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까지 혀를 차게 되는 일의 연속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이 요즘 한국사회에선 떼로 일어난다('블랙 스완'이 떼지어 날아다니는 듯하다). 고난도의 관심분산 전략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일제고사에 반대했다고 교사들이 파면당한 일도 현 정권의 자랑할 만한 치적일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교사들의 부당징계 철회투쟁을 지지하며 관련칼럼과 수기를 모아놓는다. 다른 일로 좀 일찍 일어났다가 또 속 터지는 기사들만 읽었다...  

한겨레(08. 12. 19) [기고] 시험을 치르지 않을 헌법적 권리 / 박경신

최근 전국수준 학업성취평가(일제고사)에 학생들이 응시하지 않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들이 해임·파면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의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권의 주체가 학생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징계당한 교사들은 ‘일제고사 거부 교사’들이 아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것은 학생이며 교사들은 이 학생들이 억지로 시험을 보도록 강제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할 권리가 있다면 이를 침해하지 않은 교사는 상을 줘야지 징계를 할 수는 없다.

학생의 교육권이 헌법적으로 독특한 점은 교육자의 방침에 따라 교육 수용자(학생)의 권리가 일정하게 제약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부하기 싫더라도 일정한 ‘강요’를 통해 조금씩 재미를 들이도록 하여 나중에는 큰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다. 하지만 강요의 도구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곧 공부를 잘 못하거나 열심히 안 하는 학생은 평점을 낮게 주거나 다음 단계의 교육과정으로 진급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징계 또는 과태료 등의 강제수단을 동원할 수는 없다.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학생의 교육을 방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보통 학생이 한 단계의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여 다음 단계의 교과과정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학력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학생 본인이 진급이나 학력평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그 시험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고 해서 교육당국이 그 부모나 학생을 징계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시험을 영점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대로 학생들을 때리던 과거의 교육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몸서리치며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학생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일제고사’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학생의 헌법적인 권리였으며, 교사들은 학생의 헌법적 권리를 존중해줄 의무가 있었고, 그러한 의무를 이행한 교사들을 징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일제고사’는 다른 시험과 달리 순전히 교육당국이 각 학생 및 학교의 성취도를 전국적으로 판단해 보고 교육시스템의 효율성을 자체평가하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순전히 교육당국의 정보수집 활동으로 학생의 교육권 보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학생들이 더욱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몇몇 주들은 주 단위 졸업시험을 보지만 어떤 학생도 이 시험을 볼 의무는 없으며, 어떤 교사도 학생들이 빠짐없이 이 시험을 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하여 징계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이와 같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당국과 학교가 위계와 강압으로 시험응시를 강요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학생들의 권리를 고지해 준 것 이라면 교사들은 공익적인 내부 고발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의 전국 석차를 알지 않을 권리가 있다. 치기 싫은 시험을 침으로써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의 전국 석차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번 일제고사는 교육시스템의 점검 및 학교간 성적 비교 등 순전히 교육당국의 행정적 필요로 수행된 것이다. 학생은 이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징계를 당한 교사들은 학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므로 이들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위헌이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경향신문(08. 12. 19) [금요논단]홉스의 국가論, 한국의 국가폭력

근대 초기 영국의 철학자였던 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늑대와 같아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킬 수 없다. 이런 자연적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해 인간의 폭력적 공격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국가라는 것이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가신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타자의 폭력으로부터 나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국가이론은 서양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잘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의 폭력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패를 부리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훨씬 더 평화롭고 조화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시민을 적으로 삼아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민들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를 스스로 조성해 왔던 것이다.

자유·권리 지키는 울타리
이 세상에 국가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불화가 없는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역시 특정한 개인들인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조정되는 한에서 국가는 정치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나라 안에서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거나 적대적으로 말살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경우 만약 국가기구가 표면적으로라도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소수자들을 희생양 삼는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기구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간다면 그 때는 국가기구와 대다수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파시즘이 서양 나라들의 병리현상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의 전쟁상태가 수백 년 이래 나라의 불치병이었다. 왜냐하면 국민 모두의 공공적 이익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이 나라 지배계급의 집요한 습속이기 때문이다. 공공적 이익을 지키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상류층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무능과 탐욕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다시 국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민의 마음에 원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를 테면 자동차를 몰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하여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생계를 막거나, 일제고사에 반대했다 하여 여러 명의 교사들을 한꺼번에 해고하는 것이 모두 그런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이런 일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법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이 한국의 권력집단인 것이다.

‘촛불’을 짓밟은 권력 남용
멀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서 20~30년 만에 한 번씩 엄청난 봉기가 나라를 뒤흔들고 때때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온 까닭도 바로 이런 야만적인 국가폭력 때문이다. 권력집단이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고 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할 때 그들은 이를 통해 시민 봉기의 에너지를 스스로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씨알들의 분노는 지진처럼 대지를 뒤흔들고 썩은 권력의 성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지난 봄, 여름 이 나라를 밝혔던 촛불은 명백히 그런 지진의 전조였다. 머지않아 그 전조는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니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이 추위를 견디자.(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오마이뉴스(08. 12. 18) 졸업앨범에서 사진도 빼겠답니다

일제고사에 반대해 학생들의 대체수업을 허락한 교사 7인에게 파면 및 해임 처분 결정이 17일 최종 통보됐다. <오마이뉴스>는 징계를 받은 7인의 교사 가운데 한 명인 유현초등학교 설은주 교사가 보내온 글을 싣는다.

12월 16일 수요일 저녁, 농성장에 도착한 난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만남, 나라는 사람을 말로서 드러내야 하는 인터뷰, 앉으면 이어지는 회의, 추운 농성장,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생경하기만 하고 피곤했다.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면 해임통지서를 받을 것이란 말이 선생님들 사이에 술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중징계 방침 이후부터 지난 주 수요일, 해임결정까지, 오늘의 이 장면을 난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내려 했었던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어렵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선배언니의 차를 타고 조금 일찍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찾아온 교감 선생님이 내민 해임 통지서
집에 가면 뭘 해야 하나? 글을 써야지. 학교 선생님들께 드리는 편지.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얼굴 뵐 용기가 나질 않아 편지로 대신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아이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아니 떠올려야만 했다. 오늘 이 저녁이 내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을 준비할 유일한 시간인 거다. 집에 가면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아 어쩌지. 아이들 하나하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이날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허깨비 같은 몸을 이끌고 선배와 함께 들어와 내일 해야 하는 일, 그래서 지금 준비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생각해봤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문을 열었다. 내 앞엔 교감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서 계셨다. 한 손엔 누런 봉투. 현관에 서서 봉투를 내미신다.

해임통지서.

이건 그동안 상상해낸 장면과 너무 다르다. 10월부터 늘 이런 식이다. 조금 더 견뎌내기 위해, 덜 상처받기 위해 난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뒀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앞에 전개되는 건 늘 그 이상이었다. 많은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나와 이 사람을 둘러싼 이 기묘한 공기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선.

"교감선생님, 저 그다지 다른 사람 아닙니다. 우린 그냥 아이들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다른 것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교감선생님 마음 할퀴려고 그러는 거 아니란 거 제발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학교를 떠나지만 전 정말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우리 조합원 선생님들, 그렇게 너무 상처주지 마세요. 모두 다 너무너무 열심히 하고 아이들 사랑하는 후배들이잖아요. 우린 그저 조금 다른 것뿐인데요. 제발 제발 알아주세요."

교감 선생님은 내일 학교에서 아이들 보는 건 어렵겠다고 하신다. 새 담임을 만나는 날인데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으면 한단다. 새 담임을 맞을 시간은 있는데, 열 달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우리 아이들과 내가 헤어지는 시간은 왜 주지 않는 거죠? 도대체 왜?

교감선생님은 이러니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교감선생님에겐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내 이야기만 하는 걸로 보이나 보다. 이것 또한 지침이라면, 난 또 부탁해야만 했다. 제발 마지막 정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짐싸는 것으로 하고 인사하고 나올 테니 모른 척하시라 했다. 이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17일, 교사가 아닌 신분으로 난 아이들을 만났다. 교문부터 막아서시는 교감선생님을 옆에 두고, 평소에 늘 출근하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이들, 협동해서 다같이 꾸몄던 판화, 일하는 손 그림, 아기자기해서 모든 이가 부러워하던 내 책상, 모든 게 그대로인데 이제 이곳은 내가 설 곳이 아니라 한다. 밤새 머릿속에 뒤엉켜있었던 많은 말들 속에서, 겨우 몇 마디를 하는데도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복도에서 채근을 하신다. 아이들과 난 그냥 이렇게 헤어져버렸다.

아이들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다시 돌아온 농성장. 아이들의 문자메시지는 이어진다. '화이팅, 글로 갈게요, 어떠케 가요?, 선생님 곁엔 저희들이 있어여, 힘내요.' '오늘 급식 케익 나오는데, 저희 밥 먹어요 밥 드셨어요? 카레 나왔어요 카레 제일 싫어하는데, 이제 곧 수학경시봐요 응원해줘요.'

아이들이 곁에 있는 듯 나의 손가락은 핸드폰 위로 바쁘게 움직이고, 그렇게 아이들은 계속 내 옆에서 속삭이고 살아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시교육청 앞까지 찾아온 아이들은 17일,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로 들려주고. 아이들은 촛불 문화제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또 선생님이 유도해서 집회 나왔다고 사람들이 말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어 발언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나에게 학교는 유리로 둘러싸인 성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내 목소리는 투명한 벽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 난 그 유리벽 밖에 있다. 세상은 나와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아이들 졸업앨범에서 내 사진을 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다시 한 번 오열을 터뜨렸다.

그냥. 그냥 오늘(17일) 하루는 좀 많이 힘들다. 하지만 늘 그랬듯, 난 다시 기운을 차릴 거고 일어날 거다. 이 거리에 나와 함께 서있는 사람들과 내 앞에 가로막힌 벽을 부수고, 난 다시 우리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0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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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5   좋아요 0 | URL
공교육의 경쟁력을 제고하겠다고 약속한 이들.하지만 성추행 교사,학생을 구타하는 교사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면서 이런 일에는 서슬퍼렇게 나서가지고 무슨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건지...학교를 군사정권 때의 반공궐기 대회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나보죠.

로쟈 2008-12-19 23:31   좋아요 0 | URL
어차피 막가파식이니까요. 동료교사들이 얼마나 연대할지 개인적으론 궁금합니다...

Julio 2008-12-20 10:46   좋아요 0 | URL
제가 촛불에서 찾은 단어 '연대'란 단어 댓글 달아봅니다.
로쟈님이 말하시는 연대가 어떻게 될지....

식의주와 연계되면, 우리나라에선 어떤 식의 연대가 이루어질지...
저역시 금해지는군요!

갠적으로는 23일 하루라도 가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8-12-20 22:52   좋아요 0 | URL
암튼 여러 가지 방식의 모색이 필요해 보입니다...
 

주초에 읽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2008년판 '전태일 평전'이라고 가름되는 두 노동자에 대한 평전의 서평이고, <당신은 나의 영혼>(삶이보이는창, 2008)이 그 평전의 이름이다(검색해보니 <전태일 평전>도 절판됐다!). 말미에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밟힌다...

시사IN(08. 12. 15) 대한민국에는 지금도 ‘전태일’이 존재한다

1983년. <전태일 평전>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지금과는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전태일’과 저자 이름(조영래)은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전태일 평전>은 고전이 되었다.



2008년,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당신은 나의 영혼>. 2003년 세상을 등진 두 노동자 이해남·이현중에 대한 평전이다. 충남에서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던 세원테크 노조원 이현중은 암으로, 노조위원장이었던 이해남은 분신해 사망했다. 노조가 결성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일을 담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전태일 평전> 때처럼 48년 전 일도 아니고 고작 7∼8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첫 대목을 보자. 2001년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이현중이 작업반장에게 맞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작업반장은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난 후 회사에 와서 한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는데도, 농땡이를 쳤다’면서 욕을 하고, 두들겨 팼다. 이해남이 이를 말리자 관리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아니꼬우면 그만두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던 노동자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

잔업을 강제로 해야 하고, 시급이 고작 2160원인 회사. 조합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60명인 이 작은 노조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전쟁 같은 일을 겪었다. 용역깡패, 손해배상, 가압류…. 소설가 윤동수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자 70∼80명을 취재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의 증언을 그대로 수록했다. 오랜 수배 생활을 겪던 이해남은 계열사 공장에서 분신한다. 그리고 2004년, 회사 측과 가까운 이들이 노조를 ‘접수’했다. 이 아픈 패배의 기록에 마음이 시리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저자가 맨 앞 장에 왜 이 한 줄을 적어놓았는지 알 수 있다. ‘오, 놀라워라! 우리가 인간이라니!’

책을 다 읽고서 ‘세원테크’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니 이 투쟁을 다룬 기사가 거의 없다. 무관심이 철저했다. 그리고 올해 12월,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 회사 대표의 인터뷰가 여럿 눈에 띈다. 이 책에서 ‘노조를 없애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사람’으로 기술된 이 경영자는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 경영은 경영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이 하는 것이다. 종업원이 자고 일어나면 좋은 회사에 출근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두 극단의 기록은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다.(차형석기자)

08. 12. 18.

P.S. 서평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터뷰기사를 찾아봤다. 눈에 띄는 건 아래 기사다. '두 극단의 기록'이 어떤 것인가를 대비해보기 위해 옮겨놓는다.

주간무역(08. 12. 04) '사람이 재산' 인재경영 불황 모른다

“Best for you.” 시대에 한발 앞선 경영감각과 사람중심의 경영철학으로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세원물산 김문기 회장.



그는 다양한 생산성 향상 프로그램을 도입해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베스트 & 워스트’ 제도를 통해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운동을 뿌리내리게 했다. 사원의 역량 개발을 위한 ‘멘토링제도’를 운영해 정착시키고 ‘이모셔널 비지트’, ‘아빠가 쏜다’ 등 직원 가족의 회사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키고 창립 이래 무 분규 사업장을 일궈왔다.

김 회장은 현재 자동차 부품 전문 업체인 세원물산을 비롯해 계열사 세원정공, 세원테크, 세원E&I, 삼하세원(중국법인), 그리고 착공 중에 있는 세원아메리카(미국법인)를 경영하고 있다. 스폿로보트, 대형프레스 등의 시설을 갖추고 현대차로부터 원재료인 철판 등을 구입해 FRONT SIDE MEMBER, COWL CROSS MEMBER, DASH PANEL, RADIATOR 등의 자동차 차체부품을 주로 생산하여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등에 납품하고 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후, 올해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꾸준한 수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우크라이나 등지에 3600만 달러, 미국에 2000만 달러, 사우디아라이바,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에 1600만 달러를 수출하는 등 향후 매년 20% 이상의 수출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도 전망된다. 김 회장에게서 45회 무역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소감과 앞으로의 기대에 대해 들었다.
 
-먼저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시게 된 것을 축하한다. 글로벌시장 악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장한 비법이 있다고 들었다.

적극적인 신규시장 개척 노력이 주효했던 것 같다. 회사 자체 기술연구소를 통한 독창적인 신기술 개발 노력, 품질향상을 위한 투자도 한몫했다. 생산 공정을 자동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우선 신시장개척을 위해서는 영어와 중국어로 된 카탈로그와 홍보영화를 제작해 해외바이어에게 발송했다. 시장개척을 위해서는 먼저 해외시장을 알아야한다고 판단하고 각종 해외 산업박람회에 참여했다. BMW구매본부장을 비롯, 인도 마루티, 포드 등의 해외 주요바이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우리 제품과 생산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세원물산만의 비법이 있다면?

제품개발에서부터 생산기술까지 차별화된 능력 확보뿐 아니라 Best&Worst 제도 도입,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single PPM 및 6시그마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또 생산 공정의 95%를 자동화하여 생산성향상을 이뤘다.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어려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람이 재산이다. ‘인재 경영’ 이라는 기업 이념을 실천코자 경비원, 환경미화담당자에서부터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전 임직원에게 TPS(TOYOTA Productivity System)연수 기회를 부여 하는 등 인재 역량 강화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다. 지난 98년 IMF의 한파로 동종의 기업들이 쓰러져 갈 때에도 ‘사람이 재산’ 이라는 원칙으로 모든 임직원이 단결해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이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올 들어 글로벌시장 환경악화로 어려움이 크지만 저만의 경영소신을 믿고 갈 생각이다.
 
-최근 글로벌경제위기에 대한 견해, 향후 대책은?

현재의 위기가 1년, 아니면 그 이상도 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최근 급격하게 나빠진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노력이 필요하다. 1월도 아끼는 절약경영을 실천해야겠지만 투자는 과감히 해 새로운 기회에 미리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경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명한 경영으로 직원들이 상생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수상소감 한마디.

대내외 악재 속에서 ‘세원’의 이름을 지켜주고 있는 세원그룹 임직원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한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동차 업계가 처한 어려운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책임과 노력을 다 할 것이다. 더 큰 변화와 혁신으로 21세기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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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9   좋아요 0 | URL
세원그룹 사장 같은 이들이 걸핏하면 가족경영 운운하지요.시실은 가축보다 못하게 대접하면서...가죽을 벗겨먹고.

로쟈 2008-12-19 23:2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읽은 88만원 세대의 칼럼도 '가족주의'의 허울을 잘 벗겨내더군요. '가족'이면 경영권도 넘겨줘야죠...
 

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가 내년 6월경 한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자인 박미애 박사가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 넣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2. 11) 글로벌 리스크는 세계시민사회를 도래시키나

울리히 벡의 신간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글로벌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벡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세계적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미국의 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한파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국한되었던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의 경제위기는 유럽의 최북단 조그만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의 파괴력을 피해갈 수 있는 곳,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글로벌 위험지대에 앉아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이 어느 때보다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86년 11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7개월 후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당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불편함을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적확하게 포착한 그의 분석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험을 이슈화하고 논의함으로써 성찰적이게 된다는 근본 명제로 벡은 산업적 현대와 구분되는 제2의 현대를 기록하는 한편, 현대 안에 내재된 자기혁신의 힘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벡은 과거의 진단을 한층 강화하고 확대하여 ‘글로벌 위험사회’를 논한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동안 재앙과 리스크 역시 세계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리스크와 ‘위험’,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하는 개념의 세분화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사태로 서구 민주주의의 자기신뢰를 파괴한 국제적 테러리즘,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현실화된 기후재앙,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와 같은 ‘큰 리스크’가 현대사회의 근본 토대와 인간 실존의 자명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재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도쿄와 런던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가능성, 유전공학의 획기적 발전이 가져올 인간형질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공격 등 벡이 책 서두에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앙의 시나리오는 묵시론적 종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선배들을 쫓아 벡 역시 세계몰락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몽된 성찰적 현대성 속에 더 이상 자기극복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 인간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스 요나스가 말한 의미에서) ‘공포의 발견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지난해 독일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출판 이후 나온 비판 중 하나는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 같은 태도, 벡이 ‘연출하는’ 재앙 시나리오의 과장된 측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재 전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무색해진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큰 리스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했던 합리적 위기대처 수단만으로, 즉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찰만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리스크와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성찰적 습득은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 성찰이 총체적 경제파국으로의 추락을 불러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벡의 말은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가 또 다른 리스크를 불러온 작금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테러공격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한다. 리스크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일어날 경우 경제적으로 보상할 수도, 기술적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대량학살 무기가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때는 이미 늦다. 기후재앙으로 해수면이 높아진다면, 때는 이미 늦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에 선취하여 그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과 딜레마가 글로벌 리스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함께 관리하는 세계시민사회
그러므로 글로벌 위험사회는 인류를 ‘전부 아니면 무’라는 상황 앞에 세우는 사회이며,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예측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벡은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부터 ‘세계주의’의 계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과 영향을 어느 한 지리적 장소나 공간으로 제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원칙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는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적 타자를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한다. 종교, 피부색, 국적, 삶의 상황,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실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강요로 인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비록 강요된 세계주의라 하더라도, 규범적 원칙일 뿐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편 먼 타자를 가까운 내부 타자로 수용하고,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긍정적 가치로 해석하는 세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내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감수성과 인식을 함축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모든 사회 계층에, 모든 국가에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무엇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거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기후재앙이 일어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사하라 사막과 히말라야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누구보다 서민계층을 힘들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크를 결정하는 것은 선진국이고 리스크 결정에 따른 위험의 피해를 입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이 세계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와 ‘글로벌 통치’이다. 우리 모두가 비자의적으로 세계위험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구적 책임윤리’를 발전시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벡은 비정부조직들과 사회운동들이 서로 연합한 초국가적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국가간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점차 (국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세계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글로벌 통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벡은 언뜻 글로벌 리스크를 연출하는 경고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이지만, 미래 세계시민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박미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사회학 박사)

08. 12. 17.

P.S. 영어본으로는 <세계위험사회>란 책도 지난 1999년에 출간된 바 있다. 작년에 나온 독어본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업그레이드 버전일까?.. 내친 김에 울리히 벡이 지난 가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도 옮겨놓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겨레(08. 10. 24)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순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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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9 21:39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 

오늘 연거푸 서평을 읽게 된 책은 지난 가을에 나온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이다. 사실은 이미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380365)에 꼽아놓고 "저자에 대해서 급 호감과 관심을 갖게 한다.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려다 말았던 책인데, 챙겨두어야겠다"고까지 적었더 책이다. 하지만 챙기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평들을 읽으니 다시금 관심이 되살아난다(서평을 보니 '인문학산책'보다는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소개기사와 함께 교수신문의 서평을 옮겨놓는다(다른 서평은 지면에서 읽은 거라 옮겨놓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이 책의 강점인 듯싶다. 책은 연말에 읽어볼 계획이다(지금은 연말이 아니란 말인가?)...

 

부산일보(08. 10. 04)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아야 민주사회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란다. 물론 그 자체로 사실이라기보다 그만큼 취약한 노동 환경을 빗댄 말이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것은 '인맹(人盲·110쪽)'일테다. 색을 구별 못하면 색맹이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니,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면 당연히 인맹이 된다.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있는 사회'(신성림 옮김/동녘)는 철학서다. 하지만 난해하고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읽는 도중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교양서다. 저자는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그 골격을 '사회적 품위'에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 철학교수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1995년. 벌써 13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국내에는 처음 번역됐다. 그럼에도 그의 주제어인 '품위'나 '모욕사회' 등의 개념은 일찍부터 국내 철학교수들의 논문과 저술 등을 통해 잘 알려졌다. 책보다 개념이 먼저 수입된 경우다. 다시 말해 진작 번역됐어야 하는 철학서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 책이 첫 출간된 1995년보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사회에 더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절차) 민주주의가 달성된 지 10여 년. 하지만 사회, 문화, 경제 전반의 일상 민주주의는 오히려 양극화라는 암초에 걸려 교착상태가 됐다.

그런 가운데 사람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딱히 노동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을 기계나 동물로 취급하는 경우를 자주 마주친다. 사생활이 위협받는 감청이나 검열 문화, 장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도 그런 사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욕의 주체다. 모욕은 지극히 사적인 용어이지만, 그럼에도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속성을 지녔다. 아니 사적인 모욕은 스스로 예방해 피할 수 있지만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모욕은 그럴 수조차 없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어떤 사회는 장애인용 설비를 마련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장애인들의 독립성을 확보한다. 반면에 또 다른 사회는 다른 사람의 '선의'에 주로 의존한다. 후자는 당연히 모욕 사회다. 특히 그럴 만한 여유를 가진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200쪽)" 그런데 그 사회적 모욕은 대부분 제도의 결핍에서 생성된다. 결국 제도를 바꿔야 모욕사회에서 품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 테다.

책은 4부 16개 주제 글로 구성됐다. 주제 글은 모욕, 권리, 거부, 시민권, 속물 등 서로 다른 낱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중요하게 연결돼 있다. 그 낱말을 하나씩 이어가다 보면 시나브로 '품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된다.(백현충 기자)

교수신문(08. 12. 15) 인간의 존엄성은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1996)는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이나 A. 매킨타이어의『덕의 상실』(1981)이후 철학계에서 제시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상사회론 중 하나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이다. 저자에 따르면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

저자에 의하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시킬 합리적인 절차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분배의 인간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분배의 인간적 방식이 고려되지 않는 한, 세제나 복지제도를 통해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더라도 인격적 모욕이 사회제도적으로 자행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저자가 구상한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이로써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인격적 존엄성을 훼손키지 않도록 한다. 또한 저자는 인격적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는 것보다중요한 일이며,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격적 존엄성은 지켜질 수가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존 롤스가 말한 사회 경제적 차원의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했다. 이런 소극적 규정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저자는 ‘모욕감’이나 ‘긍지’, ‘자존감’, ‘자부심’, ‘친밀함’, ‘동정’ 등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가 평소 간과했거나 뭉뚱그려 보았던 마음의 다양한 결들을 상세히 기술하며, 얼핏 주관적 차원에만 머무를 것 같은 이런 심리들이 ‘품위 있는 사회’와 관련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혀준다. 이때 저자는 분석철학적 치밀함과 밀도를 일단 접고 ‘품위’나 ‘모욕’에 얽힌 풍속사적 뒷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근대의 ‘속물적 예법’이 ‘사생활’이라는 개념을 낳고, 그것이 다시 ‘개인’에 대한 자각을 형성하며, 이것이 토대가 돼 ‘존엄성’과 ‘모욕’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완성됐다는 주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분석이나 이야기만으로는 ‘품위 있는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적 원리가 무엇인지 적극적이고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저자는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과 『1984』에서 음영법으로 묘사한 형제적 사회주의가 자신이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사회상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저자를 이끄는 근본이념은 체제지향적인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일 것이다.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에 입각해서 저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신분이나 소속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자로 규정하고 업신여기는 사회는 결코 품위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설령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거나 특정 집단 내에서 인격적 평등이 보장되더라도 그런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盲’이 지배하는 저급한 사회일 뿐이다. 아리안 민족들만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장애인이나 유태인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고 학살한 나치정권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저급한 사회를 건설했었다. 오늘날에도 인간-맹들이 지배하는 ‘속물사회’는 인간을 민족이나 국적에 따라 분류한 후, 외국인 근로자들 차별하고 멸시한다.

속물사회는 같은 국민들 내에서도 비중 있는 사회에 타자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교한 장치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도 한다.그런데 평자가 ‘사해동포주의’라고 표현한 말은 조지 오웰이나 저자의 표현법에 따르자면  인간들 사이의 형제적 평등 관계를 의미할 것이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인종이나 직업,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에서 동등한 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모든 인간이 人格的으로 평등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이 그 누구도 타인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격적 평등이 모욕과 차별을 금지하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인격이 존엄하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저자는 인간 존엄성 정당화 이론들을 분석한다.

저자는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 유형을 비교한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적극적 정당화이다. 칸트가 인간의 존엄성을 정당화할 때 근거로 삼기도 한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적인 특성들이 인간을 존중해야할 근거가 된다. 반면 회의적 정당화는 인간에게 그런 선천적 특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이 두 번째 입장은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인간존중의 원천으로 여긴다.

인간 존중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세 번째 길은 소극적 정당화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해야할 적극적이거나 회의적인 근거는 없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은 피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있다고 소극적 정당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저자는 이 소극적 정당화론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면서 칸트의 적극적 정당화론이 지닌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목적결정능력’, ‘자기입법화능력’, ‘도덕적 주체능력’, ‘합리성’ 등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은 능력의 정도에 따라 서열을 나눌 수 있는 것이어서 평등한 존중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 칸트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소유하고도 사람은 비도덕적일 수 있는데, 칸트는 단지 그런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마저 존중해야한다고 불합리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칸트는 인간적인 특징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중받을 권리를 지녔다거나, 현재 그런 특징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중받을 권리가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해 칸트는 가령 『판단력비판』에서 태아나 갓난아이의 예를 들면서 인간들의 인격성의 차이를 깊이 있게 논했다. 그런데 저자가 칸트를 단순화시켜 비판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지는 이런 비판은 대개 선각자들이 전개한 사상의 전모를 균형있게 다루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 축소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영향사적으로 저자가 ‘인격적 평등’과 ‘인간존엄성’ 이념을 칸트에게서 전승받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품위 있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념은 ‘인격적 평등개념’과 ‘인간존엄성’사상이다. 그런데  회의적 정당화는 사실상 인격적 평등개념을 주관성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다른 한편 ‘인간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정당화의 근거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저자는 “모욕을 포함해서 모든 학대를 근절하라는 요구 자체는 어떤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도덕적 행동의 전형이 학대를 막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정당화가 끝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관적 도덕감에 의존하는 저자의 이런 생각과 달리 현실적으로 이런 소극적 정당화도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전제하지 않는 한, 결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비록 모든 경우에 대해 완벽하게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선험적 존엄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형태의 정당화도 성립될 수 없다. 

저자는 주요개념을 제시하고 난 후에는 그것에 딸린 하위개념들을 다루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 가족개념들의 타당성 근거를 확정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저자는 유기적 연관성을 쉽게 파악하기 힘든 주제어들을 산발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서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내용을 쫓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저자는 제 2부 제 1장에서 ‘존중의 정당화’라는 대주제를 제시하고 나서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들’, ‘내재적 가치의 제한조건’, ‘근원적 자유’와 같은 소주제들을 다룬다. 이런 제목만 보아서는 대주제와 소주제, 하나의 소주제와 다른 소주제 사이의 개념적 연결 관계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그런데 내용을  읽다보면 실제로는 각각의 주제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개념의 근원에 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처음부터 친절하게 이들 주제나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주지 않은 것일까. 독자에 대한 친절이 아쉬웠다. ‘품위’라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과연 사회이념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 책이 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이런 문제점을 독창적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그 성공여부와는 별개로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이진오 서울대 강사·철학)

08. 12. 16.

▲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가? 2008년 12월 8일 비정규교수 농성장은 경찰에 의해 박살이 났다.

P.S. 한국사회가 속물사회이자 모욕사회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는 비일비재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강사의 처우문제이다. 얼마전에는 500일 가까이 계속된 비정규직교수 농성장의 천막이 경찰에 의해 순식간에 박살나는 '사건'도 벌어졌다(현 정부 들어서 하도 극악한 사태들이 많이 벌어지는지라 뉴스 거리로도 취급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이란 프레시안의 기획연재(http://www.pressian.com/article/serial_article_list.asp?series_idx=313)가 총체적인 문제제기를 담아가고 있다. 한번 둘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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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품위 없는 사회, 품격 없는 국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12 22:47 
    내일자 '책읽는 경향'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이름은 이 책을 여러 번 언급한 지금도 입에 익지 않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요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정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필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로 돼 있다. 그러고 보니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노보 찬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듯싶다(<보노보

낮에 교수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3'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정현백 교수의 칼럼이다. '경방고수'들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끌었는데, 짐작엔 두 주 전 한겨레21 표지기사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3895.html). 그래서 일부를 같이 옮겨놓는다. 대학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칼럼과 함께 일독해볼 만하다. 더불어, 돌이켜보면 '자료'가 될 날도 오겠지...

교수신문(08. 12. 15)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이 사라진 시대, 당신들은 왜 침묵하는가

한국 지성을 논할 때에, 이를 대학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신문>이라는 지면의 특성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논의를 대학과 대학인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정보통신의 발달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한국 사회 곳곳이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은 가장 큰 변화를 강요당한 곳의 하나일 것이다. 치열한 대학 간의 경쟁, 위로부터의 개혁 압박, 대학의 양극화, 교수평가, 대학 및 학술행정의 전산화, 국제화의 압박 등이 그것이다. 대학은 이제 분주함이 그 일상이 됐고, 교수들은 게으를 권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런 대학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대학이 ‘지적 자유’라는 명분아래 안일함을 추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학에서 학문연구의 열기가 넘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계획에 근거한 대학개혁 몰아붙이기, 연구업적이나 평가의 계량화 등은 학문의 생산성은 높이되 ‘지성의 천박화’도 증가시키는 기이한 양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60년을 돌아보자면, 한국의 지성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중기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치열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화 따라잡기’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유학을 통해 서구의 지적 수준을 따라잡고자 했고,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부르짖으며 비판적 학술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과정에서 이런 지성계의 활동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현실화하면서, 한국 사회에 지적 역동성을 부여했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자기희생은 한국에 관심을 가진 국제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은 한국의 지성이 그 지적 긴장감과 역동성을 잃어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 비약해야 할 시점에서 한국의 지성은 주저앉아 버린 것이 아닐까. 대학평가, 학술지 평가, 연구논문에 대한 엄격한 심사시스템 등을 통해서 과거처럼 치밀한 연구 없이 그저 글을 써대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연구윤리도 강화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연구도 정밀해졌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지적 연구물들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중심부 학계의 모드에 끌려 다니고 있다. ‘왜 이 땅에서 이런 연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다.

출판 분야에서도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옥석을 가릴 수 없는 춘추전국의 시대,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업주의와 선정성이 판을 치고, 국내 학계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명한 외국서적의 번역서가 여전히 날개 돌린 듯 팔리고 있다. 나 스스로도 독서대중에게,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서적을 권장해야 할지가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거기에다가 서적들은 내용보다는 디자인과 크기로 한 몫을 보니, 저렴한 작은 문고판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쉬엄쉬엄 읽은 것도 목가적인 시대의 이야기가 돼 버렸다. 

바로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지성계는 피로감에 젖어 있다. 양적 연구업적을 강요하는 대학의 현실에 쫓길 뿐 아니라 몰아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급류 속에서, 지고의 도덕성을 부르짖으며 함께 해온 동료들이나 나 자신이 어느덧 ‘욕망의 주체’로 변신해버린 것을 발견하며 선뜻 놀라는 모습이 오늘 날의 한국 지성인일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에 뒤이은 자기성찰의 과정은 거의 부재하다. 소비자본주의의 끝없는 추구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대해 회의하는 의식혁명이나 문화혁명은 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는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글은 곳곳에서 출판되고 인구에 회자되지만, 왜 폭력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변화는 시도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성장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한국 지성의 인습성은 매일매일 대중매체를 메우는 진보-보수논쟁에서도 확인된다. 여전히  정치적, 문화적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핵심은 교과서 필자의 저작권, 공권력이 교과서 내용에 개입하는 절차민주주의의 문제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문제의 본질을 다시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호도한다. 올해 들어와 급격히 후진하는 민주주의 문제에 지식인들은 침묵한다. 거기에다가 보수/진보논쟁을 채우는 논리는 얼마나 천박한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닌 합리성과 체통을 우리 지성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보수논객들의 주장은 2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녹음테이프 돌리기’이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변화된 사회, 변화된 대중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촛불시위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요구와 욕구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방식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는 한국 지성의 성찰성 결여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서 한 단계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할 8,90년대에 이르러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모든 부담은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주어지고, 이들은 좌익세력으로 폄하된 채 고립돼 있다. 이쯤 되면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즈음, 구조적 한계를 넘어 분배정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크게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한국의 지성계는 침묵하고 있다. 그 대신에 언론을 메우는 것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계산하는 정치세력에 의한 보수-진보 편 가르기의 천박한 논리들이다.

나는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미네르바와 관련한 경제논객들의 이야기를 읽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인터넷의 경제토론방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경(제토론)방고수들은 50~60명 정도라고 한다. 모두가 계급장을 뗀 인터넷에서 하루 10~30만 명이 들어와 읽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각고의 글쓰기 노력과 경제지식을 요한다. 이들은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정체를 밝힌 한 보험회사 직원은 자신의 일과를 밝혔다. 아침 6시 30분에서 출근 두 시간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직장생활, 그리고 다시 밤 10~12시에서 그는 인터넷을 찾거나 글을 쓴다.



그들은 왜 이런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한 경방고수는 1997년 경제위기 때 줄 서서 아들이 돌잔치에 받은 금붙이까지 바친 이후 겪은 씁쓸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경제지식을 챙기고 또 가능하다면 無知로 피해를 보는 서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것이다. 이들 경방고수들이 염려하는 것은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민의 관점에 설 것을 선언한다. 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은 사라졌는가. 전문성과 대학의 경쟁력 제고를 표방하며, 지식인은 침묵해야 하는가.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저항하고 있는 역사교사들의 안간힘을 지켜보면서 당신들은 침묵해도 좋은가. 경제위기 속에서 존재를 위협당하는 작은 자들의 잔혹한 현실에 당신들은 침묵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에 전임교수들이 계속 침묵해도 좋은가. 이제 이 위기의 시대는 다시 한국 지성인의 건강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정현백 성균관대·사학)

한겨레21(08. 12. 05)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 경방고수 가운데 정부 발표를 쉽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상승미소’. 본명이 이명로인 그가 11월24일 다니는 회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0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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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6 13:56   좋아요 0 | URL
인터넷 공간이니 자유롭게 하는 거죠.제도권 학자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로쟈 2008-12-16 15:29   좋아요 0 | URL
제도권 학자들이 자기 몫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지식인의 죽음'이란 말도 나오는 거겠죠. 아마도 이젠 기대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