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고 조르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분위기 그저 그렇고 맛도 별로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온 뒤라, 게다가 속까지 더부룩하여 글을 쓸 만한 기분도 아니지만(이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인가!) 생각난 김에 메모 정도는 해놓는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게리 윌스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를 지난달에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와 함께 구입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다(두 책의 영어본도 같이 구했지만, 지금 찾다가 포기한 탓에 번역본만 갖고 이 메모를 작성한다). 기억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을 읽으면서 참고하려던 것이었고,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을 포함해서 몇 권의 책을 그렇게 뒤적인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원제는 그냥 'What Jesus Meant'이고 이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의미한 것' 내지는 '예수가 말한 것'이라고 직역될 수 있겠지만, 국역본의 제목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서문보다 먼저 등장하는 '번역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몇 쪽 분량의 '일러두기'만을 읽었고 그걸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대한 독자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는 계산방식이 다르거나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성경과 예수에 대한 길잡이로 유익하지 않나 싶다.  

'번역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는 건 예수가 사용한 언어와 그 번역 문제다.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자세히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초기의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가 완전 저잣거리의 언어여서 전혀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박식한 고전주의자 니체가 이렇게 말해놓았을 정도다.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깜짝 놀랄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우아함에 굳이 시련을 부여하여 이처럼 타락한 언어 사용을 선택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때문이다. 그가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을 때 피정복 지역의 사람들이 정복자 및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용 그리스어'였다. 일종의 혼합언어인 이것을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더 참조하면 이렇다.  

BC 4세기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AD 6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및 헬레니즘 문명에 동화된 일부 아프리카와 근동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코이네는 2세기까지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 방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구약성서>(70인역 그리스어 성서)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코이네를 사용하고 있다. 코이네는 근대 그리스어의 토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미국인은 잘 못 알아듣는 그 '영어'가 일종의 '코이네'이다. 대부분의 혼합언어처럼 이 코이네는 섬세함이 부족하여 기초적인 단어들만 접속사도 없이 길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빌라도 같은 로마인이나 예수와 같은 아람어 설교자들고 그의 제자들이 함께 사용했던 이 기초적인 언어로 씌어졌다."  

'아람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역시나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BC 7~6세기에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가 사용한 이 아람어가 히브리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배우들이 사용한 말이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고대 아람어'는 어떻게 재구해낸 것일까? 우리는 삼국시대의 한국어를 모르지 않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래서 아람어의 그리스어(코이네) 번역이다. 그리고 그 점이 바울의 언어와 예수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그리스어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반면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니체주의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이 바울의 언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울의 그리스어는 학파 또는 그 어떤 모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없으며, 그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서 어색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언어처럼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남겨진 시간>, 15쪽) 

강조한 대목은 오역이다. 어순을 약간 조정하여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예수의 언어처럼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맞다(원문은 "his Greek is not translated Aramaic (as are the sayings of Jesus)"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그 그리스어로 번역된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What to me and to you, woman)?'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가 갖고 있는 개역한글판으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나이까"이고 병기된 NIV판 영역으로는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이다.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에서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데,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와 비교하면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은 흡사 콩글리쉬 아닌가?  

게리 윌스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49절은 또 어떤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I must be at my father's)?"가 직역이고, 개역한글판과 영어판으로는 각각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I must be at my father's?""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간의 차이를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 윌스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의 무엇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주석자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이 이런 식으로 투박하고 모호하여 성서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그리스어(코이네) 문장들을 정확하게 옮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옮기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대목의 우리말 번역은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의 투박함이 많이 제거돼 있다. 실상은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니었을까? "야야, 그게 니랑 나랑한테 뭐시간디?").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영어 번역들은 신약성서의 '결점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문법을 보강하고, 시제를 보다 일정하게 맞추었으며 반복어구를 잘라냈다." 그리하여 공손한 고어체로 이루어진 품위 있는 성서를 만들어냈다(흠, <바이블 키워드>와 <아시모프의 바이블>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이 '킹 제임스' 번역본이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성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번역이 원전의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품위가 없어야 한다. 복음서의 언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언어는 언어학적 세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칠게 다듬어진 위엄이다."(10쪽) 그래야지만 "하층민 남자로서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제자들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윌스는 말한다.  

  

그런 성서를 사실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예수 또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대신 우리 곁에 있는 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와 '추락하는 한국교회'다). 마치 '예수 메시아'란 뜻의 '예수 크리스토스'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음역함으로써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메시아'를 배제하고 유예시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닌지('메시아' 대신에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반항적 록정신을 상실한 '거세당한 슈퍼스타'이다. '한국형 슈퍼스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서문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몇 가지 행적만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 운동의 허상을 폭로한다(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리하면 이렇다. 과연 사람들은 예수처럼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거나(마태8:22) 부모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마태8:22, 누가14:26) 혹은 자신들이 일궈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는 교외의 부자 교회를 찾아가(혹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헌금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라고 하거나 "강도들의 소굴"(마가11:17)이라고 고함칠 수 있을까?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23:27)고 외치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 10:34)고 하거나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려고 왔다"(누가12:49)고 한다면, 그런 예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예수가 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축복과 은총을 받아서) 기름이 번지르한 윤택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왜 나입니까?'라고 반문하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건 사실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리아의 성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서, 마리아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작품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한 게리 윌스의 말에, 나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그가 사례로 제시한 건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옮겨놓는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경실색한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궁금히 여겼다."(누가1:29) NIV판으로는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인류의 역사가 그 수태로 인하여 좀 바뀌었다면 그 기원적 정념이 놀람이고 공포였다는 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기쁨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나는, 성탄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08. 12. 25. 

 

P.S. 예전 같으면 눈길도 가지 않을 책들인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관심분야가 더 넓어졌다. '성경과 기독교'란 주제와 관련하여 더 읽어볼 만한 책은 바트 에르만(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등의 책이다. 저자는 신약학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타이틀이 많다.  

 

<예수>를 비롯해서 <신약>, <신의 문제> 등이 그런 타이틀이고 내년봄 출간 예정인 그의 최신작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러셀도 같은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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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영화 개봉했을 당시 인터뷰에서 본 것 같아요.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가 아람어로 된 성경을 몇 십번 읽고서 연기했다고 하던걸요. (대단해라!)

로쟈 2008-12-25 23:5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아람어 성경의 성립연대가 언제였는지 알면 되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아무래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성서해석학자들의 중평입니다.그래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가 성서엔 혼재해 있다고 하죠.

로쟈 2008-12-25 23:59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책상맡에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분도출판사)란 책이 놓여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제가 그 책을 말하려고 했어요.광주의 한 가톨릭 서점에서 몇년전 할인판매할 때 분도 출판사 책을 많이 샀지요.개신교 신학자들 책도 내고 일반 인문사회과학 책도 좋은 게 많이 나오죠.

로쟈 2008-12-26 12:52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구하기 힘든 책이 돼버렸어요...--;

람혼 2008-12-2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의 '상상적 형상'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같은 제목을 패러디하여 "예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로쟈 2008-12-26 12: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몇년 전에 당시 유대인인가 표준형 얼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지요(요즘 우락부락하고 입술 두툼한). '예수는 이날 태어나지 않았다'까지 포함해서 두루두루 시리즈가 될 법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8-1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그간 눈으로만 읽고 가다가 처음 글 남깁니다.
아람어와 코이네에 대한 글을 읽고 정찬의 소설집 <아늑한 길>에 실린 '아늑한 길'
을 펴보았습니다. 그곳에 아람어에 대한 내용이 꽤나 자세히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람어는 문자 없이 구전되기만 한 민중의 언어인 빨리어와도 비교할 만하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아 정찬의 소설에도 나오는군요...

누런마음황구 2008-12-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읽으려고 하다가, 좋은글 읽고 갑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그냥 일종의 책소개였습니다.^^;

neoscrum 2008-12-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성경 왜곡의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6490 성경의 원본을 찾는 신학자들이 보기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는 초기 성경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현재 쓰는 성경의 여러 오류들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8   좋아요 0 | URL
바로 제가 찾던 류의 책입니다.^^ 바트 어만(에르만)이 꽤나 저명한 학자군요. 바로 올려놓습니다...

anathema 2008-12-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ratton Ladewig, "An Examination of the Orthodoxy of the Variants in Light of Bart Ehrman`s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Th.M. thesi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2000).

로쟈 2008-12-27 23:41   좋아요 0 | URL
학위논문까지 뒤져볼 정도의 관심은 아니구요, <성서 왜곡의 역사>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만 더 소개가 되면 좋겠네요...

anathema 2008-1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논문은 바트 어만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입니다.^^ 바트 어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바트 어만의 주장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다른 사본학자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로쟈 2008-12-28 12:22   좋아요 0 | URL
Th.M. thesis이면 석사논문인가요? 아직 '사본학자'라고 부를 순 없겠고, 그가 권위 있는 새 책을 낸다면 읽어봐야겠네요...
 

성탄절이라고 해서 따로 분주한 일은 없지만(그와 무관하게 써야 할 원고는 있다) 예의상 기독교(그리스도교) 관련서를 챙겨놓는다. 억지로 고른 건 아니고, 마침 흥미를 끄는 책들이 출간돼서다. 독일 성서학자들이 쓴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8)는 8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지금까지 저술된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에 관한 배경사적 연구 가운데 이만한 책은 없었다."(김진호 목사)란 평도 있는 만큼 구경이라도 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쓴 <역사 속의 기독교>(길, 2008). 역시나 5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고, '태초부터 21세기까지 기독교가 걸어온 길'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각각을 소개하는 단신기사를 옮겨놓는다. 요즘은 이런 기사보다는 상품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는 출판사의 책소개가 훨씬 더 자세하지만... 

 

초기 기독교 신앙의 형성 과정을 1~2세기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배경으로 출현한 소수자 탄압의 맥락에서 조명한 책이 나왔다. 볼프강 슈테게만 등이 쓴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다. 책에 따르면, 예수가 죽은 뒤 로마제국의 도시사회는 민족·계급 갈등으로 표출되는 지배구조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대중들이 분노를 투사할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반로마항쟁을 일으킨 유대교가 대표적인 표적이었는데, 유대교의 일탈자 집단인 기독교 공동체는 한층 가혹한 공격과 배제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됐고,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신앙 양식에 반영돼 있다는 게 글쓴이들의 분석이다. 볼프강 슈테게만은 <작은 자들의 하나님> 등의 저작을 통해 사회사적 성서해석의 전범을 확립한 신학자로 독일 아우구스타나 신학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공동저자인 에케하르트 슈테게만은 그의 쌍둥이 형제다.(한겨레)  

프랑스혁명 속에서 한때나마 기독교를 버리는 운동이 일어났다. 혁명 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저마다 종교인의 부패와 위선을 공격했다. 국민공회는 아예 주일을 알 수 없게 달력을 고쳐 10일을 한 주로 만들기도 했다. ‘역사 속의 기독교’는 19세기 프랑스 언어학자 리트레가 말했듯이 “종교 없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듯이, 역사의 일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역량 있는 역사가 55명이 참여해 저술한 책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태동했지만 온갖 고난과 박해를 극복하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순식간에 서양을 점령해버렸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춰 기독교의 탄생부터 21세기 역사까지 다루고 있다. 특히 프랑스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기독교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룸으로써, 기독교사가 문화사 전체의 주제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 영역은 물론, 테러 등의 정치영역에서도 기독교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기독교 역사를 단순히 종교사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세계일보) 

08.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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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8-12-25 11:02 
    역사 속의 기독교 : 기독교 초기 신앙형성과정에 관한 서적

철학자(라기보다는 저술가란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탁석산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더러 칼럼들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그리고 한때는 TV에서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베스트셀러'들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흄 전공자로 처음 이름을 알게 됐지만(아마도 흄의 <인성론>에 관심을 가졌을 때인 듯하다), 그가 널리 알려진 건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이 뜨면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책을 손에 들기 전에 부정적인 평을 먼저 접했던 듯하고, 이후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최신작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가 지난달에 나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비'에서 출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를 보태자면,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란 주장이 눈길을 끄는 정도. 이걸 '조선 단절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조선사와 조선 유학에 좀 관심을 갖게 되면서(제임스 팔레와 한형조 교수 덕분이기도 하고 나이 탓이기도 하다. 나는 마흔 이후에는 한국학과 동양 고전에도 눈길을 주기로 10여 년 전에 작정한 바 있다) 문득 '조선 단절론'의 근거(evidence)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손에 들게 됐고, 또 그런 김에 관련기사도 찾아 스크랩해놓는다(나의 부지런함이여!). 강성민 전 교수신문 기자의 '탁석산론'은 퍽 신랄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는데, 어차피 '한국에서의 철학=문화'라는 것이 탁석산의 지론이기에 '철학'이란 (서구식) 기준에 미달한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가 괘념할 성싶지는 않다. 어쨌든 참고할 만하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8. 11. 15) [저자 초대석]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 탁석산(50ㆍ사진)씨의 답이다. 개항 후 한국의 100년을 지배해 온, 탁씨가 한국인의 '생활철학'으로 지목한 세 가지다. 이 질문을 제목으로 딴 그의 새 책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발행)가 출간됐다. '한국적'이라는 타이틀의 권위를 허물어뜨렸던 전작 <한국인의 정체성>(2000)처럼 이 책도 단정적이고 도발적이다.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선비에 대한 향수가 이는데, 조선의 패러다임인 주자학과 현대 한국인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 못지않게, 고유의 것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서양과 조선을 뛰어넘고 새로운 시기를 100년 이상 살았다"며 "지식인 사회가 조선이라는 벽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종교, 철학이 일치된 조선 주자학과 결별한 뒤에 '개인'의 공간이 탄생했고, 그 공간에 깃든 한국인의 철학과 정신이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종파를 초월한 기복신앙이 현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라는 태도는 인생주의를 보여주죠. 적극적으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야성성을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허무주의를 한국인의 철학으로 내세운 것,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는 그의 논지다. "한국인의 허무주의는 서양의 니힐리즘과 다릅니다. '인생 뭐 있나. 다 그런 거지'하는 태도가 절망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방어수단 혹은 '보험'으로 작용합니다. '지치고 힘들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결국 '어쩌겠냐, 열심히 살아야지'로 이어져요. 이게 현대 한국인의 철학입니다. 건강한 허무주의죠."(유상호기자)    

 

담비(08. 06. 10) 상식은 어떻게 철학으로 포장되는가 : 철학자 탁석산  

탁석산(卓石山)은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머리에 각인된 철학 전공의 저술가이다. 한자로 보면 더 특이하다. ‘탁월한 돌산’이니 완전히 울산바위 아닌가. 이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걸 보면 본명인 것 같은데, 부친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다. 그는 지난 2000년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와 ‘한국의 정체성’(2000)과 ‘한국의 주체성’(2000)으로 연타석 홈런을 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우 실용적인 글들을 써서 철학자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박사를 받았고, 그 박사논문의 인용빈도가 높은 전공자임은 분명하다.   

그가 대학을 싫어했는지, 아니면 대학이 거부했는지 모르지만 교수의 길을 가지 않고 40대 중반 대중서 저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탁석산은 책세상 문고판으로 어느 정도 유명해지자 똑같은 출판사에서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 2001)를 펴냈고, ‘철학 읽어주는 남자’(명진출판, 2003)를 내면서 이른바 ‘대기업’으로 파트너를 바꿨다. 그가 갈아치우는 출판사 이름을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탁석산의 고공행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웅진닷컴, 2004), ‘탁석산의 글짓기 도서관(1~3)’(2005), ‘토론은 기싸움이다’, ‘보고서는 권력관계다’(이상 김영사, 2006), ‘대한민국 50대의 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그의 최근까지의 행보다. 여기에 몇 가지 추가한다면 2004년 KBS ‘TV 책을 말한다’ 사회자를 지낸 것(얼마 못하고 장정일·김미화에게 바통을 넘기긴 했지만), 2002년 도올 김용옥의 논어강의를 신문에다가 대문짝만하게 비판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도일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신문 기자시절 그와 대면한 적이 있다. 2003년 조긍호 서강대 교수가 쓴 ‘한국인 이해의 개념틀’(나남출판)이란 책이 나왔을 때였다. 대외의존도가 심한 한국의 여타 학문분야에 비해 그나마 토착성을 획득한 게 심리학 분야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심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인’ 연구의 계보를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했고, 그 서브 메뉴로 신간을 낸 조긍호 교수의 책을 다루게 된 것이다. 좀 독특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서평이 아닌 ‘논쟁대담’의 방식을 취했는데, 대담자로 탁석산이 정해졌다. 교보문고 1층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조긍호 교수는 내내 겸허했고 탁석산은 내내 당당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에 이렇게 독특한 관심을 가져준다는 점에 조 교수는 감격했던 것 같다. 탁석산은 당시 A4용지 에 질문할 거리를 몇가지 적어 왔는데, 대담의 내용은 이 자리에 그리 소개할 만할 게 못된다. 인상 깊었던 건 탁석산이 대담료가 적다고 불평했다는 점이다. 두꺼운 책을 한권 다 읽고 나오는데 10만원이 뭐냐고 말이다. 그 대신 대담이 끝난 후 식사대접은 신문사 측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돈 때문에 필자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은 교수신문을 다니는 내내 겪어야 했다.(90%의 필자들이 기꺼이 글을 써주고 때로는 원고료를 받지 않기도 했지만, 나머지 10%의 필자들이 던진 쓴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독특한 글쓰기와 사례인용적 글쓰기의 효과
그런데 이것을 끝으로 탁석산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학술적이고 인문학적인 책을 펴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날 대담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탁석산은 책의 내용이나 수준에서 별로 주목을 요하는 저술가는 아니다. 대화체 글쓰기와 독특한 사례인용 등에 영감을 얻어 그걸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은 있다. 책을 보고나면 남는 것 없지만 한두마디 에피소드는 꼭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의 저술을 놓고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게다가 고종석은 탁석산의 책이 매우 위험하다며 “순진한 극우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이란 책에서 아예 기겁을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란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쳐보고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 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라고 말이다. 나 또한 여기에 동감한다. 센세이션을 일으켜 떠보겠다는 ‘야심’까지 읽혀져서, 나는 탁석산이 김용옥을 가리켜 ‘약장사’라고 독설을 퍼부을 때 ‘영역다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김용옥은 탁석산에 비하면 그 깊이가 1백미터는 더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고작 ‘상식’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사람 아닌가. 수능학원에 다 정리돼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랑은 오류’(웅진지식하우스, 1995)라는 소설에서 유머러스하게 정리해놓은 오류의 방정식이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그나마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서 헛똑똑이를 참 잘 그렸다. 한 법대생이 여자친구에게 ‘일반화의 오류’니 ‘의도의 오류’니 하며 잘난 척 읊어대다가, 막상 프로포즈를 할 때는, 그 여자아이가 법대생의 말끝마다 그건 무슨무슨 오류라며 넉다운을 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탁석산이 그의 책들에 깔아놓은 내러티브는 이에 비하면 반전도 없는 밋밋한 상상력을 보여줄 뿐이다.

‘자생적 학문담론’과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행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단행본 출판이 그려놓는 시대풍경의 측면에서다. 그가 2000년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문고판 시리즈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제1권의 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석산에겐 행운이다. 당시는 한국사회가 IMF의 지독한 펀치를 얻어맞고 겨우 일어서던 시기였다. 낙관적인 이들은 비싼 수업료를 냈다며 다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외치던 때다. 경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경제학자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이런 비판의식은 각 학문분야로 널리 퍼져 이른바 이 땅에 걸맞은 ‘자생학문’을 위한 담론화가 활발히 시작될 때였다. 우리사상연구소가 2001년부터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1~3)’(지식산업사)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말 철학하기’ 모임이 결성돼 작업한 결과물이었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탈식민적 글쓰기’ 담론이 호응을 얻어 내고 있었다. 



자생학문 담론이 무르익는 상황에서 나온 책세상문고는 ‘우리시대’라는 문제의식을 눈에 띄게 표방하며, 학문의 쓰임새를 고민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는갗(박동진), ‘우리시대의 북한철학’(선우현),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배식한),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구춘권) 등의 문제작들을 계속 쏟아냈다. 책세상문고는 출발 당시 일본의 이와나미문고나 프랑스의 끄세주처럼 문고판 르네상스를 견인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세상문고는 중반 이후로 가면서 필자발굴이 어려운데다 글을 대강대강 쓰는 학계의 풍토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문제의식과 글쓰기가 둔해지면서 그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탁석산은 속된 말로 하면 주가가 폭등한 책세상문고의 시세차익만 챙긴 후 발을 뺐다. 책세상에서도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도 말이다. 가령 그에게 강의를 들었던 어떤 이는 “일본에 관한 책을 쓴다더니 그건 언제 쓸 건지…”라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이후 그의 행보는 책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탁석산의 글짓기교실’에서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의 글쓰기 요령을 조목조목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비판이 그럴듯했다고 생각했던지 장(章)의 마지막에 표로도 정리해놓았다. ‘매일 적어도 몇 줄씩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자’는 것에 대해선 ‘메모에 불과하다’, ‘내가 잘못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자’에 대해선 ‘글쓰는 방법을 알면 불안감은 사라진다’는 식으로 비꼬았다. 서울대의 글쓰기 매뉴얼이 평범한 충고에 그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매뉴얼일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반박할 만한 매뉴얼이 얼마든지 있을텐데, 굳이 그는 ‘서울대’를 걸고 넘어진다. 서울대를 우습게 만들어야, 그래야 전략이 통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여러 번 비판받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뒤집는 것이 탁석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대 매뉴얼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관찰된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기 시작하자’는 것에 대해 ‘가장 쉬운 부분은 없다. 글은 유기체와 같은 구조이다’라고 비판해놓고선, ‘너무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보자’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규범이 존재한다. 일단 규범을 익혀야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쉬운 부분부터 쓰자’는 말이 글이 유기체라는 관념을 거스르는 건가. 결코 아닐 것이다. 글이 유기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쉬운 부분부터 쓰라는 서울대의 매뉴얼은 뭔가. 일종의 방법이자 요령이고 그것이 규범 아니겠는가. 그런데 탁석산은 서울대가 규범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듯이 비판한다. 비판에도 종류가 있다. 탁석산의 서울대 매뉴얼 비판은 한마디로 불필요한 비판이자, 비판의 장식효과를 노린 비판에 불과하다.

내면의 불신과 논증의 신뢰, 그 불협화음
사실 ‘한국의 주체성’ 등은 철학자가 가한 사회비판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공감을 얻은 부분은 딱 한가지로 보인다. 주체성을 ‘정신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닌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주체성이 생기고 강대국에 대해서 할말도 한다는 단순논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주체성을 너무 내면적인 것으로 파악해 몸은 식민지에 구속돼 있어도, 정신만 온전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윤치호 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 글에서 탁석산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높이 평가했다. 물론 여러모로 미숙하다는 단서는 달지만, 아무튼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특히 권혁범 대전대 교수가 민족과 국가에 반대하는 ‘관념적’ 태도에 잘 들어맞는다고 했다. 아니 강 교수는 권혁범 교수와는 또 다른 강단 좌파, 머리는 진보이면서 생활은 보수인 이들에게 탁석산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2000년 당시 탁석산의 이런 문제제기는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내면성에 대한 불신이 탁석산의 본래적 특징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책으로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흄은 그가 20대 초반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 책읽기에 몰두하던 시절에 읽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때 그는 흄이 매우 평이한 상식적인 문제를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논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흄을 주제로 논문을 쓰다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먹을 듯이 읽게 되고 그러다보니 흄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반박한다. 오히려 전통적 해석을 새로운 논리로 옹호한다. 흄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의 대표적 사례인 ‘무지 논증’과 ‘브로턴 논증’을 반박하고, 이 반박에 대한 반론인 자연주의적 해석에 답변을 시도한다. 탁석산은 흄이 경험을 넘어서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로턴이 대상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 얘기를 꺼내면, 탁석산은 “흄의 책을 찾아보니 어떠한 인과적 힘이 존재하여 그 힘이 결과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순환정의에 빠진다고 써있네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라는 식이다.

위에서 보듯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은 논증적이라는 것이다. 뭐랄까. 영미 분석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논술선생 같은 탁석산의 면모를 눈여겨본다. 가지를 쳐내고 논리의 핵심을 뽑아내 연관관계를 검토하는 모습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체성’의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주체성이 정신과 마음의 문제라면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가 자신을 주체적이라고 여기는 한 주체적일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옳은 지적이지만, 약소국의 지식인이 이 점을 강조하면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결국 강대국이 원하는 약소국, 말로만 주체적이고 실제로는 식민지인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우리가 약소국이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과 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소국이라도 핵을 보유한다면 강대국도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한다. 북한과 파키스탄이 좋은 예이다. 왜 우리는 핵무장을 하면 안 되는가? 나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한국의 주체성’, 79~80쪽).

문제를 넘지 못하는 문제제기의 황당함
정말 놀랍다(!)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펼쳐도 되는가. “우리가 핵에 대해서 세계 인류 차원의 평화만을 공허하게 외친다면 우리의 주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단다. 소설가 김진명하고 친구 사이인가. 그 많은 지식인들이 평화를 위해 핵을 반대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평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핵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남을 몰살시킬 수 있는 대형무기를 합법적으로 보유하며, 그것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시적 위협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의 못견딤, 미국중심의 핵질서에 대한 제3세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스탠스는 아랑곳없다. 너무 단순한 주체성의 물신화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탁석산에게 핵무장을 주장하기 전에 리영희를 읽었어야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특히 이 책의 71쪽에 나오는 “조금이라도 눈치를 덜 보고 살려면”이라는 조건절에 눈길이 간다. 탁석산에게 주체성이란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주체성의 내면성이며 내면성은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확보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모순된 연결인가.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주체성의 원초적 본능 아닌가. 원초적 본능과 내면성은 다르지 않은가. 내면성은 어떤 성찰적 이성이 개입된 각성된 마음이 아닌가. 주체성의 내면성이란 자아-타자 관계를 복잡하게 내면화한 심리상태란 말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내가 아는 한 학자는 겨울에도 집에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장(長)과 죽어도 함께 밥을 먹지 않고 그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관계를 잘라내고 복원하는 결단의 연속을 생활의 호흡으로 삼는 것이다. 웬 핵무기를 끌어들여 민감한데다가 사람마다 다른 문제를 왜소화시키고 희화화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는 “외세는 약소민족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는 있을 것이나 그의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라는 남경희 교수의 말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으나 무리가 있다”며 “역사를 종식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역사적 결정이 있나”라고 반론을 편다. 그러면서 주체성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는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면화와 동시에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참으로 괴로운 철학과 경제의 결합이다. 철학의 힘만으로는 주체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그 아포리아에 경제의 논리를 잇대어 기워나가는 것은 뭐랄까 범주의 착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경제와의 타협을 포기하고 차라리 주체성을 포기해버리는 이들은 그런 손쉬운 타협을 몰라서 안하는 것일까. 우습고 유치하고 더러워서 못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破邪現正(파사현정)이란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없애면 올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강대국 논리의 논파를 이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정파사’의 전략을 택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강대국의 논리와 의도를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마련하여 잘못된 논리와 상식을 논파하려는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서면 잘못된 논리는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탁석산의 말인즉 본인은 로드맵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오라는 말인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잘 그리는 로드맵을 보라. 그대로 따라갔다가 낭패 보길 한두 번인가. 게다가 탁석산은 언어문제, 핵문제에서 전문가도 아니지 않은가.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픽 웃고 말 허술한 논리, 살펴봐야 할 현실의 장애물들과 프로세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비전문가가 사회쟁점을 열거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현정이 안 되기 때문에 파사도 안 된다.

“교과서에 적힌 것만 역사인가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를 사다리라고 말하며 그는 그것이 ‘실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實體란 말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로 탁석산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민족주의는 이념이거나 정서이거나 하기 때문에 만지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실체가 아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현실에서 민족의 중량감은 크다. 만질 수 없지만 없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물건을 탁석산은 실체(thing)가 아닌 실재(entit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어를 바꿔 단다고 해서 민족에 대한 그의 ‘반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탁석산의 이런 논리를 ‘실체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주장을 한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인가. 과연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아니면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는가? 문화가 같으려면 정치체제, 경제구조 등의 바탕구조가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매우 상이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유재산과 이자에 대해 남한 사람만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남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핏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핏줄이란 가족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민족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핏줄로 민족을 정의하려면 사돈의 팔촌의 사돈의 팔촌으로 한없이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실체를 신봉하는 그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보니 남북한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기억’을 보지 못한다. 생활이나 습성에 스민 전통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게 남북한 사람들을 얼마나 끈질기게 묶고 있는 것인지, 황석영의 ‘손님’(창비, 2001) 정도만 읽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탁석산도 역사를 염두에 둔다.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며 이순신의 예를 든다. 북한 역사교과서에 이순신이 “양반 지주계급으로 봉권왕조에 충성해 싸웠을 뿐”이라고 해석돼 있기 때문에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는 건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겨레문학의 상징이라고 떠받드는 박지원이나 김시습 같은 이는 어떤가. 그들은 남북한 사람들에게 공히 영광스러운 유산 아닌가.

심지어 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언어마저도 같은 민족을 삼는 보편적 기준이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와 호주는 같은 영어를 쓰지만 같은 민족은 아니라고 근거를 댄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청교도와 영국이민자들이 1607년 미국에 건너와 식민지를 건설한 후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1776년까지 1백7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 미국과 영국은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은 어떤가. 한국전쟁 이후 고작 60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많이 살아있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도 많다. 기억이 완전히 분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문화의 이질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장 남북한의 경제, 정치체제를 합쳐서 단일국가로 만들자는 급진론에 대한 반론이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으로 정의하고 느끼는데 사용될 필요는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핏줄이 민족의 조건으로는 약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철학자 김용옥이 프랑스인 사위를 봤는데, 손자가 태어나면, 그리고 손자가 다시 외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면 핏줄이 흐려지지 않느냐고 한다. 그는 확실히 역사적 사고에 약하다. 그는 논리의 좌우를 따지는 데 익숙할 뿐이지 거기에 통시적 시각을 부여하는 데는 서투른 것이다. 그 손자가 태어나고 다시 결혼해 애를 낳으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리지 않을까. 요즘 같은 담론의 민주화 시대에 30년이라는 시간은 바뀐 현실을 따라가며 민족의 배타적 테두리의 어느 한 부분을 헐어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지 않을까.

“민족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개인의 삶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는 말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가령 명확한 사례를 보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억압받는 건 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탁석산이 좋아하는 국민 혹은 시민의 여건을 갖추지 못해서일까. 나는 국가장치가 그들을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적 편견은 홀리건들이 득세하는 유럽이나 러시아보다 그리 심하지 않고, 소수 민족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는 대체적으로 호혜적으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과 온갖 미디어들이 이 세상 곳곳을 대명천지처럼 비추는 시대에, 그것도 그 나라의 3D 업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생활필수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밀어내서야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차원에서 동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민족이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스포츠민족주의(월드컵), 영토민족주의(독도·간도) 등이 시끄럽고 귀찮으면 귀찮았지 억압은 확실히 ‘오버’다.  

고정관념 깨는 맛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엘리트주의
탁석산에게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오래된 습성이 있다. 이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다가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에서 “태어나니 역사적 사명이 기다린 것이지,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은 아닌데”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타고난 자질 같다. 탁석산을 읽으며 불편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형 글쓰기다. 물론 문제제기형 글쓰기는 중요하지만, 결과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탁석산의 문제제기는 문제를 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민족이 내용 없는 형식적 구호일 뿐이라는 식의 극단적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는 “무엇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거짓말을 하거나 별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본심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철학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퍼져있다. “내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철학”이라는 단순화는 보통 철학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책들에 퍼져있다.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도 그렇게 시작한다. 왜 지식인은 대중에 대응하는가. ‘대중의 발견’. ‘철학이 대중과 멀다는 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멀 수밖에 없는데, 철학은 성찰적이고 더딘 것이고 괴로운 사유의 길인데, 거기 대중이 다 참여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조선시대에 철학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 시대엔 양반이면 누구나 철학자연 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계급이 없어진 요즘은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면 된다. 사실 철학과가 너무 많고,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사회가 그 공급을 다 수요하지 못하는 것이지, 철학의 위기라는 말은 냉정히 보면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를 모르는 미련한 소리인 것 같다.  

아무튼 누구나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철학하는 이들은 철학적 감수성이 없는 이들의 질시와 투정을 받아줘야 한다. 본인이 설 곳을 모르고 대중사회로 내려와 영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이란 얼마나 영악한가. 나는 이 철학의 대중화를 앞에서 어려운 척 자기들끼리의 언어놀음에 빠져있는 학자들을 향해 교양주의라고 비판하는 탁석산이야말로 일종의 교양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자가 자신의 내공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누구나 관심있는 문제를, 누구나 아는 용어를 사용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롭고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교양의 신봉자다. 나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관심 없는 문제를 그래도 한번쯤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사유해서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석산은 핵문제 같은 누구나 아는 문제에 대해 쉽게 풀어내지도, 탁견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극우적이고 순진한” 발상을 했을 뿐이다. 탁석산은 또 말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특징인데 사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이지 옛날 철학자들의 사유가 아니다. 물론 같은 문제를 사유하다보면 앞선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사유를 튼튼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이고 훈련과정일 뿐이다.”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하는 교과서적인 소리이고 개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행어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철학사에 파묻혀 제대로 훈련하려면 10년은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다. 10년이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생이다.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현장이고 사유가 꽃피는 순간이다. 탁석산 같은 이들은 사유의 과정을 분절화하고 세밀하게 흐름화하여 그 속의 소리와 이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내 힘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막막하게 가부좌만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는 것이고, 유교에서는 계속 자세를 바르게 하여 읽고 또 읽고 그대로 따라서 생활하다보면 언젠가 깨닫는바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읽기와 쓰기의 무수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교환, 피곤과 절망의 뒤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아이디어, 대책 없는 분노와 용기에서 내질러진 비명과도 같은 말들, 이 말들이 몇번씩 부딪혀 곤죽이 되어야 그 곤죽이 길에 비로소 길을 낸다. 제대로 된 말은 자기 생각의 시체들을 깔고 흘러가기 시작한다.

열정만 있다면 재미있고도 어려운 철학책은 많다
탁석산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는 조금만 신경 쓰면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전을 버리라는 말을 경전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로 고쳐 읽으면 그나마 말은 된다. 그것도 겨우 된다. 하나마나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초심자들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읽기 전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보라고 한다. 그는 글쓰기 책에서 “어느 정도 규범을 알아야 그 때부터 글이 써진다”고 하더니 생각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생각이 글쓰기보다 더 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생각과 글을 따로 따로 보는 것일까. 그의 말은 이렇듯 종잡을 수가 없다.

철학 깨나 했다는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철학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타자화하는 것이다. “철학책이 수면제 외에는 쓸 데가 없으므로 철학 소비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적 현실이라고 제시해놓은 게, 오히려 현실을 크게 왜곡하는 경우이다. 요즘의 독자들은 약간만 지루해도 잠들어버린다. 문학이라고 과학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심지어 책은 재미있어도 읽다 보면 잠이 온다. 그게 책이다. 책은 잠과 서로 침투하는 공생관계다. 책의 수면제 역할은 책이 책 고유의 역할 너머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매체적 수명을 연장해온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현행 ‘철학=수면제’라는 인식을 폭력적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는 근대경험론(흄)을 전공하고 거기에서 양식을 구하는 사람이다. 경험한 것 이외의 것들은 아예 취급도 안하는 곳이 근대경험론이다. 그가 사회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찬반의견을 많이 표출하는 것도 바로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탁석산의 현실주의와 솔직함은 모두 경험과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의 이치가 안보이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흄이 그랬다고 탁석산이 말하지 않았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他者)를 보지 못하는 걸 가리켜 독아론(獨我論)이라고 불렀다. 탁석산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유하고 말 걸고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서는 경험론의 자리에 멈추어 있다. 그의 계속되는 독서와 현실관찰이 철학적 태도의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강성민 학술평론가) 

08. 12. 24.  

P.S. 한국인의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본론보다 내가 흥미를 갖는 대목은 부록격의 '특강'이다(한국문화론이라면 이어령, 강준만, 정수복 등의 책과 비교해봄 직하다). '불교와 주자학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이 사실은 내가 이 책에서 읽고 싶었던 부분이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더불어 불교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 왜 그런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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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4 18:06   좋아요 0 | URL
^^ 재밌는 글입니다. 그의 견해에 언제나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하는 철학자죠. 그래서 좋아합니다.

로쟈 2008-12-25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조금 읽은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한데, 충분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주장들도 자주 나오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정도면 약한데요...

쉽싸리 2008-12-25 00:18   좋아요 0 | URL
크라이스트의 이브가 지났네요.
로쟈님의 종교는? 궁금^^


탁선생이 전에 "TV 책을 말하다" 진행할때, 어? 어색, 참신, 경직?? 이정도 느낌이 들었드랬습니다.
저의 단편적인 사고로는 (사정은 누구나 있겠지만/그러므로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하겠지만)박사를 따면 강의를(교수건 강사건)해야하지 않나요? 안할 수도 있겠지요, 못 할수도 있겠지요,박봉이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학문의 기본?이 그렇지않느냐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와우!!(주님 영접하느라 UP 되어있습니다)66

로쟈 2008-12-25 00:21   좋아요 0 | URL
성탄절이라고 특별한 감회를 갖지는 않고요, 다만 아이의 선물 '궁리'나 하는 편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예수나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괜히 들춰보긴 하지요.^^;

2008-12-25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rori 2008-12-25 11:39   좋아요 0 | URL
탁석산의 탁상(산)공론인지 탁석산 까기의 탁상공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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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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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필자가 매우 화가 난 상태로 글 썼다는 걸 알았어요.
철학이 실용적인 학문은 아닌데.. (필자가)독단적 철학 숭상주의 같아요. 고전= '진리' 라고 말하는 거 같고요. 필자가 좀 편파적이네요.
그래서 제 결론은 둘 다 탁상(산) 공론. 둘 다 비생산적인 글을 배설하는 듯.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사감도 좀 들어가 있다고 봐야죠..

porori 2008-12-25 11:42   좋아요 0 | URL
만약 영화감독 Jean Luc Godard가 이글을 봤다면 그나마 탁석산을 옹호할 듯.

yoonakim 2008-12-26 00:48   좋아요 0 | URL
전 속이 다 시원한대요..수년전에 대학원 총학에서 '한국의 주체성','한국의 정체성' 책이 바로 나왔을때 초청강연을 하는것을 본적이 있어요. 그 이후 그분의 책을 관심있게 본적이 없네요..ㅎㅎ..근데 참 많이 나왔네요..그런데 학술평론가...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원래 학술담당 기자였습니다. '학술평론'이라고만 돼 있는데, 제가 '가'를 더 붙였어요...
 

"톨스토이가 추리소설을 썼다면 바로 이런 소설일 것이다."란 평을 듣는 작가가 있다. 단연 최고의 추리소설가란 얘기겠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아쿠닌이 바로 추리소설의 '톨스토이'이고(그는 러시아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주인공 에라스트 판도린이 말하자면 러시아판 '셜록 홈즈'이다. 아쿠닌의 소설 두 편이 번역돼 나왔다. 추리소설의 독자나 러시아문학 애호가에게는 마치 연말 보너스 같은 책이다.   

합뉴스(08. 12. 22) '러시아의 셜록 홈즈' 탐정 판도린의 모험

러시아의 인기 추리소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의 대표작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아자젤의 음모'와 '리바이어던 살인'(황금가지 펴냄)은 러시아에서만 1천200만부 이상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인 '에라스트 판도린'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이다.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젊고 매력적인 수사관 에라스트 판도린이 치밀한 두뇌 싸움으로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아자젤의 음모'에서는 수사과에서 갓 근무하기 시작한 하급 관리 판도린을 처음 등장시킨다. 1876년 모스크바의 한 공원에서 스물셋의 젊은 청년 하나가 벤치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를 희롱하다가 보란듯이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한다. 사건을 맡은 판도린은 숨진 청년이 한 매력적인 젊은 여인에게 빠져 친구와 목숨을 건 내기를 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려는 순간 정체불명의 자객이 판도린에게 남긴 '아자젤'이라는 한 마디는 사건의 배후에 더 거대한 음모가 있음을 암시한다.

'아자젤의 음모'가 모스크바와 파리, 런던을 넘나들며 역동적으로 펼쳐진다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리바이어던 살인'은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다. 파리의 유명한 수집가 리틀비 경의 집에서 리틀비 경을 포함해 10명의 사람들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리틀비 경의 손에서 발견된 배지를 단서로 찾아간 고급 여객선 리바이어던 호에서 또다른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번역에 참여한 이항재 단국대 교수는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무거움'을 떠올리는 한국의 독자들,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서 러시아 문학에 대한 그들의 고정된 시각을 조금이라고 변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미혜기자)

08. 12. 23.

Борис Акунин АзазельБорис Акунин `Левиафан`

P.S. 러시아어본의 표지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둘다 그냥 <아자젤>과 <리바이어던>(<레비아탄>)이다. 한편, <아자젤>은 지난 2003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영화의 한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t3ESN21Vzd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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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2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련 시절에도 추리소설이 있었나요? 사회주의 국가는 추리소설이 발달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로쟈 2008-12-25 00:24   좋아요 0 | URL
대학 강의에선 보통 장르소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과문할 수도 있지만, 소련 시절의 추리소설은 저도 못 들어봤습니다. '범죄'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가 아니었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앵글로 색슨 문화에서 추리소설이 발달한다고 하니까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로쟈 2008-12-25 21:28   좋아요 0 | URL
많이 하는 얘기로 법질서가 '안정된' 사회에서 추리문학이 읽힌다잖아요. 소련에는 '공식적으로' 매춘도 없는 사회였기 때문에 '범죄'를 다룬 문학이 나올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쿨리나 2009-01-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비에트 초기 추리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해요. 러시아(소련)가 나름대로 추리소설의 긴 역사를 가진 유럽국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최근에 번역된 <러시아의 민중문화>(스타이츠)에 좋은 정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지난달인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본 <앤티크> 같은 영화가(고급 케이크가 잔뜩 나오는 영화다) 취향에 맞지 않는 건 그런 때문이다(영화를 보며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졸기도 했다). 굳이 안 볼 이유까지는 없지만 <식객> 같은 영화도, 드라마도 나는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책의 바다'에서 매일같이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요리책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요리책만큼 눈밖에 나 있는 책은 처세서 정도다).

갑자기 '서론'을 늘어놓은 건 그런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요리책이 있기 때문이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 제목이 좀 특이한데, 저자는 MFK 피셔이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그래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제목에서 '늑대'는 '굶주림과 가난'을 뜻한다고 하므로 풀어서 말하자면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이다(우리말로는 <쥐를 요리하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사람도 눈길을 끌게 만드는 이 흥미로운 책을 소개해준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빨리 번역되면 좋겠다(저자의 다른 몇몇 책들도 입맛을 돋군다)...   

 

한겨레(08. 12. 23)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주로 저녁식사들인데, 다양한 사람들과 시리즈로 저녁을 먹다 보면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꽤 드라마틱하게 체험할 수 있다. 왜 달라지는지 이유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상대방이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절실함이 한몫한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의 부족함이 주는 음식에 대한 흥분감이란 게 별로 없고 심지어 권태감마저 느낄 수 있다. 달걀이 귀할 때 먹던 삶은 달걀의 맛과 요즘 느끼는 맛이 같을 수 없듯이, 음식에 대한 기본적 ‘허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읽는 책 중에 MFK 피셔가 쓴 <늑대를 요리하는 법>(사진)이란 책이 있다. 전쟁으로 궁핍할 무렵인 1942년 나온 책이라 더 감칠맛 나게 읽힌다. 미국에서 쓰는 표현 중에 “늑대가 문간에 들이닥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늑대란 굶주림과 가난을 뜻하는데, 늑대를 제목의 일부로 사용한 이 책은 곤궁한 시대에 먹고사는 일을 은유 삼는 문학적 요리책이자 특별한 음식 에세이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쟁 중이라 설탕과 버터를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던 젊은 주부들이 모여앉아 어떻게 설탕과 버터를 거의 쓰지 않고 케이크를 만드는지 서로 묘안을 자랑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피셔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을 전쟁통 예산으로 아껴가며 살아왔다. 부엌에서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 어려울 때나 스타일리시해진다는 건 이제야 알았구나.”

전후 미국엔 풍요와 잉여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게 배어버렸다. 음식도 부족함을 아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걸 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건 뭔가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결핍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갈 때 생기는 즐거움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피셔 할머니의 말씀처럼 가난은 가난할 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 속에 항상 있는(혹은 있어야 하는) 가난과 결핍을 ‘어떤 스타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늑대’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맛있고 아름답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창조적 경제 운용은 훌륭함을 낳는 연료가 된다”고 했다. 더하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 꼭 창조적인 건 아니다. 있던 것을 빼고 모자람을 즐기는 것 또한 멋지고 흥미로운 삶을 사는 한 방법일 수 있다.(박상미/화가·작가)

08. 12. 22.

P.S. 안 그래도 요즘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 부르디외가 편집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 시리즈다. 세계의 비참을 말해주는 방대한 사례집인데, 부르디외와의 대담에서 귄터 그라스는 모든 나라가 이런 책을 한권씩 갖게 된다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동감이다(내기로만 한다면 어디 한 권뿐이겠는가!). '늑대를 요리하는 법'의 재료로서 더할 나위가 없지 않나 싶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비참'과 유사한 컨셉의 책으론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미래>(삶이보이는창, 2006)가 있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의 책들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겠다.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에 맞추자면, 이거 무지하게 식욕을 돋구는 책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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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3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otzky 2008-12-23 02:27   좋아요 0 | URL
읽어야 할 넘들은 쌓이고 쌓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고 눈앞에 쌓아두고 "언젠가는 읽고 말꼬야~~!" 하는 넘들의 리스트를 쌓아올리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군요.

로쟈 2008-12-23 09:12   좋아요 0 | URL
그 도움이 고민거리가 되진 않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