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훈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 2008)과 함께 손에 든 책은 김헌의 <위대한 연설>(인물과사상사, 2008)이다(내친 김에 그의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살림, 2004)도 얹었다). 소개대로 '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을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가 책의 취지이며, '인물과사상'에 1년간 연재한 글을 다듬어서 낸 책이다. 나는 경향신문 연재에서 저자의 글을 주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리스 고전 연구자로서 이제 활발한 저술활동이 기대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수사학>, 그리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관한 책들을 준비중에 있다고 한다. 고대해봄 직하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한겨레(08. 11. 22)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의 ‘말의 기술’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을 일으킨 힘은 펜의 힘이 아니라 말의 힘이었다”고 단언했다. 이 희대의 연설가는 유례 없이 저열한 방식으로 말의 힘을 남용했지만, 그 주장의 바탕에는 유구한 서구 역사의 한 갈래가 이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학이 그 갈래의 기원이다.

서양고전문헌학자 김헌(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HK문명사업단 연구원)씨가 쓴 <위대한 연설-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을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는 바로 이 수사학의 유래를 살피는 저작이다. 고전문헌학이란 고전기 그리스·로마의 역사·철학·문학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은이는 고전기 문헌 가운데 수사학 텍스트를 전공했다. 그는 수사학이야말로 그리스·로마 시대 삶과 앎의 풍경을 다른 어떤 학문 분야보다 풍성하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안티폰에서부터 데이나르코스까지 기원전 5~4세기를 수놓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의 활동을 통해 이 풍경을 들여다 보고 있다.

지은이는 먼저 수사학에 대한 통념 또는 오해를 깨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수사학 하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꾸미는 표현 방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것은 근래의 관념이다. 수사학이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레토리케(rhetorike)인데, 이 말을 분석해보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는 사람의 기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수사학은 ‘문학적 기교’ 이전에 ‘연설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수사학 출현의 배경으로 고전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모든 시민이 평등한 주권자가 된 민주주의 시대에 자기 생각을 공개적으로 설득하거나 자기 주장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 수사학이었던 것이다. 의회·법정·예식의 장이 수사학이 꽃핀 곳이었다.

>>파피루스에 쓴 안티폰의 연설문 필사본 조각.

지은이는 고전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수사학이 철학이나 문학보다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수사학이란 ‘말의 기술’인데, 이 때의 말은 곧 이성·논리·지식을 함축하는 말이다. 동시에 수사학은 기술로서 일상의 실천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해야 했다. 지식과 현실이 맞닿은 곳에서 수사학은 자라났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수사학은 그 세계를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는 데 유리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수사학은 일종의 실용지식이었으므로, 시민으로서 공적 생활을 능숙하게 하려면 누구나 익혀야 했다. 수사학은 소수를 위한 특수학문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교양과목이었다. 이 교양과목을 가르친 선생들이 바로 민주주의 대로를 활보하던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이 대세를 이루고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지자 거기에 대항해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며 등장한 것이 철학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때의 철학이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이다. 같은 철학이라 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수사학을 적극 인정했다. 진리·정의가 거짓·불의와 대결할 때 수사학으로 무장하면 이길 수 있지만, 수사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패배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사학은 진리의 갑옷이었던 것이다. 그는 <수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을 사용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인데, 인간 본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말과 이성을 사용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지은이가 10대 연설가 가운데 특히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사람으로 꼽는 세 사람이 뤼시아스(기원전 459~380),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이다. 이 가운데 뤼시아스는 수사학을 비난했던 플라톤도 인정한 이 분야의 진정한 대가였다. 그는 ‘30인 참주정’의 공포정치에 대항하는 데 자신의 연설능력을 활용한 민주투사였다.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그는 법정 연설문 작성자로 활동했으며, 그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했다. 간결하고 담백한 그의 언어는 인물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시대 삶을 실감 나게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스 민주주의 말기에 활동한 데모스테네스는 의회연설의 1인자로 꼽힌다. 그는 정치가로서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평생 싸웠다. 기품과 명분과 정의를 강조하는 그의 연설은 마케도니아에 맞서는 말의 무기였다. 그러나 연설의 힘도 마케도니아의 무력을 끝내 막지 못했는데, 패배한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그대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죽음이었다.

뤼시아스와 데모스테네스 사이에 살았던 이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을 철학의 지위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 자신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이 마치 모든 것을 다해 줄 것처럼 떠들고 다니는 소피스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수사학 교육은 대중을 설득하는 말솜씨를 가르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사학은 단순히 혀의 싸움에서 쓸모있는 무기나 도구가 아니다. 진정한 설득은 그럴 듯한 말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고 그 생각을 올곧게 만들어주는 품성에서 나온다.” 그런 수사학에 이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명섭 기자)

08. 11. 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천정환의 <대중지성의 시대>(푸른역사, 2008)를 손에 들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요즘 한창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였다. 이 익명의 지식인이야말로 '대중지성'의 가장 전범이 아닌가 싶어서다. 물론 이때 미네르바는 한 개인이 아니다. 미네르바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국가기관까지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존재하는 건 미네르바'들'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공감하며 읽은 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미네르바'란 기호는 2008년 가을의 한국사회를 가리키는 지표로서 기억됨 직하다). 

시사IN(08. 11. 19) 미네르바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848년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며 들머리로 사용했던 말이다. 저 유명한 문장이야말로 오늘 한국 사회의 풍경을 얘기하는 데 가장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는 메타포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이렇게 적을 수 있으리라.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미네르바라는 유령이.” 정보당국과 경제수장, 청와대 관계자는 이 유령의 입을 막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지금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미네르바’란 다음(DAUM) 아고라에 경제 관련 글을 쓰며 유명해진 논객의 필명이다. 스스로 ‘고구마나 파는 늙은이’로 칭한 것 외에, 지난주까지만 해도 미네르바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실체 없는 유령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그(녀)의 글은 거칠고 요령이 없으며 자칫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령의 ‘수상한’ 글은 누리꾼의 지지를 전폭 얻었고, 미네르바는 ‘사이버 경제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른다. 그(녀)가 쓴 글은 각종 게시판에 퍼 날라졌으며, 글에 거론된 경제학 서적은 여러 인터넷 서점에서 ‘미네르바 추천 도서전’과 같은 형식으로 유명해져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한 카페에서는 자발적으로 모인 누리꾼이 그(녀)의 글을 책으로 묶어 원하는 이들에게 제작비 정도의 비용만 받고 보내준다.

급기야 11월11일, 정보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네르바는 ‘50대 초반의 나이, 증권사에 다녔으며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남자’라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최근 미네르바가 아고라에서 활동을 중단하자 정부와 청와대는 그에 대해 손을 대지 않기로 했지만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고 판단할 경우 적극 대응”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미국발 서브프라임의 불똥이 한국으로 튀리라는 예상을 비롯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부동산 거품, 주식 폭락 등을 예측한 그를 손봐주기 전에, 신문이나 <100분 토론> 등에 나와 장밋빛 전망을 떠들어댄 관료와 애널리스트부터 손봐주어야 할 것이다”라거나 “대다수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은 미네르바의 정체가 아니라, 쌀 직불금을 부당 수령했음에도 사생활 보호라는 미명 아래 공개되지 않은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명단이라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라는 어느 누리꾼의 말은, “겨우 몇 개의 글로 위기감을 느끼는” 우리 정부의 딱한 오늘을 잘 보여준다. 한편 미네르바는 기사가 나오기 일주일 전인 11월4일부터 글쓰기를 중단한 상태다.(김홍민_출판사 북스피어 대표)

프레시안(08. 11. 21) "문제는 메시지다, 이 바보야!"

지금 대한민국의 최고 이슈메이커는 바로 익명의 누리꾼 미네르바다. 미국발 금융 위기를 족집게처럼 맞춰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을 이유로 절필을 선언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후에도 TV, 신문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은 그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다.

진보, 보수를 가릴 것 없이 각 언론사마다 ''미네르바의 정체''를 밝히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미네르바가 올린 글의 IP를 추적한 후, 자신의 블로그에 "미네르바는 1971년생으로 야구, 렉서스를 좋아하는 남성"이라는 추측을 했다. 한 진보 성향 언론사는 기자에게 "미네르바를 찾아 ''정기 기고''를 청탁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동아> 12월호에 절필을 선언한 미네르바의 장문 기고가 실리면서 ''미네르바 신드롬''은 극에 달한 듯하다. 이번 <신동아> 기고는 미네르바가 제3자를 통해서 먼저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사주의 방침과 정반대의 기고가 <신동아>에 실린 까닭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네르바가 <신동아>를 선택한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긴 분량의 기고를 가감 없이 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부 성향의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오프라인 잡지를 선택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의 인터넷 논객''의 이미지도 상쇄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기고는 곧바로 온갖 매체로 옮겨져 수많은 시민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

갈 데까지 간 미네르바 신드롬
<신동아> 기고를 끝으로 미네르바는 절필을 선언했지만, 정작 미네르바 신드롬은 더 불이 붙었다. 20일 오전 언론이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의 ''패러디'' 칼럼을 놓고 벌인 해프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 위원이 이명박 정부를 조롱하고자 언급한 ''미네르바 경제 관료 기용설''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오마이뉴스>, <데일리서프라이즈> 등이 사실로 알고 인용 보도한 것.

심지어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이날 오후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미네르바를 경제 각료로 기용하겠다는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논평을 냈다가 황급히 취소하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서화숙 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 사회의 독해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물론 미네르바가 등장부터 퇴장까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적절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대중이 불안해 할 때, 갑자기 ''메시아''처럼 등장해 현실과 부합하는 진단과 대안을 내놓다, 권력의 탄압을 못 이겨 퇴장했다."(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러나 정부, 언론이 혈안이 돼 미네르바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호들갑을 떠는 상황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정부, 언론이 미네르바 신드롬을 부추길수록 정작 대중은 더욱더 미네르바에게 쏠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작 미네르바가 한국 경제를 위해서 쏟아냈던 수많은 고언은 사라지고 없다.

미네르바 신드롬, 누가 만들었나?
그렇다. 지금 정부, 언론은 미네르바의 진단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취할 대목은 취해서 그가 그토록 걱정하는 파국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네르바가 누구인가, 이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태야말로 미네르바의 충정을 무시하는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그의 경고를 듣고서도 대비를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네르바를 만들어낸 당사자는 바로 정부, 언론이다. 한 경제평론가는 미네르바 신드롬을 놓고 이렇게 평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전 국민이 알 수밖에 없는 걸 정부가 자꾸 숨기다보니, 이런 신드롬이 생긴 것이다. 정부가 제2, 3의 미네르바의 등장을 막으려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 대신 솔직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사석에서 정부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 전문가를 만나면 모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 알고 있다. 그렇게 정책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시그널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입을 꾹 다물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으니 미네르바가 대신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은 현실을 모르고, 공무원·전문가는 침묵하고, 이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겨난 현상이 바로 미네르바 신드롬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미네르바 신드롬이야말로 위기에 취약한 한국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적인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우리는 미네르바 대신 다른 미네르바''들''이 필요하다. 익명이 아닌 실명의 미네르바''들''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때 바로 시민은 미네르바 대신 정부, 언론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당당히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미네르바''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채은하 기자)

08. 11. 2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07   좋아요 0 | URL
이번 신동아를 읽어야겠군요.그런데 미네르바 같은 이를 대상으로 정부 고위관료가 직접 나서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건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면에서도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군요.여하튼 현정부의 이념적 경직성은 지나쳐서 자기 점수만 깎아먹고 있습니다.

로쟈 2008-11-21 22:14   좋아요 0 | URL
'이념적 경직성'이란 것도 과대평가 같은데요. 그냥 '무개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탐욕적인...

2008-11-2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24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직도 몇몇 사전과 책에서 1991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이달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한다(잘못된 정보에 대한 지적은 http://blog.aladin.co.kr/mramor/1807030 참조). '장수' 학자로서 (103세에 세상을 떠난) 가다머(1900-2002)의 뒤를 바짝 좇고 있는 것인데, 국내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대규모 학술대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이 참에 <구조인류학>이라도 완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한겨레(08. 11. 20)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돌 ‘구조주의 학술 파티’

대표작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로 친숙한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신화·결혼규칙·요리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형제와 자매’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 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 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던 까닭에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는 15년 가까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지난 5월 그의 저술 7편이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로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의 매체가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일 현재까지도 프랑스를 제외한 서방 언론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주의의 변방’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헤겔·하이데거로 상징되는 독일 철학과, 미드·래드클리프브라운 등의 영미 인류학에 밀려 변변한 학맥조차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기호학회가 22일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선 원로 학자인 김형효·임봉길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최용호(한국외대)·박여성(제주대)·김기국(경희대)·윤성노(숭실대) 교수 등 인류학·철학·불문학·국문학계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학자들이 총출동한다.

»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한길사 제공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의 인연이라면, 그가 1981년 10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8년 방한한 프랑스 문학비평가 질베르 뒤랑이 강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언급한 뒤, 같은해 잡지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레비스트로스 기획’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학자도 그의 대표작 <신화학> 1·2권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가 유일하다. 임 교수는 프랑스 인류학의 대가 마르셀 모스 밑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수학한 조르주 콩도미나스 교수에게서 인류학을 배웠다. 임 교수는 “3년 전 번역한 <신화학> 1권을 레비스트로스 교수에게 보냈더니 ‘표지 디자인이 좋다. 한글도 아름답다’는 내용의 친필 답장을 보내왔다”며 “지난해부터 기력이 쇠해져 파리의 집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89년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구조주의의 ‘학문적 시민권’ 획득이 지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구조주의 이론 자체가 워낙 난해하니까 철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제대로 소화를 못했다. 게다가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선험적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주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송효섭 기호학회장은 “포스트모던과 탈구조가 논의되는 21세기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과 방법론은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의 석학과 중진, 신진기예를 망라해 그의 탄생 100년이 던지는 의미와 공과를 짚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이세영 기자)

08. 11. 19.

P.S. 레비스트로스 혹은 구조주의와 관련한 신간은 뜻밖에도 수학사에 관한 책이다. 아미르 악젤의 <수학이 사랑한 예술>(알마, 2008)이 그것. "구조주의 운동이 실은 한 사람의 천재 수학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책"이라고 소개돼 있는데, 진중권 교수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은 현대 수학의 역사에 관한 보고이자 구조주의 운동 역사에 대한 충실한 기술이다. 그동안 구조주의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거기에 수학이라는 또 하나의 기둥이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레비-스트로스의 예가 보여주듯이 구조주의 운동은 언어학이 발견한 구조의 개념을 수학으로 형식화하여 다른 분과 학문에 적용시킨 하이브리드 전략의 선물이었다. 나아가 그 전략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현대의 예술과 문학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렇게 풍부한 결과를 낳은 위대한 정신적 창조의 바탕에 수학이 깔려 있었음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댓글(4)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중국에서 출간되고 있는 레비스트로스 문집
    from 순간과 영원 2008-11-20 22:32 
    레비 스트로스가 이달 28일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한다.(관련소식: 한겨레 보러가기) 로쟈님의 서재에서 소식을 접한 김에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리를 한번 해 볼까 한다. 즉, 중국에서는 이들 사상가들, 혹은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얼마나, 어떤 게 번역되었을까? (서점을 훓어보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이런 건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 둬야지 마음만 먹었다가 계속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보일때마..
 
 
놀이네트 2008-11-19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레비스트로스보다는 프로프(이종진 교수는 블라지미르 쁘로쁘가 맞다고 하시는 듯)가 훨씬 좋던데요. 머리가 딸려서 그런지... 로쟈님 전공이 러시아 문학이신데 프로프 좀 더 번역하시면 어떨까요. ^^;;

로쟈 2008-11-19 21:48   좋아요 0 | URL
프로프는 신화학자라기보다는 민담학자이니까 전문분야는 좀 다르죠.^^ 아실 듯한데 <민담의 형태론>은 중역이긴 하나 2종의 번역본이 있고, <민담의 역사적 기원> 등도 번역돼 있습니다. 웃음에 대한 책은 번역중인 걸로 알고요. 주저들은 다 나오는 셈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9   좋아요 0 | URL
마르셀 모스의 제자의 제자가 한국에도 있군요.모스가 뒤르켕 제자이니 뒤르켕 학맥이기도 하겠구요.

로쟈 2008-11-20 20:45   좋아요 0 | URL
제자가 곧바로 '햑맥'을 뜻한다면, 국내에도 어지간한 학맥은 다 있을 듯싶은데요...
 

교수신문에서 '해외 지성 동향'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46). 지령 500호 특집의 하나인데, 기자는 특별히 스티글리츠, 울리히 벡, 피터 싱어, 아즈마 히로키 등을 거명하고 있다. 출간된 책들의 이미지들을 덧붙여놓는다.

교수신문(08. 11. 17) 불확실한 세계의 내일을 보려거든 이들을 주목하라

미국의 금융위기와 그로인한 경제 불황의 그림자와 불안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변화는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오바마에게 미국의 리더십이 넘어간 것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처한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곧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오늘의 세계를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는 학자들의 시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체감 온도 영하를 기록 중인 경제 불황의 한파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미래의 경제학은 누구에게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2001년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의 행보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주류 경제학에서 출발을 했지만, 정보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스티글리츠는 전통경제학의 완전 시장 개념이 정보 완전성을 전제했다 주장하면서, 현실에서는 정보의 결함 및 불완전성이 존재한다고 지적,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는 새로운 경제학 모델을 주창했다. 또 스티글리츠는 보험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신용거래시장, 국제금융시장 등의 여러 사례의 분석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초했다.

그런데 그를 미국 경제학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 업적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행보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평등주의 시장 경제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의 저서들을 보면, 그는 미국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9월에 출간된 『3조 달러 전쟁 : 이라크 전쟁의 진짜 비용』에서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3조 달러(우리 돈으로 3000조원 이상)를 이미 썼고, 전쟁 부상자들의 간호 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분석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정면에서 문제 삼는 저작들로 역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홍훈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스티글리츠에 대해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케인지안에 속하겠으나, 범상한 케인지안과는 다른 학자”라면서 “기존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금융 위기에 대해서 경제회생에 최소 18개월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폴 볼커 전 연준의장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추천하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바마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현대 사회가 낳는 문제는 비단 경제적 위기와 미국 중심 질서에 한정될 수는 없다. 얼마 전 광우병 파동과 사스 등 신종 질병의 출현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과학 기술의 부정적 산물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이 같은 위험에 대해 사고한 사회학자로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하버마스, 기든스 등에 견줄만한 학자로 손꼽힌다.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고, 뮌스턴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을 거쳐 뮌헨 대학 사회학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 울리히 벡은 지난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 근대화 과정이 낳은 현대 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진단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성찰은 특히 현대의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의 여러 이기를 낳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증폭시킨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진다. 벡은 탈지역화, 계산불가능성, 보상불가능성이라는 특징으로 현대 사회의 위험을 바라보면서, 예기된 재난 속에서 현대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뻔히 그것이 일어날 것임을 알면서도, 즉 예기됐으면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까지 있다. 벡은 근대화의 근본적 한계를 진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법 모색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성찰적 근대화』, 『정치의 재발견』,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울리히 벡에 대해 “벡은 현대의 과학기술이 일종의 예기된 재난을 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 학자”라고 하면서 “세계위험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비판 이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국내에는 그의 위험 개념이 희화화되고 오해된 측면이 많은데, 진면모가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울리히 벡은 최근 『코스모폴리탄 유럽』, 『코스모폴리탄 비전』등의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염두에 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사유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방문 강연을 한 적도 있어, 친숙한 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한 학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벡처럼 전면적이고, 치밀하며, 독창적인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위험성을 분석한 사람은 드물다. 벡이 과연 새로운 비판 이론의 역사를 열어갈지 관심이 간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비단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환경오염 등은 자연을 대하는 현대인의 근본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윤리학계의 좌장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는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해결의 지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싱어는 특히 동물 해방론 및 생명 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법을 제시해 명성이 높다.

우선 피터 싱어는 자신을 저명한 윤리학자로서 자리매김해준 저서인 『실천 윤리』에서 이기적 행동은 이기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불합리하며, 윤리 도덕적 삶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곧 비이기적인 삶이 이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싱어의 논의는 윤리적 행동의 필요성을 그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과 ‘의무’를 이유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논증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도덕 법칙의 존재를 거부하는 자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논증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싱어는 인간 중심의 윤리관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한다. 싱어는 동물이 비록 지적으로 인간보다 저능하지만, 그것이 동물의 윤리적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인간 중에서도 발달이 더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차별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윤리적 고려를 나누는 대상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윤리적 의식의 근원에는 고통에 대한 의식이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윤리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싱어는 생물중심주의 윤리학을 구축했는데, 광우병 파동으로 관심이 커진 동물 보호 운동의 이론적 준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변순용 서울교대 교수(윤리교육)는 싱어에 대해 “살아 있는 윤리학자 중 가장 강하게 생명 윤리와 동물 윤리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확고한 이론적 업적을 세운 학자”라고 지적했다. 박상혁 계명대 교수(윤리학)는 “자신 수입의 20퍼센트를 빈민을 위해 사용하는 실천하는 철학자이고, 의료 윤리 등 다양한 응용 윤리 연구의 진보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학자”라고 강조했다. 피터 싱어는 최근 대형 농장에서 잔인하게 살육되고 있는 동물의 현실을 문제 삼은 화제작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내놓은 한편, 『세계화의 윤리』등을 통해 비판적 지성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피터 싱어가 이렇게 인간의 윤리적 지향에 대한 모범을 제시했지만, 윤리적 삶은 언제나 대중의 삶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이는 윤리적 규범과 의무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보다 거칠고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묻지 마 살인이 빈발하고, 니트족이 사회 현상의 상수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하위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일본의 젊은 논객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주목하게 된다. 1971년생인 히로키는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해』라는 화제의 저작에서 데리다의 논의를 하이데거·프로이트와 연계하면서 ‘우편적 불안’이라는 테마로 재해석해 존재론적 함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후 히로키는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를 포스트모던과 연결해 사고하고자 하는 시도로도 유명해졌다. 특히 국내에 번역이 된 바 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 2007)와 연작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에서 거대 오락 산업과 오타쿠 집단의 출현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읽어내면서 현대 일본사회의 정신적 구조와 인간의 새로운 변화 양상을 진단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많은 독창적 테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오리지널 대 복제라는 구도를 데이터베이스 대 시뮬라크르라는 구도가 대신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데이터베이스는 기존에 표층을 규정하던 심층으로서 커다란 이야기를 대신해, 유저(독자)의 읽어내기에 따라 결정되는 심층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기표에 대한 기의의 초월적 귄위를 거부한 포스트적 관점을 인터넷 세대의 감수성으로 풀어내고 변형한 독창적 제안이다.

히로키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시뮬라크르 수준의 작은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 생기는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해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 타자 없이 충족하는 동물적 존재가 돼가는 동시에 △ 데이터베이스 수준의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따르는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는 이층적 주체로 변모한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히로키를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를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초기의 진지한 인문학적 사유를 팽개치고, 일본 특유의 오타쿠 하위문화에 천착해서, 능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나 미국의 포스트모던주의자들보다 진일보한 관점에서 과감한 테제와 분석을 제시하는 히로키를 이론적으로 천대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 미래가 주목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지성들은 이밖에도 더 열거할 수 있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푸코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사에 독보적 획을 그은 바 있다.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인간복제 등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해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의 심화, 생태 및 환경윤리에 대한 요구의 증대, 집단지성의 출현 등 급변하는 현실을 사고하기에는 낡은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다른 목소리가 프랑스에도 존재함을 각인시켜주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 플라톤주의자로 꼽히지만 결코 고루한 이성주의자에 머물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바디우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복수의 진리를 내세운다. 또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차이들을 넘어 작동하는 보편성의 차원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현대 정치 철학의 거장이자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도 시선을 끈다. 그의 저서들은 늘 화제를 몰고 있으며, 영미와 유럽대륙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 대부분의 좌파들이 ‘NO’를 외친 유럽연합 헌법투표에 대해 ‘YES’를 외쳐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또 그의 자율주의가 함의하는 대중 정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오주훈 기자)

08. 11. 18.

P.S.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는 중앙대 대학원신문의 기사를 보충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아키라의 책 <구조와 힘>은 국내에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새길, 1995)로 소개된 바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아즈마 히로키, 새로운 사상보다 사상의 새로움을

일본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일본의 한 비평가가 푸념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진을 읽었다면, 요즘에는 히로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히로키는 고진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로키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고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히로키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로, 연재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이 글이 묶여 출간되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함은 물론이고, 대개 소설에 수여되는 미시마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게 “<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확실히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물론 예외는 있다. 80년대에 <구조와 힘>은 20만 부 정도 팔렸고, 고진의 책도 대부분 수만 부씩은 팔리고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문화(하위문화) 연구에 매진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의 국내 소개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용도 잘 모른 채 책제목과 저자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 책을 출판사에 추천한 이가 정작 출간된 뒤에는 실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생각보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익숙한 분석대상이나 개념, 인명이 등장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그런 한국의 인문학도들에게 히로키는 어쩌면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히로키 자신도 이와 관련해 많은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로키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하위문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일종의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위문화는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지만 정작 주류 비평가들은 기존 틀에 갇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그러나 나는 서구사상을 학습하며 조립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실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널려 있는 문화의 정체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히로키는 새로운 사상가라기보다는 사상의 낯섦(새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조영일/ 문학비평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7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는 아즈마 히로키 처럼 20대초반에 떠오르기도 하는군요.우리나라 고교생 독서현실로는 어림없는 일이죠.

로쟈 2008-11-20 20:44   좋아요 0 | URL
고교생도 읽을 수 있게끔 번역이 돼 있지도 않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우리나라는 고졸이나 대졸의 차이점도 없는 것 같아요.모두 수험서만 읽으니까요.저도 졸업하고 나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지 대학 시절엔 고졸과 지적수준은 똑같았다고 봐야죠.

로쟈 2008-11-21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나라 학생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영어나 일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1/10도 안될 듯싶은데요. 원초적인 한계가 있는 듯싶어요...
 

이번에 한겨레21에 실린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면 배치가 달라지면서 원고가 약간 축약됐지만 대의는 그대로이다(지면기사와 달리 온라인기사는 축약되지 않았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803.html 참조). 작년에 나온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가 한국 사회에 '세대모순'을 처음 이슈로 제기했다면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를 통해서 이미 수차례 제기되어온 '지역모순'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강 교수가 먼저 낸 <각개약진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08)과 '세트'로 읽을 만하다. 지역모순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때 봉착하게 되는 양상이 각자가 알아서 제 살길을 찾는 '각개약진'이다. 하니 그 또한 '식민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중요한 이슈임에도 최근의 경제난 때문에 다소 묻히는 감이 있다. 수년전 지방분권론이 공론화되던 시기에 나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이미 발표한 칼럼들을 중심으로 책을 엮은 탓인지 더러 중복되는 부분이 있고 핵심적인 주장이 도드라지지 않는 점도 읽으면서 좀 아쉬웠다.    

한겨레21(08. 11. 24)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이 지방주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울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발상을 포기한 만큼 그 걱정도 지방이 해야 한다... 한국을 지방이 책임지자.”

우리시대의 논객 강준만 교수가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펴냄)에서 던지는 제안이다. 그가 이번에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화두로 삼은 것은 ‘지역모순’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얘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대개 모른 체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는 문제, 곧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모순이 문제다. 그는 아예 ‘내부식민지’란 말까지 꺼내들었다. 대한민국은 식민주의 국가란 말인가?

독일의 중국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펴냄, 2006)를 참조하면 억지스런 주장만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먼저, 하나의 사회 전체가 자체의 역사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타인에 의해 조종되며, 식민자의 경제적인 필요와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을 말한다. 말을 바꾸어, 지방이 자체의 발전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앙(서울)에 의해 조종되며 수도권 부유층의 이해관계에 종속된다면 바로 ‘식민주의’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할 텐가? 하지만 유의할 것은 ‘서울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는 점.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보다 중요하다.”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되라는 뜻이겠다.  

오스터함멜은 또 근대 식민주의는 무엇보다도 ‘주변’ 사회를 ‘중심’의 필요에 종속시키려는 의지와 관련되며 역사적으로 유럽의 근대 식민주의자들은 종속민들에게 유럽의 가치와 관습을 이식하려고만 했지 그들의 문화에 적응·동화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중심’과 ‘주변’이란 말 대신에 ‘서울’과 ‘지방’을 대입해보면 바로 한국사회 아닌가? 지방의 ‘서울 따라하기’는 있어도 서울의 ‘지방 따라하기’는 없다는 점도 말하자면 식민주의의 징후다.  

거기에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이라고 부를 만한 특정한 의식이나 태도도 덧붙일 수 있다. 가령 16세기 이래 이베리아 국가들 및 영국의 식민지 이론가들은 유럽의 팽창과정을 보편적인 사명의 달성으로 표현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여 이교도 전도, 야만인·미개인의 문명화, 특권을 수반한 ‘백인의 부담’ 등을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내세웠다. 서울이 잘 돼야 지방도 잘 된다는 논리는 그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므로, 비록 내부식민지론이 1970년대 남미의 국가 간 종속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이론이라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지역 간 불평등과 경제적 격차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사실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은 얼마나 자주 상식적 판단을 빗나가게 만드는가. 그 ‘특수한’ 현실은 강 교수가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는 간단한 인구 통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7년 10월 말 현재 주민등상 인구 4919만4085명 중 서울·인천·경기 3곳의 인구는 2390만3785명으로 48.6%를 점하고 있다. 국토면적 11.8%인 수도권의 인구 비중은 1960년 20.8%에서 1980년 38.4%, 2000년 46.3%, 2002년 47.2%, 2004년 48.0%, 2007년 48.6%로 증가했다.” 그렇게 수도권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감소하는 것이 비수도권 인구이다. 과연 이러한 추세가 역전될 수 있을까?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강 교수는 진정한 지방분권과 자치를 위해서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는 ‘발상의 대전환’, 그리고 지방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한국사회의 아킬레스건인 교육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신문과 지방방송, 지방문화 육성을 위한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내부식민지’의 토대가 되는 것은 역시나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의 과잉집중을 억제하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즉 ‘내부적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분산’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대학의 지방분산론’이다. 혹은 차별적인 지원정책으로 명문대학을 수십 개로 늘려 ‘경쟁의 병목현상’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란 의구심이 바로 들 만큼 현실적으론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에 명문대 입학을 사교육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가고 해마다 대입제도 개선안이 발표되어도 학생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탓에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해서다. 강 교수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명박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이나 전교조나 모두 다 한통속”이라고까지 질타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 머리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이라 한다. 정조시대에 서울인구는 전국인구의 2.55%에 불과했지만, 서울이 문과 급제자의 43%를 차지했다고 하니 서울 중심의 집중화와 출세를 위한 교육의 연계는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 ‘뿌리’를 뽑는 것이다. 지방을 볼모로 한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일에 서울 시민도 동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08. 11. 17.

P.S. 지난주 시사IN의 인터뷰기사 '‘한탕주의’를 응징하지 않는 데 비극이 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4)도 참조하시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세곰 2008-11-24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의 경쟁력이 대한민국의 경쟁력입니다"는 광고를 들을 때마다 경악하던 중이었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글로벌을 그렇게 외치면서도 정작 서울이라는 울타리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