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의 에필로그 제목은 '경계 또는 토르나다'이다. '벤야민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역량을 내비치는 대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 <남겨진 시간>의 영역본(<The Time That Remains>),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의 대하여>(길, 2008) 등이다(성경의 구절들도 참조해야 한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로 인용되고 있다('바울로'는 '바울'로 표기했다. 개신교에서만 '바울'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출판된 대부분의 책들에서 '바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아감벤은 먼저 제1테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를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체스판 밑에 숨어서 터키풍 의상을 입은 기계인형을 조종하여 승리로 이끄는 난쟁이"의 이미지를 포우의 소설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작고 볼품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는" 신학이 바로 그 '난쟁이'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이 두려운 적수들과의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신학을 자기 편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제1테제의 주장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을 텍스트 자체에 적용한다. 결정적 이론투쟁이 전개되는 체스게임을 밑에서 조종하는 신학자?! 그렇다면 "저자가 테제의 텍스트 속에 매우 정교하게 숨겨둘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그 누구도 특별히 지목하지 못했던 이 난쟁이 신학자는 과연 누구인가?"(227쪽) 아감벤의 에필로그는 그러한 관심에 촉발되며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 정교하게 숨어 있는 난쟁이 신학자는 바로 '바울'이다. 아감벤은 보다 구체적인 증거(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그 구체적인 '흔적'을 어떻게 찾는가?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실마리 삼아서다. 벤야민은 '파사쥬론' 즉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완전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섹션 N의 한 주석). 벤야민에게서 이 인용은 방법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국역본은 'Epic Theater'를 '서사시극'이라고 옮겼는데, 혹 일어본에서는 그렇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는 '오역'이다). "어느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속하는 컨텍스트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크라우스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인용은 언어를 이름으로, 언어를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문맥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구제하고 벌한다."라고 적었다(국역본에는 '논고'라는 엉뚱한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인용의 방법으로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른다. 벤야민이 보기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는 식자공이 글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처럼, 그 동작에 간격을 둘 수 있어야 한다."(그러한 간격두기가 낳는 효과가 연기에서는 '소격효과'이겠다.) 여기서 '간격을 두다'란 말은 영어의 'spacing', 독어의 'sperren'을 옮긴 것이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려고 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각 철자들 간의 간격을 띄우는 것을 말한다. 즉 'sperren'이라고 하지 않고 's p e r r e n'이라고 표기하는 것. 이렇게 간격이 주어진 단어는 보통 두번 읽히게 된다. '스-페-르-렌, 스페렌'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들 자간의 간격이 주어진 단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적으로 읽혀진다. 두번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번의 독해는 인용의 중복기입적인 독해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228쪽)

'인용의 중복기입적 독해'는 'palimpsest of citation'을 옮긴 것인데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에 지우고 다시 쓴 걸 말한다. 두 번 읽기가 인용의 거듭 쓴 양피지라는 것. 이제 이런 사전지식을 갖고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남겨진 시간>의 표지에도 쓰인 수고의 제2테제이다.

끝에서 4행째부터 잘 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 c h w a c h 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때문에, 우리들에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약한 메시아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국역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32쪽)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수고본에서 알 수 있지만 's c h w a c h e'(weak; 약한)란 단어의 자간이 띄워져 있다. 어떤 인용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메시아적 힘의 약함? 아감벤의 추정으로 "메시아적인 힘의 약함이 명료하게 이론화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텍스트에서이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가 그것이다. 바울은 간구한 끝에 주에게서 이런 계시(응답)를 얻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he gar dynamis en astheneia tele tai'이고, <남겨진 시간>의 역자는 "권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로 옮겼다. 영어로는 "power fulfills itself in weakness"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약함'에 있다고 하므로 바울은 흡족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리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의 강함이라."이고, 영어로는 "Therefore I take pleasure in infirmities, in reproaches, in necessities, in prosecutions, in distresses for the sake of the Messiah: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이다.

물론 벤야민 참조한 성경을 독어본이었을 텐데,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고 한다. 'denn mein Kraft ist in den schwachen Mechtig.' 즉 'kraft(힘)'과 '약함(schwache)'이 모두 출현하고 있고, 또 대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철학테제의 텍스트에서 바울 텍스트의 비밀스러운 존재야말로 자간을 비우는 것을 통하여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230쪽) 그리고 이 발견을 아감벤은 자못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으로 기록한다.

벤야민에 대한 바울의 (가능한) 영향을 시사한 유일한 인물은 타우베스라고 한다(하지만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학 단편>을 로마서와 관련시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독일의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를 말하며, 그의 <바울의 정치신학>(2004; 독어본1993)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 생전의 마지막 공개강의를 묶은 것이다(영어본으로는 150여 쪽의 얇은 책인데,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바울 관련서를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감벤은 강의의 서두에서 타우베스를 추모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의 이 강의는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했던 강의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메시아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으로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14쪽) 참고로 아감벤의 강의는 1998년 10월 파리의 국제철학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벤야민의 제2테제에서의 바울 인용이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철학테제'는 벤야민의 최후의 저작 중 하나이며 그의 메시아적 역사관이 일종의 유언적인 요약이라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기계인형의 손을 비밀스럽게 이끄는 난쟁이 신학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미 답은 주어졌지만 아감벤은 몇 가지 '흔적'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제5테제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지나간다."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제18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사를 엄청난 단축 속에 요약하고 있는 지금의 때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의 그 형상과 철저하게 일치된다."("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에서 '지금의 때(Jetztzeit)'에 대한 분석 등이 추가적인 사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결론만은 말하자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어휘는 모두가 순수하게 바울적인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를 형성화고 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드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37쪽)

이 '지금'에 대한 분석은 보다 자세한 정리를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다...

0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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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체성(혹은 요즘 더 많이 떠들어대는 용어로는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책이 나올 성싶지 않다. 다만,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한 책은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짐작에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후, 2008)이 그런 종류다. 찾아보니 책소개도 그렇게 돼 있다. "이 책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민족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까다로운 ‘정체성’ 개념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근거자료들을 성실하게 모아 놓았다. 과거의 이론은 물론 최신의 논문 자료들까지 성실히 찾아놓은 덕분에 ‘민족’에 대한 최신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사실 그런 최신 이론에 관심이 없는 중고생들까지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우리가 기댈 건 똑똑한 중고생들 아닌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29) 민족 정체성, 영화·車로 재생산되다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세계화의 물결은 각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키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격변 속에서도 어떻게 민족들은 고유의 색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민족 정체성이 사회적 혹은 역사적 요인보다 대중문화, 일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란 다양한 문화요인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재진행형 용어라고 주장한다. 책은 스펙터클하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문화와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이 배양되는 현상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민족을 둘러싼 다양성과 온갖 문화적 효과들(결국 민족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 문화요소들로 짜여진 거대한 문화적 매트릭스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 아이콘이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변형시키는지, 영화 '브레이브하트', 롤스로이스 자동차, 영국의 밀레니엄 돔 등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롤스로이스와 애스턴마틴 등 영국 자동차들은 일견 사치스럽고 계급폐쇄적인, 혹은 쾌락주의적이고 도발적인(애스턴마틴은 제임스 본드와 이미지가 연결된다) 영국 민족의 한 단면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1960년대 대중화된 새로운 영국의 아이콘 '미니'(자동차 모델)의 등장으로 자유분방함의 상징이 사회에 번져갔다. 저렴한 미니는 노동계층에 어필했고, 이전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저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꼽는다.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사를 다뤘다.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는 마침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이 새 전기를 맞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신화와 역사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가다듬었는지 보여준다.

문화 지형 속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 이것이 항상 진행형으로 변화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에도 꽤나 유효한 개념이다. 10만원짜리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에서 나타난 쟁점들이 모두 이 정체성 논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양홍주기자)

08. 11. 29.

P.S. 정체성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역시나 중고생도 읽을 만한 유익한 책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정체성에 관한 과학'을 표방하는 책이다. 이 재미있는 책을 예전에 다 읽지 못해서 아쉬운데(찾아서 마저 읽어야겠다) 여하튼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편가리기'로 거부되는 시대에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책. 다양한 연구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단, 저자는 실제적인 차별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대타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주목하는 게 아닌가란 의문도 든다. 그 역시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라고 말하기엔 너무 쓰라린, 부당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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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북리뷰를 미리 훑어보다가 관심을 좀 갖게 되는 책은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쳐>(사문난적, 2008)이다. 고딕의 문화사를 다룬 책인 듯한데, 나름대로 희소하지 않나 싶다. 흠이라면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분량이 좀 얇다는 것. 억지로 부피를 늘린 책들보다는 낫지만, 조금 싱겁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크'의 색감이 좀 엷은 게 아닐까 싶은 것. 실상은 읽어봐야 알겠다...

경향신문(08. 11. 29) 허락되지 않는 것들의 매력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 그런데 트로피를 든 채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스타일이 심상치 않았다. 새까만 붙임머리, 고딕풍의 베르사체 드레스…. 졸리는 할리우드 정상의 자리로 발돋움하는 순간 고스 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스타이자 전위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자신의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드러냈다.

애초 고딕(Gothic)이란 르네상스 사람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적인 북유럽의 고트(Goth)족이 가져온 양식이라 비난했던 데서 시작된 표현이었다. <다크 컬처>(원제 Contemporary Gothic)는 소설, 건축,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아우르는 고딕 문화의 기원과 의미, 현대의 변형 등을 폭넓게 조망한다.

근대인들에게 고딕이란 이성의 전복이었다. 서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로마 문명을 멸망시킨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말끔한 고전주의 양식 대신 뾰족한 아치, 기괴한 각도의 조형, 괴물 모양의 장식물 등으로 꾸며진 사트르트 대성당은 이성 대신 야성과 환상을 고취했다.

고딕은 복고주의지만, 그 소비자는 신흥자본가였다. 고딕 문학은 현재의 목을 조이고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과거를 그렸고, 그러한 과거를 상품화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의 몫이었다. 근대 프로테스탄트 독자들은 중세 후기 가톨릭을 혐오스러운 타자로 구성했고, 영국과 미국은 중동의 타자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현대 서구문화에서 고딕은 예상치 못한 구석에 숨어있다. 고딕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여고생 버피의 뱀파이어 퇴치담을 그린 TV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 블록버스터 영화 <배트맨 비긴즈>, 록가수 마릴린 맨슨은 ‘10대 악마들’을 위한 고딕 상품이다.



고딕 인테리어는 세련된 주부의 사랑을 받고, 알렉산더 매퀸의 고딕풍 의상은 수많은 중저가 브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딕의 역사는 줄곧 소비의 역사와 결부되어 왔다.” 자본이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비유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들어맞는 셈이다.

자본과 윤리, 하위 문화의 관계는 흥미롭다. 전자는 후자를 포섭하려들고 거의 성공하지만, 가끔 의도치 않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고딕풍의 공포영화는 ‘섹스를 하면 죽는다’ ‘술과 마약을 해도 죽는다’는 교훈을 설파하지만, 폭력과 유혈의 쾌락은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다. 도중에 일어나는 사악한 행위들이 결말의 선의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나한 푸닥거리를 한다해도 이 ‘어둠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고딕이 ‘개인과 집단의 불안’을 부인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어휘와 사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캐슬’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교외에 자리한 고딕성당 풍의 모텔을 바라본다. “고딕에는 원본이 없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고딕은 언제나 위조에 관한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떠올린다면, 한국인이 경험하지 못한 서구의 중세를 위조하는 저 기괴한 건물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백승찬)

08. 11. 28.

P.S. 생각해보니 '고딕'에 관한 책은 2권짜리 두툼한 비평논문집을 포함해 여러 권 갖고 있다. 내년쯤에는 고딕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될 예정인지라 모처럼 들춰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내엔 총서로까지 나오고 있는 고딕문학 작품집을 제외하면 건축과 영화(알다시피 팀 버튼이 독보적이다) 관련서들이 눈에 띈다...

아, 알고 보니 저자 스푸너는 고딕 전문가이고, 나도 그녀의 책을 한 권 이상 갖고 있다. <다크 컬쳐>(원제는 <현대의 고딕>) 외 다른 책들도 소개됨 직하다. 고딕은 잘 팔린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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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08-12-04 15:32   좋아요 0 | URL
고딕이 건축양식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는 걸 이제야 눈뜨게 해준 책이 '다크 컬처'인데 로쟈 님의 글을 보니 고딕 문화에 대해 좀더 맥을 잡을 수 있네요.고맙습니당~
 

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서 번역과 '반동적 행위'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따져본 것이다. 내가 읽기에 이 대목의 국역본 번역은 다소 부정확하며 그에 대한 지적도 겸하고 있다.   

번역이 능동적 행위라면 번역비평은 반동적 행위일까? 혹은 번역이 작용이라면 번역은 반작용일까? 그래서 번역이 주인의 도덕이라면 번역비평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한 것일까? ‘번역비평’이란 말을 염두에 두고서 들뢰즈가 읽는 니체를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니체와 철학>의 네 번째 장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를 모토로 하고 있는데, 들뢰즈가 제일 처음 인용하는 니체의 문장은 “La vraie réaction est celle de l'action”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이것은 “참된 반작용은 작용의 반작용이다”(<니체와 철학>, 201쪽)라고 옮겨졌다. 반면 영역본의 “The true reaction is that of action”을 옮긴 번역은 “진정한 반작용은 행위의 그것이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3쪽)라고 옮겼다. 이 대목은 <도덕의 계보>의 제1논문의 10절 첫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판 니체 전집본에서는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367쪽) 

독어본을 옮긴 이 인용문에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들뢰즈의 인용문에 상응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곧 참된 반응을 포기하고 단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하는 것, 번역을 통한 반응 대신에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제스처로 자신을 보전하는 것, 혹 그것이 번역비평은 아닌가? 니체는 그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라고 불렀다. 번역비평의 ‘창조성’이란 바로 그런 노예 도덕의 산물은 아닐는지? 그것은 반작용이자 반동적 행위이며 결국은 ‘원한’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일견 이것이 번역비평이 내몰린 궁지이다. 번역비평을 닦달하는 의혹과 비난의 시선은 어차피 능동적인 힘이 아닌 한에서 불가피하게 뒤집어써야 하는 숙명일까?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한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물어야겠다. 과연 원한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 자신이 일부러 갖다 쓴 불어 단어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정확한 정의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la réaction cesse d'être agie pour devenir quelque chose de senti”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니체와 철학>, 202쪽)고 옮겼고, 영역본의 “reaction ceases to be acted in order to become something felt (senti)”를 옮긴 번역본은 “반동적 행위는 느껴지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행위하게 되기를 중지한다”라고 옮겼다. 편하게 이해하자면, ‘르상티망’은 느끼기 위해서 반응하지 않는 걸 뜻한다. 즉, 느낌만을 계속 축적할 뿐 그에 대한 반응은 중지한 상태를 가리킨다. 국어사전에서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르상티망’을 풀이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하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계속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르상티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는 말은 모순이다. 영향 받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보통 어떤 반응이나 행동을 예비하는 것이니까. 여기서의 이분법은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만 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느냐이다. 물론 이때의 반응은 ‘참된 반작용’을 가리킨다.

들뢰즈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hypothèse topique’를 소개하면서 풀이한다. 한 번역본은 ‘위상학적 가설’이라고 옮기고, 다른 번역본은 영역본의 ‘topical hypothesis’를 따라서 ‘총론적 가설’이라고 옮겼지만 내용상으론 ‘장소’에 관한 가설이다. 어떤 가설인가? 자극/흥분을 수용하는 체계(시스템)와 그 흔적을 보존하는 체계는 동일한 체계일 수 없다는 가설이다. 어떤 하나의 체계가 자극을 성실하게 보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자극을 계속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때문에 애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한 체계는 자극들을 수용하지만 아무것도 잡아놓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기억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한 체계는 그 자극들을 항구적인 흔적들로 변화시켜서 보존한다. 이것이 이른바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이며 이들은 각각 의식과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의 구분에 따르면,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면에 또 다른 반응적 힘은 의식과 구별되지 않으며 이것은 항상 새로운 수용에 열려 있는,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에 대해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편의상 두 종의 국역본과 영역본을 인용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또 어떤 조건 아래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반응적 힘들이 의식 속의 흥분을 대상으로 삼을 때, 상응하는 반작용 자체는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니체와 철학>, 204쪽)

"두 번째 종류의 반동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활동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동적 힘들은 의식적인 자극을 그것들의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그러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은 그 스스로 작용된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6쪽)


The second kind reaction can be acted: when reactive forces take conscious excitation as their object, then the corresponding  reaction is itself acted.(Nietzsche and Philosophy, 113쪽)   
 
영역본에서의 ‘be acted’는 문맥상 ‘능동적이 된다’ 정도의 뜻이다(‘영향을 받는다’는 식의 번역은 난센스이다). 여기서 의식의 반응은 ‘행위에 의한 반응’으로서의 ‘참된 반작용’에 부합한다. 그래서 니체는 의식이 겸손해야 하다고 요구하면서도(어쨌든 의식 또한 반응적 힘이므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반응적 체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망각과 기억의 차이로 변주된다. 니체에게서 망각은 제동력이자 완화장치이고 재생력을 갖는 치료적 힘이다. 이러한 ‘능동적’ 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소화불량 환자의 처지와 같게 된다. 아무것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는 변비 환자 또한 연상시킨다). 우리가 현재 순간에 어떤 행복, 평온, 희망, 자부심, 기쁨 따위를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망각의 능력 덕분이다. 망각은 반응적 힘이 스스로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것이 반작용으로서, 반동적 행위로서 번역비평이 봉착한 궁지를 타개시켜줄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0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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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8-11-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좀 어렵네요. 번역비평이 반동적행위고, 반동적행위는 원한이고, 원한은 쌓아두는 거고, 쌓아두는 건 무의식이고, 무의식은 망각이고~전 이렇게 이해되는데요. 그러면 망각은 번역비평인가요? ㅎ 저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번역비평도 너~무나 능동적인 것 같아서 사실 이런 논의 자체가 느낌이 안 오네요.^^

로쟈 2008-11-29 13:36   좋아요 0 | URL
무의식은 망각이고, 에서 다시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무의식은 기억/축적이고 의식이 망각이거든요...^^ 저도 이런 대목에선 국역본 <니체와 철학>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 다시 옮긴 거구요(보통은 원저보다 번역본들이 더 어렵습니다)...

릴케 현상 2008-11-2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사실 무의식은 기억이고로 정리했다가...축적은 무의식이니까 다른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수정했거든요^^ 아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요.

yoonta 2008-12-1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마이클하트의 책(들뢰즈사상의 진화)를 다시 읽다가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역량에 관한 들뢰즈의 연구는 두가지 층의 구별을 밝혀준다. 첫째 층위에서 그는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둘째 층위에서 그는 기쁘고 수동적인 변용들과 슬프고 수동적인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들뢰즈 사상의 진화 309쪽>

여기에서 들뢰즈(마이클 하트)는 역량에는 순수한 형태의 긍정적인 힘인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passive) 변용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전자인 순수한 능동적 힘들은 "불투명한 채로 남아있"어서 분석하기 힘들고 후자인 두번째 층위의 수동적 변용들이 우리들의 (들뢰즈가 논한 것처럼)의식과 무의식간의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량이라는 것라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실천practice의 기반이 되는 "기쁜" 수동적 변용들, 즉 의식과 느낌들을 축적만 하고 새로운 실천(행위)를 위해 망각하지 못하는 "슬픈" 수동적 변용들, 즉 무의식으로 구분될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스피노자의 기쁨joy의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이 가능하게 되는 지점도 결국 여기서였죠. 기쁨이라는 말이 흔히 오해되기 쉬운데 사실은 순수한 의미의 기쁨(능동성)이라기 보다는 슬픔과 수동성을 망각함으로써만 얻어지는 (수동적/반응적/반작용적/반동적) 기쁨이라는 것 이것이 이 말의 좀더 정확한 해석이죠.

로쟈님 덕분에 가물가물해질뻔 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그런데 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라고 하셨는데..혹시 글의 전문은 볼수있을까요?

로쟈 2008-12-10 18:10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 2호에 게재될 예정이고 곧 출간된다네요. 나머지는 예전에 쓴 걸 좀 간추린 거라 생략했습니다...
 

미국 한국학계의 거두였던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저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산처럼, 2008)이 번역돼 나왔다. 반계 유형원과 조선 후기에 관한 연구서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 2007)의 저자 김범 씨가 역자다. 책은 작년 이맘때 예고됐는데, 1년만에 약속이 이루어진 셈(http://blog.aladin.co.kr/mramor/1800757). 도이힐러 교수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 2007)과 함께 해외 한국학의 수준을 일별해볼 수 있는 저작이 아닌가 싶다(알라딘에는 아직 이미지가 올라와 있지 않다).

경향신문(08. 11. 26) “유형원 등 조선의 실학자들 진보적 평가는 절반의 진실” 

미국에서 한국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역사학자 제임스 B 팔레 전 워싱턴대 명예교수(1938~2006년)의 주저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산처럼)가 번역·출간됐다. 1996년 나온 이 책은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한국학계를 풍미한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정하는 주장이어서 ‘식민지 근대화론자’ ‘정체성론자’라고 비판받았다. 팔레 교수는 이에 대해 “나를 비판하려거든 내 논저를 다 읽고 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1·2권 합해 1500쪽이 넘는 책은 반계 유형원(1623~1673년)의 <반계수록>에 나타난 경세사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유교적 경세론의 실체를 추적했다. 특히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진보에 대한 현재적 관점이 투영된 연구에서 벗어나 방대한 사료와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섭렵하고 유형원의 사상과 조선시대 제도를 촘촘히 묘사했다.



팔레 교수는 “유형원을 비롯, 실학자들을 근대성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이는 유교적 경세론의 핵심을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실증과학으로 잘못 해석한 시대착오적 판단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유형원의 경제사상은 16세기의 상대적으로 퇴보적이었던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진보적이었지만 서양은 물론 명이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발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중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교적 경세론을 해석하는 태도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학문적인 경세론과 역사적 현실의 관계, 그리고 그 둘의 상호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건국부터 강화도조약까지 조선 사회에서 일어났던 주요 변화의 본질을 탐구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대한 최근 연구가 비농업적 상업 분야의 성장, 노비제도의 축소, 조세제도의 전환 등 ‘조선이 스스로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찾음으로써 그 사회의 근본적인 양상의 일부를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진보를 입증하려는 열망’이 농업의 지배와 양반 권력의 유지, 지식계층의 사고에 준 유교적 경세론의 영향에서는 관심을 거둬들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역자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저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때로는 너무 경직되거나 엄격하게 적용해서 유연하거나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줄였고 그 결과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도 있는 사실을 때로는 너무 앙상하게 형해화시킨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김진우기자)

08. 11. 26.

P.S. 말이 나온 김에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관련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7. 04. 12) "서구학자 객관적 논증 한국학 비교 틀 만들어”

“숫자 하나 확인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글 자체를 옮기기 위한 번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훈상(53)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에드워드 와그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조선 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을 최근 번역·출간했다. 1993년 제임스 팔레의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 2004년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번역한 데 이어 와그너까지 번역함으로써 서구 한국학 대가의 주요 저서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옮겨지게 됐다.

한때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영어로 번역한 와그너 교수는 옌칭도서관 내에 한국학 자료실을 만드는 등 35년간 하버드대에서 한국학 개척과 발전에 헌신해온 인물이다. 완전을 기하기 위해 10년씩 걸려 번역서가 출간되는 동안 팔레 교수와 와그너 교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유일하게 도이힐러 교수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서구에서 한국학은 명함조차 꺼낼 수 없던 변두리 학문이었다. “이들의 성과가 없었다면 현재의 한국학이 이 정도 위치에 오를 수 없었겠죠. 요즘 한국학을 문화산업과 연결하는데 사실 외국에서 한국학의 발언권은 지극히 낮습니다.”

서구 한국학자들과의 인연은 이 교수가 대학원 재학 시절 팔레 교수의 책을 처음 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한국 사학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치밀한 고증 작업이 외국인의 손에 의해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는 그는 서구 한국학 대가의 책들을 탐독하게 됐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이론이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의 논증, 이것이 우리가 이 서구 한국학 학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들이 단단하게 쌓아 올린 한국학 기초자료들은 국내 사학자들도 인용할 정도로 견고합니다.”

이 교수는 와그너 교수가 조선왕조 전 시기 동안 진행된 748회의 문화시험 급제자의 인맥지도를 만들고도 조선시대 양반을 모르겠다며 중인 연구까지 폭을 넓힌 것을 그 예로 든다. 통계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이론’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의미 외에도 비교사적 의미도 함께 부여한다. 사회과학은 비교에서 출발하는 데 반해 한국사에서는 아직도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외국 것을 알아야 한국학이 어떻게 호소력을 가지고 어떻게 치환해서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있죠. 이들이 그런 한국학의 비교사적 틀을 만든 셈입니다.”
이 교수는 와그너 교수가 쓴 화원(畵員·궁중 도화서 소속 직업화가) 일람표를 원본 대조하면서 미술사학 관련 연구서까지 영역을 넓혔다. 3년 동안 고문서를 찾아다니면서 얻은 결과다. “서구의 한국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계 유형원의 대가로 불리는 팔레 교수의 저서도 한국 사학자들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맹목적인 추종도, 배타적인 경계도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구 한국학을 제대로 알고 이를 통해 한국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입니다.”(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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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5 23:49   좋아요 0 | URL
내재적 발전론이 수탈론과 연결되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제국주의 옹호론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제임스 팔레나 카터 에커트의 주장 중 내재적 발전론 비판은 곰곰이 되씹어 볼 만합니다.내재적 발전론-수탈론 주장자들중 그 논리를 군사정권 정당화에 이용하면서 박정희 전두환 앞잡이 노릇한 인간말종들이 수두룩했습니다.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면서 마치 내재적 발전론-수탈론이 정의인양 난리치는 자칭 타칭 진보파들을 보면 진짜 얼치기 진보들이 여러가지 하는구나....하는 생각 뿐.제임스 팔레는 군사정권에서 연구비라면서 주는 돈은 받기 거부한 지조라도 있었습니다.

로쟈 2008-11-26 21:49   좋아요 0 | URL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6 00:01   좋아요 0 | URL
와그너,도이힐러,팔레 외에 도날드 베이커도 추천합니다.조선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을 연구한 학자입니다.그리고 이런 책을 번역한 이훈상 씨같은 학자가 있어야지요.언어장벽때문에 원저를 못 읽었다면 한국사학자들은 번역본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맨날 애국심 팔아서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갈 생각하지 말구요.

로쟈 2008-11-26 21:4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연구서도 있었군요. 아무튼 이들 일급 한국학자들의 성과는 좀 놀랍습니다...

evol 2008-11-27 04:26   좋아요 0 | URL
서구 한국학의 거장으로서 최근에 번역된 안드레 슈미드도 빼놓을 수 없겟죠?

노이에자이트 2008-11-27 14:14   좋아요 0 | URL
슈미드는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준다고 생각한 헐버트나 매켄지가 사실은 백인우월주의자로서 일본이 식민지 쟁탈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을 규탄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죠.그리고 신채호에 대한 해석은 박노자와 비교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 게을러서 멈칫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