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세계화시대 언어의 운명과 관련한 몇 가지 이슈를 짚어본 것이다. 타이틀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며 글의 일부 내용은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http://blog.aladin.co.kr/mramor/2341396)에서 따왔다. 알고 보면,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1월호) 세계 공통 언어, 과연 필요한가?

바벨탑 이후 - 지구상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처음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의 어느 평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잘 아는 대로 이때 여호와가 등장한다.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서 분노했다.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해 주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적어도 언어에 관한 한 말이다. ‘바벨탑 이전’이란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보편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 있은 뒤, 너무도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서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된 시대를 뜻한다. 물론 언어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언어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 결과 인류는 불행해졌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와 반목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언어는 분화에 분화를 거듭하였고,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로 잡아도 5,000개가량의 언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여러 언어가 공용되는 것을 ‘다언어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지구 공동체 또는 지구촌은 그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가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다언어적 세계’였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주의의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먼저 고민했던 폴란드의 한 안과 의사의 이야기는 참고할 만하다.

세계어 -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의 옛 도시 비알리스토크에 자멘호프(1859~1917)라는 유태계 안과 의사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비알리스토크에는 러시아 인, 폴란드 인, 게르만 인 그리고 히브리 인의 4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멘호프는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이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믿은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냈다. 그것이 1887년에 나온 에스페란토다.

사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세계 공통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인공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문학 작품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한국 근대 시사(詩史)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억(1896~?)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양 시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하니, 에스페란토 열풍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참고로, 국내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상주의자였던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의 활용이 각 지역과 국가에 속한 개인들의 세계시민적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 자체가 ‘희망을 가진 자’인 것은 그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14년 제10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로 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전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화하는 광경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이상으로서의 세계어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멘호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1908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가 결성되면서 세계적인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에스페란토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아직 세계 공통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기에 역부족이며, 공식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도 못하다. 사실, 에스페란토 자체가 각 국가어로부터 거리를 둔 중립적인 언어를 표방했지만,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 어, 에스파냐 어, 프랑스 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 등이고, 그런 탓에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소요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까닭에 자멘호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 현실적으로 세계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는 ‘국제어’라 불리기도 하는 패권 국가들의 언어다.



영어의 힘 - 소수 언어의 종말이 다가온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5,000개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이 숫자는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남은 언어의 숫자다. 언어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21세기에만 이 중 절반가량의 언어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평균 2주에 1개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200개 정도의 언어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 200이란 숫자가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는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예측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어들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세계화 추세가 강화될수록,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나 국제어에 대한 요구도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유력한 세계어의 후보가 현재로선 단연 영어다. 이미 현실에서 많은 나라가 영어를 국가어로 채택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능통한 영어 사용자가 세계적으로 18억 명에 이르며, 영어 학습자 수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만하면 영어와 함께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비친다.

하지만 그 ‘회귀’는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만큼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가 <언어의 종말>에서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영어와 과거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 어의 확산 과정에는 세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언어의 ‘제국주의’는, 첫째로 식민화의 결과로 비롯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통 언어, 곧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함)였다.

둘째로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불러온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富)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 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도처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영어는 여러 사회적 특권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며, 이를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능력과 성공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 재생산의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다.” ‘세계어’이기 이전에 영어는 ‘제국의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발생은 원거리 교

역, 특히 해상 교역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pidgin, 비즈니스의 중국식 발음으로, 주로 상거래에 사용되며 문법이 간략화되고 어휘가 극도로 제한된 영어를 말함)는 점점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는 평평하다’고도 말해지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는 무엇보다도 비즈니스 언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언어가 몇몇 언어로, 특히 영어로 집중되는 현실의 뒷면에서는, 소수 언어들의 소실과 언어 다양성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리고 앞으로 ‘언어 전쟁’, 개별 국가어와 영어와의 전쟁 또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영어 공용화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 한 언론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45%였고, 이듬해 교육 방송(EBS)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62%까지 증가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한국 국민의 절반가량은 영어 공용화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용어’란 말 그대로 공공 생활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영어 공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처음 공용어론을 제기한 소설가 복거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어 공용화는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고, 아예 모국어를 영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력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지구 제국이 형성되리라는 기대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논리일 뿐이며, 이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어 공용화가 그 자체로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질적인 개선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에도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용화 자체가 궁극적인 해법인가는 미지수다.



이중 언어 -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사회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전 지구화 시대에 모국어와 국제어의 이중 언어 사용이 대세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단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국민 국가 형성의 주된 바탕이었고, 이에 따라 민족(또는 국민)을 언어 공동체로 규정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단일 언어적 상황보다는 이중 언어적 상황이 보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듯 변화된 언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을 앞으로의 지향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벨탑 이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연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어를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소수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국가어마저도 존립을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세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신화를 다시 상기하자면, 인류가 하나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언어적 혼잡성·다양성이라는 신의 징벌 이후다. 곧 세계는 그러한 혼잡성·다양성으로 구성되며, 결국 그것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계주의는 이러한 혼잡성·다양성 자체를 보존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지식을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구분 짓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 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을 뜻한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 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음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누려 왔다. 세계어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과 공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08.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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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다 싶었지만 '대박'이 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뉴런, 2008) 시리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껏해야 나의 관심은 저명한 문학비평가 'I. A. 리처즈'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은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저자로 기억하겠구나 정도였는데, 한겨레21의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꼭지를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일 것인가! 알고보면, 원제가 <그림으로 보는 영어>이고 한번 나왔던 책이 다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올해의 가장 '기이한'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싶다(출판사회학의 연구대상이다)...

한겨레21(08. 10. 31)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

신기한 물건 하나가 등장했다. 원래 있던 겉표지를 어디에 두고 온 듯한 노란색·파란색·초록색의 단순명료한 디자인, 한글 제목은 귀퉁이에 둔 과감함, 우유 한 갑 무게도 안 되는 가벼운 종이, 듣기용 MP3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1만원이 안 되는 가격…. 가벼운 책이 무겁게 베스트셀러를 가격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I. A. 리처즈·크리스틴 깁슨 공저, 뉴런 펴냄)가 터졌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BASIC’편은 발간(7월2일) 한 달 만인 8월2일 인터넷서점 ‘예스24’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9월4일에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어학’ 부문이 아니다. 종합베스트셀러다. 이후 연속 7주 종합 1위를 지키고 있다. 10월 둘쨋주 교보문고에는 ‘ADVANCED1(스피킹편)’이 종합 2위, ‘ADVANCED2(리딩편)’가 종합 6위에 올라 있다. 편집부에서 전하는 판매부수는 30만 부(인쇄는 35만 부). 첫 쇄는 3천 부를 찍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영어 교재’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지음, 사회평론 펴냄)의 2000년 2~4월 총 9주, <해커스 토익>의 2006년 7월 첫째·둘쨋주 총 2주가 있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학습법’에 관한 것이라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한다. <해커스 토익>의 베스트셀러 등극이 대학 여름방학 초기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머리를 동여맸음을 보여준다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한국 일반인들이 영어 공부를 하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이미지보기

책을 펴낸 뉴런은 ‘전략적’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홍은숙 대표는 영어 원제인 ‘그림으로 보는 영어’(English through Pictures)를, 타깃을 명확히 가다듬으면서 ‘리스타트’로 바꾸었다. 1997년 <그림으로 보는 영어>(창문사)로 국내에서 한 번 나왔다가 사라진 타이틀이 일신한 것이다. 그리고 카페를 통해 학습그룹을 조직했다. 카페 가입자는 현재 6만4천 명을 헤아린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앞부분 ‘학습법’과 ‘소감’을 덧붙인 글을 제외하고는 시작되는 첫 장부터 해답까지 모두 영어와 그림으로 돼 있다. ‘I’와 ‘YOU’로 시작한다. 단어 아래 철사로 만들어진 단순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고 상대방을 가리킨다. 장이 끝나면 연습문제가 있다. 책을 딱 반으로 나눠서 뒷부분은 연습문제로 이뤄진 ‘워크북’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일반인이 몽땅 영어로 된 한 권의 책을 읽어내려간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한 경험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엔 제목보다 크게 ‘영어 한 달만 다시 해봐’라고 쓰여 있다. 능률영어사 대표인 이찬승씨는 “영어 공부에 손을 놓았던 일반인들이 책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어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요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능률영어사 홈페이지에는 65살 할머니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어를 배우는 사연을 적어놓기도 하고, ‘발음을 배우고 싶다’고 문의를 해오기도 하는데, “옛날에 없던 분위기”다. 이명박 정권의 ‘영어 몰입’도 한몫했고, 해외여행이 많아지는 환경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 폭발은 일반인들에게 ‘영어에 대한 욕구’가 무시무시하게 잠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어 학습 시장은 점점 분화돼왔다. 쓰기, 말하기, 읽기, 단어, 문법 등. 이런 조류는 영어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들을 위한 시장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학습서 시장이 존재해오긴 했지만 미미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이런 조류를 역행한다.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어 교재 시장의 여집합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략했다. 그 부분은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방대한 시장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의 여건 또한 완성된다. 베스트셀러의 기본 조건은 ‘누구나 집어든다’이다. 그런 면에서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하긴 하지만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일반인이 보는 영어책’이라는 욕구와 비슷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키워드는 ‘제너럴’이다. 영어책을 겨냥하고 있지만 핵심은 ‘누구나’다. 아주 특수한 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키워드는 ‘일반인 독자’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영어 학습은 효과가 있을까. 이찬승씨는 지금 아무런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 검증된 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수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까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어쨌든 책이다. 책은 단순 지식이지 사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영어교재’이다. 머리말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출판사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원서에 나온 말을 옮겼다고 한다. 10월23일 현재 미국 ‘아마존닷컴’의 이 책 순위는 ‘26만2788’. 2005년판인데 ‘템포러리 아웃오브 스톡’(일시 품절)이다. 원서의 출판연도는 1945년, 성경 이후로 가장 오래된 영어교재인지도 모르겠다.(구둘래 기자)

08. 11. 02.

P.S. 이미 적은 대로 <잉글리시 리스타트>에 대한 나의 반응은 'I. A. 리처즈'(보통 그렇게 읽었다)가 이런 책도 썼나 하는 것이었다('썼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게 맞겠지만). 이 저명한 신비평가의 책으로 현재 구할 수 있는 건 <문학비평의 원리>(동인, 2005)와 <수사학의 철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모두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문학비평의 원리>는 예전에 <문예비평의 원리>(현암사, 1981)로 출간된 적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이 현암사판이다.

리처즈의 책으론 고전인 <시와 과학>(을유문화사, 1947)이 고 이양하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저자가 'I. A. 리차아드'로 표기됐다). 그리고 또 하나 C. K. 오그든과의 공저 <의미의 의미>(현암사, 1987; 한신문화사, 1990)도 예전엔 많이 읽히던 책이다. 물론 독자는 주로 어문학 전공자들이었지만...

영미비평사 3 - 뉴 크리티시즘 : 복합성의 시학

미국의 신비평(뉴크리티시즘) 얘기가 나온 김에 정평있던 연구서도 적어두도록 한다.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복합성의 시학: 뉴크리티시즘 연구>(민음사, 1987)가 그것인데, 나중에 <영미비평사3 - 뉴크리티시즘: 복합성의 시학>(민음사, 1996)이라고 재출간됐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책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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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자가 문학비평가로군요.몰랐네요.

로쟈 2008-11-03 22:22   좋아요 0 | URL
네, 나름 저명한 비평가이면서 대학 영문학과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틀을 마련한 사람이죠...
 

오랜만에 한국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강정과 김경주 두 시인이 각각 새로운 시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강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키스>(문학과지성사, 2008)와 김경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이 그 시집들이다. 최근시의 한 경향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강정(37·사진 왼쪽) 김경주(32·오른쪽)

한겨레(08. 10. 31) '시인의 실험실’에서 발사된 4차원 언어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나오는 이 말은 시와 시인이 ‘새로운 언어’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인은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이다. 그는 말하자면 고전음악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였던 베토벤과 비슷한 운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언어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데, 그 궁극은 일종의 임계 지점 또는 비등점과도 같아서 언제든 다음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간행된 두 권의 시집에서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로서 시와 시인의 속성을 만나 보자.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제353권과 354권으로 연이어 나온 강정(37·사진 왼쪽)씨의 <키스>와 김경주(32·오른쪽)씨의 <기담>이 그것이다.

“오래전 한 편의 시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사후(死後)의 바람> 앞부분)

“이 오래된 바람의 내력엔 서로 피를 나눠 먹던 종족의 역사가 흐른다/(…)// 또 다른 궤를 그리며 땅속에 덮이는 하늘/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니/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마지막 시가 불붙는다”(<사후의 바람> 뒷부분)

<키스>는 <처형극장>과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에 이은 강정씨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을 열고 닫는 것은 제목이 같은 두 편의 <사후의 바람>이다. 인용한 시들 중 ‘한 편의 시’가 나오는 것이 시집 맨 앞에 실린 작품이고 ‘마지막 시’가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명백한 종말의 분위기를 풍긴다면, 뒤의 작품은 종말을 딛고 선 모종의 갱신을 꿈꾼다. 종말과 갱신의 지표로 나란히 ‘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키스>는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사랑의 노래를 담은 시집이다. 시인은 사랑이 초래하는 혁명과도 같은 새로움을 시집 전편에 걸쳐 강조한다. 하나의 시가 종말을 고하고 또다른 시가 탄생하듯이, 사랑은 하나의 세계를 여의고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행위가 된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불탄 방-너의 사진> 부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이은 김경주씨의 두 번째 시집 <기담(奇談)>은 제목처럼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적과도 같다. 시집은 전체 3막에 ‘연출의 변’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구운몽(口雲夢)’ 등 희곡적 구성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것은 관습과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빚어지는 언어의 충격적 변신이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베리에게> 부분)

인용한 시는 사물들의 이름을 서로 바꿔 부르는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빅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기담>의 시인 역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모색한다. 아니, 시인이 새로운 언어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시인을 부려서 (인간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는 언어가 인간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제1막 인형의 미로> 부분)

새로운 언어의 개척자라는 측면에서 김경주씨는 강정씨보다 더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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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학술적인 성격의 교양서로 가장 눈길을 끄는 책 두 권은 각각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를 다루고 있다(그래서 같이 모아놓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권은 지난 여름 유럽중심주의 역사학 비판서 <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 2008)로 처음 소개된 제임스 블라우트(제임스 블로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 2008)이고(http://blog.aladin.co.kr/mramor/2270833 참조. 저자명이 다르게 표기되는 바람에 알라딘에는 '제임스 블로트'와 '제임스 블라우트'가 서로 다른 인명으로 설정돼 있다), 다른 한권은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이다(로버트 영의 책으론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둘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1. 01) 왜곡된 유럽중심 이데올로기 해부

국가와 도시, 조직화된 종교, 봉건제, 노동분업, 민주제, 관료제, 근대국가, 자본주의….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이 처음 만들었거나 완성시켰다고 배워온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다. 유럽 어딘가에서 시작한 화살표가 동쪽(아시아)으로, 남쪽(아프리카)으로, 혹은 서쪽(아메리카)으로 퍼져 나가는 지도들까지 곁들여지면 이런 주장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저자는 이런 주장에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깔려 있다면서 하나씩 기각해 나간다. 세계사에서 항상 주변으로 간주돼 온 지역들을 복권시켜 유럽 단일 중심이 아닌 여러 개의 중심을 갖는, 혹은 아무런 중심을 갖지 않는 탈근대적 세계사를 서술하기 위한 노력이다.

기존 유럽중심주의의 기본 명제는 “유럽은 스스로 진보하고 근대화한다”는 것이다. “비유럽은 정체되고, 불변하고, 전통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유럽 역시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했으며 나름의 기술을 발전시켜 오지 않았는가. 유럽중심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유럽이 이식시켰거나 비유럽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확산론’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가 이룩한 상당한 기술적 진보들(예를 들어 제지술과 화약의 발명 등)은? 유럽중심주의자는 태연하게 답한다. “중세 중국과 인도에서 어떤 기술적 진보가 발생했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멈춰버렸다는 것”이라고. 이런 논리는 비유럽이 이룩한 진보를 뭉개버리는 도식으로 자리잡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492년은 비유럽 지역에 대한 대규모 식민지 시대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저자는 1492년 이전, 즉 중세 유럽은 비유럽에 우월하다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상당부분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돼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유럽 사람들은 유럽인과 달리 태생적으로 미개한 종자들이고, 비유럽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없다고 치부함으로써 노예제와 토지침탈의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속속 드러남에도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념체계가 강력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식민주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3년 발간된 이 책의 울림이 상당한 것을 보면 식민주의자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퇴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아류들이 판치고 있지는 않은지.(김재중기자)  

한겨레(08. 11. 01) 마르크스주의도 유럽 중심주의 갇혀 있다

로버트 영(뉴욕대 영문학·비교문화학 교수·사진)은 ‘트리콘티넨털(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을 제창한 이론가다. 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이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서발턴(하위계급·기층민중)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그 이론들의 진보적 유산을 3대륙 현실에 맞게 번역해 소화하려는 이론이다. <백색신화>는 영의 이론활동에서 전환점이 된 책이다.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몰두했던 영은 이 책 집필을 계기로 하여 탈식민주의로 이동했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지은이 자신의 이론적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넘어 탈식민주의 이론의 출현을 알린 저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미 바바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탈식민주의 사유의 역사적 계보학을 수립하는 데 의미심장한 기여”를 한 저작이다.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장이 막 형성되고 있던 때 그 장의 형성을 역사적 차원에서 보여준 것이 이 저작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탈식민주의 이론의 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서구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계승인 사르트르를 비판하고 알튀세르·푸코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기여와 한계를 동시에 검토하는 것이다. 이어 이들의 사유를 극복하려 한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의 이론을 탐색한다. 이런 검토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이 ‘유럽중심주의’와 ‘탈식민주의’이다. 유럽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중심주의에 갇혀 있었다면, 사이드 이후 탈식민주의는 이 유럽중심주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이론적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책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1990년 초판이 출간된 뒤 2004년에 재판이 나왔다. 2004년 판에서 지은이는 ‘다시 읽는 <백색신화>’라는 제목으로 긴 서문을 썼다. 한국어판은 이 재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의 토대가 된 것은 사이드의 기념비적 저작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그 어떤 지식도 오리엔탈리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는데, 영은 한발 더 나아가 서양의 가장 진보적인 이론들조차 유럽중심주의적 백색신화에 갇혀 있음을 입증한다. 이때 영이 맨 먼저 공략 대상으로 삼는 것이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를 흡수함으로써 주체를 더 큰 주체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주체-타자 대립을 해소한다. 지은이는 헤겔의 변증법이 19세기 제국주의 기획을 철학적으로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의 주권을 박탈해 주체에 통합시키는 변증법의 지식 구성 방식이 서구가 비서구를 지리적·경제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흉내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었을 뿐 유럽중심주의와 공모하는 개념체계의 작동양식을 뒤집지는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중심주의의 연장이었다. 지은이는 유럽의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인간 현상들을 경제결정론으로 환원시켰으며, 인간의 역사적 과제를 근대성 달성에 귀속시킴으로써 유럽 역사를 모범으로 제시했고, 혁명주체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수렴시켰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 담론은 “여성, 인종, 다른 소수집단들, 나아가 식민화되거나 식민화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을 겪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기능”을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한 것은 미래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기 때문에 결국 최선이었다고 한 마르크스의 진단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유럽중심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지은이는 사르트르가 식민지 해방 투쟁에 동참했지만, 결국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중심주의 한계를 반복했다고 비판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당시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제3세계에 대한 ‘생색내는 온정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제3세계 민중을 대신해 발언하면서 그들을 종국엔 지워버리는 유럽 마르크스주의를 지은이는 이렇게 비판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한계는 알튀세르·푸코·데리다·들뢰즈를 포함한 광의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됐다. 그리고 그런 이론적 바탕 위에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현했다. 그러나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 시스템을 폭로하기는 했지만, 그 시스템을 획일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비서구 내부의 모순·갈등을 보지 못했다. 이런 한계는 다시 바바와 스피박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사유의 새 지평이 열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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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스트식민주의와 문화번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9 21:00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국내에는 소개된 로버트 영 교수가 학술대회 참석차 방했던 모양이다.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그의 책으론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 두 권이 번역돼 있다. 간략한입문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책도 소개됨직하다. 교수신문(11. 06. 17)번역불가능한 것은 새로운 실천을 낳는 '씨앗' 제공" 로버트
 
 
노이에자이트 2008-11-01 18:27   좋아요 0 | URL
근대화는 서구화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간단하지 않을까요.예를 들어 유럽이 예전엔 이슬람을 통해 문물을 수입하던 때도 근대화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그렇게 되면 근대화가 몇 번 씩 있게 되지요.탈근대 논의에 이런 주장은 없나요?

로쟈 2008-11-01 19:27   좋아요 0 | URL
근대화의 모델을 만들어놓은 것이고 또 그게 가장 '성공적'이었기 때문이겠죠. 월러스틴이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른 '보편주의'를 세계화하고. 월러스틴은 근대 대학제도 역시 '유럽적 보편주의'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탈근대화, 탈서구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대학제도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요...
 

주말에는 써야 할 원고들이 많아서 미리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어느새 11월이다. 아마도 1년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달을 꼽자면 2월과 11월이 되지 않을까? 12달 가운데도 주연과 조연이 있다면, 2월이나 11월은 만년 조연에 딱 맞는 달들이다. 비록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달이긴 하나 남몰래 책을 읽기에는 더 좋은 달일 수도 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제지수들이 변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1. 문학

신경숙 작가의 추천작은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이다. 이 작품을 모른다면 알라딘 마을에서는 '간첩'과도 같으니 군말은 필요 없겠다. 나는 일찌감치 지인에게서 선물을 받았지만 10월에는 읽을 여유가 없었다. 해서 대신에 '김연수 문학의 기원'(http://blog.aladin.co.kr/mramor/2333164)이란 페이퍼만 올려두었었는데, 11월에는 사정이 좀 다를 수도 있다(달라졌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에 보면 와다 하루키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비, 1995)에서 처음 민생단 이야기의 단서를 접하게 됐다고 하면서 김연수는 이후에 도움을 받은 몇 권의 책을 나열한다. 신주백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아세아문화사, 1999)와 김성호의 <1930년대 연변 민생단 사건 연구>(백산자료원, 1999) 등이 도우미가 된 책들이다. 그의 소설의 독자라면 한번쯤 같이 뒤적여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몇 권의 일본시집도 같이 읽어보는 건 어떨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밤은 노래한다>를 읽은 여운으로 들춰보았다는 시집들이다(http://h21.hani.co.kr/arti/COLUMN/68/23580.html). 1886년에 태어나 26살에 요절했다는 일본의 '국민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집도 오랜만에 열어볼 수 있겠다.  

“내 친구는 낡은 가방을 열고/ 희미한 촛불이 흩어지는 마루 위에/ 여러 가지 책을 꺼내놓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이 나라에서 금지된 것들이었다.// 마침내, 내 친구는 사진 한 장을 찾아내어/ ‘이거야’ 하고 내 손에 얹어놓고는/ 조용히 또 창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쁘지도 않은 젊은 여인의 사진이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낡은 가방을 열고’ 전문)

마지막 행은 “그건 아리땁다고만은 할 수 없는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네.”라는 소설의 번역이 더 '시적'이긴 하다. 아무튼 '낡은 가방'을 열어보듯이 오래전 책들의 먼지를 슬며시 닦아보자.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라도 닦아보도록 하자...

2. 역사

이덕일씨가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이진이의 <이순신을 찾아 떠난 여행>(책과함께, 2008)이다. 어인 또 이순신인가, 싶지만, 추천의 변을 들어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 "이순신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와 있고, 필자도 노산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69년판)>을 필두로 여러 권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책은 계속 나오고 있고, 그때마다 또 손길이 가게 된다. 그만큼 그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은 피해갈 수 없는 바위처럼 우뚝한데 과거 군사 정권의 의도에 의해 과장된 인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고 접근하지만 그런 의도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확인하고 매료되고만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다." 물론 저자가 그런 사람이고.

책은 “삶이 몹시 힘들다고 생각된다면…나처럼 이순신의 삶을 따라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을 담은 "인간 이순신과 함께 하는 여정"이라 한다. 그 여정에 겸사겸사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2003)를 다시 빼들 수도 있겠다(<난중일기>는 어느 것이 '정본'인지 모르겠기에 넘어간다). 궁색한 처지인지라 새책을 살 여유도 없으니 읽은 책이나 한번 더 읽도록 하자(사실 나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얼마전에 소개한 바 있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08)이다(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46452 참조). "눈에 띄는 철학 입문서가 나왔다. '나는 누구인가... 이미 알고 있다고요? 그럼 얼마나 알고 계신지요?' 계급장 떼고 전공 불문하고 한번 제대로 따져보자는 식이다. 이제껏 자기 분야에 갇혀 ‘똑같은 노선을 단조롭게 오가는 나이든 버스 기사’ 같았던 철학자가 새로운 스타일로 변신하여 대중들 곁으로 바짝 다가온 느낌이다. 결코 지루하거나 골치 아프지 않은, 그러나 핵심을 놓치지 않는, 흥미진진한 사유의 테마 여행 속으로 독자의 손을 잡아끈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책으로 루이 라벨의 <자아와 그 운명>(누멘, 2008)과 앤서니 엘리엇의 <자아란 무엇인가>(삼인, 2007)도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각각 '자아(나)'에 대해서 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어떤 해명/설명을 시도해왔는지를 간추려주는 책들이다. 나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책의 상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사라 밀즈의 푸코 입문서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앨피, 2008)이 출간된 김에 푸코와 주체/자기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볼 수 있겠다.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을 비롯해서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나남, 2004),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 등이 리스트에 오를 만하다. 자아 혹은 자기란 발견의 대상인지, 구성의 대상인지, 아니면 해체의 대상인지 늦가을의 고독을 씹으면서 한번 생각해봄 직하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고른 정치분야의 책은 장기표의 '17세를 위한 교실 밖 정치 교과서' <지못미, 정치!>(시대의창, 2008)이다. "저자가 기성세대로서 우리사회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정치제도와 문화를 지켜주지 못하고, 낡은 지역주의 등 잘못된 정치를 물려줘 미안하다는 자괴감에 기초해 자라나는 주인인 청소년에게라도 정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기 위해 쓴 책"이라고. 청소년을 위한 '정치(학)' 입문서라고 해야 할까.

혹 여유가 된다면 비슷한 컨셉을 가진 국외의 책들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다. <청소년을 위한 정치 이야기>(다른우리, 2005),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정치학>(웅진지식하우스, 2006)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전자는 독일 청소년들을, 후자는 스페인 청소년들을 겨냥해 씌어진 듯한데, 우리도 해외에 번역될 만한 '정치 교과서'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지못미, 정치!>가 그런 기대에 부응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손교수에 따르면, "청소년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정치교양서"이다.  

'일반 국민들'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정치철학적 관심을 총족시키고 싶은 독자라면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 한나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을 같이 읽을 목록으로 올려둘 수도 있겠다. 내가 그런 경우인데, 최근에 <정치의 약속>의 원서를 입수함으로써 준비를 다 마쳤다. 샹탈 무페도 그렇지만, 특히 랑시에르 같은 경우는 원서나 영역본 등의 도움 없이 번역본만으로 맥락을 따라가기가 좀 어렵다(역자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거나 한국어가 이런 철학서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사실 랑시에르가 자주 인용하는 플라톤의 <법률>도 아직 국내엔 번역돼 있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가장자리'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브루스 핸더슨 등의 <서브프라임 크라이시스>(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면서 이미 많이 언급된 책이다. 추천의 변에 따르면, "이 책을 쓴 사람들은 경제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실 서브프라임 위기는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사람조차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문제다. 그런 복잡한 문제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 복잡한 문제'는 '머리 아픈 문제'이기도 하고 당장 경제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살 떨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신의 아파트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선대인 등의 <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한국경제신문, 2008)나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풍요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지구의 풍요 또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시려면 빈곤을 준비하십시오. 빈곤이 싫다면 종말을 맞이하십시오."라고 충고하는 김재인의 <대한민국 경제, 빈곤의 카운트다운>(서해문집, 2008) 등 최근에 나오는 경제 관련서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고 살벌하다(<부동산 대폭락의 시대가 온다>의 저자 인터뷰는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8114010 참조). '솟아날 구멍'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일독해봄 직하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도 눈에 익다.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 책은 "성장 위주의 ‘양적 사회’에서 ‘질적 사회’를 넘어 ‘품격 사회’가 대안적 발전 목표로 거론되기 시작하는 이즈음, 국가의 품격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곰곰 생각토록 하는 읽혀지기를 바라는 서적에 속한다." 현재 예수살렘의 히브리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저자의 책은 몇 권의 공저가 소개된 바 있지만 단독 저작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 서평자는 "25년 전 존 롤스의 <정의론>이 출간된 이래 사회정의 문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까지 평했다. 소개의 글을 읽으면 좀더 흥미로워지는데,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동물농장>, <1984>를 쓴 사회주의 작가 조지 오웰은 언젠가 자신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여태껏 사회주의의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아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인간적인 형제애다.”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몸소 체험했던 오웰의 이런 생각이 ‘품위 있는 사회’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 한 학자가 있다. 바로, 2000년 공저<옥시덴탈리즘>을 통해 서양을 바라보는 적대적 편견을 이야기한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이다.

저자에 대해서 급 호감과 관심을 갖게 한다.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려다 말았던 책인데, 챙겨두어야겠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교양과학서는 제인 구달과 루이스 리키를 다룬 진주현의 <인간과 유인원, 경계에서 만나다>(김영사, 2008)이다.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화석, 침팬지 무리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행동을 담은 이야기를 책에서 접했던 독자들이 고인류학, 영장류학의 선구자인 루이스 리키와 제인 구달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 사실 루이스 리키, 메리 리키 부부와 제인 구달은 사제지간이라고 한다.

"고릴라와 오랑우탄을 연구하는 다이앤 포시와 비루테 갈디카스, 제인 구달"을 루이스 리키의 '세 천사'라고 부른다는데, 제인 구달과 다이앤 포시의 자전적 기록은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 각각 제인 구달의 <제인 구달>(사이언스북스, 2005)과 다이앤 포시의 <안개 속의 고릴라>(승산, 2007)이다. 갈디카스의 책으론 <에덴의 벌거숭이들>(디자인하우스, 1996)이 소개됐었고. 세 사람에 대한 스케치로는 사이 몽고메리의 <유인원과의 산책>(다빈치, 2001; 르네상스, 2003)이 있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사진작가 조선희의 <네 멋대로 찍어라>(황금가지, 2008)이다. 조선희는 사진을 찍되, 어떤 대상을 어떻게 찍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는 조언을 한다. "사물마저도 그 사물들의 이야기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책 안에는 이러한 심정으로 작가가 찍은 사진들이 다양하게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솔직한 사진 찍기의 충고들이 담겨있다."고 소개된다. 개인적으로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별로 즐겨하는 편이 아니므로 '어떤 대상을 어떻게 찍을까'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하지만 좋은 사진을 보는 즐거움마저 마다할 이유는 없다(비록 고가의 사진집들을 소장할 여유는 아직 못 되지만).

최근에 나온 사진관련서로, 보다 정확하게는 사진과 역사의 만남을 다룬 책으로 이경민의 <경성, 사진에 박히다>(산책자, 2008)와 김장춘의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살림, 2008)이 눈길을 끈다(관련기사는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022029015&spage=5 참조).  

그리고 최근에 나온 풍경 사진집으로 눈에 띄는 것은 강운구의 <저녁에>(열화당, 2008)과 정봉채의 <우포늪>(눈빛, 2008)이다. 각각 한 장의 표지 사진만으로도 사색의 공간을 그윽하게 넓혀준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서는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를 담은 여행서,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웅진지식하우스, 2008)이다. 빌 브라이슨이 대표적이지만, 요즘은 불평꾼, 혹은 투덜이들의 여행기가 대세인 모양이다. "여행기와 문화인류학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종합한 책은 처음 보았다"고 하는 걸 보면 재미는 있는 책인 듯. 전에 읽다 만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21세기북스, 2008)과 견주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투덜이계의 왕중왕'을 뽑는다고 할 수 있을까? 와이너나 브라이슨이라면 '여행할 권리'(김연수)는 곧 '궁시렁댈 권리'이지 않을까 싶다.

10. 르 클레지오

이제 끝으로 아동서 대신에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 '특선'을 마련한다. 여느 때와는 달리 이미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라 몇 권 추릴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골라본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작품인 <황금물고기>(문학동네, 1998)부터가 그 계열에 속한다. 소개에 따르면, "<황금 물고기>는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1997년에 출간되자마자 순수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떤 이야기인가?

"이 작품은 예닐곱 살 때 유아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팔려간 한 소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밤’이라는 뜻의 라일라라는 이름의 소녀. 예닐곱 살에 유괴당한 그녀는 랄라 아스마라는 노파의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란다. 노파의 죽음 이후 우연히 창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숱한 역경과 고난 끝에 프랑스로의 밀입국. 미국, 또 다시 프랑스로 전전하다 결국 자신의 나라 아프리카로. 그녀의 조국의 땅을 밟은 순간 본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연이어 <사막>(문학동네, 2008)과 <아프리카인>(문학동네, 2005)까지 읽으면 얼추 그 문학세계의 윤곽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08. 10. 31.

P.S. 11월의 고전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열림원, 2006)이다. 1870년작으로 '마조히즘'을 창시한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대표작이다. "마조히즘의 극단적인 감각주의를 보여주는 일종의 자전적 소설로, 자허마조흐의 일생과 문학 전반을 지배한 피학적 성적 취향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는 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최근에 닉 맨스필드의 <마조히즘: 권력의 예술>(동문선, 2008)이 출간되는 바람에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2007)과 세트로 묶어서 읽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맨스필드는 서론에서 자신의 기본적인 입장을 이렇게 밝혀놓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의 결론은 마조히즘이 권력에 대한 특정한 실험이며 이 실험에서 주체는 쾌락과 고통, 능동성과 수동성, 권력과 권력의 부재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시나리오를 꿈꾼다는 것이다."

모피를 입기에는 좀 이른 계절이지만 마조히즘에 입문(?)하기에는 오히려 적합할는지도 모른다. 축축하고 이 음산한 계절에, "자기 포기를 통해서 자신을 강화하고 자기 부정 나아가 자기 절단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그러한 권력의 모델"은 위험하면서도 충분히 유혹적이지 않을까? 곧 추운 계절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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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1-0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 브라이슨도, 지금 제 앞에 있는 에릭 와이너도 왜 '불평꾼', '투덜이'로 카피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네들이 책에서 우스운 말로 불평만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부정적인 단어들을 마케팅하는데 끌고 들어오는 것도 잘 이해가 안가요. 좀 심하게 말하면, '너네들은 짖어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줄아냐, 이 불평꾼들아' 로 들려서 기분 나빠요.

그나저나 르 클레지오는 위에 번역되어 나온 것 말고도 무지막지하게 번역되어 나오네요. 노벨문학상이 뭐길래..

로쟈 2008-11-04 22:22   좋아요 0 | URL
개그 프로그램에서의 캐릭터 설정과 유사하지 않을까요? 대리만족의 순기능도 있을 법합니다. 호통개그처럼...

陳周賢 2008-11-28 0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알라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제 책(인간과 유인원, 경계에서 만나다)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글 남깁니다!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읽어보시게 되면 많은 비평 부탁 드려요. 처음 쓴 책이어서 이렇게 막상 나오니 겁도 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

로쟈 2008-11-28 23:19   좋아요 0 | URL
책은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 페이퍼는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을 기억하기 위한 용도이기도 합니다. 목차는 충분히 흥미롭고 짜임새가 있어 보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