 갇히게 된 그가 떠올리는 단어들 ‘어머니’, ‘가슴’, ‘배’, ‘구멍’, ‘조개껍질’, ‘바다’등의 이미지들은 모성적 공간의 다른 이름들이다.

르 끌레지오의 주인공들은 전통소설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누보로망의 주인공들처럼 익명으로 존재하며 그들의 공간 역시 익명이다. 그의 소설은 각각 독립된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의 여러 이름을 가진 여러 개의 목소리로 구성된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이 문명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 비극적인 세계를 떠돌다 도시의 혼돈 속에 소리 없이 소멸해 버리는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의 시선과 감수성이 읽어냈던 현대 문명 속의 비극적인 인간의 조건과 상황의 서술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들은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시기는 첫 작품 『조서』부터 1980년 『사막』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른 숨결로 발표한 작품들로 이뤄져있으며 일관된 흐름을 안고 있다. 작가는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거대한 폭력의 세계와 그 세계에 던져진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로서 이중의 역할을 안은 현대인의 초상을 통해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서를 작성하고 있다.

한편, 르 끌레지오는 현대의 상업주의와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가하는 소리 없는 그러나 숨겨진 거대한 폭력과 그런 상황이 만들어내는 고독한 현대인의 운명을 그렸다. 문명 속의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고뇌에 찬 시선으로 그린 르 끌레지오의 작품세계는 1980년 발표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쓴 소설’ 『사막 』을 기점으로 제2의 전환기를 마련한다. 푸른 두건의 남자들의 광활한 대지인 사막에서 태어난 랄라는 고향을 등지고 문명세계인 프랑스로 건너온다. 그녀는 많은 경험을 하게되고 마침내는 사진 기자의 눈에 들어 유명한 모델이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주었던 문명세계는 그녀가 진정한 삶을 누릴 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사막의 딸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바닷가의 무화과나무 아래 그녀의 첫 사랑이었던 목동의 아이를 낳는다.

이 소설 이후 르 끌레지오 자신도 인간의 잃어버린 실락원의 꿈을 찾아 문명세계를 뒤로한다. 현대인들이 오랫동안 잊어왔고, 잃어버렸던 공간의 빛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찾아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끝없이 수많은 여행을 한다. 마침내 시인의 혼은 긴 여정 끝에 남미의 인디언들에게서 경이로운 침묵의 언어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발견한다. 지금까지의 작가의 서사적인 세계는 서정성으로 탈바꿈한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제 어린아이, 떠돌이 방랑자이며 도시적 공간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간인 자연과 바다가 무대가 됐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그의 모든 시적 영감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어린아이는 빛 아름다움 순수 투명한 새벽 그 자체이며 신의 모습의 재현이다. 어린아이는 복잡한 비밀로 얽힌 세계의 문을 아무런 장애 없이 열며, 세계와 직접적이고 완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며 하늘과 땅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자연과 어린 시절에의 귀환은 황금시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과 자유에의 복귀를 의미한다. 어린아이의 무소유, 인디언들의 침묵의 언어, 자연, 이것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가치의 힘과 단순한 삶의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르 끌레지오는 무소유의 기쁨과 방랑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과 자연 속에 인간과 태양과 동물들이 한 리듬으로 어우르며 사는 단순한 삶의 기쁨, 자연에의 귀의를 권유하며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인 자연, 녹색 낙원으로의 귀환을 재촉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이루고자 하는 지상에서의 자유롭고 행복한 진정한 삶의 약속이다. “지상의 삶은 그 어떤 꿈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다(La vie terrestre est plus surprenante que n’importe quel rve).”(정혜숙 전남대·불문학)

08. 10. 14.

P.S. 경향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면, "스웨덴 한림원은 “르 클레지오가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며 “그는 인간성 탐구와 관능적 환희, 시적 모험, 새로운 출발 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1980년작 <사막>에 대해서는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북아메리카(*북아프리카)의 잃어버린 문화가 잘 그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또 40개의 작품 중 <사랑하는 대지> <도피의 서> <전쟁> <거인들> 을 주요작으로 꼽았다." 20여편에 달하는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사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작품은 빠져 있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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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1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사막>은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새 옷을 입고 그대로 다시 나왔군요. 인터넷 서점에서는 품절상태였고, 가끔 서점 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노벨상 특수덕에 다행입니다.

로쟈 2008-10-15 17:08   좋아요 0 | URL
네, 그런 효과가 있지요. 서점에서 따로 전시도 해주고...(대학서점 같은 곳에서만 둔감하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도적 경향이란 불교 소설에 많이 나오는 그런 분위기를 말하는지요? 클레지오가 화순 운주사를 방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 취향과 관계가 있나 해서요.

로쟈 2008-10-16 21:31   좋아요 0 | URL
네, 그의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태도에서도 묻어나는데, 소설을 쓰는 선사를 연상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