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타계 120주년을 맞아 사이먼 스톤 연출, 전도연 주연의 <벚꽃동산>이 막을 올렸다.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한 버전이라고 한다(연출과 연기는 기대를 모으지만 각색은 염려된다). 알라딘 플랫폼(이라는 걸 나는 이번에 알았다) '투비컨티뉴드'에서 이번 공연을 관람할 독자들을 위해 원작 번역 전재 코너를 마련했다. 거기에 보태 실을 리뷰를 옮겨놓는다. 예전에 쓴 리뷰를 조금 보강한 글이다(출처는 https://tobe.aladin.co.kr/n/201309). 
















<벚꽃동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낡은 시대, 낡은 삶과의 작별을 통해서다. 그렇지만 이 작별은 순간의 의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교체, 혹은 이행은 일련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안톤 체호프의 '문학적 유언'으로 간주되는 마지막 장막극 <벚꽃동산>(1904)이 이러한 이행기의 문제와 과제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처음 무대에 올려진 시기가 러시아 역사의 과도기였고 작품의 줄거리도 벚꽃동산의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다. 



작가가 ‘4막 코미디’로 부른 이 작품에서 주요 배역은 각각 두 계급을 대표한다. 지주(귀족) 계급의 대표로는 라네프스카야와 그녀의 오빠 가예프가 있다. 선량하지만 세상의 물정에는 너무 둔감하며 게다가 게으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속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무위와 허영의 삶을 살아왔다. 점차 재산을 탕진하고 채무가 늘어가는 바람에 가장 아끼던 벚꽃동산마저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막연히 친척의 도움만을 기대한다.

연극은 아들을 잃고 5년간 외국(주로 파리)에서 생활하던 라네프스카야가 러시아의 영지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 가운데 상인 로파힌이 또 다른 계급의 대표자다. 아버지가 라네프스카야 집안의 농노였기에 스스로 농부라고 칭하지만 로파힌은 수완을 발휘해 재력가가 되었다. 전통적인 지주 귀족계급과 대비해 새롭게 부상한 중간계급(상인 자본가)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하지만 현실의 물정에 대해서는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로파힌의 계급적 위치는 실제로 농노 출신의 상인 아버지를 두었던 체호프를 떠올리게 한다. 농노였던 체호프의 조부는 농노해방(1861)이 단행되기 이전인 1841년 지주에게 돈을 지불하고서 가족과 함께 자유를 얻는다. 조부와 함께 농노 신분에서 벗어난 아버지는 1856년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상인으로 신분상승하게 되고, 1860년 체호프가 그의 3남으로 태어난다. 러시아에서는 성직자와 의사, 상인 등을 묶어서 '잡계급'이라고 불렀는데, 잡화상의 아들이었던 체호프는 대표적인 잡계급 출신 작가다. 

체호프가 살았던 시대는 바야흐로 구시대적 질서가 무너지고 지주계급이 몰락해가던 때였다. 서유럽을 시발점으로 한 근대적 사회 변화는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의 과정이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표적 '반동의 제국'으로서 이러한 변화에 미온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었지만 크림전쟁(1853-1856)에서 패배하면서 결국은 변화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농노해방은 그 출발점이었다. 그와 함께 농노제를 기반으로 했던 러시아의 사회경제구조는 해체된다. 체호프의 작품들에게 대부분의 지주들이 몰락하는 계급으로 묘사되는 이유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가라앉거나 변화의 대세를 수용하고 변신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단순하게 보면 <벚꽃동산>은 계급 간의 교체과정을 다룬 작품이지만 체호프는 그 과정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독특하다는 것은 이중적이기 때문인데 사회적 위치에 있어서 체호프는 로파힌과 동일시될 수 있지만 벚꽃동산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는 라네프스카야와 가깝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체호프는 작가로서 어렵사리 성공을 거둔 뒤에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보를 영지로 구입한 지주이기도 했다(영지에 대한 로망!). 1892년, 서른 두살의 나이 때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벚꽃동산>에서 서로 다른 계급을 대표하는 라네프스카야와 로파힌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더불어 그 교체과정도 일방적인 승패로 제시되지 않는다.

비록 가예프에게는 “천박한 구두쇠”라고 조롱받지만 로파힌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라네프스카야를 곤경에서 구해주고자 한다. 그의 제안은 벚꽃동산은 별장지로 분할하여 임대하면 꽤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채무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벚꽃동산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긴 하지만 '버찌나무 밭'으로서는 경제적인 이익을 낳지 못한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버찌는 판로도 없다. 파산 직전에 놓인 라네프스카야 남매로서는 귀담아 들어볼 만한 제안이지만 이들은 수용하지 않는다. 임대사업을 위해 아름다운 동산의 벚나무를 베어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로파힌이 보기에 이들은 “경솔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사람들”이다.

결국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아 라네프스카야 남매의 벚꽃동산은 경매에 부쳐지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로파힌이 새 주인이 된다. 벚꽃동산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확장해서 보면 러시아 사회의 지배계급이 교체된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는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체호프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로파힌은 벚꽃동산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가련하고 착한 부인’ 라네프스카야가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은 것을 원망한다. 그래서 희희낙락하기보다는 모든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 로파힌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성실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교양이 부족하고 사랑에는 숙맥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직 제대로 된 주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벨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는 귀족 계급의 사교계가 서서히 와해되고 부르주아들이 부상하는 과정을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함께 묘사한다. 동일한 사회변화의 과정을 다룬 드라마로 읽을 때 체호프의 <벚꽃동산>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프루스트의 주인공 마르셸이 예술가적 역량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결국 되찾는 데 반해서 <벚꽃동산>에서는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작품의 결말에서 벚꽃동산의 새 주인 로파힌은 벚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내고 별장지로 만들 참이다. 이러한 러시아 과도기의 사회적 풍경을 체호프는 애조 띤 ‘코미디’로 그려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헝가리 국민시인 두 명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헝가리 어순대로 적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이름순이다. 헝가리어 인명은 실제 어순과 영어식 어순이 섞여서 소개되고 있어서 소위 '뒤죽박죽'이다. 성으로 부르자면 '페퇴피'와 '요제프'다). 우리에겐 좀 생소하지만 헝가리의 위대한 시인들로 손꼽힌다. 헝가리문학 강의를 일년째 진행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근감이 들어서 이 시인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적는다. 


















먼저 19세기 시인 페퇴피 산도르(1823-1849)는 26세의 짧은 생을 살았던 헝가리 '민족시인'이다. 지난해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를 기념한 시집이 최근 번역돼 나왔다. 일러스트판 으로 나온 서사시 <용사 야노시>다(헝가리 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출간됐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서사시로 보이는데,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제작됐다 한다. 요컨대 헝가리 '국민문학'에 해당하는 작품. 앞서 <민족의 노래><올가미>(절판)도 번역됐다(는 걸 알고서 <민족의 노래>는 이번에 주문했다. 같은 역자가 옮긴 어디 엔드레의 시집 <모든 비밀의 시>와 함께) <용사 야노시>의 일러스트로 들어간 건 처코 페렌츠의 샌드 아트 작품이다. 


 















32세에 생을 마친 요제프 어틸러(1905-1937)도 페퇴피와 마찬가지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대표적 민중시인으로 기억되기에는 충분한 작품을 남겼다. 최근 <세상에 나가면 일곱번 태어나라>가 다시 출간돼('아틸라 요제프 시집'으로 표기됐다), 앞서 나온 <너무 아프다>와 함께 '한국어 요제프 어틸러'가 갖추어졌다. 헝가리어에서 옮겨진 <용사 야노시>와 다르게 <세상에 나가면 일곱번 태어나라>는 영어판의 중역본이다(<너무 아프다>는 헝가리어 번역). 공진호 번역가의 번역본으로 심보선 시인이 해설을 붙였다. 


헝가리문학 강의에서 주로 소설들을 읽고 있기에 헝가리 시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들이 요긴한 참고가 될 듯싶다. 일별해보고 강의에서도 소개하려 한다. 아래는 왼쪽이 요제프 어틸러, 오른쪽이 페퇴피 산도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보르헤스에게 보내는 손택의 편지

9년 전 페이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최강의 독재자소설

6년 전 페이퍼다. 그 사이 카르펜티에르의 책은 번역돼 나왔다. 독재화 진행중(이면서 저지중)인 나라에 살다보니 독재자 소설들에 다시금 눈길을 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