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함께 그의 책 <가비오따쓰>(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재출간을 기념하는 뜻인 듯하다. 지난주 서점에 깔린 <가비오따쓰>가 재출간 도서(월간 말, 2002)라는 건 알았지만 역자가 생태공동체운동가인 황대권씨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마침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저자와 역자, 두 사람의 대담이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0. 27)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 산 증거”

‘가비오타스(Gaviotas)’는 콜롬비아 동부 야노스의 오지에 있는 작은 생태공동체다. 그러나 인구 200여명의 조그만 마을이 일으킨 작은 기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비오타스인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불모의 땅에 열대우림을 부활시켰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또 수경재배법을 통해 채소를 자급자족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시하며 구성원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가비오타스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로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책이 <가비오따스>(랜덤하우스)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61)은 가비오타스인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환경을 손상시키는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도발적인 상상을 통해 오늘날 ‘인간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통찰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가비오따스> 재출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를 <가비오따스>의 번역가이자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씨(53)가 지난 24일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황대권=<인간 없는 세상>은 DMZ(비무장지대)가 모티브였다. DMZ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앨런 와이즈먼(이하 와이즈먼)=같은 민족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이를 뚫고 새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한때 폐허였던 곳이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의 DMZ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DMZ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 DMZ 보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립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대권=나는 <야생초편지> 등을 통해 전통적 농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야생의 풀을 식량으로 삼고 야생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와이즈먼=그렇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전통적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 물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한다. 20세기 농업 기술은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빈곤층도 20세기에만 4배가 늘었다.

황대권=이 시점에 <가비오따스> 출간 10년을 놓칠 수 없다.

와이즈먼=<인간 없는 세상>이 제목처럼 ‘우리가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 대한 얘기라면 <가비오따스>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주는 교훈이 필요하다.



황대권=10년 동안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어떻게 변했나.

와이즈먼=가장 중요한 것은 가비오타스가 콜롬비아의 극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비무장 공동체인데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야자나무를 심어서 지속가능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연료를 위해 숲을 밀어버리지만 가비오타스는 기존 숲과 함께 야자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의 토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황대권=가비오타스가 자급자족 공동체지만, 생산물을 바깥 세계에 파는 구조여서 예측하기 힘든 세계 경제에 의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리면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가 커지는 것만을 위한 성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 크기를 키우는 성장을 번영이라고 했다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비오타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사례다. 지속가능성에 가장 가까운 생태공동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그것이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재활용되도록 노력한다.

황대권=한국에도 생태공동체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생태공동체 운동의 현황은 어떤가.

와이즈먼=미국에는 LA 한가운데에 커다란 생태공동체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저렴하게 살면서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비자가 생산자의 영농을 미리 지원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는 것)가 확산되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위기와 심각한 대기 오염 등으로 인해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황대권=좌우 대립이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봤다. 가비오타스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또 모든 이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운동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연구하고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 책에는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 성공한 이유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도 단지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

황대권=세계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 한 발 다가가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금융위기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말한 대로 어떤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더 이상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는 수많은 재앙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우리가 지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누구?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퍼’ ‘뉴욕타임스’ ‘애틀랜틱먼슬리’ 등의 매체와 미국 국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글을 기고해왔다. ‘LA타임스’ 객원편집위원을 지냈다.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꼼꼼한 현장 취재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써왔다. 지난해 펴낸 <인간 없는 세상>으로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20개국에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08.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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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현실에 어두운 한국의 경제학자들 얘기를 옮겨놓고 보니 조금이라도 위안거리가 없을까 찾게 된다. 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송기호 변호사의 책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2008)에 눈길이 간다. 저자는 알다시피 지난 촛볼 정국 때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프레시안에서는 우석훈씨의 발문을 옮겨놓았는데, 그걸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6155813). 생각해보니 곱창 전골을 먹어본 지도 오래됐다. 오늘처럼 좀 쌀쌀한 날씨엔 딱 좋은데, 어쩌다가 그런 사소한 즐거움도 포기하게 되었는지...

프레시안(08. 10. 26) "송기호는, 대한민국의 '에이스'다"

송기호 변호사가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펴냄)을 펴냈다. 송 변호사는 이 책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추종한 결과 우리의 농업, 먹을거리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를 고발한다. 송 변호사가 고군분투하며 막으려고 애를 썼던 한국 정부의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그 결과일 뿐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평화를 해치는 차별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북돋는" 통상법이 가능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지난 촛불 집회는 이런 통상법을 향한 시민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줬다. 송 변호사가 이 책을 다음 이들에게 받치는 이유이다.
  
"이 책이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을 바로잡는 정당한 활동을 하다가 부상당하고 연행되고 수배되고 처벌받은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특히 2008년 9월 9일 서울 조계사 앞에서 회칼에 피습을 당하신 분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큰 충격을 받았을 가족에게도 깊은 위로를 드린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주저앉는 소의 도축을 완전히 금지하는 입법예고를 하는 데 이바지한 <PD수첩>에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나는 허물 많은 신앙인의 한 사람이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의 '발문' 전문이다. <편집자>

송기호는, 나의 벗이다
  
나도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알거나 친구를 사귀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직장 시절부터 나는 '친구'와 '적', 이렇게 두 부류만으로 주변이 구성된 듯한 삶을 산 것 같다. 현대, 에너지관리공단, 총리실, 이렇게 안정된 직장들에 다니던 시절에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나는 하극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의 상사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예의는 갖추었지만 거침없이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적과 아주 약간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대인기피증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깊은 교류를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로 내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하기가 무섭다. 좌파로 살아온 사람들은, 크든 작든 나와 유사한 대인기피증을 삶의 증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녹색당 창당 운동을 포기한 채 더 이상 활동가가 아니던 시절, 그래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조금씩 가르치고 글을 쓰던 시절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두 번의 직업 활동가로서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유학 가기 직전,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또 황당한 정부를 만나서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고 글을 쓴 걸 보면 나도 곱고 편하게 산 편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스무 살 넘어서 싸운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 편에 담고, 되도록이면 명랑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또 웃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 편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그렇게 내가 초록정치연대의 정책실장으로, 직업 활동가로 일종의 정치운동을 하던 시절에 국회 토론회장에서 내 앞의 발제자로 처음 만났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일부러 누가 짠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토론회의 발제자로 여러 번 나서게 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정부에서 주관한 토론회에 역시 앞뒤 순서의 발제자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송기호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내가 등을 기대고 쉬는, 거의 유일한 벗이고 동지인 셈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법률적 분석까지 떠맡아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이것저것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송기호 덕분이다. 그는 유능하고, 진지하고, 꼼꼼하다. 이 세 가지 전부, 내가 갖추고 있지 못한 덕목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무능하고, 장난기와 짓궂음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덜렁덜렁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형이고, 법학과 경제학 이 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와 내가 같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식품은 안전해야 한다, 그리고 농업이 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점이다.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학문으로, 그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각각 진화해왔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그는 농업이라는 문으로 들어왔고, 나는 생태학이라는 문으로 들어왔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쌀나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서울 내에서만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서울 밖에 나가본 완전 '서울 촌놈'이다.


  
우리 모두는 송기호에게 빚지고 있다

송기호의 눈은 언제나 농업에 가 있는데, 나는 솔직히 농민보다는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과 같이 소위 '농업 생태계'에 먼저 눈이 가고, 그 후에 농민들을 보는 편이다. 송기호의 눈은, 나와는 달리 농민들을 먼저 보고, 그 후에 농업을 보는 것 같다. 그 차이점은, 우리가 걸어왔던 다른 길만큼이나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생겨난 농산물들이 유통을 거쳐서 소비자에게 넘어가는 식품안전이라는 단계에서, 나와 송기호는 서로 등을 대고 지난 정권을 버텨왔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에서 최초로 '농업 포기 정책'을 공식화시켰고, 그 정권 내내 나와 송기호는 "농업이 뭐 그리 중요하냐?"라는, '타칭 좌파'―한나라당이 그렇게 불렀다―혹은 '자칭 진보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며, 그 포위를 끝끝내 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정권이 바뀌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빠른 시점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문제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는 중요한 변곡점 하나를 넘었다. 그 변곡점의 최정점에 바로 송기호가 서 있었다. 그 유명한 <100분 토론>에서의 미국 농림부 서류의 오역 사건에서부터, 농림부 장관 고시의 오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송기호가 집어낸 것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공화국의,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양아치들의 난장판 사건에 대한 거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단단히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믿어라, 그리하면 쇠고기는 안전해질 것이다"라고 외치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쇠고기는, 어쩌면 다가올 한국의 비극에 대한 예비자, 마치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협상 문헌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고사하고, 원문 번역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믿어라, 국민들아!"를 말하는 현실. 이 우울한 현실은 송기호의 손에 의해 하나씩 벗겨져 나갔고, 그 진실이 발가벗고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났을 때, 내가 협상가로 참여하던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우리나라 행정 자체가 그렇고, 협상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 진행되는 많은 정책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엄청난 파국 앞에 혼자 서 있던 사나이, 그가 바로 송기호였다. 그가 보여준 현실의 드라마는 위대한 문학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송기호는, 한국의 에이스다
  
한국이 거대한 야구단이라고 한다면,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혹은 고려대학교 교수님들의 그룹은 2부 리그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학문적으로는 20~30년 전에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시민 야구단에서는 강속구를 뽐낼 수 있는, 그런 2부 리그이다. 그렇다면 공무원 집단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한국 야구팀의 에이스는? 류현진이다. 그는 카스트로도 감탄할 정도로, 세계 최강의 쿠바팀에도 '지대로' 통하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다. 정말 감탄스러운 투수이다. 그렇다면 진짜 한국의 에이스는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도전하겠다는 시인 고은인가, 아니면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된 적이 있는 시인 김지하인가? 아니면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는 엄청난 공로를 세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의 에이스인가? 아닌 듯싶다.
  
제대로 된 연봉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팀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혹은 관객들이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해 한국에서 위기의 한국을 구해내고 다음 번 등판을 위해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은 등판을 기록한 투수는 바로 송기호다. <100분 토론>을 비롯한 빅 매치들, 신문을 포함한 매체에 대한 기고, 그리고 실제 만루 위기를 병살타 처리한 깔끔한 명투구를 가장 많이 기록한, 한국의 실질적 에이스는 바로 송기호이다(이에 비하면, 나는 8점차 이상 차이 난 경기에서 패전 처리로나 가끔 등판하는, 꽈배기 변칙 좌완이다.)
  
그런 송기호가 맹활약했던 지난 게임에 대한 복기의 기록을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선보인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어지간해서는 복기를 하지 않고 "진 것은 잊어버려" 혹은 "다음 게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하는 좀 나쁜 습관이 있다. 진 게임이나 이긴 게임이나, 어떻게 졌고 어떻게 이겼는지를 잘 복기해서 분석하는 것은 에이스가 되는 투수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습관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 중 송기호처럼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고, 좋은 분석을 하면서 토론에서 절대로 소리 지르지 않고 상대방을 케이오시키는 게임을 하고 싶으신 이가 있다면, 한국의 에이스 송기호의 복기본을 잘 분석해보시기 바란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재미를 위해서나 감동을 위해서나 혹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송기호가 펼쳐 보인 지난 촛불 정국의 분석은 감동스러운 드라마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흔히 말하듯 "팬들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말하듯 "죽도록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다. 조용하지만, 그는 한국 최고의 승부사이고, 또한 최고의 국제 통상 분석가이다. 송기호는 통상 조문과 법적 절차를 분석하지만, 제발 여러분들은 송기호를 분석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팀을 꾸릴 만한 송기호 급의 에이스가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내 리그나 해외 리그나, 전혀 꿀림 없이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좋은 선발 투수 혹은 좋은 수비수들이나 의미 있는 진루타를 칠 수 있는 선발 선수들이 독자 여러분 중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명박 시대의 어둠을 딛고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을 펼쳐볼 수 있을 것 아닌가?(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88만 원 세대 저자)

08.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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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8 17:33   좋아요 0 | URL
농업보다 농민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그러기가 쉽지 않죠.인류보다 인간 개인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듯이.

이중결합 2008-10-28 20:27   좋아요 0 | URL
'역사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한다'는 비유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0-28 22:55   좋아요 0 | URL
'송기호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난주초에 시사IN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2#). 금융 위기와 함께 불황 국면으로 접어든지라 경제와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한국 대학에는 한국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기사다. 이유는? 연구업적을 평가받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을 실어야 하고 그러자니 주로 그쪽 경제학의 이슈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다들 자기 자리 보전하기도 바쁘다는 얘기다). 경제 호황기라면 으레 그려려니 하겠지만,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제법 한심하게 보인다. 사실 다른 분야에도 '한국 학문'이 있느냐고 하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지만서도... 

시사IN(08. 10. 21) 한국 경제학계에 ‘한국경제’ 학자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경제학은 그렇게 무력하냐고”(복거일, 10월13일 조선일보 칼럼), “시장 만능을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에 숨었나”(이정우, 9월30일 한겨레 칼럼) “배반의 경제학”(김순덕, 10월10일 동아일보 칼럼).

미국발 금융위기로 신뢰를 잃은 것은 투자은행만이 아니다. 사회과학의 꽃이라던 경제학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느냐며 질타하는 목소리가 보수·진보 모두에서 나온다. 이런 비판은 특히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 경제학계에 대한 실망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경제학계는 한국 경제학계에 비하면 체면을 세울 만하다. 10월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55)를 선정했다. 폴 크루그먼은 2000년 1월부터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해왔다. 이미 2005년에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미국 경제위기를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연일 블로그·인터뷰 등을 통해 미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대폭로> 등 그가 쓴 수많은 대중 경제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비판적 지식인’에 가깝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틀 전 조선일보는 “경제가 대공황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학계에서 무슨 체면으로 누가 노벨상을 받을 것인가, 받은들 그 따가운 눈총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칼럼을 게재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폴 크루그먼을 선정해 그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폴 크루그먼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한국에도 화제가 됐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긍정하는 케인지언 학파가 부활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민주당은 크루그먼을 빌려 ‘MB노믹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크루그먼은 감세 정책과 규제완화 정책을 비판해왔다. 기실 크루그먼이 노벨상을 받은 명목은 ‘신무역이론’ ‘무역이론과 경제지리학의 통합’에 관한 공로다. 부시 비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곱씹어봐야 할 것은 경제학자의 사회적 역할일지도 모른다. 

“한국 현실 경제 연구자, 존중받지 못해”
금융위기에 경제학자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비난이 높지만, 여전히 미국 경제 담론을 이끄는 것은 경제학자이며 특히 대학 교수들이다. 뉴욕 대학의 루비니 교수(<시사IN> 제54호 참조)가 좋은 예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7). 그는 과거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도 정확히 예언한 바 있다. 그는 매일같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58쪽 상자 기사 참조) 방송에 출연해 경제 위기 대책을 설파한다.

부시 대통령이 처음 구제금융법안을 의회에 상정했을 때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미국 경제학자 166명이 반대 서명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신속히 서명을 받은 것도 놀랍고 대부분 대학 교수인 것도 눈에 띈다. 미국 정부의 은행 국유화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교수들이 주도한다. “공적 관리는 손익계산에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의 방침은 경제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틀렸다”(케이시 멀리건 시카고 대학 교수) “영국처럼 은행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이 옳다”(폴 크루그먼)라는 식이다. 

한국 경제학계의 경우,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나 위기 탈출구를 제시해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한국 경제의 현안이 주류 학계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일간신문 경제부 기자인 ㅇ씨는 요즘 연일 쏟아지는 경제위기 기사를 쓰느라 바쁘다. 그는 “경제 전문가 조언을 구할 때, 대학교수 말보다 차라리 삼성경제연구소를 인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대학교수가 해야 할 몫을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인 경제학자 중에 경제 현안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집단에 관한 연구로 한국 사회 변화에 큰 울림을 준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라든지,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88만원 세대’ 담론을 처음 제기한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했던 이준구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장하준 교수는 서울에서 9000km 떨어진 영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학계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학자가 한국 경제학자보다 더 자주 인용된다.

김상조 교수는 “미국은 학풍이 다양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폄하할 수 없다. 한국에도 현실 문제를 연구하는 교수가 꽤 많다. 미국도 폴 크루그먼 같은 비판적 경제학자는 소수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경우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를 때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색깔론’으로 몰아붙인다.

홍훈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현실을 말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학계의 중심에 있거나 이런 내용이 연구나 교육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학 연구와 교육이 한국 경제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학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욱 적다”라고 경제 학계의 풍토를 전했다.



홍훈 교수가 2007년 발표한  논문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변화와 한국학계의 수용(1960 ~2006년)>은 경제학계의 자화상을 뼈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논문은 말한다. “한국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해외 학계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달리 말해, 한국의 경제학은 한국의 경제와 지속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로 자처하기 힘들다.”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의 연구일수록 외국 학술지를 지향해 한국 경제의 현실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서울대 교수들이 대표 사례가 될 듯하다.  한국 언론이 가장 인용하기 좋아하는 서울대 경제학 교수진은 어떤 모습일까. 전체 31명 교수 가운데 29명(94%)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이 중에 젊은 교수일수록 그의 논문 목록에서 한국 경제와 관련 있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 경제학계 내에서 한국 고유의 경제 문제, 즉 재벌, 아파트·부동산, 세금 정책 등이 논쟁이 되는 일이 드물다.


 
미국 학술지 논문 게재가 최고 목표

왜 이럴까? 부교수·정교수 승진 등에 필요한 연구 업적 평가의 기준이 해외 SCI급 저널에 실린 논문 횟수이기 때문이다.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3~5배 이상 높은 점수를 받는다.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젊은 교수 처지에서는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것보다  미국 현안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연구해야 할 동기부여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드물게 나오는 한국 경제 관련 논문조차 미국적 방법론을 숫자만 바꿔 한국에 대입한 경우가 많다.

폴 크루그먼은 올해 6월 쓴 칼럼에서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신 여론 가운데 일부는 비합리적인 면이 있지만, 쇠고기 문제는 볼썽사나운 미국 외교에 모욕당했다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뒤엉켜버렸다. 한국인을 비난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어느 한국 경제학자가 쓴 미국 쇠고기 칼럼보다 이 짧은  문장이 더 화제가 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기자들이 한국 경제를 알기 위해 외국 경제학자에게 물어봐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신호철기자)

08. 10. 26.

P.S. 경제 현안과 관련해서는 강단 경제학자들보다 인터넷 시민논객들이 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젠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10. 25) 경제학자 뺨치는 ‘인터넷 스타 논객’

금융당국이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인터넷에선 경제학자를 뺨치는 시민 논객들이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 논객은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다. 미네르바는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 8월 말 아고라에 산업은행이 인수하려던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부실화를 정확히 예견한 글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그는 쉬운 경제이론과 통계 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정부의 잘못된 경제 예측과 처방,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글은 수만 건의 조회를 기록하고,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삽시간에 퍼지면서 경제 관련 토론을 위한 ‘필독 항목’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미네르바 신드롬’ ‘미네르바 효과’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미네르바는 9월 중순 “1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아고라로 돌아와 하루 5개 이상씩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외환시장 대책과 관련해 22일 “최소 500억~ 700억달러 규모의 외부 달러 차입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며“이제 남은 것은 일본 달러 공수뿐”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했다.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인 <한토마>에서도 스타 논객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논객으로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SDE’, ‘명사십리’와 <한토마> 토종 논객인 ‘삼성해체’ 등이 있다. 거시경제 전망을 주로 하는 ‘SDE’는 “앞으로 지엠, 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의 부도-유럽 은행의 부도-미국 지방은행의 부도-한국 저축은행·건설회사·캐피탈사 유동성 위기-한국 외환부분 신용 위기 등 9가지 위기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삼성해체’는 주로 ‘금융위기에 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글을 쓴다. 그는 최근 <한토마>에 올린 글에서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있는 서민이라면 빨리 달러로 바꿔야 한다. 지금 막차라도 타야 하는 이유는 ‘자산보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권유했다.

김상종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시민 논객의 등장은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이 건설경기 부양 등 특정기업과 ‘강부자’를 위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며 “시민 논객의 분석이 정부정책보다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이상 ‘미네르바’ 같은 시민 지성은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종찬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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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6 16:01   좋아요 0 | URL
외환위기 때문에 외국의 핫머니까지 급전으로 가져다 쓴 직후인 1998년 봄 당시의 시사월간지를 보니 외환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한국지식인의 죄 운운하는 기사가 있더라구요.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군요.

로쟈 2008-10-26 19:24   좋아요 0 | URL
변한 게 없으니 반복되는 거겠죠...

루쉰P 2008-10-26 16:15   좋아요 0 | URL
정말 문제가 크네요... 어떻게 한국 경제문제에 대해 같은 땅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일까요. 황색 피부, 흰 가면을 쓴 우리나라 경제 교수들이 문제군요. 도대체 한국 경제에 대해 배울려면 누구 책을 봐야 할지 참으로 문제네요. 흠...그렇다면 로쟈님의 추천대로 '아고라'의 미네르바님을 찾아가서 한국 경제의 해답이란 무엇인가를 구도를 해야겠네요. 음하하하

로쟈 2008-10-26 19:25   좋아요 0 | URL
네, 학자들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면 안됩니다...^^;

비로그인 2008-10-26 21:04   좋아요 0 | URL
이 글 담아갈게요.

로쟈 2008-10-26 21:42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수정했습니다...

바보 2008-10-28 09: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 담아갈께요. ㅇㅇ

로쟈 2008-10-28 23:03   좋아요 0 | URL
^^
 

부제가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론의 역사'인 책이 있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나남출판, 2008)인데,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학술적 가치는 인정받는 책이겠으나 손에 들기는 어려워 보이는 책이다. 교수신문의 서평에서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8317x). 하지만 대략의 윤곽을 따라가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중에 관심있는 장만 선별해서 읽어볼 수도 있겠고. 일단은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8. 10. 20)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되면서, 지난 수천 년 동안 다분히 이질적인 개념으로 간주돼왔던 시간과 공간은 수학적으로 동등한 특성을 지닌 하나의 가족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시간과 공간은 “통일이 돼도 크게 해될 것 없는” 유사한 개념이 아니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통일돼야만 하는” 하나의 좌표세트였던 것이다. 그 후로 이론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굳이 구별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의 추상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유추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학문을 떠난 현실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동일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에게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은 딱히 존재하지 않지만, 공간을 지각하는 기관은 다양하게 발달돼 있다. 또한 시간의 이동은 인간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고 거시적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공간의 이동은 개인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물론 지구 근방에 한해)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으며,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는 동선은 경험과 의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제아무리 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좌표계로 간주한다 해도, 우리의 뇌리 속에는 시간보다 공간을 우선시하는 ‘공간 편향적 비대칭’이 존재한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Concepts of Space)』은 인류가 공간을 인지하고 분석해온 역사를 포괄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 철학사조와 유대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공간개념을 설명하는데 거의 1/3 이상을 할애하고 있어서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가 다소 무색한 감이 있지만, 절대공간이 물리학의 주 무대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이다.

공간은 모든 만물을 담고 있는 상자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사물의 ‘위치적 성질’에 불과한 것인가. 전자가 맞다면 물체가 없어도 공간은 존재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물체가 하나도 없는 공간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는 후자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였던 뉴턴은 물체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모든 운동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필요했고, 거기에 신의 속성을 닮은 ‘절대성’까지 부여했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소박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해 머나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을 일종의 ‘장소’개념으로 간주해 등방성과 균질성을 부정했고, 그의 사상은 근 2천년 동안 서양의 공간개념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철학자 텔리시오가 “공간은 물질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간의 균질성을 옹호했고, 파트리티우스는 이것을 더욱 구체화시켜 “공간은 실체나 물질성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추상적 세계에 머물러있던 공간은 수학적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후 피에르 가상디와 토마소 캄파넬라 등에 의해 균질적이고 무한한 공간의 개념이 정립됐으며, 이것이 뉴턴에게 전수돼 고전물리학의 근간인 절대공간의 개념이 탄생한다.

뉴턴의 첫 번째 운동법칙, 즉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절대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지상태와 등속운동상태가 구별되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절대공간뿐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절대공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그 유명한 ‘회전하는 물통실험’을 제안했다.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놓고, 밧줄이 충분히 꼬일 때까지 물통을 서서히 돌린다. 그 후 물통을 쥐고 있던 손을 가만히 놓으면 꼬인 밧줄이 풀리면서 물통이 회전하게 되고 평평했던 수면은 원심력에 의해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곡면이되는데, 이 현상은 물통과 물 사이의 상대운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즉, 가속운동이야말로 절대공간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절대운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도 허점은 있다.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우주공간에서 물통을 돌려도 수면이 오목해질 것인가. 수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것은 절대공간에 대한 운동 때문이 아니라 우주에 분포돼 있는 질량의 분포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천체들이 지금과 다르게 배열돼 있다면 오목해지는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으며,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텅 빈 우주에서는 회전하는 물의 수면이 아예 평평하게 유지될 수도 있다(이것이 바로 마흐의 원리이다). 버클리와 마흐,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 등은 절대공간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현실세계를 너무나 정확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과학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던 당시의 풍조에 잘 부합됐으므로 한동안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돼 왔다.

저자는 절대공간의 개념이 상대성이론의 휘어진 시공간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章을 통째로 할애했다. 다른 대부분의 교양과학서적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이 상대성이론 때문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권좌에서 밀려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뭇매를 맞아가며 서서히 와해됐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오일러와 칸트 등에 의해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일반상대성이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마흐의 원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았으며, 19세기말에는 절대공간의 상징인 에테르의 관측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이 상황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하면서 말끔하게 정리됐고,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리만 기하학의 n-차원 다양체로 대치됐다. 공간개념은 1920년대에 등장한 양자역학에 인식론적 해석에 의해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고, “공간은 왜 3차원인가”라는 근본적질문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됐지만 아직 이렇다 할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공간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 책의 초판은 1954년에 출판됐고, 1992년에 확대개정판이 나오면서 지난 40년 동안 공간문제와 관련해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상이 여섯 번째 장으로 추가됐다. 여기에는 그 동안 초판에 가해졌던 비난이 부분적으로 해명돼있으며, 1960년대 이후의 물리학을 비롯해 공간의 차원을 파격적으로 늘인 초중력이론과 초끈이론도 소개돼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의 전반부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야머의 뛰어난 분석력과 박학다식함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머는 최신물리학에 철학이 결여돼 있음을 넌지시 비치면서, 물리학이 공간의 철학적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는 희망은 철학이 공간의 물리학적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허황하다는 단언으로 끝을 맺는다.

유대교적 공간개념도 하나의 장(제2장)에 걸쳐 소개돼 있는데, 책의 머리말을 쓴 아인슈타인조차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언급을 회피했다. 유대교의 철학이 공간의 변천사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특정 종교관을 심각하게 다룬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물리학이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도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다가 중간쯤 가면 아예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고, 끝 부분에 가면 백과사전 한 권을 독파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자는 막스 야머의 방대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각 장마다 역주를 정성껏 달아놓았다. 본문의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것도 가능한 한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역자의 배려일 것으로 짐작된다. 공간을 한 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기도 어려운데, 야머는 이것을 역사, 철학, 종교, 물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막강한 지식을 자랑하며 단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독자의 생각까지 첨가됐을 때 콘텐츠가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오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 -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과 집중력, 상상력,이해력에서 모두 A+를 받기에 충분하다.

08. 10. 25.

P.S. 서평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 책의 머리말은 아인슈타인이 썼다. 소개 페이지를 보니 이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야머 박사의 책은 공간개념이 고대와 중세에 차지했던 지위를 연구하는 데 크게 중요하다. 그는 연구들에 근거해서, 근대적인 (1) 유형의 공간개념이 르네상스 이후에야 비로소 발전되었다는 견해로 기울어진다. 그 개념은 공간을 모든 물질적 대상을 담는 상자로 여긴다. 내가 보기에 고대인들의 원자론은 원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2) 유형의 공간을 전제해야 했던 반면에, 세력이 더 컸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학파는 독립적(절대적) 공간이라는 개념 없이 잘 해나가려고 했다. 신학이 공간개념의 발전에 끼친 영향들에 관한 야머 박사의 견해들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관심을 분명히 불러일으킬 것이다."

흥미로운 건 아인슈타인의 그러한 평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막스 야머가 <아인슈타인과 종교>(1999)라는 책까지 썼다는 점이다. 부제는 '물리학과 신학'.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신학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야머는 이를 막바로 다룬다. 살아있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한편, 현대 물리학이 함축하는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스 라이헨바하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서광사, 1986)이 유명한 저작이(었)다(하지만 수학에 어두운 내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현재 철학아카데미 원장인 이정우씨의 작품이다. 아마도 대학원시절에 번역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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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링 2008-10-25 19:50   좋아요 0 | URL
이런 책 완전 제 취향이에요~

로쟈 2008-10-25 20:26   좋아요 0 | URL
관심분야신가 보군요.^^
 

작년초인가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보고 이 주제의 책들은 실용서나 처세서 정도로 치부하는 편인데(그나마 인문학에서 돈 된다고 하는 쪽이다. '스토리텔링'과 '콘텐츠'는 금박 입은 단어들이다), 제법 유혹적인 책이 출간됐다(하기야 이 서재도 많은 이들에겐 그냥 '실용적인' 도서 정보 제공처이겠지만).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 2008). 이름이 생소한 저자보다는 역자가 더 눈길을 끄는데, <내 이름은 김삼순>을 연출한 김윤철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번역이다. 아마도 한예종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책인 모양이다. 그런데, 유혹적이라고 한 건 이 책이 스토리텔링의 비밀 전수서로서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입문서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원저의 제목이 '시나리오작가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시학>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런 아이디어쯤은 다들 가져봤을 것이다. 단 저자인 티어노는 그걸로 책 한권을 써냈다는 점이 차이다. 일반독자들이 <시학>을 접할 수 있는 유익한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10. 25) 시나리오 작법의 비밀 알려줄까요

방송가와 영화판 언저리에 작가 지망생 집단이 형성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누군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야기의 끈을 잡아채려 시간을 톺고 있을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몇 달 씨름 끝에 완성한 금쪽같은 대본에 내려진 주변의 혹독한 평에 좌절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관객이 감동하는 이야기를 쓰는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속삭이는 책이다. 그 비밀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에 담겨 있다. 알고 보면, 이 2천년도 더 묵은 책 <시학>은 이 시대 드라마 생산공장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공공연한 시나리오 작성의 바이블이다.

할리우드의 스토리 분석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클 티어노가 쓴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밑줄 삼아 할리우드산 명작 영화들을 조목조목 분석해놓은 작법 지침서라 할 수 있다. 글쓴이는 단언한다. “위대한 영화를 분석해 보면,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감독은 관객들이 어떻게 드라마에 반응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시학>은 바로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극적인 이야기 구조의 근본 요소를 꼼꼼히 적시하고 있는데, 그 극적 구조의 비밀 문을 여는 제1의 열쇳말은 이렇다. “이야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좋은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서 일하고, 시원찮은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극적인 이야기 구조란 무엇인가. 글쓴이 티어노는 이를 풀어내기 위해 ‘액션 아이디어’라는 용어를 꺼내놓는다. 굳이 풀이하자면 ‘플롯화된 이야기 개요’라고 할 수 있는 이 용어를 통해 글쓴이는 이야기(=드라마)는 액션, 곧 행동임을 일러 준다. <시학>은 이야기는 반드시 행동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행동은 인물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극적 행동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영화 <조스>는 식인 상어를 막으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요컨대 <조스>라는 전체 이야기가 딛고 서 있는 아이디어는 바로 식인 상어를 막는 일, 그 행동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 플롯을 짜는 능력 또는 강력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구성보다 대사나 성격 묘사에 능한 것은 초보자들이지 좋은 작가가 아니다. 나아가, 이야기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려면 어떻게 써야 하나? <시학>의 대답은 행동의 극적인 통일, 곧 플롯의 통일이다. “이야기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반드시 하나의 전체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단일하게 통일된 플롯은 이야기 속 사건들이 서로 개연적인 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존재하게 한다. 어떤 사건이 들어 있든 들어 있지 않든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꼭 필요한 게 아니므로 과감히 빼라는 얘기다. 인과관계로 연결된 사건을 통해 하나가 된 플롯은 바로 한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내며, 중요한 것은 그 플롯 행동이 주인공의 가장 깊숙한 욕망과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일된 플롯이야말로 이야기의 목적이라고까지 설파하는데, 이는 관객의 감정이입 혹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플롯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관객의)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일어나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일어난다. 주인공의 운명 변화에서 그 원인은 악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과실(착오나 실수)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극적인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주인공이 일으키거나 주인공이 연루돼 있는 ‘비극적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비극적 행위는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차가운 대서양 얼음바다에서 로즈(케이트 윈즐릿)를 구하기 위해 널빤지를 밀어올려준 뒤 죽는 일이다.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실수는 코모두스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일어나며, 막시무스는 이 ‘과실’로 말미암아 가족을 잃고 노예가 되고 끝내 죽음에 이른다.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 레스터(케빈 스페이시)는 삶이 아름다우며 그 순간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총을 맞는 것이다.(허미경 기자)

08. 10. 25.

P.S. 소설가 박민규씨의 추천사는 이렇다: "여기 마이클 티어노가 전하는 <스토리텔링의 비밀>이 있다. 이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당신을 연결해줄 가장 쉽고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축구는 축구선수들에게 맡기고, 타고난 당신의 재능 위에 이천년 이상 역사를 장악해온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탑재하라. 티어노의 말처럼 할리우드라는 원형 경기장에 뛰어나가서도 당신은 두 팔을 벌리고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덤벼,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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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26 00:05   좋아요 0 | URL
헤...막시무스다...

로쟈 2008-10-26 00:48   좋아요 0 | URL
'다 나와!'란 대사는 요즘 많이들 입에 물고 다니실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