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때문에 자연스레 떠올린 책은 토머스 소웰의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다. 작년 3월초에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비전의 충돌>을 꼽으면서 내가 떠올린 책이 <본성과 양육>이었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830562). 서평거리가 될 만한 책으로 전부터 염두에 두고는 있었는데, 오늘에야 책을 손에 넣었다. 한 신간서적을 구하러 서점에 들렀다가 아직 입고가 안 되었다기에 잠시 두리번거리다 들고 나온 게 바로 소웰의 책이었던 것. 언론 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다가 그 중 가장 긴 것을 옮겨놓는다.

프로메테우스(06. 02. 22) 인간과 세계를 보는 두 시각의 차이

최근 『비전의 충돌』이라는 새 책이 나왔다. 원제는 A Conflict of Visions고 부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Thomas Sowell이 2002년에 발표한 것으로 채계병이 번역했고 이카루스미디어에서 2월 15일 출간했다.

‘문명의 충돌’의 아류작인가, 비전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유발시키는 책 제목이었다. 저자 토머스 소웰은 현재 스탠포드 대학 교수다. “그는 고전 경제 이론에서 사법적 행동주의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에 대한 많은 논문과 에세이는 물론 9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책날개에는 40여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는 “미국의 학자 두뇌집단의 한 명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3기에 걸친 미국 행정부의 자문을 맡았었다. 「포천」, 「포브스」, 「월 스트리트 저널」 등 150개 이상의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고 한다.

책 표지의 광고로 “랜덤 하우스가 조사한 미국 독자가 뽑은 논픽션 부문 20세기 명저”, “소웰은 공정하고 분명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뉴욕타임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 학자가 정치투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잊혀지지 않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토머스 소웰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저자이다(Ingram)”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환영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서문’으로 넘어간다.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개의 시각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의 ‘비전’은 시각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에 따라 각 사상가들의 주장과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소웰이 제시하는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성악설(혹은 성오설)과 성선설로 이해할 수 있다. 소웰은 서양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소웰은 서문에서 “우리 모두는 비전을 갖고 있다. 비전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소리 없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비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이해관계의 갈등은 단기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비전의 충돌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제 비전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제1부 '비전은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넘어간다.

제1장 제목은 '비전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이다. 소웰은 "비전은 논리나 사실에 기초한 검증에 활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육감이나 '본능적 느낌'과 같은 것이다. 논리가 사실에 기초한 검증은 비전이 원료를 제공한 후에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육감과 느낌이라, 다소 실망스럽지만 더 들어보기로 한다. “특정 비전- 혹은 특정 비전의 충돌 -은 결정이 내려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지배할 수 있다. 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속삭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사고의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다”고 한다.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다
제2장 제목은 '아담 스미스의 제약적 비전과 윌리엄 고드윈의 무제약적 비전'이다. 2장을 읽으면서 이 책이 생각보다 흥미로운 책이라고 느끼게 됐다. 학적 깊이나 구체적인 논증은 약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넘나들며 크게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어 사상가들의 집합을 제시하는 부분들이 재밌다.

“사회에 대한 비전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로 시작한다. 루소와 홉스의 인간관의 차이를 거론한다. 소웰은 “서로 다른 관점에 기초해 자신들의 분명한 철학, 정치, 혹은 사회 이론들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정신의 본질에 대해 아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제도에 대한 그들 각각의 개념 또한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로 유명해지기 거의 20년 전인 1759년, 철학자로서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이론』”에서 가정이지만 중국의 모든 주민이 지진으로 사라져버린 사건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잃었을 때를 비교한다(*<도덕감정론>으로 번역돼 있다).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지만 그의 사고 과정은 이미 경제학자의 것이었다”고 한다. 소웰은 에드먼드 버크에 이어 알렉산더 해밀턴도 스미스와 같은 ‘제약적 비전’ 입장이라고 소개한다. 제도의 결점은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적 문제로 해결하기보다 “일련의 ‘균형’적인 도덕적 인센티브 체계”를 중시한다. 그런 관점은 『국부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으로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을 거론한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관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 책이다. “아담 스미스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사회·도덕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윌리엄 고드윈은 인간의 오성과 기질로 인간은 의도적으로 사회에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인가, ‘조장’된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스미스와 달리 고드윈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로 그 보상 시스템에 의해 인간의 이기심이 조장되는 것으로 보았다”며 심리적 혹은 경제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드윈의 비전은 “보상에 대한 기대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정신을 개선시키는 데 해가 된다”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마르키 드 콩도르세도 무제약적 비전파다. 수학자로서 콩도르세는 “완벽해질 수 있는 능력을 수학적 극한에 대한 무한히 점근선적인 접근으로 인식했다.” 고드윈은 의도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미덕’,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는 것을 ‘악’, 우연히 해를 입히는 것을 ‘태만’으로 불렀는데 우연하게 유익하게 하는 경우를 뺐다. “아담 스미스의 비전 전체에서 중심적인 것이 고드윈에게 빠져 있는 항목이다.”

스미스는 자본가들이 사회에 대해 산출하는 경제적 이익은 “자본가의 의도는 아니다”며 스미스는 자본가의 의도를 “비열한 탐욕”으로 특징지었다. 자본가들은 “즐거움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조차 함께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사회에 대한 음모나 가격을 올리기 위한 어떤 계략으로 끝을 맺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밀의 절충, 마르크스의 복합, 제퍼슨의 전향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 제도 때문에 편협해지고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현재의 비열한 교육과 비참한 사회 제도들이” 사람들이 일반적 행복을 누리는 데 “유일하게 진정한 방해물”이라고 한다. 소웰은 밀을 절충주의라고 보지만 이 부분만큼은 무제약적 비전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맬서스는 인간의 고통이 “인간 본성의 고유한 법칙 때문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규칙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소웰은 “제약적 비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로 맬서스를 꼽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미래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있는 독특한 복합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소웰의 책에서 이 사상가들은 마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듯이 상반되는 주장들을 마구 쏟아낸다. 어수선하지만 싸움 구경은 재밌다.

“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무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큰 악- 예를 들면 전쟁, 가난 그리고 범죄 -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며 무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들의 특별한 원인을 찾고 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 부 혹은 법을 준수하는 사회의 특별한 원인들을 찾는다. 아담 스미스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의 대혁명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전자는 무제약적이고 후자는 제약적인 다른 비전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베스피에르는 해결을 추구했고 해밀턴은 균형을 추구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희생이 늘어나자 반대하게 된다. 소웰이 밀과 마르크스를 복합파로 분류했는데 제퍼슨은 전향파다.

이백 년간 계속된 이데올로기 갈등
“어떤 사람들은 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무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본성과 사회 인과율에 대한 어떤 분명한 핵심 가정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으로 모든 사회 이론가들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분류를 통해 중요한 많은 인물들과 지난 이백 년간 계속되어 온 이데올로기 갈등의 논점을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는 있다.”

무제약적 비전파는 18세기의 고드윈, 루소, 볼테르, 콩도르세, 토머스 페인, 홀바흐 그리고 19세기의 생 시몽, 로버트 오웬, 조지 버나드 쇼 이어 “20세기엔 정치학자인 해롤드 라스키, 경제학에서 솔스타인 베블렌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리고 법학에서 이론에선 로널드 드워킨, 실천에선 어를 워런으로 대표되는 사법적 행동주의 옹호자들과 같은 전 학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적 비전파는 “세계의 악을 개선하고 진보를 조장하기 위해 도덕적 전통, 시장 혹은 가족들과 같은 어떤 사회 과정의 시스템 특성들에 의존”한다. 제약적 비전파는 토머스 홉스, 스미스와 “에드먼드 버크와 『연방주의자의 보고서』 저자들, 법학의 올리버 웬델 홈즈, 경제학의 밀턴 프리드만, 그리고 일반 사회 이론에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등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중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전향하기도 한다. 5장에서 ‘복합적 비전들’로 마르크스주의와 공리주의를 설명한다. 소웰은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특정 이론의 구조와 작용에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나 내재되어 있는가 여부”가 기준이라고 한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이라는 이분법은 인간의 고유한 한계가 비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느냐 여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비전의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들이 충돌하게 된다.”(오창엽 기자) 

07.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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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7-08-14 02:2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몹시 민망하군요. 당시 인터넷신문 기자로서 매일 기사를 작성하는데, 신문사로 책들이 왔습니다. 영어공부법과 처세술 등의 책들이 많지만 가끔 신간인문서적이 출간 한달쯤 전에 오곤 했습니다. [비전의 충돌]은 개인적으로는 그리 호감가는 책이 아니었으나 그 주제, 저자의 주장 또 그 안에 언급되는 무수한 인물들에 대한 논평과 정보를 볼 때 좀더 폭넓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압축하는 서평이 아니라 먼저 읽은 독자로서 그 내용을 음미했던 것이지요. 제 생각은 최소한으로만 포함해서요.
많은 언론사의 책담당기자들이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요약해서 기사를 씁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기자가 보도자료 압축한 걸 베끼기도 합니다. 사실 다 읽고 쓰나 홍보글을 표절하나 비슷하지요. 반면 인터넷신문의 경우 분량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전문서평기자나 객원기자가 있다면 보다 성실한 책소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출판사 쪽 분이 그러더군요. 책을 읽고 기사를 써서 고맙다고. 해당 책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든 안 하든 기사를 쓰려면 책을 읽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현실이 부박하니 당연한 게 특이한 게 되버리는 거겠지요.
훗날 이렇게 갈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잠을 줄여서라도 더 공을 들였어야 하는데 말이죠.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찾아본 서평들 중에는 가장 길고, 그래서 가장 유익한 서평이었습니다. 민망해하진 마시길.^^

푸하 2007-08-14 02:4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고 이를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도요.^^
 

'경계인'이란 말에서 당신이 어떤 이념적 경계, 가령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의 사색>(한겨레출판, 2002) 같은 책을 떠올렸다면 좀 미안한 일이다. 아래 기사에서 '경계인'은 '경계성 성격장애인'을 가리키고 나도 그런 뜻의 제목을 붙였다. '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란 부제를 가진 신간 <잡았다, 네가 술래야>(모멘토, 2007)에 관한 리뷰인데, 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두 가지 근거를 갖는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 '경계인'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다는 것.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게 다른 하나다. 부제를 고려하건대 저자는 경계인들의 주변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취지로 책을 낸 듯싶다. '심리치료'로 분류되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한 권 건져놓는다.   

한겨레(07. 08. 04) 경계성 성격장애인, 이 ‘웬수’ 같은 그대여!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이 시에는 폭발하는 질투와 좌표 잃은 사랑이 염천의 개처럼 헐떡인다. 그렇지만 문학적 열정과 회한이 상대를 할퀴고 끝내 자신마저 할퀴는 실제 상황으로 바뀐다면 그사람은 경계성 성격장애인(이하 경계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피부의 90%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은 사람과 같다. ‘정서적 피부’가 없어 사소한 접촉에도 심한 괴로움을 느끼니까. 경계인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예측 못할 행동으로 주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자꾸 도망가는 것 같아 조바심내고, 검은과부거미한테 쏘인 것처럼 펄쩍펄쩍 미쳐 날뛴다.

경계인의 참담한 고백을 들어보자. “어제 약혼자에게 악을 쓰다가 약혼반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적 이유는 없지만, 그가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머니와 통장을 뒤진다. 직장으로 찾아가서 그가 있는지 확인한다. 별일 없으면 안도감과 함께 창피함을 느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헛일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변 사람이다. 경계인은 누군가를 붙잡아 술래로 만들어야 하고, 그 대상이 된 사람들(이하 비경계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자신이 왜 그 사람한테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경계인보다 더 참담한 비경계인의 말도 들어보자. “직장에서 귀가 시간이 5분이라도 늦어지면 아내는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친구들과 외출할 수도 없다. 영화를 보는 중에도 벨이 울린다. 스트레스가 심해 이제는 아내와 함께가 아니면 친구와 어울리는 일도 그만두었다.”

경계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배우자, 연인, 가족, 친지 등 그들의 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 경계인을 아끼기 때문에 훌쩍 떠나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때로는 ‘감정 노동’이, 때로는 ‘정서적 전투’가 필요한 지피지기의 살벌한 전장이다. 비경계인의 생생한 증언이 이 책의 고갱이다. 그 생생한 증언은 ‘고독한 자에게 보내는 키스’이며 훌륭한 ‘생활의 지혜’다. 자,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80년대 ‘이런 사람을 신고하자’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간첩 식별법 같은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

△그 사람이 감정변화가 극심한지 △자신의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반대로 타인의 행동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는지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의도와 다르게 왜곡해 공격하는지 △흑백논리의 양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는지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 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고 느끼는지 △바라는 바가 변화무쌍해서 도저히 비위를 맞출 수 없는지 △과음, 약물남용, 폭식, 난폭운전 등 자해적 행동을 하는지 △당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늘 빠뜨리는지를 살펴보자.

해당 사항이 많다면 당신은 피곤하다. 그러나 쉽게 매도하지는 말자. 경계인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수칙들을 숙지하면 비경계인이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을 얻게 된다.

주변에는 비교적 중증인 나 자신을 포함해 경계인 의증 환자들이 여러 명 보인다. 실제로 1996년 서울 여자대학 3곳의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5.6%가 경계인이었다. 그들은 타인과 친밀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 약물을 쓰기도 하지만 감정, 행동, 사고, 생리적 요인까지도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 각각의 사례들은 그와 당신 사이에 놓인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를 밀어내며 소통의 첫 단추를 끼우게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계인도 하늘에서 떨어진 별종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 가진 특징을 좀더 과장되게 지닌 사람들일 뿐이라는. 그러므로 경계성 성격장애인은 나와 당신에게 들이대는 반성의 거울이다.(손준현 기자)

07. 08. 04.

P.S. 혹 주변에 '경계인'이 없다면(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만) 경계성 성격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영화들을 참조해볼 수 있겠다. 김혜수 주연의 <얼굴 없는 미녀>(2004)가 그런 영화이다('경계인' 증상에 더 맞는 제목은 '피부 없는 미녀'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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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4 18:40   좋아요 0 | URL
끄윽, 채점해 보니 저도 경계선 인격장애군요.

로쟈 2007-08-05 11:16   좋아요 0 | URL
주변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philocinema 2007-08-07 17:50   좋아요 0 | URL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한 미국정신의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유병률은 0.7~1.0%정도 되며, 여자가 남자보다 3배 많다고 합니다.
또한 정신과 입원 및 외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인격장애 랍니다.

다양한 환자분들을 만나온 8년간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되짚어 볼 때 개인적으로 가장 마주하기 힘든 분들이 바로 "경계인"들이었습니다.

이 책이 일반인들로 하여금 주변의 경계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7-08-07 18:36   좋아요 0 | URL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대하기 어렵다니까 흥미롭네요...

philocinema 2007-08-08 11:38   좋아요 0 | URL
가장 흔하면서 가장 대하기 어렵다는 것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대하기 쉬웠다는 것은 결국 의사의 입장인데, 쉬웠다는 것은 의사의 면담을 통해 환자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는 얘기일테고(그래야 의사 입장에선 대하기 편했다는 생각과 치료가 수월했다는 생각이 들테니까요!) 성찰이 충분히 이뤄져 인격에 변화가 왔다면 이제 더 이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상황은 아닐테니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가 없겠지요!


글은 처음 남기지만 2년전부터 이곳에 들르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올초까지 군에 있었던 군의관 생활동안 독서모임을 정기적으로 1주에 2번씩 가졌는데, 참석했던 분들에게 로쟈님 서재를 소개했고, 그중 몇 분은 로쟈님의 서재를 방문한 뒤 소개만 해드렸을 뿐인 제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더군요.
이 자릴 빌어 그 분들과 저의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좀 엉뚱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만나뵙고 얘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구요.


로쟈 2007-08-08 11:42   좋아요 0 | URL
사실 저 혼자 떠드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때가 많은데, 가끔씩 좋은 평들을 해주시면 감사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냥 기본적으론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많이 읽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고(그럼 세상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란 기대도 있구요) 그게 다음 세대에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게, 물려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러러면 좋은 의학서적들도 많이 나와야 할 텐데요.^^

philocinema 2007-08-08 15:45   좋아요 0 | URL
실제로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건너편에 상대가 있어 말을 주고 받는다곤 해도 따지고 보면 자기 생각을 그냥 혼자 떠드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그런 독백들 가운데에서도 귀 기울이고 싶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싶은 독백들이 있더군요! 바로 로쟈님의 독백이 그런 경우 였습니다. 적어도 제겐^^..
독백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으시니 어리둥절하다는 느낌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그 순간이 바로 독백으로부터 상호간 대화로의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이 출간되고 읽혀졌으면 하는 소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답니다. 자기 분야의 specialist는 많아 보이지만 교양인으로서의 generalist는 만나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전 개인적으론 제 분야의 책은 그리 많이 읽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 나는대로 다른 분야의 책을 되도록 많이 접해보려고 하지요, 그런 상황에서 만난 님의 글은 메마른 대지에 나리는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좋은 의학서적이라!
워낙이 의학분야가 고유의 "인본주의"가 사라진채 상업적 자본주의와 결탁이 되어서 그런지 획기적이라고 발표되는 논문이든 책이든 다국적 제약회사의 입맛에 맞는 분야의 연구들만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이 분야에 몸담고 있는 것이 때론 부끄럽기도 하구요. 하지만 이런 기우의 대척점 어디선가 좋은 의학서적이 써지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놓지 않고 싶네요. 진화생물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로쟈님이 한 번 써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


 

발터 벤야민의 책 두 권이 번역돼 나왔다는 단신을 접하고 귀가길에 서점에 들러봤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단다. 직원의 말을 보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새물결 책은 따로 주문하셔야 합니다." 비록 대형서점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규모는 되는 2층 건물의 서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하지만 내가 자주 듣는 종류의 답변이다. 하긴 어지간한 문학잡지들도 들어오지 않으니). 멋쩍어서 책세상문고가 어디 있는지 물어서 역시나 신간인 벤담의 <파놉티콘>(책세상, 2007)이나 집어들고는 계산대로 갔다...

집에 돌아와 벤야민의 신간에 관한 리뷰가 떠 있나 싶어 한겨레의 북리뷰로 들어갔다가 어떨결에 읽은 건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과 '천태산인' 김태준의 평전들이다. '좌파 혁명운동가'란 공통점이 있을까? 동시대를 살아간 두 빨치산/지식인의 행로가 두툼하게 재현돼 있는 듯해서 반갑다(<김태준 평전>은 아직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하다). 두 리뷰기사를 모아놓는다.  

한겨레(07. 08. 04) 빨치산 대장 이현상 생애와 투쟁 복원

장편소설 <파업>(1989)으로 80년대 노동문학의 한 획을 그었던 작가 안재성(47)씨. 2000년대 이후 그는 식민 시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김삼룡과 이현상 등이 전개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재조명한 <경성 트로이카>(2004)에서부터 시작된 작업은 지난해의 〈이관술 1902~1950〉을 거쳐 이번에 새로 낸 <이현상 평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현상 평전>은 1948년 여순사건을 계기로 결성되어 전쟁 직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인 남부군 대장 이현상(1905~1953)의 생애와 유산을 꼼꼼하게 더듬는다. 특히 남부군의 존재를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역사의 미아’로 묘사한, 남부군 기관지 <승리의 길> 기자 출신 이우태(필명 ‘이태’)의 논픽션 <남부군> 등의 관점을 강하게 반박한다. 이현상이 북에서 보낸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을 부인함은 물론이다.

전북(지금은 충남) 금산의 유복한 양반가의 막내로 태어난 이현상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될 때까지 총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전향하거나 변절하지 않았다. 빨치산 시절 그는 나이와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존대했으며, 포로나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엄금했고, 오락시간이면 북에서 배운 탭댄스로 흥을 돋우곤 했다.

그런 그를 대원들은 한결같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과 호감을 표했다. 과묵하고 온후했던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전황이 낙동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50년 8월에는 90여 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두 달 동안 미군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의 퇴로가 막힌 채 산에 갇히게 되고부터 마지막 순간을 맞기까지의 3년 동안이 그의 생애의 절정이자 <…평전>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는다’는 빨치산의 운명은 이 시기를 다룬 평전의 마지막 세 장에서 비극적 광휘를 한껏 내뿜는다. 이 시기의 유격 투쟁은 분명 불가피한 몰락을 향해 가는 하강 운동이었지만, 이현상의 인간적 면모는 몰락의 드라마를 배경으로 오히려 상승하는 듯 보인다.

마침내 그가 수긍하기 어려운 죄목을 뒤집어쓰고 평당원으로 강등된 뒤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에도 그는 끝내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책 말미에는 선배 소설가 김성동씨의 장문의 발문이 곁들여졌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07. 08. 04) "신념과 죽음 맞바꾼 지식인 제대로 평가하고 싶었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해 온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가 다소 뜻밖의 책을 펴냈다.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일지사). 국문학자이자 일제 강점기·해방공간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 운동가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이다. 사상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김태준(1905~1949)이란 이름 석자는 여전히 드러내놓고 논하기에 부담스런 존재다.

경성제대 중국어문학과 출신인 그는 25살인 학부 3학년 때, 우리 문학의 근대적인 개별양식사로는 최초 저작인 <조선소설사> 원고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1년엔 또 다른 양식사인 <조선한문학사>를 펴냈다. 이어 <조선가요>(1934)를 출간했고, 한국사, 민속, 종교, 한국고전 관계 논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30살 이전에 대부분의 기성 연구자들보다 많은 저서를 내면서 강렬한 주목을 받았다. 문단과 학계의 총아가 된 것이다. 이런 업적을 토대로 그는 34살 때 경성제대 문학부에서 전공 강의를 가르치는 최초의 조선인 학자가 됐다.

그의 삶은 1년 뒤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위원회(경성콤그룹)에 가담하면서 격랑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이 당시 맺은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이현상과의 인연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삶의 비극적인 종지부도 공유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 것도 마찬가지다. 경성콤그룹 지하운동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1943년 세상 밖으로 나온 김태준은 노모와 아내, 어린 아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해방을 1년 남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탈출을 시도한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연안행’이다. 해방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의 행보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남로당 특수정보부장으로 49년 11월 수색의 군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 교수는 “왜 김태준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신념이 좋든 나쁘든 (그것을) 일관되게 지키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써야 했던 것은 평가되어야 한다.” “대학교수급 (지식인) 가운데 김태준처럼 총살형을 당한 경우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신념 속에 죽었다”는 아우라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그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분’이 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와 이데올로기가 같은 북한 문학사에서 김태준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그는 그쪽에서는 틀림없이 애국자다.”

곧 <북한문학사>를 펴내는 김 교수는 문학과 정치 관련 각종 북한 사서를 들춰보았으나 단 한차례도 김태준이란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남한의 연구도 미흡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전집이 없다. 기존 저작의 복사판 수준의 전집만 나와 있다. “김태준이 쓴 모든 자료를 엮어서 전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의 글이 굉장히 거칠다. 앞뒤 논리가 안 맞는 예도 부지기수다. 자료를 모두 모아 교정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김태준에 대해 적어 놔야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그에게 김태준의 공과는 뚜렷이 갈린다.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였다. 그 당시 계급투쟁은 반제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 노선에는 비판적이다.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로 수많은 인명이 결과적으로 살상당했다고 본다. 남로당의 문화공작 책임자였던 김태준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지시로 지리산 문화공작대로 파견된 시인 유진오 등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그는 적었다.

학자로서의 연구 업적에도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조선소설사> 등에서 나타나는 ‘성급한 계급사관’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이유로 다산 정약용을 소외시키거나, ‘비과학적’이라면서 단군 건국신화를 제외시킨 판단은 수긍하기 힘들다고 썼다. 하지만 △고려시대 패관문학을 소설의 갈래로 포함시킨 점 △박지원의 <양반전> <허생전> <호질>의 발굴 소개 △허균 <홍길동전>, 김만중 <구운몽>을 부각시킨 점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의 소설사 등록 등은 굵직한 업적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교수의 뇌리에 인간 김태준이 각인된 시기는, 14살이던 1946년이다. 당시 문학가 동맹 기관지 <문학>에서 김태준이 쓴 ‘연안행’을 읽었다. 반제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 포위망을 뚫고 연안으로 탈출한 이야기가 “독서 능력이 보잘것없었던” 시절에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 수기는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끝을 맺지 못한다.

김 교수는 김태준이 신념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지 못한점을 몹시 아쉬워했다. “서울대에 남았으면 한국과 중국문학의 주인이 됐을 것이다. 업적이 괜찮다. 연안에서 귀국할 때도 서울에 가면 ‘난 이제 다른 것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안정되면 고려시대 문학사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연구자·학자로 남기에는 속된 말로 피가 너무 끓었다.”

신념을 저세상에 가져간 한 지식인의 남다른 행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하나님에게 운명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 자기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안다. 고문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신념에 따라 살기가) 더 어렵다. 그의 신념·사상에는 여러 결함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신념 속에 죽으니까 평가되었다.”

07. 08. 03.

P.S. <김태준 평전>의 저자인 김용직 교수에게서 오래전 '해방기 시문학사'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교재가 <해방기 한국시문학사>였는데, 지금 찾아보니 개정판마저도 절판된 상태이다. 아마도 15-6년 전인 듯싶다. <임화 문학연구>의 초판도 그맘때 나왔던 것 같고. 강단에서 주로 시를 가르친 저자의 관심이 의외로 지식인과 이념(신념)의 문제에 많이 쏠려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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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4 18:10   좋아요 0 | URL
강조하실 때 분홍색 대신 노랑색을 쓰니까 눈이 덜 피로하고 좋네요.

로쟈 2007-08-04 18:24   좋아요 0 | URL
주로 연한 색을 쓰는데, 분홍색을 너무 많이 썼나요?^^;

심술 2007-08-04 18:30   좋아요 0 | URL
네, 주로 분홍색을 많이 쓰셔서 그 동안 눈이 좀 아팠어요.
 

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정수복씨의 신간이 출간됐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2007)이란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600쪽에 육박한다!). 지난주에 책이 나온 걸 서점에서 봤지만 너무 두꺼워서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이전에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리뷰 정도만 챙겨두도록 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옮긴 피에르 앙사르의 <현대 프랑스 사회학>(문학과지성사, 1992)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다. 벌써 15년 전이라니...

문화일보(07. 08. 03) 한국인의 병폐 낳은 巫敎-儒敎 ‘잘못된 만남’

한국인들은 상대방과 얘기할 때 흔히 “(무엇무엇이) 있거든요…”라는 말을 앞세운다.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들어간다. 상대방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응대한다. 속으로는 “그래 너 잘났구나… 어디 한번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어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기보다 자기가 무슨말을할까만을 골똘히 생각한다. 노래방에서 상대방의 노래는 듣지 않고 자기가 부를 노래만을 열심히 찾듯이. 대화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심각한 소통장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그릇된 우월감은 자신을 제대로 성찰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점’이라는 굴종의 경험에 치를 떨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인가.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로 진입하면서 폭발적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뒤 한국인들은 어디에서고 우쭐대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우월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미 세계 초강대국이 돼 버린 일본을우습게 보는 것은 남한과 북한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이 책은 우월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 감정우선주의, 이중규범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등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한국인의 병폐를 성역없이 들춰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이어 오랜만에 나온 비판적 한국인론이다. 무척 논쟁적이다. 곳곳에 뇌관이 묻혀 있다. 굿의 지역 공동체적 정감 회복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는 상황인데 무교(巫敎)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최근 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 심해지는 개인주의, 파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을 인정하는 개인존중사상과 개인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초청연구원으로 지난 2002년 이후 두번째 파리 생활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머물렀었다. 집을 나온 뒤에야 기존 관습에 젖지 않고 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볼 수 있다. 저자는 파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한국사회의 종교와 문화, 교육, 의식구조 등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곱씹어본 듯하다.

저자는 545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방대한 담론을 풀어놓기 전에 우선‘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에 딴죽을 걸겠다고 선언한다. 문화적 문법을 사회구성원들의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영어문법을 모르면 무시당하듯 여러번 문화적 문법을 어기면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 되고, 계속 어기면 ‘미친 사람’이 돼 버린다는 것.

저자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교역국가가 됐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기존의 전통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경험은 빈곤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먼저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등 6가지 근본적 문법으로 정리했다. 이어 파생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 6가지로 분류한다. 이 12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분출된다.

저자가 예로 들었던 황우석 사태에서부터 신정아 학력위조 파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대학사회에서도 윤리적 불감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할 때도 이 같은 요소들은 유용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터지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재발을 막는 근본적 방법보다는 공적 자리에 있는 책임자를 찾아내 그를 사퇴시키거나 법적 책임을 묻는 일로 마무리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특히 종교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도교, 불교, 기독교 등 외래종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교와 결합함으로써만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의 기저에 무교 - 유교 결합체를 근간으로 하는 문화적 문법이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 나쁜 일을 피하고 현실에서 복을 바라는 무교는 현세적 물질주의를 강화시켰다. 무교의 조화론은 갈등회피주의라는 문화적 문법의 뿌리다. 또 무교의 현세주의적 세계관이나 조화론은 이후 도래한 불교와 기독교에도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한국 기독교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가족이기주의와 연고주의는 유교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이 책에 따르면 유교도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권력과 질서의 유지, 국민동원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됐다.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시됐고 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논리로 정당화됐다. 또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개인주의 = 자기만의 이익추구 = 무질서 = 무정부주의 = 혼란 = 난장판’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이제 한국사회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면서 수직적 인간관계를 수평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치 중심의 사회운동도 문화중심의 사회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문화예술분야의 역할강화, 가족관계와 종교단체, 학교 교실의 민주화 등과 함께 영성훈련, 문화체험, 자원봉사, 우정과 연대의 발견, 독서토론 등을 통해 개인 내부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낡은 문화적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뇌관이 개인주의에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주체성과 자주성과 독자성을 갖춘 개인을 뜻한다. 저자는 “개인존중사상이 없는 한 나이와 성별, 출신가문과 출신학교, 지역을 기준으로 한 서열의식과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한 공동체 논리 앞에 개인을 줄 세우는 오래된 문법은 계속 통용될 것”이라고 밝혔다.(예진수기자)

한국일보(07. 08. 04) 우리의 의식은 아직 상투를 틀고 있다

사회학자 정수복(53)씨. 1989년 프랑스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0년대 초까지 강의와 시민운동,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했던 그는 2002년 서울생활을 접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자로 5년간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탐구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그가 한국사회에 대해 의도적인 ‘떨어져보기’를 시도하며 끌어낸 한국인론이다.

한국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근대는 미완이고 절름발이’라는 선언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근대의 꼴을 이룩했지만, 그 시공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전근대의 정신적 유산을 떨치지 못했다고 본다. 그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발생한 황우석 사태가 상징적이다. 이때 한국 지식인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너무 까발리면 생존하기 어렵다.

큰 공적을 이룬 분들은 공헌도 크지만 과정에서 오류도 있기 마련”이라며 희박한 윤리의식과 도덕불감증을 날것으로 보여줬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시나브로 확산되는 박정희 전두환 이승만 등 전근대적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 역시 그의 확신을 굳혔다. 그는 ‘문화적 문법(cultural grammar)’이란 개념을 동원해 한국인의 내면세계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문화적 문법이란 구성원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마음의 습관, 의식구조 등을 아우르는 개념. 이는 다시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내면화한 근본적 문법과 20세기 들어와 형성된 파생적 문법으로 나뉜다.

근본적 문법은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이고 파생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 중심주의다. 이 문법들의 기원은 유교, 도교, 불교 등 전통종교와 사상인데 지은이는 특히 유교의 부정적유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령 유교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한국인들은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해도 문제 제기를 못했고, 이는 비판과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자율적이고 근대적인 개인’들의 출현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좌파건 우파이건 남한이건 북한이건 이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동권이나 시민단체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한 위계질서나, 사회주의를 내세웠지만 봉건적 수직적 질서를 강화했던 북한사회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이런 낡은 문화적 문법을 해체할 수 있는 주역으로 청년층과 여성들을 주목한다. 2030이라 불리는 청년세대는 나이, 직위, 영향력으로 유지되던 수직적 위계질서를 인격존중, 설득, 격려로 유지되는 수평적관계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오랫동안 남성지배적 문법에서 배제돼 있었던 여성들도 기존의 문법을 비판적이고 상대적으로 해석하며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세계를 낡은 문화적 문법으로 파악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희망에서 이 책을 썼다”며 “한국사회에 독자성과 존엄성을 지닌 개인을 그대로 인정하는 개인주의가 고양될 때 낡은 문법들이 해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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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서점에서 <마르스의 두 얼굴>(연경문화사, 2007)이란 책을 보았다('마르크스'란 말이 들어간 표지들에 익숙해진 처지라 뭔가 빠진 듯하다는 게 첫인상이었다!). 다른 여러 신간들 틈에서였기 때문에 크게 주목하진 않았지만 뭔가 두툼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그런 두툼한 책으로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기행>(효형출판, 2007)도 눈에 띄는 책이다). 거기에 저자가 '마이클 월저'라는 것. 철학자 '마이클 왈쩌'와 동일인인가 하는 게 잠시 가져본 궁금증이었다. 세계일보의 리뷰를 보고서 검색해보니 '월저'가 그 '왈쩌'였다(고유명사들은 웬만하면 통일해주는 게 좋을 터인데). 그리고 생각보다는 비중있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세계일보(07. 07. 28) '정당한 전쟁'이라도 무고한 시민 희생은 부당하다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계사는 전쟁사와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 인류 역사는 전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종교전쟁, 이념전쟁, 민족전쟁, 영토확장전쟁, 식량확보전쟁 등등.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정치·경제·외교·정보 등 국력의 제반 수단을 이용해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사용하게 되는 ‘최후의 수단’이다. 전쟁 개시의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나 총리 등 민간인 군통수권자가 하게 되지만 수행은 군인들 몫이다.

문제는 정치·외교·군사적 목적 달성 혹은 방어적 성격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그 피해는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한 무고한 민간인들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민간인 봉사단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단체에 납치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가까운 예다. 아프간전쟁의 후유증이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 출신인 아미클 월저가 1977년 쓴 ‘마르스의 두 얼굴’은 전쟁 도덕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집필한 전쟁이론의 고전이다. 마르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군신, 즉 전쟁의 신을 뜻한다. 원제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역사적 예증에 근거한 도덕적 논거’. 미국 각군 사관학교와 하버드대 등에서 교재로 채택되고 있다. 저자는 상대 국가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될 경우엔 예방 차원의 공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9·11 이후 전개되는 대테러전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과연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격언은 유효한 것인가.

책에서는 아테네의 멜로스 공격, 1870년의 보불전쟁,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의 미라이 양민학살사건, 제1·2차 걸프전 등 다양한 전쟁에서의 도덕의 문제, 특히 전쟁의 정당성과 부당성 측면을 집중 분석해내고 있다. 책은 침략전쟁과 자위 차원의 전쟁, 국제사회에서의 국가의 권리, 정치적 공동체의 자결권, 간섭과 불간섭의 원칙, ‘예방전쟁’과 선제공격, 중립, 유용성과 비례성의 원칙, 군사적 행위의 ‘필연성’, 전시 민간인과 비전투원의 권리, 부당한 행위에 따른 책임의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개별 주제와 관련해 2개 이상의 역대 전쟁에 돋보기를 바짝 갖다 대며 전쟁의 정당성 여부를 깊게 파헤친다. 저자는 ‘정당한 전쟁’도 ‘전쟁의 정당성’과 ‘전쟁에서의 정당성’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전쟁의 정당성’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자위 차원의 전쟁 등 도덕적 측면에서 정당한 경우이고, ‘전쟁에서의 정당성’은 전쟁을 정당한 수단과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걸프전 이후 CNN과 인터넷 중계를 통해 전쟁 상황을 세계인들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전쟁의 수단과 방법을 고려한 전쟁 계획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정당한 전쟁에 못지않게 정당한 전투행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군통수권자가 군인을 순조롭게 전장에 동원하기 위해선 분명한 혹은 그럴 듯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때론 정보를 조직해서라도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전쟁 명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군인들이 목숨 걸고 싸우느냐 그러지 않느냐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므로 전쟁의 정당성은 중요하다.

저자는 ‘정당한 대의(Just cause)’ 작전이라 불리는 미국의 1989년 파나마 침공을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성전이니 해방전쟁으로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즉, 자신의 ‘정당한 전쟁’ 이론이 부당한 전쟁을 방어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불쾌하다고 밝힌다. 저자는 또한 국가 간 혹은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적 간섭’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제압한 후 일본헌법 제정에 간섭함으로써 일본에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이식한 것을 지지한다. 즉, 타의에 의한 정권 교체를 지지함으로써 적잖은 논란도 낳았다.

책은 이 밖에 한국전쟁을 내전이라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일갈하고, 북한 핵 문제와 독도 및 간도 문제 등 우리의 현안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에서의 법과 질서’ 코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조정진 기자)

07. 07. 28.

P.S. 수년 전에 석학초청강좌를 위해 내한하기도 했던 마이클 월저(왈쩌)(1935- )는 존 롤즈(롤스)와 함께 각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내지는 내가 그렇게 알고 있다). 그간에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책들이 많이 번역/소개됐었는데,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이번에 출간된 <마르스의 두 얼굴>이 가장 흥미로울 듯하다(원제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

공역자들이 모두 사관학교 출신으로 국방대학 등에 몸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은 미국의 사관학교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관학교(혹은 국방대학)에서도 교재로 쓰이는지 모르겠고. 찾아보니 지난 77년에 출간된 책은 현재 4판까지 나와 있고(국역본에 4판 서문이 들어 있다) 맨왼쪽은 작년에 나온 페이퍼백이다. 월저는 그밖에도 <전쟁론(Arguing About War)>(2004) 등의 저작들을 더 갖고 있는데, '정의'의 문제를 전쟁을 통해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지 않나 싶다(롤즈의 칸트식 정의론과 대비된다).

소개에 따르면, 그는 "미국의 베트남전 이후 반전운동의 지도적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야만의 방식이 아니라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뉴욕타임즈 2001년 9월 21일자)는 기고를 통해 사뮤엘 헌팅턴을 필두로 한 보수적 지식인과 에드워드 사이드, 노암 촘스키 등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동시에 공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까지 월저(왈쩌)의 책들은 5권이 나와 있는 듯하다(나는 두 권을 갖고 있다). 특히 <해석과 사회비판>(철학과현실사, 2007)은 바로 지난달에 나온 책이다. 이 정도면 월저식 정의론과 사회철학을 한국어로도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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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로운 전쟁은 어떻게 가능한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0 20:21 
    지난주 신간 가운데 리뷰가 뜨길 기다렸던 책은 마이클 왈저의 <전쟁과 정의>(인간사랑, 2009)이다. 이미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논한 <마르스의 두 얼굴>(연경문화사, 2007)이 소개된 터여서 의외의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9.11이 낀 주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한번쯤 손에 들어봄 직하다.    연합뉴스(09. 09. 10) 전쟁에 정의의 잣대 들이대기  오늘날 많은
 
 
마늘빵 2007-07-28 13:10   좋아요 0 | URL
매우 끌리는 책이 번역되었군요. 롤즈를 읽고 마이클왈쪄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제는 롤즈보다는 왈쪄가 더 끌리는데, 아무런 기반도 없이 덤벼들 수 없엇, 논문은... 음... (.. )

로쟈 2007-07-28 14:16   좋아요 0 | URL
'정의'를 추상적인/이론적인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례(전쟁!)를 통해서 접근해가는 게 월저의 장점인 듯합니다. 저도 처음 안 것이지만...

마늘빵 2007-07-28 15:05   좋아요 0 | URL
근데 그의 이전작들은 껍데기가 허섭한데, 이번건 깔끔합니다. 보고 싶게 만들어졌는데요?

로쟈 2007-07-28 15:07   좋아요 0 | URL
철학과 현실사의 책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쪽은 주로 '철학'에만 신경을 쓰는지라...

未知生焉知死 2007-07-28 15:07   좋아요 0 | URL
공리주의를 배척하고 계약론의 입장에서 '정의'를 규명하려는 롤즈의 규범적 구성주의는 처음 이론이 나왔을 때보다 여러 학자들의 비판으로 더욱 형이상학적이 되면서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정의에 접근한다니 읽어봐야겠군요.

로쟈 2007-07-28 15:10   좋아요 0 | URL
네, 말씀대로 그게 장점일 거 같습니다. 헌팅턴과 촘스키를 모두 비판할 수 있는 포지션도 궁금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