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번역서) 리스트(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8763.html)를 보면 10권 가운데 두 권이 같은 번역자의 작품이다. 디어드리 베어의 <융 -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열린책들)과 코맥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가 모두 번역가 정영목씨의 손을 거쳤다. 그런 점에서도 '올해의 번역자'를 꼽자면 단연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매일경제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216809) 씨네21의 인터뷰도 찾아서 스크랩해놓는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의 한 꼭지인데, 한 번역가의 '서재'로 가는 길잡이로서 더없이 친절하고 유익하다. 

씨네21(08. 11. 28) [김혜리가 만난 사람] 번역가 정영목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는 7과 1/2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이 등장한다. 천장이 유독 낮은 이 방은 알고 보면, 타인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비밀 통로다. 번역가의 작업실을 상상하는데 퍼뜩 그 괴상한 방이 떠올랐다. 출판 번역가의 작업실이란 말하자면 독자의 방과 저자의 서재 사이 층계참에 포복한 셈이어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일쑤다. 역자의 작업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본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번역가 정영목의 작업실은 일산이다. 보통 회사원들이 직장에 도착할 즈음 집을 나서는 그는 15분을 걸어 친구의 연구소 한쪽에 자리잡은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커피와 인내심이 식지 않도록 주의하며 영어로 쓰인 책을 한줄 한줄 모국어로 옮긴다.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출판 번역가로 입문한 그가 옮긴 책은 줄잡아 100여권. <의뢰인> <펠리칸 브리프> 등 존 그리샴의 스릴러가 초창기 그의 작업이고 알랭 드 보통의 저서 중 다수가 정영목의 손을 거쳤다.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연작은 적당한 포르투갈어 역자를 만나지 못해 그가 중역한 경우다. 화제작 <로드> <서재 결혼시키기> <책도둑>이 그의 번역으로 소개됐고 비소설로는 모차르트, 붓다, 간디, 융의 전기와 <지젝이 만난 레닌>,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III-서양신화> 등이 있으니, 웬만한 애서가라면 책꽂이에서 정영목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다.



기나긴 임종의 기록에 가까운 암담한 내용에도 국내에서 16만부 가까이 팔린 소설 <로드>의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스스로를 “친절하지 않은 번역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거는 편집자들의 신뢰는, 번역에는‘친절’보다 중한 미덕이 있음을 방증한다. 정영목과 세권의 책을 낸 <문학동네> 이현자 팀장은, 문학성이 깊고 번역이 까다로운 소설의 최고 적임자로 그를 꼽으며 “그저 한 문장을 잘 옮기는 것과 작품 전체의 온전한 이해가 뒷받침된 균형 잡힌 번역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도서출판 강 대표인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로알드 달의 단편집 <맛>을 정영목의 새로운 번역으로 읽었던 소감을 “이야기만 같을 뿐 구간(舊刊)과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다.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번역가의 대학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정홍수 평론가에 따르면 청년 정영목은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정리해주는 조용하고 현명한 형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그의 자취방을 찾아갔다가 책상 왼쪽에 원서, 오른쪽에 원고지를 두고 곧바로 펜을 달리는 광경에 감탄했던 일도 정 대표가 전하는 추억이다.



하지만 지인과 동료들이 말하는 성취를 본인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영목은 밥벌이를 위해 번역을 했고 본인의 노동이 성실하기만 희망할 뿐이라고 반복한다. 옮긴이에게 주어지는 한뼘의 공간인 역자후기에서 그의 글이 고집하는 자세도 극도의 겸양이다. 부커상 수상작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The Sea) 후기는 “부커상이 영국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문학상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리샴의 소설에 견해를 보탤 때는 “저자가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번역자도 편승한 우스운 꼴이지만”이라고 유보조항부터 단다. 그런 그가 챙기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지금 여기서’이 책을 읽는 이유와 의미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주의가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쟁투를 그린 <그레이트 게임>에서, 독자들이 영국인 저자를 과도하게 동일시할까봐 조심스레 경계한 후기는 좋은 예다.

번역은 독해보다 천만배 무겁다. 외국어로 의미를 어림잡는 행위와 그것을 모국어 문장으로 확정하는 결단 사이에는 통과해야 할 엄격한 법정이 존재한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훌륭하게 정리했다.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번역사 산책> 쓰지 유미 저,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 세상이 번역을 ‘먹물의 막장’이라 불러도 “그럴지도 모르지” 주억거리며 묵묵히 일해온 사람, 인터뷰 내내 번역 예찬이라고는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번역인지도 모르죠”라는 단 한마디가 전부였던 사람과 헤어지며 나는 그가 번역가의 묵직한 의자에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태원에서 성장기를 보내셨다고요. 언뜻 듣기엔 번역가에게 어울리는 고향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웃음)
=지금의 이태원은 몰라도 제가 어려서 살던 해방촌은 그렇지 않았어요. 기지촌이라 미국인들을 더러 보긴 하지만 접촉은 없고 그렇다고 “기브 미 쪼꼬렛”할 시대는 지났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고 부대 정문 앞에서 아가씨들이 미군 병사를 기다리는 부박한 곳이었죠.

-번역이라는 작업에는 원전의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책상에 홀로 앉아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일의 성격과 본인의 기질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느끼세요?
=지금까지 해왔다는 건 제가 뭐라 생각하든 성격과 맞는 것 아닐까요? 설령 맞지 않았어도 맞추었다는 뜻이고요. 굳이 조직생활을 기피했거나 중뿔나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고 뛰쳐나온 경우는 아니에요. 졸업 직후 문예진흥원에 들어가 1년 남짓 다녔죠. 문예지 원고료 지원 업무였는데 조사하고 접수하고 영수증 챙기는 일을 했어요.

-‘문예’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이 선택에 영향을 줬나요?
=(잠시 생각한다)저희 세대의 진로 고민은 지금 세대와 달랐을 거예요. 제 경우에는 직장을 선택할 때 우선 고려한 것이 최소한의 시간만 일을 하고 칼퇴근을 해서 나머지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가였어요.

-느낌에 그 ‘다른 일’이 취미는 아닌 것 같은데요. 80년에 대학(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셨는데 혹시 정치적인 이유로 도망 다니는 처지의 친구를 도우셨다거나….
=그맘때야 친구 절반은 도망 다니고 있었죠. (웃음)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따로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다 영문학과 대학원 간다는 핑계로 직장을 나왔어요. 그 대학원은 몇년 전에야 겨우 졸업했지만. (웃음) 직장을 나온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학원 강의와 과외, 번역 같은 일을 했지요. 하지만 가르치러 왔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이 싫어져서 과외는 그만두고 수입은 시원치 않지만 번역만 하게 됐어요. 번역은 1991년부터 시작했는데 ‘부업의식’의 여파는 꽤 오래갔어요.

-남들 눈에는 영문과와 대학원을 차근차근 나와 번역가가 된 직선코스인데 내막은 그렇지 않군요. 번역이 생업이라는 자의식은 대략 언제 때쯤에 왔나요?
=아마 <마르크스 평전>을 옮긴 즈음(2001)이었나봐요.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이 끝나고 계속 흔들리는 상태에서 내 일이 뭔지 정신 차리고 생각해봤어요. 그 나이에 고시를 보는 친구, 유학을 떠나는 친구도 있었는데, 저는 사람이 못나서 하던 일을 관성적으로 하게 된 거죠. 그즈음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도 됐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란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반한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요.
=상상하셨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아래 세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세대가 외국문화에 대한 매혹을 번역가가 된 동기로 꼽는다면 전 거짓말이라고 의심할 것 같아요. 저희 세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고 의문을 제기한 세대거든요. 영문과더러 제국주의학과라는 농담도 오가는 상황에서는 서구 문화에 대한 매혹이 있다 해도 뒤틀려서 표현됐겠죠.

부업의식을 떨치기까지의 긴 시간

-<매일경제>와 인터뷰하시면서 경제학이나 법학이 아닌 영문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라고 답하셨던데요. 거꾸로 법학이나 경제학을 할 경우 예상한 결과는 뭔가요?
=어린 나이에 법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습니까? 법학이나 경제학이 싫었다기보다 그 전공은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바의 상징이었죠. 반발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집안 어른들이 기대하는 삶을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한 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문대를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정 그러면 영문과를 가라고 하셨어요. 일종의 타협점이었던 것이죠.

-학창 시절 독서를 많이 한 편입니까?
=많이 읽은 친구들에 비하면 턱도 없죠. 즐겨 읽긴 했는데 어머니가 학업과 무관한 책 보는 걸 말리셨어요. 그래서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다림이 컸죠. 그런데 80년 3월에 입학을 해보니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본래 늦되는 편이라 학생운동에 동참하는 데에 갈등이 있어요. 공부 좀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받는 게 싫었고, 고교 시절 교련 과목이 싫었듯 대열에 서기 싫은 저항감이 있었죠. 그러다 81년에 경제학과 4학년생이 도서관에서 투신했어요. 공부만 하던 선배였다고 했어요. 이게 뭔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판단과 행동을 가속한 사건이었죠.

-말씀을 듣다보니 한 시절을 박탈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절대 박탈당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누가 강요했던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에 즐거웠어요. ‘화양연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에도 외국어 사회과학 원전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법합니다.
=일본어는 선배들에게 남들은 사흘 배우면 읽는다고 구박 받으며 한자로 대충 때려잡는 법을 배웠어요. <자본론>을 그때 영문판으로 구해서 봤어요. 셰익스피어보다 사회과학서적을 먼저 본 경우죠. <성문종합영어> 다음의 제 영어교과서는 그쪽으로 넘어간 것 같네요. (웃음)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처음 출판 번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번역자들의 상황이 기억나세요? ‘번역계’라는 것이 있었는지 세대구분은 있었는지.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 외에 특별히 번역가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어요. 번역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만 해서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웃음) 단, 소설을 쓰려고 하거나 다른 일을 도모하는 중간 단계에 번역을 하는 전통은 길었죠. 합리화지만, 제가 말씀드린 부업의식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죠. 한 사람이 매달려 할 정상적인 직업으로 번역을 나도 남도 인정하지 않은 긴 세월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안정효, 이윤기 선생님이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또 IMF 이후 번역을 지망하는 분들이 급속히 늘어났어요. 실직자가 많아지니 번역은 좌우지간 혼자 먹고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출발부터 번역을 업으로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죠. 새로운 세대를 보면 내게는 애초에 없는 자세가 있구나 생각합니다. 제게 번역은 첫사랑 같은 느낌이 전혀 없고 어쩌다보니 같이 살고 있는 상대에 가까우니까요. (웃음)

-번역 작업의 일반적 순서가 궁금합니다. 일단 책을 통독하고 일을 맡을지 결정하시겠죠?
=과거에는 책을 선정하는 일도 맡는 번역자가 더러 있었고 지금도 기획을 겸하는 훌륭한 번역가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주로 출판사가 에이전시를 통해 책을 선정합니다. 책을 받으면 빠르게 읽으면서 할 만한지 살피고 답을 드립니다. 그리고 번역을 시작하죠. 전 둔한 편이라 읽어서는 감이 안 오고 손으로 옮겨봐야 알겠더라고요. 보통은 절반가량 진도가 나가면 궤도에 오릅니다.

-궤도에 오른다 하면?
=배우로 치면 대사가 입에 붙는 거죠. 저자의 문체가 내 몸에 붙어 대충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오죠. 처음에는 불분명했던 대목이 뒤쪽을 마저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아, 이 사람은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구나 깨닫는 거죠. 그렇게 한 차례 번역하고 처음부터 다시 보며 습득한 스타일대로 다듬어요. 그러니까 앞쪽 절반을 퇴고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제 경우는 초고 만드는 시간과 다듬는 시간이 얼추 비슷해요. 이렇게 다듬어 보낸 다음 나중에 역자교정을 편집자와 의견을 나누면서 보고 옮긴이의 글을 마지막으로 씁니다. 동시에 두권 정도 진행해요. 종일 같은 책만 붙들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워

-번역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외국어도 잘 알아야 하지만 모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던데요.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선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예를 들어 글솜씨가 있으면 되느냐, 문장구조가 정확하고 비문만 없으면 되느냐. 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말을 구사하는 법은 국어실력뿐 아니라 번역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번역자는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느냐입니다.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란 전제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극단적 예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서문을 보면 14세기 말 독일의 한 수도사에 의해 라틴어로 쓰인 작품의 17세기 라틴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이탈리아어로 옮겼노라 써 있잖아요. (웃음)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할 때는 어떤 문체가 합당한 것인지 굉장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잖아요?
=불가능이라… 원작과 번역은 다른 거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악몽이 되는 것이고요. 말장난이나 운을 갖고 벌이는 유희를 그대로 번역하기는 힘들어요. 나아가 오리지널 텍스트가 뭐냐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걸작이 있을 때 작품의 의미가 고정돼 있다면 많은 학자들이 논의할 필요도 없겠죠.

-문외한 입장에서도 번역은 딜레마 덩어리로 보여요. 단어를 정확히 옮기는 게 옳으냐 아니면 사상을 옮기는 게 옳으냐, 운문을 운문으로만 옮겨야 하느냐 산문으로 옮겨야 하느냐, 독자와 동시대 문체로 써야 하느냐, 원전과 동시대의 책으로 읽혀야 하느냐 등등. 매번 작업할 때마다 그런 문제를 고민하시나요?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로 풀면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번역자의 선택이 가능한지도 별개 문제입니다. 제가 “자, 오늘부터는 의역을 해볼까?” 하고 의역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좌중 웃음) 광고라면 메시지 전달이 중요하지만 문학 텍스트는 오역이 아닌 이상 번역자의 기질과 성향,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결정적인 것 같아요. 제 경우 굳이 어느 쪽이냐를 묻는다면 직역쪽에 가깝죠. 독자의 편의를 염려하는 것은 편집자 소관이고 역자는 저자가 어떻게 말한 것인지를 충실히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근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죠. 번역에서는 말귀를 알아듣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저자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깊어야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른바 ‘초를 치는’번역은 싫어해요. 번역은 설명이 아니잖아요? 원문 풀어쓰기(paraphrasing)도 아니고요.

‘번역투’가 나쁘다는데 장말 나쁜가?

-번역문이 술술 읽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반대쪽에는 번역문은 원문쪽으로 끌어당겨서 쓴 이질성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저보고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번역스러운 번역쪽을 택하겠죠. ‘번역투’가 나쁘다는 것이 통념인데,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거든요. 번역인데 번역투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만보면 몇몇 분열적인 직종이 있어요.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받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은 겁니다. (좌중 웃음) 옛날엔 실물과 똑같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지만 달라졌잖아요. 저는 번역의 매끄러움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역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사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한글 문장을 번역투로 쓰는 경우죠. 번역서가 악영향을 끼쳤다고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하지만요. 우리가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라면 자연스런 사태이기도 하겠죠.
=번역의 영향이 없진 않죠. 하지만 A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영어로 읽어도 독특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작가란 모름지기 그런 독특한 목소리가 없으면 작가가 아니잖아요? 비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저자의 문투를 무화하는 방향은 제 방침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보존하느냐를 고민하는 쪽이죠. 물론 번역자 중에는 (글이) 이런 꼴은 못 본다고 생각해 다듬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입장의 차이죠.

-서평이나 신문의 책 기사에서 번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거칠다고 지적하느라 언급하는 예가 많지만 매끄럽다는 칭찬도 있죠. 기자가 원서도 읽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 무엇을 기준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일단 대부분 원문과 대조없이 평한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죠. 기사에서 번역을 논하는 의도는 사실 본격적으로 번역을 평가한다기보다 이 책은 기본이 안돼 있다는 평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방법 아닐까요?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니까. 축구 경기를 보면서 기본기가 안돼 있다고 해설하듯이 말이죠.

-번역자로서 마지막 방법이 영어 원문을 그대로 쓰고 주석을 다는 것일 텐데요. 역주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주석을 싫어하는 건 편집자들이죠. 책이 어려워 보인다고 학술서도 아닌데 그래야 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전 번역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봐요. 영어의 말장난도 어떤 역자들은 비슷한 우리말 농담으로 치환도 하지만 일단 전 그런 재주가 없고요.

-왜요. <책도둑>에서 “A로 시작하는 말”을 “ㅅ이나 ㅆ으로 시작되는 말”로 옮기셨잖아요? (웃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옮길 때, 제복이라 치고 입었는데 결과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표현을 “제각각복을 입었다”라고 옮겼어요. 그때는 뭐 약간 제 상태가 좋아서 해본 건데(웃음), 만약 그런 농담이 자주 나왔다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렇게 옮기지 않았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재치가 없어요.

<로드> 성공, 한국 독자의 수용력에 놀라

-의뢰를 많이 받는 번역가이십니다. 수락 여부를 좌우하는 조건이 뭔가요?
=처음 읽었을 때 독자 입장에서 제가 느끼는 호감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서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 무엇이건 제가 어느 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책이길 바라죠. 그런 동기가 없으면 몇달의 작업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좀 이해해주세요. (웃음)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낸 <미메시스>라는 번역 무크지가 있었습니다. 99년에 “올해의 좋은 번역서 가운데 선생님이 옮긴 <신의 가면III: 서양신화>가 있던데요. 개인적으로 성취감을 크게 느끼는 번역서는 무엇입니까?
=번역의 완성도에 대한 만족과 성취감이 일치하진 않아요. 일단 <마르크스 평전>이 떠오르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작업은 힘들었지만 보람있었어요. 존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마치 어려서 읽은 한국의 민중소설, 그것도 아주 잘 쓴 작품을 보는 것 같았어요. 현실을 끌어안는 품이 푸근한데 그 위에 예술적 깊이와 온기도 대단해서 각별했습니다.



-제약 조건 없이 선택할 수 있다면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
=호치민, 레닌, 마르크스, 마오쩌둥 평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오쩌둥은 좀 생각이 달라졌지만 이 나이에도 설레는 남은 로망으로는 프로이트가 있었는데 그의 평전 번역에 곧 착수할 것 같습니다. 피터 게이가 썼으니 책은 좋을 것 같습니다. 한때 베토벤 평전을 옮기고 싶어 안달을 하고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하느라 공을 들였는데 막상 설득에 성공하고 나니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계약을 했더군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가 전기를 해보고 싶은데 기회가 많이 돌아오지 않네요.

-주로 인물에 관한 책이군요.
=중요한 인물의 저작을 옮기기엔 제 능력이 미흡한 것 같고, 평전이 제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난이도로 치면 소설이 최고죠. 어찌보면 인문사회과학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소설 번역은 결과 자체가 완성품이 돼야 하니까요. 예컨대 <지젝이 만난 레닌>의 경우 쉽지 않은 번역이었지만 지젝은 기본적으로 독자에게 말을 하려는 사람이거든요. 반면 소설 <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꼭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어요. 독자가 알아듣는지 여부에 딱히 관심이 없달까.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이죠. 내게 설명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옮기는 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일을 애써 알아듣고 번역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죠.

-<로드>는 암울하고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16만부가량 판매됐다고 들었어요. 올해의 작은 사건이랄까.
=저도 의외였어요. 정보가 없는 상태로 번역하겠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간결함이 주는 매력과 알 수 없는 힘에 끌렸어요. 이게 뭘까, 더 알고 싶었어요. 책이 성공한 뒤 제 친구가 내린 해석을 옮기면 <로드>는 누구나 대입하기 쉬운 절망을 그렸기 때문에 잘된 거라더군요. 우리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저 같은 사람에겐 큰 힘이 되죠. 일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신장되고 자유가 커지니까요. 사실 <로드>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대가는 그거예요.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전에서 꼭 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나요?
=번역을 배우는 학생들 말이 사전에 나온 1번의 뜻으로 번역하면 안된대요. 실력이 없어 보이니까. (웃음) 그렇지만 저는 1번이 제일 중요한 뜻인데 그걸 피해가면 어떻하냐고 하죠. 단어의 의미는 문맥이 규정하죠. 사전에 나온 풀이가 문맥에 들어맞지 않으면 그때부터 고민에 들어가는 거죠. 사실 작가가 일일이 사전을 들춰보며 원문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사전이 몇권이라도 소용없는 부분이 있어요.

영화자막 번역은 악몽이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편집위원들이 문학의 고전은 세대마다 새로 번역돼야 한다고 표명하셨어요. 번역은 원작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이 상식인데요.
=그 문제도 단순하지 않아요. 그분들은 그렇게 선언했지만, 원작은 가만히 있는데 번역은 왜 시대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한 건 아니죠.

-번역문에 쓴 단어가 예스러워져서 동시대 독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있겠죠?
=저는 현재 흔히 쓰지 않는 단어도 뜻과 느낌이 맞다면 쓸 수 있다고 보는 쪽이죠. 쓰지 말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독자들은 사전을 찾아보면 안되나요? 어휘 선택도 일종의 검열이라고 생각해요.

-불필요한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원문이 젠체하며 외래어를 쓰는 문체라면 번역도 그래야겠죠. 실제로 출판 관행이 저자들의 문장은 토씨 하나 고쳐도 난리가 나니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번역문은 편집자가 윤문하기도 해요. 저로서 기분 좋은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당의를 입힌 매끈한 번역이 선호됐지만, 지금은 원작의 문체를 어떻게 정확히 드러내느냐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에요. <로드>도 그런 불친절한 문체를 살려서 출간하기 쉽지 않죠.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한 문단이 몇쪽에 이르는- 역시 독특한 문체를 출판사에서 받아들여줬고요. <책도둑>도 흔치 않은 구성과 문체라 초반 진입을 못한 독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번역이 뭐 이래?”거든요. 그래서 편집자에게 고마워요. 좋은 편집자와의 만남이 번역가에겐 중요합니다.

-본인이 번역한 책 중에 개정해서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눈을 크게 뜨며) 다죠, 다. 저한테 한정없이 잡고 있으라면 한책을 갖고 끝도 없이 고칠걸요? 오역은 당연히 바로잡지만 그래서 역자교정 이후에는 일부러 책을 안 보려고 해요. 그걸 어떻게…. 가끔 제 번역을 인용한 글을 읽으면 낯 뜨거워 못 읽겠어요.

-영화를 볼 때도 자막 번역에 대해 민감하십니까?
=미디어 번역을 전공하는 친구들 말을 들으니 가로 번역은 몇자 이내, 세로 번역은 몇자 이내로 해야 하다보니 원뜻과 무관한 번역을 하는 분도 있대요. 물론 그분의 스타일이겠지만. 저는 영화를 잘 모르지만 어떤 영화는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디 앨런 영화자막을 만드는데 잣수 제한이 있다면 몹시 괴로울 거예요. 그분 영화야 스펙터클이 있길 하나 그야말로 말 갖고 하는 건데 대사를 잃으면 영화의 큰 부분을 잃는 셈이잖아요.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웃음) 딱 한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책을 번역하면서 한꺼번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자막을 번역했는데 악몽이었어요. 자막 번역의 고충을 알았죠.

음식과 옷 묘사하기 가장 힘들어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관념적인 명제보다 시시콜콜한 묘사가 옮기기 더 어렵지 않나요? 역서 중 책장의 역사를 다룬 <서가에 꽂힌 책>을 읽었는데, 중세의 사슬 달린 책장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옮기는 이가 괴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묘사의 번역이 의외로 굉장히 힘들어요. 일단 이미지를 제 머릿속에 확실히 잡아야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동시에 문체도 살려야 하거든요. 제일 싫어하는 내용이 음식과 옷이에요. 먹어보거나 눈으로 봤어야죠. 특히 여자 옷은. 번역뿐 아니라 작가들도 묘사력을 보면 재능을 가늠할 수 있어요. 묘사를 못하는 사람은 영어 자체가 꼬여서 이미지를 설득 못하거든요. 주장하는 문장이 훨씬 쉽죠.



-한 문화권에는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등가물을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맞을 텐데요. 관직명도 그렇고요.
=<번역어 성립 사정>이라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 있어요. 민주주의, 연애 등 10개의 단어를 갖고 처음에 서양어로부터 어떻게 일본어로 번역됐느냐를 따진 책이죠. 예를 들어 경제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해서 쓰게 됐는지 알 수 있죠.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쓴 라틴어가 영어로 흘러드는 과정에 관한 책도 있어서 한때 이 두권의 책을 엮어 번역해볼까 하는 구상도 있었어요. 일본 책이 먼저 나와서 무산됐지만.

-선생님이 두권 이상 번역한 책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존 그리샴, 알랭 드 보통, 주제 사라마구, 타리크 알리 등이 있는데요. 어떤 작가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존 그리샴은 정의감이 중요한 장점이죠. 그 정의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다른 문제지만요. 주제 사라마구는 노동자 출신다운 강단과 세상을 보는 각도가 있는데, 낯선 그의 스타일이 실은 구술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해요. 타리크 알리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은 깊지만 의욕만큼 성취한 작가는 아직 아닌 듯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글쓰려는 주제 안으로 독자를 포섭하는 능력이 있죠. 무거운 책과 가벼운 책을 번갈아 내는 느낌입니다. 신경질적인 면도 있지만 무게도 실을 줄 아는 저자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중에서는 <불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현재 <일>(Work)이라는 책을 쓰고 있대요.

-다양한 작가의 책을 작업했는데 옮긴이가 같아 나타나는 문체의 일관성이 전혀 없을까요?
=누군가 그런 말을 제게 해준다면 최악의 평가일 겁니다.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과 쇼팽을 똑같이 연주했다는 말과 같은 거니까. 물론 불가피한 공통점이 있고 저의 무엇이 저자와 변증법적으로 작용해서 번역이 나오는 것이겠지만요. 훌륭한 배우의 경우 어떤 역을 연기했을 때 “이게 그 사람이었어?” 하고 놀랄 때가 있잖아요?

-배우의 경우 육체성을 떼놓을 수 없으니 약간 다르겠죠. 가끔은 독자로서 동의하기 힘든 내용을 번역하기도 할 텐데요.
=제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최근 나온 <그레이트 게임>이 그런 예인데, 저자 피터 홉커크가 영국인의 시선으로 아프가니스탄인을 폭도로 간주한다거나 하는 대목이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한국의 독자들이 ‘폭도’라는 말의 다양한 함의를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해서 아니까 굳이 각주를 달지 않고 역자후기에만 언급했습니다.

번역은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

-선생님은 유학도 간 적이 없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시지도 않는데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비결을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언어에는 끈적한 속성이 있고 해당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 있죠.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건 좋은데 그걸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물건을 사고팔려는 건지, 철학을 하려는 건지, 연애를 하려는 건지. 그런 요소가 있으니 제가 번역을 하고 있겠죠? 외국 거주 경험이 없고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면 번역을 못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겠죠.

-자동 번역기계가 등장했을 때는 감회가 어떠셨나요?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란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게재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자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지젝, 레닌을 만나다>의 후기에 번역 준비과정에서 과거에 나온 책들을 보면서 20여년 전 금서를 타자기로 번역했던 익명, 가명의 번역자들에게 감탄했다고 쓰셨던데요.
=과거의 책들을 찾아본 까닭은 일단 틀리고 싶지 않았고, 앞서 옮긴 이들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작업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번역이 좋아서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 원동력에 눈길이 갔어요. 저야 먹고살려고 번역한 거지만 그들에게 번역은 틀려서는 안되는 절박한 문제였던 거죠. 오류 여부를 떠나 본인의 번역이 당시 논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행동을 결정하는 큰 변수가 된다는 데서 나오는 서늘한 기(氣)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 그 사람들만이 소유한 기운이었고 지금의 저한테는 없는 부분이라 부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번역이란 지금 말씀하신 정치적 절박함이건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건 문학에 대한 동경이건 아마추어적 열정이 중대한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번역을 비전문적 영역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고요.
=패러독스인데, 20년 전 레닌을 번역한 사람들은 당연히 아마추어였을 텐데 그들만큼 프로가 되겠다고 의식한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레닌 이론의 핵심이 직업혁명가론이잖아요. (웃음) 아마 새로운 세대들은 아마추어적 정열을 바탕으로 프로페셔널 번역가가 되겠죠?

-혹시 반대 방향의 번역, 한글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여러 설이 있지만 모국어가 도착어(번역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번역이 아트(art, 예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래프트(craft, 장인의 기술)는 되는 것 같아요. 즉 결과로 나오는 언어를 세공해야 한다는 뜻인데, 세공은 모국어가 아니면 힘들 것 같아요.

追伸: 나이와 함께 체력이 쇠하고 집중의 지속이 짧아졌다고 정영목은 말했다. 이어“그래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책이 점점 더 필요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거꾸로 젊은 번역자들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덤벼들어야 할 책이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느슨해지려는 몸과 마음의 탄력을 추슬러주는 정영목의 도락은 등산과 클래식 공연 관람. 얼마 전에는 그가 사는 도시의 음악당에서 최다 관람 관객 2위로 뽑혀 부상을 받기도 했다고. 표값이 아닌 방문횟수를 합산한 덕분일 거라면서도 흐뭇한 기색이 비친다. 번역자의 가슴에는 원작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락시켰던 말의 부스러기가 쌓일 테지만, 연주자는 공연으로 작품을 끝없이 재해석할 수 있다. 연주자와 연주를 향한 그의 사랑에는 혹시 그런 특권을 향한 천진한 동경이 포함돼 있는 게 아닐까.

08.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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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2-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일 오후 좋은 글을 로쟈님 덕분에 읽었네요. 정영목씨는 어린이책들도 번역하셔서 조카에게 망설임 없이 권하곤 했죠..

로쟈 2008-12-21 13:59   좋아요 0 | URL
저도 인터뷰기사 덕에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이 있는 골목>을 알게 됐어요. 어린이책에 대해선 좀 무관심해서 모르고...^^;

쉽싸리 2008-12-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몇 권 사야 겠습니다.
이 분 이름으로 검색해서 살펴보니 단 한 권도 제 수중엔 없군요.늘 소유욕만 난발,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뭐가 좋을까요? ^^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보통의 책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 듯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기자가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고 질문한다는 느낌이 드네요.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을 번역한다니 기대가 되는군요.게이의 슈니츨러 연구서를 읽은 기억이 있거든요.

로쟈 2008-12-21 18:20   좋아요 0 | URL
리뷰어가 이름을 걸 만하지요. 피터 게이의 책은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Kir 2008-12-2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이 분이 번역한 책을 꽤 가지고 있는 편인데, 좋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반반이었어요. 그래서 선호하는 역자로 꼽기는 어쩐지 애매했는데, 이 기사를 보고나니 선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렸네요^^ 언제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땅의 수많은 번역자분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로쟈 2008-12-23 00:09   좋아요 0 | URL
본인 스스로도 고칠 게 많다고 하는데, 점점 좋아지고 있는 케이스죠. 이제까지의 번역보다 앞으로의 번역에 더 기대를 걸게 합니다...
 

간혹 언론리뷰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책이 있다. '유럽 시민발의 및 국민투표연구소(IRI)'란 곳에서 펴낸 직접민주주의 가이드북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8)도 그런 책의 하나다. 사실 한국식 대의민주주의가 저절로 잘 돼갈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요즘 아닌가. 해서 국민(인민) 주권은 이제 국민들 스스로가 챙기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우리의 생선은 우리가 지키자!). 책은 직접민주주의 노하우와 실제를 여러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있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직접민주주의의 '레시피'로서 유용해보인다. 더이상 권리를 도둑 맞기 전에 각자가 주권자의 위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노력으로 부족하면 분투를!..  

국제신문(08. 12. 20) 'By the people(국민에 의한)' 궁극의 민주정치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또다시 국회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여당이 단독으로 한미 FTA 비준안을 상정하기 위해 회의장을 봉쇄하자 야당 당직자들이 해머를 들고 출입문 바리케이드를 부수었고 이들을 막는 소화기까지 등장했다.



국민 선거로 선출된 거대 여당의 과두정치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무관심이다. 사람들은 '난투극'이라는 현상만을 보며 정치를 더 혐오할 것이며 선거 투표율은 또다시 바닥을 길 것이다.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민의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다시 소수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간접민주주의의 악순환인 셈이다.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는 이러한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막가는 정치에 눈을 닫고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감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이들을 견제하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이처럼 책은 정치의 '퍼블릭 액세스' 시대를 어떻게 열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북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인 부르노 카우프만, 롤프 뷔치, 나드야 브라운 등은 유럽 최초의 현대 직접민주주의 싱크탱크인 '유럽 시민발의 및 국민투표연구소(IRI)' 소속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스위스에 돋보기를 갖다댄다.



'취리히시의 거주자이자 유권자로서 아스트리드는 1년 동안 6번의 선거와 30번의 국민투표에 참가한다. 5월 어느 일요일. 그는 연방정부 관련 9개, 주정부 관련 1개, 지방정부 관련 2개의 사안에 대해 투표를 했다. 또 당직자 선출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투표자들이 너무 많은 사안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라고 언론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권자의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론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그건 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치라며.'

한 국민의 사례는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의 현재를 집약한다. 스위스에서는 법안을 시민이 발의, 투표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헌법 관련, 주정부에서는 각종 법안과 연관된 시민발의가 제기된다. 유권자 10만 명 이상이 서명을 하면 연방헌법의 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연방의회가 이를 거부해도 제안자들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는 한 발의된 개정안은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이렇게 스위스 국민들은 적정한 집세, 적절한 건강보험료, 연 4일 차 없는 날, 장애인에 대한 동등한 권리 보장, 핵발전 반대 등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베른주에서 독립해 스위스 연방의 26번째 주가 된 주라의 분리 과정은 직접민주주의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다. 1815년 불어권 가톨릭계인 주라가 독일어권 개신교계인 베른주에 통합되면서 분쟁은 시작됐다. 소수집단이 된 주라가 끊임없이 분리를 요구했고 2차 대전 이후 주라의 분리주의 운동은 본격화된다. 1957년 주라 민회가 분리 사안을 놓고 시민발의를 했고 결국 1975년 주민 투표로 새로운 주 창설이 결정됐다. 이를 두고 저자는 "민족주의에 대한 민주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책의 2부에서는 ▷스위스 시민발의와 국민투표의 통계자료 및 사례 ▷스위스 직접민주주의 운영 절차와 과정 소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각종 제안과 지침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현황 등을 30개 주제로 나눠 도표와 그래프를 곁들여 설명, 독자의 쉬운 이해를 돕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국민투표, 주민발의, 주민감사청구제, 주민투표, 주민소송, 주민소환이라는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고대 그리스 이후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는 최근 직접민주주의의 역동성과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역자인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교수이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장은 서문에서 올해 5월 스위스 소도시 레인펠덴의 주민들이 음악교육을 헌법조항에 넣기 위해 시민발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런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스위스 국민들은 모두 비상근정치인이며 직접민주주의는 현지 선거 관계자의 표현대로 대의제라는 자동차에 달린 브레이크이자 액셀러레이터이다.'(이선정기자)

08. 12. 20.

P.S. 작년에 나온 책 <직접행동>(교양인, 2007)과 올해 나온 책 <절반의 인민주권>(후마니타스, 2008)도 같이 손에 들어봄 직하다. 내가 이 두 책보다 먼저 집어든 건 재작년에 나온 벤자민 바버의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2006)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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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8-12-20 22:55   좋아요 0 | URL
지난 1년 간의 U턴이 너무 극적이라서 이런 얘기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지지 않나요? (1년 만에 정치후진국의 대오에 우뚝 서다니!) 게다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간접민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상당히 정확히 반영된 것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면...

로쟈 2008-12-20 23:10   좋아요 0 | URL
'정확히 반영된 것 아니냐'(자업자득 아니냐)란 지적은 대해선 저도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제라도 '강한 시민(사회)'을 향한 분투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것이구요. 어쩌면 밑바닥에서부터의 '장구한' 노력이...

Sati 2008-12-20 23:18   좋아요 0 | URL
시간만이 약일 듯해서요(조만간에는 '노력'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로쟈 2008-12-21 18:19   좋아요 0 | URL
저도 단기적으론 비관적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12-21 10:54   좋아요 0 | URL
선거구의 재편도 필요할거 같아요. 지금 같아서야 무신 지방자치가 되겠습니까..

로쟈 2008-12-21 18:19   좋아요 0 | URL
그게 단기간에 좋아질 것 같진 않습니다. 말만 지방자치이지 지역 토호들의 주머니만 챙겨주고 있는 거 아닌가 해요. 제도개선에다가 플러스 알파가 필요한데, 언제나 가능할는지...

노이에자이트 2008-12-21 15:57   좋아요 0 | URL
<절반의 인민주권>은 정당정치 및 대의제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얇아서 서점에서 대충 읽었는데 앞으로 정독해야겠죠.

로쟈 2008-12-21 18:17   좋아요 0 | URL
네, '정당론'의 클래식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뒤집어서 읽었습니다. 정당정치란 민주주의의 '절반'이라고요. 곧, 최선의 정당정치만으로도 부족한 것이죠. 하물며 허접한 정당정치라면 더더욱...

노이에자이트 2008-12-22 17:0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아직 제대로 된 정당정치도 정착이 안 되었지요.그런데도 건방지게 정치혐오증과 투표권 포기 등등의 못된 것만 먼저 배우고 있으니 한심하지요.

로쟈 2008-12-23 00:10   좋아요 0 | URL
그런 거 학교에서 가르치고 숙달시켜야 한다고 봐요. 중요한 건 교과과정에서 일부러 빼놓는 것인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는 소식이다. 오바마의 승리에는 부시의 실정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임자'인 부시와 맞승부를 펼친 건 아니었다(오바마의 상대는 맥케인이었다). 부시와 맞장을 뜬 건 이라크의 한 기자였다. 며칠 전 바그다드의 기자회견장에서 부시에게 신발을 던져 '국민적 영웅'이 된 알자이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시에게 신발 던지기' 개인적으로 꼽은 올해의 외신 사진이다.  

더불어, 지난주에 출간된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프레시안북, 2008)이 이주의 책이다(사실은 이번주 서평도서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추이를 더 지켜봐야겠다).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종말'은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이다. 그 종말과 함계 오는 것이 파시즘이며, 따라서 <미국의 종말>은 민주주의 종말에 대한 진단이면서 파시즘에 대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이쯤이면 바로 떠오르는 책이 있지 않나? 역시나 우리가 파시즘으로 가는 전환기에 있다고 진단/경고하는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개마고원, 2008) 말이다. 내년 이맘때쯤엔 <한국의 종말(The End of Korea)>이란 책이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고 우려스럽다. <미국의 종말>을 반면교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아, 이 '미국제' 종말!).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아울러 아룬다티 로이의 사례를 들어 문학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장정일의 칼럼도 같이 옮겨놓는다. '잘난 소설가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지만 사실 반성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이명박 정권의 탄생이 우리의 책임인 것처럼).

한겨레(08. 12. 20) '부시 파시즘’은 어떻게 미국을 망가뜨렸나

‘미국은 끝장났다(The End of America)’고 선언한 나오미 울프의 책이 나온 것은 2007년. 진보적 사회비평가 나오미가 보기에 미국은 이미 그 시점에서 더는 미국이 아니었다. 금융공황이라는 경제파탄 이전에 정치·사회·도덕적으로 이미 파산상태였다. 나오미는 부시 집권기간을 파시즘 체제로의 이행기라고 진단했다. 놀랍게도, 버락 오바마의 등장으로 주춤거리고 있는 미국 파시즘의 불길한 전조들이 한국에선 지금에야 그대로 복제돼 한층 더 강도 높게 활개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미국의 종말>이라는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6월 환경운동가 스티븐 하워드가 아들을 피아노 레슨에 데려가다가 부통령 딕 체니 일행이 근처 쇼핑몰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가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이라크 정책은 비난받을 소지가 있소.” 10분 뒤 비밀 경호원이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지역경찰은 ‘부통령을 공격한 혐의’로 하워드가 징역 1년을 살 만한 내용의 조서를 꾸며 기소했다. 그해 7월 중앙정보국(CIA) 컴퓨터 보안전문기술자 크리스틴 액스미스는 물고문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블로그에 올렸다가 13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잃고 기밀문서 취급자격도 박탈당했다. 같은 시기 부시 정부는 누구든 ‘적대적 전투요원’으로 낙인찍히기만 하면 재판절차도 없이 수감해서 무기한 감금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었다.(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끔찍한 범죄행위를 상기해보라.) 8월엔 시위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검찰에 넘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블로거가 수감당했고, 연방검찰 당국이 <뉴욕타임스> 취재기자들 전화통화 내역을 조사해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해 3월엔 부시 정권에 ‘비협조적인(민주당 지지 유권자등록운동 시민단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이유)’ 연방검사 9명이 해고당했다.

<미국의 종말>은 부시 정권이 미국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그 ‘열 가지 비법’을 가르쳐 준다. 1. 안팎의 위협을 부각시켜라. 2. 비밀수용소를 건설하라. 3. 준군사조직을 육성하라. 4. 일반시민들을 사찰하라. 5. 시민단체에 파고들어라. 6.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와 석방을 꺼리지 마라. 7. 핵심인물들을 겨냥하라. 8. 언론 자유를 봉쇄하라. 9. 비판은 ‘간첩행위’로, 비판하는 자는 ‘국가반역죄’로 몰아라. 10. 법의 지배를 뒤엎어라.

미국 우익 패권주의세력이 영구집권을 위해 고안해낸 이 10가지 수법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그리고 프랑코, 피노체트, 수하르토, 소모사 등이 써먹던 수법을 그대로 따온 것임을 나오미는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망가졌다. 결국 공화당 정권도 무너졌다.

이 땅의 우익 파시스트들이 유행시킨 이른바 ‘좌빨’이라는 합성어가 미국 파시스트들이 정치적 반대세력 제거용으로 써먹은 ‘적대적 전투요원’이라는 매카시적 용어의 복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책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땅의 우익은 말하자면, 미국 우익의 영구집권계획을 이제야 열심히 복습하면서 일본 우익의 낡은 수법까지 가미해 한술 더 뜨고 있다. 촛불시위자 처벌, 역사교과서 수정과 우익역사 특강, 일제고사 관련 교사징계, 단체장·고위공무원 판쓸이, 사이버 규제, 백골단 부활, 방송장악과 언론관련법 개악, 그리고 대북정책, 에프티에이(FTA) 날치기 처리…. 판박이다.

나오미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쌓아올리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라며, “황혼의 땅거미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파시즘의 전조에 눈감은 채 그것을 남의 일로 치부하면 머지않아 모두가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8. 12. 20) 논픽션 무시하는 ‘잘난’ 소설가들에게

인도의 여성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30대 중반에 발표한 첫 장편 <작은 것들의 신>(문이당, 1997)으로 그해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독후감이 바쳐진 데는 로이의 출세작이 아니라,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 2004)라는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정치평론집이다. 여기서 로이는 인도 정부가 벌이는 세계화 정책과 무절제한 댐건설이 어떻게 빈곤계층의 생존을 위협하는지, 미국의 패권주의와 거대 자본가들의 탐욕이 중동을 식민화하기 위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는지 고발한다. 무례한 단안이지만, 동년배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아직 우리는 유치원생이란 생각이 든다. 인도가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며,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방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주한 미군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우리 속에 파고든 자본과 미국에 대한 편애는 독처럼 깊다.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을 쓸 권리를 포기했는지요?”라는 로이에게, 소설가이기 때문에 오로지 소설을 써야 한다고 믿는 것은 소설가에 대한 오해다. 실제로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 큰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로이는 첫 소설 이후, 소설을 작파했다. 갑작스런 비약이지만, 비비케이 의혹에 관한 단 한 권의 논픽션도 없다는 것은, 우리의 글쓰기가 얼마나 편협하고 위계적인지 웅변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라면 벌써 셀 수 없는 책이 쏟아졌다.

로이처럼 소설을 그만두고 논픽션이나 정치평론을 쓰라는 게 아니다. 단지 아홉 권의 소설을 쓴 뒤, 단 한 권 정도는 악취 풍기는 의혹이나 공공선에 관심을 할애하는 것이 과연 그 잘난 소설가의 품위를 해치고, 예술가의 자존심에 금을 내며, 작가로서의 본분을 방기하는 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일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의 충격으로 <언더그라운드>(열림원, 1998)를 썼다. 그가 그 사건을 소설의 ‘글감’으로 삼지 않고 논픽션을 택한 것이야말로, 문학적 글쓰기의 좁은 정의를 넘어 사회와 직면한 고귀한 행위였다.

유치원생들에겐 ‘장르계급’이라는 게 있어서, 소설과 시만이 글쓰기의 왕도며, 이외는 모두 잡문이다. 이렇듯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논픽션에 맞춤한 주제와 소재들로 논픽션을 써야 할 사람들이 ‘팩션’으로 월경한다. 소위 진지한 문학계(?)가 ‘팩션’에 당하는 수난은 인과응보겠지만, 정작 안타까운 것은, 고증과 논리로 무장해야 할 논픽션 정신이 ‘팩션’이란 허위의식에 찬 형식에 썩어나는 거다.

독자들도 문제다. 설혹 비비케이에 관한 논픽션이 있더라도, 소문과 잡담으로 진실을 대신하며, 그저 ‘누군가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기’만 바란다면 만사휴의다. 선진국의 연간 베스트셀러가 대부분 논픽션인 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유지와 그것과의 관계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소설 나부랭이는 집어 던지고 <9월이여, 오라>를 읽자!(장정일/ 소설가)

08. 12. 20.

P.S. 이미 알려진 대로 '부시 신발 투척' 사건은 플래시 게임으로도 번져가고 있다(하긴 이명박 게임도 생기지 않았나). 이런 현상은 이제 '젼형적인' 루트가 되었다. 21세기 '정치' 혹은 '운동'은 이런 조건(토대)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책으론 소설 <작은 것들의 신>(문이당, 2006) 외에 논픽션으로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 2004),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이후, 2005), <생존의 비용>(문학과지성사, 2003) 등이 번역돼 있다.

한편, 나오미 울프의 경우는 <미국의 종말>이 유일하게 소개된 책인데, 그녀의 출세작은 스물 여덟 살에 펴냈다는 <아름다움의 신화(The Beauty Myth)>(1990)이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 70권의 하나로 지칭하면서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와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도발적인 새로운 페미니스트 책자"라고 평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데,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권>(부글, 2007)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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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12-20 11:36   좋아요 0 | URL
위계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진 않겠지만, 논픽션의 기피가 단순히 '품위'와 '자존심'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요즘 한국소설이 너무 안 읽힙니다. 주변에 책 꽤나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한국소설을 화제로 삼는 일이 드물던걸요. 문학권력 논쟁과 잇따른 표절 시비로 신뢰도 크게 꺾였고요.

단지 논픽션이 쓰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의 진위 여부나 고증을 둘러싼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못 쓰거나 안 쓰는 게 아닐까 싶어요. "'팩션'으로 월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논픽션이 매력은 있는데 제대로 된 논픽션을 쓰기에는 이래저래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언제든 '픽션'으로 둘러댈 수 있는 안전하고 간편한 길로 가는 거죠. 장정일 씨가 확실히 문단에 거리를 두다 보니, 필요하지만 내부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종종 던져주네요. 지난 번 녹색평론 이야기도 그렇고요.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0 23: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공감합니다. 어렵거나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품위' 때문은 아닌 듯해요. 장정일은 원래부터도 문학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던 편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20 13:20   좋아요 0 | URL
미국을 망가트린 열가지 비법..
이거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느낌도 제법 나는데요??

로쟈 2008-12-20 23:1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핵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0 15:3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특징 중의 하나가 논픽션이나 전기류가 잘 안팔린다는 겁니다.그건 우리나라 특유의 문제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명예훼손이라면서 작가를 고발해버리잖아요.그런 걸 보면 정말 별나기는 해요.일본 문고판만 해도 50년 이상 된 논픽션이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게 많더라구요.

로쟈 2008-12-20 23:14   좋아요 0 | URL
저는 논픽션이 작가들보다는 기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몫이면서 의무죠. 기자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그나마 기분을 풀어준 기사는 '88만원 세대'의 칼럼이었다. 필자는 대학생 논객. 비록 청소년 울리는 '알바'의 실상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는 칼럼이지만 그 주장의 예리함과 미더움 때문에 오히려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오늘 아침 환승하기 위해 서 있던 용산역 플랫홈에서였다. 연구소에 도착해서 칼럼을 다시 찾았더니 중앙일보의 칼럼까지 덩달아 눈에 띄었다. '기성세대'의 감각을 여실히 전해주는 것이어서 나란히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모아놓는다. 제목을 '88만원 세대 vs 기성세대'라고 붙여놓을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08. 12. 19) [88만원 세대 논단] 청소년 울리는 ‘알바’

11월부터 약 한 달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디든 지원자가 넘쳐났고, 위치도 좋고 시급도 괜찮은 곳은 나 같은 비숙련자들이 넘보기가 힘들었다. 며칠을 집중해서 알바 사이트를 뒤지다 보니, 알바 구직 시장에서 쓰이는 몇 가지 상투적인 표현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용모 단정’. 고등학생 때는 정말로 ‘용모’가 ‘단정’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 미모 하는 사람만 연락하라’는 뜻이다.

시급 협의. 시급 협의라고 써놓은 데 치고 최저임금 제대로 주는 곳을 못 봤다. 만일 직종이 편의점이라면 십중팔구 최저임금에서 한참 깎아서 준다. ‘가족 같은 분위기.’ 알바 체험 게시판에 따르면, 불합리한 일이 생겨도 ‘가족처럼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한다. ‘왜 임금이 더 작아요? 좀더 쉬게 해 주세요’라고 하려면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막으려는 수사다. ‘열정을 가지고 일하실 분!’ 예전에는 ‘근면 성실한 분’이 차지했던 자리다. 제 정신 가지고 일하려면 견디기 힘든 격무라는 소리 되겠다. 실제로 “일이 힘들어요. 열정을 갖고 하셔야 합니다”라고 면접 때 이야기했던 그 패밀리 레스토랑은 실제 일을 해 보니 보통 체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 괘씸하게 느껴진다. 근면 성실은 습관과 인내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열정은 내가 그 일에 대한 강한 목표가 있고 일에서 주체적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서 가지는 적극적인 태도다.

일을 시작해 보니, 왜 그렇게 열정 어쩌고 하면서 힘들다는 걸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곳에서 접시와 컵의 물기를 닦았는데, 동작 자체가 힘이 드는 건 아니어서 처음에는 할 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점심시간이 되고, 식기세척기에서 끊임없이 그릇들이 나오고, 그릇을 빼내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접시를 닦아 쌓고, 낑낑대며 홀에 갖다 놓고, 그러고 나면 식기세척기에서 나온 그릇들이 또 한참 쌓여 있고….

그런데 앉을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앉을 수가 없었다. 거의 열두 시간을 그렇게 서서 접시를 닦았다. 행주를 말릴 틈도 없이 접시를 닦다 보니 젖은 행주와 접시에서는 고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손은 퉁퉁 부었다. 나보다 몇 주 먼저 일을 시작한 아이는 주부습진으로 손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이곳은 월급날까지 한 달을 채워야 임금을 주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 전에 그만두는 아이들은 일을 했어도 시급을 받지 못한다.

월급날 통장을 확인해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다. 다음날 물어보니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하고 주는 거란다. 내가 29분을 일했다 해도 30분을 다 채우지 않고 퇴근하면 그만큼의 시급은 없다. 모두 노동법 위반이다. 그러나 알바 사이트에는 광고만 가득 있을 뿐, 관련 법규에 대한 안내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 수능 끝난 고3인 알바생들은 알바가 원래 이런 것이려니, 원래 돈은 그렇게 주는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일하고 있었다.

얼마 전 노동부에서 최저임금제 적용범위 완화를 추진했다는 소식과,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최저임금이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가파르게 올라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언급을 들었을 때, 언젠가 소설에서 읽었던 좀 적나라한 표현이 떠올랐다.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지.” 그러나 친애하는 노동부 장관께서는, 우리의 완전 소중한 기업들이 혹여나 최저임금의 굴레에 발목 잡힐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우리의 똑똑한 기업들은, 굳이 그렇게 법을 고쳐가며 돕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한 힘으로, 적정 임금을 알아서 조정하고 있다. 아,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이응소 | 인터넷 논객)

중앙일보(08. 12. 19) [노재현 시시각각] 바닥을 겁내지 말자

며칠 전 충북 제천의 청풍호(충주호) 부근을 다녀왔다. 짧지만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 이 일대의 명물인 벚나무들은 아직 봄을 기다리며 은인자중하고 있었지만, 호수를 끼고 도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철을 타지 않았다. 호숫가 산마루에 자리 잡은 청풍문화재단지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충주댐 건설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에 걸쳐 옛 가옥과 누각·향교, 생활물품, 고인돌·비석 따위를 옮겨 조성해 놓았다.

뜻밖에도 문화재단지 안의 고가(古家)가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문화재’라는 단어가 어색할 정도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거의가 어릴 때 살고 쓰던 집 구조요,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또래 이상의 연배라면 누구나 같은 느낌을 받았으리라. 쟁기·고무래·삼태기·다래끼·종다래끼·망태기·도롱이에서 오줌장군과 안방에 턱 놓인 사기 요강까지, 정겨웠다. 탈곡기와 씨아(목화씨를 빼내는 기구)도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고, 누에를 치던 집이었는지 섶이랑 잠박도 전시돼 있었다.

고가의 부엌 아궁이에서는 지금도 매캐한 연기 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랬다. 솔가지와 장작을 때다 어느 시점엔가 연탄 아궁이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 기름 때는 집에 산다. 고가의 도구들은 대부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에서 나왔다. 공장 물건은 드물다. 그만큼 결핍의 시대, 내핍의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십대에 갓 들어선 나도 생활도구에 관한 한 문화재와 첨단을 두루 경험하지 않았는가. 압축성장의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시대에 한국전쟁까지 겪은, 더 연세 드신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돈을 찾으러 시골 단위농협에 들렀다. 자그마한 사무실 창구 옆에 알사탕이 소복이 놓여 있었다. 공짜 서비스용이다. 한 쪽엔 무료 커피 자판기도 있었다. 저 알사탕이 옛날엔 얼마나 선망받았던가. 세계적인 뇌영상 과학자인 조장희(72·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박사의 회고록이 떠올랐다. 그는 62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유학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엘리베이터와 커피 자판기, 인기척이 나면 자동으로 켜지는 복도등,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 모두 처음 대하는 것들이었다. 한국은 나무들이 땔감으로 잘려나가 대부분 민둥산인데, 스웨덴은 온통 빽빽한 숲 천지였다. 강의실마다 필기구를 비치해 학생들이 공짜로 쓸 수 있게 한 것도 놀라웠다. 조 박사가 스웨덴에 가는 데 든 항공료는 550달러였다. 그런 거금(?)을 들여 해외에 가기 때문에 국무총리의 출국 결재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은 가난했다.

많이 쓰이는 영어로 ‘Been there, done that’이라는 말이 있다. ‘I have been there, I have done that’을 줄인 표현이다. 말 그대로 ‘거기에 가 보았고, 해보았다’는 뜻이다. 현장을 충분히 목격한 데다 온몸으로 겪어도 보았다는 말이다. 한국의 기성세대야말로 ‘Been there, done that’ 세대다. 식민지에, 전쟁에, 산업화 시대 일중독에, 민주화 열망에, 게다가 10년 전 혹독한 외환위기까지 현장마다 가 있었고 빠지지 않고 체험한 세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이 몸에 배어 있다. 문화재급 유물에서 시작해 첨단 제품까지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젊은이들이 ‘88만원 세대’ 운운하며 상대적 빈곤과 취업난을 호소하지만, ‘가 보았고 해 본’ 기성세대가 겪은 적빈(赤貧)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기성세대가 예전에 경험한 바닥보다 더한 바닥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

경제위기의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쯤이 바닥일지 감 잡기도 힘들다. 그러나 바닥을 겁낼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특히, 숱한 고난으로 단련된 기성세대가 이번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08. 12. 19.

P.S. 경험과 내공에 차이가 있고 그런 만큼 생각이 다른 두 세대가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역지사지'하는 수밖에. 자기 주장을 맛깔나게, 그리고 당당하게 펼칠 줄 아는 이응소 학생이 아예 일간지 논설위원을 하고, 만만치 않은 내공에다가 안해본 일이 없어서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는 노재현 논설위원이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열정'을 갖고 접시를 닦으면 되겠다(이번에 사표를 내신 1급 공무원들께서도 솔선수범하여 같이 닦으셔도 좋겠다). 서로 한 달만 바꿔서 일한 다음에 다시 칼럼을 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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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돌이 2008-12-20 01:14   좋아요 0 | URL
두 칼럼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물론 느껴지는 감정은 다르겠지만요.

로쟈 2008-12-20 00:18   좋아요 0 | URL
저도 착잡하면서 한편으론 '이런 거로군'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Ritournelle 2008-12-20 02:02   좋아요 0 | URL
아! 우리 훌륭하신 노위원님의 글은 곳곳에서 무시무시하고 괴기스러운 좀비들이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반면에 이응소 학생의 글은 단단하고, 앙칼지면서, 사태의 정곡을 단칼에 베어내는 느낌이듭니다. 둘 다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는데 한쪽에선 참된 실천의 천사들이 살아 움직이고, 다른 한쪽에서 거짓된 말들의 악마들만이 미쳐 날뛰네요. 답답합니다. ㅠ.ㅠ

로쟈 2008-12-20 10:53   좋아요 0 | URL
아주 선명하게 나눠지는 건 아닙니다. 사실 기성세대의 상당수도 나름으론 혈기방장한 반항적 청춘이었으니까요...

2008-12-20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8-12-20 10:25   좋아요 0 | URL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는 그 '말의 바닥'이 두려워지는군요 --;

로쟈 2008-12-20 10:48   좋아요 0 | URL
'바닥이여 어서 오라!'는 것이니 존경할 만한 자신감입니다. 다만 지지율 바닥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리더십을 떠올리게 하네요...

마노아 2008-12-20 12:22   좋아요 0 | URL
p.s에 환호하고 싶군요. 진짜 바닥이란 걸 디뎌본 적이 있으신건지...

로쟈 2008-12-20 23:48   좋아요 0 | URL
네, 부당한 노동조건과 착취에 맞서본 경험이라면 88만원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요...

무해한모리군 2008-12-20 13:43   좋아요 0 | URL
이 시대를 살아내면서 제가 느끼는 절망, 무력감과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한켠 잘라 보여주고 싶습니다.

로쟈 2008-12-20 23:48   좋아요 0 | URL
약간의 희망은 보존하셔야 하는데...

노이에자이트 2008-12-20 15:33   좋아요 0 | URL
저에게 이영희 씨가 군사정권 때 크리스찬 아카데미 활동 때 쓴 논문이 있는데...왜 저렇게 되어버렸을까요.노동부인지 전경련인지...

로쟈 2008-12-20 23:49   좋아요 0 | URL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잖아요...
 

주디스 버틀러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의 출간 소식을 '마이리스트'로 갈무리한 바 있는데, 책의 요지를 짚어주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몇 가지 줄거리만 챙겨두어도 인문 이론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은 책의 부제이다...

한겨레(08. 12. 20) 주디스 버틀러 “여성은 없다”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담론 안팎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작이다. 1990년 출간한 이 책으로 지은이 주디스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섰다. 논란이 거셌던 것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여성 해방의 정치를 주도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를 이 책이 정면으로 치받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여성이 설령 계급·인종 같은 분할선에 따라 복수로 존재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여성이라는 범주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여성 정체성 담론도 해체돼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버틀러가 보기에 여성이라는 젠더는 결코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이질성의 집합이었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젠더 트러블’은 ‘젠더’ 내부에 이미 항상 ‘트러블’이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알려진 대로 버틀러는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라는 호칭도 얻었는데, 이 책의 재판(1999년)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라면서 젠더 규범의 어떤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 그는 16살 때 “격렬한 커밍아웃”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여성이라고 지칭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요구했는데, 그런 요구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마침내 밝혔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이렇게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겪었던 삶을 이론화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조차 이질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의 처지가 그를 급진적·근본적 사고로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버틀러가 시도하는 것은 여성 정체성 문제를 래디컬하게 파헤침으로써 정체성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이론적 수혈을 받은 곳은 프랑스 철학계인데, 이 책에서도 사르트르·푸코·보부아르·크리스테바·이리가레의 이론에 대한 인용과 성찰을 만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 이 책인 셈이다. 이때 버틀러는 푸코를 통해 만난 니체의 계보학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프랑스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한다.

버틀러의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섹스(생물학적 성)가 문화적·제도적 힘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명제다. 이 명제를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그가 먼저 인용하는 것이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보부아르의 명제에는 여성이 생물학적 성(섹스)과는 별개로 젠더(사회·문화적 성)를 차후에 구성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젠더와 섹스가 분리되는 것인데, 이 분리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면, “섹스/젠더 구분은 섹스로 결정된 몸과 문화로 구성된 젠더간의 극단적 단절을 시사한다.” 젠더가 섹스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 된다. 그럴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의 특징을 지녔더라도 젠더상으로는 여성인 존재가 나올 수가 있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젠더가 이렇게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면, 여성 정체성의 본질적 근거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편다. 생물학적 성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남성의 이분법으로 포괄할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이질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이 문화적 강제 속에서 하나의 생물학적 성으로 고정될 뿐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섹스가 자연에 관계되듯 젠더가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젠더(사회·문화적 성)의 원인 또는 기원은 섹스(생물학적 성)이며 섹스의 결과가 젠더라는 통념이 여기서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역으로 섹스는 젠더라는 문화적 강제 속에서 구성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의 결과이자 효과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비유가 아닌 직설의 지위를 얻게 된다.

버틀러의 주장은 여성성의 본질적 바탕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범주의 보편성에 입각해 여성성·모성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 정치’는 토대를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버틀러는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라고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보편적 정체성을 해체하더라도, 해방을 위한 일시적·잠정적 연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고명섭 기자)

08. 12. 19.

P.S. <젠더 트러블>의 출간으로 잠시 유예해 두었던 독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은 '정치적 열정적 (탈)애착들, 혹은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다. 얼마전 방한했던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주말에 먼지를 좀 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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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12-2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학적 삼인방에서 버틀러는 영미 전통에 해당하는 영역에 속하지요?

로쟈 2008-12-20 10:44   좋아요 0 | URL
영-불-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라고 자평하는 걸 보면 영미 전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는데요. 버틀러는 헤겔 철학에도 정통합니다...

헛헛헛헛 2009-01-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버틀러의 논의들 중 특히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기가 힘든데... 이에 대해 어떤 근거들을 들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참고로, [젠더 트러블]과 관계된 논쟁들은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