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케리아트'란 신조어가 있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유행어인 듯하다).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분류하자면 나도 프리케리아트로군). 아래 박혜영 교수의 칼럼에서 이 단어의 의미와 '프리케리아트 시대'의 배경에 대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최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는 올해의 대표 키워드를 '자기치유'라고 발표했는데, '희망 잃은 사회' 내지는 '희망 빼앗는 사회'로 내몰린 대중(프리케리아트)의 불가피한 독서 성향으로도 읽힌다. 그 '자기치유'로 우리는 과연 '치유'받을 수 있을까?.. 

교수신문(08. 11. 10) 藤田省三과 땅끝에 선 사람들

지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은 불안감이다. 경제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대통령후보에게 다른 자질은 전혀 묻지 않고 몰표를 몰아준 이유는 이 불안감 때문이었다. 경제지상주의와 무한생존경쟁시대를 맞아 한번 밀려나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극사실주의적 현실의식이 결국 떠받쳐준 당선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직장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건강해도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해도 불안하며, 성공해도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불안하다.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가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스승도 없이 각자 돈벌이에만 올인하는 끝없는 경쟁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윤리나 미학은 대학교양과목으로도 팔리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관심은 애완동물에 대한 배려에도 못 미칠 지경이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삶도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깨달음이 됐고, 투기와 사기는 이런 불안한 시대의 강을 건널 유일한 방법이 돼 버렸다. 치고 빠지는 기술이 최고의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되고, 불안을 먹고 자라는 보험산업, 펀드산업, 오락산업, 노름산업 등이 최고의 돈벌이 산업으로 떠올랐다. 



우리시대의 불안은 과학지식이 없던 시절 인류가 자연과 우주에  막연히 느꼈던 신비적 두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우리시대의 불안은 자본주의 초기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두려움과도 다르다. 단결할 노조조차 없고, 계급적 당파성조차 모호한 무한계약직, 혹은 임시비정규직이 모든 경제분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프리케리아트’(precariat)란 말은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에서 나왔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널리 퍼진 일시적, 유동적, 간헐적, 비공식적 노동조건의 확산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불안이 이들의 전반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리케리아트는 우리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한 전혀 새로운 세대이며, 초국적 후기산업자본주의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전방위적인 자본의 공격에 노출돼 있지만 사람들은 단결할 계급의식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더욱 파편화되고 말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공포로 위기상황은 일상화됐지만,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오직 혼자서만 분투하다 절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것은 지금 확산일로에 있는 이 프리케리아트들인지 모른다. 



원래 ‘프리케리어스’는 ‘기도에 의해 얻어지는’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이 말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위험에 대한 민중의 인식과 동시에 그런 삶의 불확실성을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해 순정의 기도로 이겨내려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케리아트는 원래의 종교적 실존의식과는 무관한 채 오직 경제적으로 끝없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리며 불안해하는 우리시대의 모든 약자들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의 삶의 평화란 경제적 성공으로만 보장될 수밖에 없다. 즉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가 만들어낼 안락에의 평화이다.

일본의 현대문명사상가인 후지따 쇼오조오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라는 글에서 억제라고는 모르는 고도 기술사회의 정신적 기초가 바로 이 경제인간들의 안락에 대한 광적인 추구와 안락의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이라면서, 이런 정신상태는 마침내 안락에 예속 되고, 따라서 사회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기가 두렵다. 실직이나부도로 인한 사람들의 자살소식이 너무 많아서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낄 때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에 의지해서라도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토로했듯이 인간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금 우리세대는 강을 건널 배도 없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을 눈도 없이 그저 무작정 강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쇼오조오가 말한 이런 안락한 지상의 평화에서 내몰린 우리시대의 프리케리아트에게는 차라리 사람의 운명이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믿었던 과거 희랍시대가 어쩌면 더 안전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박혜영 인하대·영문학)


 
한겨레(08. 11. 14) 희망 빼앗는 사회 속 ‘자기치유 열풍’

경제경영서를 펴내는 한 출판사 대표는 자신이 최근 ‘멜라민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멜라민을 이용해 수많은 식품을 만드는 일을 줄곧 해 왔는데 갑자기 멜라민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 앞이 노랗다는 이야기였다.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해 모든 기획을 진행해 왔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책 시장에서 신자유주의 철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그동안 기획해 놓았던 책의 대부분을 폐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 한다. 그러니 폐기해야 할 기획의 선인세를 크게 오른 환율로 당장 갚아야 하는 것부터가 난감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 어디 그 출판사 대표뿐이겠는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을 뽑아놓았지만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갈팡질팡하기만 해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나마 내세우는 정책마다 모두 가진 자를 위한 것뿐이라 없는 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지난 10년간의 상실감을 정신분열적 정책으로 되갚는 듯하다. 그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의 확산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 고사상태로 빠져드는 문화시장, 해소되지 않는 청년실업,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자살자 증가 등으로 대중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희망을 잃고 단지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상태다. 따라서 스스로 위안받는 자기치유(self-healing)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이미 ‘성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몰두한다. 이 자기치유가 2008년 출판시장을 상징한다. 대중은 이제 ‘물질’이나 ‘권력’의 획득도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만을 찾고 있다. 또 먼 미래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시크릿>(론다 번 외)의 ‘비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응원’, <하악하악>(이외수)의 ‘거친 숨소리’, 아고라 광장에서의 치유로서의 글쓰기, <개밥바라기별>(황석영), <완득이>(김려령), <리버보이>(팀 보울러) 등 성장소설, 죽음과 자살을 다룬 책, 섬세하게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심리학 서적 등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올해 출판시장에서 자기치유가 거대한 흐름을 이뤘음을 방증한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정말 우리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기 어렵다. 개인에게는 국가나 사회, 나아가 가족 등 거의 모든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오로지 스스로 위로하며 절망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출판시장에서는 자기치유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0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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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6 21:02   좋아요 0 | URL
공감하지만.. 아래 허연의 시집을 선택하겠어요!! ^^ 내 치유는 그를 통하여.

로쟈 2008-11-16 21:17   좋아요 0 | URL
"가난한 사람이 음식 앞에서 수줍어하는 것처럼 나는 오늘 눈물 앞에서 수줍어합니다." 아무데나 펼쳐서 읽은 구절입니다. '치유'에 도움이 되시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 출간됐다. 올해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로 처음 소개된 이 철학자의 책들이 여러 권 더 출간될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바울로)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인<남겨진 시간>이 먼저 나오는 줄은 몰랐다. 출판사나 역자도 의외이고. 아무려나 바울과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묵직한 독해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는 그런 '묵직한 독해'를 따라가기 이전에 '색인' 같은 '곁다리텍스트'나 가볍게 읽어본다.

어제 책을 들고 와서는 습관처럼 '인명색인'을 들춰보았다. 책의 품새와 역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데 가장 간편한 지표가 되는 것이 이 '색인' 혹은 '찾아보기'다. 어째서 그런가? 고유명사의 표기를 보면 역자가 국내에 소개된 저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표기를 쓴다면, 그건 역자가 해당 저자를 모르거나,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겨진 시간>의 인명색인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건 '게르숌 쇼렘'이다. 14쪽에서 '게르숌 쇼렘 Scholem'이라고 처음 등장하는바 벤야민의 친구이자 유대교 철학자 '게르숌 게라르트 숄렘(Gershom Gerhard Scholem, 1897-1982)을 가리킨다.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일단, 성이 '숄렘'이므로 'ㄱ'이 아닌 'ㅅ' 항목에 배치되어야 하지만 'ㄱ'쪽에 나오게 된 건 색인 작성자가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ㅎ' 항목에서 '하이데거' 다음에 '한나 아렌트'가 나오는 식인데, 이런 색인을 정색을 하고 작성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퀴즈. '미셸 푸코'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셸'이니까 'ㅁ'에서다. '미그엘 드 세르반테스'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그엘'이므로 'ㅁ'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자크'니까 또 'ㅈ'이고, '조르주 바타이유'도 'ㅈ'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가 아니어서 그냥 'ㅋ'에서 찾는다. '칸트'도 'ㅋ'. 하지만 '칼 슈미트'는 'ㅅ'이 아니라 'ㅋ', 뭐 이런 식으로 대중없다. 참고로 이런 조잡한 색인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책은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허접한 '찾아보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쇼렘'. 왜 '숄렘(Scholem)'이 아니라 '쇼렘'이 됐을까? 첫째는 역자가 '숄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일역본을 참조해서다(옮긴이 후기에는 영어본을 옮겼다고 했지만 내 짐작으론 일어본을 옮긴 듯하다). 가령 '히포라테스(Hippokrates)'는 '히포라테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본식이다. 'l'과 'r'의 표기방식이 우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일역본을 참조했거나 일어 표기법에 따르고 있다는 건(물론 익숙한 저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표기를 따르고 있지만) 역자의 약력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더라도 편집자나 교정자가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인문서를 다루는 편집자/교정자라면 말이다.  

다시 퀴즈. 'ㅂ' 항목에 가 있는 '벤야민 월프 Benjamin Whorf'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할까? '벤자민 워프'라고 표기하고 'ㅇ'에 배치해야겠다. 일단 '워프(Whorf)'가 '월프'가 된 것이 일어식 표기라는 건 지적한 대로다. 워프가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엉뚱한 표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벤자민 워프'는 '에드워드 사피어'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교정되어야 할 인명들이 이 색인에는 다수 등장한다. '본헤퍼(Bonhoeffer)'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가리킨다. '부르멘베르그(Hans Blumenberg)'는 저명한 문학이론가 '한스 블루멘베르크'이고 '레비트(Karl Lowith)'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나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칼(카를) 뢰비트'로 표기된다. 어느 경우이건 요즘은 검색창에 이름을 한번만 처넣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인명들이다. 게다가 독일 시인 '횔덜린(Holderlin)'을 굳이 '횔더링'으로 새로 작명하는 일 따위는 피해도 좋지 않을까?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Trubetzkoy)의 유무대립(privative opposition)이라는 개념"을 "트루벳코이의 결여적 대치라는 개념"(169쪽)으로 옮기는 건 어찌해볼 도리가 없더라도 말이다.

물론 본문은 이런 부실한 고유명사 표기나 인명색인과는 달리 충실하게 옮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곁다리텍스트'에 대한 이런 일람은 '텍스트'에 대한 기대를 얼마간 잠식하는 것도 사실이다. <남겨진 시간>의 역자나 편집자가 이미 앞서 나온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만 참조했더라도 많은 오류/오기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지나친 기대일까?

한편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에도 재미있는 오류가 하나 있다. 'ㅇ' 항목에 '윌슨, 에드워드 O.(Edwaard O Wilson)'이라고 나오는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을 가리키는 것. 아감벤의 책에 어인 카메오 출연인가 싶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Paul Ravinow refers to the case of Wilson, the biochemist who decided to make his own body and life into a research and experimentation laboratory upon discovering that he suffered from leukemia"(185쪽) 이것을 번역본은 "폴 래비노우(Paul Rabinow)는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윌슨은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자기 신체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무제한적인 연구의 실험의 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348-349쪽)라고 옮겼다.

문제는 에드워드 윌슨(1929- )이 아직 살아있으며 백혈병 환자도 아니라는 것. 역자나 편집자는 '윌슨'이란 이름만으로 예단하여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풀네임을 병기해주고 '생화학자(biochemist)'를 '생물학자'라고까지 수정해준 듯하다. '에드워드 윌슨'이 '윌슨'이란 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긴 하지만, 백혈병에 걸려서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증한 생화학자는 따로 있으니 짐작에 '앨런 윌슨(Allan Wilson, 1934-1991)'이 그이다('짐작에'라고 한 것은 백혈병으로 죽은 생화학자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책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다).

만약 앨런 윌슨이라고 하면, 뉴질랜드 출신의 이 생화학자는 '미토콘트리아 이브' 가설로 유명한 분자생물학자이기도 하다. 현대여성이 15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가설로 ‘아프리카 기원론’ 또는 ‘이브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살아있는 신체를 기증함으로써 윌슨은 그것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대상으로 만들었다. 래비노우는 이러한 윌슨의 생명을 '실험실의 생명(experimental life)'이라고 불렀다. 아감벤은 이를 '더이상 조에와 구분되지 않는 비오스'의 사례로 제시한다.   

아무려나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 교정을 한다면 본문의 한 대목도 같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의 '노모스'로서 수용소를 다룬 대목으로 이렇게 번역된 부분이다. "수용소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외상태와 수용소 사이의 이러한 구성적 연결관계를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319쪽)

문맥상 이상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The importance of this constituive nexus between the state of exception and the concentration camp cannot be overestimated for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he camp."(168쪽)라고 돼 있다. 'cannot be overestimated'는 직역하면 '과대평가될 수 없다'이고,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다. 아감벤의 핵심적인 주장과 관련되는 부분이라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08.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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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5 15:18   좋아요 0 | URL
정말 색인을 저런 식으로 만들면 정말 거시기하겠군요.그리고 디트리히 본헤퍼...헤픈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게 왜 저렇게 표기를 했죠?
제가 헌책이 많기 때문에 일제시대 세대들이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습니다만 요즘에도 저런 표기를 한다니 뜻밖입니다.

로쟈 2008-11-15 16: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엉터리 색인들이 많아서 '색인'이란 것 자체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란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크네히트 2008-11-18 13:39   좋아요 0 | URL
궁금한게 있는데요. 왜 벤야민 워프가 아니고 벤자민 워프이 되는 건가요? 발터 벤야민은 벤야민이 맞는 것 아닌가요? 혹 워프가 미국에서 활동한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발터 벤야민이 표기법상 틀린 건가요? 궁금해서 문의드려요^^

로쟈 2008-11-18 16:01   좋아요 1 | URL
같은 이름이라도 독어와 영어를 읽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벤야민 프랭클린'이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죠. 발터 벤야민을 '베냐민'이라고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미 '벤야민'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습니다...
 

이번주 시사인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55#).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허연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를 소개하고 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란 시 등이 마음에 들어서 서평을 읽고 바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주문했다(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알라딘에서 할인판매하고 있다).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같은 구절들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가 맨앞에 실려 있다(미리 말해두자면 내 얘기는 아니다). 해서 나는 김경주의 두번째 시집 <기담>보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지지하기로 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시들에 끌리는 법이다(시인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2698&PAGE_CD=19 참조)...

 

시사IN(08. 11. 11) 이제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사는 그대에게

언제 나이를 실감하시는가. 내가 좋아하는 L선생님의 말씀. “예전에는 나랑 동창인 녀석들이 그라운드를 누볐어. 지금은 그 녀석들이 다 감독이 돼 있더라고.” 어르신들께는 민망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10년쯤 선배인 분들이 쓴, 삶의 피로가 흥건한 시를 읽다가 ‘어어’ 하면서 와락 공감이 되어버릴 때 나이를 느낀다. 20대였으면 ‘왜 이렇게 징징거려!’ 하고 말았을 것을. 시인 허연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가 그랬다는 얘기다. 첫 번째 시집 이후 13년 만이다. 왜?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가 아니다.”(‘면벽’에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슬픈 빙하시대2’에서)

생업에 시달리느라 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시와 그만 어색해진 것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유라서 새삼 더 쓸쓸하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래서 이 시인의 마음에도 슬픈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였던가 보다. 가끔 술자리에서나 폭발할 그런 신경질. 게다가 신경질 한번 부릴라치면 후배는 얄밉게 말한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쓸쓸하다. 이 쓸쓸함이 이 시집에 흥건하다. 그러나 밥을 버는 일, 그거 하찮은 일 아닐 것이다. 밥을 버느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밥을 벌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의 쓸쓸함에도 마음이 짠했지만 밥벌이의 준엄함을 인정하면서 삶을 견뎌내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일요일’에서) 체념인가 다짐인가. 나는 그냥 다짐으로 읽어버렸다. 이런 시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다시 ‘나쁜 소년’이 되겠다는 이 오기가 멋지다. ‘밥과 시’가 과연 상극일지라도,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나쁜 소년’ 선배를 볼 때 후배는 막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푸른 잉크 한 통을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1. 14.

P.S. 참고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에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이 한 줄이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아주 오래전 이상희의 시집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1992)을 읽으며 이미 작별을 고했건만 굳이 '확인사살'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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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문을 넣어야겠군요.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

PhEAV 2008-11-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20대 중반인데도 읽고 싶네요. <기담>보다 더!
(아니 무슨 청춘이 갔다고!)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마음으론 중년이신가 보네요.^^
 

아침에 읽은 문학기사를 옮겨놓는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 30주년을 맞아 오늘 교보문고에서는 기념행사가 있었다 한다. 개인적으로 <난쏘공>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베스트셀러이다. 70년대 후반 매주 베스트셀러 통계가 방송될 때 언제나 1위는 <난쏘공>이었다(때문에 당시엔 <난쏘공>이 대중문학 작품인 줄 알았다. 그게 어즈버 30년 전이다!). 이번에 30주년 기념 문집까지 출간됐지만, 정작 작가가 바라는 세상은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사회이다. 아직 요원해 보인다...

한겨레(08. 11. 14) ‘난쏘공’ 안읽히는 사회 오길 그토록 바라건만…

자기 작품이 널리, 세대를 거듭해 읽히기를 원치 않는 작가가 있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쓴 조세희(65)씨는 이 점에서 확실히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난장이 가족의 절규가 호소력을 갖지 않는,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평범한 세상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난쏘공>을 찾는 독자는 해마다 늘었다. 2만에서 4만, 다시 6만으로. <난쏘공>의 판매량은 이 사회에 미만한 ‘고통의 총량’에 정확히 비례했다.


지난 11일 <난쏘공> 발간 30년을 기념해 그를 만났다. 30년이면 ‘팬지꽃 앞에서 줄이 끊어진 기타를 치던 영희’ 세대의 여자들이 <난쏘공>의 대학생 독자 두엇은 능히 길러냈을 세월이다. 이명박식 토건논리대로라면 “낙원구 행복동 난장이가 살던 집을 부수고 지어진 그 아파트가 이미 재개발되어, 하늘을 찌르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로 탈바꿈하기에 충분한 시간”(한홍구)이기도 하다. 그사이 <난쏘공>은 100쇄(1996년 4월)와 200쇄(2005년 11월)를 넘기고 100만부(2007년 9월)를 찍었다.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했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거야.”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파괴를 견디고’ 따뜻한 사랑과 고통받는 피의 이야기로 살아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칼’의 시간에 작은 ‘펜’으로” <난쏘공>을 썼다고 했다. 이런 <난쏘공>을 향한 평가가 마냥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계급’과 ‘전망’에 대한 신경증적 강박이 짓누르던 시절, <난쏘공>은 곧잘 황석영의 <객지>와 비교당했다. “<객지>와 <난쏘공>의 차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근원적 신뢰인가 감상적 연민인가, 동일시인가 대상화인가에 있다”는 평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민중문학 진영의 저명한 평론가는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고까지 날을 세웠다.

“80년대에 내 작품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난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론이 뭔지 몰랐어. 따져보면 그 사람들 말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당시 내 책을 ‘노동자 팔아먹는 지식인 소설’이라고 앞장서 공격하던 사람들이 돌연 태도를 바꿔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걸 보면 쓸쓸해.”

30년을 기념해 후배·제자들이 펴낸 헌정 문집의 제목은 <침묵과 사랑>이다. 사랑은 조씨가 <난쏘공>에서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작동원리다. 30년 전 그는 난장이 아들 영수의 입을 빌려 썼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그러나 완강한 현실은 그의 바람에 증오로 응답할 뿐이었다. 침묵은 그래서 조씨가 택한 세계와의 대면 방식이 됐다. 이런 점에서 <침묵과 사랑>이란 제목은 <난쏘공> 이후 조세희의 삶을 응축시킨 단어들의 조합이자, 침묵을 깨고 사랑이 필요한 현실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이 시대 수많은 난장이들의 간구와 염원의 표현이다.

후배들은 애초 이 책을 ‘80년 광주’의 역사적 기원을 다룬 조씨의 첫 장편 <하얀 저고리>와 함께 출간하려 했다. 그런데 조씨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젊었을 때 막 뛰쳐나와 써 달라던 단어들이 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집중하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얀 저고리>는 어떻게든 살아 있는 동안 쓸 거야. 인생 일흔까지 채우면서라도 끝을 내고, 내가 찍은 사진과 함께 후손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띄우려고 해. ‘난 300년 전 살았던 할애비인데, 이것 좀 확인해다오. 박정희는 아직도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지, 독일의 히틀러는 또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우리는 광화문 네거리에 절박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뛰쳐나갔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헤어졌던 불행한 세대란다’라고.”

<난쏘공> 30돌을 기념하는 작품 낭독회는 14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다. 조씨와 배우 조재현, 소설가 이혜경씨 등이 참석한다.(이세영 기자)

08. 11. 14.

P.S. 작년 가을 <난쏘공> 100만부 돌파 기념 페이퍼로는 '조세희가 쏘아올린 큰 공'(http://blog.aladin.co.kr/mramor/1543793) 참조. 한편 계간 <작가세계>는 조세희를 두 차례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미완의 <하얀 저고리>도 잡지에 연재됐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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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에도 '노벨상'이 주어진다고 한다. 노르웨이 정부가 주관하는 홀베르상이 그것이란다. 처음 듣는 상인데, 상금이 자그만치 10억이 넘는다고 하니 '노벨상' 맞는 듯싶다(상금은 더 많은 것 아닌가?). 2003년에 제정됐다고 하니 나만 과문한 건 아니겠다. 이미 줄리아 크리스테바, 위르겐 하버마스, 쉬무엘 아이젠스타트, 로널드 드워킨 등이 수상을 했고, 올해 수상자가 미국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고 한다. '연로한' 제임슨의 근황 소식도 겸하고 있어서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11. 14) "세계문학은 보편 가치를 좇는 공간 아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74)이 노르웨이 정부가 주관하는 홀베르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제임슨은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듀크대에서 10일 오후(현지시각) 수상 기념 강연을 했다. 듀크대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영문학자 신명아 교수(경희대)가 직접 강연을 듣고 글을 보내왔다.

11월26일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의 저자인 미국의 좌파지식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78만달러(10억6천만원 가량)의 상금이 수여되는 홀베르상을 수상한다. 제임슨과 더불어 미국의 좌파 문화이론을 선도하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생산관계를 현대판 노동자인 다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제국>을 네그리와 함께 쓴 마이클 하트는 <한겨레> 독자를 위해 이 수상이 “문학과 문화분석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이라고 정의해 주었다.

지난 10일 듀크대는 ‘세계문학은 외국 사무소를 가지는가?’라는 제임슨의 기념 강연과 저명한 작가, 인문학자들의 축하 논평으로 이 수상을 축하했다. 제임슨은 “각각 다른 국가의 비평가들과 사고가들의 관계망”으로서의 세계문학은 독일 작가 괴테가 영국 시인 바이런의 텍스트를 읽는 2자적 관계가 아니라 양쪽 독자(작가)들이 양쪽 나라의 역사적·국가적 상황에 매개되어 쌍방의 텍스트를, 저항이든 수용이든, 자신의 국가적 상황과 관계하여 접근하는 “(각 나라의) 역사들과 구체적 역사적 상황들 사이의 복잡한 접촉”의 장으로서 4자적 관계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제임슨은 작품이 자신의 고유 형태와 그 바깥(역사, 사회)의 변증법적 산물이듯이, 현대사회는 국가를 무화시키기는커녕 전지구적 자본의 유동성을 위해 국가의 이름으로 주체들의 임금이나 권리를 희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의 관계를 가진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문학은 “국가적 산물의 관계이자… 투쟁, 경쟁 및 대립의 장이자 공간”으로서 “고전들의 (죽은 것을 위한) 신전이나 ‘상상적인 박물관’이 아니라 각 차이들이 어떻게 관계하고, 어떻게 국가성이 보편화되고, 전지구적 복수성이 중심이 없이 생각되어질 수 있는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다른 이름”임을 지적한다.

제임슨은 “가치는 역사적이다”라는 신념 아래 세계문학은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아니라 “급진적 차이와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불균등한 정전성”이 허용되고 보편과 개체성의 변증법적 양가성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제임슨은 자신의 이번 수상은 헤게모니적 유럽 중심 기관으로부터의 수상이 아니라 비헤게모니 국가로부터의 수상이라는 점에서 ‘중심이 없는 세계문학’의 의미가 특히 부각된다고 보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는 특히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 독자들의 문학적 고립성을 지적하면서, 세계문학은 어린 아이가 자기 나라의 문학이 아닌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그런 순수한 감각으로 다양한 지역과 물질성에 기초한 이야기들이 세계인에 의해 서로 애호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평했다. 라틴 계열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라틴 작가 카르펜티에와 미구엘 아스투리아스가 파리에서 유럽과의 마찰로 더 고유한 문학을 창출해낼 수 있듯이, 각 문화의 산물은 시장을 통해 원심력적으로 혹은 구심력적으로 왔다갔다 하며 자신의 문학을 창조적으로 교환하고 생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임슨의 홀베르상 수상은 우리 사회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시각에 균형을 가져다 줄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백낙청 교수가 수상식 전날 같은 곳에서 개최되는 홀베르상 학술대회에서 페리 앤더슨 같은 5명의 저명한 학자들의 일원으로 논문을 발표한다는 사실은 이 분야에서 우리 학계의 세계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우리 지식인들과 문학인들이 자기 고유의 국가적 상황에 기초한 텍스트를 창조하면서 전지구적 복수성의 일원으로서 세계문학의 무대에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신명아/경희대 교수 영문학)

■ 홀베르상은

2003년 노르웨이 국회에서 작가 홀베르(1684~1754)의 이름으로 제정된 이후 줄리아 크리스테바, 위르겐 하버마스, 쉬무엘 아이젠스타트, 로널드 드워킨 같은 세계적 석학들에게 수여된 상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진다.

08. 11. 13.

P.S.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형편인지라 제임슨에 대해서 따로 뭘 기대한다는 건 사치에 불과하겠지만, 그의 신작 가운데 SF문학을 다룬 <미래의 고고학>(2007)이나 출간예정작인 <변증법의 가치>(2009) 등은 소개되면 좋겠다. '노벨상' 수상 이론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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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4 13:28   좋아요 0 | URL
20대 30대 인문학 연구자들,특히 문학이론 연구자들이 요즘도 제임슨을 많이 읽나요?

로쟈 2008-11-14 22:47   좋아요 0 | URL
제가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편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대학원 강의실에서는 더러 읽히는 것 같습니다...

책사랑 2008-11-15 05:39   좋아요 0 | URL
"미래의 고고학"은 현재 두 번역자에 의해(한 명은 제임슨 제자) 번역중에 있으며, "변증법의 가치"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