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몇 년전부터 예고돼 온 그리스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난주에 1차분 세 권이 출간됐고, 나는 그 중 한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이다. 수고한 역자들(정암학당 연구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마침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문자 그대로 접수하지는 않더라도 이 서양철학의 '시초'에 대해서 그간에 우리말로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래저래 갑갑한 노릇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가져도 좋을 법한데, 사실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움직이는 지경을 거쳐서 '말문'이 트이는 경지까지는 아직도 장구한 여정을 남겨놓은 듯하다. 구두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이제 각주도 제대로 달아가면서... 

경향신문(07. 04. 17) 그리스어 원전 ‘플라톤 번역판’ 나왔다

다들 알지만 제대로 읽지 못한, 아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서양철학의 주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이 그러하다.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정암학당에서 지난 13일 연구원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창연, 김재홍, 정준영, 김주일 연구원. 박재찬기자

때문에 지난주 나온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1차분 ‘뤼시스(강철웅 옮김)’ ‘알키비아데스 I·II(김주일·정준영 옮김)’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의 출간은 반갑고 값지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 원전을 저본으로 하여 정암학당을 중심으로 뭉친 국내 학자들이 오랜 기간의 세미나와 연구를 바탕으로 펴낸 플라톤 번역서다.

앞으로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위서를 포함해 플라톤의 저작 43편이 5년간 순차적으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이는 정암학당 김재홍 박사의 말대로 “한국 인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 유입된 것이 길게 잡아봤자 1세기가 안됩니다. 그간 늘 일본어 혹은 영어로 된 번역본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지요. 텍스트로 삼을 한글 번역본도 없었고, 상호검증하기도 어려워 서양고대철학사 연구가 사상누각인 상태였지요.”



플라톤 역주사업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2000년 설립한 정암학당에서 주도하고 있다. 20여명에 달하는 연구원들은 철학을 전공한 석·박사들로 지난 7년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저작들을 읽어왔다. 이들은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아’의 교수법처럼, 그리스어 원전과 발제자가 준비해온 한글 번역문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엄격한 토론을 통해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독자 대상은 고교생 이상으로 삼았다. 이정호 교수는 “총기 있는 고등학생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정암학당 정준영 연구원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전문용어가 아니라 당시의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지요. 철학적 사고의 밑바탕이 되는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역자들은 최대한 쉽고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데 역점을 뒀다. 동시에 작품 해설과 주석에 신경써 전문연구자들을 배려했다. 실제로 ‘뤼시스’ 편을 보면 에로스와 필로스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을 뜻하지만 육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와 상호성을 기반으로 사랑·우정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의 필로스를 구분하기 위해 역자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석을 달아 설명을 더했다.

숱한 토론을 거치며 뜻을 다듬었지만 정리는 역자의 몫. 이 과정에서 번역어의 선택이나 복잡한 그리스어 문법에 맞춰 의미를 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교생 독자 수준으로 맞추려고 하는데 번역투의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리스어의 의미를 살리려고 하다보면 우리말 같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우리말에 맞추다보면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더라고요. 그 중도를 가는 게 어려웠습니다.”(김주일 연구원)



플라톤 전집은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부터 출간된다. ‘뤼시스’는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라는 청년의 대화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크리티아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로 이상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자들은 인문학 연구의 1차 자료가 되는 원전번역이 활발한 해외의 사례를 부러워하면서 “앞으로 이 전집이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윤민용기자)

07. 04. 16.

Платон. Избранное

P.S. 참고로, 러시아어 플라톤은 3권 짜리 전집 외에 다양한 형태의 선집들이 출간돼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 중 <국가> 등이 포함된 책과 15개의 대화편이 수록된 저럼한 선집 등이다(비교적 널리 알려진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이번에 나온 국역본 대화편들 가운데서 <뤼시스>와 <알키비아데스>는 빠져 있다).

Наследники Платона 

관련서들을 검색하다 보니까 존 딜론의 <플라톤의 유산>(2005) 번역본이 눈에 띈다. 원서는 2003년에 나왔고 250여쪽이니까 만만한 분량이다(원제는 'The Heirs of Plato: A Study of the Old Academy (347-274 BC)' 그러니까 플라톤의 제자들 얘기인 듯). 러시아어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인정받는 책인 듯하다.

플라톤 전집도 출간되는 김에 우리의 독자적 시각에 따른 연구/주석서들도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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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6 23:12   좋아요 0 | URL
지난주 교보에 깔렸더군요. 저도 한 권만 택한다면 <뤼시스>. :D

biosculp 2007-04-16 23:20   좋아요 0 | URL
깔리자 마자 3권 다 구입했는데, 가독성은 좋더군요.
제일 좋은것은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들고,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길때 그리고 꽉 잡을 때 뽀드득 소리가 첫눈 밟는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로쟈 2007-04-16 23:24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알키비아데스>를 먼저 골랐습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때문에...
biosculp님/ 서평은 좀 기다려봐야겠지만, 고전 번역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면 좋겠네요...

나비80 2007-04-16 23:31   좋아요 0 | URL
<국가-정체>만 아주 예전에 통독해둔 형편이라 욕심이 생깁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 진득하니 입원하기 전에는 읽기 힘들다는 자조섞인 농담들도 하더라구요. 이것도 로쟈 님 페이퍼에서 본 말인것 같기도 하고. ^^

2007-04-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7 01:20   좋아요 0 | URL
**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제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네요.^^;

자꾸때리다 2007-04-17 06:35   좋아요 0 | URL
호옷 나왔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1:00   좋아요 0 | URL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라는 평가는 서광사에서 나온 박종현 등의 번역에도 해당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마늘빵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오홋. 이런 것두. 음...

biosculp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기자가 확인안하고 쓴것 같군요. 지금 원전 번역된것이 박종현번역본들과
한길사에서 나온 소피스테스, 정치가(김태경역), 철학과 현실사에서 나온 송영진번역의 파르메니데스(책이름은 플라톤의 변증법), 문지에서 나온 향연등이 있을텐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2:28   좋아요 0 | URL
biosculp / 한겨례 서평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국가〉를 비롯해 그의 저작 몇 편이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파편적·단속적이었을뿐더러 대개는 일어판의 중역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2870.html

로쟈 2007-04-17 15:01   좋아요 0 | URL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 전무했던 건 물론 아니지요. 몇 권 나와있습니다. 이번 '전집'의 차별성을 좀 내세우려다가 보니까 약간 오버성 멘트가 들어간 듯한데, 저는 '전집'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언제 다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biosculp 2007-04-19 18:44   좋아요 0 | URL
정암학당 운영자가 쓴 글인데요.
"전집 출간과 관련한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 중 학당 전집 출간이전에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본이 없는 양 보도 된 것은 전혀 잘못된 사실입니다. 발간사에서 밝힌 것 처럼 이미 우리나라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박종현 선생님 등의 노력으로 상당수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성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전집 발간계획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대화편들의 원전 역본 출간 자체가 처음인 것으로 기자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학당에서는 해당 일부 언론에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로쟈 2007-04-19 19:07   좋아요 0 | URL
역시나 기자들의 '게으름'이 문제였군요...
 

주말이면 밀린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교차하면서 여러 변이적인 일들까지 생산해낸다. '고립'을 자초하기 위해 도서관에 나가기 전에 그런 일들 몇 가지를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이 또한 시간과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이지만). 어제 충무로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지역서점에서 두 권의 책을 사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먼드 마리 르로이의 <돌연변이>(해나무, 2006)이다. 거의 기억에 없는 책인 것으로 보아 어떤 이유에서든 출간 당시에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모양이다(한겨레의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42947.html).

 

 

 

 

'유전적 변이와 인체의 형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표지의 글이 선동적이다. "너 자신을 알라. 병리학적으로 네가 얼마나 연약한 거품인지를." 그런 문구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끄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유전적/신체적 조건으로 태어나는 돌연변이들을 추적, 소개한 책이다. 눈을 하나만 가지고 태어난 기형아, 얼굴 전체에 털이 뒤덮인 다모증 가족, 외관상으로는 여성이지만 사춘기가 되어서야 자신이 남성임을 깨달은 자웅동체의 수도원 여인 등등, 지난 역사상 등장한 기이한 돌연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지은이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인체의 형성 과정의 신비이다.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은 주로 자궁 안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고, 유전자 정보가 서로 엉키고 뼈와 살이 생겨나는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날 때부터 건강에 해를 줄 수 있는 돌연변이를 평균적으로 300개 정도씩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즉 돌연변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도 돌연변이다!'가 되는 것이다.

어제 본 영화 <데리다>에서도 데리다의 가족이 '재키'(자크 데리다의 애칭이다)에게 가졌던 놀라움이  큰형인 르네 데리다의 입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데, 전혀 지적이지 않은 집안에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배출된 것에 대해 그는 '커다란 수수께끼'란 말로 표현했다. 비록 어머니가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철학쪽과는 무관한 책들이었고 아들의 책을 그녀는 한권도 읽지 않았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다(나중에 가족들은 모두 데리다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유명한 철학자가 된 것인지 경이로워했다). 그야말로 철학의 '철'자도 들어있지 않은 집안의 돌연변이가 데리다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체적 형질뿐만 아리라 지성(지적 능력)에 있어서도 '돌연변이'라는 게 엄존하는 듯싶다.

'개의 심장'을 가진 합성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불가코프의 소설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의 표현을 약간 비틀어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대단한 지성의 여성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우리 모두가 차여해야 하고 우리 모두가 패배하는 우연성의 게임"이기 때문이다(불가코프의 소설은 이것이 사회공학에 함축하는 바를 따져묻고 있는 풍자소설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다. 돌연변이로서의 인간.

르로이의 <돌연변이>보다 1년 늦게 나왔지만 국내에는 1년 먼저 소개된 에른스트 피셔의 <인간>(들녘, 2005)에도 <돌연변이>의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인간의 탄생과정은 경이롭지만 몹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한 위험은 부모와 의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이제는 유전학자들도 그 위험성을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유전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새로 만들어지는 배아의 게놈에는 부모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수백 가지의 변형(돌연변이)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돌연변이 대부분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 중 몇 가지는(아마도 세 가지나 네 가지는) 단백질(효소)의 작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돌연변이를 겪는다. 그러므로 돌연변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모두 돌연변이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르로이는 2004년에 출간된 <돌연변이>에서 이런 사실을 지적했다."(189쪽)

책이 '돌연변이 사례집' 정도였다면 굳이 손에 들지 않았을 텐데, 젊은 진화생물학자의 이 첫번째 책에 대한 호평들이 결국엔 마음을 움직였다. 결정적이었던 건 바로 뒷표지에 씌어진 매트 리들리와 리처드 포티의 추천사.

"겉보기에 기괴하거나 뒤틀린,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괴물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인체의 성장에 유전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르로이는 역사와 최신 유전공학을 세심하게 연구하여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가 <게놈>, <본성과 양육> 등의 저자 매트 리들리의 추천사이고, "<돌연변이>이는 최신 발생생물학과 유전공학을 통하여 인체의 경이를 과학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비정상은 정상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돌연변이는 성장과 발생의 미묘함과 경이로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르로이는 아주 훌륭한 작품을 일궈냈다."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 <생명> 등의 저자 리처드 포티의 추천사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주로 친구 따라 강남가는 편이다...

07. 04. 15.

P.S. 나는 집안에서 유일한 '도서애호증' 환자이다. 더불어 철학서들의 유일한 독자이다. 아마도 나의 '돌연변이성'은 그런 데 있는 듯싶다. 더불어, 내성적인 성격에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 아빠와 달리 모든 '발표'에 열성적인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간혹 "얘는 도대체 누굴 닮은 것일까?"를 궁금해 하는데, 그러한 '돌연변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되겠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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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5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5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5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5 22:33   좋아요 0 | URL
m님/ 일부러 미리 공지하지 않은 건데요.^^; 그리고 목요일엔 선약이 있습니다. 5월 중순에 한번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h님/ 참고하겠습니다.^^
움님/ '돌연변이의 확장형'이라고 이름붙이겠습니다.^^

2007-08-09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권의  평론집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강유정의 <오이디푸스의 숲>(문학과지성사, 2007)과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창비, 2007)이 그 나란한 책의 이름들이다. 연배상으로는 10년 터울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나온 책이 첫 평론집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강유정씨는 데뷔 2년만에, 그리고 유희석씨는 데뷔 10년만에 그간에 발표한(혹은 미발표한) 글들을 모아펴냈다. 비평적 지향과 입지는 다르더라도 한 언론의 표현을 빌면, '젊은 피'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보게 만든다(유희석씨는 40대의 나이이지만 창비쪽 스타일을 고려하면 '젊은 피'란 표현이 무색하진 않다).

먼저, <오이디푸스의 숲>은 "2005년 데뷔 후 문학과 영화, 문화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평론가 강유정의 첫 비평집이다. 지난 2년간의 활동 중 한국 문학의 흐름과 작가론을 중심으로 한 20여 편의 글을 묶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재작년 신춘문예 3관왕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단했고(관련기사는 http://www.korea.ac.kr/webzine/KF4S02T02F00-view.jsp?idx=209783&page=3&search1=&search2=) 이후에 주목받는 만큼이나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다.  

개인적으로 2005년 2월 1년간의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한 모임자리에서 처음으로 '강유정'이란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들었었다. 마치 '살아있는 전설'처럼. 외지에 있었던지라 내가 체감할 수 없었던 '경악'을 그이들은 연초에 경험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각인된 '강유정'이란 이름은 개인적으로 '장윤정' '채연' 등 연예인들의 이름과 나란하다. 모두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스타가 된 이름들이다(나는 공항에서 딸아이가 '어머나'를 흥얼거리는 걸 들었고, 집에 와서 TV를 틀어보니 '채연'이란 이름의 생소한 가수가 춤추고 있었다). 차이라면, 두 연예인과는 달리 비평가는 잠시의 휴지기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진군하고 있다는 것. 그의 비평 속에서 '문학의 위기'는 그저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네 부로 나누어진 이 비평집에서 저자는 "2000년대 문학, 그 새로움을 향한 깊은 애정과 기대 뿐 아니라 사뭇 예리한 시선으로 동시대 문학의 현실을 꼬집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다."고 소개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근황이 궁금한 독자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명석하고 유창한 화법의 가이드와 함께 '오이디푸스의 숲'으로 떠나보시길(참고로, 영화평론가 강유정의 글들은 주로 필름2.0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최근 리뷰로는 <타인의 삶>에 대한 것이 있다.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4385 참조. 한편 생각해보면 비평가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닐까?). 

영문학 전공의 평론가 유희석이란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건 데뷔평론(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인 '보들레르와 근대'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비평으로도 평론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파격으로 여겨졌고 신선했다.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번 평론집에 실린 글들도 절반은 서구문학과 문학론에 관한 것이다. 특히나 프랑코 모레티(프랑꼬 모레띠)에 관한 글도 두 편 포함돼 있어서(영미문학연구회에서 펴내는 학술지 <안과 밖>에서 이미 읽은 것이기는 히자만) 구내서점에서 바로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어떤 자기몫을 찾을 수 있을지 유익한 시사가 되어준다.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안팎'이란 부제에서 '팎(밖)'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바깥(의 문학)'이다. 나는 한편으로 그것이 '문학의 바깥'을 향하는 것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바깥'은 공시적이면서 또한 통시적이다. 문학을 넘어선 문학, 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 사회적 주목을 받거나 말거나 이 시대 비평의 몫은 점점 많아지고 무거위지는 듯하다... 

07. 0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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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팅 2007-04-13 00:24   좋아요 0 | URL
문학평론집을 좀 읽어왔는데 요즘은 관심이 줄었습니다. 90년대 이후 문학이 변화한 모습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평론집도 작가론 목차만 봐도 식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국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90년대 이전의 한국소설처럼 촌스럽기때문입니다. 일본소설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쿨합니다만 저에게는 오락거리 이상은 아닌것 같습니다. 미국의 60년대 비트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한국에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같은 작가가 없습니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점도 하나의 징후이겠지요.

로쟈 2007-04-13 00:39   좋아요 0 | URL
**님/ 저도 몇 번 합석한 적은 있습니다...
모비딕님/ 저도 예전만큼 읽지는 않습니다. 1년에 몇 권 정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마침 눈길이 가는 평론집들이 나온지라 따로 거명한 것이구요. 한국문학에 없는 게 어디 케루악과 버로스 뿐이겠습니까? 다만 '한국어'로 씌어진 '한국적 현실'에 관한 소설들이라는 게 미우나고우나 내칠 수 없는 이유겠지요...

수유 2007-04-13 09:09   좋아요 0 | URL
<타인의 삶>은 오래 상영해서 다행이네요..이제사 보러갑니다. 주변의 강추들이 많네요 :)
저 또한 평론집을 샀던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읽어보고싶습니다.
 

이 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주말판 북리뷰들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책은 단연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당대, 2007)로 보인다. 주중에 구내서점에 갔다가 (절실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사든 책인데, 한국사회에서의 영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예상대로 언론의 포커스는 받았지만 다소 '학술적'으로도 읽히는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적극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관련리뷰 정도는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FTA 덕분에 혹 '언어시장'마저 완전 개방될지 모르는 형편에서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겠기 때문이다.   

경향신문(07. 04. 07) 한국에서…영어는 이미 ‘권력’

언제부터인가 ‘영어 완전 정복’은 이 땅의 ‘지상목표’가 됐다. 정부에선 영어 조기교육 도입을 주도하고 지자체는 영어마을을 앞다투어 만들고 있다. 조기유학생의 숫자는 해마다 급증하고 ‘기러기아빠’는 일상적인 게 됐다. 심지어 월 100만원의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원어민처럼 영어발음을 할 수 있도록 혀근육 절개수술까지 받는 지경이다.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한가지 목표에 따라 우리 삶의 곳곳이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번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도대체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영어가 뭐기에 우리 삶과 사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가. 과연 우리는 영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가.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는 우리의 입장에서 영어를 근본에서부터 성찰해보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지난 10여년간 국내에 발표되었던,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담은 17편의 글을 모았다. 필자의 대다수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전문가들이다. 시각이나 관심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결같이 현재 우리나라의 ‘영어 광풍’에 대해 우려하고, 더욱 근원적인 사고와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오늘날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영어가 국가경쟁력”이라는 세계화 논리가 그 뒤에 있다. 사실 근대 이후 영어는 그 위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반드시 습득되어야 할 당위의 모습”으로 우리 심리 속에 굳어져 왔다. 미국과 미국적 사고방식을 경험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들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현대사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능력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최샛별 이화여대 교수)을 의미한다. 영어실력이 제도화된 ‘문화자본’이 된 것이다. 문제는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다른 가치들을 초월하는 지상목표로 자리잡는 데 있다. 유창한 영어가 의사소통이라는 기술적 능력을 넘어 한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니 우리 대다수에게 영어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영어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도 그 억압 대상에 대한 공격적인 소유욕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영어를 정복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영어라는 제국에 정복되는 과정”(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이다. 언어는 중립적인 도구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개입하고 우리를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영어와의 얽힘’이 한 민족이나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더글라스 루미스 일본 쓰다대 전 교수의 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영어회화 학습이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무비판적으로 젖어드는 과정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책은 특히 영어가 “자본주의 발흥과 함께 세계어로 올라선 역사적 과정을 가진 자본의 언어”라고 지적한다. 영어의 세계적 확산에는 모든 것을 사물화하는 자본주의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영어 광증’은 인간을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도구로 보는 관점과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다. 필자들은 영어의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태도도 비판한다. 언어는 창조적이고 문화적인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어의 실용성 강조는 경쟁력만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경쟁력의 핵심은 전문적인 식견과 폭넓은 교양이지 초보적인 회화능력일 수 없다.”

김진만 전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교양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을 만들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병민 서울대 교수는 영어의 필요성이 “침소봉대됐다”고 일침을 놓는다. “상당 수준의 영어 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의 영어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나니 책에 거론된 두 사람이 떠오른다. 먼저 국내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의 경우. 그는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어를 배웠으나 근대 달성과 서구화를 동일시한 나머지 오히려 제국주의의 식민논리에 포섭돼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 다음은 반제국주의의 기수 프란츠 파농. 그는 자신의 저서 ‘검은 피부, 흰 가면’에서 자신의 민족성(검은 피부)을 감추고 서구를 모방(흰 가면)하고자 하는 욕망이 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위기에 빠뜨리는지 실감나게 그렸다. 윤지관 교수는 이같은 예를 빌려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김진우 기자)

한겨레(07. 04. 06) 영어에 빠져 살려다 영어에 빠져 죽을라

우리 사회는 ‘영어 광풍’이 불고 있다. 해외 영어연수가 대학생의 필수과정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은 초등학생 단계까지 내려왔다. 월 100만원대의 어린이 영어유치원도 호황이다. 국내 영어 사교육 시장은 한해 1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공교육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10살 남짓때부터 영어에 대한 흥미와 능력의 양극화가 시작되고, 중학교 쯤 가면 제법 영어를 하는 학생과 알파벳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학생이 한 교실에 섞여 수업을 받는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펴냄)는 최근 10여년 동안 국내에 발표됐던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의 담은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 △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3개의 주제를 큰 얼개 삼아, 영문학자·사회학자·언어학자들이 쓴 17편의 글을 실었다.



우리 사회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00여년 전.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식민지시대 영어교육과 영어의 사회적 위상’에 주목한다.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혈의 누>(이인직, 1906년)에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남녀 주인공 구완서와 김옥련이 정분을 나누는 대목이 나온다. 구씨는 본래 활발하고 거칠 것 없이 수작하는 사람이라 옥련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애 옥련아, (중략) 우리가 입으로 조선말은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이 젖었으니, 혼인을 하여도 서양 사람과 같이 부모의 명령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부부 될 마음이 있으면 서로 직접하여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선 말부터 영어로 수작하자. 조선말로 하면 입에 익은 말로 외짝해라하기 불안하다”하면서 구씨가 (중략)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하는데, 옥련이는 조선말로 단정히 대답하더라.

이것 말고도, 이광수의 <무정>, 현진건의 <희생화> 등 개화기 문학작품들에서 영어를 하는 인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한말 지배계층 엘리트나 지식인 절대다수는 미국 문물을 직·간접으로 경험했거나 독학으로라도 영어를 익혔다. YMCA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최초의 대중 공간이었다. 영어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여러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시대 개화문명’의 상징으로 들어온 셈이다. 분단과 미군정, 한국전쟁과 냉전은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영어에 ‘주류 지배권력’의 무게를 얹었다.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실력을,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어 ‘문화자본’ 내지 ‘구분짓기’와 ‘계급재생산’의 중요한 기준으로 봤다.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을 넘어,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의 척도가 된다. 최 교수는 전국 6개 대학생 1719명을 대상으로 부모의 소득·학력·직업과 자녀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의 상관관계를 설문조사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월소득 500만원 이상 가구의 자녀 29.2%가 “영어에 자신 있다”고 답한 반면, 150만원 미만 가구에서는 9.9%에 그쳤다. 또 부모의 직업이 고학력, 전문·관리직일수록 “자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승렬 영남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의 매혹은, 영어가 이 땅의 지배적 이념의 전달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는다. 일각에서 영어공용화론이 나오는 배경도 이러한 사회언어학적 맥락에서 분석된다. 이런 사정은 자본주의적 세계화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영어의 확산이 그 이전의 지배적 언어였던 라틴어나 프랑스어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그 기원이 자본주의의 발흥과 때를 같이하고 있”으며, “영국에 이어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금세기에 이르러 영어는 이 시대에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매개체가 된다”고 갈파한다. 영어가 ‘중립적 언어’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지배·억압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영어교육체계를 통해 청소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전파되고 학습된다는 것이다.

원로 영문학자 김진만은 영어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올바른 영어교육을 저해하는 현실을 ‘인권유린 수준’이라고 질타하면서, “교양 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을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영어교육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박찬길 이화여대 교수가 자신의 유학 경험을 전하면서 진정한 영어실력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적절한 표현으로 조직해내는 ‘사고력’과 어휘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쓰다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 더글라스 루미스는 한발짝 더 나간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회화 교재들이 수강생들의 체질에도 맞지 않은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그런 어색한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는 비판도 우리네 풍경과 꼭 닮았다.



언어는 한 집단의 얼을 담는 그릇이자 문화의 총체이다. 윤지관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마지막 글에서 알제리의 사회철학자이자 반제투쟁가였던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1978년 번역본 제목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민족성을 감추고 서구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식민지인들의 의식을 왜곡시켜 위선적이 되게 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

영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의사소통수단이자 국제협상을 비롯한 외교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어를 잘 할 이유와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김남주 시인의 의역을 빌리자면,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것’이다.”(조일준 기자)

07.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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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4-07 00:50   좋아요 0 | URL
좀 뒤떨어진 애기 같네요.
영어는 지상목표가 아니라 기본입니다.
물론 한국의 일부 애기겠지만 그 일부(미국유학생만 10만인세상)가 적지 않고
초등학교때 영어는 기본 제2외국어 겸하는것이 트렌드이고요.
외고에서 영어로는 애들 우열을 가릴수 없어 수학에서 판별하는 세상에.
오디오나 다른 기기 그리고 영어책을 쉽게 구할수 있는 애들 차분히 시키면 영어가 그리 큰 장벽은 아닌세상인데.

biosculp 2007-04-07 00:51   좋아요 0 | URL
그리고 지금 영어 상황은 대학 1,2학년보다 초딩애들이 더 잘하는 수준입니다.
어려운 문법빼놓고는 회화, 작문은 월등합니다.
초딩애들 잘하는 애들은 머리에서 번역안하고 그냥 영어로 생각하는 수준이니.

로쟈 2007-04-07 00:57   좋아요 0 | URL
'영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그 경우에도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요? 말씀대로라면, '영어로 생각하는 수준'에 이른 다음 세대에게 '한국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도 같지만...

드팀전 2007-04-07 09:35   좋아요 0 | URL
^^..두 책의 리뷰가 비슷하군요...언젠가 직장동료가 TV에서 영어잘하는 사람을 보더니 "와..무지 똑똑한데" 그러더군요.^^ ...

소경 2007-04-07 10:40   좋아요 0 | URL
영어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까지만 생각 했는데..'영어로 생각하는 수준'가지는 미치지 못했네요 .

마늘빵 2007-04-07 10:51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 한국일보 책 소개서 이거 보고 바로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갖는 주제 중 하나에요.

마늘빵 2007-04-07 10:54   좋아요 0 | URL
영어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세계화의 추세이고 영어를 못하면 도태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을 우회하는 것이지요. 경쟁의 대열에 들어서지 않으면 됩니다. 외부에서보면 저는 영어경쟁에서 '도태'되었다고 하겠지만, 저는 '우회'하고 있는 겁니다. 한때 영어를 잘했던 내가 왜 문맹의 수준에 도달했는가 하면,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이라고 대답 하겠습니다. 영어 꾸준히 잘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저라면 차라리 책을 더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해적오리 2007-04-07 11:06   좋아요 0 | URL
가끔 (저를 포함한) 만은 사람들이 어떻게 영어를 잘할 것인가하는 만큼 자신들의 삶을 큰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직업상 연관이 많은 사안인데, 제가 접해본 선에서 아이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엄마들의 강박이 전 무섭다고 느낄 정도에요.

로쟈 2007-04-07 11:30   좋아요 0 | URL
다음 세대의 한국인들이 모두 영어에 능통하다면(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영어공용화론' 자체가 무의해지겠지요(민족에 대한 정의 하나는 '언어공동체'이지요). 더불어, '한국인'이란 말 자체도 다시 정의되어야 할 것이고, 'Yellow Skin White Masks'에 훌쩍 다가설 것이고. 문제는 언어가 '소통의 수단'을 넘어서 '사고의 방식', 그리고 '삶의 양식'과 맞물릴 때입니다. 모두가 자랑스런 'Yellow American'이 되는 그날엔 사소한 문제일 법하지만...

웅아 2007-04-07 12:0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질문입니다. 그럼 영어를 잘 하면서도 정체성을 어느정도 보존하는 나라는 있나요? 잘모르지만 네덜란드나 스위스는 어떤가요?

로쟈 2007-04-07 12:29   좋아요 0 | URL
글쎄요, 유럽 국가들은 원래가 다중언어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또 같은 '백인'인지라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비교하자면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클리오 2007-04-07 13:23   좋아요 0 | URL
영어가 필요없는 사람들까지 영어로 스트레스 받게 하는 세상이 좀 어이가 없어요. 영어가 기본이라지만 우리 나라 안에서 쓸 일도 한번 없는 사람도 많잖아요. 학문의 문제에 있어서는 뭔가 이중적인 느낌으로 좀더 생각해봐야겠지만요.. 휴휴..

biosculp 2007-04-07 14:18   좋아요 0 | URL
영어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영어를 말하는것이죠.
이건 자주 말하고 듣고 하면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초딩들 보면서 다시금 느낍니다. 고딩이상들하고 배우는 과정이 달라져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요.
문법 배우기 전에 외국인과 직접대화하거나 오디오 있는 책 읽어가거나 비디오 보면서 직접 대하니.
그리고 정체성 문제는, 영어잘할려면 가장 먼저 해야할것은 모국어의 수준을 높이는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영어 잘할려면 한국어의 수준이 높어져야하는것이니.
기본은 한국어.
오히려 문법하나를 이해하려해도 한국에서 써진 문법책은 거의 없다는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것 같습니다. 그냥 예 덜렁 내놓고 문제풀이식.
영어된 좋은 책들, 이것도 하나의 이유는 될것같습니다.

로쟈 2007-04-07 16:54   좋아요 0 | URL
클리오님/ 대부분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나 강사들에게도 "영어는 ‘억압’으로 작용"합니다.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한.
biosculp님/ 표제에서 암시되는 것이지만, 중요한 문제제기 중의 하나는 "영어를 정복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영어라는 제국에 정복되는 과정"이라는 주장입니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잘 해야 한다, 는 주장도 사실 달리 보면 섬찟하게 들립니다...

붉은달걀 2007-04-07 19:18   좋아요 0 | URL
영어는 문화라는 이제는 국제화라는 이름아래 우리에게 권력의 한 형태로 다가와 있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로자님의 말에 적극 동감하고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우리것이라는 기둥 속에서 다른문화든 언어든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iosculp 2007-04-07 23:00   좋아요 0 | URL
윽,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외국어 실력은 모국어 실력을 넘을수 없다는 애기정도니까요.
영어, 제국까지 연결되는 주장은 동감하기가 어렵군요.
영어숭배를 벗어나게 하려면 영문학자들이 한국말로 된 영문법이나 좀 제대로 써주시고 나서 애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구학관이라는 분 의 영문법책 보고나서 이런 영문법책도 있구나 했습니다.
가구라는 단어가 있을때 불가산 명사와 가산명사 해서 이때는 어쩌고 단순히 외우기만 하던 부분을 이분 책을 보니 많은 설명이 달려있더군요.
영어나 미국을 보는 눈이 성인인 우리와 애들이 같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쟈 2007-04-08 23:19   좋아요 0 | URL
삶은달걀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단언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죠. 각론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biosculp님/ '한국말로 된 영문법' 책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할 거 같지는 않은데요.^^; 아이가 다니는 영어학원에서도 교재는 영어권 것을 그대로 쓰니까요!..
 

알라딘에 로그인 하게 되면 습관적으로 새로나온 책들을 검색해보게 된다. 막상 가끔씩 서점에 가보면 전혀 생소한 책들과 대면할 때가 있어서 역시나 '온라인은 온라인일 뿐'이란 생각도 하게 되지만 또 거꾸로 서점에서 미처 둘러보지 못한 책들을 온라인에서 처음 접할 때 느끼는 반가움도 적지는 않다. '반가움'이라고 적었지만 실상은 묘한 감정이다. 새로 나온 책에 대한 부듯함과 함께 또 사서 읽어야 하나, 언제 읽나, 하는 부담감이 묘하게 결합돼 있는. 그런 반가움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준 책이 또 출간됐으니 미국의 저명한 동시대 작가 존 바스(1930- )의 <연초 도매상>(민음사, 2007)이 그것이다.  

 

 

 

  

미국의 현대문학에 대해 약간의 견문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대해 얼마간 면식이 없을 수 없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에 가장 많이 언급된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존 바스였기도 했고. 이번에 출간된 <연초도매상>은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의 한권이기도 하니까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한다.

다소 놀라운 건 1960년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작가가 만 30세(이전에!) 쓴 소설이라는 것. 768쪽이라는 방대한 분량(국역본은 3권 합계 1,600쪽이 넘는다!)의 작품을 20대에 쓰고서 그것이 당대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아무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회자되던 책이 (비록 '연착'이란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완역 출간되었기에 반갑다(비슷한 경향의 러시아 현대작가들의 소설들도 소개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 해본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연초 도매상'이라는 서사시를 남긴 17세기의 시인 에브니저 쿠크의 여정을 좇는 패러디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리얼리티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리얼리티가 언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리얼리티가 어떻게 모방되고 위조되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주인공 에브니저 쿠크는 17세기에 실존했던 시인이자 연초 도매상으로, 서사시이자 풍자시인 '연초 도매상'을 비롯한 몇 편의 시를 남겼다. 에브니저 쿠크의 시 창작 과정이 전개되고 메릴랜드의 식민 역사가 패러디되는 <연초도매상>에서는 문학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역사적인 글쓰기가 중심적인 관심사이다. 에브니저는 메릴랜드 주에 있는 아버지의 연초(담배)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간다. 그리고 여정 내내 해적과 인디언, 매춘부, 폭도에게 둘러싸여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하게 된다. 그는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무 개가 넘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그림으로 직조되고, 쿠크는 서사시 '연초 도매상'을 완성한다."

 

 

 

 

위키피디아의 '존 바스' 항목을 읽어보면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 메타픽션의 대가라고 소개돼 있는데, 작품의 줄거리는 그러한 소개에 딱 들어맞는 듯싶다. 특히나 <연초 도매상>은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문학과지성사, 2001)와 필딩의 <톰 존스>(삼우반, 2007) 같은 피카레스크 소설에 대한 풍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며 타임지의 평에 따르면, "<캉디드> 이후 가장 흥미로운 방랑 영웅이 등장하는 현대의 고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존 바스는 대부분 영문학자 김성곤 교수의 소개에 근거한 것이다. 대부분이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다시금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미로 속의 언어: 현대 미국작가와의 대화>(민음사, 1986), <탈모더니즘 시대의 미국문학>(서울대출판부, 1998) 등의 책에서 존 바스가 언급되었던 듯하다. 더불어, '고갈의 문학'과 '소생의 문학'이란 표어로 잘 알려진 바스의 문학론은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글, 1992)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마전 교보에서 <고갈과 소생의 변증법>(한국학술정보, 2006)이란 제목의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든 적이 있는데, 기대한 번역서가 아니라 존 바스 연구서였다.  

 

 

 

 

한편,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엮은 <영미문학의 길잡이2>(창비, 2001)에서는 20세기 문학의 마지막 작가들로 '존 바스와 토머스 핀천'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두 작가의 소설들이 국내엔 얼마간 소개돼 있다. 먼저, 존 바스(존 바드, 존 바아드)의 경우엔 <여로의 끝>(을유문화사, 1983), <여로의 끝/ 선상악극단>(학원사, 1984) 등이 영문학 교수들의 번역으로 출간된 바 있고, <키메라>(고려원, 1979)는 전문번역가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일찌감치 나왔고.

토머스 핀천(1937- )의 경우에도 <브이>(학원사, 1985; 민음사, 1991), <제49호 품목의 경매>(벽호, 1994)가 번역/소개된 바 있다(단행본 연구서도 두어 권 정도 나와 있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이번에 민음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책은 아무래도 아직 번역되지 않은 <중력의 무지개>(1973)이다. 제목에 이끌려 오래전에 원서를 사두었지만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도 지금은 박스에 들어가 있다. <연초 도매상>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마저 번역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07. 03. 28-31.

P.S. 핀천의 경우엔 자신의 신변노출을 극히 꺼리는 작가로도 유명하여 인터넷에서도 그의 사진은 몇 장 찾아볼 수 없다. 알려진 에피소드 한 가지는 그가 코넬대 재학시 나보코프의 문학강의를 수강했었다는 것 정도. 정작 나보코프 자신은 핀천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드러진' 학생은 아니었던 듯한데, 작문 채점을 도와준 그의 아내 베라가 핀천의 필체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마디 덧붙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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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7-04-14 15:22   좋아요 0 | URL
커트 보네거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이 세대가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싶어서 남은 분들(;;;)을 생각해봤더니, 핀천과 바스가 살아 계시더군요;;; 아무래도 이 분들은 보네거트 님만큼 만만한 분들이 아니어서 읽은 적 없는데, 로쟈 님 포스트 보고 <연초 도매상>에 도전합니다. -_-;

로쟈 2007-04-14 20:42   좋아요 0 | URL
저도 뒤늦게(?) 보네커트의 책을 주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