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활>(창간호) 필진들과 함께하는 공개토론회가 8월 26일부터 9월 16일까지 네 차례 개최된다(일정과 신청은 http://cafe.daum.net/bords/SB9m/5 참조). 나도 9월 2일에 '이현우의 지젝 읽기'를 진행한다. 물론 창간호에 실린 지젝의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를 번역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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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에 슬라보예 지젝이 방한한다는 소식은 전했다. 최근에 나온 <말과 활>(창간호)에 실린 지젝의 기고문도 일부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9월 둘째주에 이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될 듯하다(알라딘에 조만간 공지가 뜰 것이다). 주저 <헤겔 레스토랑><라캉 카페>가 나오면서(번역서 제목은 타이핑할 때마다 묘한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관련기사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 중앙일보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헤겔과 마르크스, 라캉을 접목해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지젝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실천적 철학자이면서 ‘문화이론의 엘비스’라 불릴 만큼 인기도 높다. 난해한 이론 전개로도 유명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9일, 미국의 사상가 노엄 촘스키(MIT 교수)가 “지젝이 얘기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못하겠다”고 꼬집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인기높은 그를 e-메일로 만났다.(이은주 기자)

-엄청난 분량의 책이다. 정치 팜플렛 같고, 철학적 논고를 담고 있는가 하면 문화 평론으로 읽히기도 한다.

 

“20~30년 동안 꿈꿔온 ‘필생의 역작’(opus magnum)이다. 이 두꺼운 책이 영어권에서만 1만부가 팔리고 현재 10여 개국에서 번역되고 있다. 특히 영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그동안 어둠 속에 있던 헤겔을 다시 조명하고, 지금 한참 유행하고 있는 라캉의 전혀 새로운 얼굴을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점이 가장 뿌듯하다.”

-왜 헤겔인가.
“헤겔은 읽으면 읽을수록 경이로운 사상가다. 그는 대학생 때 프랑스 혁명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혁명은 곧 공포정치로 변질됐다. 그래도 그는 자유 이념이 역사의 종언을 향해 가리라는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이센의 군주제와 관료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이야기 아닌가? 헤겔은 21세기라는 ‘우리 시대의 아들’이다.”

21세기 지구촌의 현실이 헤겔이 마주했던 역사적·정치적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의미다. 그는 이번에 ‘무(無) 이하인 것(Less Than Nothing)’이라는 개념에 천착했다. 이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넘어선다. 책에서 그는 셜록 홈즈와 경찰서장의 대화를 인용했다. “제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그렇소. 그날 밤 개의 이상한 행동을 놓치지 마시오.” “그날 밤 개는 전혀 짖지 않았는데요.” “그게 바로 이상한 행동이오.” ‘없음’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적 사유’하면 흔히 마르크스를 든다. 그런데 당신은 헤겔의 복권에 무게를 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기준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마르크스나 헤겔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헤겔이, 그리고 ‘헤겔의 반복으로서의 라캉’이 우리 시대의 교착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책에서 마르크스야말로 헤겔을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헤겔의 많은 부분이 유물론적인 반면 마르크스의 많은 부분이 관념론적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폐지한 사회주의를 제창했으나 전체주의 등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진보주의가 좌절했다는 것이다. 반면 헤겔은 여전히 국가를 최고의 해결책으로 고민했다고 강조한다. 지젝은 “오늘날 가장 서둘러야 하는 과제는 국가가 금융 부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당신이 보기에 ‘진보적인 것’의 기준은.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헤겔이 가르치는 대로 개념은 시대정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본가들은 경제적으로 최고의 혁신가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다. 또 중국의 정치가들은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옹호하지만 가장 뛰어난 ‘자본가’(이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이기도 하다. 진보와 보수는 한 사람에게도 공존하는 등 일종의 아이러니 속에 있는 것이다.”

지젝은 9월 24~29일 한국을 찾는다. 경희대 특강, 세계적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 등과 함께 하는 학술대회 참석 등이 예정돼 있다. 그는 “한국은 놀랍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경이롭고 신비한 나라”라며 “분단 등 정치적 상황도 흥미롭고, 눈부신 경제 성장이나 영화 분야에서의 활약도 놀랍다”고 말했다.

 

<헤겔 레스토랑>에 대한 포스팅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주 금욕적으로 읽고 있다. 이번주에는 기사 인용으로 포스팅을 대신한다...

 

13.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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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헤겔 레스토랑>(새물결, 2013) 서문을 절반쯤 읽었다. 그 정도가 내가 부릴 수 있는 여유다. 서문에서 지젝은 책의 전체적인 구성과 함께 주제를 미리 말해주는데, 그게 갈릴레이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직역하면 "그래도 그것은 돈다(Eppur si mouve)"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것은 돈다"로부터 모든 존재론적 결론을 다 이끌어내는 게 이 대작의 목표라고 지젝은 적시한다. 그게 헤겔 파트와, 헤겔의 반복으로서 라캉 파트,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고, 번역본으로는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로 분권돼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책을 통독한 다음에야 할 수 있을 터이고, 오늘은 그냥 한 대목만 밑줄을 그어놓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다. 지젝은 프로이트의 충동("그래도 그것은 돈다"가 바로 충동의 논리다)이 불교에서 비난하는 욕망이나 하이데거가 비난하는 의지와는 다르다고 말하면서(이에 대한 자세한 입증은 본문에서 다뤄진다) 이렇게 언급한다.

죽음 이후에도 도저히 파괴될 수 없는 충동을 대변하는 불유쾌한 '부분 대상'에 의해 지탱되는 성령은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르케고르적 의미에서 죽음의 인접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연속적인 다섯 단계로 나누어 논의하는 퀴블러-로스의 이론을 불멸(성)이라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을 대하는 다섯 단계로 태도로 뒤집어야 한다.(31쪽)

 

 

간단히 죽음 이후에도 성령은 살아남아 불멸하게 된다는 것인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참조되는 건 그녀의 <인간의 죽음>(분도출판사, 2000)이란 책 때문이다. 죽음학(사망학)의 원조 격인 책. 국내에는 <죽음과 죽어감>(이레, 2008), <죽음의 순간>(자유문학사, 2000) 등 여러 차례 번역돼 나온 바 있다(하지만 현재 <인간의 죽음> 외에는 모두 품절되거나 절판된 상태).

 

  

 

이 책에서 퀴블러-로스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 부정과 고립, 2단계: 분노, 3단계: 타협, 4단계: 우울, 5단계: 순응. 가령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엔 부정하다가 이어서 분노하고, 그 다음에 타협적 태도를 보이다가 체념과 우울의 상태에 빠지고 마지막 단계에 가서 이를 수용/순응한다는 것이다(이런 단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예증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런 반응은 퀴블러-로스의 고안이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재구성한 것이다. 지젝은 이 5단계를 불멸에 대한 반응에 대입한다.

먼저 그것을 부정한다. "무슨 불멸? 죽은 후 그저 먼지로 흩어질 뿐인데." 그런 다음 분노를 터뜨린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곤경에 빠져 있는가!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네!" 그리고는 타협으로 이어진다. "좋아, 하지만 불멸인 것은 내가 아니라 나 중에서 안 죽은 부분이지, 그건 감수할 수 있어..." 그런 다음 우울증에 빠진다. "여기 영원히 머물도록 저주받은 이상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마침내는 불멸(성)이란 부담을 받아들인다.(31쪽)

이런 대목에 흥미를 느낀다면 지젝의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두꺼운 책을 앞에 둔 독자들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무슨 얼어 죽을 지젝? 안 그래도 읽을 건 많아. 아니 인생을 독서로 낭비한다는 게 될 말이야?" 이어서 분노. "무슨 책이 1,750쪽이나 되냐구? 내가 어지간하면 그래도 읽어주려고 했어. 아니, 이게 무슨 대하-철학이야 뭐야!" 그리고는 타협. "그래, 주변에서 하도 지젝지젝거리니, 내가 읽어는 준다. 대신 서문만 읽는다. 그 정도면 대충 파악은 되는 거 아냐? 사실 이런 책 완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런 다음 우울증. "흠, 이게 생각보다는 재미있는데... 내가 철학책을 다 읽을 수 있다니. 벼락이라도 맞은 건가?" 마침내는 체념과 수용. "하긴 뭐, 내가 휴가라고 여행갈 팔자도 아니었어. 올 여름엔 지젝을 읽는 게 운명인가 보다.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게 원래 내 스타일이야." 

 

 

바쁜 일도 많은데, 이런 페이퍼를 적고 있는 나도 구제불능이다.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인지 어쩔 수 없다. 저녁 먹고 정신 차려야겠다...

 

13.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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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세번째로 한국을 찾는다. 경희대 석좌교수로 임용돼 방한이 예정돼 있던 지젝은 당초 이달에 방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9월말로 일정이 미뤄졌다고 한다. 입소문으로만 돌았는데, 알랭 바디우도 참여하는 학술대회도 같은 시기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아래가 관련기사다.

 

기사 이미지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에 지젝(64·Slavoj Zizek) 경희대 교수가 9월말 우리나라를 방문해 특강을 연다. 지젝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79·Alain Badiou) 등 세계적 석학 8명과 함께 학술대회도 개최한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는 "지젝 교수가 9월24일부터 일주일 간 우리나라에 머물며 특강과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라고 27일 밝혔다. 지젝 교수는 9월24일부터 26일까지 '가을 경희에서 지젝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정신분석학과 철학 등에 대해 특강을 열 예정이다. 또 같은달 27일부터 29일까지 '무위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공리주의와 공유 등에 대해 바디우 등 세계적 석학 8명과 함께 학술대회를 연다.(...) 이 교수는 "지젝 교수가 7월 방문해 특강 등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문제로 일정이 9월 말로 잡혔다"며 "특강과 학술대회 장소 등 세부적인 사항은 8월 초 확정된다"고 말했다.(뉴시스)

 

 

방한이 늦춰지는 바람에 독서에도 여유가 좀 생겼다. <헤겔 레스토랑><라캉 카페>에 대한 독서도 그 전에 마칠 수 있을 테니까(계획은 그렇다).

 

 

 

지난해 경희대에서의 강연은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경희대출판문화원, 2013)로도 나와 있다.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과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기억엔 '강연'과 '강연문'을 옮긴 차이가 있다. 바디우와 지젝이 의기투합한 책으로 먼저 소개된 것은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있다.  

 

 

바디우의 짧은 글과 대담도 9월말까지는 읽어둬야겠다. 아마도 방한 전에 바디우의 책이 한두 권은 서둘러 나오지 않을까 싶다.

 

 

 

기사에서는 '공리주의와 공유' 등의 주제에 대해서 지젝과 바디우 등이 학술대회를 연다고 돼 있지만 짐작엔 '공산주의'의 오타가 아닌가 싶다. 공산주의(코뮤니즘)가 두 철학자의 공통 화두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 이후에 포럼 발표문을 묶은 책 <공산주의 이념1,2>가 출간돼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의 발표문이 <공산주의 이념3>으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주에 포스팅한 대로 <말과 활> 창간호의 기고문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를 참고할 수 있다.

 

 

그밖에 바디우와 지젝의 대담 <현재의 철학>과 연구서 <바디우, 지젝과 철학의 변형> 등도 더 읽어볼 만한 책이다..

 

 

13.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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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 활> 창간호가 나왔다. ‘자본에 맞서는 정치, 자본 너머의 정치’가 창간호의 키워드다. 슬라보예 지젝의 기고문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번역을 청탁받고 참여했는데, 그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기고문 외에도 읽을 거리가 풍성하다. 격월간이란 포맷도 새로운 시도로 여겨진다. 아직 받아보지 못했지만 책도 궁금하다 반응도 궁금하다...

 

 

말과 활(13년 7-8월호)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만약 역사적 경험에 의해 완벽하게 기각돼야 할 이념이 있다면 바로 공산주의일 것이다. 확실히 공산주의는 20세기 전체를 특징짓는다. 하지만 1990년의 완벽한 패배 속에서 공산주의는 불명예스럽게 종언을 고했다. 그 이후에 공산주의는 단지 두 가지 형태로만 살아남았다. 북한처럼 끔찍할 만큼 기이한 체제와 중국처럼 공산당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쥔 채로 가차 없는 자본주의 관리자로 변신한 나라들이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 그렇게 단순할까? 공산주의 국가들의 해체에 대해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사반세기 전에(1990년) 일어난 사건들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강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꿈이 현실이 됐고 그보다 수개월 전에는 가능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공산당 정권은 마치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졌다. 폴란드에서 어느 누가 레흐 바웬사가 자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훨씬 더 기적 같은 일이 불과 수년 뒤에 일어났다. 전직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선거를 통해서 권력으로 복귀하고 바웬사는 완전히 주변적인 인물이 됐다. 심지어는 그 15년 전에(1981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자유노조(솔리다르노시치)를 파괴한 장본인 야루젤스키보다도 인기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진보는 파국을 낳는다
‘벨벳 혁명’(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 붕괴를 가져온 시민혁명)의 다음날, 혁명의 숭고한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민주주의-자본주의 세상이 되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을 느끼며 대략 세 가지 태도로 반응했다. (1)“좋았던 옛날”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2)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즘, (3)뒤늦은 반공산주의 편집증. 처음 두 반응은 이해하기 쉽다. 그 두 가지는 오늘의 러시아에서처럼 종종 중첩된다. 수십 년 전에 “공산주의보다 죽음이 더 낫다!”(Better dead than red!)고 외쳤던 우파가 이번엔 또 “햄버거를 먹는 것보다는 공산주의가 더 낫다”(Better red than eating hamburgers)고 중얼거린다.

 

 

공산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중충한 사회주의 현실로 정말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과거에 대한 애도, 과거와 곱게 작별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동유럽만의 특징이 아니라 글로벌화의 소용돌이에 빠진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헝가리에서 슬로베니아까지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반공주의(anti-communism)의 부활이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문제와 도전을 낡은 투쟁의 반복으로 몰아넣는다. 동성애와 낙태권에 대한 옹호가 국가를 부도덕하게 만들려는 지하 공산주의 세력의 음모라는 허황한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간혹 폴란드와 슬로베니아에서 그렇다).


이러한 부활은 어디에서 그 힘을 끌어내는 것인가? 어째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시절을 기억조차 못하는 국가들에서 그런 낡은 유령들이 다시 소생하는 것인가? 새로운 반공주의는 “만약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그렇게 더 낫다면, 우리의 삶은 왜 아직도 비참한가?”라는 질문에 간명한 답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진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진짜 민주주의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그 현혹적인 가면뿐이다. 소수의 구-공산주의 세력이 새 소유주와 관리자로 변장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숙청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혁명이 반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책임 추궁이 구 공산주의 체제가 자신들의 실패를 “과거 세력”의 지속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둘러대던 것과 갖는 유사성이다.


이 뒤늦은 반공주의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이미지가 가장 욕을 먹는 전통 좌파가 자본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섬뜩할 만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부유한 소수의 지배를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이미지 말이다. 다시 말해, 신생 반공주의는 자신들이 비정상적인 유사-자본주의라고 기각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자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환멸을 느낀 구 공산주의자들이 포퓰리즘적인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 운영에 더 적합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공 시위의 영웅들이 정의와 정직, 연대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계속 꾸는 동안, 구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규칙에 자신을 가차 없이 적응시킬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포스트 공산주의 상황에서 반공주의 영웅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을 대표한 반면에 구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속임수와 부패를 포함한 시장적 효율성이라는 잔혹한 신세계를 대표했다.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폭발을 가능하게 한 중국 같은 나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들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중의 역전 속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승리의 대가는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지역에서 자본주의를 이기고 있다는 현실이다.

 

(...)

 

13.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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