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전인가부터 '비바 악티바'라는 개념사 시리즈가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는데, 마땅한 리뷰가 올라오지 않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바로 옮겨놓는다. 비록 아직 한권도 손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분권형 '개념어 사전'이 사유와 행동을 위한 '도구상자'로서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개념 없는 이들은 필히 챙겨둘 일이고... 

한겨레(08. 12. 13) 인권·시민·계급 ‘개념의 족보’ 한눈에 본다

인문사회과학 시리즈 ‘우리시대’로 한국 출판계에 ‘문고판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책세상 출판사가 ‘비타 악티바’(Vita Activa·행동하는 삶)란 이름의 개념사 시리즈를 펴냈다.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어를 뽑아낸 뒤 그 개념이 생성되고 변화해온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실천적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풀어내려는 시도다.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지식사회학적 탐색인 셈이다.

‘개념사’라는 방식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시작된 도서출판 이후의 ‘비투비21’은 현재 2차분까지 출간된 상태다. 하지만 영국 오픈유니버시티 출판부의 ‘기본개념 시리즈’를 발췌·번역한 것이란 점에서 국내 학자들이 집필하는 비타 악티바 시리즈와는 차이가 있다.

이번에 나온 1차분은 <인권>(최현), <아나키즘>(하승우), <시민>(신진욱), <계급>(이재유), <아방가르드>(노명우) 5권이다. 필자 대부분 진보 성향의 30~40대 소장학자들이다. 개념의 역사를 통해 실천적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시리즈의 문제의식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쓴 <시민>에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개념은 “만들어진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서 탄생한 시민이란 개념이 중세와 근대를 거쳐 어떻게 오늘날의 핵심가치로 부상하게 됐는지를 다양한 지성사의 흐름과 정치·사회적 사건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정치적 주권자이며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시민의 이념이 보편화되기까지는 구세력에 맞선 근대 시민계급의 선도적 투쟁과 그 이념의 경계를 사회·경제적 평등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노동계급의 지난한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글쓴이는 하나의 윤리적 요청을 도출해낸다. 신분·계급·성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어온 시민의 이념은 “여전히 시민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또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누군가와도 평화롭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 시민사회에 대한 모색”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가 쓴 <아방가르드>는 형식에서 ‘개념사’보다는 ‘예술의 사회사’에 가깝다. 도전과 성공, 좌절로 이어진 아방가르드 운동의 예술사를, 그것을 둘러싼 정치·경제·사회의 포괄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방가르드의 출현 배경을 혁명과 제국주의 전쟁으로 초래된 정치·사회적 동요와 신기술의 출현이 가져온 예술적 재현의 위기에서 찾는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에 확립된 근대예술의 미학적 이상을 거부하고 저항과 실험을 통해 제도 예술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기 취리히에서 태동해 베를린과 쾰른, 뉴욕을 거쳐 파리로 이어지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핵심을 글쓴이는 반전통과 국제주의, 변혁에 대한 열망 등으로 요약한다. 일상의 기성품을 통해 신격화된 예술의 허구성을 폭로했던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시각적 충격을 통해 불편한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했던 마그리트의 콜라주는 이런 아방가르드의 이상을 구현한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하지만 글쓴이의 관심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성취한 영광보다는 실패에, 도발과 소란을 의도했던 오브제가 ‘거장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판매되는 ‘성공의 역설’에 맞춰져 있다. 그가 볼 때 오늘날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은 ‘시장’이다. ‘새로움’은 한때 아방가르드의 전유물이었지만, ‘유행’이란 이름으로 부단히 신상품을 만들어내는 시장 앞에서 예술의 도발은 과거의 파괴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섣부르게 아방가르드의 종말을 선언하진 않는다. 아방가르드에는 대중문화가 갖지 못한 ‘저항 정신’이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글쓴이는 2005년 뉴욕의 미술관을 순회하며 벌인 ‘도둑 전시’ 해프닝을 통해 관객과 예술 시스템을 조롱한 거리 예술가 뱅크시에게서 찾는다. “아방가르드는 죽지 않는다. 뱅크시가 사라지면 또다른 이름의 아방가르드가 나타날 것이다. 누구나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꿈꾸는 자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되풀이되는 신화다.”

시리즈 2차분은 내년 1월에 나온다. 출판사는 내년 말까지 전체 30권을 완간할 계획이다. 남아 있는 시리즈는 <공화주의> <노동가치> <민족주의> <생태주의> <유토피아> <자본주의> <자유> 등이다.(이세영 기자)

08. 12. 12.

P.S. 내친 김에 개념사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도 챙겨놓는다. '개념사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기사다.

대학신문(08. 11. 15)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 - 개념사를 아십니까?

도시 지역 및 국가 구성원으로서 정치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주체. 위키백과사전에 나온 ‘시민’에 대한 정의다. 오늘날 시민은 국민국가의 구성원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산업혁명 당시에는 유산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사회제도에 따라 달리 정의된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김용구 원장은 “개념은 장소(토포스)와 시간(템포)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해 기원을 살펴보고, 개념을 매개로 정치·사회의 전개과정을 분석한다. 개념은 정치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반영하는 치열한 사고과정의 산물이고 개념사는 실증적 정치사회 분석과 사상사적 분석의 매개체다.

◇‘근대’에서 벌이는 ‘개념의 싸움’=한림과학원은 지난 2005년부터 ‘한국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오수창 교수(한림대·사학과), 송호근 교수(사회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해 총 50개 항목으로 집필할 계획이며 2015년에 완료할 예정이다. 지난 9월에는 ‘한국 개념사 총서’의 1권으로 김용구 원장의 『만국공법』이 출간된 바 있다. 이 용어는 일본 학계의 용어 ‘국제법’에 밀려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다.

현재 7차례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시장, 민족, 국가, 주권, 시민, 헌법 등의 용어가 선정됐다. 이들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생성된 개념으로서 근대를 규정짓는 핵심 용어다. 박명규 교수(사회학과)는 “개념사 연구는 근대를 거쳐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등 근대의 문화적 성격을 밝히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며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근대를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19세기 말은 고유한 언어, 사상이 서구문물과 만나면서 ‘개념의 싸움’을 벌이던 시기다. 전근대와 근대가 만나면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던 19세기 말은 개념사의 관건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한국 개념사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유럽에서의 개념사 연구는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개념의 전이’를 주로 다루지만 한국에서는 ‘개념의 충돌’도 주 연구대상이다. ‘시민’ 역시 한국에서는 한자문명권, 한국의 특수성 등의 맥락에서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 개념사 연구의 논리와 방법」에서 우리만의 맥락으로 시민의 개념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시대 ‘시민’은 ‘시(市, 시장을 뜻하는 한자)’와 ‘민(民)’의 합성어로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시민’은 자유로운 도시주민을 의미했는데, 도시행정의 개편과 더불어 ‘시의 주민’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헤겔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면서 ‘시민’은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입되던 서구사상이 서구에서 한국으로 직접 들어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1990년대 초에 언급된 ‘시민’은 일본의 시민론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의 개념사를 연구할 때는 서구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파된 과정, 한자문명권 내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충돌, 일본의 식민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사상의 굴절, 서구사상의 직수입 등의 과정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편과 특수, 두 마리 토끼 잡기=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대다수 서양에서 탄생, 정리된 개념이다. 서양의 개념은 비서양에 수용되면서 기존의 개념과 충돌해 서로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같은 용어라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용어를 사용할 때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개념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개념사 연구는 비교문화적 관점을 통해 학문이나 사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강상규 교수(한국방송통신대·일본학과)는 “세계사적 개념과 동아시아적 특수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며 “보편과 특수의 접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칫 맥락을 놓치면 용어가 보편적 개념으로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과 특수의 경계에 위치한 개념사 연구는 동양의 학문을 오리엔탈리즘으로 격하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강 교수는 “개념사를 통해 구체적 맥락을 파악할 때 이 땅의 고민이 묻어나는 학문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념사, ‘동아시아’를 외치다=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4개 단체가 공동주최한 제11회 개념사국제학술대회가 지난 9월에 개최됐다. ‘서구 개념의 지구적-역사적 전파와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환’을 주제로 유럽, 아시아 등의 학자들은 서구 개념이 아시아 지역으로 어떻게 전파됐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했다.

리디아 류 석좌교수(미국 컬럼비아대·인문대)는 ‘제국주의 전쟁에 있어서 상처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정의해 타국을 침략했는지 분석했고, 사다미 스즈키 박사(일본 국제일본연구센터)는 ‘메이지유신기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 대하여’를 주제로 일본에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한국의 개념사가 동아시아의 개념사, 세계적 개념사와 함께 논의된 것이다.

지난해 인문한국지원사업에서 인문분야 중형 연구소로 선정된 한림과학원은 근대 이후 개념들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소통 가능성을 넓히고자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림과학원은 ‘18세기 시(時)와 속(俗) 관련 용어의 변화와 의미’, ‘대립개념과 연관개념을 통해 추적한 문명개념의 변천과정-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 다양한 주제로 월례발표회의를 열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와 현대문제를 연구하는 동아시아학술원도 ‘동아시아 개념사의 가능성 모색’을 주제로 지난달 10일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민병희 연구원(동아시아학술원)은 ‘동아시아에서의 개념사 연구문제에 대하여’를 주제로 유럽 개념사와 동아시아 개념사를 비교 분석했다.

◇개념사, 아직은 초보운전 중=연구자들은 한국의 개념사 연구가 첫발을 내딛는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는 “현재 사회 근간을 이루는 용어를 우선 연구하고 있다”며 “협의를 통해 용어를 확대, 선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를 위해서는 서양의 정치사상 및 동아시아의 논의와 더불어 한국의 논의를 함께 파악하고 비교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학제 연구가 필수적이다. 최근 여러 학술대회에서 연구자들의 협의가 이뤄지는 점은 기대해볼 만하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개념사 연구는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박명규 교수는 그중에서도 사전편찬 작업을 첫손으로 꼽았다. 그는 “어휘사전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전이 부족하다”며 “어휘에 대한 용례 사전이 발전해야 사전적인 정의를 기초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시점에 서울대 역사연구소 주도로 진행 중인 ‘역사용어사전’ 편찬 작업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최근 연구는 한자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자어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번역·수입됐는지 등 어휘의 연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자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개념사는 학문을 위한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개념 자체가 명확히 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개념사를 ‘학문의 얼굴’이라고 일컫는 이유다.(류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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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55   좋아요 0 | URL
유럽어가 근대일본을 통해 번역되면서 한자문화권에 정착된 역사에 관한 연구는 정말 절실한 과제라고 봅니다.이런 곳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학문도 점점 나아지나 봅니다.

로쟈 2008-12-14 09:46   좋아요 0 | URL
<번역어 성립사정>이란 번역서가 있는데, 후속작을 기대했지만 절판되고 말더군요...
 

주초에 재미있게 읽은 이번주 시사IN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사회과학 대망론'이다. 경제위기 때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부활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는 것이다(고작 인문학 독자 1만명을 꿈꾸는 내가 소심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뭔가 새로운 '얘기 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당신이 미네르바를 믿는다면 이 참에 우석훈도 믿어보자. 그리고 최소한 한달에 한권, 사회과학서를 돈 주고 사서 읽어보자.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문화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한번 지켜봐 보자. 그런데, 방안을 둘러보니 정말 사회과학서가 드물군. 죄다 문학, 철학, 미학, 역사, 예술서 들이니... 

시사IN(08. 12. 09)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부분균형’이라는 분석 틀을 만든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단다. 이후에 마셜의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찾지 못했다. 요즘 다시 부활하는 케인스의 적 중에 한 명이, 바로 이 마셜이었다. 어쨌든 이 한 문장은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개뿔,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은폐하려고만 했고, 과학은 숫자로 가득한 예쁜 도표에서만 존재했다. 이제 마흔이다. 다시 이 문장을 접하고는 “미네르바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점심이나 저녁식사, 그리고 차를 마실 때 미네르바보다 더 끔찍하고 참혹하게 미래를 예상하던 증권사나 연구소의 경제학자들이 다음 날 발표한 문건의 모든 문장은, “나도 월급쟁이야”라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월급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전문가라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다. 한때 마르크스 경제학이 화려하게 부활한 적이 있는데, 바로 19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의 한동안이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위기를 맞으며, ‘이것은 석유값 때문이다’ 혹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음모 때문이다’라고 되지도 않는 말을 할 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그게 맞든 틀리든 나름의 설명을 했다. 과잉생산 때문이든가, 부문별 조정 실패 때문이든가, 아니면 유통주의적 임금조정의 실패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다리면 좋아진다’는 우파들을 제치고 좌파끼리 논쟁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 시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고 정운영 선생이 평생 풀어보고 싶었던 ‘전형논쟁’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파 경제학에는 ‘공황론’이라는 것이 없고, 위기이론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그러니 경제위기가 오면, 당연히 공황이라는 이론 틀에서 출발하는 좌파 경제학이 힘을 쓰게 되어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이다. 과연 한국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올 수 있을까?



1만 권 팔면 ‘신의 영역’

자, 한국의 출판시장 규모를 살펴보자.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로, 2007년 3조1000억원 정도 된다. 그렇다면 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서, 외환위기의 여파가 몰려들기 시작한 1998년에는? 3조7000억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출판시장은 고작 6000억원만 줄어든 선방을 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슬픈 선방’이다. 1998년 한국에서는 1억9000만 권이 발행되었는데, 2007년에는 1억3000만 권이다. 확실히 부수는 줄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가장 많이 줄어들었을까? 2007년 한국에서 사회과학 도서는 총 1532종이 발행됐다. 1999년 1351종보다 약간 늘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1998년에는? 두둥! 1만4460종. 1998년에서 1999년으로 넘어오는 1년 사이에 사회과학 도서가 만 종 단위에서 천 종 단위, 즉 10분의 1 가까이로 준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외환위기를 경계로 한국에서는 사회과학이 죽었고, 이게 출판시장 자체를 위축시킨 1등 요인이 된 셈이다.

아주 과학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2년 전 나는 여러 통계를 종합해서, 한국의 사회과학 독자가 ‘2만명’이라는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이 가설은 대체로 여러 정황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과학 시장은 50권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지인이 사주는 분량이다. 교수 가 내는 책은 1000권이 넘으면, 우리끼리 베스트셀러라고 부른다. ‘명함 대신 사용하는 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2000권을 넘으면, 출판사의 손익분기점을 넘어 최소한 손해는 안 끼치는 책이 된다. 5000권을 넘기면, ‘50명의 글쟁이’ 안에 들어간다. 고종석 같은 저자가 대충 그 선에 서 있는 걸로 안다. 1만 권을 넘기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이런 책을 낸 출판사는 보통 ‘중견 사회과학 출판사’라 분류된다. 이 정도 됐을 때 저자가 받는 인세는 1000만원 안팎이다. 그 이상의 경지는 하늘이 하는 일이다. 장하준은 그래서 ‘신 중의 신’이라 불린다. 국방부 불온문서? 그것도 신의 능력에 포함된다.

최근 일본의 어느 에디터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출판시장은 한국보다 3배 이상 큰데도 이른바 ‘심각한 책’이 연간 1500종 나오는 데 비해, 한국에서 같은 1500종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과학을 우습게 보지만, 어쨌든 그는 이것을 한국의 저력이라 파악하며,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매번 외국 저자들에 비해서, ‘급 떨어지고, 질 떨어지는’ 저자 정도 취급받는 한국 사회과학의 지은이들이, 지난 10년간 일본보다 규모도 작고 구조도 열악한 상황에서, 정말로 이 악물고 사회과학이라는 장르를 지켜온 셈이다. 한국인은 한국 저자를 우습게 보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금방 망할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이 아직도 학술문화에서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계하는 눈치이다.

저자의 고령화가 진짜 위기

한국의 사회과학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2만명 정도의 사회과학 독자, 1000명 미만의 저자,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이 악물고 지켜온 시장이라서, 단군 이래 최악의 출판 공황이라는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도 어찌어찌 버티기는 할 것 같다. ‘신의 영역’이라는 1만 권 팔아 1000만원 버는 상황에서도 버텼는데,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그러나 저자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편집자의 나이도 같이 높아지는 것, 이건 위기다. 20대가 에디터로 활동하고, ‘지금 여기’에 대해 얘기를 던지는 20대 저자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이 구조적 위기, 이건 정말 위기이다. 일본과 한국 시장의 미래 구조 차이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즉, 길게는 못 버틴다.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 위기에서 더 많은 사람이 분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쓰고, 더 많은 사람이 읽고 떠들면서 소통해야 사회적 대화가 시작되고, 사회 합의든 논의든 다음 단계를 위한 진화가 시작된다. 지금보다 10배 많은 사람이 글을 써서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면, 나는 비로소 한국형 경제모델도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핵심 쟁점인,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 분야의 ‘시대와 호흡하기’ 그리고 ‘얘기 만들기’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 세상은 위기이다. 많은 사람이 그 위기를 직시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결국 붕괴하게 된다. 한때, 세계의 제국이던 네덜란드가 그렇게 붕괴했다. 위기의 순간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상상이 결국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단지 ‘용기를 내라’는 이명박식 처방으로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 문화경제로의 전환, 그 첫발은 이 위기 국면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래야 영화도 살고, 만화도 살고, 음악도 살아난다(하나만 부탁하자. 제발 도서관들, 출판사에게 ‘영광으로 알고 책 공짜로 달라’는 거, 그것 좀 하지 마라).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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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사IN]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 우석훈
    from 자기치유 2008-12-14 20:12 
    ‘부분균형’이라는 분석 틀을 만든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단다. 이후에 마셜의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찾지 못했다. 요즘 다시 부활하는 케인스의 적 중에 한 명이, 바로 이 마셜이었다. 어쨌든 이 한 문장은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개뿔,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경제학은..
  2.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

고교 독서평설 12월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세계문학과 국민문학(민족문학)의 관계를 화제로 삼아서 쓴 것으로 '세계화'와 관련한 네 차례 연재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예전에 쓴 '상자 속의 문학과 세계문학'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몇몇 대목은 편집자가 가독성을 고려하여 풀어썼다. 그럼에도 고등학생들이 읽기 어렵다면 아직은 나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2월호)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은 공존할 수 있을까?

세계 문학의 출현 - 세상의 빛을 보다
“오늘날에는 국민 문학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이제 세계 문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지.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런 시대의 도래 촉진을 위해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네.”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J. W. von Goethe, 1749~1832)는 1827년 에커만(J. P. Eckermann, 1792~1854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문학’에 대한 최초의 구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학이란 말의 원조는 독일어 ‘벨트리테라투르(Weltliteratur)’이고, 영어의 ‘월드 리터러쳐(World Literature)’는 이 말의 번역어다.

세계 문학이란 전 세계 각국의 문학을 뜻하기에 오랜 역사를 가졌을 법하지만, 실제로 그 개념 자체가 출현한 지는 불과 2세기도 되지 않는다. 이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세계’가 출현한 것이 근대의 지리상 발견과 산업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세계’가 먼저 출현해야 ‘세계 문학’이란 것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학의 의미 - 세계 문학과 국민 문학의 관계
사실 한국어에서 ‘세계 문학’은 조금 더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네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국내 문학과 대비해서 국외 문학·해외 문학을 통칭해 세계 문학이라고도 부른다. 곧 외국 문학(Foreign Literature)이란 뜻의 세계 문학이다. 두 번째는 세계 명작(World Classic), 또는 세계 문학의 고전들을 가리키는 세계 문학이 있다. 흔히 세계 문학 전집 등의 출판 기획물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말이 이를 뜻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오늘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도 가능하다. 이 경우는 ‘지구 문학(Global Literature)’이나 ‘세계적인 문학(Worldwide Literature)’이라는 뜻으로 풀어 볼 수도 있다.

동시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처럼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학이다. 이러한 문학은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명작’에 편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세계 명작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반대로 모든 세계 문학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아니므로, 이 두 개념은 서로 구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괴테가 처음 제시한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세계 문학이 있다. 괴테 시대에 막 시작되었고, 그 도래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세계 문학이다. 이것은 국민 문학(National Literature), 또는 민족 문학을 대응 개념으로 갖는 세계 문학이다. 따라서 세계 명작류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 문학계에서 일찍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화두로 제시했던 문학 비평가 백낙청은 세계 문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것은 “괴테가 ‘세계 문학’이란 용어로 뜻한 바가 세계의 위대한 문학 고전들을 한데 모아 놓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그 당시로서는 당연히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지만)의 지성인들이 개인적인 접촉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을 읽고 중요한 정기 간행물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대의 그물망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 용어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차라리 세계 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명작’들을 ‘세계 문학 전집’이라고 한데 모아 놓는 것은 괴테가 말한 세계 문학과 무관하다. 오히려 이 괴테적 세계 문학에 대한 반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도래하게 되면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국민 문학·지역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문제는 이 세계 문학의 형성이 국민 문학(민족 문학)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한가, 아니면 그 극복을 통해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과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일까, 아니면 민족적인 것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적인 것에 값할 수 있게 될까? 다시 말하면,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올바른 세계 문학일까, 아니면 민족 문학의 틀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 문학이 될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상자 속의 사나이>를 읽으면서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국민 문학 - ‘상자 속의 사나이’가 살아가는 법
소설의 주인공은 시골 학교의 그리스 어 교사 ‘벨리코프’다. 그가 ‘상자 속의 사나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날씨가 매우 좋을 때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드는데다가, 반드시 솜이 든 방한 외투를 입고 외출하기 때문이다. 벨리코프가 자신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격리시켜 방어하려는 ‘상자들’로 자기를 감쌀수록 그에게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질, 곧 사회성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 벨리코프가 찬양한 것은 과거의 세계, 그리스어의 세계뿐이며, 심지어 그는 인간을 ‘안트로포스’라는 그리스어로 부른다.

이 단편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노총각 벨리코프를 타지에서 온 동료 교사의 누이 서른 살의 바렌카와 결혼시키려던 일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이 사나이에게, 인생의 큰 '일'인 결혼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드물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의 모의 덕분에 거의 결혼할 뻔했다. 하지만 결혼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벨리코프는 바렌카에게 청혼하기를 주저했고,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사건이라고 해 봐야, 언제나 활달하며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렌카가 어느 일요일에 동생 코발렌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을 벨리코프가 목격하게 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너무도 날씨가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활기차게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바렌카와는 대조적으로 벨리코프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로서는 부인네나 처녀가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리코프가 보기에 그건 공고로써 ‘허가’된 일도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벨리코프는 다음 날 학교도 결근한 채 저녁 무렵 여름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두꺼운 옷을 껴입고 주의를 당부하러 코발렌코를 찾아간다. 그러나 오히려 봉변만을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바렌카는 또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운 벨리코프는 한 달 뒤에 죽고 만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관 속에 든 그의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해 보였으며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흡사 드디어 상자 속에 들어가게 해 주어서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죠, 그는 글자 그대로 자기의 이상에 도달한 셈입니다.”

결국 ‘상자 속의 사나이’의 삶은 상자(관) 속에 들어감으로써 완성되었다. 이는 그의 ‘상자 속의 삶’이란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곧 그는 죽음(=상자)이라는 외피를 두름으로써만 연명할 수 있었던 삶,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삶’이자 진정한 의미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세계란 무엇인가?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세계 종교론을 조금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세계 문학 - ‘상자 속의 문학’에서 벗어나기
가라타니는 ‘세계 종교’라는 말을 단순히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라는 관념을 제시한 종교라는 의미로 쓴다. 이때 ‘세계’는 ‘공동체’의 상대어다. ‘공동체의 종교’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 또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공동체 종교는 안(내부)과 바깥(외부)의 구분을 대전제로 삼는다. 반면에 이러한 공동체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한 세계 종교는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세계’, 곧 ‘무한한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유대교에서의 야훼는 다윗이나 솔로몬이 믿는 공동체 신으로서의 야훼와, 공동체를 부정하는 모세의 신 야훼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모세의 신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안녕과 보존을 제공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이른바 ‘사막에 머물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막’은 꼭 물리적인 사막을 뜻하지는 않으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계 종교는 ‘사막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세계 문학 또한 ‘사막의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거부하는 공동체 ‘바깥의 문학’이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문학’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한 문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다. 올바른 민족문학(국민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공동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국민문학은 세계문학이 아니며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이 아니다. 세계문학이란 유대교의 야훼가 아닌 모세의 신을 섬기는 문학이기에 그러하다. 물론 세계문학의 대척점에서 보면 공동체의 문학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동체 신이 번창하듯이 공동체의 문학 또한 번성해 왔고 번성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상자 속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자 속의 문학’은 공동체 문학과 민족 문학의 다른 이름이자, 상업주의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 이 ‘상자 속의 문학’은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종족과 재산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든다. “항상 색안경을 끼고 털 스웨터를 입은데다가 귀를 솜을 싸고, 합승 마차를 타면 반드시 포장을 치게 한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벨리코프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상자 속의 문학’이 가장 편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상자(관) 속이다.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사막’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사막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발견자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주체, 곧 ‘코기토의 발견’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 데카르트는 많은 여행을 통해 코기토의 발견을 얻어냈다. 알다시피 개별 민족은 각기 다른 문화적 관습과 전통, 생활방식 등을 갖고 있다. 데카르트는 여행중에 이처럼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차이를 지각하고, 자기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류학적’ 코기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작가 또한 체호프 또한 1890년 사할린 섬을 여행하면서 그런 인류학적 현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러한 체험과 거기서 얻은 깨달음이 작가의 창작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비유컨대,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그러한 ‘사막’에 대응하는 사건은, 가능할 뻔했던 ‘바렌카와의 결혼’이다. 바렌카는 소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타자(他者)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러시아 어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큰 소리로 ‘하하하’ 웃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벨리코프 또한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하지만, 그에겐 자신의 ‘상자’를 벗어 던지고 타자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따라서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도 결국은 청혼해서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결혼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작중 화자의 예단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진정한 사건은 결국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 -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족 문학
<상자 속의 사나이>를 ‘진짜 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밝혀 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면, 진정한 문학은 우리에게 ‘사막’을 보여 주는 문학이며 ‘사막’을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인류학적 여정을 가능하게 문학이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자각하게 함과 동시에, 세상은 넓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이다. 그것은 과연 민족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가라타니의 세계 종교론을 민족이라는 우상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한쪽에는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섬기는 '공동체 신의 민족문학'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특정한 공동체를 부정하고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세의 신의 민족문학'이 있을 법하다. 동일한 종교에서 공동체종교와 세계종교를 분리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문학에서도 공동체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을 식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우리가 촉진하고 앞당겨야 할 세계 문학은 모세의 신을 섬기는 민족 문학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민족 문학 자체에서 두 가지 개념을 분별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는, ‘민족’으로도 ‘국민’으로도 번역되는 ‘네이션(nat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이념의 공간이며, 네이션 바깥에 또 다른 네이션이 있는 현실 또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과연 민족문학이 공동체문학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 세계문학과 양립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을 부정하는 민족문학이 될 것이다.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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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12-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08-12-12 21: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 부쩍 많이 출간된 '글쓰기' 책들에 대한 인상을 적고 있는데, 아이템 자체는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어렵게 작성하진 않았지만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몇 가지 해프닝이 생기는 바람에 마감을 겨우겨우 맞추었다. 글쓰기 책을 몇 권 훑어보아도 글쓰기 자체는 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한 글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12. 15)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글쓰기를 권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글쓰기’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게 없지만 그 글쓰기의 주체를 ‘누구나’로 전제한다는 점이 새롭다. 예전의 ‘작문론’이나 시․소설 작법 등과는 성격이 좀 다른 것이다. 바야흐로 “누구나 글을 쓰고, 써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 새로운 시대적 조건을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이다. 온라인상의 블로그, 미니홈피, 카페와 클럽, 그리고 토론광장 등 글쓰기의 공간은 차고 넘친다. 그에 따라 글쓰기에 대한 유혹 또한 전면적이며 전방위적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의 <전방위 글쓰기>(바다출판사 펴냄)의 착안점이 그렇다. 인터넷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를 무너뜨렸다는 것. “따라서 21세기의 글쓰기는 특정한 과정을 거쳐 작가가 된 사람들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비록 글쓰기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라 하더라도 그 욕구의 현실화는 멀티미디어 시대, 미디어믹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게 된 시대,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쓸 수 있을까다. 글쓰기가 타자와의 소통이고 유희라면, 더 잘 소통하고 더 잘 즐기는 법을 아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전방위 글쓰기>는 이미 다방면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전방위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는 저자의 노하우를 담고 있다. 글쓰기의 필수 교양 세 가지로 철학적 사고와 경제 상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점을 드는 것을 ‘저자만의 노하우’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대중문학에서 영화, TV, 만화, 음악, 시사비평까지 다루면서 친절하게 요령을 짚어주는 것은 저자만의 강점이다. 그러한 요령과 비법을 습득한 뒤에 자기만의 ‘색다른 정보’를 가미한다면 “누구나 비평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살려 얼마든지 특정 분야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책은 그러한 비평적 글쓰기의 매뉴얼이다.

물론 전방위 문화비평가가 다 짚어준다고 해서 누구나 저절로 그처럼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강제’는 필요하다. 이를테면 반드시 일주일에 원고 2-3매라도 꾸준하게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보면 인터넷 시대라고 하여 특별한 글쓰기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닌 듯싶다. 그의 결론 또한 우리 귀에 익은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그리고 꾸준하게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정도다.”

뭔가 자기만의 주제에 대해서 꾸준히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책을 쓰면 된다. 어떻게? 오병곤과 홍승완이 지은 <내 인생의 첫 책쓰기>(위즈덤하우스 펴냄)는 제목 그대로 ‘첫 책쓰기’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직장인으로서 실제로 자신의 첫 책을 쓰는 데 성공한 경험을 풀어놓고 있어서 그 노하우는 자못 구체적이다. 책을 출판하기 위한 ‘좋은 출판사를 고르는 3가지 기준’까지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첫 책을 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출판 거절을 경험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란 구절은 이 책이 얼마나 ‘실전적’인가를 말해준다.   

저자들이 ‘첫 책쓰기’에 도전해보도록 권유하는 독자층은 직장생활 10년차 직장인들이다. “대략 3년에 한 번 꼴로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의 3분의 1을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게” 되기에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는 요즘 직장인들의 10년 공력이면 책 한 권은 너끈하다는 판단이다. “자기만의 노하우나 전문성을 담은 책을 쓰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저자들은 격려한다. 하지만 이런 대목을 읽게 되면 책 쓰기가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도 여겨진다. “전문가 1.0 시대가 학위나 자격증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면 전문가 2.0 시대에는 책쓰기에 의해 판별될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가 되려면 자신의 책을 써야 한다.”

비록 웹2.0 시대, 전문가 2.0 시대라고는 하지만 글쓰기의 목표가 비평가나 전문가 되기일 수만은 없다. 박미라의 <치유하는 글쓰기>(한겨레출판 펴냄)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글쓰기의 ‘치유의 힘’을 편안하게 풀어나간다. 기본 전제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글쓰기 안에 모두 담겨 있다는 점. 곧 나를 표현하기, 거리두기, 직면하기, 명료화하기, 나누기, 사랑하기, 떠나보내기, 수용하기가 모두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글쓰기의 노하우는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 그래서 저자는 몸으로 쓰고, 심장으로 쓰라고 권한다.

가령 15살에 가출하여 ‘양아치 오빠들’을 만나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다 18세에 귀가한 한 여성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털어놓는다. “집에 들어갔다. 큰오빠한테 좆나게 맞고 작은오빠한테도 좆나게 맞았다. 하루종일 맞았나보나. 맞다가 오빠들한테 그랬다. 씨발 죽었어. 다시는 집에 안 들어와. 씨발, 하고 나는 다시 집을 나갔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나는 오빠들이 나를 때려서 정말 미웠다.” 고상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처지와 가출의 배경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음의 문을 열고 상처를 어떤 식으로든 글로 표현해내는 것, 그것이 치유하는 글쓰기의 시작이다. 이 치유하는 글쓰기의 목표는 우리가 조금 덜 불행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글쓰기에 소질이 좀 있다면, 그리고 열정도 갖추고 있다면 보다 ‘본격적인’ 경지로 나아갈 수도 있겠다. 이른바 ‘글을 쓰는 삶’의 경지다. 미국의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애니 딜러드의 <창조적 글쓰기>(공존 펴냄)는 그런 삶의 다채로운 면모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창조적인 글을 쓰는 삶을 ‘가장 자유로운 상태의 삶’으로 규정한다. 물론 자신의 포부에 호응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전문적인 글쟁이들에게도 언제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헨리 소로의 말대로 젊은 시절엔 궁전이나 사원을 지을 재료들을 모으지만 중년이 되면 나무 헛간 정도를 짓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것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며 그의 보람이다. 글쓰기는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제하며 고양시킨다.

08.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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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12-0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그런데 일주일에 원고 2-3매가 왜 이렇게 안 되냐 이거죠. 어휴어휴. 저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책 중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제일 좋았어요. 소개해주신 요즘 책 중에선 [전방위 글쓰기]가 궁금해요. (근데 이런 책 읽을 시간에 사실 한 장이라도 더 쓰는 게 좋은 거 아냐? 하는 생각이 할 수 없이 드네요. 킁.)

로쟈 2008-12-09 08:28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주일에 2-3매가 아니라 하루에 2-3매가 되어야 할 듯싶은데요.^^;

파란여우 2008-12-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능도 열정도 시시한 사람은 당췌 뭘 해 먹으라는 말에요.

로쟈 2008-12-09 14:20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에겐 염소들도 있잖아욧!^^;

Arch 2008-12-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니 전 서재 닫아야할 것만 같고^^

로쟈 2008-12-09 14:04   좋아요 0 | URL
흠, 다들 '본격적인 글쓰기'를 노리시는 건가요?..

nada 2008-12-0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애니 딜러드.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많이 그러든데 번역되어 나왔군요. 근데 163쪽밖에 안 되는데 가격은 왜 다른 책들하고 같은 수준인 거예요. 군시렁군시렁.

로쟈 2008-12-09 14:05   좋아요 0 | URL
앗, 양배추님. 왜 이렇게 뜸하신 거예요. 궁시렁궁시렁...

토란잎 2008-12-1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꾸준히 쓰는 일...... 글쓰기의 왕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텐데....
아이궁,
이 게으름이여!

로쟈 2008-12-11 21:06   좋아요 0 | URL
이틀에 이틀치씩 쓰셔도 됩니다...
 

이번주 개봉예정작에는 이미 '걸작'이란 소문이 파다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가 포함돼 있다. 명불허전이므로 간단한 소개 기사들만을 챙겨둔다(개인적으론 러시아 마피아를 소재로 한 영화여서 더 기대가 크다). 그럼에도 기사는 꼼꼼히 읽지 마시길...  

 

한겨레(08. 12. 08) 비극은 한 권의 일기서 시작됐지

‘냉혹함’과 ‘포근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조산실의 풍경과 사내들이 서로의 목을 향해 칼질을 서슴지 않는 ‘조직’의 세계는 좀처럼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스파이더>(2002)와 <폭력의 역사>(2005)에서 기묘한 느낌의 세계를 구축해 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나타나는 풍경들을 서늘하게 그린다.

런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조산사 안나(나오미 와츠)는 ‘타티아나’란 이름의 열네 살짜리 그루지야 소녀가 낳은 아기를 받아 낸다. 숨진 소녀와 살아난 아기. 안나는 아기의 연고를 찾기 위해 소녀의 일기장에 꽂힌 명함 주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인자해 보이는 노인 세미온(이민 뮬러-스탈)이 안나를 맞는다. 세미온은 겉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신사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에 근거를 둔 런던 최대 범죄 조직 ‘보리 V 자콘’의 두목이다. 세미온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안나는 조직의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안나는 러시아어로 써진 소녀의 일기를 읽을 수 없다. 세미온은 안나에게 “일기를 번역해 주겠다”고 말하고, 안나는 그에게 일기 사본을 넘긴다. 일기에는 안나가 모르는 뜻밖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세미온의 세계’는 ‘안나의 세계’에 개입한다.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당신이 있을 곳은 저기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비정한 조직은 니콜라이를 세미온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 대신 사지에 내몬다. 사우나실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두 괴한의 침입을 받은 니콜라이가 보여주는 절박한 폭력의 몸짓은 영화의 ‘백미’라 꼽을 만하다. 싸늘한 주검이 된 타티아나가 그랬듯 니콜라이도, 세미온도 한때는 ‘포근함’의 세계에 속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11일 개봉.(길윤형 기자)

필름2.0(08. 12. 05)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경지

한 가족사를 통해 폭력의 생태를 짚어나가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크로넨버그가 다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증명하는 걸작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런던. 평범한 외관의 이발소와 약국에서 뜻밖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중년 남자가 이발하는 도중 청년에게 살해당하고 약국을 찾은 임신 중인 소녀는 하혈을 하며 기절한다. 소녀는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아이를 낳고 죽는다. 유품인 일기장에서 소녀의 이름이 ‘타티아나’임을 알게 된 간호사 안나(나오미 왓츠)는 러시아어로 쓰인 수첩 내용을 번역해 아기의 연고지를 찾기로 한다. 안나는 수첩에서 발견한 명함의 식당인 ‘트랜스 시베리아’를 찾아간다. 새미온(아민 뮬러-스탈)이라는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이곳에서 안나는 새미온 가족의 운전수로 일하는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를 만난다. 하지만 안나는 곧 식당이 러시아 마피아의 유럽 본거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니콜라이는 위험에 처한 안나와 아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주제와 형식면에서 <폭력의 역사>(2005)와 연작으로 묶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일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 2부작’이라 불리는 두 영화는 모두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그리는 폭력은 여타 영화들이 폭력을 이야기하고 사용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그의 폭력은 특정한 공간, 주체, 이유, 대상을 갖지 않는다. 폭력이 존재하는 곳은 어두운 뒷골목이 아니라 대낮의 식당 혹은 이발소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고 폭력을 행하는 이는 익명성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에서 우위를 점하는 폭력은 그 자체가 존재 이유다. 그런 폭력으로부터는 보통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다. 즉 크로넨버그가 영화에서 그리는 폭력은 평범한 인간과 일상에 기생하는 종류의 것이다. 때문에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은밀하기에 깊고 단단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폭력이 인간 본연의 선처럼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로넨버그가 영화에 담는 것은 바로 이런 폭력의 절대성이다. <폭력의 역사>는 가족 드라마를 내세워 일상에 잠복한 폭력의 속성을 정교하게 그린 수작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가족사를 통해 폭력의 생태를 짚어나가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크로넨버그가 다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증명하는 걸작이다.

온화한 인상의 식당주인 새미온은 사실 런던 최대 범죄 조직인 러시아 마피아단 ‘보리 V 자콘’의 보스다. 그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은 조직의 2인자로서 이발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청부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운전수인 니콜라이는 조직의 해결사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가 두려운 것은 단순히 마피아여서가 아니다. 이들의 악행이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범죄세계와 무관한 안나는 연고가 없는 어린 산모가 남긴 아이 때문에 마피아 조직의 타깃이 된다. <폭력의 역사>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벌어진 사건이 평온한 가정과 마을을 피로 물들였듯이 안나의 일상에도 폭력의 공포가 스며든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역사>가 톰(비고 모텐슨)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마을 전체에 피어오르던 폭력의 기운을 담았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실체를 좀 더 구체화, 형상화해 보여준다. 건실한 가장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폭력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갱들의 몸을 빌려 표현된다. 검은 정장과 선글라스의 남자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폭력의 잔혹함을 예감케 한다. 그만큼 폭력의 묘사 역시 직접적이다. 아이들의 교내 싸움, 부부간의 섹스 등을 통해 일상에 도사리는 폭력성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던 <폭력의 역사>와 달리 영화는 첫 장면부터 폭력의 섬뜩한 실체를 보여준다.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발소에서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유쾌한 농담을 건네던 남자의 목을 칼로 가른다. 벌어진 살 틈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이 장면은 사실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폭력을 그리는 크로넨버그의 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단연 중반부 사우나 격투 신. 니콜라이가 두 명의 킬러와 맨몸으로 싸우는 이 장면은 영화가 구사할 수 있는 폭력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오감이 압도되는 이 장면에서는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쾌감조차 느끼기 힘들다.

크로넨버그가 우리가 몰랐던 일상의 이면이 드러나는 무대로 범죄 도시의 이미지가 희미한 런던을 택한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이곳에서 크로넨버그는 구원도 희망도 찾아보기 힘든 세계를 구축한다.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냉기 어린 고요가 흐르는 런던의 풍경을 잡아내기 위해서 제작진은 런던의 뒷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장소 헌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러시아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만큼 다문화적 특성이 드러난 곳이어야 했다. 고심 끝에 낙찰된 장소는 킬번, 그린위치, 해크니, 할레스덴 등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런던의 변두리다.

일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폭력의 양상을 탐색하는 크로넨버그는 또 다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나?’로 시작된 질문은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르러 ‘구원은 있나?’로 확장된다. 크로넨버그는 이례적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는 남겨놓는다. 아이와 후반부의 반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바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에도 이 질문에 답하기란 힘들다.

영화가 담은 폭력의 속성은 결국 변하지 않을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아이라는 명백한 구원의 요소가 일종의 연민 어린 판타지로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폭력을 통해 마침내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관통한 <이스턴 프라미스>는 크로넨버그의 경이적인 성취를 보여주는 영화다.

문신으로 새겨 넣은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 속 문신은 힘의 과시라기보다 개인의 정체성, 역사와 맞닿아 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수감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심지어 그 사람의 성적 취향까지도 드러낸다. 비고 모텐슨의 등과 손목, 발목, 손가락에까지 새겨진 문신은 총 43개. 옥스퍼드 문신 박물관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약 4시간 동안 작업한 결과다. 호랑이, 별, 아기와 함께 있는 성모마리아, 십자가, 바벨탑, 예수, 벌거벗은 천사, 나뭇가지, 단추, 까마귀, 약탈자, 스콜피온, 단검, 문장 등 다양한 종류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문신들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표적인 문신의 뜻을 살펴본다.

발목 수갑 문신 수용자들이 자신의 발목을 그어버리던 베드로 시대의 오마주

가슴의 십자가 종교적 의미가 아닌 모범이 될 만한 도둑이라는 의미를 내포

세 개의 둥근 지붕 모양 교회 3개의 다른 감옥을 의미

무릎의 별 문양 실제 마피아 집단인 보리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직 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함

08. 12. 07.

P.S. 최근 데이비드 린치의 책도 출간된 김에, 이 '또 다른 데이비드'의 책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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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0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노골적인 영화였어요.
특히 아민뮬러스탈의 이중적인 모습은 뮤직박스 이후 두번째 만났습니다.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가 됩니다...

드팀전 2008-12-0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작이지요. 비고 모텐슨은 정말 러시아사람처럼 영어를 하던데. <씨네21><필름2.0>이 '배트맨' 이후 집중적으로 좋아라하고 있습니다.ㅋㅋ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네 걸작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수유 2008-12-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연말이 되니 좋은 영화들이 한두편 들어오나요, 수첩에 적어야겠습니다!!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볼 만한 영화들은 많은 듯싶어요...

하이드 2008-12-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등의 해골은 살인자,
팔에 호랑이 문신은 행동대장.

무삭제로 나온다고 얘기 들었는데, 그렇다면 정말 ㄷㄷㄷ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라고 해서 괴영화를 예상했는데,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여서, 더 오래오래 남을듯합니다.

로쟈 2008-12-08 21:2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취향이시죠?^^

2008-12-09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8-12-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많은 매서운 눈들이 있어서 전 이제 영화에 대해 모라고 말을 하기가 겁납니다^^

로쟈 2008-12-09 14:05   좋아요 0 | URL
영화평론도 사양업종이라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