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언론의 북리뷰에서 초점이 된 책은 '킬링필드'의 악몽을 다룬 필립 쇼트의 <폴 포트 평전>(실천문학사, 2008)이다. 877쪽이니까 두께로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2005년에 나온 원저 자체가 560쪽에 이른다). 함부로 손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리뷰 정도는 챙겨놓도록 한다.

경향신문(08. 11. 08) 왜 캄보디아 사회는 ‘킬링필드’를 내버려뒀나

킬링 필드(Killing Field)’는 현대사에서 ‘악몽’의 다른 이름이다.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장악한 1975년 4월부터 79년 1월까지 캄보디아 인구 700만명 가운데 150만명이 희생됐다. 상당수가 숙청당했고 나머지는 질병·강제노동·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욕으로 단 한 번에 이토록 높은 사망률이 발생한 사례는 역사상 처음이다.

1988년 중국 남부 징강산에 있는 마오쩌둥의 옛 게릴라 기지를 방문한 폴 포트.

폴 포트(1925~98년)는 이 끔찍한 ‘악몽’의 최고기획자였다. 그의 기획은 극단적으로 과격했고 또 냉혹했다. 정권을 잡은 3년8개월 동안 250만명의 프놈펜 시민들이 지방으로 쫓겨났고 집산주의 정책으로 전 국민은 자유와 개성을 박탈당했다. 화폐·법정·신문·우편·해외 원거리통신은 폐지됐다. 집단 개념이 강조돼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써야 했고, 자기 부모를 ‘숙부’ ‘숙모’로, 다른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로 불러야 했다.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혁명이 극단으로 치달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정의롭고 부유한 사회’를 향한 꿈이 ‘인류 최악의 참사’로 변했을까. <폴 포트 평전>은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영국의 타임스와 BBC 등의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크메르루주 핵심인물들과의 인터뷰와 프놈펜·베이징·하노이·모스크바·파리의 각 정부 및 당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영문 부제(‘Anatomy of a Nightmare’) 그대로 20세기의 ‘악몽’을 냉철하게 ‘해부’해 나간다.



책은 훗날 폴 포트로 불려지게 되는 살로트 소르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지만 단순한 인물 전기를 넘어선다. 캄보디아의 비극이 어떻게 배태되고 진행됐는지를 캄보디아의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 종교와 문화, 정치·사회제도 등 다각도로 분석했다. 나아가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했던 베트남 등 주변국과 미·중·소 등 강대국과의 관계를 살피면서 캄보디아 현대사를 꼼꼼하게 되살려냈다. 문제적 인물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짚어내는 평전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저자는 비극이 잉태된 원인을 캄보디아의 독특한 문화와 사회 조건에서 찾는다. 소승불교의 규범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악인을 물리칠 선인의 화신”으로 여겼다. 사랑과 슬픔 등 모든 감정은 떨쳐버려야 할 개인주의의 소산으로 보고 일부 지역에서 웃거나 노래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은 마치 소승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려면 속세의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과 비슷했다. 폴 포트가 육체노동을 강조한 것도 육체노동이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연마하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극의 씨앗은 크메르루주가 농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농민혁명에는 도시에 대한 분노라는 특징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루주에게 프놈펜의 ‘타락상’은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도시민이 땅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개조해야 도시생활에서 묻은 오물을 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폴 포트는 “낡은 사상이나 이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혁명의 불길’ 속에 사라지고 나면 캄보디아가 더 강해지고 깨끗해져서 공산체제의 본보기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당시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것은 국민을 ‘벽 없는 감옥’에 가두는 ‘현대 최초의 노예제국가’였다.

크메르루주 여성대대가 행군하는 모습(1974년쯤).

저자는 “폴 포트 정권의 잔혹성은 캄보디아 역사에 책임이 있다”고 밝힌다. 봉건적 전통질서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들은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캄보디아가 변할 수 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캄보디아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결심은 한층 더 강했다. “힘없는 동물도 구석에 몰리면 본능적으로 쫓아오는 포식자에게 덤벼들듯이 폴 포트는 사투(死鬪)가 방책이라고 여겼다”는 설명이다. 

부관의 자녀들과 함께한 폴 포트.

그런데 ‘킬링 필드’의 책임이 모두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에게만 있을까. 책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전쟁을 야기하거나 지원한 외국 국가들에도 책임을 묻는다. 저자는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크메르루주도 없었다’는 단순한 등식에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미국은 60~70년대 폴 포트에게 집권 동기를 마련해주었고 80년대 반(反)베트남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폴 포트에게 계속 힘을 실어줬다. 중국은 베트남과 소련의 세력 강화를 막기 위해 크메르루주를 적극 지원했고 베트남의 공산세력도 자신들의 전쟁 승리를 위해 캄보디아 공산세력과 협력 및 결별을 반복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에는 프랑스 보호령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와 동서냉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개입되어 있다. 저자는 나아가 현 캄보디아 정부의 부도덕성과 부패를 묵인하는 국제사회에도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책은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이 캄보디아인에게 있음을 냉정하게 따진다. ‘악몽’을 기획한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이들이 약속한 미래상에 투자한 캄보디아 지식인층과 자신의 권력에만 몰두한 시아누크 국왕, 국내의 정적을 제거하려고 자국 국민들의 고통은 무시한 채 적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지도자들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신랄한 비판은 책의 첫머리에 던져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왜 캄보디아 사회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자비심과 동정심, 선의와 품위를 저버린 채 끔찍한 만행이 자행되는 것을 내버려두었고 또 여전히 내버려두고 있냐”는. 그리고 이 질문은 또다른 곳을 향한다. 나치 독일에서부터 르완다,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테러조직에 이르기까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또다른 ‘악몽들’에.(김진우기자)

08. 11. 08.

P.S. 한겨레의 리뷰는 '악몽으로 끝난 유토피아의 꿈'(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0596.html) 참조. 크메르루즈 통치에 대한 지젝의 분석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 152-156쪽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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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0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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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36   좋아요 0 | URL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식민통치를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요.힘도 없고 국제사회도 아무 관심이 없고...캄보디아가 베트남을 침략한 뒤 이것은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이 아니고 폴 포트의 압제에서 구해주려고 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뒤 베트남 주민들을 캄보디아로 대량이주시켜 캄보디아에서 좋은 땅을 다 뺏고 상권까지 다 장악했어요.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 실상을 알고 난 뒤 역사허무주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죠.하지만 공산국가에 대한 환상은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애초에도 그다지 환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로쟈 2008-11-09 20:51   좋아요 0 | URL
니체가 역사의 유해성이라고 한 게 떠오르네요. 굳이 공산주의사가 아니더라도 문명사 전체가 야만의 역사 아니던가요...
 

어제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의 하나는 강유원 번역으로 새로 나온 <공산당 선언>(이론과실천, 2008)이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2006)도 읽은 터라 '내친 김'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미 몇 종의 <공산당 선언>을 갖춰놓고 있는 만큼 '컬렉션'을 마저 채운다는 뜻도 있었다(이 <선언>과 함께, 여러 신간들을 들었다 놓고 고른 책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1998)이었다. 오바마 탓일까?).  

집에 돌아와 맛보기로 내가 읽은 것은 부록 중의 하나인 '1882년 러시아어판 서문'이다. 이진우 번역의 <공산당 선언>(책세상, 2002)에도 포함돼 있는지라 비교해보기 위해 옥스포드판 영어본과 함께 한참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누구를 위한 책들인가?). 그나마 15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김태호 번역의 <공산주의 선언>(박종철출판사, 1998)이 눈에 띄기에 나란히 펼쳐놓았다(알다시피 <공산주의 선언>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의 대본이기도 하다). 그 정도 준비한 상태에서 '러시아어판 서문'(69-71쪽)을 읽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 초판은 바쿠닌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종>의 인쇄소에서 나왔다. 서양은 당시 <선언>의 러시아어판에서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파악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초판' 얘기가 나오는 것은 1882년판이 2판이기 때문이다. 바쿠닌(1814-1876) 번역의 초판이1860년대 초에 나왔다고 했지만 후주(102쪽)에 밝혀진 대로 러시아어 초판은 1869년에 출간됐다(엥겔스는 1888년 영어판 서문에서도 출간연도를 1863년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그때쯤으로 착각했던 듯하다. '1860년대 초'라는 말은 '1863년'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번역자도 바쿠닌이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1856-1918, 사진)였다. 초판에 결함이 많아서 1882년에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돼 있다(<공산주의 선언>, 129쪽). 그리고 초판을 낸 잡지 '<종(Kolokol)>의 인쇄소'에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살아있음을 외친다"를 구호로 내세운 혁명잡지. 헤르젠(Herzen)과 오가르요프(Ogarjow)가 발행. 1857년부터 1865년에는 런던에서 1865년부터 1867년에는 주네브에서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러시아에서 혁명운동 보급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102-3쪽)

인용문에서 두 러시아 망명 인텔리겐치야의 표기는 부정확하다. '게르첸'과 '오가료프'라고 해야 맞다(박종철출판사판은 '알렉산드르 게르쩬과 니꼴라이 오가르요프'라고 표기했다. '게르쩬'은 맞지만 '오가르요프'는 오기다). 사진은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오른쪽)과 니콜라이 오가료프(1813-1877)의 모습(1861년).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를 참조할 수 있다(게르첸의 유명한 자서전 <과거와 사색>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려나 러시아에서 나온 초판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서양'보다는 '서구'가 더 적합하겠다. '서유럽'을 가리키니까).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은 영어본의 표현으론 'literary curiosity'이다.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어, 러시아판도 있네!"). 그러던 것이 1880년대에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젠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이어지는 건 그 이유다.

당시(1847년 12월)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직도 얼마나 제한된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는 각각의 나라들의 각각의 반정부 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라는 <선언>의 마지막 장이 극히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요컨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러시아와 미합중국. 당시는 러시아가 유럽의 전체 반동의 최후의 거대한 예비군을 이루고 있던 때였으며, 미합중국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여력을 이민을 통해 흡수하던 때였다. 두 나라는 유럽에 원료품을 공급하고 있었고, 동시에 유럽 공업제품들의 판매시장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당시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존 유럽질서의 기둥들이었다.

요는 <공산당 선언>이 씌어지던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미국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열외 지역이었으며(그러니 이 두 나라에서 <공산당 선언>은 남의 나라 얘기였을 테다) 원료 공급처이자 판매시장으로서 유럽의 질서(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달라졌다는 것. 먼저 미국의 경우.

오늘날에는 얼마나 다른가! 바로 유럽의 이민 때문에 북아메리카는 거대한 농업생산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의 경쟁은 유럽의 토지 소유 - 대토지 소유든 소토지 소유든 - 그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게다가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가지 사정이 아메리카 자체에 혁명적으로 반작용하고 있다. 정치체제 전체의 토대인 농업인들의 중소 규모 토지소유는 차츰 거대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며, 공업지대들에서는 이와 동시에 처음으로 대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자본들의 거짓말 같은 집중이 전개되고 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덕분에 미국에서 (1)대규모 농업생산과 (2)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인데,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란 대목은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 '빼앗다'란 동사는 보통 '누구에게서'란 간접목적어를 필요로 하는데, '공업자원들'을 누구에게서 빼앗는다는 말일까?

영어본에서는 "it enabled the United States to exploit its tremendous industrial resources with an energy and on a scale that must shortly break the industrial monopoly of Western Europe, and especially of England, existing up to now."로 번역되는 부분이고, 여기서 'exploit'는 '개발하다'는 뜻이다('노동력'을 목적어로 할 경우에는 '착취하다'로 번역하지만). 풍부한 노동력(이민자)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규모의 자원 개발과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읽는 게 자연스럽겠다(<공산주의 선언>에서는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옮겼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또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 1848-1849년의 혁명 동안에는 유럽의 왕후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부르주아들도 이제 막 깨어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을 러시아의 간섭에서 찾았다. 차르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혁명적 행동의 전위를 이루고 있다.

처음 <공산당 선언>이 나오던 184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였고, 그때의 러시아 황제(차르)는 니콜라이 2세였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1861년 농노해방을 단행한 알렉산드르 2세(사진)인데, 이 1882년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 직전인 1881년에 '인민의 의지' 당원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의 위협 때문에 한동안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가치나에 칩거한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라는 대목은 그런 사정을 가리킨다. 러시아는 이제 유럽 혁명 대오의 전위다!

<공산당 선언>은 블가피하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해체를 선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러시아에서 급속히 꽃피는 자본주의로 인한 현기증과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에 대립하여, 토지의 태반이 농민들의 공동 보유임을 발견한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이렇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지금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두 문단이다. 이 결론부가 아마도 러시아판만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향후 운명(혹은 진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의할 단어는 '오브시치나'(러시아식 농촌공동체, 곧 '농촌 코뮌'을 말한다. 발음은 '옵쉬나'). 강유원본에는 따로 주석이 붙어 있지 않은데, 김태호본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오브쉬치나'를 '오브시치나'로 수정해서 옮겨본다.

러시아 촌락 공동체를 흔히 미르라고 부르는데, 이 촌락 공동체를 토지 소유와 분배 형태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는 오브시치나라고 부른다. 촌락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자연적 결합이며, 가옥은 사유 재신이지만 경지는 공유되어 몇 년마다 성원 사이에 재분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 성원은 분배받은 경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경작했다. 방목지 등은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은 이 촌락 공동체를 근거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7쪽)

지향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해체와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다. 한데, 1880년대 러시아 사회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와 농민 공동체(오브시치나)의 공동소유가 공존하고 있었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였다.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키)은 직접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 비로소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 쟁점에 대한 유익한 안내서가 베르쟈예프의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80)이다. 러시아 지성사의 전개도 다루고 있지만 원제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Russian Communism)'(영역본)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러시아 혁명의 기원과 의미'이고. 참고로, 예전에 같이 소개됐던 <러시아 사상사>(범조사, 1985재판)는 원제가 '러시아 이념'이다.

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Духовные основы русской революции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Русская идея

다시 반복하자면,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얻었던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렇지는 못하다. 마르크스는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며 엥겔스도 1895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역사는 러시아 혁명의 시작과 끝까지도 목격하였다.1880년대에도 "심하게 붕괴된 형태"라고 했던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지금은 거의 와해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 선언>의 메시지는 어떻게 해독되고 실천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계급의 대립을 철폐함으로써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이다.(강유원, 역자후기, 159쪽)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획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가능한가? <공산당 선언> 160주년을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08. 11. 08.

Первая программа Союза коммунистов. "Манифес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в контексте истории

P.S. 이미지는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선언> 160주년 기념판이다. 그리고 아래는 1848년에 나온 독일어판 <공산당 선언>과 1948년에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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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라는 잡지는 <낭만의 망명객>을 읽고서 알게 되었죠.그리고 그 책에 나온 게르첸과 오가료프,게르첸 부인의 삼각관계는 참...거시기하더군요.게르첸은 부인을 친구에게 뺏기고 그 슬픈 마음을 자서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일본에는 번역되어 있다네요.자서전 문학의 명저라는데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엄청나게 두툼하답니다.

로쟈 2008-11-08 16:44   좋아요 0 | URL
네, 꽤 두툼하죠. 저도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을 모셔두고만 있으니까요. 톰 스터파드의 드라마까지 해서 세트로 번역되면 좋을 텐데요. 저는 제 코가 석자라서 엄두를 못 내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를 버린 여자가 다른 남자 애기까지 임신하고...아...그 심정이 어땠을까요.그 무렵에 유럽의 1848년 혁명까지 실패했으니 그가 비관주의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아요.

로쟈 2008-11-08 19: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농민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넘어가니까 아예 비관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겠죠...
 

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출판인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일본의 한 원로 편집자의 인터뷰 기사다. 일본 출판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표적인 인문서적 출판사인 헤이본사의 대표편집국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출판 편집자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저렇게 안면을 튼 편집자들이 열명은 되고, 나 역시도 '편집간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가 던지는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물음에 흥미를 느낀다. 대답은 간명하다. 읽는 것! 그가 참여했다는 '독서회'가 우리 출판계에도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겨레(08. 11. 08) “위대한 편집자는 끝없는 독서가”

한국출판인회의가 창립 10돌을 맞아 기획한 세계출판인포럼을 이틀 앞둔 지난 4일 서울 세종호텔에 여장을 푼 류사와 다케시(63·사진) 전 헤이본(평범)사 대표편집국장의 손에는 노란 포스트잇 딱지들이 잔뜩 끼워진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정말 좋은 책이어서 두 번째 읽고 있다”는 그 책은 <조선전쟁의 사회사>,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쓴 <전쟁과 사회>의 일본어 번역본이다.

편집자는 무엇보다도 ‘읽는’ 존재다. 그밖에도 다양한 역할과 중요한 일이 편집업무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편집의 진정한 핵심은 ‘읽는 것’이다. 그게 거의 대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쓴이가 하지 못하는 것, 글쓴이 이상으로 편집자에게 가능한 것, 그것은 읽는 것이고 정독하는 것이며 비평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편집이라는 끝이 없는 일의 출발점이 아닐까?”

이번 포럼에서 발표할 글의 주제인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읽는 것’,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전세계 출판인 50여명이 함께한 이번 포럼에는 출범 4년째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7차 대회의 확대판으로 세계편집자포럼도 함께 열렸다.

게이오대학 경제학부에서 사상사를 전공한 그가 일본의 대표적 인문서적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헤이본사에 입사한 건 1968년. 신출내기 편집자 시절부터 담당했던 대표적 혁신계 사회과학자요 인문학자인 후지타 쇼조(5년 전 작고)를 따라 대여섯명 규모의 독서회에 참가했다. 고전학자 사이고 노부쓰나와 함께한 또다른 독서회는 그가 지난 1월 타계할 때까지 37년간이나 계속했다.

일본 고전과 구미의 고전 중에서 번역되지 않은 문학이론이나 역사이론서들을 “한 줄 한 줄 소리내어 가며 매우 엄밀하게 읽었던” 독서회는 매월 1회 일요일 오후에 6시간씩이나 이어졌다. “매번 준비하고 사전조사를 하는 게 몹시 힘들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직무상의 일과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 여겼고, 거기서 읽는 일의 즐거움과 깊이를 느꼈다. “30여년이나 계속된 독서회는 아마 드물겠지만, 헤이본사 내에도 독서회가 여럿 있었을 정도로 일본 출판계엔 70년대까지는 그런 모임이 상당히 많았다. 그게 일본 출판계 힘의 원천이었다.”

2000년까지 32년간 헤이본에 근무하면서 8년간 편집일 전체를 총괄하는 이사로서 대표편집국장직을 맡았고 방대한 백과사전의 디지털화라는 선구적 작업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충실한 ‘읽기’가 바탕이 됐나 보다. 근대 일본의 발전은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이에 조응한 방대한 서책(書物) 발간의 상호 상승작용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그는 말했다.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이와나미 신서의 권당 10만부 판매 여부가 성패의 척도가 될 정도로 책이 많이 읽혔다. 대형 출판사들은 매년 대졸자들을 5~6명씩 뽑았고 그들의 월급은 일반 대기업 사원들보다도 월등 높았다. 그들은 최고급 지식인들이었으며 유명작가들도 편집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조락의 기미가 보이더니 90년대 들어서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와나미, 주오고론, 고단샤에서만 나왔던 신서들도 여기저기서 출판됐으나 비슷한 기획들로 차별성이 없어졌으며, 그나마 괜찮다는 이와나미 신서 초판이 1만여부 판매 수준으로 졸아들 정도로 기운은 쇠락했다. 탈활자화가 무섭게 진행됐다. “2000년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신문연구소의 후신)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신문 읽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5% 정도가 손을 들었다. 호세이(법정)대 강의 때도 매년 그렇게 물었는데 손 든 사람은 3~5%밖에 되지 않았다.”

편집자들도 여유가 없어졌다. “예전엔 편집자 한 사람이 연간 6~8권의 단행본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때의 2배인 10여 권이나 된다.” 부수가 적더라도 수십년 이상 꾸준히 읽히면서 영향력이 지속되는 좋은 책이,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라도 단기간에 그 영향력이 끝나버리는 매체나 책보다 훨씬 더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편집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해서는 좋은 책이 나올 수 없다.”

독서행위 자체를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로 파악하는 그는 과잉 시장화·상품화가 부른 출판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해 반지성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국경을 넘은 공동전선이 필요한 것이다.

1년에 3~4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재체제 아래서 한국 젊은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해적판을 구해 읽었다는, 상상도 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에서, 만든 이들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이의 것이 돼버리는 책의 엄청난 침투력을 새삼 실감했다”고도 했다.(한승동 선임기자)

08. 11. 07.

P.S. 독서행위 자체가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라는 주장에 눈길이 간다. 일종의 '독서 코뮤니즘' 아닌가?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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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8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8-11-08 10:5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의 표지가 참 인상적입니다. 찾아보니 국내 디자인 팀의 작업이네요. 이래저래 책은 영물인가 봐요. 덕분에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책만한 물건도 드물죠.^^;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엔 정말 재미있는 일화가 많아요.소련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구요,칼 쇼르스케가 일본 방문한 이야기도 있어요.한때 일본에 함스부르크 황혼기에 대한 책이 많이 팔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1-08 16: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9   좋아요 0 | URL
독서회에 모여서 저렇게 책을 읽는군요.정말 대단한 직업의식입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저런 모습이 '스탠다드'라면 좋을 텐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3   좋아요 0 | URL
저도 80년대의 일본의 인문사회과학 번역본들을 90년대부터 헌책방에서 꽤 사모았죠.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그리고 광주의 모 도서관에는 아사하라 쇼코(오옴 진리교 교주)의 저서<최후의 해탈자>도 있답니다.이 이야기를 광주사는 일본 남성에게 했더니 와...한국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11-08 19:51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어지간한 대학도서관에도 없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44   좋아요 0 | URL
아사하라 쇼코가 광주에 오옴 진리교 한국지부를 두려고 그랬을까요.

로쟈 2008-11-09 20:52   좋아요 0 | URL
ㅎㅎ 광주 분위기가 그런가요?..
 

'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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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1-07 13:22   좋아요 0 | URL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Da im Wissen sowohl als in der Reflexion kein Ganzes zusammengebracht werden kann, weil jenem das Innre, dieser das Äußere fehlt, so müssen wir uns die Wissenschaft notwendig als Kunst denken, wenn wir von ihr irgend eine Art von Ganzheit erwarten. Und zwar haben wir diese nicht im Allgemeinen, im Überschwänglichen zu suchen, sondern, wie die unst sich immer ganz in jedem einzelnen Kunstwerk darstellt, so sollte die Wissenschaft sich als jedesmal ganz in jedem einzelnen Behandelten erweisen.

문제 삼으신 곳은 독일어에서도 역시 지시대명사 "diese"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예를 들어 이 부분이 첫 문장에서처럼 "jenem(Wissen)"과 "dieser(Reflexion)"로ㅡ두 명사의 위치와 성이ㅡ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문맥이었다면 그것이 "전체성(Ganzheit)"을 가리키는 것인지 "학문(Wissenschaft)"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단어 모두 여성 명사라 "diese"가 지시하는 것을 명사의 성으로 따져보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는군요.^^;

다만 1) 문법적인 관점에서 "diese"가 그 이전 문장 안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했던 단어를 받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말은 "전체성(Ganzheit)" 또는 "모종의 전체성(eine Art von Ganzheit)"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문 역시 예술의 방식을 따라 일반적인 것(das Allgemeine)과 과도한 것(das Überschwängliche) 안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einzelnen) 것 안에서 전체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역시나 "diese"는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두 번째 번역에서 "학문"으로 옮겨진 목적어를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축자적인 면을 고려하는 적확한 번역을 생각할 때는 두 번째 번역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7 23:26   좋아요 0 | URL
네, 짐작대로군요. 러시아어에서도 '전체성'과 '학문'이 모두 여성명사입니다.^^;

2009-03-0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랑구 2009-03-10 01:35   좋아요 0 | URL
로자님,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 권 부쳐드리고 싶습니다.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학문과 전체성 얘기의 힌트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지난 번 글은 꼭 '비밀 댓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체크하는 난이 있기에 어리버리 체크하는 바람에..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아감벤(남겨진 시간), 바디우(사도 바울), 랑시에르(미학안의..), 지젝(죽은 신..)의 글들을 죽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벤야민이 간섭되고 있는 글들이고요. 그들이 서로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들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도 와 닿아야하는데, 그 점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 그런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로쟈님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참, 기술복제도 최근에 로쟈님 지적을 숙고하면서 좀 손질을 봤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감사^^ 그 때 제가 반응을 했었죠. 여하튼...

로쟈 2009-03-10 06:20   좋아요 0 | URL
아,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내달에나 읽어볼 듯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벤야민 커넥션에 대해선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아침에 주간지를 읽느라고 신문은 챙겨보지 못했는데, 경향신문에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 2008)의 저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책에 대한 소개는 며칠 전에 스크랩해놓았고(http://blog.aladin.co.kr/mramor/2378599), 내친 김에 인터뷰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11. 03) "고착화된 시스템에 우리 문학 갇혀 있다”

“황석영 작가의 최근작들은 수준 미달인데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름값 덕에 무조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문학평론가 조영일씨(35·사진)가 최근 펴낸 첫 비평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에서 작가 황석영씨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동안 인터넷 공간을 통해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이 책에는 우리 문학을 향한 쓴소리로 가득하다.



조씨는 2006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롯해 <세계 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등 가라타니 고진(67)의 저서를 꾸준히 번역해 소개해온 ‘가라타니 전문가’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4년 겨울 ‘문학동네’에 게재된 자신의 강연문 <근대문학의 종언>을 통해 한국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을 지적했고, ‘한국문학의 위기’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문학비평가. 조영일씨는 이번 비평집 제목에 가라타니의 이름을 빌렸지만, 자신의 잣대로 국내의 작가와 비평가를 포함해 한국문단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근대문학의 종언> 후 4년이 지났지만 이 시대의 한국문학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단지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가라타니 고진에 천착하는 이유도 한국에 가라타니 고진만한 비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을 내세운 것도 폐쇄적인 한국문단에 이질적 요소를 집어넣어 그것을 깨보자는 의도입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제도화되면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며 고착화된 문학 시스템을 우려했다. “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유력 문예지와 출판사 위주로 편성된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운동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젊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더 딱합니다. 새로운 문학을 말하면서 기존 시스템에 속할 생각만 하고 시스템 내부에 들어가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해요.”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써왔기 때문일까. 그는 문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말하는 작가 황석영씨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 ‘국민작가’라는 월계관 뒤에 숨어 입담으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객지>, <한씨연대기> 등 초기 작품은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랜 외국 생활 뒤에 쓴 <오래된 정원> 이후의 작품들은 솔직히 수준 미달인데, ‘황석영’이라는 이름의 후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신작 <바리데기>가 작품으로선 실패인데, 문단의 찬사를 받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에겐 성역이 없다. 비평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서도 ‘비평의 노년’이라며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객관적 평가 없이 낙관론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비평가 백낙청 선생은 문단의 어른이십니다. 어른이니까 자꾸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가 쌓아올린 것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현재를 바라보려 합니다. 일부 신세대 유명 작가들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라 칭하시는데, 보람은 어떤 일을 한 뒤에 회고를 하는 것이죠. 앞을 보지 않고 현실에 자족함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우리 문단의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제시했다. “최근 조경란씨 소설과 관련, 표절 의혹을 덮고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문단 내부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발언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젊은 사람들이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새로운 문예지와 동인지의 등장이 필요해요. 그런데 젊은 작가들은 신춘문예 등단의 출세코스를 밟으려고만 하니….”

그는 동인지를 낼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 운영 중인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 올해 말 무크지 형태로 낸다. “계속 인터넷 글쓰기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겠습니다. 제 문제제기에 대해 문단이 귀 닫지 않기를 바랍니다.”(이영경기자)

08. 11. 03.

P.S. 황석영의 <바리데기>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는 십분 동의한다(많은 비평가들이 그럴 테지만 그들은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한편, 카페 '비평고원'에는 나도 발을 담그고 있는데, 요즘은 좀 뜸하게 활동했다. 흠, 이러다가 자아 비판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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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1-0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리데기를 읽고 대체 뭐에 그토록 감동을 받았는지 의아했죠. 하지만 제가 제대로 못느끼는거라고 셀프플레임을 해버렸는데. 다른 시각이 있고,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조차 없는 문단이란. 자아비판, 섬짓한데요^^

로쟈 2008-11-05 07:03   좋아요 0 | URL
저는 용두사미가 돼버린 소설로 읽었습니다. 기획은 거창하지만 마무리가 따르지 않는. 자아비판은 서재에서도 해야 하는데, 당체 글을 제대로 쓸 만한 짬을 못 내고 있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서점에서 선 채로 통독했는데 되게 재밌어요.일본에선 윤흥길의 <장마>가 황석영의 소설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요.황석영 씨는 자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나카카미 겐지를 우익이라고 혹평했다는 이야기도 있고...그리고 문지나 창비에서는 가라타니 번역서가 한권도 없다는 것도 지적했어요.

로쟈 2008-11-05 07:01   좋아요 0 | URL
반 이상은 가페 비평고원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왼발 2008-11-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도 죽고 철학도 죽고 신학도 죽고 예술도 죽고 문학도 죽고 인간도 죽고 역사도 죽고 정치도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음의 시대

로쟈 2008-11-06 23:31   좋아요 0 | URL
'종언'은 죽음처럼 부정적인 것만 아니어서 '완성'이란 의미도 갖습니다. 정년퇴임 같은 것이죠...

쉽싸리 2008-11-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리데기가 그렇군요.비판적인 얘기를 들은게 없어서. 찾아보면 있었겠지만,,
바리데기 읽으면서 결말이 허무하다. 그냥 다 아우르려하는구나 정도 생각이 들었던것 같네요.

로쟈 2008-11-07 23:29   좋아요 0 | URL
기대만큼의 작품들을 쓰고 있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