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나온 가장 눈에 띄는 신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이다. 출간 소식은 이미 이달초부터 접했고 '물건'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던 참이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에 이어서 근 1년만에 가라타니의 책이 출간된 것인데,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그의 책들은 낼 모양이다(표지에서 큼지막한 '1'자가 뜻하는 바이다). 이번 타이틀이 '세계공화국'인데, 그의 비평은 막바로 '비평의 세계화'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비평집들이 초판을 소화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유독 그의 비평집들만이 독자들로부터 환대와 환영을 받아온 탓이다. '비평'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그간에 불철저했던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책은 내일 역자에게 받기로 했는데, 그 전에 리뷰 먼저 읽어둔다. 마침 오늘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의 1면을 다 책임지고 있군...  

한겨레(07. 06. 09) 국경을 지워라, 느린 혁명으로 

가라타니 고진(66)은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평가다. 1970년대까지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누렸던 지위를 1980년대 이후 가라타니가 대체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마루야마가 ‘사상계의 천황’이었다면, 가라타니는 그 천황의 자리를 뒤엎은 전복자다. 그는 무리를 거느리지 않은 단독자다. 그는 자객처럼 지배적 사상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심장을 겨냥한다. 그의 무기는 전방위로 뻗친 지식과 불온한 비판성이다. 문학에서부터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 심지어 건축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의 힘으로 그는 현실이라는 괴물의 딱딱한 외피를 뚫고 탄환처럼 그 속살을 관통한다. 그의 최근 작업은 그 괴물이 고꾸라지고 난 뒤에 열리는 시야를 보여준다. 그의 2006년 저작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그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1845년 카를 마르크스가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세계공화국으로>를 쓴 가라타니의 경우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제까지 그의 작업이 불온성을 내장한 해석이자 비판이었다면, <세계공화국으로>는 명백히 ‘변혁’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가 ‘테제’를 쓰고 3년 뒤 작심하고 집필한 <공산당 선언>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말하자면 이 책은 팸플릿이고 선언문이며 새 세계를 향한 이행 전략론이다. 팸플릿 성격이 강한 만큼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다른 책들이 무수한 전문용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지만, 이 책은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당대의 여러 사회주의 조류와 대결했듯이, 가라타니도 이 선언문에서 기존 이념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의 대결 지점은 마르크스와 이마누엘 칸트다. 기존의 변혁 운동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논거로 마르크스가 동원된다면, 칸트는 마르크스를 넘어 세계 변혁의 방향과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칸트의 한계를 마르크스가 뛰어넘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거의 정반대로 뒤엎은 꼴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약점은 ‘국가론’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분석에서는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국가’에 관한 한 시종일관 프루동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꾼 근대 아나키즘의 시발점이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뒤엎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 곧 생산자 협동조합 체제를 만들면 국가가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외부적 장치일 뿐이므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국가라는 껍데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생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프롤레타리아가 연합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면 국가는 사라진다고 믿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일시적 국가기구를 상정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독재론은 혁명의 구체적 상황에서는 국가기구를 일시적으로 틀어쥐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지, 국가의 자연스런 소멸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가라타니는 프루동-마르크스가 국가 안에서 국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항해서 존립한다. 국가를 내부의 힘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이 먹어치워 더 큰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다른 국가들이 있는 한 국가는 해체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순진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세계동시혁명으로 일거에 모든 국가를 철거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가라타니는 단호하게 이 책의 주장을 부정한다. <제국>은 1990년 이후 세계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제국이 됐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갈등과 경합 체제다. 다중의 반란이 제국의 그물을 찢어낼 것이라는 전망도 가라타니가 보기엔 환상이다. 다중의 반란은 세계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 국민국가만 더욱 강화시키고 말 것이 틀림없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프루동-마르크스를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론 없는 아나키즘’이다.

그렇다면 변혁의 전망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가라타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주목한다.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계속해야 하지만, 인류적 차원의 집합적 힘으로 국민국가의 준동을 억누르고 궁극적으로 그 국가를 소멸시켜야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총체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칸트는 그런 외적 장치로서 ‘세계공화국’이란 이념을 내놓았다. 현재의 국제연합(유엔)이 장래의 세계공화국 모태라 할 수 있다. 그 실천의 첫발은 국민국가들의 군사 주권을 국제연합으로 넘기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세계공화국은 먼 미래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변혁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이행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점진성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의 경로다. 인류를 이끌어주는 이념 또는 이상 아래서 오늘의 현실과 싸우는 것, 가라타니가 그의 선언문에서 밝히는 전략이다.(고명섭 기자)

삐딱이는 나의 힘!
가라타니, 주류에 끊임없이 저항…‘퇴물 공산주의’ 부활 나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에서 이력을 시작한 사람이다. 1969년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글로 비평계에 입문한 뒤 1972년 첫 비평집 <불안에 떠는 인간>을 출간했다. 문학비평가로서 그의 이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라는 규정은 가라타니라는 지식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의 삶을 일관하는 것은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일본 지식계에 프랑스 탈구조주의 운동을 소개하고 퍼뜨린 사람이었다. 뭉뚱그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 흐름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은 근대주의적 억압 질서에 대한 지적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시절에 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그 저항의 학문적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그는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고들어갔다. 근대적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상식적 믿음을 깨뜨리고, 제도로서 형성 중이던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했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성립한 것이 최근의 일임을 문학 연구로 보여준 것이다.

1978년 출간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도 시대 흐름을 삐딱하게 보는 그의 반골 정신이 밴 작품이다. 그 시절 일본 지식계에서 ‘마르크스’ 하면 퇴물 취급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를 혁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다. 1980년대까지 프랑스 철학의 영향 아래 ‘해체주의’를 실천하던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비평적 태도에 깊숙한 변화를 겪었다.

해체주의란 사실상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그 이념의 억압성을 고발하는 것인데, 그 사회주의가 파산해버린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하고 좌파가 궤멸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해체주의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바지가 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가라타니는 모두들 ‘공산주의는 끝났다’며 돌아선 지점에서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섰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변화시키는 이론”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10년 가까운 작업 끝에 내놓은 <트랜스크리틱>이 그의 새로운 관점을 담은 책이다. <트랜스크리틱>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내가 하려고 한 것은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런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크리틱>의 후속 작업으로 그가 하고 있는 것이 <트랜스크리틱 2> 저술인데, 이 저술을 대중적 문체로 풀어내 미리 보여준 것이 이번에 출간된 <세계공화국으로>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보면 오히려 아나키스트 쪽”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아나키즘을 비판한 <세계공화국으로>는 일종의 자기비판인 셈이다. 그 자기비판으로써 가라타니는 새로운 세계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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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09 21:59   좋아요 0 | URL
'지은이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일반인이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나네 ..^^ 그래줘야겠지요?.^^;; 일단 보관함으로 골인.

로쟈 2007-06-09 23:12   좋아요 0 | URL
'장바구니'로 가야 주문을 하실 수 있는 건데요.^^

자꾸때리다 2007-06-10 22:58   좋아요 0 | URL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가지고 뭔가 굉장히 현실적인 대안인 척하는 사람들, 게다가 특히 (자칭-타칭) 좌파, 내지는 맑스주의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아 이제는 이 사람 정말로 할 얘기가 다 떨어졌구나'라는 생각만 든다. 철학을 핑계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가장 형식적인 논의를 끌어와서 논지를 전개하는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하는 회의와 함께. ] 양창렬 씨의 클럽에 가니 어느 분이 이런 리플을 달으셨더군요.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7-06-10 23:25   좋아요 0 | URL
고진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발언 같네요. 그렇게 말하자면 세칭 '고전들'이란 게, 그리고 '읽기' 혹은 '비평'이라는 게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것이지요...
 

며칠 유예됐지만 이 서재 또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즈음이라 '다른 곳'이란 어구에 눈길이 갔다.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을 엊저녁 서점에서 보고 바로 손에 든 이유이다. 저자는 "다문화연구에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프랑스의 여성 사회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책은 딱딱한 사회학과는 다소 무관해 보이며 내가 가끔씩 손에 드는 전형적인 '프랑스산 에세이'이다.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정의되는 우리식 '수필'보다는 훨씬 길고 무겁지만 동시에 활달한 사변을 자랑하는 장르로서의 에세이.

'길을 내며'란 서문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항상 다른 곳을 사유한다"는 몽테뉴의 문장이다. <수상록>(이 책의 원제가 바로 '에세이'이다!)의 '기분전환에 대하여'란 장에 나온다고(국역본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 수록돼 있으며 발췌본 <수상록>에는 빠져 있다). 그 장의 요지는 이렇단다.

"슬픔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무모하고 괴로울 뿐 아니라 정작 슬픔을 덜어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비탄에 잠긴 마음을 살며시 다른 데로 돌리는 편이 낫다. 슬쩍 다른 화제를 꺼내 생각을 유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1563년 절친한 친구 라 보에티가 사망한 후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던 몽테뉴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학문과 여행에 더욱 몰두함으로써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기분전환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처방'이요, 강박관념과 고정관념과 치명적인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특효라고 말한다."(9-10쪽)

그에 대한 저자 라피에르의 촌평. "몽테뉴는 불행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금욕적인 인물과는 딴판이다. 그에게서는 침울한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상황이 호전되기를 바라고, 살 사람은 어찌 됐든 살자는 주의다.(...) 몽테뉴는 사고와 감정의 유연성이 인간 조건에 있어서 일종의 행운이자 묘수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성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런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단지 그 행보를 그릴 뿐."

책은 그러한 몽테뉴적 정신으로 충전된 저자의 지식인 유람기처럼 보인다. 뒷표지에 실린 김용석 교수의 추천사에 따르면, "몸의 이동으로 '실천의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 가능했던 '학문적 떠돌이'들의 역사적 사례들을 세심하게 짚어간다." 표지를 보면 그런 '학문적 떠돌이'로 발터 벤야민도 다루어지는 모양이고(찾아보기를 보면 250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듯하다).

흔한 유행어로 하자면 '유목'이고 '탈주'고 하겠지만, 차이라면 이건 '앉아서 하는 유목'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면서 하는 사유'의 궤적이다. 그리고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을 다루면서 그 모델/전거를 들뢰즈의 철학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테뉴의 에세이에서 찾는다는 것이 특징적이다(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오늘 생일을 맞은 러시아 작가 푸슈킨 또한 몽테뉴주의자였다).  

이 여름의 초입에, 호젓한 해변에 가보는 것은 아직 엄두도 못낼 형편이지만 '멀리 떠나자!'라는 유혹만은, 기분전환으로의 초대만큼은 거부하고 싶지 않다(그게 고작 '서재2.0'인가에 대해선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사유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07. 06. 06. 

P.S. 책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가독성이 좋다. 우리말이 깔끔하고 안정감이 있다. 옥에 티라면 역자도 토로한 바대로 학술용어나 고유명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이 책의 경우 옮긴이를 곤혹스럽게 한 부분은 학술 언어, 특히 학자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의 번역 문제였다.(...) 이 문제는 책이 출간된 이후에 독자들의 지적과 재번역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고자 한다."(316쪽)에 기대어 내가 읽은 서문에서 지적하자면, 22쪽에서 벤야민의 대작 <이행의 책 Passagen-Werks>은 음역해서 <파사젠-베르크>라고 하거나 국역본을 따라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라고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남편은 '하인리히 불뤼커 Heinrich Blucher'는 그녀의 전기들에서 '하인리히 블뤼허'라고 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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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6-06 12:19   좋아요 0 | URL
기분전환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것은 '파스칼의 팡세'였는데, 환기를 통해서만 사람은 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다소 체념적이기까지 한 사고를 보여주었어요. 파스칼이 몽테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지만, 정작 몽테뉴는 읽어보지 못했네용~~

로쟈 2007-06-06 16:06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수상록>을 예전에 읽긴 했지만 대개 그렇듯이 발췌본이었고, 완역본은 나중에 구하게 됐지요. 기분전환이 자주 필요한 때인지라 가까이 두려고 합니다...

Joule 2007-06-07 01:01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를 읽고 저도 몽테뉴주의자 하기로 했어요. 인간을 그리지 않고 다만 그 궤적을 그릴 뿐이라는 말이 참 멋져요.

아, 그런데 '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저 출판사에서 나온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란 책을 들춰보신 적 있으세요? 음, 속에 편집이 어떻게 되어 있나 해서요. 서체가 12포인트 이상 된다거나 행간이 너무 넓직하다거나 가장자리에 테두리가 둘러쳐져 있다거나('빈 서판'처럼) 그러지만 않으면 되거든요. 사실 제가 원하는 건 아무 디자인도 하지 말아달라는 건데 어쩌다보니 그게 까칠한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로쟈 2007-06-07 01:40   좋아요 0 | URL
제가 갖고 있는 건 구판인 <몽테뉴 인생에세이>입니다. 제목이 왜 바뀐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책입니다. 한데, 전집을 원하신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유일한 완역본인지라...

작은앵초꽃 2007-06-07 02:5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저 가운데에 있는 책이 유일한 '완역본'이라는 말씀이지요?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완역본 있는 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네요. ^^;;;

Poissondavril 2007-06-07 17:18   좋아요 0 | URL
<몽테뉴~>는 본문에 아무 디자인 없고 글씨는 시원시원하지만 너무 크지는 않습니다(판형 자체가 커서 그보다 글씨가 더 작으면 아마 현기증이 날걸요...).
그리고 로쟈님, <다른 곳을~>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유령이 (이상하게) 대중과 영미권 학자들에게 사랑을 받게 됐다고 곤혹스러워하는 대목을 재미있어하실 것 같네요. ^^

로쟈 2007-06-07 17:49   좋아요 0 | URL
<다른 곳을>을 벌써 읽어보셨군요. 앞부분의 번역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저도 예감은 좋습니다. 언제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Joule 2007-06-09 03:14   좋아요 0 | URL
ghdh, tlsdltldu wjdprp ajswj dudrhkddmf wnthtj!

이거 해독하시는 분에게 제가 한 천 원쯤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발견한 고서에서 발견한 문구인데요. 사서는 라틴어라고 하더라구요. 무슨 말인지 너ㅡ무 궁금해서요.

전 히말라야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는 중이에요.

로쟈 2007-06-09 13:32   좋아요 0 | URL
저는 음주 댓글로 추측하는 중입니다...

Joule 2007-06-09 16:1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안 그래도 오늘 일어나서 대략 10분 동안 부끄러워해주었답니다.



라벨이 너무 예쁘지 않나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 신간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개운한 한 주였다. 손자들이 놀러와주면 고맙고 돌아가주면 더 고맙다는 우스개가 있잖은가. 읽고 싶은 책들이 나오면 반갑기 짝이 없지만 한편 괴로운 일이기도 한 것이 '애서가'들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에 뇌과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이 나온 것 말고는 나를 괴롭게 한 책들이 따로 눈에 띄지 않는다. 뇌과학 관련서로서는 <꿈꾸는 기계의 진화>(북센스, 2007)를 진작에 사두고 있고 조만간 <스피노자의 뇌>(사이언스북, 2007)도 구입을 검토해볼 생각이지만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긴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 2007)을 장서용으로 구입하는 게 폼나지 않을까 한다. 단, 역자 천병희 선생이 욕심을 내어 또 개정판을 낸다면 좀 낭패(?)가 되겠지만. 관련기사를 읽고 신중하게 판단해봐야겠다.  

알라딘의 소개로는 "'로마의 평화'로 표상하는 인류사의 가장 절묘한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인 위대한 길잡이로 평가받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완역본. 2004년 첫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초판이 번역의 충실함에 있어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고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번역을 위해 문장 하나하나 다듬은 옮긴이의 노고가 빛난다.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의 <아이네이스>는 로마라는 위대한 역사적 현상을 관찰하면서 아이네아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배경으로 하여 한 국가의 세계사적 의미를 경건하게 노래하고 있다. <성경>,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더불어 서양정신세계의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세계일보(07. 05. 08)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 사랑 부활했네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 문화의 뿌리로 생각하는 로마의 고전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노래’)다. 동양에서는 '삼국지'가 그만큼의 인기를 누렸을까. '아이네이스'는 이미 '일리아스'에서 몰락하는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릴 인물로 예언되어 있던 아이네아스가 세계를 문명화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추종자들을 데리고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를 떠나 정착지를 찾기까지 곳곳을 떠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네아스는 제2의 트로이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건만,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본의 아니게 재난과 죽음을 불러온다.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인 사랑은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부분으로 디도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최고신은 과업을 일깨우며 디도 곁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그가 떠나자 디도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태우려고 쌓아둔 장작더미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여러 곳을 방랑하고 오랫동안 탐색을 계속한다. 그렇게 방랑에 방랑이 이어지면서 가야 할 곳은 분명해지고, 사명을 향한 그의 의지도 점차 굳건해진다.

당대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제국, 로마의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만큼 '아이네이스'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활약하고 사라진다. 그렇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은 신의 행위나 영웅적인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건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의에 희생되어 어쩔 수 없이 부서지고 쓰러지는 인간들의 비애와 운명을 조명한다. 이것이 바로 2000년 동안 사랑과 찬탄을 받아온 베르길리우스 시 예술의 탁월함과 보편성이다.

산문으로 초안을 잡은 후 예술적 이상에 맞춰 오랫동안 그 시행들을 운문으로 조탁했다는 시성(詩聖) 베르길리우스의 유언은 11년 간 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버리라는 것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시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마저 다듬게 하여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완벽주의자가 있으니 번역자 천병희(단국대 명예교수) 교수가 그렇다. 천 교수는 번역의 충실함이나 감동의 깊이에서나 이미 인정받은 '아이네이스'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천 교수는 그동안 '일리아스'의 세 번째 번역본을, '오뒷세이아'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으며, 이번에 '아이네이스'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30년 동안 50여 종에 가까운 그리스 라틴 고전을 원전 번역했지만, 언어는 늘 바뀌기 때문에 중요 고전 번역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조정진 기자)

07. 05. 13.

P.S. <아이네이스>의 또다른 번역본으로는 김명복 교수가 영역본을 옮긴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이다. 저자의 이름 베르길리우스도 영어식으로 '버질'이라고 표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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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5-13 08:38   좋아요 0 | URL
이 분 정말 완벽주의자 같습니다. 대단해요. 번역했던 것을 또 번역하고 또 번역하고. 집에도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가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제 책꽂이를 빛내고 있을 뿐이죠.

이번주엔 저도 관심가는 책이 하나 정도 밖에 안보이더라구요. 매주 몇 권씩 보관함에 넣다가 하나도 없으니 허전합니다.

로쟈 2007-05-13 10:36   좋아요 0 | URL
**님/ 미처 '확인'을 못했네요. 덕분에 좋은 책 읽겠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저도 <오뒷세이아>를 갖고 있는데 막상 읽을 시간은 잘 안 나네요.^^;

가넷 2007-05-13 16:09   좋아요 0 | URL
숲 출판사들의 책은 값도 만만치 않지만, 책 무게도 왜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 저는 손목 쪽이 유독(?) 약한 편인데, 등교길에 읽으려고 들고 있으려면 무리가 오더군요. --;;

로쟈 2007-05-14 01:38   좋아요 0 | URL
들고 다니시면서 읽을 책은 아닌 듯한데요. 설사 손목이 유독(!) 강하시더라도요.^^
 

고골의 <오월의 밤>(생각의나무, 2007)과 함께 낮에 배송받은 책은 이인식의 <유토피아 이야기>(갤리온, 2007)이다. 과학저술가의 책으론 이채롭게도 '유토피아'란 단일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가 516쪽의 분량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매품 <미래교양사전>(갤리온, 2006)을 같이 껴준다는 '이벤트'도 고려가 됐다(작년에 과학저술로는 호평을 받은 책이었다).

한데, 결론을 말하자면 '오판'이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조지 오웰의 <1984년>까지, 세상이 두려워한 위험한 생각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아니 '편역자'가 해놓은 일이란 건 10쪽의 프롤로그의 외에 각 저자의 생애와 줄거리에 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발췌 번역이 전부이기 때문이다(무엇을 추적했다는 말인가?). '이인식 쓰고엮다'라고 적었지만 분량으로 치자면 그냥 '옮기고 엮은 책'이라고 해야 온당하다.

소개대로 "다루고 있는 책은 플라톤의 <국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며>,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예프게니 자먀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년> 등이며 세계 문학사의 이정표가 된 작품들을 해석과 함께, 원문을 소개한다."

나는 미처 '원문을 소개한다'는 걸 간과한 탓에 이 책이 저작이라기 보다는 발췌번역본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것이고, 그게 나의 불찰이라면 불찰이다. 프롤로그의 첫문장대로 "이 책은 이상사회를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을 문학작품 위주로 골라서 그 내용을 간추려놓은 유토피아 길라잡이"인 것이다. 일종의 다이제스트북인 셈. 그게 이 책의 주제이다. 자기 주제.  

때문에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국가와 종교, 문학과 철학,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사상가들의 창조적인 성찰과 통합적 사유의 모습을 보게끔 인도하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는 광고는 과장으로 읽힌다. 개별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도 해설도, 전복적인 해석도 제시하지 않는 책이 무슨 '나침반' 구실을 할 거라는 건 공상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해서,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사들인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실망스러운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과적으론 비매품 <미래교양사전>만을 고가에 구입한 것이 돼 버렸군...

07. 05. 08.

P.S.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나의 불찰을 적었지만(인터넷 구매의 맹점이다. 서점에서 책을 미리 살펴봤다면 절대로 구입하지 않았을 책이다), 저자의 불찰도 만만치는 않다. 9종의 책을 소개하면서 "원문은 번역판이 출간된 7종의 경우, 그대로 사용할 수 없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원문을 좀더 충실히 소개하기 위해 직접 옮기는 작업을 했음을 밝혀둔다."(6쪽)고 했는데, 그런 수고를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도 의문이거니와, 플라톤의 <국가> 등은 '원문'을 옮긴 것이 아니라 '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게다가 <국가>의 경우 참조한 책도 원전 번역인 박종현본이 아니라 영역본을 중역한 최현본이다. 기본적인 서지에도 둔감한 경우이다.  

 

 

 

 

거기에 "국내에 번역판이 나오지 않은 <뒤를 돌아보며>와 <우리들>의 원문은 이상헌 박사가 옮기는 작업을 맡아주었다."고 돼 있는데, 이 또한 절반은 불필요한 수고였다. 편자가 '예프게니 자먀틴'이라고 옮기고 있는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 2006)은 이미 오래전에 번역되었고 개정판까지도 작년에 출간됐기 때문이다('Zamyatin'은 '자먀찐'으로도 '자먀틴'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Yevgeny'를 '예프게니'로 읽는 건 무지이거나 겉멋의 소산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예브게니 오네긴>을 <예프게니 오네긴>으로 잘못 읽는 것처럼).

러시아 작품이어서 먼저 훑어보았지만 '편자'는 <우리들>에 대해서, 작가의 생애에 관해 4쪽 가량, 그리고 줄거리 10쪽 가량, 나머지 30쪽 가량은 작품 일부의 발췌로 채워놓고 있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의 '교양'을 채워주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작가 생애나 작품 줄거리는 인터넷상에 얼마든지 떠다닌다), '허접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 편자 자신이 그러한 우려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 여름부터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에게 반신반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과학 저술에 전념해온 내가 유토피아 문학작품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어째 어색하고 미덥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표정들 같아 보였다."('책을 펴내며') 

그런 표정을 편자는 '과학과 문학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통념'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나는 '문학'을 너무 만만하게 본 편자의 '편견'에 더 큰 책임을 돌리고 싶다. 편자의 책을 몇 권 더 갖고 있지만 이런 '얕은 수준'의 책을 엮어내느니 그냥 과학저술가로서의 명망을 이어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공연히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사게 할 필요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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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5-08 18:38   좋아요 0 | URL
카테고리명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라, 이 말씀이군요.
그건 그렇고 <오월의 밤>은 어떻던가요?
고딕총서 시리즈도, 대강 훑어보기만 했지만, 왠지 땡기던데...

로쟈 2007-05-08 23:37   좋아요 0 | URL
'카테고리명'이라 하심은?(제가 낚였다는 말씀이군요^^;) <오월의 밤>은 <지칸카 근교 야화>에 실린 작품 댓편이 새로 번역되었기에 구입한 책입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고, 액면으로야 고전이죠. 고골이 쓴 거니까...

2007-05-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5-08 20:29   좋아요 0 | URL
허 이런. 저도 보관함에 넣어놨던 책이고, 당연히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럴수가. 엮은 책이군요. -_- 흠. 감사합니다. 서점가서 보고 사야겠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사면.

기인 2007-05-08 22:07   좋아요 0 | URL
오옷;;; 저도 감사;;;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

자꾸때리다 2007-05-08 22:54   좋아요 0 | URL
낚시질을 당하신 로쟈님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ㅋ

2007-05-09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09 01:16   좋아요 0 | URL
M님/ 번역 관련으로 문의드릴 일이 있었는데, 조만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프님/ 역시 물건은 실물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요.--;
기인님. Mravinsky님/ '위로'까지야.^^;
G님/ 그렇군요. 사실 이런 낭패는 자주 겪는 일은 아닙니다. 잠시 이벤트에 눈이 멀었던 것이죠.--; 그리고 본의아니게 '압박'을 드린 셈이 됐는데, '가책'까지는 안 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지난주에는 북커진이라는 새로운 형식 책(혹은 잡지)이 출간됐다. 혁명(Revolution)의 머릿글자를 딴 잡지 'R'이 그것인데, 매호 주제별로 묶인다는 첫호의 주제는 '소수성의 정치학'이다. “주변화가 지배적 척도에 의한 존재의 부차화를 가리킨다면 소수화는 그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리킨다.”는 기획의 변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게 없지만 그것이 한 권 분량의 책으로 출간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엔 '물질적 노동'이 관여하기 때문에. 관련리뷰와 책을 낸 출판사 그린비의 유재건 대표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5. 05) 권력·자본으로부터 탈주… 소수의 가치를 실험하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큰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의 결정을 의미한다. 백인, 성인, 남성 등 다수성이 지배의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의 상태가 다수성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다수성과 소수성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수적으로 우세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 척도’를 쥐고 있기 때문에 ‘다수적 지위’를 차지한다. 반면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다.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여전히 ‘진행형’인 한국 사회에선 이같은 ‘소수성’이 다양한 형태로 양산되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위해 공유수면에서 추방당한 어민들, 안보를 명목으로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한 평택 대추리의 농민들, 법체계에서 추방당한 이주노동자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추방당한 중증장애인들….

도서출판 그린비와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공동 기획한 반연간 인문사회지 ‘R’는 이처럼 권력과 자본에 의해 추방된 타자들에 주목한다(R는 alter(다른)+Revolution(혁명)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그간 ‘전체’를 위해 희생이 불가피한 ‘일부’로, 정상에서 벗어난 ‘예외’로 취급됐다. 그런데 이 ‘일부’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져서 우리 사회의 대다수 ‘대중’의 형상이 됐다.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사실상 전체이고, ‘정상’에서 벗어난 ‘예외’가 정상을 이루는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의 연구원이 평택 대추리의 철거된 건물 위에 ‘모두가 소수자’ 라는 의미를 담은 깃발을 꼽고 있다. <도서출판 그린비 제공>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인 고병권씨는 총론격인 ‘주변화 대 소수화:국가의 추방과 대중의 탈주’에서 이같은 문제의식을 여실히 드러낸다. 지난 10년간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대중들은 지속적으로 추방당해왔다. 그는 이를 ‘주변화’(Marginalization)라고 정의하면서, 이 ‘마진’(Margin)의 사전적 의미(주변, 한계, 이익, 여백 등)에서 많은 것을 읽어낸다. 첫번째 의미인 ‘주변’은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부차화된 대중의 지위를, ‘한계’는 대중들의 삶이 처한 상황을, ‘이익’은 권력과 자본이 주변화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점을, ‘여백’은 이같은 주변화가 정치권에서는 전혀 사고되지 않는다는 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주변화’와 ‘소수화’(Minoritization)를 구분한다. “주변화가 지배적 척도에 의한 존재의 부차화를 가리킨다면 소수화는 그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리킨다.” 책은 바로 여기에 주목한다. 권력과 자본은 대중들을 추방하고 주변화하지만, 대중들은 그만큼 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탈주하고, 다른 삶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희선의 글 ‘새만금의 노모스’에선 새만금 어민들의 삶과 투쟁이 기존 법의 소유권 개념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신지영의 글 ‘대추리의 코뮨주의’에선 “올해도 농사짓자”는 농민들의 투쟁이 재화를 독점하는 국가적 공공 개념의 모순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보여준다.

‘이주노동자와 이동’ ‘중증장애인, 비인간의 탈인간 되기’ 등의 글도 대상만 다를 뿐 소수자와 탈주의 새로운 가능성을 얘기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책 말미를 장식하는 진은영 시인의 글은 짧지만 의미심장하다. “소수는 모든 사람이다. …소수자는 우리가 특별히 만나야 할 어떤 인물, 어떤 계층이 아니다. 그는 기준에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이다.”(김진우 기자) 

한겨레(07. 05. 04) "사회이슈 깊이 파고든 ‘책잡지’랍니다”

처음 유재건 그린비 출판사 대표를 인터뷰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고, 한다면 당연히 고병권씨가 해야죠.”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래도 출판사에서 이런 독특한 잡지를 낼 용기를 냈다는 것 자체가 이야기해볼 만한 주제 아닌가요?” 그는 거듭되는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쑥쓰럽네요.” 그래도 여전히 그는 주인공은 ‘수유+너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그린비 출판사가 펴낸 잡지 (아르)다. 이 잡지의 품목명은 특이하게도 ‘부커진’이다. “북(책)과 매거진(잡지)을 합성한 말인데요, 1980년대에 자주 나왔던 ‘무크’(매거진+북)를 뒤집어놓은 꼴입니다. 그 시절 무크라는 게 단행본 형태로 된 부정기 간행물이었잖습니까? 무크가 잡지의 성격이 강했다면, 우리가 내는 부커진은 책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보면 됩니다. 기존 잡지가 주제 하나를 깊이 있게 파고들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단행본 책 형식을 취해 그 깊이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이 ‘책-잡지’는 일반 단행본 책처럼 독자적인 제목이 있다. 이번에 나온 첫 호의 제목은 ‘소수성의 정치학’이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발견되는 소수성의 문제를 이슈로 삼았습니다. 새만금 문제라든가 한-미 에프티에이 문제, 평택 미군기지 문제, 장애인 문제 같은 이슈들을 소수자의 관점에서 접근한 거죠.”

이 책-잡지의 특이함은 ‘부커진’이란 이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상의 잡지나 무크가 일인 대표 편집위원 체제로 굴러가는 것과는 달리, 이 잡지는 매번 편집인이 바뀐다. 이번호 편집인은 고병권 대표다. 그가 고병권 대표를 자꾸 앞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번 대표 편집인이 바뀔 예정인데, 해당 이슈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열정적으로 그 이슈를 이야기할 사람이 편집인을 맞는 게 옳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수유+너머’가 기획을 주도했다고는 해도, 출판사의 적극적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희 출판사와 ‘수유+너머의 연구원들이 함께 고민해서 이슈를 잡았습니다. ‘소수성의 정치학’이라는 주제 아래 쓴 글들은 ‘수유+너머’ 연구원들이고요, 저희는 이슈로 묶은 글 외의 다른 글들을 책임진 셈이죠.”

유 대표가 이 잡지를 처음 생각한 것은 5~6년 전이었다고 한다. 대중과 만나는 접점을 넓혀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것이다. “기획을 구체화한 것은 1년 전쯤입니다. 지난해 사회적 이슈가 많았잖아요? 한-미 에프티에이 반대 시위나, 평택미군기지 반대시위에 ‘수유+너머’ 사람들과 함께 나갔죠. 지난해 5월에는 ‘수유+너머’ 회원 20여명이 새만금에서 평택을 거쳐 서울까지 20여일간 도보행진을 했는데, 거기에 저희 출판사 사람들이 잠시 동참하기도 했고요. 그 무렵 잡지를 만들자고 합의했던 거죠.”

혁명(Revolution)의 영문 알파벳 첫 글자를 딴 제목 ‘아르(R)’의 의미는 고병권 편집인이 쓴 ‘창간사’에 소개돼 있다. “모든 혁명은 첫 글자 ‘R’만을 필요로 한다. 혁명이란 완성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 쓰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는 과거 혁명이 제 자신의 철자를 계속 이어가려 할 때마다 단호하게 미래 혁명의 첫 글자 ‘R’을 쓴다.” 다시 ‘아르’(R)의 의미는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R’을 쓴다. 너무나 오랫동안 발전해온 ‘발전’과 결별하기 위해, 너무나 선진화된 ‘선진’과 결별하기 위해 ‘R’이라고 쓴다. 우리에게는 발전론 자체가 낡은 과거다. 아니 반대로 말해도 좋다. 발전론과 결별한 우리에게는 어떤 과거도 충분히 미래적이다.” 말 그대로, 탈근대적 혁명을 꿈꾸는 전사들의 선언문이다.

이 전사 동맹에 가담한 유 대표는 이 동맹이 열린 동맹임을 강조했다. “이 잡지를 저희(그린비와 ‘수유+너머)가 시작하기는 했지만, 저희들만의 소유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면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 매체를 통해 여러 목소리를 내줬으면 합니다. 반드시 정치적 입장이 같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이슈들을 제기한다면, 그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고명섭 기자)

07. 05. 05.

P.S. 반년간 문예지인 <작가와 비평>의 작년 하반기호 주제도 '타자-마이너리티-디아스포라'였다. 아마도 요즘 가장 유행하는 주제가 아닌가 싶은데, '소수성의 정치학'이란 주제도 그런 면에서 보자면 '소수적' 주제는 아니다. 거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소수성의 아포리아'이다. 들뢰즈의 정의를 따라 어떤 표준 혹은 '지배적 상태'를 다수성이라고 한다면, '소수성'은 언제나 상대적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소수는 모든 사람이다"는 규정은 아포리아적이다. 그것이 참이라면 "다수는 모든 사람이다"라는 반대적 규정 또한 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소수이면서 다수이다(장애인이 '소수성'이라면, 정상인은 무어라고 규정되는가? 혹은 우리는 알고보면 저마다 '장애인'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 나는 차라리 그러한 이중성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소수성의 정치학>에 실린 글들은 모두 '소수성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을까?). 언제나 '다수성'을 전제하며, 그에 따라 대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탈근대적 혁명'의 기획은 그 유예의 기획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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